성공회 조선-한국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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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찰스 존 코프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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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1905)
2대
아서 베레스포드 터너 주교
파일:영국 국기.svg
(1905~1910)
3대
마크 네이피어 트롤로프 주교
파일:영국 국기.svg
(1911~1930)
교구장 서리
헨리 존 드레이크 신부
파일:영국 국기.svg
(1930~1931)
4대
알프레드 세실 쿠퍼 주교
파일:영국 국기.svg
(1931~1941)
교구장 서리
구도 요시오 요한 신부
파일:일본 국기.svg
(1941~1942)
교구장 서리
구도 요시오 요한 주교
파일:일본 국기.svg
(1942~1945)
교구장 서리
윤달용 모이서 신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45~1946)
4대
알프레드 세실 쿠퍼 주교
파일:영국 국기.svg
(1946~1950)
교구장 서리
아서 어니스트 차드웰 주교
파일:영국 국기.svg
(1950~1953)
4대
알프레드 세실 쿠퍼 주교
파일:영국 국기.svg
(1953~1954)
교구장 서리
아서 어니스트 차드웰 주교
파일:영국 국기.svg
(1954~1956)
5대
존 찰스 시드니 데일리 주교
파일:영국 국기.svg
(1956~1965)
성공회 서울교구장 · 성공회 대전교구장



성공회 조선교구
聖公會 朝鮮敎區 | Diocese of Korea
(1890 ~ 1945)

성공회 한국교구
聖公會 韓國敎區 | Diocese of Korea
(1945 ~ 1965)

파일:대한성공회 문양.svg
형태
성공회 교구
소속관구
캔터베리관구
주보성인
성모 마리아
교구설립
1890년 9월 29일
교구분할
1965년 5월 27일
주교좌
없음[1]서울대성당[2]
말대 교구장
존 찰스 시드니 데일리 주교
교구장 대리
휴 존 엠블링(임휴고) 주교[3]
구도 요시오 요한 주교[4]
아서 어니스트 차드웰(차애덕) 주교[5]
관할구역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만주[6]
교구민[7]

교구청 소재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21길 15 (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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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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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전경
▲ 조선-한국교구의 주교좌성당이였던 서울대성당
1. 개요
2. 역대 교구장
3. 역사



1. 개요[편집]


성공회 조선-한국교구(聖公會 朝鮮-韓國敎區, Diocese of Korea)는 캔터베리 관구 직속의 교구였다. 설정 당시 '조선교구'로 설정되었으나, 해방에 즈음하여 교구명이 '한국교구'로 개칭되었다.[8] 1965년 서울교구대전교구로 각각 분리됨으로서, 한국교구는 막을 내린다.[9]

2. 역대 교구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성공회 조선-한국교구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역사[편집]


1890년 9월 29일 잉글랜드 성공회 해군 종군사제 출신인 찰스 존 코프(고요한) 주교가 사제 5명과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의사로서 의료선교에 힘쓴 일라이 바 랜디스(Eli Barr Landis, 남득시)와 함께 입국하면서 대한성공회의 역사가 시작된다. 한국인 교인이 한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주교가 선임되고 한 교회가 시작된 것으로 이는 세계교회사에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성공회는 주교제 교단으로서 주교 및 교구가 교회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알렉산더 크로프트 쇼(Alexander Croft Shaw)나 존 리처드 울프(John Richard Wolfe) 등의 선교사들이 한국을 방문해 선교를 하거나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었지만 공식적인 한국 성공회의 시작은 1889년 조선주교로 서품된 존 코프 주교가 1890년 9월 26일 부산을 거쳐 인천 제물포에 입항한 시점인 1890년 9월 29일로 잡는다. 이때 교단의 이름은 조선종고성교회(朝鮮宗古聖敎會)였다. 이후 아서 터너(단아덕) 주교 재임 시기인 1910년에 소집된 제1차 교구 의회(conference)에서 대한성공회(大韓聖公會)로 이름을 바꾸게 됐다.[10] 선교 초창기에 존 코프 주교는 의료선교에 힘쓰고자 영국성공회에 의료인의 파송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891년 10월에 의사 로이스 로자 쿡(Lois Rosa Cooke)과 더불어 내한한 거트루드 히스코트(Gertrude Heathcote)는 공식적인 한국 최초의 선교간호사로 알려져 있다.[11]

