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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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성삼문 표준영정.jpg
성명
성삼문(成三問)
본관
창녕 성씨
출생
1418년 조선 충청도 홍주
사망
1456년 6월 8일 (향년 38세) 조선 한성부
국적
조선

근보(謹甫)·눌옹(訥翁)

매죽헌(梅竹軒)
시호
충문(忠文)
부모
부친 - 성승(成勝, ? ~ 1456)
모친 - 죽산 박씨(竹山 朴氏) 박첨(朴襜)의 딸
형제자매
남동생 - 성삼빙(成三聘, ? ~ 1456),
성삼고(成三顧, ? ~ 1456),
성삼성(成三省, ? ~ 1456)
부인
초취 아주 신씨
계취 연안 김씨 김차산(金次山)
자녀
슬하 3남 3녀
장남 - 성맹첨(成孟瞻, ? ~ 1456) 김차산 소생
차남 - 성맹년(成孟年, ? ~ 1456) 김차산 소생
3남 - 성맹종(成孟終, ? ~ 1456) 김차산 소생
장녀 - 성효옥 김차산 소생
차녀 - 성씨(1439 ~ 1489) 박림경(朴臨卿)의 처 김차산 소생
3녀 - 엄정구(嚴鼎耉)의 처 김차산 소생
1. 개요
2. 생애
3. 기타
3.1. 절명시?
3.2. 강희안을 구해줬다?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조선 전기 세종 - 세조 치하의 문신, 학자.

1418년 출생. 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謹甫), 는 매죽헌[1], 시호는 충문(忠文). 창녕성씨의 회곡공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생을 마감한 사육신 가운데 대표격인 사람이다.


2. 생애[편집]


성승과 박첨의 딸 죽산박씨의 아들이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은 사육신의 반열에는 들지 않았지만, 역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에 동참했었다.[2] 부자가 한꺼번에 왕에게 반기를 든 셈이라 결국은 형제들도 다 죽고 집안이 쫄딱 망했다. 학자의 이미지가 강한 성삼문이지만 아버지 성승은 물론이고 할아버지 성달생까지 모두 무장이었는데 이 집안의 무인적 풍모는 성삼문의 강직한 면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충청도 홍주 출신이다. 이름이 특이한데 낳을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라는 소리가 3번 들렸다고 한다. 3번째 질문에서야 비로소 아이를 출산했기 때문에 이름이 삼문(三問: 세 번 물어봄)이 되었다는 기이한 설화가 전해진다. 장남이어서 동생들도 다 '삼'자 돌림이 되었고 그래서 다들 이름이 특이하다.[3] 성삼문이 태어난 뒤 점을 보자 충신이라 나와서 그의 할아버지 성달생이 집안 말아먹을 녀석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자신이 모시는 군주에게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있어야 비로소 충신이 되는 것이니 자연히 그럴 수 밖에. 훗날 충신이라서 집안을 말아먹게 되었다.[4] 이런 말을 한 성달생은 이성계와 공모하여 우왕, 창왕을 몰아낸 흥국사 9공신 성석린의 동생 성석용의 아들로 우왕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다. 우왕, 창왕, 공양왕의 비극적인 최후와 태조의 찬탈,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왕씨 몰살, 최영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의 충신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충신들이 떼죽음당하고 고려가 어떻게 망하는지 지켜본 사람이니 충신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5]

세종 재위 시절 과거에 장원 급제했는데 글씨를 잘 쓰며 문장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적에, 당시 명나라의 음운학의 권위자인 한림학사 황찬이 귀양와 있던 요동에 13번 왕래하며 훈민정음 창제에 공헌했다.[6] 집현전 학사 등을 역임했다.

