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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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푸른늑대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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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행-제2대
비대위
대행
성재기
한승오
황장수
김인석
제3대
제4대
김인석, 김동근
박형준




전 남성연대 상임대표
성재기
成在基 | Sung Jae-Gi


파일:external/image.donga.com/20120109046_1.jpg

출생
1967년 9월 11일
경상북도 대구시 동구 효목동
(現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사망
2013년 7월 26일 (향년 45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서강대교 남단
묘소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남성현로 1011-208 경산공원묘원
본관
창녕 성씨
신체
키 175cm
가족
박 모 (배우자)
슬하 2녀
종교
유교

심헌(審軒 또는 心軒), 청죽(靑竹)
필명
푸른 늑대, 똥발바쓰, 똥발, ssjjgg1985
학력
대륜중학교 (졸업)
대륜고등학교 (졸업)
영남대학교 (경제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경력
남성연대 대표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초기 활동
3. 활동
3.1. 군 가산점 유지, 부활 운동
3.1.1. 군필자 보상 방안 제시
3.2. 호주제 폐지 반대
3.3. 조성민 친권 옹호 운동
3.4. 국제결혼 지원 활동
3.4.1. 매매혼 주선 논란
3.5. 남자니까? 그게 뭔데?
3.6. 여성 특별공간, 여성 전용 반대 운동
3.6.1. 제천여성도서관 개방 반대 운동
3.6.2. 대구 여성전용칸 폐지 운동
3.6.3. 경기도 여성 전용칸, 여성 전용석 철폐
3.7. 더치페이
3.8. 결혼제도의 모순점 지적
3.9. 결혼제도 비판
3.10. 이혼은 개인 취향
3.11. 성소수자 옹호
3.12. 아청법 비판
3.13. 매춘 합법화 지지
3.14. 기타 활동
3.15. 가정폭력 피해 남성 구제 활동
3.16. 정치적, 사상적 관점과 성향
5. 사후
7. 어록
7.1. 긍정적 어록
7.2. 부정적 어록
7.3. 논란이 있는 어록
8. 출연 방송
9. 비하
10. 관련 영상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기업인[1], 전 남성연대 상임대표.

호는 심헌(審軒 또는 心軒), 청죽(靑竹), 자는 임성(臨聖). 그 밖에도 PC통신 활동기 필명과 초기 인터넷 필명은 ssjjgg1985였고, 나중에는 똥발바쓰, 똥발, 푸른늑대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2006년 11월 26일 남성연대라는 대한민국 유명한 남성인권운동 단체를 설립하였고[2], 방송에서 남성인권 운동가라는 타이틀로 토론 및 예능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여 남성인권을 알리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대구 대륜중학교, 대륜고등학교를 거쳐 1986년 영남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87년 입대하여 11사단에서 병사로 복무하고 1990년에 전역했다.[3] 1992년 영남대학교 졸업 후 보험 회사 외판원으로 활동하다가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서 대구의 양대 나이트클럽이라고 할 수 있는 유명한 유흥업소(참조)와 토마스 맥플라이 공인중개사 사무실 등을 운영했다. 1999년부터 남성 인권 운동에 참여하면서 2006년 사업을 접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2012년 11월에 로복과의 군가산점 부활, 남성 역차별 관련하여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며 토크쇼를 진행하였다.

“남성연대는 18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한다. 박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는 단 하나, 여성부에 대한 시각이 남성연대와 박근혜 후보가 동일하기 때문. 박 후보는 여성부에 대한 문제점을 알고 축소하려 했고, 문재인 후보쪽은 이를 비판하고 있다. 우리 남성연대가 누구를 지지해야 할지는 분명해졌다”


2006년부터는 사재를 털어 남성 인권 운동 단체인 남성연대를 운영하였다. 초창기에는 여성부 폐지 운동본부라는 이름으로 설립했다가 뒤에 2008년 1월 13일부로 남성연대로 이름을 바꾼다.

성재기는 자신의 사비를 들여 성폭행 무고 피해자, 허위 성폭행 신고 피해자, 여성에게 구타당한 남성 폭행 피해자, 이혼 소송 피해자들의 소송 비용과 변호 비용을 지원하였다. 다만 이 과정 중에서 변변한 수입도 없이 운영되던 남성연대가 임금체불 등의 사건을 일으킨 바 있다.

남성 역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 여성 이기주의를 비판하지 않는 여성운동 내부의 부조리함, 남성에 대한 기존 가부장제 역할 강요와 압박, 가정폭력 피해 남성 외면 문제, 사회의 남성성 몰이해 등에 대한 비판 등을 적극적으로 이슈화하였다.#

여러가지 남성들의 역차별 문제가 불거질때마다 시사프로그램의 여성계의 반대편에 서는 패널로서 활동을 하였으나 당시 많은 남자들의 호응까지 이끌어내지는 못하였다.

최근에 재조명받게된 SNS의 남겨진 기록들로 남겨진 논리적인 말싸움으로 보이는 면과는 다르게, 성재기 본인이 의도한건 보다 근본적인 양성의 조화로운 공존이었고 이를 위해 강한 어조에는 강한 어조로 어리석은 질문에는 같이 어리석음으로써 대응한것이 당시 많은 이들에게는 오락거리정도로 취급되어 이에 대한 감정적인 지지 또는 비난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한편 SNS로 화제가 된것에 비해 남성들의 공감은 상당히 부족한 편으로, 성재기 본인의 이름이 알려진것만큼 생활은 여의치 않았고 특히나 그가 의도했던 단체의 후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남성의 지지가 그리 강하지 않았던 건 여성에 대한 차별을 자신의 어머니 세대, 386세대 이상 세대 여성이 받은 차별로 기억하는 대한민국 남성이 적지 않고, 이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약간의 불합리한 부분은 괜찮지 않냐고 생각하는 인원도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드라마 '아들과 딸'의 귀남이 후남이로 대표되던 성별에 따른 극심한 차별대우가 불과 1990년대까지만 해도 흔한 일이었다.

당시 그는 지금 기준에는 상당히 의외의 곳에서 가능성을 보았는데, 그게 일베(일간베스트)다.
2011년 디시인사이드의 일간 베스트글을 모아두는 사이트로 출발한 일간베스트는
초기에는 순수한 커뮤니티로서 수위가 높은 글이 올라오던 커뮤니티 사이트에 불과했다.

