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FC/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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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FC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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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1. 연고이전
2.2. AFC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5-0 참패
2.3. 귤이나 까라 현수막
2.4. 팬과 홍철의 트위터 설전
2.5. 하강진 사건
2.6. 황기청년단 난동 사건
3. 시민구단화 이후
3.1. 전주성 까치 시체 사건
3.2. 독이 든 성배, 성남 감독
3.3. 동서울대학교 관중동원 사건
3.4. 공무원 동원 논란
3.5. 설레발 후 2부리그 강등
3.6. 성남 FC 선수 부당해고 사건
3.7. 장학영 승부조작 제의 사건
3.8. 자자 영입 논란
3.9. 경기장 내 정치적 중립성 위반
3.10. 서포터즈 기만사건
3.11. 탄천요새 수원 팬 입장 사건
3.12. 팀내 코로나19 집단 감염 발생
3.15. 울산 안티콜 논란


1. 개요[편집]


K리그 성남 FC의 사건사고 정리한 문서.

2. 성남 일화 천마 시절[편집]



2.1. 연고이전[편집]


일화 구단 역사에 연고이전은 두 번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프로축구연맹에서 청와대까지 끌여들여 "너네 서울에 새 구장 지을래? 아니면 딴데 나가 살래?"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강제로 서울을 떠나 천안시로 옮겨갔다. 여차하면 다시 서울로 옮겨가기 위해 가까운 위성도시를 선택한 것이었고 이는 안양으로 간 LG 치타스와 부천으로 간 유공 코끼리도 마찬가지였다.[1] 3팀 다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특히 프로축구 태동기 연고분배 과정에서 선수를 잡아 서울특별시만을 연고로 창단된 팀이 일화였기에[2][3] 더욱 억울한 입장이었다. 그리고 특정 종교재단에 속해있어 개신교 영향력이 강한 대한민국에서 비호감되기 쉬운 구단이었던지라 관중동원이 비교적 쉬운 서울 연고를 잃은 타격도 특히 컸다.

두 번째는 2000년 천안시에 정착한지 4년만에 성남시로 옮긴 것이다. 새 연고지로 삼은 천안시에서는 유명한 동전던지기 사건이 있었다. 당시 K리그 규정은 리그경기에서도 90분 무승부시 연장전을 시행하였는데 천안오룡경기장에 조명시설이 없어서 일몰로 연장전 진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동전던지기로 승패를 가린 사건 이었다. 100년전 메이저리그에서나 볼법한 어처구니 없는 인프라와 지역 내 개신교도들의 반대, 1998년부터 접근해온 성남시의 적극적인 구애에 성남으로 옮겨간다. 일단 천안의 축구팬 숫자가 많지 않았고 인터넷 커뮤니티가 대중화되기도 전이었던터라 레드와 헤르메스라는 K리그에서 1,2위를 다투는 과격 서포터즈가 존재했고 2002년 월드컵 이후에 있었던 FC 서울과 제주 유나이티드의 연고이전에 비해 조용했다.[4]

종교는 성남에도 같은 반대여론이 존재 했으며,# 종교반대만의 이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인프라상 지적된 낙후된 오룡경기장을 대신해 천안종합운동장이 건축'중'이였으며 완공연도가 이전 다음해인 2001년이다. 인터넷에 적혀있는 공공단체와 주민들이 반대했다는 말과 달리 당시 일화천마축구단 서포터즈인 '일레븐 플러스'를 비롯하며 이전반대 시민서명운동까지 번졌으며 기관체는 내년 완공되는 경기장을 약속하며 강한 이전반대를 외쳤다. 연고프로축구의 이득을 생각한다면 단순히 기독교의 상징적 도시가 아닌 이상 종교적 이유로 거부한다는건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심지어 천안에는 통일교 재단의 선문대학교가 있는 도시인만큼 더 종교적이유로의 이전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반대 기사도 있다. 일화 연고지 이전에 천안 반발 거세 이런 '정당한 이전'이라고 포장되는 건 천안팬 자체의 숫자가 많지 않고 특정 구단의 이전에 대해 특수성을 부여하기 위한 왜곡이 포함되어 있어 주의해야 할 것이다. 명백히 구단은 서포터즈 및 지자체에 사과 한 마디 하지 않고 떠났다.

2013년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사후 일화가 축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하면서 성남의 향배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는데, 성남시 측에서는 재정문제 등을 들어서 성남의 시민구단화에 난색을 표하면서 안산시로의 연고이전의 가능성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일화 재단에서 안산시 측에게 구단을 매각하는 형태가 거론되었다. 이에 따라 성남의 축구팬들은 다시 한 번의 연고이전 발생 여부에 촉각을 기울였으나 성남시가 장고 끝에 구단 인수를 최종 결정하면서 성남 일화는 성남시에 남게 되었고 시민구단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2.2. AFC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5-0 참패[편집]


2004년 성남은 차경복 감독의 지휘 아래 K리그 3연패를 달성한 막강전력을 아시아 무대에서도 과시하며 승승장구했고, 결승에 진출하는 동안 단 1패밖에 기록하지 않으며 강력한 우승후보로 급부상했다.

