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읍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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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성읍국가론
2.1. 배경
2.2. 성읍국가론의 문제점과 폐기 이유
3. 기타
3.1. 치프덤(Chiefdom)의 번역문제와 성읍국가와의 관계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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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성읍국가(城邑國家)는 기존에 제시된 '부족국가' 개념을 대체하고,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도식화하기 위해 천관우가 제안한 용어이다. 천관우는 이를 삼한의 소국에만 적용하였으나, 이후 이기백이 체계화하면서 청동기시대의 정치체(주로 고조선)부터 성읍국가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성읍국가가 한국사의 발전도식을 설명하기 위해 일부 학자들이 사용했으나, 1980년대의 간헐적인 비판을 시작으로, 1990년대에 이 용어 자체가 한국사의 발전도식에 적용할 수 없다는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면서(강봉원 1992) 현재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2. 성읍국가론[편집]



2.1. 배경[편집]


파일:도시의 형성.png

한국사 발전도식으로 제안되었던 기존의 ‘부족국가’라는 용어는 학술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왜냐하면 부족(tribe)은 공동체적인 유제가 남아있고 혈연을 중심으로 한 친족 중심 사회였던데 반해 국가(state)는 이를 파괴하고 새롭게 재편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모순되는 용어가 합성되다보니 이 사회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성격이 모호했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제시된 것이 '성읍국가론'이다. 이는 1971년 신동아 심포지엄에서 서양사에서의 도시국가나 막스 베버M. Weber의 성채국가론(城砦國家論), 중국사의 읍제국가론(邑制國家論) 등을 기준 삼아 한국 고대사에서 세계사적 보편성의 수용을 강조하면서 가설로 제기된 것이다.

이를 최초로 제안한 천관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중국사에는 이러한 일종의 도시국가를 은·주에서 찾아, 혹은 ‘성시국가’ 혹은 ‘읍제국가’ 등으로 부르는 것을 다 아는 바 이지만, 여기서는 한국사상의 그것을 ‘성읍국가’로 부르기로 한다... 《三國史記》에 왜인이 자주 우리 ‘성읍’을 범하여 ...(신라유례기) 등, ‘성읍’이라는 고유의 용어례가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에서 이와 같이 굳이 도시국가 내지 성읍국가의 단계를 찾는 것은 그러한 방향의 파악이 한국사상의 국가형성과정을 추적하는 데 유효한 방법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기 때문이지만... (천관우 1976:12-13; 강봉원 1992:129-130 재인용)


그는 우리나라에도 도시국가와 같은 형태가 있으며,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나라 사료들에서 ‘성읍’이라는 용어가 자주 보이므로, 이러한 국가의 형태를 성읍국가로 부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를 삼한이나 초기 신라나 백제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성읍국가론을 적극 수용한 이기백은 성읍국가의 개념을 한층 구체화하였다. 그는 청동기시대에는 부족장 후예들이 정치적 지배자로 등장하는데, 이들의 영토는 그리 넓지 못했지만 토성을 축조하여 성 바깥의 농민을 지배하는 형태였으므로 이를 성읍국가라 부르자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이기백은 기존에 삼한사회나 초기 신라 및 백제에 적용되었던 성읍국가를 청동기시대로 확장하였다. 또한 신동아 토론회에서 단순히 서양의 도시국가, 중국의 읍제국가가 한국사에서도 있었을 것이라는 시론적인 제안을, 성읍국가가 무엇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정의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더 나아가 이러한 성읍국가들이 연합하여 왕을 중심으로 하나의 커다란 연맹체인 ‘연맹왕국’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즉 그는 성읍국가를 한국사의 발전단계 중 하나로 인정하고, 그 발전도식을 부족사회(신석기시대) → 성읍국가(청동기시대) → 연맹왕국(철기시대)으로 정립하였다.


2.2. 성읍국가론의 문제점과 폐기 이유[편집]


이 용어가 폐기된 결정적인 이유는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이기백이 명확한 개념 규정을 못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의 가설은 실증되지 않은 상상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기백은 2-1장 맨 위의 도식화된 그림처럼 지배층과 일반 농민이 거주지를 달리하여, 지배층은 성벽이 있는 도시에 왕궁과 관청 같은 공공시설이 존재하는 곳에 산다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이들 성은 성 바깥에 거주하는 농민으로부터 일정한 세금을 거두었을 것으로 상상하였다(이기백 1985:87).

