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루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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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다닐로비치 루간스키(Сергей Данилович Луганский : 1918~1977)

1. 출생과 입대
2. 겨울 전쟁에서
3. 대애국전쟁
4. 전용기를 선사받다
5. 독일 에이스와의 결투
6. 종전 후



1. 출생과 입대[편집]


소련 공군의 탑 에이스 중 한 사람이었던 세르게이 루간스키는 1941년부터 1945년 종전까지 독소전에 참전하는 동안 통산 37대의 격추기록을 달성해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두 번씩이나 받는 영광을 누렸다.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알마티(Алматы́)에서 태어난 루간스키는 어릴 때부터 비행기나 비행선, 기구 등 날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깊은 관심을 품고 있었고, 항공기와 비행에 매료된 소년이었다. 보로네시(Воронеж)에서 살던 그의 부모들은 적백내전의 혼란을 피해 카자흐스탄 지방까지 흘러와 정착해 살고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나이가 차기도 전부터 정원사 보조로 일해야만 했던 루간스키는 학교 성적은 중위권에서 맴돌고 있었지만 비행에 관련된 서적은 열심히 탐독하는 항공 매니아였다고 한다. 이렇게 8학년을 마치고 입대 연령인 18세가 되던 해인 1936년에 루간스키는 오렌부르크(Оренбург)에 있던 소련 공군의 비행학교에 입학하였고, 2년 후인 1938년에는 '최고 학생상'을 수여받는 우수한 성적으로 조종사 훈련 과정을 마치게 된다. 그는 곧 프스코프(Пскове)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전투기연대(14-й иап : 14-й истребительный авиационный полк)에서 폴리카르포프 I-15를 몰면서 전투조종사로서 공군에 복무하기 시작했으며, 1939년에는 장교가 되기 위한 사관학교 과정까지 모두 수료하게 된다.



2. 겨울 전쟁에서[편집]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소련핀란드 사이에서 벌어진 겨울전쟁 동안, 루간스키 소위는 59회의 실전 출격을 수행하면서 적기 1대를 처음으로 격추시키게 된다. 비행 솜씨라면 누구보다 자신있던 루간스키였으나, 그가 소속되어 있던 비행대의 주임무는 공중전이 아니라 적 지상군을 공격하는 것이었던 탓에 신참 소위가 핀란드 공군기와 교전을 벌일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1940년 2월 28일에도 여느 때처럼 기총소사로 핀란드 지상군을 공격하려던 루간스키의 전투기에 대공포 파편이 정통으로 명중했다. 마침 그는 사격을 위해 얕게 강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상탈출하기에 좋은 상황은 아니었으나 불붙은 전투기에 타고 있던 루간스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도를 잃는 기체에서 루간스키는 잽싸게 낙하산 탈출을 시도했고, 다행히도 그의 낙하산은 나무 꼭대기 높이에서 펴지면서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다음날, 곧바로 다시 출격한 루간스키는 대망의 첫 격추를 달성하는데, 그 희생양은 핀란드 공군의 낡은 정찰용 복엽기 아에로 A.32(Aero A.32)였다.

루간스키의 다음 격추는 참 황당해서, 그의 조종사 경력에 종지부를 찍을 뻔했다. 왜냐하면 아군인 폴리카르포프 R-5 정찰기를 적기로 오인해 격추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전쟁중이던 그 무렵의 소련 공군은 조종사가 아쉬운 상황이었던 데다가 함께 비행하던 동료들이 그가 실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을 변호해줘서 단 며칠간의 징계만을 받고 다시 일선 출격을 나갈 수 있었다. 강대국 소련을 상대로 4개월간이나 완강하게 버티던 핀란드가 마침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날 때 즈음, 루간스키는 그의 앞날에 엄청난 역량으로 작용하게 될 좋은 경험을 쌓은 셈이었다.


3. 대애국전쟁[편집]


독소전이 터지고 독일 공군과의 전투가 본격화되었을 때, 루간스키는 라보츠킨 전투기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LaGG-3 전투기에 탑승하게 되었고 노련한 독일 조종사들을 상대로 몇 대의 격추 전과를 더 보탠다. 신예기라고 좋아했던 루간스키와 그의 동료 조종사들은 LaGG-3의 온갖 고장에 시달리다가 얼마 후 그의 비행대는 구식의 I-16를 다시 주력기로 삼았다.

1941년 9월 9일, 바타이스크(Бата́йск) 상공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 루간스키가 포함된 6대의 소련 전투기들은 18대의 독일 전투기들과 격렬한 공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던 도중 독일의 에이스 하나가 소련측의 블라디미르 페쉬코프(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Пешков : 1911~1941 / 3대 격추)가 탄 전투기를 공중분해 시켜버리더니 연이어 니콜라이 코즐로프(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озлов : 1917~2005)까지 격추시켰다.