세조가 계유정난(단종 1년 10월) 이후 발표한 정난공신 명단에는 수충정난공신에 포함되는데 이후에 연루되는 인물 중 같이 포함된 인물은 수충협책정난공신 박팽년, 충청도 도절제사에 임명된 성삼문의 부친 성승, 수사헌 장령이 된 유성원, 중훈대부를 더하게 된 이개 등이 있다.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공적으로 내린 좌익공신 3등으로 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으며 성삼문과 같이 이름을 올린 인물로는 이휘가 있다. 계유정난에 대해서는 집현전 학자들 역시 최소한 암묵적으로 동조했다는 평도 있다. 실제로 박팽년의 지위는 신숙주와 맞먹고 폭넓은 인사 조치가 이루어졌다는 것. 실제로 성삼문은 계유정난 직후 안평대군은 죽이라면서도 자신이나 계유정난에 참여하지 않은 여러 대신들이 공신에 오르는건 옳지 않다는 말을 했다. 결국 성삼문 등 집현전 출신 관료들을 회유하기 위한 세조의 의도라 볼 수 있다. 실제로 계유정난 이후 성삼문을 포함한 집현전 출신 관료들의 승진은 빨라지는데 계유정난 이전 정4품 시강관에 있던 성삼문은 계유정난 이후 사간원의 종3품 우사간으로 승진 후 11월 다시 좌사간으로 승진. 1454년 1월 단종의 비를 들이는 문제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좌천되지만 1454년 6월 집현전 부제학이 되면서 정3품 당상관의 직에 처음 오르게 되는데 8월에 예조참의(정3품)를 거쳐서 1455년 6월 승정원 동부승지로 직이 바뀐다. 집현전 출신 관료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입장에서도 문제였던 노신들을 제거한 계유정난과 달리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반대하게 된다. 여기까지 가는 것은 너무 나간다는 것. 실제로 이 시기까지 가면 세조의 회유책도 많이 줄어들어서 사육신 사건에 연루된 이들 중에서는 성삼문과 이휘만이 3등공신에 오르게 된다.[7] 이후 성삼문은 승정원 우부승지로 임명되었고 좌부승지는 한명회가 임명된다. 이후 세조가 왕위에 오른 다음 추충정란좌익공신(推忠靖亂佐 翼功臣)에 임명되면서 다시 한명회의 전 직책인 좌부승지로 승진한다.[8]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하는 장면에서 성삼문이 옥새를 끌어안고 울어서 세조에게 찍혔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 내용은 실제 역사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은 장면이다. <조선왕조실록>은 다음과 같은 짧은 기사만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또 명하여 재촉하니 동부승지(同副承旨) 성삼문(成三問)이 상서사(尙瑞司)로 나아가서 대보를 내다가 전균으로 하여금 경회루(慶會樓) 아래로 받들고 가서 바치게 하였다.


성삼문은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을 모았다. 사육신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문기, 사육신에 속해있지는 않으나 아버지인 성승, 고모부인 조숭문, 결국 이들을 배신하게 되는 김질 등이었다. 이들은 세조를 폐위시키고 상왕이 된 단종을 복권시킬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거사의 내용은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별운검[9]으로 서게 되는 유응부와 성승이 세조와 그 일파 등을 죽이고 명나라에게 단종 복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것이었다.[10] 그러나 환송연 당일 이상한 낌새를 눈치를 챈 것인지 세조가 별운검을 축연 자리에서 빼버렸는데 성삼문은 반대했으나 결국 별운검은 없는 것으로 통과. 거사를 치르기로 한 이들은 망설이다가 후일을 기약[11]하며 일을 미루고 말았다. 남효온의 소설 <육신전>은 이 장면 묘사도 쓸데없이 자세하다. 이 때 유응부가 그래도 한명회부터 베어버리고 들어가서 거사를 강행할 것을 주장했으나 성삼문이 반대해서 이루지 못했다.[12] 이 때 사람들이 미적미적거리는 꼴을 보며 일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에게 가서 이 일을 죄다 털어놓았고 결국 이들의 모의는 이대로 발각이 되었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첫 국문에서 함께 모의한 자들의 명단을 성삼문이 털어놓았다는 점이다. [13] 심지어 후일 단종도 같이 모의하였다고 일러바친것도 성삼문이다.[14]

주동자들은 끌려가기 전에 가족과 함께 자결한 유성원을 제외하고 모두 끌려가 극형을 받았다.[15] 함께 모의했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문 후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에 처해졌다. 사건이 컸던만큼 집안이 아예 풍비박산나서 아버지, 동생들, 아들들이 멸족당했음은 물론 여자라서 살아남은 부인 및 딸들도 노비가 되었다고 한다.[16] [17]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둘째 아들만이 몰래 도망쳐 성씨를 바꾸고 살아서 지금까지 집안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성삼문의 아내는 차산(次山), 딸은 효옥(孝玉)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들은 박종우[18]에게 주어졌다가 성종 6년(1475년) 석방되는데 계유정난이 1456년이니 거의 20년만의 일이다. 딸의 생몰년도는 나와 있지 않으며, 노비가 될 당시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복위시키려던 단종마저도 이 일에 연루된 것이다. 이 일에 단종이 연루되었다는 말 자체가 성삼문의 입에서 나왔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19] 실제로 단종을 생각했다면 목숨 걸고 비밀로 붙였어야 했을 일이었다는 점에서 완벽한 배신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사육신을 미화하는 소설인 <육신전>에는 계속 세조가 친국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 단종의 이름을 말하는 장면도 당연히 없다. 사실 왕이 직접한 친국은 첫째날 뿐이고 둘째날 이후에는 구치관이 국문했다. <육신전>의 사료엄밀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고려하면 무슨 세조에게 낚였거나 해서 이성을 잃고 이런 소리를 했을 확률은 0이나 마찬가지다. 단종의 이름을 불은 것은 국문 거의 마지막이기 때문.