1891년 오늘날 인천 중구 내동에 첫 교회 내동성당을 설립했다.[12] 한국에 진출한 성공회는 대한제국 시기 서구식 근대 교육 보급의 일환으로 강화 갑곶이학교(진명학교), 인천광역시 야간영어학교, 수원시 신명학교, 평택시 신명강습소, 천안시 진명학교, 진천군 신명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의료선교를 위해 서울 낙동 성 마태 병원과 정동 성 베드로 병원, 인천 제물포 성 누가 병원,[13] 진천 애인병원, 여주 성 안나 병원을 설립했고 고아를 돌보기 위해서 경기도 수원·안중 등지에 보육원을 설립했다. 1892년 11월에는 성 베드로 공동체(Community of St Peter)[14] 소속 선교간호사로 노라(Nora) 수녀, 로잘리(Rosalie) 수녀, 마가레타(Margaretta) 수녀, 알마(Alma) 수녀, 로이스(Lois) 봉사수녀, 엘리자베스 웹스터(Elizabeth Webster) 협동수녀가 내한해 의료·보육선교에 헌신했다. 1900년대에도 이자벨(Isabel) 수녀, 이디스 헬레나(Edith Helena, 애태) 수녀, 세실(Cecil) 수녀가 성 베드로 공동체에서 파송돼 활동한 바 있다.[15] 하지만 성공회 소속 병원들은 1930년대까지 매각되거나 폐원됐고 학교 및 보육원 또한 광복 후 국가의 공교육 정비 및 원생 감소로 인한 폐원으로 차차 사라졌다.

1894년 문서선교의 일환으로서 마크 트롤로프(조마가) 당시 신부의 주도로 신약성경을 발췌해 한문, 한국어, 영어를 병용한 《조만민광(照萬民光, Lumen ad Revelationem Gentium)》이 편찬됐다.

1900년 강화군 강화읍강화성당을 세웠다. 서구 바실리카 양식과 불교 사찰 양식을 조합해서 세운 이 성당은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를 보여 준다. 이렇게 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한국 문화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힘썼다. 그래서 한국 건축 양식인 한옥으로 건축한 성공회 교회들이 지금도 강화군 강화읍(강화읍성당), 강화군 온수리(온수리성당, 1906년 완공.), 청주시 수동(수동성당, 1935년 완공.) 등에 남아 있다.

1908년 첫 한국어 공동기도문을 발간했다. 영국성공회 1662년 공동기도문을 번역했으나 축성경만은 1549년 것을 채택했다.

1914년 강화도에 지금의 성공회대학교 전신 성 미카엘 신학원을 세웠다.

1915년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고 전도사가 된 김희준 마가[16] 신부가 최초로 한국인 성공회 사제가 되었다. 김희준 신부의 집안은 대대로 성공회를 믿으며, 오늘날까지 성공회 사제를 배출하고 있다.

1919년 3·1 운동 중 병천교회와 부속학교 진명학교가 태극기 제작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당했다.

1924년 부산 중구 대청동에 대청동성당을 세웠다. 이후 1974년 부산교구가 대전교구에서 독립하면서, 대청동성당은 부산교구를 대표하는 부산주교좌성당이 된다.

1925년 영국성공회 성 베드로 수녀회의 지원으로 성가(聖架)수녀회가 설립되었다.

1926년 서울 중구 정동에 서울주교좌성당을 세웠다.