초기 일베에 모인 이들은 비합리적인 성평등(기울어진 운동장은 남성의 몫이었다)에 대한
다른 곳에서는 말못할 불만이 성재기 본인의 의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일베 사이트에도 남성연대 후원을 부탁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게시판에는 남성연대에 후원을 했다는 글이 올라왔지만 정작 통장에는 1원씩 몇차례 입금하며 조롱하는 형태가 이어지자 본인은 이 활동을 인생 걸고 하고 있다는 진정성을 알리고자 기획한 이벤트가 후술할 한강 투신이다.

정부 지원(여성가족부 휘하의 위치로서 받는 지원이라 거부하였다), 후원가의 후원 없이 사비로 운영하던
남성연대 운영에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성재기는 이를 타개하고자 2013년 7월 26일 한강에 몸을 던지는 퍼포먼스를 실행하다 그만 사망했다.

자세한 것은 남성연대 대표 한강 투신사건 참조.
7월 27일과 28일은 비가 내려서 강물이 흐려서 수색 3일 만에 시신을 찾았다.
시신은 그가 뛰어내린 곳 남쪽 150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국립수의과학수사에서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허파에 들어찬 다량의 물과 항문에 철근이 꽂혀 생긴 깊은 좌상을 볼 때 사인은 배설구의 외부 충격에 의한 호흡곤란으로 추정.

조문을 해야 마땅한 일베 회원들은 의리도 없이 부조금도 제대로 내지 않았다.

들어온 봉투들을 열어보니
달랑 500원짜리 하나, 더 심하게는 1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들어있던 경우가 많았고, 더욱더 악질적으로는 아예 텅 빈 봉투들도 있었다 한다.
그나마 지폐가 들어있는 경우도 천원짜리, 5천원짜리 등 부조금이라기엔 상당히 부실한 금액이 많았다. 사실상 공짜 육개장만 처먹으러 온 거다 그냥.... 성재기 살아생전에는 비록 십원 한푼도 보태준 적은 없었고 말뿐이지만 그의 의견에 그렇게나 공감하고 사망했을 때는 그렇게나 안타까워했으며 관련 인기글도 여러 개가 올라갔던 사이트가 과연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 3천여명에 달하는 조문객이 찾아왔지만 조의금은 총 6700만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즉 인당 낸 금액이 고작 평균 22333원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그중 2400만원으로는 장례비를 치르고, 남은 돈은 고인의 어머니에게 갔다고 한다.

그가 공감시키고자 했던 성별에 따라 각 인원이 겪게되는 불편함, 차별에 대해서는 최근에 와서야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었다.

성재기 자신이 인생 모두를 걸고 활동하던 당시에는 정작 남성들에게는 '어디서 말 못할 못난 말싸움 대신 해주는 사람' 정도로 여겨졌고, 그마저도 자신이 딱히 불편함을 못 느낀 남성들에게는 정말 못난이 취급을 받았다.

때문에 앞으로도 대한민국 내 성재기와 같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본인 인생 전체를 걸고 자신이 주장하는 바에 무관심한 전체 남성을 위해 목소리를 내줄 사람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되려 메갈리아로 대표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더해갈수록 이 이슈를 악용해 수익을 노리는 소위 '코인털이들'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남성 중 일부는 적의 적은 동지라 생각하고 유사 성재기의 등장을 옹호하겠지만
성재기 본인의 의도는 남성,여성 서로의 불합리한 차별 없는 조화로운 공존 이었지 감정적 막싸움이 아니었다.
단순히 화제가 된 이슈에 코인을 털어가는 유사 성재기가 늘어가고 그들이 지지를 받을수록 그들의 과거 이력이 주장의 당위성 자체를 훼손할 가능성에 주목해야한다.



2. 초기 활동[편집]


대구시 동구 효목동 출신으로, 출신 초등학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삼촌 중 한 명은 경찰관으로 근무하다가 2000년대쯤 정년퇴직하였다 한다. 1983년 2월 대구광역시 대륜중학교와 1986년 2월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그해 3월 영남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로 진학했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의 11사단 GP에서 병사로 복무하고, 병장으로 만기 전역하였다.[4] 1993년 2월 영남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때 만난 모 대학 의과대학 출신 내과의사 박모와 결혼했다. 부인 박모는 내과 전문의였으며, 한때 서울시내 모 대학교 의과대학과 또 다른 대학교 의과대학의 내과 강사와 교수로 활동하였다.

영남대 졸업 후 그는 생산직,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도 활동했고, 2000년대 초반 동구 효목동 효목사거리 근처에서 양대나이트클럽을 운영했다. 2000년부터는 직업소개, 투자상담, 부동산 거래 회사인 토마스 맥플라이 헤드헌팅 & 컨설팅을 창립하여 2006년까지 운영하다가 2006년 11월 28일 매각하였다. 해당 사무실은 얼마 뒤 문을 닫았다.

1999년 10월 군가산점 폐지에 반발하여, 군 가산점을 찬성하는 입장에 서서 여성운동가들과 논쟁, 언쟁을 벌였다. 그 길로 남성 인권 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정채기, 한지환, 이경수, 김재경 등과 함께 군 가산점 찬성 입장론에 섰다. 2004년부터 2005년 3월까지는 호주제 폐지 문제를 놓고 호주제 찬성 입장에 섰다. 정채기, 한지환 등은 호주제도 폐지에 찬성하였고, 성재기는 '형식뿐이고 허울 뿐인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지위조차 없애려 한다' 며 호주제 폐지에 격렬하게 반대하여 이들과 이견이 갈리게 되었다.

그는 대구 시내의 각종 친목 단체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2006년 11월 재산을 전부 처분하고 서울로 올라와 11월 26일 남성연대의 전신인 여성부 폐지 운동 본부를 창설하고, 2008년 1월 2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정식 사무실을 마련하고 남성연대로 이름을 바꿨다. 남성연대는 2011년부터 정식 시민단체로 승인을 받았다. 가두 캠페인과 방송 참여 등의 활동을 했다. 그러나 2012년까지만 해도 그가 출연한 방송은 대부분 방송 편집되거나 출연 거부 등을 당하기도 했다.