덕분에 이 때까지 형식상이나마 상왕 대접을 받고 있던 단종은 아예 폐위되었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가 안 좋았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훗날 숙종 시절에 단종이 신원되면서 같이 복권되었고 영조 시절에는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아버지 성승 등 함께 희생당한 다른 이들과 함께 김시습이 몰래 시체를 수거해 노량진에 묻혔는데 그 사육신묘 주변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3. 기타[편집]


  • 성삼문의 증조부 성석용은 개국원종공신이며, 영의정 성석린(성삼문의 종증조부)의 동생이다. 다른 종증조부 성석인의 아들 성억(성삼문의 재종조부)의 딸은 성녕대군의 부인이다(성삼문의 재종고모). 성억의 동생인 성엄의 아들, 성봉조(성삼문의 재종숙부)는 세조의 동서(정희왕후의 형부)였고, 성엄의 손자인 <용재총화>를 지은 대제학 성현과 연산군대 영의정을 지낸 성준은 모두 성삼문의 8촌 동생이다.

  • 성삼문의 3명의 고모 중 한 명인 창녕성씨(성달생의 딸, 성승의 누이)는 한혜에게 시집갔는데, 한혜는 한명회의 당숙부(5촌)이고, 한혜의 아들들인 한계미(세조의 또다른 동서이자 정희왕후의 또다른 형부), 한계희, 한계순은 성삼문의 고종사촌들이다. 이들은 모두 좌익, 익대, 좌리공신에 봉해져서 세조~성종대의 훈구대신들이었다. 또 한 명의 고모는 농은 조원길의 손자인 조숭문에게 시집갔는데 조숭문은 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처조카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아들 철산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 기존의 강직한 충신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로서는 의외겠지만 실제 역사 속 성삼문은 평소에는 밝고 유머러스한 성격이었으며 실없는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개를 지켜야 하는 때가 오면 누구보다 굳은 의지와 절개를 보여주는 외유내강형 인물. 사실 미래가 잘 보장된 타입인데 3등 공신에 책봉되었으므로 가만히 있어도 자손 대대로 잘 먹고 잘 사는게 가능했다.

  • 성삼문이 사망하고 몇 년 후 세조 4년 9월에 성삼문을 죽인 세조와 그 신하들은 거하게 술판을 벌였는데 거하게 취한 정인지가 세조에게 반말을 찍찍하여 경악한 신하들이 "정인지는 성삼문이랑 똑같은 역적이니 목을 베어 죽여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정인지와 오랫동안 같이 일한 그의 동료들이 그냥 처벌해라도 아니고 몇 년 전에 죽은 반역자 성삼문과 비교하며 목을 베어 죽여야 한다고 할 정도면 정인지가 세조에게 차마 표현하기 어려운 상당한 수준의 폭언, 욕설을 한 듯하다. 정인지는 정말 역모를 꾸민 것도 아니고 공신이라 세조의 용서를 받아 별다른 처벌을 받지는 않았으나 성삼문은 저승에서 이 광경을 보고 기가 막혔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후에 성종 시절, 유자광이 한명회를 저격한 적이 있었는데[20] 이 때도 한명회는 성삼문, 남이, 이시애를 역적으로 거론하며 이런 역적들이 난을 일으킬때마다 자신을 해하려 했다고 상소를 올렸다. 이 점을 보면 사육신들 중에 성삼문이 대표격으로 여겨진 모양.

  • 세종 시절 이성계의 팔준마를 소재로 찬문을 써서 1등으로 뽑힌 적도 있었다. 이 때 신숙주와 다른 집현전 학사들도 찬문과 찬시를 썼지만 1등은 성삼문이었다고 한다.