1936년 천주교, 감리회, 재림교회, 성결교회, 구세군과 함께 신사참배를 시작했다.[17]

1940년 일제에 의해 4대 교구장 세실 쿠퍼(구세실) 주교와 영국인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성 미카엘 신학원이 폐교당했다. 이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고 영국일본 제국의 적국이었으므로 일제는 영국인 신부들과 영국성공회 소속 조선교구를 용인할 수 없었다. 이때 조선교구는 당시 한국에서 일본인 성공회 신자들을 사목하고 있던 구도 요시오(工藤義雄) 요한 신부가 주교[18]로 서품되어 교구장 서리를 역임했다. 이와 관련하여 2015년에는 대한성공회와 일본성공회 간 메시지 교류가 있었다.

1945년 광복 후 일제에 의해 추방당했던 세실 쿠퍼 주교 및 선교사들이 귀국하여 교구 조직과 성 미카엘 신학원이 재건되었다. 1945년 광복 당시 한국교구는 일본관구 소속이 아니라 영국의 캔터베리관구 소속이었기 때문에 성당과 기타 교구 재산이 적산가옥으로 취급돼 몰수되는 최악의 상황을 비켜갈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한국정교회는 당시 일본정교회 소속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광복 후에 교회 재산이 모두 적산으로 분류되어 몰수되는 날벼락을 맞았다.[19]일본성공회 오사카교구 밑에 있었던 구대만성공회도 대만에서 일본의 식민지배가 끝나자 국민당정부가 주요 성당을 압류하였다. [20]

1950년 한국전쟁서울주교좌성당 주임사제이던 윤달용 모이서[21] 신부를 비롯한 성직자 7명이 조선인민군에 의해 순교했다. 희생된 성직자 중 윤달용 모이서 신부는 당시 천주교로 옮길 뜻을 밝히고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세실 쿠퍼 주교 또한 납북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남한으로 복귀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으로 북한의 교세를 모두 상실하고 한때 신자 1만여 명에 달하던 교세도 완전히 무너져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때까지 한국에 왔던 성공회 외국인 선교사들은 모두 영국성공회의 선교단체인 해외복음전도협회(SPG: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22] 소속으로 앵글로-가톨릭 성향이 강했기에 성공회 신부라면 응당 가능한 결혼도 하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기조는 선교를 위해 독신사제의 파송을 요청한 당시 교구장서리 보좌주교 아서 차드웰(차애덕) 주교에 의해 한동안 유지됐다. 이 때문에 한국 성공회는 매우 강한 앵글로-가톨릭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970년대까지는 전례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 천주교와 매우 유사했고, 당시의 천주교나 정교회처럼 성공회 신자는 반드시 성공회 사제에게만 성사를 받을 수 있었고 견진자가 아닌 영세자는 미사 때 말씀의 전례가 끝나면 본당에서 나가야 했다.[23]

