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질서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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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설명
3. 예시
3.1. 현실의 세계질서 개편
3.1.1. 성공 사례
3.1.2. 삽질 사례
3.2. 픽션의 세계질서 개편



1. 개요[편집]


모종의 이유로 전세계의 정치, 외교적 서열과 질서가 재정립되는 사건을 의미한다.


2. 설명[편집]


게임, 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굵직한 줄거리에 항상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클리셰이기도 하다. 창작물에서 이런 거대한 가상역사를 플롯에 삽입하는 것은 유사한 실제 역사 사건과의 비교를 통해 묘한 재미를 줄 수 있으며, 실제 역사가 일종의 사례 혹은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여 화자가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을 짜는데 여러모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시도하는 특정 조직 혹은 개인의 의도에 따른 세계 질서 개편 행위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거나, 성공하더라도 한 국가나 도시 등 매우 한정적인 지역에 국한되거나, 완전히 성공하더라도 인류 역사에서 손에 꼽을만한 극소수의 성공사례로 남게 되는, 매우 찾아보기 힘든 일에 해당된다. 또한 성공한 경우에도 거의 대부분은 그 과정에서 대규모 인적, 물적 피해를 동반하게 된다. 반면에 특정 개인 혹은 단체의 의도치 않은 행위 혹은 결정이 나비 효과가 되어 일파만파 영향을 미친 끝에 세계구급의 대변화를 초래한 사례는 의외로 드물지 않다. 아래의 여러 사례를 참조해보도록 하자.

관련 문서로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가 있다.


3. 예시[편집]



3.1. 현실의 세계질서 개편[편집]



3.1.1. 성공 사례[편집]


  • 알렉산드로스 대왕그리스 세계의 질서 개편을 시도했고,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 뒤 동진에 동진을 거듭하여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거대한 헬레니즘 제국을 만들었지만 불과 32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 문제를 두고 헬레니즘 제국은 분열과 복잡한 이합집산을 겪는다. 그 결과 그리스 문화와 현지의 문화가 복합된 헬레니즘 문화가 나타났고, 분열된 제국은 크게 여섯 왕국으로 나뉘어 서로 패권을 다투는 헬레니즘 시대가 열렸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내전에서 승리하여 사실상 공화정 제체를 종식시키고 종신 독재관 자리에 앉아 당시 지중해 일대의 패권국이었던 로마의 통치체계를 개편하려 했다. 그러나 파르티아 원정 사흘 전인 기원전 44년 3월 15일 결행된 암살로 카이사르 본인은 불귀의 객이 되고, 그가 의도했던 로마 세계의 개편 역시 이루지 못한 일로 역사에 남을 뻔 했다. 하지만 암살 당시 불과 18세였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탁월한 정치적 능력을 바탕으로 경쟁자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 제정을 수립하면서 세계 질서는 개편되었다.
  • 이슬람의 흥기는 단기적으로는 700년 가까이[1] 이어져 온 로마[2] 이란-페르시아계 왕조[3]의 양강 구도라는 중동지중해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린 대격변이었으며, 장기적으로는 현대에까지 이르는 중동 일대 이슬람계 국가들의 기원이 된 세계 질서 개편의 가장 대표적 사례이다.
  • 몽골 제국중세의 이슬람 세계와 동아시아 및 서아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 일대, 그리고 러시아 일대의 공국들을 갈아마셨다. 칭기즈 칸의 정복 사업에서 죽어나간 사람들로 인해 줄어든 탄소 배출량이 7억 톤에 달한다 할 정도면… 이 정복 사업 끝에 중국에 몽골계 왕조가 들어섰으며 칭기즈 칸의 분할 통치 제도로 여러 칸국(汗國)들이 생겨났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수많은 공국들의 군사적 역량이 칼가강 전투로 크게 꺾여나가고 몽골 제국의 조공국 신세로 전락하면서 러시아 일대의 세력 주도권이 키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옮겨가게 된다.
  • 흑사병중세 유럽과 원나라[4]를 말아먹었다.
  • 마르틴 루터교황극딜하며 기독교 세계의 질서를 개편하려 했는데, 그 결과 독일 북부와 네덜란드, 영국, 북유럽가톨릭 교회에서 이탈하여 개신교 국가가 되었고, 근대적 국제질서를 처음으로 확립한 조약의 체결까지 이어졌다.
  •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품 안의 자살용 독약을 언제 마셔야 할 지 고민할 정도로 열세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1762년 초 대프로이센 동맹의 한 축을 담당하던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사망하고 그 후계자로 표트르 3세가 등장하는데, 이 표트르 3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열렬한 빠돌이(...)였다. 왕자 시절부터 프리드리히 대왕의 무용담에 빠져 지내던 표트르 3세는 즉위하자마자 프리드리히 2세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전쟁 이전의 국경으로 회귀하는 화친 조약을 제의하여 그것을 성사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스웨덴을 설득하여 대프로이센 전선에서 이탈시켰다. 덕택에 프로이센은 패색이 짙었던 7년 전쟁에서 슐레지엔을 차지하며 강대국으로 가는 기반을 마련하였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국이였던 오스트리아는 영토를 잃었으며 그 권위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또한 영국이 북미와 인도, 캐나다의 식민지를 프랑스로부터 할양받았으나 전비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과도한 세금을 식민지에 물렸고,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국가재정이 악화되어 하층민을 쥐어짜는데 열중했다. 나중에 표트르 3세는 불만을 가진 아내와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어 차르 자리에서 내쫓기고 그 아내가 차르에 오르니 그녀가 바로 예카테리나 2세이다.
  • 양차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이 두 전쟁은 사실상 20세기 세계 전체의 질서를 개편했으며, 그 영향은 21세기 현대에도 진행형이다.