동문선 제44권 / 표전(表箋)

집현전 진 팔준도 전(集賢殿進八駿圖箋) /성삼문(成三問)

하늘이 도와 임금을 내시니 성인은 천 년의 운수를 맞추셨고, 땅에서 쓰이는 것은 말[馬] 같은 것이 없으며, 신물(神物)은 한 시대의 재능을 바쳤기로, 감히 새 그림을 만들어서 예감(睿鑑)에 올리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오면, 왕자의 작흥(作興)에 있어어도 역시 축산(蓄産)에 힘입어 성공하였습니다. 촉한(蜀漢)의 왕은 적로(的盧)를 타고서 능히 단계(檀溪)의 액을 면하였고, 금(金) 나라 태조는 자백(赭白)을 타고서 곧장 흑수(黑水)의 깊은 물을 건너갔으니, 진실로 큰 업이란 돌아갈 데가 정해져 있사오매, 미물(微物)도 또한 그 힘을 분발하는 것이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옵서 용맹은 하늘에서 타고나시고 덕은 오직 날로 새로우시매, 고려의 운수가 끝날 무렵에 외부의 적이 자주 틈을 노리니 나라를 위하여 적개심을 품고 백성 보살피기를 상처입은 것을 대하듯 안쓰러워하셨습니다. 의기(義旗)를 한번 돌이키자 백성은 화난을 면하게 되었고, 신과(神戈)를 사방으로 휘두르매 삼한(三韓)은 청명한 세상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원근(遠近)이 지극한 인(仁)을 당적(當敵)할 길이 없었지만 근골(筋骨)은 먼저 크나큰 임무에 부지런하셔서,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시매, 몸은 상처에 피곤하였습니다.

이 시절을 당하여 세상에 이름난 인재만 용의 비늘에 붙어 절개를 다한 것이 아니오라, 기르는 짐승 같은 천물(賤物)까지도 제 몸을 바쳐 수고를 맡을 것을 알아서, 혹은 사냥터를 달리기도 하고, 혹은 싸우는 진중을 출입하여 주선(周旋)하는 데 힘을 다하고 걸음걸이는 사람을 따르는데, 그 크고 건장한 체격은 이미 익숙한 모습을 볼 만하고, 달리는 곳에는 앞설 놈이 없어 참으로 사생(死生)을 의탁할 만하더니, 마침내 그 장기를 발휘하여 큰 업을 이룩하는 데 도움되었으니, 어찌 영걸(英傑)만이 유독 능연각(凌煙閣)에 오르리오. 권기(權奇)로 소릉(昭陵)에 참열하게 된 것을 믿을 만하옵니다.

삼가 생각하오면, 도(道)는 생성(生成)에 흡족하시고, 공은 조화(造化)에 참예하시고, 선대의 뜻을 잘 계승하시고 선대의 일을 잘 기술하시어 삼가 수성(守成)만 하시고, 선대의 공을 계승하시고 선대의 정책을 드러내어 창업(創業)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시며, 사랑은 견(犬)ㆍ마(馬)에게도 버리지 않으시고, 신의는 돈(豚)ㆍ어(魚)에까지 미치며, 특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도찬(圖贊)을 지어 올리게 하셨습니다.

신 등은 모두 조전(雕篆)의 기술로써, 외람되게 문한(文翰)의 직을 맡아온즉, 하물며 이 칭송이야. 바로 직분이옵기로 삼가 사적에 실린 것을 상고하고 겸하여 부로(父老)의 말을 채택하여, 화사(畵師)로 하여금 모형을 그리게 하고 졸한 글을 엮어서 공적을 기록했사오니, 터럭이 꼬부라진 한혈(汗血)은 완연히 당시의 용모와 같고, 늠름한 자태와 높은 공로는 거의 뒷사람의 안목을 놀라게 할 것이며, 상서로움은 하도(河圖)와 더불어 나란히 가고 노래를 지으면 천마가(天馬歌)를 누추하다며 차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한가한 틈이 나시오면 한 번 보아 주시옵소서. 그 덕을 칭찬하고 그 힘을 칭찬하지 않은 것은 선니(宣尼 공자(孔子))의 말씀을 따랐고, 아들에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길이 성조(聖祖)의 공을 살필 수 있사옵니다.