결승전 상대는 준결승에서 전북을 꺾고 올라온[5] 알 이티하드였다. 당시 챔피언스리그 는 결승전 홈 앤드 어웨이 제도를 택하고 있었고 사우디 원정으로 열린 1차전에서 데니스, 김도훈, 장학영의 골로 3-1 낙승을 거두며 우승의 8부능선을 넘은 듯 했다. 어웨이골 제도가 적용되는 대회에서 원정에서 3골을 넣었다는 것은 결정적. 그러나 아무도 예상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2차전이 열린 성남종합운동장에는 평소와는 달리[6]만원 관중이 들어찼고, 이런 분위기가 어색했던 선수들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실수를 연발했다. 결국 전반전에만 두 골을 내주며 시작했고, 산전수전 다 겪은 차경복 감독과 호랑이 김학범 수석코치도 무너진 선수들의 멘탈을 다잡지 못해 후반전에 3골을 더 실점, 5-0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게 된다. 1,2차전 총합 6-3으로 알이티하드의 우승. 성남 선수들과 팬들은 자기네 집 안방에서 알이티하드가 우승컵을 들어올리고 환호하는 모습을 씁쓸하게 지켜봐야 했다.

후일담으로 알 이티하드는 이듬해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승승장구하며 준결승까지 진출했고 준결승 상대는 조별예선과 8강에서 전승 행진중이던 부산 아이파크였다. 알 이티하드는 이 경기에서도 부산 홈에서 5-0 관광쇼를 선보이며[7] 국내 축구팬들에게 알 본좌라는 경외와 공포가 섞인 별명으로 불리우게 된다. 이러한 알 이티하드에 대한 축구팬들의 공포심은 2009년 포항이 결승에서, 2011년 전북이 준결승에서 알 이티하드를 각각 꺾어버리고 나서야 어느 정도 불식될 수 있었다.

차경복 감독은 결승전 패배의 책임을 지고 시즌 종료 후 감독직을 내려놓았고 이 때의 충격이 컸는지 2006년에 루게릭병이 발병하여 투병생활을 하다가 그 해 10월에 사망했다.


2.3. 귤이나 까라 현수막[편집]


서포터즈가 왜 욕을 먹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도발했으나 홈 경기장에서 수원에게 패하며 FA컵 우승을 날렸다.
파일:성남FC 2009년 귤 현수막.jpg



2.4. 팬과 홍철의 트위터 설전[편집]


그럼에도 홍철은 꾸준히 성남에 인사하러 온다.
그리고 팬들도 여전히 홍철을 반겨준다.
하지만 서포터즈 중에서는 싫어하는 팬들이 대부분이다.

2.5. 하강진 사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하강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6. 황기청년단 난동 사건[편집]


2013년 7월 3일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서 벌어진 전북 현대와 당시에는 성남 일화였던 성남 FC의 K리그 경기에서 경기 종료후 벌어진 사건.

후반 32분 키퍼 전상욱이 전북 선수가 쓰러진 상황에서 볼을 차냈고 전북 공격수 이동국은 축구의 관례상 키퍼를 가리키며 길게 찬것이 그만 그대로 골인이 되었다. 전북이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황당한 사건이라 성남 선수들은 극도로 흥분했고 이 과정에서 김태환이 퇴장 당하기까지 한다. 이후 경기가 재개되며 전북 키퍼 최은성이 스스로 자책골을 넣으며 다시 성남이 앞서가게 되었지만 선수 한 명만 퇴장 당한 상황이 되었다. 결국 경기는 성남의 승리로 종료. 하지만 이후 문제가 벌어지는데 성남의 주축 서포터즈 그룹인 황기청년단의 콜리더가 확성기를 들고 전북 서포터들과 선수들의 욕설을 시작한 것이다.

이에 전북 프런트진까지 흥분하였고 서로 말싸움으로 이어졌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전북 서포터들도 흥분 순식간에 원정석으로 진입하여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문제는 이 사건을 일으킨 콜리더는 버스에서 아무런 사과없이 가만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고 다른 사람들만 수습하기 위해 애를 썼다는 점. 그리고 그 콜리더는 얼마 뒤 벌어지는 포항과 성남과의 FA컵에서 경기가 연장전으로 흐르자 당시 SNS상에서 인종차별적 멘트를 적어서 물의를 일으킨 포항의 한 선수를 확성기를 들고 강력하게 비난하여 성남의 홈경기를 담당하는 경호원들이 홈팀 서포터석으로 진입하게 만드는 추태를 보였다.

결국 이것으로 서포터즈의 확대는 더욱 힘들어졌다. 그렇잖아도 야구장과 대비되게 팬층이 분화된 축구장에서, 관중 수가 적은 편인 성남의 미래를 도리어 어둡게 했다. 구단 게시판에서 꾸준히 서포터즈 창고 금지(성사됨) 및 그 해산을 요구하는 팬이 나온 것도 당연지사.



