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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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 都氏
성주 도씨

관향
경상북도 성주군
시조
도순(都順)
집성촌
대구광역시 달성군 서재리
대구광역시 달서구 용산동
경상북도 울진군 원남면 덕신리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외기리
대구광역시 군위군 의흥면 이지동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교동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삼덕리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덕계리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천리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대덕리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읍 남당리
인구
56,850명(2015년)
홈페이지
링크

1. 개요
2. 역사
3. 항렬[1]
4. 인명
4.1. 24세손
4.2. 25세손
4.3. 26세손
4.4. 27세손
4.5. 28세손
4.6. 29세손
4.7. 30세손
4.8. 32세손
4.9. 33세손
4.10. 34세손
4.11. 미상
5. 기타



1. 개요[편집]


경상북도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성씨 집단으로, 전국의 도씨들은 대부분 성주 도씨다.[2] 시조는 고려 명종때 전리상서를 역임한 도순이며 주로 본관지를 위시로 한 대구광역시/경북 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주간조선에 따르면 都의 한자 표기는 者(사람 자)에 점이 없는 글자가 맞지만 일제 때 '놈 자'라는 비하의 의미로 者에 점을 넣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보기 행사 때 현수막은 점이 없는 都를 쓰지만보기 성주 도씨 대종회의 한자표기는 점이 있는 都를 쓰고 있다. 변(성씨) 문서도 참조.


2. 역사[편집]


도씨의 유래로는 전한 무제(전한)때 복파장군 도계가 남월의 반란군 여가를 제압하여 도씨를 하사받은 것이 시초가 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도계의 후손 도조(고구려)(都祖)가 한성제고구려에 건너와서, 유리명왕이 이복동생 비류, 온조의 견제를 물리치고 왕위계승을 하는데 기여했다. 즉, 고구려 개국공신의 후손이라는 것.

이후에 도씨는 만주와 한반도 전체에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백제신라로도 내려 간 것으로 보이는데 간간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에서 도씨를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설화의 주인공인 도미와 성왕(백제)을 전사시킨 신라의 장군 도도 등.

이후에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도진(都陳)이 왕건에게 개국공신으로서 논밭 800경(약 [math(12.4km^2)])과 성산부원군[3]으로 봉해져서 현재의 본관인 성주를 관향으로 삼게되었다. 그러나 이후 후에 전리상서를 지낸 도순(都順) 이전의 세계(世係)를 분실하여 도순을 시조로 삼게 되었다.

이후에 고려대에는 자주 재상을 배출하는 명문집안이었으나 고려 말기에 도길부이인임의 측근으로 권력을 누리다 무진피화때 살해되었으며 이성계의 측근이었던 도응[4]역성혁명을 반대하면서 조선 초에 고려 시대보다 가세가 기울었다.[5] 친고려적 성향은 조선 중기까지 계속 되었고 이에 조선왕실의 눈밖에 나게 되면서 고려에 비해서는 고위 관직은커녕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수도 눈물 나게 적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본관인 성주나 대구, 경북, 논산 일대에서는 이름 높은 선비집안이었다.[6] 조선 후기에는 다시 왕실의 신임을 얻어 정계에 재진출하기도 했으나 흥선대원군에게 서원철폐령 등의 제재로 인하여 몰락했다. 광복 이후에는 성주군, 대구광역시 인근에서 문중의 서원등을 복원하여 정기적으로 향례를 치르고 있다고 한다. 1981년 도응의 후손인 청송당공파의 종중 문서 일괄이 보물 제 72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도 집성촌이 대구, 경북 지역 위주로 있다.


3. 항렬[7][편집]


25세
○규(珪)
26세
진(鎭)○
27세
○호(浩)
28세
상(相)○
29세
○환(煥)
30세
기(基)○
31세
○종(鍾)
32세
법(法)○
33세
○격(格)
34세
혁(爀)○
35세
○숙(塾)


4. 인명[편집]



4.1. 24세손[편집]




4.2. 25세손[편집]




4.3. 26세손[편집]




4.4. 27세손[편집]




4.5. 28세손[편집]




4.6. 29세손[편집]




4.7. 30세손[편집]




4.8. 32세손[편집]



4.9. 33세손[편집]




4.10. 34세손[편집]



4.11. 미상[편집]




5. 기타[편집]


손씨와는 과거 혼인을 금하였는데, 병자호란 당시 낙음공파의 시조인 도경유가 경상감사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전투에서 머뭇거린다는 이유로 휘하에 있던 박충겸이란 자를 참하였는데, 이에 그의 아들이 앙심을 품어 손씨 자객에게 암살을 의뢰하여 살해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로 중재가 있기 전까지 가문들간의 앙심을 품은 암살과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반남박씨와 청송심씨들처럼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시스템망이 전산처리화가 되면서 행정상의 오류로 점을 찍은 '놈 자'가 등본을 통해 간간히 보이는데 수정을 요청해도 법원에 소원서를 내라는 문제가 발생하는 중이다.(가족관계증명서는 문제없음) 성주 도씨 대종회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여 법원에 전체 소원서를 낼 필요가 있어보인다.

사람 자에 점이 없는 글자설 또한 다소 의아한데, 애초에 이 한자는 약자(약어)인데 족보가 만들어진 시기에는 약어를 차용했던 때가 아니였기 때문에 점을 뺀 약어가 언제부터 쓰였는지, 성주 도씨 대종회에서 그렇게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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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항렬자는 파마다 다르다. 즉 대동항렬표가 아니다. [2] 사실상 성의 한자가 도읍 도이면 성주 도씨이다.[3] 후작.[4] 두문동 72현 전설의 일원이다.[5] 그러나 태조 2년부터 6년까지 도응이 이성계에게 계룡산일대의 땅을 하사 받은 것으로 보아 아예 몰락할정도로 기울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이성계는 건국 직후 도응에게 상장군을 내려줄 정도로 매우 친한 사이였고, 참고로 하사받은 땅은 그당시 새로운 수도자리를 놓고 한양과 경쟁했던 명당인 곳이고, 그 토지 문서 일괄은 지금 보물로 지정되었다.[6] 애초에 조선 건국 이전부터 대대로 성리학을 연구하는 집안이었다. 다만 조선 시대에는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보다 지역 유지로써 유학을 공부하려는 성향이 강했다.[7] 다만 항렬자는 파마다 다르다. 즉 대동항렬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