  • 세종이 총애하는 신하였으며 훗날 세종이 어린 세손의 앞날을 걱정하여 세손을 지켜달라고 고명을 남긴 문신들 가운데 하나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다. 우선 고명은 죽을 때 손을 잡고 부탁하는 것 같은 그림이 아니라 정식으로 신하들을 모아놓고 하는 절차로 <조선왕조실록>에 그 과정까지 등재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세종에게 고명을 받았다고 인정된 신하는 황보인, 김종서, 정분 정도로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의 이름은 없다. 무엇보다 세종의 후대는 단종이 아니라 문종이고 왕이 죽으면서 후대가 되는 아들이 아니라 그 손자를 부탁하는 것은 아들을 금방 죽을 징검다리로 취급하는 굉장히 불길한 행동이기 때문에 이를 행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아무리 문종이 몸이 약했다한들 왕에 오를 때는 30대 중반의 한창 나이였으며 문종이 40도 채우지 못하고 죽어버려서 문제였지 10년만 왕위에 있었어도 단종은 장성한 이후 즉위했을 것이다. 게다가 세종이 승하할 당시 성삼문은 고작 30대 초반의 젊은 관료에 불과했다. 세종 사망 이후부터 문종 즉위 시기 관직을 보면 황희가 사직한 이후 영의정은 하연인데 문종 초기에 사직했다. 세종 말년의 우의정은 황보인으로 하연이 퇴임하자 영의정이 되었다. 세종 말기 좌의정은 남지인데 문종 초에 병으로 사직했다. 삼정승 바로 아래가 종1품인 좌우찬성인데 좌찬성 박종우는 문종 즉위 이후 정승이 되지 못하고 함길도 도체찰사가 되었다가 계유정난에 협력하여 정난 1등 공신이 된다. 우찬성이 정분으로 남지가 사직한 이후 김종서의 천거로 정승직에 오른다. 김종서는 세종이 사망하던 시점에서는 평안도 도체찰사이지만 문종 즉위 후에 세종의 빈전에 곡할 때에는 우찬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까지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고명대신 후보로 모두 정1품과 종1품인데 정승과 그 후보군인 찬성이며 이 시기 성삼문은 집현전 직전으로 정4품이었다. 그럼 문종이 단종을 부탁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는데 문종은 당시 어의종기 치료를 잘못하는 바람에 치료 시기를 놓쳐서 죽기 전에는 유언도 제대로 못 남기고 급사했다. 사실 이 때 고명을 했어도 성삼문은 고명대신이 되었을 가능성이 극히 낮은데 이 때도 성삼문은 4품이었기 때문이다. 단종 즉위 후에야 신숙주의 뒤를 이어서 종3품 직제학에 오르고 성삼문이 정3품 이상 당상관까지 오르는 것은 계유정난으로 고위직들이 쓸려나가고 수양대군이 관련 인사들을 포섭하느라 관직을 뿌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일화가 창작된 것은 소위 말하는 그림이 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으며 세종이 죽으면서 젊은 관료를 붙잡고 손자를 부탁하는데 이 때 성삼문은 단종을 위해서 죽고 신숙주는 배신해서 세조 편에 선다는 형태로 대비시키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이 때문에 박팽년을 높히고자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여기에 박팽년은 추가하지 않는데 이 경우 대비 구조가 2:1로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3.1. 절명시?[편집]


<臨死賦絶命詩>

擊鼓催人命 북소리 둥둥 울려 목숨 재촉해

回頭日欲斜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기울어

黃天無一店 황천 길엔 주막 한 곳 없다니

今夜宿誰家 이 밤을 뉘 집에서 묵어갈고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는 것인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듯 그 뉘땅에 났는가[21]


이 몸이 주거가셔 무어시 될고하니

봉래(蓬萊)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어야 이셔

백설이 만건곤(滿乾坤) 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22]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한 시조들이긴 한데 정말 성삼문이 지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애시당초 조선에서 개인의 시조나 가곡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한 게 조선이 제2의 중화라는 소중화사상이 발생한 조선 후기부터이며 그 이전에 지어진 작품들은 개인 문집에 명확히 전해오는 것이 아닌 이상 저자가 불분명하다. 수양산과 봉래산이 들어가는 저 2수는 1728년 김천택이 편찬한 진본 청구영언에서부터 성삼문이 지은 것으로 등장한다. 역적의 글은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소각하는 게 원칙이란 것을 고려하면 저 작품이 정말 성삼문이 지은 것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 시조들은 실존 인물 성삼문을 평가할 때가 아니라 조선 후기 사육신이 어떤 위상을 갖고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용도로 바라보는 게 타당하다.

더 재미있는 것은 청구영언에서 작자 미상으로 수록된 시조들이 병와가곡집, 가곡원류 등 후대의 저작으로 가면서 유응부, 이개, 박팽년 등 다른 사육신의 작품으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사료에 따라 동일한 시조의 저자가 다르게 기록된 경우도 존재한다. 그리고 시조의 저자를 정하는 과정에 남효온의 육신전이 만들어낸 인물상이 강하게 작용하는 걸 볼 수 있다.[참고]


3.2. 강희안을 구해줬다?[편집]


고사관수도로 유명한 세종의 처조카 강희안도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잡혀왔으나, 평소 친분이 있었던 강희안을[23] 살리기 위해 성삼문이 그의 연루를 부인하여 살았다고 한다. 이후 강희안은 평소 천시하던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고. 그런데 문제는 이 내용도 육신전에만 나온다.