3.1.2. 삽질 사례[편집]


  • 카르타고한니발로마를 정복하여 지중해 세계의 질서를 개편하려 했고, 실제로 로마를 멸망시키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으나,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여 실패했다. 이후 로마가 서지중해 유일 패권국이 되어 동지중해 국가들까지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반면, 카르타고는 약소국으로 전락하여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한니발 본인은 망명지를 떠돌다가 음독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전진부견화북을 통일한 후 문자 그대로 10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하여 동진까지 정복함으로써 중원을 통일하고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개편하려 했으나, 비수대전에서 역대급 참패를 당해 나라가 쪼개지고 본인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 동로마 제국유스티니아누스 1세서로마 제국의 고토를 수복하여 다시 로마유럽지중해 세계 전체의 중심 국가로 만들려 했다. 그 결과 서로마 본토곡창지대를 탈환하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전쟁 도중에 발생한 역병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동로마랑고바르드족의 침공을 받아 이탈리아 중북부의 상당수를 상실하여 서유럽 세계의 정세에 개입할 역량이 약화되었고, 7세기에는 마그레브는 물론이고 기존 영토이자 최대 곡창지대인 이집트까지 상실하여, 이슬람 제국에 의한 세계질서 개편이 야기되었다.
  • 수양제고구려를 정복하여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개편하려 했으나, 부견처럼 문자 그대로 10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했다가, 그 중 30만을 살수에서 꼬라박는 대참패를 당하고 귀국한 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에 시달리다 신하였던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했다.
  • 사산 왕조호스로 2세동로마를 정복하여 중동 세계의 질서를 개편하려 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며 동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간 적도 있으나, 결국 이라클리오스에게 역관광당해서 참패하고 아들쿠데타로 인해 목숨까지 잃었다. 이후 사산 왕조는 내전까지 겪으며 국력이 극도로 약화된 끝에 이슬람 제국에게 정복당하여, 이슬람 제국에 의한 세계질서 개편이 야기되었다.
  • 요의 성종고려를 공격하여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구도를 바꿔보려 했지만, 서희와 강감찬의 활약에 쳐발려 고려의 국위만 올려줬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선을 치고 나아가 명나라까지 공격, 훗날 인도 정복에도 착수해서 일본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세력개편을 시도했다. 조선에게 져 명나라에게 직접 공격은 시도도 못해봤으나 그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정권을 잡고, 조선과 명나라는 큰 타격을 받아 내리막길을 걸어갔다. 특히 명나라의 망한 자리에 청나라가 대신 들어섰으니 의도와는 다르게 동아시아 세계를 개편했다.
  • 오스만 제국의 실권을 잡고 있던 대재상[5] 카라 무스타파 파샤신성 로마 제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왕위를 차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수도 포위하고 함락시킴으로써 유럽 세계의 질서를 개편하는 동시에 국내에서 자신의 입지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성을 함락하기 직전이라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윙드 후사르로 인해 오스만 제국군은 대패했고, 이후에는 유럽 각국에게 다구리를 당해서 영토를 할양하는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체결해야 했으며, 카라 무스타파 파샤 본인은 패전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
  • 아돌프 히틀러게르만족을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 개편을 주장했으나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고 자살했다.
  • 군국주의 일본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위와 비슷한 주장을 펴다가 핵무기세계 최초로 맞았다.
  • 냉전 종결 후 공개된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소련이 6.25 전쟁에 불참[6]하면서도 북한중국을 지원한 이유는 독소전쟁과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미국보다 핵무기가 적었으며 한반도전쟁에서 미국이 국력을 소진하여 차후 펼 소련의 유럽 공략을 좀 더 쉽게 하려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전작업이었음이 드러났다. 당연히 실패했지만[7]
  • 마오쩌둥생태계 질서의 개편을 시도했는데, 이게 다른 삽질들과 자연재해와 겹치면서 수천만 명이 굶어죽는 대참사가 난다.
  • 이슬람 세계의 질서를 개편하려던 이라크는 미국한테 2번 을 겪었다.
  • 미군도 세계 질서 개편한답시고 이라크랑 놀다가 각종 차기사업이 떡실신 중이다.
  • 각종 쿠데타는 가끔 사태가 커져 자국 뿐만 아니라 세계 질서 개편까지 이룬다. 대표적인 예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는 스스로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고 전세계를 이슬람의 이름 하에 통일하겠다고 선포한 뒤, 이를 명분삼아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는데, 그 결과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등의 여러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군시리아군, 쿠르드족 민병대에게 참교육당하고 세력이 궤멸되어 버렸다.
  • 둥글게의 신탁은 한때 세계 질서 개편을 촉진한다고들 했다.


