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비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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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Vitte545.jpg
이름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
Sergei Yulyevich Witte
Серге́й Ю́льевич Ви́тте
재무장관 재임기간
1892년 ~ 1903년
'''{{{#white 각료평의회 의장
재임기간}}}'''
1903년 ~ 1905년
총리 재임기간
1905년 11월 6일 ~ 1906년 5월 5일
출생
1849년 6월 29일 트빌리시
사망
1915년 3월 13일 페트로그라드

1. 개요
2. 생애
3. 재무장관 시절
4. 각료평의회 의장 시절
5. 러시아 제국 초대 총리
6. 기타
7.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세르게이 비테 백작은 1905년에 임명된 러시아 제국의 첫 번째 총리로 발트 독일인 귀족 출신이었다. 총리로 임명되기 이전 1892년 러시아 제국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적이 있었던 비테는 국가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재무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였다.


2. 생애[편집]


비테는 오데사의 노보로시스크 대학의 물리학부와 수학부를 졸업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그는 박사 학위를 따는 대신에[1] 철도회사에 취직했는데 여기서 그는 출납계, 검사원, 감독관, 역장으로 근무했으며 새로운 차량연결 방법, 빠른 신호 방법, 통제 장치 등을 고안해냈다. 그는 재무성 철도사업국장, 교통장관 등 중앙정부 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의 직책을 거쳤다.

평범한 지방의 철도관리였던 그가 일약 요직에 발탁될수 있었던 배경에는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있었다. 일개 지방관리였던 비테가 차르에게 직언을 하였고 이것이 알렉산드르 3세의 눈에 띈 것이다. 《코레일 사보》황제의 기차를 세운 세르게이 비테 <유라시아 철도 알아보기>


3. 재무장관 시절[편집]


비테는 43세에 재무장관이 되었다. 상업, 공업, 철도국 등이 그의 세력하에 있었다. 비테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국가 주도로 산업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당시 독일 경제학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주장을 참고하여 과감한 국가주도 경제 개혁 정책을 성공적으로 밀어부쳤다. 1894년 러불동맹을 체결해서 프랑스로부터 빌린 돈을 철도 건설에 주로 투자했는데, 이는 향후 표트르 스톨리핀의 농업 진흥 정책과 시베리아 개발의 밑바탕이 된다. 1897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개의치 않고 다른 서구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금본위제를 도입했는데, 이 덕분에 러시아 화폐의 교환성이 확립되면서 해외 자본 유입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비테의 재무장관 재임 기간 당시에 러시아 제국은 연평균 8~9%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여 공업국으로 발돋움했다. 같은 기간의 프랑스는 1,6%, 영국은 2.4%, 독일은 4.9%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을 보였었다. 철도의 총연장은 두 배로 늘었고 관련산업도 크게 촉진되어 선철, 철강, 석탄 생산량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1898년 한 해 동안만 해도 거의 3,000베르스타의 철도가 부설되었고 그가 재직하는 동안 러시아 제국 내 철도 길이는 25,000베르스타가 늘어났다. 티스푼 공사가 벌어지던 첼랴빈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의 노선도 비테가 팔을 걷어붙여 본격적으로 재개될 수 있었다고 한다.[2]

대외정책에 있어선 실리적인 온건파로 평가받으며 당시 러시아 군부와 외무성이 주도하던 보스포루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의 확보에는 회의적이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각료들 사이의 다수의견인 신중론과 자신의 강경론을 모두 채택했다. 신흥공업국으로 부상한 일본이 가진 지정학적 이점이 극동에서 러시아에 불리한 조건을 만들어 낼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무장관으로서 재임하던 기간 동안 육군과 해군의 긴축을 요구하며 상당수의 군비확장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는데 이 때문에 러일전쟁 전후, 당시 지상군 사령관이었던 알렉세이 쿠로팟킨 전 육군장관과 문서상으로 책임공방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3] 대체로 (1880~90년대에) 그는 러시아가 영국 등 유럽 열강과의 과도한 경쟁에 부족한 재원을 쏟는 대신 동방의 미개척지 개발에 집중하길 원했다.


4. 각료평의회 의장 시절[편집]


러일전쟁 패전 직후 러시아 측 전권대사의 자격을 가지고 포츠머스 조약에 참여했다. 이 조약에서 일본의 전쟁수행력이 바닥났던 사실을 빌미로 러시아에 유리한 강화안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사실 러시아도 일본보다 사정이 나았을 뿐이지 전쟁을 지속하자면 무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며[4] 더불어 정치, 사회적으로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비테는 이를 절대 티내지 않았고[5] 탁월한 언플실력으로 미국을 상대로 러시아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였던 것이[6] 성공요인이었다. 비테는 이후 백작 칭호를 수여받는다.


5. 러시아 제국 초대 총리[편집]


자신의 주도하에 대대적인 내정개혁을 추진하길 원했으나 비테의 권력강화를 경계하던 니콜라이 2세 및 보수적인 각료들의 견제를 받다 결국 일선에서 후퇴한다. 이후 재정 말기의 또다른 수완가로 평가받는 표트르 스톨리핀이 비테의 개혁작업을 이어받는다.


6. 기타[편집]


자신의 정치일생을 집대성한 회고록을 남겼다. 그러나 지나치게 왜곡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7.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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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러시아 제국의 대학에는 대부분의 유럽 대학이 그러했듯 학부 없이 바로 석사 진학이 가능한 학과가 있었다.[2] 이런 비테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러시아 제국은 러일전쟁에서 더 심한 망신을 당했을 확률이 높았다.[3] 쿠로팟킨은 전쟁 책임이 알렉산드르 베조브라조프 일당의 농간과 비테가 주도한 동청철도 사업 및 아시아 정책, 군비삭감에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의 주장은 러시아 내외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4] 비테가 포츠머스로 출국 전 육군대신을 만나서 상황을 물어보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선 1년의 시간과 20만 명의 추가적인 인명 손실을 각오해야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연해주와 사할린을 점령당할지도 모른다는 답변을 들었다. 한편 해군의 경우 전력의 90퍼센트를 상실한 터라 해군대신은 영토 할양 정도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였다.[5] 지금의 시각으로는 어처구니가 없지만 영국조차도 극동에서 손을 뗀 러시아가 인도를 침공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정도였다.[6] 특히 일본이 배상금 문제를 거론하자 AP통신을 통해 일본이 돈을 받아내기 위해 평화를 짓밟고 있다는 식의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이게 미국 언론에 먹혀들었다. 결국 일본은 배상금을 한푼도 못 받고 조선과 남사할린만 할양받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