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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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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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제6대 황제
聖宗 | 성종

묘호
성종(聖宗)
시호
문무대효선황제(文武大孝宣皇帝)
연호
건형(乾亨, 982년 9월 ~ 983년 6월)
통화(統和, 983년 6월 ~ 1012년 10월)
개태(開泰, 1012년 11월 ~ 1021년 11월)
태평(太平, 1021년 11월 ~ 1031년 6월)

거란어
야율(耶律)

거란어
문수노(文殊奴)
중국어
융서(隆緖)
생몰 기간
972년 1월 16일 (음력 971년 12월 27일) ~ 1031년 6월 25일 (음력 6월 3일) (59세)
재위 기간
982년 10월 14일 ~ 1031년 6월 25일
(48년 8개월)

1. 개요
2. 생애
2.1. 외정
2.2. 내정
2.3. 말년
3. 사후의 막장 황실사
4. 평가
5. 대중매체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요나라의 제6대 황제. 거란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었다.


2. 생애[편집]


거란식 이름은 야율문수노(耶律文殊奴)로 문수보살의 종이라는 뜻이었으며, 한식(漢式) 이름은 야율융서(耶律隆緖)였다. 12세의 어린 소년일 때 즉위하여 역사상 유명한 여걸인 승천태후 소작섭정을 받았으며, 친정(親政) 이후 집권기 동안 군사력 신장과 내전 수습에 힘을 기울여 요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이었다.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쪽의 북송, 동쪽의 고려여진을 대대적으로 침공한 명장이기도 했다.


2.1. 외정[편집]


행정 조직을 정비하고, 신장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며 동•서 양방향으로 원정을 나가 서쪽으로는 티베트위구르 지역(알타이 산맥 등 신강 북부), 동쪽으로는 고려에 맞닿을 정도로 제국의 영토를 크게 팽창시켰다. 또한 남쪽의 북송과도 자주 대규모의 전쟁을 벌여 그들을 연전연파한 끝에 황하 이북까지 정복하는데 성공했으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중국 역사상 가장 군사력이 개판이었던 북송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고, 강력한 저항에 북송의 제3대 황제인 진종전연의 맹을 체결하게 되었다. 전연의 맹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북송이 요나라에게 매년 대량의 공물을 보내는 대신 형제 관계를[1] 맺는 것이었다.[2]

이렇듯 요나라의 영토를 크게 팽창시킨 정복자였지만 특이하게도 고려와의 대결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제1차 침략 때 소손녕서희의 술책에 낚여 강동 6주를 고려에게 넘겨주었고, 그 강동 6주 때문에 이후 전쟁에서도 고전했다.[3] 이후 제2차 침략때는 성종이 친히 4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들어와 강조와의 통주 전투에서 고려군을 대파하고, 수도 개경을 함락시키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정작 함락시키지 못한 강동 6주의 군사 요새 중 하나였던 흥화진의 양규와 귀주의 김숙흥이 지휘하는 고려군의 후방 게릴라 전술에 큰 피해를 입는 바람에 실익은 못 거두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4] 그리고 마지막 제3차 침략소배압이 퇴각 도중 강감찬과 맞붙었다가 귀주 대첩에서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면서 고려와도 결국 강화를 맺게 되었고, 이로써 고려, 요나라, 북송 이 세 나라는 균형을 이룬 채 약 100여 년 동안 평화롭게 지내게 되었다.

성종 야율문수노는 장군으로서 역량이 탁월했던 명장으로, 그가 몸소 친정을 나가 수많은 국가들을 정복하면서 고전한 상대라고는 고려가 유일했다. 그마저도 한때나마 수도를 함락시킬 정도로 아예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며, 반대로 말하면 다른 강대국들과 벌인 전쟁에서는 대부분 연전연파했기에 그야말로 전신이라 불릴 만한 행보를 보여줬다.