3. 시민구단화 이후[편집]





3.1. 전주성 까치 시체 사건[편집]


2015년 3월 7일 전북 현대 모터스와 성남 FC의 K리그 클래식 개막전이 열린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원정팀 성남의 응원석인 S석 2층에서 몸통은 없고 머리만 있는 까치의 시체가 발견됐다.

바로 얼마 전에 전주월드컵경기장 까치집 제거작업 때 나온 것이 그제야 발견되었을 가능성과 고양이나 타 육식 짐승들의 흔적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경찰서에 문의한 결과, 수사할 방법이 없다며 사건은 종결되었다. 전북 구단 및 팬은 성남 FC 측에 사과를 하였으며, 더 이상 공론화를 원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과격 축구팬의 행동을 제어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공동 의식이 생겨났다.


3.2. 독이 든 성배, 성남 감독[편집]


  • 박종환 폭력 사태
시민구단의 첫 사령탑으로, 장년층에게 과거 3연패를 되살릴 구세주로 보였던 박종환은 다시 사고를 쳤다.
4월 중 성균관대와 가진 연습 경기 도중 플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김성준의 뺨을 친 것. 폭력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대학 선수 및 관계자들도 다 보는 공개된 장소에서 거리낌 없이 선수를 폭행한 것이다. 이 일로 김성준 선수는 오사카로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갔다 왔으며, 박 감독은 구단 자체 결정으로 출장 정지 후 경질되었다.

  • 감독 대행과 감독대행의 대행
박 감독 퇴진 후 수석 코치 이상윤이 사령탑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번엔 성적이 좋지 않았고, 급기야 이영진 코치 등과 갈등을 빚는 상황까지 왔다. "'정식으로"' 대행으로 임명되고 FA 준결승 기자회견까지 한 뒤 이 대행도 경질되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겠다고 꺼내든 카드가 다시 수석코치 이영진의 기용이었다. 인 줄 알았는데 대구 전만 치르고 김학범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을 정식 감독으로 선임했다. 이 대행은 그야말로 임시대행, 단역이었다. 본인이야 미리 이야기를 들었겠지만팬들에겐 어이없는 사태.
그래도 김 감독 시즌 2는 FA컵 우승&아챔 진출과 클래식 잔류라는 성과로 시작했다.

  • 학범슨 퇴장과 유소년 지도자들의 긴급 소환
2014년을 무사히 넘긴데 이어, 2015년은 김두현의 부활과 황의조, 윤영선&임채민의 각성[8]으로 아챔 16강 진출과 상위 스플릿 첫 진입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비록 FA컵 등에서 실패하며 아쉬움을 남기긴 했어도.
2016년은 티아고 알베스 살레스의 대오각성을 바탕으로, 잠깐이나마 1위를 찍는 등 명문 구단 재건이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티아고가 부상을 당한 데 이어 결국 중동으로 떠났고, 노장 선수들의 체력 저하와 신예들의 미숙함, 황의조의 부진이 겹치며 104일 동안 홈 무승의 수모를 겪는다. 급기야 9월 10일에는 수원 삼성에 어이 없는 패배로 팬들이 감독 면담을 요구하여 '아직 끝이 아니'란 답을 들었다.
그런데 구단은 여기서 김학범 경질카드를 꺼냈다. 뿐만 아니라 코치들도 정경호만 남고 전원 백수행. 그 대안은 유소년 감독들인 풍생고 구상범, 12세 남궁도, 15세 변성환의 성인 팀 지휘였으나, 팀의 하락세를 막지 못하고 하위 스플릿으로 추락한뒤 급기야 K리그 챌린지 강등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나왔다.

  • 2년 약속된 박경훈 감독, 1년만에 경질
제주를 이끌며 패션과 지휘력 모두에서 인정받다 전주대 교수로 들어간 박경훈을 챌린지 확정 후인 2016년 12월 영입했다. 그런데 2017년 초에 무리한 해외원정에 이어 팀의 부진함이 겹쳐져 한때는 챌린지 하위권을 맴돌았고, 여름에 잠깐 반짝해 가을의 PK 캐리를 업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3위 아산에 패하며 챌린지 시즌 2가 확정되고, 그 전에 희망을 걸었던 FA컵에서도 안방에서 목포시청에 0:3 대패하며 탈락한 것 등이 겹치며 박경훈 감독도 옷을 벗어야 했다. 이런 팀을 남기일 감독에게 3년 동안 부탁한다고 했으니 시민구단화 이후 감독이 이렇게 많이 바뀌는 팀은 최초다.

그런데 2018년 남기일 감독이 부임하면서 성남은 2위로 올랐고, 1위 아산의 승격 제한으로 인해 2년만에 다시 승격했다.