3.2. 픽션의 세계질서 개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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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로마파르티아가 최초로 맞붙은 카르헤 전투가 BC 53년,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이 AD 651년[2] 당연히 동로마도 포함. [3] 아르사케스 왕조&사산 왕조[4] 당시 중국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3300만여명이 흑사병으로 인해 사망하면서 생산 역량이 크게 감소했고, 여기에 여러 국가 막장 테크가 겹치면서 멸망의 길에 들어섰다.[5] 오스만 제국 재상의 칭호[6] 사실 비공식적으로 군사고문단, 공군을 파견도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소련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인천 상륙작전 이후 나타난 한국군유엔군의 북진 시 소련 군사고문단을 급히 북한에서 철수시켰으며, 소련 공군기는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공군기로 위장시켰다. 물론 미국도 이 사실은 진작에 알았으나, 그런다고 소련과 전쟁을 벌였다간 바로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냥 모른 체했다.[7] 물론 스탈린6.25 전쟁 당시에 북한중국의 편을 든 것은 이런 이유만 있는게 아니다. 우선 소련은 나라가 해체되는 순간까지도 공산주의 국가들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었던 만큼, 자본주의 국가의 맹주인 미국 앞에서 당당하게 나설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도 그런다고 직접 미국과 붙었다간 제3차 세계 대전이 날 것은 분명했으므로, 직접 미국을 상대하는 대신 북한중국을 이용한 대리전을 펴는 것으로 공산권 맹주로서의 자존심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중국이 땅도 넓고 자원도 풍부한 나라인 만큼 내부적인 역량이 엄청나서, 이런 나라가 경제 성장을 이룬다면 소련 입장에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것이고 공산주의 국가들의 상당수가 친(親) 소련 정책을 버리고 친중 국가로 돌아설 위험이 컸다. 그래서 중국이 제 역량을 발휘할 만큼 성장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고자 했는데, 마침 한반도에서 발발한 6.25 전쟁이 좋은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미국을 이용한 중국 견제책은 엄청난 성과를 내어서 6.25 전쟁으로 인해 마오쩌둥의 입김이 중국 내에서 커졌고, 이는 전쟁으로 입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과 함께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이라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삽질 정책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중국의 역량을 확실히 깎아먹었다. 덕분에 지금도 중국은 바로 위의 러시아도 견제하는데 부담스러워 할 정도로 국력의 신장이 크게 늦춰졌다.[8] 시작하는 주인공에 따라서 조금씩은 다르나 결과적으로는 저 4명에게 아작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