2.2. 내정[편집]


한국에서는 여요전쟁의 주동자라서인지 군사적인 업적 및 고려와의 전쟁 부분으로 많이 설명되는 편이지만, 실제로는 내치도 꽤 준수하게 이끌었다. 우선 성종은 법 집행을 공평무사하게 실시했다. 귀•천에 따라 법 집행이 다르면 백성의 원망을 받는다는 것을 밝히고는

"황족이나 친척들의 죄는 백성과 똑같이 처벌한다."

고 공포했으며, 노예가 죽을 죄를 지어도

"주인이 노예를 함부로 죽일 수 없으며, 관청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

는 내용의 법령을 내려 질서 체제를 정비했다.

중세 시대 대부분의 군주들은 이런 건 말로만 공포하고 실천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는데, 당시 황제였던 성종은 이를 실천으로 단행했다. 한 번은 서북군로사총령으로 있었던 부마 소도옥의 아내인 13녀 금향공주 야율새가가 노예 한 명을 무단으로 죽이자 즉시 금향공주를 공주가 아닌 '군주'로 강봉시켰고, 사위 소도옥은 집안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며 파직시키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노예들에 대해서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는데, 새로 초와부갈술부라는 마을을 만들어 요하 동쪽에서 수렵이나 철을 제련하던 노예들을 새로 만든 마을의 평민으로 환천시켜 주었다. 또한 여진족의 노예들도 각 지역으로 편입시켜 평민의 신분으로 바꿨다. 심지어는 비리 문제 척결에도 엄격해서 황족이나 친척들을 모아두고 이런 말을 했다.

"황족이 뇌물을 받았는데도 이를 사면해 준다면 이는 법이 폐지된 것과 같다."

"황족이 뇌물을 받는 일이 적발되면 평민으로 강등시켜 죄과를 치르게 할 것이다."

《요사》61권


또한 적발된 탐관오리는 한 번 파직하면 죽을 때까지 임용하지 않았으며, 청렴한 관리들은 낮은 지위에 있어도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

성종은 거란족조세 제도도 전면적으로 개혁했다. 백성을 동원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독려하고, 이들에게는 10년간 세금을 면제시키는 큰 혜택을 주었으며, 대대로 농업에 종사해 온 평민들에게는 토지 주인에게 소작료를 내도록 하는 등 제국에도 일정 액수의 세금을 내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국경 지역의 농민들에게는 둔전과 개간 경작을 유도하면서 힘써 이런 황무지를 개간하는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일절 부여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호전적인 유목국가 체제 티를 제대로 벗지 못한 거란에 조세 제도를 확립시킨 것과 엄정한 법치주의를 실현한 것이 성종이 이룬 최대 업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한편으로는 거란의 호전적인 성향이 더욱 강해지면서, 군사력까지 엄청나게 발전하게 되어 시도때도 없이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를 팽창시키고, 군사강국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2.3. 말년[편집]


50년 남짓한 긴 재위 기간 동안 제국의 정치•군사•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요나라를 당대 동아시아 최대 제국이자 군사강국의 위치로 올려놓은 성종도 재위 후반에는 긴장이 풀렸는지 사냥에만 몰두했다고 하며, 《거란국지》에 따르면 모여서 할 일 없이 술을 마시며 휴가를 자주 즐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1031년에 붕어했는데 소갈증을 오래 앓던 중이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우연의 일치인지, 여요전쟁 때 피터지게 싸운 고려현종강감찬이 같은 해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고려의 현종이 1031년 5월(음력 기준)에 붕어했고, 성종은 그 다음 달인 6월에 죽었다. 강감찬은 그 해 8월에 세상을 떠났다. 유언으로는 그의 아들 흥종 야율지골에게,

"전연의 맹을 잘 지켜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성종의 재위 기간은 49년에 달했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모든 황제들을 통틀어 재위 기간이 네 번째로 긴 것이었다.[5]


3. 사후의 막장 황실사[편집]