3.3. 동서울대학교 관중동원 사건[편집]


2015년이 되면서 성남시에서 관중을 모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보였다. 그 일환으로 동서울대 학생들 응원단이 7월부터 탄천구장에 나타났는데, 문제점은 동서울대학교 측이 축구장의 문화를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규정상 금지된 앰프(스피커)를 사용하지를 않나, 경기 흐름이나 다른 관중의 움직임과 무관한 응원을 하는 바람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본부석에서도 응원구호가 울려퍼지는 상황이었다. 대학 응원단은 n석에 가까운 e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바로 옆의 e석과 n석 관중들은 응원하는 것에 혼란스러워서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고해서 응원구호가 썩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애니나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단조로운 응원이었기에, 이들이 축구장 문화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다는 티를 한껏 드러냈다.

한술 더 떠서, 이들에게 구단의 2군 버스와 도시락, 유니폼이 제공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포터즈 중심으로 "무슨 지거리야?"라면서 항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대학 관계자는 "재능기부 차원에서 응원을 간 것이니 별일 아니다."는 답변을 했고, 구단에서는 보름 가까이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서포터즈 대표단이 구단 담당자 및 대학 관계자와 회견을 가졌지만, 원론 수준의 일치(한마음으로 응원한다)를 보는데 그쳤다. 그러나, 7월 22일 FA컵 울산 현대와의 8강전 기준으로는 앰프를 사용하는 응원이 사라지고 현수막만 내걸어서 응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8월 12일 K리그 클래식 제주 유나이티드전에서 다시 한 번 북을 이용한 응원전을 시작하였다. 단, 앰프를 이용하지 않아서 나름 전에 비하면 축구 응원에 대한 바른 인식이 심어졌다고 볼 수 있었다.

8월 30일 K리그 클래식 전북 현대 모터스 경기에는 연기학과 여자 학생들을 하프타임 쇼에 내보냈다. 물론, 이 시점까지도 구단은 동서울대학교 문제의 공식 해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동서울대와 말이 꼬일까봐 적극 해명하기는 곤란했다."고 밝힌다. 다시 협의를 해서 동서울대 측의 얌전한 응원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건 사실인지 동서울대 학생들은 구석에서 목청껏 응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5시즌 마지막~2016시즌 시작을 기점으로 사실상 동서울대학교 응원단이 등장하지 않게 되면서 이런 흑역사를 볼 일은 더 이상 없어지게 되었다. 애초부터 억지스럽게 반쯤 강제로 동원된 관중들은 장기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나쁜 점만 알려준 셈이다.

3.4. 공무원 동원 논란[편집]


2015년 날씨가 풀리면서 e석에 특이한 관중들이 나타났다. 삼삼오오가 아니라 마치 군인들이 하던 것처럼 중년층이 우르르 와서는 뭉쳐 앉아서 응원하는 것인데, 이들은 카드섹션까지 선보였다. 거기에는 '성남시 행정지원과'라든가 '성남형 교육'이라고 쓰여 있는데다 가족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성남시의 공무원 동원을 한 것이 아니냐면서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파일:external/www.todaysn.com/2015052203263835.jpg

일단, 평일 관중 수를 천 단위로 만드는 데는 기여했다. 그러나, 정작 끌어와야 할 탄천변이나 주변 아파트 시민은 내버려두고 '눈치 게임'을 만드는 것은 구단과 리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쟁 구단의 팬이어도, 축구엔 관심이 없어도 말 한 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억지춘향을 하고 있다면 당연히 인권 침해다.

그렇지 않아도 주주권부터 시즌권까지 릴레이로 부담을 넘기는 것 같은 모양새인데 일단 구단 및 단체의 해명으로는 '진짜 자발적인 모임'이 맞다고 한다. 하지만, 자의로 나왔다고 보기엔 여전히 미심쩍다.

사실 sns에 관람 사진 인증 후 전반 이후 경기장을 나가거나 심하면 올린 후 나간다. 도구까지 세심하게 준비해 나오기 때문에 원정 경기가 있을 때 기존 서포터즈보다 이 풍선막대기 쪽이 더 주목받는다.

성남 FC가 명문구단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더욱 규모가 커진 것 같다. 성남시 내 단체들의 현수막이 점점 늘어난 것이다. 심지어 분당서울대병원까지 선수 응원문구를 적어냈다. 물론, 관중 수는 옛날과 큰 차이도 없지만 말이다.

강제적으로 모집한다고 한다.

3.5. 설레발 후 2부리그 강등[편집]


2016시즌 성남 FC 구단 프런트와 서포터 황기청년단이 자신들의 순위가 더 높다고 -사실 상위 스플릿 확정도 아니고 수원 삼성과는 7점차 차이일뿐인데- 하위권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수원 FC를 디스함과 동시에 자신들은 절대 강등 당할리 없다는 설레발 치는 내용의 포스터를 만들고 문구를 적어 역대급 웃음거리를 선사하였다.