실제로 성삼문과 강희안 기사를 시기별로 분류해보면 알 수 있는데, 사육신 사건이 불거진 것은 세조 2년 6월 2일이다. 그런데 성삼문이 한참 고문을 받고 있던 6월 2일 강희안은 예조참의로 승진한다. 성봉조·홍원용·강곤·박형·봉석주·안숭직·강희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강희안이 해당 사건 관련해서 처음 언급된 것은 세조 2년 7월 1일 기사이다. 권기와 최정강이 역모와 관련해 이계전·김인 등의 처벌을 청하나 불윤하다. 그런데 성삼문은 동년 6월 8일에 이미 처형되었다. 의금부에서 성삼문 등의 반역죄를 고하니 연루된 자들의 처벌을 명하다. 사실 강희안이 연루된 것은 불고죄, 그것도 정말 단순한 사건이었다. 고변 내용이 다음과 같다.

강희안(姜希顔)은 척리(戚里)로 주상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이개(李塏)의 ‘인심(人心)이 흉흉하다.’는 말을 듣고서도 못들은 체하고 피하여 갔을 뿐이요, 즉시 아뢰지 않았습니다. 또 성승(成勝)의 집에서 박팽년(朴彭年)과 하위지(河緯地)가 함께 서로 술마시는 것을 보았는데도 어찌 알지 못했다고 하겠습니까?

강희안(姜希顔) 같은 자는 범연하게 공사(供辭)에 관련된 다른 사람과 비교가 아니됩니다. 일찍이 이개(李塏)의 ‘인심(人心)이 흉흉(洶洶)하다.’는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 역도(逆徒)들이 성승(成勝)의 집에 모여서 모반을 꾀하던 날에도 역시 참여하였고, 또 성삼문(成三問)을 끌고 함께 이웃집으로 들어갔으니, 어찌 그 음모를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강희안이 처벌 받지 않은 것은 혐의가 기껏해야 불고죄(그것도 민심이 흉흉하다 정도의), 혹은 성승의 집에서 술마셨다 정도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친구 아버지 집에 모여서 술 마신 것이 역적 모의가 되고, 요즘 민심 안 좋다는 말을 들은 것이 역적의 근거가 되었다. 이 때 고발된 사람 중에서는 이개의 숙부였으나 세조에게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좌익공신에 임명된 이계전 같은 인물도 포함되어 있고, 박팽년이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던 당시 하급 관직으로 박팽년의 신임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안철손이 포함되는 등, 조선 시대에 역모 사건 하나 터지면 수백명이 죽어나가는 것이 이런 식으로 엮어들어가기 때문이다. 고발하는 사람들은 자기는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고발 당한 사람들의 빈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서 무조건 사소한 일로 고발을 하는 것이고[24], 조선시대 왕들은 이 범위 줄이느라 진땀을 뺀다.

이후에도 강희안은 호조 참의, 중추원 부사, 인수부 부윤 등을 지냈다. 강희안은 성종 7년에 죽었는데,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친척 중 누구가 강희안의 집안 제사를 이을 것인가로 조정에서 논의한 기록까지 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박진성이 연기했다. 왕의 비서직인 승지로서 수양대군의 회유를 받으면서도 의지할데 없는 단종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단종 복위 시도가 발각된 뒤에는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세조에게 절대 굽히지 않는데 거열이라는 끔찍한 처형을 당하기 직전에도 절명시를 읊으면서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 2007년 KBS북한과 공동 제작한 드라마 <사육신>에서는 북한 배우 박성욱이 연기했다.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선 굵은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시청률이 낮았다. 박성욱의 말에 의하면 배우 본인이 사극에서 주인공을 처음 맡으니까 조선시대를 모르는 측면에서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본 연구를 해도 처음에는 연기도 잘 안되어서 연출자에게 비판도 받았다. 그 이후 박성욱은 그 당시의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했고 그렇게 연기를 하다 보니 점차 익숙해져 갔다.

  •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젊은 배우 박철호[25]가 연기했다. 집현전 학사 시절의 풋풋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신숙주가 세조의 편에 서기 전까지는 절친이었던 신숙주와 콤비를 이루며 명랑하고 발랄한 모습을 보인다.

  •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는 중년 배우 박철호[26]가 연기했다. 정종과 김승유가 참여하는 사육신 사건과 관련되어 등장했는데 적은 출연 분량에도 성삼문의 의기와 절개를 잘 표현해냈다. 그렇습니다. 나으리!