2012년쯤 사무실을 영등포구 여의도동으로 옮겼다.


3. 활동[편집]


그는 사회가 남성에게만 책임감과 희생, 헌신 그리고 가족 부양을 강요한다는 점을 여러 번, 반복해서 지적했다. 성재기는 남녀평등, 양성평등인데도 남자에게 가족 부양과 생계를 강요하면서 권리만 나눠 가지려 한다며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들보다도 이런 이기적인 여자들이 남자들을 힘들게 하고, 서럽게 한다며 반복해서 언급하였다.

1999년 이후에는 인터넷 활동이 대부분이었지만 2006년 11월 무렵에는 오프라인에서도 집회 등을 활발하게 하며 대중에게 인지도를 알렸고, 2008년 1월에 남성연대가 정식 시민단체로 승인된 이후에는 지상파와 언론에도 모습을 드러냈고, 적극적으로 행보를 이어나갔다.


3.1. 군 가산점 유지, 부활 운동[편집]


1999년 군 가산점 폐지가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남성 인권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99년 10월부터 성재기는 한지환, 정채기 등과 군가산점 폐지 운동에 참여했다. 이화여대생 6명이 연세대생 남성 1명과 함께 군 가산점에 헌법소원을 내자 성재기는 한지환, 정채기, 이경수, 김재경[5] 등과 함께 군필자에 대한 보상이 전혀 없고 군복무를 가볍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를 예로 들어가며 군 가산점 폐지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1999년 12월 헌법재판소는 군 가산점 폐지를 합헌 결정을 내린다.

군 가산점 폐지가 합헌결론이 난 뒤부터는 군 가산점 부활운동에 나섰다.


3.1.1. 군필자 보상 방안 제시[편집]


성재기는 이후 군 가산점 부활을 비롯하여 군 복무를 마치고 나온 남자들의 경력단절을 보상할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하였다. 그가 주장한 보상방법은 군필자에게 대학 등록금, 학비를 감면, 면제해 주는 것, 장학금 지급, 군필자들에게 등록금을 지원해주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남성들은 아무것도 못 받는 차별이라는 반박에 부딪혔다.

성재기는 군 가산점이 아니더라도 군필자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그는 또 병역을 수행한 자에게 제대 전날 수고비나 위로금을 주는 것은 어떠냐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그 전에 우선 군인 사병들 월급부터를 그해의 최저시급선 수준까지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병역 위로금 지급, 군필자 장학금 지급, 군필자 학비 감면, 병사 생활환경 개선 요구, 병사 월급을 현실적인 수준-최소 그 년도의 최저시급 이상으로 줄 것을 요구했다. 병장하사의 월급이 20~30배 차이 나는 것도 부당하다며 10배 차이 정도로 병장-하사간 월급 격차를 최소한도로 줄이는 것도 제시하였다.

군 가산점에 대해 군 가산점은 공무원시험 응시자가 아닌 이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그는 군 가산점과 그 밖에도 병역에 대한 포괄적인 보상 방안과 국민적 동의를 요구했다. 그러나 반대 측에서는 군대 가지 않는 남성들이 불이익을 당한다,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는 남성들에게 불이익이 간다며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하였다. 심지어 같은 남성들마저 성재기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30대 이상의 이미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은, 자신들은 혜택을 보지 못했는데 아랫세대들만 혜택을 보는 게 말이 안 된다며[6] 뒤에서 성재기에 대한 인신공격을 했다. 심지어 성재기가 군대를 약화시키려 한다는 인신공격성 댓글들과 남성연대 사무실 및 성재기 집으로 항의, 욕설 전화가 날아오기도 했다.


3.2. 호주제 폐지 반대[편집]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논란이 된 호주제 폐지 논란 시 성재기는 정채기, 한지환 등과 의견이 갈리게 되었다.

군 가산점 부활론과, 병역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보상(병역 위로금, 병사 생활환경 개선 요구)에서는 정채기, 한지환과 입장이 같았으나 2004년~2005년 호주제 폐지를 놓고 정채기, 한지환 등과 갈라지게 되었다. 정채기, 한지환은 호주제가 가부장제의 상징으로 본 반면, 성재기는 형식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마저 없애려 든다고 격렬하게 반발했다. 정채기, 한지환 등은 호주제 폐지의 취지에 다소 동의하는 입장이었고, 성재기는 가부장제는 이미 소멸했는데, 상징적인 의미마저 없애려 든다며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였다.


3.3. 조성민 친권 옹호 운동[편집]


최진실의 사망 후, 자녀들의 친권을 조성민[7]이 아닌 최진실의 가족들에게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최진실과 조성민이 이혼하는 과정에 있었던 폭력이나, 최진실에게 간통 등의 이미지를 뒤집어 씌우려다가 발각된 조성민의 이미지 실추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성재기는 조성민에게서 친권을 박탈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주장하며 조성민 친권을 옹호하는 대자보, 팜플릿을 들고 거리 홍보에 나섰다.

2008년 10월 29일에는 조성민 친권 반대 카페가 생기자, 성재기는 이 조성민 친권반대 카페에 찾아가 조성민의 친권을 반대하는 페미니스트 및 네티즌들과 논쟁을 벌였다. 성재기는 조성민이 아이들 친아버지인데 조성민의 아버지로서의 권리는 존중받아야 된다고 따지다가 카페에서 강퇴당했다.

그해 11월 11일 오전 11시에는 연예인, 방송인, 국회의원, 시민단체 회원들 등이 참여한 한부모 자녀를 걱정하는 진실모임이 열려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18층 기자실에서 조성민의 친권 회복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8] 기자회견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성재기는 단문의 성명서를 들고[9] 기자회의실을 찾아갔다. 그러나 출입구에서 강제 추방당했다. 성재기는 이들을 만나러 갔지만 경찰관과 경호원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성재기는 당일 오전 9시부터 서울 광화문 광화문 프레스센터 건물 앞에서 조성민의 친권은 정당하다며 1인 시위를 하였다. 오전 11시에 기자회견이 열린다 하자 성재기는 18층 외신기자실에 들어가려 하다가 실랑이가 벌어졌다. 곧 제지당하고 경비원들에 의해 건물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해 11월 15일에도 여의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근처 산업은행 정문에서 조성민 친권 반대 거리집회가 개최되자, 성재기는 혼자 여기 찾아가서 반대, 항의하려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11월 19일 조성민이 방송 언론에 친권 포기를 선언할 때까지 그는 여성단체, 시민단체들에게 조성민의 아버지로서의 친권을 존중하라고 주장했다. 이상과 같이 성재기는 조성민의 잘잘못을 떠나, 그가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점을 존중해줄 것을 홀로 외쳤지만 결국 외면, 무시당했다. 그의 주장을 당시 언론에서 다뤄주지 않았다.