"부서진 전투기가 불타며 추락하는 광경은 언제 봐도 무서운 것이죠. 페쉬코프가 탄 전투기는 꽈배기처럼 작은 원을 그리며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 갔는데, 그건 마치 엄청난 힘을 가진 거인에게 내팽개쳐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페쉬코프는 미친듯이 돌던 기체를 바로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가 탄 전투기는 속절없이 통제를 잃고 짙은 연기를 끌며 추락해갔습니다. 파시스트 전투기는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페쉬코프의 뒤를 쫓아 강하하면서 또 한차례 사격을 퍼부었는데, 그건 마치 한 줌의 우박에 두들겨 맞는 듯 했지요. 불을 뿜던 LaGG기는 그 순간 마치 참아왔던 것을 터뜨리듯이 공중에서 폭발해버렸고, 난 산산조각나는 파편들 사이에서 친구의 붉은 피와 육신이 흩어지는걸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루간스키는 핀란드에서부터 함께 싸워온 전우이자 친구인 페쉬코프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그 독일 전투기를 맹렬히 추격했다. 그런데 그 독일 에이스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갑자기 선회해 방향을 바꾼 적기가 불을 뿜은 기총 세례에 루간스키는 도리어 기체에 손상을 입고 만 것이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이 루간스키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던지, 두 번째 낙하산 탈출에도 성공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후 제270전투기연대(270-й иап)로 소속을 옮긴 루간스키는 1942년 9월 14일, 스탈린그라드 상공에서 지상군 엄호 임무를 수행하다가 모든 실탄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그는 적기와 충돌해서라도 격추시키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하인켈 He 112 한 대를 골라잡아 비행기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날개에 충돌을 감행했고, 한 쪽 날개가 떨어져 나간 그 적기는 곧바로 추락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드네프르 강 위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루간스키는 또다시 공중 충돌을 시도해 He 111 폭격기의 날개를 부러뜨려 격추시켰다. 이 용맹한 무공으로 인해서 루간스키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메달을 수여받는다.

1943년 6월에 루간스키가 포함되어 있는 소련 전투기들은 로스토프 상공에서 30대의 Bf 109와 일대 접전을 벌였고 이중 8대를 격추시키는 대전과를 올렸다. 9월 12일에 루간스키는 18대 격추 기록으로 소비에트 영웅 칭호를 받았다. 또 다른 공중전 도중, 부상을 입은 루간스키는 야전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침상에 누워서도 적기를 격추시킬 생각만 하고 있던 루간스키는 완전히 몸이 회복되지도 않았는데도 다시 부대로 복귀하였다.


4. 전용기를 선사받다[편집]


기지에 돌아간 그에게는 고향에서 보내준 선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마티 시민들이 18만 루블의 방위성금을 모아 루간스키가 탈 신품 Yak-1 전투기를 보내준 것이다. 번쩍거리는 그 비행기에는 루간스키의 개인 식별마크인 커다란 붉은 하트와 함께 킬마크가 줄줄이 그려져 있었고, 동체 옆에는 "소련연방영웅 세르게이 루간스키에게 알마티 콤소몰 청년들이(Герою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Сергею Луганскому от комсомольцев и молодежи г. Алма-Аты)"라는 문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1944년 봄에 세르게이 루간스키는 동맹인 미국과 친목을 꾀하고 보다 많은 군사원조를 얻어내기 위해 파견된 소련 방문단과 함께 대서양을 건너갔다. 군복에는 대령 계급장이 달려 있었고, 가슴에는 금빛 찬란한 영웅 훈장을 2개나 달고 있던 젊은 연대장 루간스키에게 단숨에 언론의 이목이 쏠렸다. 당시 소련에 제공되던 P-39 에어라코브라 전투기를 만들고 있던 벨 공장에 방문한 루간스키는 그곳에서 새로운 신형 전투기 벨 P-63 킹코브라의 인도 기념식에 참석했고, 수많은 기자들에 둘러싸여 1호기의 날개에 손바닥 도장을 찍고 기념 사진을 활영했다. 즉석에서 몇 가지 주의사항만 듣고 킹코브라에 올라탄 그는 능숙하게 시범비행을 선보였고, 이 모습은 다음날 미국의 각 일간지에 실렸다.



5. 독일 에이스와의 결투[편집]


미국에서 돌아온 후인 1944년 5월, 이제는 제152친위전투기연대(152-го гиап)로 재편된 부대의 지휘관이 된 루간스키 연대장과 그의 윙맨은 작전상 매우 중요한 정찰 임무를 위해 비행장을 이륙했다. 편대장 루간스키는 독일 기갑부대를 발견했고, 그들을 엄호하는 적기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고도를 낮춰 저공비행에 들어갔다. 정찰 임무를 마친 뒤 그들은 다시 기지를 향해 기수를 돌려 귀환하려 했는데, 그들의 뒤에 슬며시 따라붙은 Bf 109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루간스키의 탑승기에는 많은 킬마크가 그려져 있었고, 이를 본 독일기들은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기습할 기회를 엿보면서 계속 소련 공군기들을 조용히 추적하고 있었다. 루간스키 편대는 기지 상공에 가까와지자 착륙하기 위해 속력을 늦추기 시작했고, 이때다싶었던 독일기들은 공격을 결심했다.