사후 황실사가 좀 막장스럽다. 성종의 정실인 인덕황후의 이름은 소보살가(蕭菩薩哥)로, 성종의 어머니인 승천태후 소작의 조카였다. 기록에는 얼굴도 아름답고 성품도 훌륭해서 성종과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을 둘 낳았으나 이 아들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뒷날 성종은 소누근(蕭耨斤)[6]이라는 후궁을 가까이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훗날 흥종이 되는 야율지골이었다. 이 아이는 정실인 소보살가가 직접 양육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들은 아니었지만 친아들처럼 매우 아꼈다. 한편 친모이지만 후궁이었던 소누근 역시 황후 소보살가를 옆에서 모셨지만 속으로는 그런 상황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종이 병에 걸려 위중해지자 소누근이 황제의 병수발을 들었는데, 그녀는 대놓고 정실인 소보살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성종이 붕어하고 야율지골이 흥종으로 즉위하자 소누근은 스스로 황태후가 되었으며, 소보살가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서 유배시키고[7] 결국 사람을 보내 그녀를 죽여버렸다. 소보살가는 자신을 죽이러 온 사자에게,

"내가 죄가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 죽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할 수 있도록 해 달라."

하는 말을 했고, 결국 목욕을 한 이후 죽임을 당했다.

이 무렵은 고려도 현종이 붕어하고, 덕종이 즉위했을 무렵이었는데, 덕종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사》를 보면 거란족 출신의 고위 관료들이 대거 고려로 망명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정치 혼란 속에서 고려 뿐만 아니라 여진이나 북송 등의 주변국가로 도망친 거란인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소누근은 황태후로서 섭정을 맡아 권력을 행사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1034년에 동생들을 모아 그녀의 차남이자 흥종의 동생인 야율중원을 황제로 세울 음모를 꾸몄다. 그런데 야율중원은 이 음모를 형 흥종에게 알렸고, 흥종은 어머니의 태후 옥새를 빼앗은 다음 유폐시켰다. 그러다가 5년 후에 흥종은 모후를 유폐한 것을 후회하며 다시 마차를 몰아 어머니를 맞아들여 효도를 다했다고 한다. 결국 소누근은 아들의 효도를 받으며 잘 살다가 1055년에 흥종이 먼저 붕어하고, 흥종 사후 2년 뒤에 병사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소누근이 죽고 난 후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소보살가와 함께 성종의 능인 경릉에 묻혔다는 것이다.


4. 평가[편집]


말년에 사치를 부리고 여요전쟁에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래도 《요사》에서는

"거란의 황제들 중 재위가 길고, 훌륭한 이름을 남긴 황제는 오직 성종 뿐이다."

라며[8] 호평했다.

실제로도 태조, 태종, 경종 같이 요나라 초기와 성종 직전의 그래도 좀 괜찮았던 군주들은 재위 기간이 20년이 안 되는 반면, 성종 이후 영 좋지 않은 흥종, 도종, 천조제 등은 죄다 20년이 넘었다. 특히 도종은 45년에 걸쳐 서서히 제국의 국력을 하락세로 이끈 암군이었다. 여하튼 성종은 사실상 요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끈 군주였던 셈이다.

청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와도 유사한 면모가 있다. (중화 기준) 이민족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한반도를 여러 차례에 걸쳐 침략했으며, 송나라, 명나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점 등이 그렇다. 차이점이 있다면 청태종이 침략해서 싸운 상대는 조선암군인조여서 빠르게 정복했지만, 요성종의 상대인 현종성군이어서 이에 대한 대처를 해뒀기 때문에 정복에 실패하고 도리어 큰 피해만 입었다는 점이다.