더 재밌는것은 2014년 FA컵 결승전 당시 성남 FC는 FC 서울이 FA컵 결승전에서 서울이 전북보다 성남이 올라와서 좋다는 말을 한것에 대해 무시당했고 서울의 설레발을 조롱까지 했던 구단인데 자기 자신들이 이번에는 그 설레발 때문에 준우승에 비견될 수 없는 강등이라는 말그대로 좆망하게 되어 한층 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K리그에서 설레발은 과학임과 동시에 설레발로 흥한자 설레발로 망한다는 교훈을 알려준 실례라 할 수 있겠다.

파일:성남FC-설레발후강등.jpg
파일:성남FC서포터-설레발후강등.jpg

이 포스터에서 날개가 찢어지는 비행기를 잘 보면 색 배치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팀 색깔을 연상케 하는 배치로 되어 있다. 대놓고 수원 삼성은 챌린지로 갈 것이라는 암시. 하지만 현실은 1:2로 패배한 후 남은 9경기에서 1승 2무 6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거두며 자신들이 챌린지로 가게 되었다. 오히려 수원은 스플릿경기에서 3승 2무로 무패행진을 하며 하위스플릿 6팀 중 제일 먼저 잔류에 성공했고, FA컵까지 우승을 했다.

그리고 성남은 2부 리그로 떨어졌는데 무슨 예산이냐며 대폭 삭감당하고 성적은 체면치레도 못하더니(4위로 마감), 2018년에는 전액 삭감이라는 초강수에 직면했다. 어차피 시 여당이 소수파이긴 해도 여당 의원들조차 구단의 존속에 의문을 품고 있는 상황인데 그나마 구단을 밀어주는구단주는 대선 경선 때문에 한동안 시정을 비운데 이어 경기지사를 노리고 있기에 구단의 미래는...


3.6. 성남 FC 선수 부당해고 사건[편집]


2016년 10월 성남FC는 이원규, 문창현 2명의 선수를 무단방출했다. 두 선수는 2015년 1월 1일부터 2017년 12월 31일까지 3년의 선수계약이었다. 그런데 성남FC는 2016년 10월 두 명의 선수를 무단방출한 것이다. 그리고 급여도 그 달부터 지급하지 않았다.

두 선수는 변호사를 고용해 소를 제기했다. 그리고 양측의 주장은 갈렸다. 성남 FC 측에서는 이적을 권유했고, 선수가 스스로 나갔고 그러므로 해고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반면 선수들은 계속 구단에서 뛰고 싶다고 전달했는데도 불구하고 구단이 자신들을 쫓아냈다고 주장한다. 구단이 숙소에서 짐을 빼라고 지시했고, 동계 훈련에 참가시키지 않겠다고 전달했다.

이 사건의 1심은 성남지법에서 담당했는데 판결은 구단 손을 들어줬다. 그리고 박지훈 변호사가 엠스플뉴스에 비판문을 기고했다.해당기사 저연봉 2군 선수들이 팀에서 목소리가 높을 수가 없고, 구단의 압박에 못 이겨 이적을 추진했다고 한다. 박지훈 변호사는 법원이 성남FC 손을 들어준 근거로 삼은 조항은, 양 구단간에 트레이드가 성사되었을 때를 위한 조항인데 구단간의 트레이드가 성사되지 않았으므로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또한 현역 선수들도 10월에 선수 보고 알아서 이적할 구단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스타선수가 아닌 이상 말도 안 되는 무책임한 처사라고 말하고 있다.

이 박지훈 변호사의 비판문에 대한 반박을 성남FC가 게시했다.해당기사 이에 따르면 선수 1명은 부상이 심했고, 선수 1명은 전력외였다. 그리고 둘 다 성장에 정체되어 있었다. 그리고 급여는 2017년 것은 지급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2017년 연봉협상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선수들 보고 복귀하라고 했는데 선수들이 복귀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선수 이적을 추진했던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다. 우리는 선수 이적을 열심히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적이 이루어지지 않자 2000만원의 해지금을 제시했다. 그런데 선수들은 처음에 긍정적이다가 입장을 바꿨다. 이것은 약자인 척해서 부당한 이득을 가져가려는 것이라는 게 성남FC 측의 주장이다.

박지훈 변호사는 다시 재반박문을 냈다.해당기사 본인이 앞서 말했듯이 트레이드도 성사되지 않았고, 구단과 선수간의 합의에도 실패했다고 말한다. 또한 처음 비판문을 기고했을 때처럼 아예 구단간의 트레이드가 성사되지 않은 경우이며, 2017년 12월 31일까지 사인된 계약서를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구단과 선수라는 사회적 힘의 역학관계를 완전시 무시했다. 계약직 직원에게 사장이 이직을 권유, 제안했다면 사실상의 해고며 이것은 대법원의 판례로도 증명된다고.