3.4. 국제결혼 지원 활동[편집]


2011년 1월 3일부터 2013년 1월 31일까지 성재기는 남성연대 내에 우즈벡, 카자흐, 베트남, 캄보디아 등 국적 여성과의 국제결혼 지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비용은 받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어떤 돈이나 주선 지원금 없이 자비로 국제결혼을 지원하였다. 주로 우즈벡, 카자흐, 베트남, 캄보디아 등의 여성들이었고, 가출 의도가 있는지 여부도 상세히 파악하였다.

그중 중소기업에 다니는 남성의 결혼은 일부 성사되었지만, 장애인 남성 중매결혼과 농촌총각 중매결혼은 호응하는 여성의 수가 적어서 사실상 실패했다. 그러나 몇 건의 국제결혼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국제결혼 업체들의 항의와 소송에 직면했다.

2013년 1월 31일 국제결혼 업체들의 거듭된 항의와 소송 끝에 그는 국제결혼 사업 및 장애인 남성 중매결혼 사업의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3.4.1. 매매혼 주선 논란[편집]


국제결혼 지원활동에는 매매혼 주선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이에 성재기는 "국제결혼만 매매혼이라 말하지만 남자가 데이트 비용 모두 낸다. 남자가 안정된 직장을 가져야만 결혼한다. 남자가 집 사오고 전세도 마련하고 차도 산다. 그럼 이건 매매혼 아니냐? 남자들이 데이트비 집세 집값 차값 다 쓰는데 이건 돈쓰는 게 아니냐. 국제결혼만 매매혼이냐 성재기의 국제결혼을 매매혼으로 디스하려다가 되려 결혼비용, 데이트비용 남자가 다 내는 것, 여자는 직업 없어도 결혼하지만 남자가 직업 없으면 결혼할 수 있느냐." 고 반박했다.

거기서 나아가 "여자는 직업이 없으면 신부수업을 말하면서, 남자가 직업 없으면 바보취급 하는 것도 성차별 아니냐" 고 항변했다.


3.5. 남자니까? 그게 뭔데?[편집]


남자다움이 뭔가? 남자다움의 기준이 뭔가?


남자는 치사하면 안 되는 이유는 뭔데?


성재기는 '남자니까'라는 말은 남자들에게 상당히 부담스럽고 폭력적인 단어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자' 라는 역할을 왜 멋대로 정하느냐며 남자, 여자, 지위, 직업 이전에 먼저 한 사람으로 개인으로 봐 달라고 설명했다.

성재기는 남자는 쪼잔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라며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이 남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지적했다. 남자가 아니라 인간이 왜 쪼잔하냐 라고 지적해야지, 남자는 쪼잔하면 안 된다는 것이 남자들에 대한 성 역할 강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견해에 대해 2000년대 초 당시 중년층 이상은 찌질하다, 못난 자의 변명 정도로 여기며 비웃었다. 그가 어려서 날라리들이나 동네 건달들에게 맞고 다니지는 않았느냐며 인신공격적인 비난도 돌아왔다.

성재기는 남자다움이 뭐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남자다움의 기준이 뭔지, 그 남자다움은 누가 정하고 기준이 뭐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아직 2000년대 초였던 당시, 그의 이런 주장은 안타깝게도 인터넷과 현실 모두에서 그저 '바보 같은 주장, 궤변, 억지, 등신 같은 소리' 등으로 매도당하고 인신공격과 조롱의 소재가 될 뿐이었다.


3.6. 여성 특별공간, 여성 전용 반대 운동[편집]


남자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이유로 여성 특별공간, 여성 전용 공간 설치에 반대하였다.

성재기는 여성 전용 공간을 만들려면 그만큼 남성 전용 공간도 만들어 달라며, 남성 전용 공간을 만드는 조건부로 여성 전용 공간을 인정하겠다고 주장했다.


3.6.1. 제천여성도서관 개방 반대 운동[편집]


2012년 7월 7일~7월 8일과 7월 28일, 2013년 1월 7일에 제천여성도서관 항의 방문과 퍼포먼스를 했다.

2012년 5월 성재기는 남성연대 게시판에 제천 시민인 20대 남성 대학생의 제보와 또 다른 20대 제천 남성의 사진 촬영 제보를 받고 제천여성도서관을 항의 방문했다. 이들은 제천여성도서관 기증자가 가난한 학생들에게 독서 공간, 공부할 공간을 제공해 달라 했지 여성 전용 공간을 만들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근거로 제시했다.

2012년 7월 7일 남성연대 회원 한승오, 김동근, 김인석, 손승민 등을 동행하고 차량으로 제천 여성도서관을 방문했다.

이에 제천 지역 시민단체와 지역 유지들이 와서 외부인이 왜 끼어드느냐고 몸싸움을 했고, 성재기는 제보자들이 제보한 내용을 근거로 기증자가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공부할 곳을 마련해 달라 했지, 여성에게만 제공하라 했느냐고 반박했다.

김인석, 김동근, 한승오 등 남성연대 회원 10여 명을 데리고 항의 방문을 했고 확성기, 현수막 퍼포먼스 등을 하기도 했다. 1차 항의 방문은 도서관 진입이 제지당하자, 7월 8일까지 도서관 주변에서 펼쳤다.

7월 7일~7월 8일 1차 방문과 7월 28일 2차 방문 때에는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사전 집회 신고를 접수하고 출동한 경찰이 있어서 폭력 사태로 번지지는 않았다.

7월 28일에도 차량으로 제천여성도서관을 방문, 입구에서 제지당했다.

성재기는 제천여성도서관 폐지 내지는 남성 개방의 사유를 밝혔다.

1. 여성도서관부지 기증자가 여성을 위한 도서관을 쓰라고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10]

[11]

2.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에 여성만 이용하게 하는 것은 다른 국민들에 대한 차별이다.