5. 둘러보기[편집]


진승총(震乘總)
[ 본기(本紀) ]
권1기
,제1대 「태조기(太祖紀)」,
,제2대 「정종기(定宗紀)」,
,제3대 「태종기(太宗紀)」,
,제4대 「세종기(世宗紀)」,
이단
이경
이방원
이도
권2기
,제5대 「문종기(定宗紀)」,
,제6대 「단종기(端宗紀)」,
,제7대 「세조기(世祖紀)」,
,제8대 「예종기(睿宗紀)」,
이향
이홍위
이유
이황
권3기
,제10대 「연산기(燕山紀)」,
,제11대 「중종기(中宗紀)」,
이융
이역
권4기
,제12대 「인종기(仁宗紀)」,
,제13대 「명종기(成宗紀)」,
이호
이환
권5기
권6기
권7기
,제14대 「선조기(宣祖紀)」,
,제14대 수정기,
,제15대(중초본, 정초본) 「광해기(光海紀)」,
이연
이혼
권8~9기
,제16대 「인조기(仁祖紀)」,
이종
권10기
,제17대 「효종기(孝宗紀)」,
,제18대(개수록) 「현종기(顯祖紀)」,
이호
이현
권11~12기
권13기
,제19대(보궐정오) 「숙종기(肅宗紀)」,
,제20대(수정록) 「경종기(景宗紀)」,
이순
이윤
부록
금상(今上)
[ 평전(評傳) ]
평전
이용 · 김종서 · 황보인
,「부록 사육신(死六臣)」,
,「부록 생육신(生六臣)」,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김시습 · 원호 · 이맹전 · 조려 · 성담수 · 남효온
[ 부록(評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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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훗날 일제 강점기 때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는 스승인 매곡 성주록이 호를 지어 주었는데 성주록의 호 '매곡'에서 '매'를 땄고 성삼문의 호인 '매죽헌'에서 '헌'을 따서 '매헌'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참고로 성주록은 성삼문의 후손이며 그의 고사를 학생들에게 자주 훈화했다고 한다.[2] 양운검의 한 분으로 모신다.[3] 삼빙(三聘: 세 번 부름), 삼고(三顧: 세 번 돌아봄), 삼성(三省: 세 번 살펴봄)[4] 실제로 성씨 가문의 일원이 담당하여 간행한 조선 초기 서적들의 경우 세조 대 이후에는 성씨 가문 사람이 간행했다는 내용이 언급된 부분 자체를 목판에서 완전히 파내 없애버리거나 다시 간행할 때 해당 부분을 빼고 출판한 사실을 실물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5] 다만, 성달생의 직계손은 성삼문의 단종복위사건으로 몰락했지만, 그의 형제 등 방계가문은 훈구가문으로서 잘 나갔다[6] 훈민정음보다는 이를 이용한 동국정운의 한자음을 정립하는데 공헌했다는 것이 맞는 것 같다.[7] 물론 사육신 사건 이후에는 이들의 공신 작호가 떨어지고 같은 3등공신이었던 정창손이 2등공신으로 오르고 사육신 사건을 고변한 김질이 3등공신에 오르게 된다.[8] 승정원에서 1칸씩 승진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이 때는 묘하게 성삼문이 한명회의 직책을 따라서 승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적극적으로 반정에 참여했던 신숙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36세에 당상관에 오른 성삼문의 승진 속도도 느리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9] 연회에서 왕을 양 옆에서 호위하는 직책.[10] 만약 거사를 성공했으면 그걸 목격하고 황제에게 보고 들은걸 전해야 했을 명나라 사신들, 명나라 황실의 장래도 참으로 볼만했을 것이다. 상왕이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통해 금상을 처단하고 왕위를 되찾는다니 형이 목숨이 위태로울 때 제위를 먹튀하고는 조카마저 내쫓아버린 황제가 이들을 퍽이나 기특해했겠다. 수양대군은 경태제의 등극을 알리는 칙사들을 앓아누운 아버지와 형 대신 접대하고 경태 연간에 사신으로 명나라에 들락거려 안면도 있던 사이였다. 그나마 세조 입장에서는 이듬해에 명나라 태상황탈문의 변을 일으켜 천순제로 복위했어도 다른 압박은 없었던게 다행이나 결국 그 해를 넘기기 전에 조카를 죽이고 만다.[11] 세조가 농사 일을 보러 갈 때를 노리려고 했다는 말이 국문장에서 나온다.[12] 그래서 국문받을 때 유응부는 성삼문을 향해 "너는 을 읽었지만 꾀가 없으니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또는 "더벅머리 겁쟁이 선비 놈들과 거사를 치른 것이 일생 일대의 실수다!"라고 일갈했다고 한다.(유응부는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의 친구라서 나이 차이가 아버지뻘이었다.)[13]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2_002[14]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7_001[15] <조선왕조실록>에는 국문 기록과 성삼문 등의 진술 위주의 기록만 존재하지만 <육신전>에서는 성삼문은 세조를 끝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전하'가 아닌 '나리(나으리)'라고 불렀고 유난히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는 식으로 묘사된다. 