하지만 우선 그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청동기시대부터 삼한시대까지 그가 이야기 한 성읍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적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었다(이기백 1985:85).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그는 서울의 몽촌토성, 대구의 달성토성, 경주의 월성과 같은 ‘토성’을 삼한시대의 성읍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이기백 1985:88). 그러나 이러한 성들은 이후의 조사에서 밝혀졌듯이, 4-5세기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들이다. 현재까지 그가 이야기한 삼한시대 토성은 단 하나도 확인된 바가 없으며, 앞으로도 확인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왜냐하면 이러한 토성들은 인력이 매우 많이 드는 대공사이기 때문에 이를 동원할 강력한 조직이 존재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산신성비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가조직이 지역의 일반성원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토목사업에 동원하는 것은 강력한 고대국가가 성립하고 난 이후에나 등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토성은 강력한 지배조직인 ‘국가’가 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지표이다(박순발 2001). 삼한 사회는 특정 한 유력 개인을 중심으로 구심점이 모이는 사회로, 그러한 체계적인 조직은 매우 미약하였다. 또한 수장들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의 범위도 매우 한정되어있었다. 자연스레 수장들이 동원할 수 있는 인력 또한 매우 한정적이어서 토성과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지을 여력 따위는 없었다.

풍납토성이 가장 좋은 사례이다. 이 성은 4세기 전반에 축조되기 시작해 475년 웅진 천도 이전까지 4번에 걸쳐[초축(1·2단계)→ 증축(2·3단계) → 완성(3·4단계)] 증축하여 완성된 성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최근 풍납토성 축조인원에 대해 구체적인 인원이 제시되었는데(허진아 2018), 이에 따르면 풍납토성 각 단계별 축조 소요 시간은 평균 25년으로, 동원된 총 인원은 4,225,200명이다. 즉 각 단계당 연간 4,225명이 대략 25년간 투입된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의 큰 나라는 1만호(戶), 작은 나라는 수천가(家)라고 기록되어있다. 1호당 5명으로 계산하였을 때, 큰 나라의 경우 약 5만여명이 사는 것이 된다. 단순 계산하였을 때 마한의 큰 정치체의 경우 토성을 축조하기 위해 연간 약 8.5%의 인구를 고정적으로 투입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는 현대사회에서도 불가능한 초대형 메가 사업이다.

두 번째이자 가장 큰 문제점이 그가 도식화한 이야기들은 아무런 검증도 할 수 없는 그냥 상상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사실상 그가 제시한 도식은 고대국가로서 완전한 형태를 갖추는 삼국시대 이후에나 가능한 것들이다. 삼한시대는 어느 정도 계급이 분화되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러한 경계가 모호했고, 그가 이야기한 것처럼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공간이 이격될 만큼 사회가 분화되지 않았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동일 공간 내에 살았고, 왕궁이나 관청 같은 시설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의 "국읍에 비록 주사가 있어도 읍락에 잡거하여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다", 같은 사료 예조의 "불내예왕은 백성들 사이에 섞여 거처한다"라는 기사에서 알 수 있다. 즉 삼한사회는 수직적이면서도 수평적인 면모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회였다.

이처럼 어떠한 근거없이 상상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성읍국가는 애초 첫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문제가 많은 용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헌사학계에서 무비판적으로 사용되어왔고, 결국 90년대 한 논문(강봉원 1992)의 강력한 비판에 직면하면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3. 기타[편집]



3.1. 치프덤(Chiefdom)의 번역문제와 성읍국가와의 관계[편집]


치프덤(Chiefdom)을 군장국가로 번역하거나 성읍국가와 등치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아마 치프덤을 군장'국가'라고 번역하는 것은 단순히 성읍국가와 동일한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치프덤은 국가 전(前)단계에 등장하는 사회이므로, 국가라는 접미어를 붙일 수 없다.