제국을 반석에 올려놓은 成宗 대신 '聖(성스러운 성)' 자를 쓰는 聖宗이라는 뜻이 매우 좋은 묘호를 받았듯이, 후대에서나 당대에서나 요성종 야율융서에 대한 평가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5. 대중매체[편집]


  •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청년기는 배우 오건우[9], 중년기는 배우 장동직[10]이 연기했다. 여기서는 요나라의 리즈 시절을 이끈 명군을 무슨 폭군마냥 다혈질 군주로 각색해놨다. 소배압강감찬에게 발렸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 가죽을 벗겨버려라!"라고 버럭했다는 실화에서[11] 인물상을 차용한 것 같다. 그래도 해당 드라마에서 야율융서를 단순한 찌질이로만 묘사한 건 아니다. 수렴청정불륜까지 저지르는 본인의 어머니를 평생 깍듯이 모셨고 전쟁에서도 무작정 설치기보다는 장수들과 함께 상당히 신중하고 철저히 준비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고려 최고의 장수 중 하나라던 강조를 죽이게 되었을 때 무턱대고 사형에 처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엄선한 갑사 100명을 불러와서 다 쓰러뜨리면 석방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에 강조는 병사 100명은 전부 쓰러뜨렸지만 제국의 황제로서 석방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장수들 5명들을 시켜서 다구리쳐 죽였는데 이러한 강조를 야율융서는 융숭히 장례치러 주었다.

  • 2019년 JTBC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서는 몽골인 배우 우간바야르엔크 바야르[12]가 연기했다. 잔인한 침략자로만 묘사되었다.

  • 2023년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배우 김혁[13]이 연기한다.


6. 둘러보기[편집]


요사(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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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권 「이국외기(二國外記)」
고려 · 서하
※ 116권은 國語解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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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나라가 형, 요나라가 동생. 한마디로 삥은 뜯기지만 자존심은 챙긴 것이었다. 여요전쟁에서 요나라가 대판 깨지고 명목상 사대관계를 맺은 것과 비슷한 점도 있다.[2] 이때 소태후가 직접 친정하기도 했다.[3] 사실 1차 침략은 직접적인 침략이라기보단 후방 정리 차원에서의 예방 전쟁 성격이 짙었고, 강동 6주는 사실상 무주공산이었기에 고려가 점령해도 묵인해주겠다는 것에 가까워서 당시로선 서로 윈윈하는 상황이었지만, 이후 고려는 강동 6주를 완전 군사 요새화해서 요나라를 엿먹인다.[4] 이때 양규와 김숙흥은 견고한 성채에 웅거해 있으면서도 틈틈히 기병을 내보내서 요군의 후방을 마구 교란했다. 그러나 요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히던 양규김숙흥은 전쟁 막바지에 전사하고 말았다. 애초에 양규김숙흥고려인 전쟁포로가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살 생각을 거의 안하다시피 하며 전투를 벌였기에 어찌보면 예견된 결과였다.[5] 1위는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61년), 2위는 청나라의 고종 건륭제(60년), 3위는 한나라의 세종 무황제(53년). 참고로 건륭제가 60년만 재위하고 태상황제로 물러난 이유가 "짐은 감히 성군이신 조부(강희제)보다 오래 제위를 지킬 수 없다."라는 논리 때문이었다.[6] 사후 흠애황후[7] 이 와중에 소손녕의 아들인 소필적이 소보살가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그 역시 이 역모사건에 걸려 죽었다. 이때 소필적의 부인이 여진으로 도망가자고 했지만 소필적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8] 遼之諸帝,在位長久,令名無窮,其唯聖宗乎. 《요사》 권17 <찬>(贊)[9] 오건우는 2011년 1월 13일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10] 장동직은 성종의 어머니인 소태후를 연기한 배우 심혜진과 동갑이다. 배우를 교체한 것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일기도 했다. 다만 배우의 연기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11] 물론 진짜 얼굴 가죽을 벗기지는 않았다.[12] 배우가 얼굴과 체격이 넙대대한 마동석 비슷한 외모였다.[13]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 청나라 황실종친 도르곤을 연기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