3. 제천여성도서관에 남성 출입 전면금지는 아이가 있는 아이 엄마들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성재기는 만 5세 미만의 아들을 둔 엄마들을 배려하지 않는 것도 제천여성도서관의 문제점이라고 언급했다.

성재기는 기증자의 유언에 여성만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라는 내용이 없었음을 지적하며 공론화시켰고, 국가인권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등에 진정서를 보냈다.

2013년 1월 2일 그는, 그해 2월 1일부 제천여성도서관과 제천시청을 상대로 행정소송과 인권 침해 소송을 선언하고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런데 1월 9일 제천여성도서관 측에서 1층에 남성의 출입을 허용하면서 재진입 기도와 행정소송 준비를 전격 철회했다.


3.6.2. 대구 여성전용칸 폐지 운동[편집]


2013년 1월 14일 대구지하철공사의 대구 도시철도 여성전용칸 설치계획 제보를 접수한 뒤 공사에 3일간 항의 전화, 항의문을 보냈고 캠페인을 벌여 대구시내 지하철의 여성전용칸 설치를 시행되기 전에 전면 철회시켰다. 아래는 성재기가 대구지하철공사 사이트에 넣은 공문.

1. 여성전용칸이 만들어지면 오히려 남성의 비율(60%)이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은 줄어들게 된다. 같은 지하철요금을 내고 40%의 여성이 지하철 6칸을 모두 자유롭게 차지하고 60%남성은 5칸안에 좁게 몰려있어야 하는가. 우리도 여성이 편하고 안전할 수 있다면 찬성한다. 하지만 그래서 남성이 피해를 입게 된다면 반대한다. 정 여성전용칸을 만들겠다면 여성은 여성전용칸에만 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2, 성추행 위험을 근거로 들었는데 소수의 성범죄자 때문에 모든 남성을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하여 120만명이 넘는 대구남성과 타지역에서 대구지하철을 이용하는 남성승객에게 피해를 입히겠다는 것인가.

3.임산부, 할머니 우대는 이미 노약자석으로 해결 되고 있으며 만약 부족하다면 노약자석을 늘리면 될 일이다. 나이 든 남성과 함께 앉는다고 그들이 피해를 보는가.

4.임산부와 동행한 남편은 다른칸에 타야 하는가.

결론 - 상기 내용을 근거로 남성연대는 대구지하철 여성전용칸 추진에 대해 반대하며 만약 이를 추진할 시에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이 정책을 무산시킬 것이며 뿐만 아니라 이 정책의 모든 관련자를 끝까지 추적하여 책임을 지게 할 것이다.



3.6.3. 경기도 여성 전용칸, 여성 전용석 철폐[편집]


2008년 5월 20일부터 경기도 제2청사경기도에서 파주-인천 노선 등 경기도 북부를 오가는 시외버스 노선 4개에 대해 6월 1일부터 여성전용 좌석제(핑크존)를 도입해 7개월간 시범 운영 계획을 발표했다. 2008년 6월 1일 성재기는 제2청사에 전화해, 버스 여성전용 좌석을 8개씩이나 설치하느냐며 폐지하라며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13년 2월 1일 어느 네티즌이 다시 여성전용 좌석제를 성재기에게 제보하였다. 파주시 시외버스 3000의 8석이 여성 전용인 것과, 경로석이나 장애인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월 13일 그는 버스회사 신성교통에 민원을 신청하였으나 경기도의 정책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후 성재기는 신성교통과 경기도 제2청사에 계속 민원글을 남기거나 전화하여 여성전용 좌석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성교통 외 경기도 내 버스회사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경기도 측으로부터 외압에 의해 여성전용 좌석을 시범 운영 중이며 회사 임의로 정책을 그만둘 수 없다는 답을 듣자 그는 경기도청에 전화해서 버스회사에 외압을 행사했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경기도 측에 문의한 결과 그런 사례는 없었다는 답변을 받았다.

3월 14일 트위터에 "시내외 버스에 여성전용 좌석이 납득이 가십니까?"라며 "이런 말도 안 되는 여성전용 좌석을 남성연대가 전부 없앨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3월 15일부터 꾸준히 경기도청과 버스회사들을 상대로 성재기는 여성전용 좌석 폐지 또는 노약자 전용석, 장애인 전용석 신설을 요구했다.

성재기는 트위터에 여성전용 좌석을 유지하고 싶다면 남성전용 좌석도 만들라고 촉구했다. 4월 8일 오후 "현재 경기도 내 시외버스의 여성전용 좌석을 폐지하기 위해 업체들과 협의 중"이라며 "경기지역 외에도, 시외버스에 여성전용 좌석이 운용되는 곳을 아시면 제보 바란다"고 트윗했다.

결국 계속된 항의 끝에 2015년에 여성전용 좌석을 폐지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3.7. 더치페이[편집]


그는 여성들이 연애, 데이트에서 더치페이를 하려 하지 않는다고 계속 반복해서 문제 제기했다. 성재기는 "배려는 그만큼 상대방의 입장, 처지를 생각해주는 마음씨"라면서 연애, 데이트에 아쉬운 것은 남자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여자친구가 남자친구 배려하는 것에 감동받을 남자들이 더 많지 그런 거에 자존심 상해할 남자가 더 많을 거 같냐"고 반박, 여친의 그런 작은 배려를 고마워할 줄 모르는 남자라면, 인간적으로 사귈 가치도 없는 찌질한 인간이라는 것이 그의 반론이었다.

201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연애, 데이트 시 남녀 더치페이를 하는 일이 대학가, 학원가에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재기의 더치페이 주장은 한동안 찌질하다, 못났다는 평을 들었다.