이는 "족장사회는 국가 이전 사회(stateless society)의 사회 복합도를 특징짓는다"(Earle 1987:279), "족장사회는 무두(無頭)사회와 관료제 사회 사이에 진화적 가교를 제공하는 중간단계사회이다"(Earle 1987:279)라고 정의한 티모시 얼(Timothy Earle)의 이야기로 명확히 알 수 있다. 따라서‘국가’라는 접미어를 붙여 번역하는 거 자체가 오류이다.

흔히 계급사회를 곧 국가로 이해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계급사회가 발생하고나서 꽤 오랜시간이 지나야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는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청동기시대가 되면 초보적인 계급사회가 시작되지만, 그로부터 국가가 발생하는 것은 최소 1,000년이 더 지나야한다. 일부 고조선을 국가로 이야기하지만, 위만조선 이전 단계의 고조선은 국가로 볼 만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평등사회라 부르는 부족사회와 불평등사회라 부르는 국가 사이의 과도기적인 단계를 이 치프덤이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 이러한 치프덤을 무엇이다라고 딱 정의하긴 힘들지만, 친족 중심의 부족 전통이 해체되지 않았으면서도,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이 심화되어 계급이 발생하였으며, 이들을 통치하는 정치적 지배자가 존재하는 복잡미묘한 사회이다. 그래서 흔히 복합사회(Complex Society)라고도 부른다.

단순하게 국가와 차이점을 이야기하라면 우리가 국가의 특성으로 흔히 이야기하는 ‘관료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정치적 기구가 존재는 하되, 국가처럼 세금을 징수하고 법을 시행할 수 있는 기구가 체계화되지는 못했던 사회이다. 게다가 국가는 혈연 중심의 부족적인 전통을 해체시키고 지연중심사회로 재편되지만, 치프덤 사회는 여전히 친족 중심의 혈연 원리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성읍국가는 2장 성읍국가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실상 국가단계사회(세금 징수 등)에서나 볼 법한 특징들을 보이고 있고, 단순히 치프덤과 동일 시대를 정의했을 뿐이지, 두 용어가 가지는 개념상의 의미는 완전히 딴판이다. 따라서 이 둘을 등치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치프덤의 번역어로는 굉장히 많지만, 군장사회(君長社會), 족장사회(族長社會), 수장사회(首長社會) 중 하나를 택하여 사용하는 것이 옳다. 전자인 군장사회는 주로 문헌사학계에서, 후자인 족장사회와 수장사회는 고고학계에서 채택되고 있는 용어이다. 특히 족장사회(族長社會)라는 번역어가 혈연·친족 중심의 치프덤사회를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으므로(강봉원 1998), 현재로서는 가장 적절한 번역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번역어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본인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용어를 사용하면 된다.

최근 고고학계에서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사회는 족장사회로, 초기철기-원삼국(삼한)단계는 군장사회로 번역하자는 의견도 있다(이청규 2015). 청동기시대는 지배자 개인의 탁월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고인돌 건설과 같은 공공건축물의 건설을 통해 집단의 정체성과 공동체적 원리를 강조하는 사회였던데 반해, 초기철기-원삼국(삼한)단계는 지배자 개인의 위신을 강조하기 위해 무덤 외형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청동무기, 청동의기와 같은 지배자 개인의 탁월성을 강조하는 사회였다는 배경이 있다(Renfrew 1974).

군장사회라는 번역어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등의 중국 사료에서 외국의 우두머리를 군장(君長)으로 표기하는 것에서 유래한다(김정배 1986). 이러한 사료에 나타나는 나라들이 초기철기-원삼국(삼한) 즉 옥저, 동예, 삼한 등에 해당되므로, 최근 이러한 용어적 구분도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대개 렌프류(1974)의 용어를 빌려 청동기시대 고인돌 사회를 "집단 성향 족장 사회(Group-oriented Chiefdom)", 초기철기-원삼국 사회를 "개인 성향 족장 사회(Individualing Chiefdom)"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김승옥 2007). 구미 고고학에서도 대개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다.(Earle 1991)


4. 관련 문서[편집]




5. 둘러보기[편집]


한국사의 고대국가 발전단계 분류
성읍국가
(군장국가)


연맹왕국

중앙집권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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