2심에서는 선수들의 손을 들어줬다.해당기사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구단을 나갔다는 주장이 전면부인되었다. 성남FC가 선수들에 대한 인격존중의무, 차별금지의무 및 보호의무를 위반했다고 법원은 말하고 있다. 프로축구선수협 김훈기 사무총장은 선수의 권익 보호를 위한 획기적인 전기가 될 법원의 이번 판결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계약이 남은 선수의 훈련참가 배제, 숙소 미제공, 급여 중단은 사실상의 무단 선수 방출행위임을 지적했다. 이근호 선수협 회장 역시 선수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좋은 판례라고 말했다. 스포츠 인권변호사인 박지훈 변호사의 열정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수원지방법원은 성남FC가 합의금으로 제시한 2000만원 대신, 전해의 연봉인 2800만원과 3600만원을 지급하고, 소송 총 비용을 다 성남FC가 부담하라고 판결을 냈다.

부당 해고 당사자인 이원규의 인터뷰다.해당기사 이원규는 매우 마음이 편했으며 군대에 있는 문창현에게 이 소식을 제일 알려주고 싶다고 한다. 소송 동기는 2000만원의 합의금 없이도 살 수 있고 잃을 게 없다는 마음가짐이었으며 김훈기 사무총장과 박지훈 변호사에게도 공을 돌리고 있다. 계약기간이 남았는데 부상을 당하면 당연히 계약기간 동안 재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원래 축구계에서 그렇게 하는 일인데, 구단이 그냥 내쫓으면 에이전트도 없는 2군 신인들은 방법이 없었다고.

가장 처음에는 계약기간이 남았기 때문에 2000만원 최저연봉이라도 계약해지금으로 받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거부되면서 담당하던 주무관이 해임됐고, 구단 내부에서 친하게 지내던 스태프 형이 이 일을 맡았다고 한다. 이 사람과의 친분 때문에 몹시 힘들었다고 한다.[9] 그리고 이 시기에 성남FC가 2000만원을 주겠다고 하는 얘기가 나왔는데, 그것은 이미 4~5월, 소송이 제기되었고 축구 리그도 시작된 상황이다.

또한 그 사이 소송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자, 성남FC는 다시 복귀하라고 통보했다고 한다. 그래서 두 선수는 복귀하려고 했는데 그 조건이, K리그 최저인 2000만원 연봉에 다른 선수와는 달리 물품 및 숙식 제공 없고, 전력외 선수로 동일한 훈련은 없고 대충 운동만 시켜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원규의 부상도 피로골절인데, 구단에 있는 의료관계자가 2~3명 정도 있는데 3개월 쉬면 나을 것을 괜찮으면 운동을 하라는 진단을 내려서 1년 동안 공을 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잠시 치료받고 괜찮아지면 운동하고 다시 나빠지고를 반복하면서 1년을 낭비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단 방출을 지시한 것이다.

이원규 선수의 인터뷰는 성남 구단이 발표한 반박문을 꼬집는 내용이 많다.

사정을 다 알면서도 교묘하게 왜곡하는 구단 공식 반박문과[10] 추잡스럽게 말과 태도를 바꾸는 행태 등,[11] 성남FC는 이번 사건에 있어서 약자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짓밟으려 하다가 언론과 법이 다가오니 점잖은 척 하는 몹시 추악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성남FC는 하부리그에서 선수생활을 연장할 수 있었던 두 선수의 축구선수 생활과 생계를 함부로 짓밟았다. 그리고도 사실관계를 자기들에게 교묘하게 조정한 반박문을 언론에 기고하는 등 뻔뻔한 모습이 많다.

3.7. 장학영 승부조작 제의 사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장학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8. 자자 영입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자자(축구선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9. 경기장 내 정치적 중립성 위반[편집]


파일:성남 FC 더불어민주당 현수막.jpg
2019년 3월 10일부터 성남종합운동장 W석 전면에 "성남FC K리그1 우승을 기원합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더불어민주당 명의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경기영상[12] 사진 정당법 제37조(활동의 자유) 제2항을 보면 "정당이 특정 정당이나 공직선거의 후보자(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자를 포함한다)를 지지ㆍ추천하거나 반대함이 없이 자당의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한 입장을 인쇄물ㆍ시설물ㆍ광고 등을 이용하여 홍보하는 행위와 당원을 모집하기 위한 활동(호별방문을 제외한다)은 통상적인 정당활동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어서 한국당 사건과 정의당 사건과는 달리 현행법상 문제는 없으나, 다만 K리그 규정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 해당 규정에는 "정당명, 후보명, 기호, 번호 등이 적혀 있는 피켓, 어깨띠, 현수막 등 노출 불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더불어민주당의 현수막이 걸려있는 위치는 구단 후원사들의 광고가 걸리는 광고판에 해당하는 위치인데 거기에 정당명이 들어간 현수막이 걸려있다는 것은 경기장에서 정당 홍보를 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에 충분히 위반 사항에 해당하고 더군다나 현재 성남 FC 구단주인 성남시장 은수미의 소속정당이 더불어민주당이라 더더욱 정치적 중립에 위반되는 행위이다. 안그래도 성남 FC는 그동안 정치적 문제와 많이 엮여 논란을 양성하고 있는 팀이다. 같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재명이 성남시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제20대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경선 당시 불법 경선 선거인단 모집에 연루되어 고발당했고 기사 대기업 광고비 우회지원, 임원 억대 성과금 수령, 예산안 비공개 등 이재명 시절부터 끊임없이 정치적 논란에 휩싸인 구단이었다. 기사

4월 3일 성남 FC 측은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 '경기장 내 정치적 중립성' 요청을 받아 현수막을 더이상 게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 이로써 성남 FC는 정치적 중립성을 위반한 것이 증명되었다.