세실 쿠퍼 주교의 재임 이후 한국 성공회는 자립과 관구 독립을 원칙으로 삼은 존 데일리(김요한) 주교의 사목적 방침 하에서 영국성공회, 미국성공회, 캐나다 성공회 등의 지원을 받아 다시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선교 발전의 결실로 1965년 이천환 바우로[24] 사제가 최초의 한국인 성공회 주교로 서품을 받았다. 또한 이때까지 한국 성공회는 전국을 통틀어 단일교구로 체제였지만[25] 서울교구대전교구가 분리됨으로서 2개 교구 체제가 되었고, 성공회 한국교구의 마지막 주교인 존 데일리 주교가 신생 교구인 대전교구의 초대 교구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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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90~1922. 주교좌 없음.[2] 1922~교구 분할 시(1965) 까지.[3] 1926~1930 성공회 조선교구 보좌주교[4] 1942~1945 성공회 조선교구 보좌주교 겸 교구장 서리.[5] 1951~1963 성공회 한국교구 보좌주교. 1951~1953, 1954~1956 교구장 서리. 1950년 한국전쟁으로 납북된 교구장 세실 쿠퍼 주교를 대신해 교구의 사목을 맡기 위해 주교로 서품되었으며, 1953년 세실 쿠퍼 주교가 돌아올 때까지 교구장 서리를 맡았다. 이후 구세실 주교가 사임하고 신임 교구장 존 데일리 주교가 한국에 올 때까지 한번 더 교구장 서리를 맡았다. 그는 존 데일리 주교가 교구장으로 승좌한 뒤에도 보좌주교직을 유지했다.[6] 1892. 1. 1. ~ 1901. 조선교구 관할[7] 교적상의 교구민이다.[8] 다만 이는 국문명에만 해당하고, 영문명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즉, 영문명은 1891년부터 1965년까지 'Diocese of Korea(혹은 Corea)'로서 국내 교구명 개칭에 따라서 함께 개칭되지 않았다.[9] ACNS나 영어판 위키백과등 다수의 해외 사이트나 자료에서는 서울교구가 조선-한국교구의 후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한국교구에서 서울교구와 대전교구로 분리된 것이다. 즉 어느 한 교구가 일방적으로 한국교구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며 대전교구, 서울교구 양자 모두 현 대한성공회의 모체이다. 다만, 국내에서도 몇몇 자료에서는 서울교구를 조선-한국교구의 후신으로 기록하고 있다.[10] 다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성공회 내에서는 조선성공회(朝鮮聖公會)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했다. 관련 자료.[11] 간호학 관련 교재에서는 Emily Heathcote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본 문서에서는 대한간호협회에서 발간한 《한국간호역사자료집 I: 1886~1911》(2012) 및 우리역사넷의 표기를 따른다. 또한 1892년 당시 출간된 《모닝캄(Morning Calm)》지에서도 명확하게 Gertrude Heathcote로 표기하고 있다. 관련 자료.[12]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인천내리교회와 같은 동네에 있다.[13] 성 누가 병원은 내과의사이자 의료선교사였던 일라이 랜디스(남득시)가 운영했으며 그는 한국어와 한문에 능통했기 때문에 성 누가 병원에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 '선행을 함으로써 기쁨을 주는 의원')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했다.[14] 또는 성 베드로 수녀회(Sisterhood of St Peter). 관련 기사.[15] 관련 자료.[16] 복음사가 성 마르코를 예전에는 마가 내지 말구라고 표기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의 영향으로 대다수의 개신교단에서는 지금도 마가로 표기한다.[17] 신사참배를 교단 차원에서 끝까지 거부한 것은 침례회의 전신인 동아기독교가 유일했다. 동아기독교는 교단이 해산되고 목사 32명이 투옥되어 고초를 겪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18] 조선교구 보좌주교[19] 한국정교회는 나중에 반환소송에서 승소하여 몰수되었던 재산을 되찾아오긴 했으나, 소송 비용이 막대해 결국에는 되찾아온 교회 재산 중 상당수를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 성 니콜라스 대성당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20] 대륙의 중화성공회 출신자들이 미국성공회의 지원하에서 성공회교회를 재건하였으나 결국 구대만성공회의 성당들에 대한 소유권은 포기하였다. 만약 성당 소유권을 다시 취득하고자 했다면 한국정교회와 마찬가지로 소송전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타이베이와 타이난에 있었던 구대만성공회 성당은 대만기독교장로회가 현재 소유하고 있다.[21] 구약성서상의 인물인 모세의 예전 번역명.[22] 현 복음동역자연합협회(USPG: United Society Partners in the Gospel).[23] 말씀의 전례 후 예비 신자가 성당에서 나가야 하는 규정은 가톨릭에서는 이미 1920년대에(...) 없어졌다고 한다.[24] 성공회 신명은 대체로 공동번역성서상에서의 표기를 따르지만 '바우로'와 같이 성서상에서 쓰인 바울로라는 표기를 따르지 않고 예외적인 관용을 존중하는 경우도 존재한다.[25] 캔터베리관구 한국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