3.8. 결혼제도의 모순점 지적[편집]


성재기는 결혼은 인륜지대사라는 말에 대해서도 계속 태클을 걸었다. 성재기는 결혼은 거래일 뿐이라며, 결혼이 인륜지대사가 되려면 남자의 직업이나 경제적 능력을 우선시하기보다는 남자의 인간 됨됨이, 성실성, 사람 됨됨이를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자가 남자의 능력, 재력을 보고 남자를 선택하는 것을 매매, 거래와 다른 점이 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에 의하면 거래에 불과한 현 결혼제도를 사랑 등으로 미화하는 것도 억지라고 보았다. 성재기는 남자의 직업과 경제적 능력을 따지려면 그에 걸맞게 여자들의 직업과 경제적 능력도 같이 따져야 된다. 여자도 동등하거나, 거의 비슷한 조건을 가져야 되지 않느냐, 여자는 몸만 있어도 시집갈 수 있다 이것이 가장 큰 성차별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와는 별도로 성재기는 점차 사회의 발전과 함께 각종 편의시설의 발달, 인간관계 스트레스, 개인주의의 확산 등으로 2020년 이전에는 한국 사회에 독신자와 미혼자 수가 많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3.9. 결혼제도 비판[편집]


성재기는 결혼과 이혼이 쉬워야 된다고 지적했다. 성재기에 의하면 한국은 결혼과 이혼의 기준이 너무 엄격하며, 개인의 행복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에 사람 됨됨이와 장래성, 성실성을 보던가 서로 마음 맞는 사람끼리 하는 것이지, 주변의 간섭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 그의 주장.

성재기는 결혼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남의 남편감, 남의 신부감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도 결례 수준의 오지랖이라고 지적했다.

성재기는 자식 결혼에 부모가 간섭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너무 나간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2000년 무렵 성재기는 작은 결혼식을 주장했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은 친척들 줄줄이 불러내는 것도 번거롭고, 오고 가야하는 친척들도 부담스러운 일이며, 결혼 축의금 같은 돈문제도 확실히 부담스럽다며 작은 결혼식, 결혼 과정을 간소화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의 이런 주장은 바보같은 생각, 한국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발상이라며 비웃음을 샀다.

3.10. 이혼은 개인 취향[편집]


성재기는 이혼은 개인 취향이라며 존중하라취존중고 지적했다.

이혼은 잘못이라는 정채기 교수의 주장과 이혼 후 자녀들이 받을 상처를 주장하는 정채기 교수의 기고문 발표 직후, 성재기는 이혼도 취향이다, 이혼도 떡 먹고 물 먹고 숨 쉬듯이 자유로워야 된다며 반박하는 반론을 제기했다.

성재기에 의하면 이미 1990년대 이후로 이혼이 급증하는 마당에 이혼을 개인 취향으로 인정하고 넘어가자는 것이었다. 이혼을 나쁘게 본다 해서 이혼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혼을 나쁘게만 보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 그는 결혼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결혼하고 이혼하듯, 이혼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이혼할 수 있어야 된다, 재혼도 쉬워야 된다고 지적했다.

3.11. 성소수자 옹호[편집]


성재기는 동성애도 개인 취향이라며 동성애자들을 차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조장은 안 되지만 성적 소수자들은 약자이므로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어야 하고 권리를 배려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지인이 말하길, 그가 대구 동구 효목동에서 양대클럽을 운영할 때 여기에 게이들이 왔다고 한다. 당시 게이들을 보면서 느낀 동정심과 연민이 동성애자 차별을 반대하게 된 나름의 원인. 그런 신념 때문인지 그는 가족에게 커밍아웃한 뒤 쫓겨난 게이, FTM, MTF들을 안타깝게 여겨, 이들에게도 남성연대 숙소와 자신의 오피스텔을 개방하였다. 동성애자들을 내쫓자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 그들도 남성이며, 우리 사회에서 가장 박해받고 소외받는 약자들이라고 반박했고 회원들에겐 게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먼저 미워하거나 구박하지 말라고 말했다. 다만 상호 교차성이 아닌 지라 레즈비언에 대해서는 매정했다.

그가 게이트랜스젠더들을 동정하는 것을 두고 그가 동성애 성향이거나 트랜스젠더 성향일 것이라는 악성 인신공격이 유행했다. 한때는 그가 아내의 용돈을 받아서 생활한다, 아내의 재산으로 단체를 설립했다는 등의 소문과 인신공격이 돌기도 했다.

정작 그의 뜻을 잇겠다는 수많은 반페미 단체들은 호모포비아 성향을 강하게 띈다.


3.12. 아청법 비판[편집]


아청법 도입전 공청회에서 아동청소년 성범죄에 반대하는 미친 인간이 어디 있냐며 바바리맨을 잡아야지 바바리를 남자에게 못입게 해서는 안된다며 아청법에 대해 강하게 비판을 했는데 이는 안티페미들 사이에서 유명한 어록처럼 되었다. 또한 야동 애니가 남성들의 성충동을 증폭시켜서 성범죄의 원인이 된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대해 무식한 소리라며 비판했다. #


3.13. 매춘 합법화 지지[편집]


성매매특별법을 폐지하고 매춘을 제한적으로 합법화시키는 것에 찬성했고 이를 두고 여성단체회장과 토론까지 벌였다. #


3.14. 기타 활동[편집]


  • 성폭행 무고, 허위 누명 피해자들의 신고를 접수받고, 법률 상담과 변호사 선임 등을 지원, 주선하였다.
  • 남성의 상담전화를 개설하여 부인에게 매맞는 남편, 부당한 이혼 소송을 당한 남편을 상담,치료하였다.
  • 2010년 5월 8일부터 13년 어버이날까지 어버이날에 아빠, 아버지들의 고생도 알아 달라는 피켓 시위를 서울시청 광장에서 피켓을 들고 매년 했다.
  • 싱글 대디, 싱글 파파 가정에 방문하여 상담했다.
  • 로복과 토크쇼를 2012년 11월에 진행했다.


3.15. 가정폭력 피해 남성 구제 활동[편집]


그는 울산에서 올라온 매맞는 남편, 온몸에 멍이 들었지만 자녀들 때문에 차마 이혼 못 한다는 남성을 만나 사연을 듣고 2011년부터는 강남구 삼성동 남성연대 숙소를 개방하여, 가정폭력 피해 남성, 아내의 외도 피해 남편들, 가정에서 쫓겨난 남편과 아들, 오갈 데 없는 남성의 쉼터로 개방하였고, 역삼동과 송파구 석촌동, 2012년 5월부터는 영등포구 영등포동 등지에도 남성의 쉼터 숙소를 개설했다.

숙소 개설 과정에서 땅값이 떨어진다는 지역 주민들의 반대와 집단 항의 방문으로 마찰을 빚기도 했으나 그는 가정폭력, 외도 등으로 집을 나온 남자들이 잠재적 범죄자는 아니라며 이들을 설득하고 강행했다.