3.10. 서포터즈 기만사건[편집]


2021년 성남FC 프론트 내에서 팬과 서포터즈를 '얘네들'이라고 하는 것이 공개되었고 서포터즈들은 이에 분노하고 있다. 처음에 블랙리스트 측에서 프런트에 문의 메일을 보냈는데, 이걸 내부에서 회람한다며 문의자 측에도(!!) 이메일을 전송. 거기에 '"얘네들"이 이런 요구를 한다'는 문구가 들어 있던 것이다. 당연히 팬들은 분노했다. 결국 구단은 사과문을 올렸다.


3.11. 탄천요새 수원 팬 입장 사건[편집]


코로나 19 사태로 2020년에 이어 2021 시즌도 제한 입장에 원정 팀 복장 및 응원도구 금지가 적용 중이지만, 탄천에선 경호업체와 구단 측의 무관심 속에 원정 팬이 전광판 아래 S석[13] 또는 다른 좌석에 입장해 열렬히 응원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데 4월 25일 탄천종합운동장에서 펼쳐진 두 팀의 두번째 대결에, 다수의 수원 팬이 태연하게 유니폼과 응원 도구를 반입한 것은 물론(심지어 W석 2층 스카이석[14]에도 수원프랑스 깃발 휘두르는 원정 팬이 들어갔다!!해당 상황을 지적한 글), 내내 응원전을 펼치다 후반 막판 이기제의 결승골이 터지자 환호했다.

이에 맞은 편의 블랙존에 있던 팬과 서포터즈 중심으로 '지금 구단 뭐하는 거냐', '원정 팬 방치하냐'는 항의를 했는데, 구단과 연맹에서는 오히려 홈팬을 문제시했다(다만, 홈팬 상당수의 육성 응원은 지난 경기들은 물론 이날 경기에서도 문제긴 했다).성남 팬을 비판하는 기사 압권은 블랙존에 배치되었던 경호 업체 직원이 '지금 해보자는 거냐'고 따지고 들었다는 점과 직후 구단의 성명서에서 '육성 응원을 계속하면 구단이 징계먹으니 조용히 하라'는 표현(연맹의 경고문구를 인용)을 썼다는 점. 이것 때문에 팬들이 계속 항의하니까 마지못해 두번째 성명서에서 '홈 팬을 불쾌하게 해서 죄송하고, 해당 보안요원은 교체하였으며 업체 교육을 시켰고 앞으로 잘하겠다'는 형식적인 사과문을 내놓았다.

이후 4월 30일 서울 원정 경기에선 경기 시작 전에 성남 팬이 퇴장 조치되는(이유 불명) 등 다른 구단의 원정 팬 관리에 비하면 성남 구단의 대응은 매우 안일한 상황임이 다시금 드러났다. 서울 원정에서 코로나 사태의 유탄을 맞으며[15] 5월 일정이 날아간(최소 4경기) 가운데, 위의 '얘네들' 사건을 포함해 과연 구단 측의 태도가 얼마나 바뀔는지 의문.


3.12. 팀내 코로나19 집단 감염 발생[편집]


2021년 7월 11일, 성남 1군의 A코치가 강원도 고성군에서 열린 성남의 전지 훈련 마지막날에 코로나19 증상을 보여 PCR 검사를 진행한 결과 양성 판정을 받았다.#

이후 7월 12일에는 선수와 다른 코치를 포함한 4명이 추가로 확진 판정을 받으며 팀내 총 확진자는 5명으로 늘어났다. 전지훈련중 진행한 회식이 전파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날 오후에는 팀내 확진자가 선수 2명과 스태프 6명으로 총 8명으로 늘어났다.#

시간이 좀 더 지나 선수단 내에서도 1명의 확진자가 더 추가되었고, 7월 14일에는 선수 중 2명이 새로이 증상을 보여 검사 후 확진판정을 받아 총 확진자의 수는 선수 5명과 스태프 6명, 총 11명까지 증가했다.#

그래도 이쪽의 경우에는 조치를 비교적 잘했다는 평이다.


3.13. 이재명 성남 FC 후원금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재명 성남 FC 후원금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4. 신상진 성남시장 성남 FC 매각 추진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신상진 성남시장 성남 FC 매각 추진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5. 울산 안티콜 논란[편집]


#[16]
2022년 9월 18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경기가 끝나고 성남의 서포터즈인 블랙리스트가 뜬금없이 울산 현대의 안티콜인 " 별이 두개래 "를 불러서 논란이 되었다.