그런데 이때, 천만다행히도 지상에 있던 관제탑에서 이 섬뜩한 광경을 목격했고, 황급히 무전으로 루간스키에게 위험을 알렸다. 루간스키의 윙맨은 즉각 급선회를 해 편대장의 엄호 위치로 돌아갔는데, 순간 코앞에 적기의 동체가 드러났고 그가 발사한 기총 사격에 독일기 한 대가 화염을 덮어쓰고 추락했다. 그러나 바로 동시에 독일기 편대장도 루간스키의 윙맨에게 사격을 퍼부었고, 그는 낙하산 탈출을 해야만 했다. 이젠 소련과 독일 두 편대장만이 공중에 남았다.

독일 편대장은 루간스키를 향해 급기동을 펼치며 꼬리에 붙으려 했는데 마침 루간스키는 거의 착륙을 하려는 찰나였다. 그의 랜딩기어가 비행장 활주로에 닿았고, 미끄러지며 달려나갔다. 독일 전투기는 최대한 기수를 내린 상태로 그의 뒤를 바짝 따라 기총사격을 해대기 시작했다. 활주로를 택싱하다가 귓전에 울리는 무선 경고와 기관포의 궤적을 느낀 루간스키는 곧바로 스로틀을 최대로 밀면서 랜딩기어를 집어 넣고 재차 이륙해 교전에 돌입하려 했다. 루간스키가 막 활주로 위로 뜨고 있을 때, 그 메서슈밋 전투기는 기수를 들고 고도를 높이며 다음 공격을 위해 선회하고 있었다. 그 Bf 109는 다시 루간스키에 접근해 모든 포문을 일제히 열었다. 몇 발의 총탄이 루간스키의 동체에 명중해 캐노피와 조종 판넬이 날아갔다. 그러나 그는 다치지 않았고, 그가 탄 Yak 전투기는 아직 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루간스키는 연료가 거의 바닥나서, 단 한번 정도 공격을 하면 더 이상 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간스키는 저공에서 선회 성능이 뛰어난 Yak-1의 장점을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적기를 향해 날카로운 선회을 시작했다. 그 적기도 선회하고 있었지만 점점 루간스키의 조준경에 가까와졌고, 곧 적기의 동체가 비스듬히 꽉 차게 되자 그는 기관포 방아쇠를 당겼다. 독일 편대장이 탄 Bf 109의 콕핏 캐노피가 튕겨져 나갔고, 조종사는 총상을 입었는지 부상을 당한 것으로 보였다. 그 독일기는 얼마 후 엔진마저 꺼져버렸고, 소련 비행장에서 3 km 떨어진 곳에 동체 착륙을 하게 되었다. 기지 경비원들은 즉시 그곳으로 달려가 독일 편대장을 사로잡았다. 일순간에 사냥꾼이 사냥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독일 조종사의 이름은 오토 푀네콜트(Otto Fönnekold : 1920~1944 / 136대 격추)였고, 동부전선에서 30대 격추를 포함해 그때까지 통산 70대 이상의 격추 기록을 쌓아올리고 거기에 더해 기사철십자훈장까지 수여받았던 수퍼 에이스였다. 다음날 루간스키의 비행장을 방문한 이반 코네프(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Конев) 중장은 격추된 Bf 109의 잔해를 보았고, 흥미진진하게 전과 보고를 들은 후 크게 기뻐하며 루간스키에게 황금으로 만들어진 붉은 별 훈장을 수여했다. 루간스키는 살아서 두 번째로 연방영웅이 된 것이다.


6. 종전 후[편집]


세르게이 루간스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려 390여회의 실전 출격을 거듭하면서도 살아남았다. 전쟁 동안 그는 단독 격추 37대에 더하여 공동 격추 6대를 기록했다. 루간스키가 지휘했던 비행대의 최종 기록은 적기 245대 격추라는 엄청난 무공을 이루었다. 공군에 계속 남게된 루간스키는 MiG-15 같은 제트전투기를 몰았지만 당대 최신예 초음속 전투기인 MiG-19의 개발 과정에도 참여했다. 1957년에 공군 소장으로 진급한 루간스키는 1964년에 군에서 퇴역했다. 군복을 벗고 낙향한 그는 고향 알마타에서 급선회(На глубоких виражах : 1963) 같은 동부전선 항공전을 회고한 몇 권의 자서전을 펴냈고, 1977년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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