그는 주로 가정폭력 피해 남성과 가출 남편, 가출 청소년 남성들의 심리치료와 상담, 각종 진료비용을 지원했고, 가정폭력 피해 남성들의 소송비와 변호사 선임도 도와주었다. 물론 성재기 자비로 벌인 것이다.

남성연대의 삼성동과 송파 석촌동 사무실에 남성의 쉼터를 운영, 가정폭력 피해 남편, 가출 남편, 청소년 남성들의 임시 숙소를 제공하였고 2012년에는 영등포 남성연대 숙소도 개방하였다.

2013년 4월 말부터 5월 15일까지 경영난으로 인해 잠시 문을 닫았던 남성연대 숙소는 5월 16일부터 재개방했다. 심지어는 남성의 쉼터 숙소에 일부 회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남성 동성애자들도 받아들였다.


3.16. 정치적, 사상적 관점과 성향[편집]


그는 보수주의자유주의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성향을 보였고, 페미니즘 등을 급진주의, 급진 과격파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동시에 그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는 굉장히 싫어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 그는 종종 비꼬거나, 정치적 올바름을 설파하는 청년층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그 밖에 성재기는 한국사회는 점차 이중잣대이기주의적인 인간들로 인해 개인주의냉소주의, 인간불신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고 보았다. 한국 이외에도 일정 부분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한 중진국 이상의 국가에서 개인주의와 삶의 질 추구 현상, 냉소주의, 개인화, 인간불신 현상 등이 보편적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보았다. 동시에 각종 미신과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이비 종교 같은 사상들의 출현과 그에 휩쓸리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라 내다봤다. 그런 사이비 종교나 미신은 가만히 들여다 보면 허황된 것인데도, 뿌리 없이 흔들리는 갈대처럼 휩쓸린다며 뿌리 없는 갈대이기에 그런 것에 많이 휩쓸릴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다량의 독서, 책을 통해 다양한 생각과 영혼을 접하거나 혹은 스스로 생각하고 사색하는 습관을 길러야 됨을 역설했다. 그는 평소 보수적인 관점에서 기존의 전통과 질서는 나름 그만 한 이유와 가치가 있음을 존중해야 된다고 하면서도, 부당하다 싶은 권위나 전통, 관습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 인간이 욕심 많고 식욕, 성욕, 삶의 질, 돈 욕심 등 인간의 삶 자체가 욕망이고 욕심임을 인정할 때가 되었다고 보았다. 인간의 삶 자체가 욕심과 욕망 덩어리이고,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 자기 자신이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사회적인 갈등과 문제점 상당수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문명의 이기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인간의 정신과 영혼이 고차원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그는 문명의 발전이 무조건 이점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하였다. 그에 반해 그릇이나 능력이 되지 않는 인간들도 많아서, 문명이 편리해질수록 어린아이 같은 사고방식, 사춘기 청소년 같은 정신 세계, 유아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들도 그에 반비례해서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소설가 이문열이윤기의 팬이기도 했다. 이문열과 이윤기의 작품을 주로 읽었고, 이문열의 팬 클럽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그 밖에 강용석 팬클럽, 전원책 팬클럽의 멤버이자 전원책 팬 클럽의 게시판 관리자로도 활동했다.

알려진 취미로는 등산, 낚시, 국내 여행, 사진 촬영 등이었다.


4. 사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성재기 한강 투신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사후[편집]


7월 29일 양성평등연대(구 남성연대) 홈페이지는 이날 오후 성 대표의 시신 발견 소식이 전해지자 접속이 폭주해 2~3시간가량 다운됐다가 복구되었다.

2013년 7월 30일 성재기의 서울 마포구 마포대교 아래 간이 빈소에는 조문객이 방문해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부산 대전 등 전국 각지에도 분향소가 설치돼 빈소를 직접 찾아가지 못하는 시민들이 성 대표의 죽음을 추모했다.

파일:성재기빈소복숭아.jpg
하지만 간이 빈소에 복숭아가 올라온 것으로 웃음거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복숭아가 귀신을 쫓는 과일이라는 속설이 있어서 고인이 생전에 매우 좋아했거나 제사상에 올려달라고 하지 않는 이상 제사상에 올리는 것이 금기시된다. 마찬가지.


6.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성재기/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어록[편집]



7.1. 긍정적 어록[편집]


여자가 길에서 울면 안타까워 하면서도 남자가 울면 다들 찌질하다고 비웃거나 욕을 한다. 이게 문제다. 남자다움의 기준이 뭐고 남성성이 뭐며 남자들에게 한 가지 역할을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남자도 건강 나쁘고 약한 남자 있다. 이게 왜 잘못된 거냐.


여자는 거리에서 울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거리에서 운다면 바로 못난 놈, 찌질이 등등 비난과 야유가 가해집니다. 이것이 무슨 남녀 평등이란 말입니까? 남자는 슬프면 안 됩니까?


여성들의 과도한 노출은 성범죄와 직접연관이 없다면서 '야동, 애니'와 같은 표현물이 남성들의 성충동을 범죄화시킨다는 주장이 과연 납득이 됩니까? 아동, 청소년을 성범죄로부터 보호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바바리맨을 잡아야지 바바리를 못 입게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남자도 마음껏 거리에서 눈물 흘릴 수 있는 그날이 오면, 그날이 진정한 남녀평등을 이루는 날입니다.


남자가 넓은 가슴으로 여자를 안아준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자도 넓은 가슴이 되어 남자를 안아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남녀평등이고 양성평등인 것입니다.

2011년 12월 24일 저녁, 서울특별시 시청광장에서


제가 남성연대 대표로서 마지막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이거 억지로 끌고가는 사람들, 이거 개정 안하고 억지로 찬성하고 밀고 가는 사람들! 제가 마지막까지 그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남자들도 마음껏 거리에서 울어도 되는 그날을 위해 우리는 뛰고 또 뛰어야 합니다.