블랙리스트의 사과문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올라왔으나 "일부팬의 소행"이라는 말과 함께 회피성 사과문이 올라오자 여론은 더 싸늘해졌다.

울산 현대의 서포터즈인 처용전사도 인스타그램으로 입장을 밝혔는데, "사태 수습을 위한 급급한 사과문"으로 보인다며 "단순 성명서가 아닌 행위자들의 진정한 사과를 원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울산 팬들이 화가 난 이유는 안티콜을 불러서기도 하지만 9월 18일 기준, 2주도 안 된 울산과 성남의 29라운드 탄천 경기에서 울산 서포터들이 성남의 연고이전 반대, 해체 반대 걸개를 걸기도 했으며, 해체 반대 서명 운동까지 했기 때문에 울산팬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며 성남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 것으로 보인다.
[1] 1998년부터 성남시와 접촉하며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옮길 수 있다는 밝힌 천안 일화나 2000년부터 용역조사를 하며 서울로 옮겨가기 위해 움직이던 안양 LG, 구장이 없어 목동구장을 홈으로 쓰느라 다른 두 팀에 비해 입성도 늦었고 가서는 전국에 주유소가 몇개인데 축구단을 운영하냐며 개판쳐서 더 까먹을 이미지도 없었던 부천 SK의 행보를 보면 3팀 다 오래 머물 생각은 안하고 간 것이 분명하다.[2] 유공은 인천, 경기 연고를 포함하여 창단했다. LG도 서울 연고를 강하게 원했으나 일화와 유공이 있다는 이유로 연맹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충청도로 갔다가 1990년 광역연고제에서 도시 연고제로 전환된 이후에야 서울로 올 수 있었다.[3] 처음부터 서울만을 연고로 창단된 팀은 동대문 일화와 서울 이랜드 FC 2팀 뿐 이다.[4] 참고로 세 구단 서포터 중에 연고이전 이슈에 말 안꺼내는 서포터는 제주의 풍백 뿐 이다. 내가 응원하는 구단이 연고이전을 했는데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나며 해당 화제가 나오면 말을 아낀다.[5] 1,2차전 총합 3-3 동률이던 시점에서 2차전 종료 직전에 이용발의 어이없는 실수에 힘입어 진출한다.[6] 이제나 저제나 성남은 비인기구단이다(...)[7] 이 경기는 부산의 원래 홈인 아시아드 주경기장이 아닌 구덕운동장에서 열렸고 과거 대우로얄즈 시절의 향수를 기억하고 있던 올드비 팬들이 경기장을 찾아 만원관중 앞에서 열렸다. 성남과 마찬가지로 부산도 인기가 많은 팀은 아니었기에 선수들은 만원관중이 들어찬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고 애초에 경기장 자체가 원래 적응되어 있던 홈경기장이 아닌 다른 곳이었으니... 다만, 부산 팬들은 알 이티하드의 전력분석을 하고 난 뒤 사실상 포기상태였다.[8] 이 셋 모두 국대에 발탁되어 경기를 소화했다.[9] 구단이 하는 일인 만큼 당연히 고의로, 주무관 해임은 별개의 일이겠지만 고의로 친하게 지내던 사람을 붙여서 적대시킨 것일텐데 사람의 마음과 친분을 이용해서 돈을 떼먹으려는 질이 몹시 나쁜 행위이다. 그 스태프도 지금은 관두고 여행을 떠난 상태라고 한다.쓰레기구단[10] 이원규의 인터뷰에 따르면 2000만원을 합의금으로 지급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소송으로 번지자 제시했다는 것, 복귀 통보 역시 소송으로 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통보했던 것 등등[11] 예를 들어서 성남FC의 반박문에서는 아주 열과 성의를 다해서 두 선수의 이적을 추진하다가 이적기간이 끝났다고 말했는데, 2000만원을 달라고 요구하자 처음에는 쿨하게 씹었다는 얘기, 친한 사람으로 담당자 바꾸기, 팀에 합류하되 훈련도 안 시키고 숙식도 제공 안 한다는 얘기 등으로 보면 열과 성의를 다해서 두 선수의 이적을 추진했을 리는 전혀 없어 보인다.[12] 18분 30초 참조 바람.[13] 통상 원정석으로 배정되었으나, (다른 구장과 마찬가지로) 원정석에서 해제되었다.[14] W 구역은 탄천종합운동장에서 VIP석(W 구역 가운데) 다음의 상위 좌석이고, 스카이석(요금은 W석 1층과 동일)은 경기장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이다. 기자들(전용 구역이 2층 가운데에 있다)과 휴식 중인 선수들이 주로 앉는 자리임은 물론, 블랙존 설치 이전에 황기청년단 등 주요 서포터즈가 있었을 정도.[15] 후반 투입된 서울 선수 한 명이 확진되어서, 당일 경기에 참가한 양측 선수단은 물론 심판진도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음성 판정이었지만, 자가격리를 하게 된 상황.[16] 원본 영상인 유튜브 영상은 비공개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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