또한 세조가 "네가 지금 나를 '나으리'라 하는데 그러면 내가 준 봉록은 왜 먹었느냐?"라고 묻자 "나으리가 준 녹(봉급)은 하나도 먹지 않고 우리 창고 안에 고이 쌓아 두었소이다"라고 대답했는데 조사해보니 과연 그랬다더라는 식의 일화가 추가. 함께 동문 수학했던 신숙주가 세조와 함께 서 있자 세종의 고명을 받들지 않은 변절자라며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는 것도 <육신전>에만 전하는 이야기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단종 복위 운동을 모의하며 "신숙주는 나와 좋은 사이지만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고 김질의 고변에 나온다. 근데 이 말은 신숙주에게 직접 한 말이 아니라 일종의 뒷담화 식으로 동료들에게 한 말이다. 딱히 신숙주에게만 포인트를 준 것은 아닐 텐데도 이야기가 너무 두고두고 남는 바람에 신숙주는 지금까지 변절자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숙주나물이 신숙주와 엮이는 것은 실제 사육신의 정변 시도가 있고도 몇 백년 뒤인 조선 후기의 일이다.[16] 기존의 문서에는 먼 친척들도 화를 입었다고 되어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성삼문의 집안은 개국공신 성석린의 집안이기도 했고 그 범위를 넓게 보면 방계 친척들은 오히려 세조의 찬위에 협조하거나 정난공신들과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삼문의 재종숙(7촌)인 성봉조는 세조의 동서였다.(...) 화를 입은 사람들은 성달생(성삼문의 조부)의 직계손, 즉 성삼문 입장에서는 사촌 범위 이내에 한정되었다.[17] 사실 이 정도만 돼도 이 좋은 거다. 연산군 때는 여자고 먼 친척이고 멸족했으니 말이다. 연산군이 멸족시킨 가문들은 계유정난에 가담한 정난공신들의 가문이었으니 연산군은 의도치 않게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원수를 갚은 셈이 되었다.[18] 태종의 딸 정혜옹주와 결혼한 부마이다. 결혼한 것이 14살 때였는데 정혜옹주가 3년만에 죽었기 때문에 재혼한다. 세종 때는 호조판서, 문종 때는 정승 후보군인 우찬성까지 올랐고 계유정난에도 적극 참여해서 정난1등공신이기도 했다.[19]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7_001[20] 이유는 친정 관련.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그만두자 반대의견이 올라왔는데(사실 이건 의례상 행하는 것으로 덥석 받아들면 모양새가 좋지 않아서 왕과 신하는 한번 이상은 반대의견을 냈다.) 이 때 한명회 역시도 반대의견을 올렸는데 그 정도가 좀 지나쳤다.[21] 수양산 : 백이, 숙제가 절개를 지켜 은거하다 굶어 죽은 곳. 수양 대군을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 이제 : 백이와 숙제. 채미 : 고비를 뜯음. 푸새 : 산과 들에 저절로 나서 자라는 풀 (녹봉을 의미). 백이와 숙제는 구차하게 연명하며 살았으나 나는 녹봉도 받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라는 의미.[22] 봉래산 : 중국의 전설상의 산. 낙락 장송 : 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진 키 큰 소나무. 백설 : 수양 대군과 간신 비유. 만건곤 : 하늘과 땅에 가득함.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뒤덮여도 홀로 푸른 빛을 잃지 않는 소나무처럼 세조와 배신자들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절의를 지키겠다는 결의가 담김. 육신전에 의해서 이미지가 성립된 이후에 추가된 이야기에서는 세조는 태종의 「하여가」로 성삼문의 마지막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다. 위 시조는 세조의 「하여가」에 화답한 성삼문의 「충의가」로 묘사된다. 저 시조 자체가 뒤에 억지로 붙여 넣은 것일 확률이 높다는 것을 고려하면, 시조를 붙여 넣으면서 배경을 추가한 접착제 역할이라고 보면 되겠다.[참고] 문헌 신성환, 「사육신 담론의 전변과 조선 후기 시가의 수용 양상」 (민족 문학사 연구, 2011년)[23] 강희안을 놀리는 시를 지었을 정도였다.[24] 위에 언급된 안철손을 고발한 것은 그 동복동생인 안신손이었다.[25] 영화 <해바라기>에서 김래원한테 포켓 나이프 뽑고 덤벼들다가 팔모가지 부러진 역할을 했다.[26]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성삼문 역을 맡았던 배우 박철호와 동명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