2011년 5월 8일 시청광장에서


지금 대한민국을 개판으로 만드는 놈들은 누구입니까? 남자는 야동만 다운 받아도 평생 성범죄자로 만들고, 여자는 자기 나체,음란 셀카를 찍어서 유포해도 법대로 하면 형이 무거울까봐 차마 처벌을 못한답니다.#


온 나라가 여자 편을 드는데, 나라도 남자 편을 들어야지.#


누가 틀렸다고 얘기하지 말자. 여러분은 여성쪽에, 나는 남성쪽에, 서로 서 있는 위치가 달랐을뿐


좌우 피터지는 동안, 여성계는 등 따시고 배불렀다. 페미니즘이 남녀평등을 목표로 한다? 천만에, 그네들이 원하는건 여성권력이고 복수다. 페미니즘은 이제, 남자가 여자앞에서 담배피면 성폭력이고 자발적인 성판매여성도 피해자라 주장한다. 당신이 모르는새 여기까지 왔다


믿고 싶다. 남성을 일으킬 수 있다니.

# 한강에 투신하기 직전에 올린 마지막 트윗. 결국 돌아오지 못하면서 유언이 되었다.



7.2. 부정적 어록[편집]


어이 무뇌아들아, 두 경우[12]

가 죄질이 같으면 일반적인 정숙한 여성들에게 훨씬 막대한 피해인거야.이해안돼?이 또라이들아?여긴 전부 짧은다리,긴허리에 미니스커트 처입고 가슴풀어헤친 만취한 상태로 골목에 쓰러져 잘 가능성 많은 년들만 몰려있는거야?[13]

한 트윗 : 이사람진짜멍청한거아님??? 헐ㅡㅡ 여자가 밖에서 옷벗든 춤을추든 뭔상관이야? 뭘하든간애 변태적인 남자들이 문제인건 내 동생도 알겠다ㅋㅋㅋ[14]

너는 상관없다[15]


니수준에 맞게 욕좀 할려다 니사진보고 참는다. (욕설이 담긴 한 트윗을 보고)



7.3. 논란이 있는 어록[편집]


나는, 진심으로 한국의 젊은남자들이 불쌍하다. 나라도 남자가 지켜, 가족부양도 남자가 해, 여자도 남자가 보호해. 대체 여잔 뭐하나? 맞벌이? 한국에서 돈못버는 남잔 사람취급 못받는다. 즉 여자의 맞벌이는 선택, 보조적이다. 출산? 세계 꼴찌다. 여잔, 무슨 생각으로 사는가?

한 트윗 : 당신 어머니도 여자세요. 그렇게 말하면 당신 어머니까지 포함되는거 아닌가?이사람 디게 불효자네ㅋ당신 어머니가 뭐했는지 생각을 해보세요.그냥 놀고드셨나

우리 어머니가 니편이겠냐?


생리통도 장애등급 받을 기세구만.

한 트윗 : 장애등급받고그런소리하시죠

내 발기는 정상이다.


방금 임신한 것처럼 태연하게 노약자석에 앉는 여자들, 그러지 마라.

한 트윗 : 꼬우면니도임신해

니가 발기하면 내가 임신을 하마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 셋 중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당신 인생이 파탄 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난 된장녀가 당신 삶을 파멸시킬 수 있는 확률은 거의 100%다.



8. 출연 방송[편집]


  • 2012년 tvN 곽승준쿨까당 게스트
  • 2013년 채널A 서세원 남희석의 여러 가지 연구소
  • 2013년 tvN 대학토론배틀4 - 군가산점제 토의 스페셜 게스트[16]
  • 2013년 JTBC 여보세요 게스트


9. 비하[편집]


사후 초기에는 극단적인 성향으로 유명한 일간베스트 저장소, 국내야구 갤러리 등에서 성 고재기, 고재기돈, 고재기밥으로 비하를 당하다 시간이 흘러 남성혐오 성향을 가진 여성시대, 워마드 등의 사이트에서 고인드립을 당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이곳 참조. 2023년 현재도 트위터나 여초 커뮤니티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재기하다'라는 단어 등으로 고인 모독을 당하고 있다.


10. 관련 영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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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0년부터 6년간 헤드헌팅 회사를 운영했다.[2] 최초는 아니다. 한국 최초의 남성인권운동단체는 1994년 정채기 전 대학교수가 설립했다가 후에 문 닫은 한국남성연구회이다.[3] 11사단은 후에 그의 후계자인 김동근이 2009년부터 2011년에 병사로 근무한 부대이기도 하다.[4] 일부 군대시절 GP에서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되기도 했다.[5] 가수 2명과는 동명이인인 남성이다.[6] 똥군기가 사라지기 힘든 이유, 군 인권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보상심리 때문이다.[7] 공교롭게도 성재기와 같은 해에 죽었다.[8] 당시 진실모임은 여성학자 오한숙희와 호주제폐지시민모임 대표 고은광순 등의 주도로 배우 손숙, 김부선, 권해효, 방송인 허수경,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 작가 공선옥, 만화작가 장차현실 등 사회 각계 인사들이 대표로 참여하고 수백명의 동의 서명을 받고 발표하게 된다.[9] 남성연대 카페에 올렸던 글을 문구를 수정, 순화하여 몇 장의 성명서로 작성해서 들고 갔다.[10] 제보자가 보낸 사진 자료 등을 첨부[11] 기증자 고 김학임씨는 왜 여학생만 하냐고 여학생 얘기는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12] 이전 트윗에서 했던 "대낮에 침입한 괴한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우"와 "새벽에 만취한 채로 옷을 풀어헤친 상태로 골목에 쓰러져 자다가 성폭행 당한 경우"를 말한다. 다만 이에 관련해서 대검찰청 트위터는 "전자에 주거침입죄가 추가될 뿐이며, 청순한 여성이 더 보호받는다거나 자유분방한 여성이 덜 보호받는다거나 하진 않는다"라는 답변을 했다.[13] 참고로, 이 발언을 했다가 대검찰청 대변인 트위터로 반박당했다. #[14] 물론 밖에서 함부로 옷을 벗거나 하는 행위는 범죄다.[15] 해당 트윗을 한 여성의 외모를 겨냥한 발언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 외에도 이런 류의 인신공격성 발언을 자주하는 편이었다. 본인도 인신공격 피해자였는데 말이다. 이로 인해 비판도 많이 받았다.[16] 남성연대 대표 한강 투신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촬영한 마지막 방송으로 당시 CJ 측은 유족들과 협의 후에 방송을 내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