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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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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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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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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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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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넨베르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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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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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마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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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기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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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아라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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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이프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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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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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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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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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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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아르투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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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카므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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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거 뱅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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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한 잠수함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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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의 선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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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프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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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폴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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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를리체-타르노프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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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아르투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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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손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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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즈기르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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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비에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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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됭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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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치 호수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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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틀란트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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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실로프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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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아라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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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벨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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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해협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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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렌스키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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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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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앵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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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미이엘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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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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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세르비아 침공
Serbian campaign
Serbienfeldzug 1914
Српска кампања
Сръбска кампания
제1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의 일부
파일:350px-Vojska_Ada_Ciganlija.jpg
아다 시가니리야[1]에 주둔하고 있는 세르비아 왕립군 병사들
날짜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3일
장소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알바니아 공국 전역
교전국
협상국
동맹국
파일:세르비아 왕국 국기.svg 세르비아 왕국
파일:몬테네그로 왕국 국기.svg 몬테네그로 왕국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1915~)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3공화국(1915~)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제국(1917~)
파일:그리스 국기(1863-1924, 1935-1973).svg 그리스 왕국(1917~)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국(1915~)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차르국(1915~)
지휘관
세르비아 왕립군
파일:Flag_of_the_Royal_Serbian_Army.svg.png 페타르 1세
파일:Flag_of_the_Royal_Serbian_Army.svg.png 알렉산다르 1세
파일:Flag_of_the_Royal_Serbian_Army.svg.png 라도미르 푸트니크

몬테네그로 왕국군
파일:몬테네그로 왕국 국기.svg 니콜라 1세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쟁기(1918).svg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쟁기(1918).svg 오이겐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독일 제국군
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불가리아 왕립군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페르디난트 1세
병력
1914년
파일:Flag_of_the_Royal_Serbian_Army.svg.png 세르비아 왕립군
- 대략 420,597명

1915년
파일:Flag_of_the_Royal_Serbian_Army.svg.png 세르비아 왕립군
- 420,597명 이상
1914년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쟁기(1918).svg 황립 및 왕립 육군
- 대략 462,000명

1915년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쟁기(1918).svg 황립 및 왕립 육군
- 462,000명 이상
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독일 육군
- 12,000명 이상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왕립군
- 37,000명 이상
피해 규모
파일:세르비아 왕국 국기.svg 세르비아 왕립군
- 대략 320,000명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쟁기(1918).svg 황립 및 왕립 육군
- 264,500명 이상
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독일 육군
- 대략 12,000명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왕립군
- 대략 37,000명
결과
1914년 세르비아 왕국의 부분적 승리.
1915년 동맹국의 승리.
1918년 협상국의 승리.
영향
러시아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불가리아 왕국의 세르비아 분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쟁수행능력 급감.

1. 개요
2. 배경
3. 과정
3.1. 양국의 준비
3.2. 침공 개시와 초반
3.3. 침공 중후반
4. 결과
5. 오헝제국의 졸전



1. 개요[편집]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1914년부터 1915년까지 발칸반도 서부 일대에서 협상국의 일원인 세르비아 왕국몬테네그로 왕국,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불가리아 왕국, 독일 제국동맹국 간에 벌어진 전역. 세르비아 전역이라고도 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린 전역이자 세르비아 왕국이 몇배는 큰 대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상대로 놀라운 선전을 보여준 전역으로, 발칸 반도의 소국 세르비아는 협상국의 빈약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국왕 페타르 1세의 지도 아래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유럽 5대 열강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면적인 침공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 세르비아는 1915년 독일 제국불가리아 왕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이후 국력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했다. 세르비아군 잔당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918년이 되어서야 프랑스군의 지휘 하에 조국을 해방한다.


2. 배경[편집]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베를린 회의로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지배 중이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전격적으로 합병했다. 남슬라브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오헝제국을 자극하던 세르비아 왕국과 후원자인 러시아 제국은 오헝 제국의 도발에 크게 분노하였다. 이에 러시아 제국은 발칸 반도로 진출을 시도하는 오헝제국을 견제하고 발칸 반도를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삼기 위해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불가리아와 그리스 등 발칸 반도의 소국들끼리의 동맹을 주선하였고 이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그리스 4개국의 발칸 동맹이 결성되었다.

1912년 발칸 동맹이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 영토 분할을 목표로 오스만 제국에게 선전포고하면서 제1차 발칸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여기서 예상을 깨고 발칸 동맹이 오스만에게 승리하면서 오스만의 발칸 반도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가 얼마만큼의 땅을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발칸 동맹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였고 결국 불가리아가 마케도니아 전체를 목표로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배신하고 선제 공격을 하면서 제2차 발칸전쟁이 발발하였다. 하지만 몬테네그로가 세르비아-그리스 편에 가담하고 또 불가리아와 영토 갈등이 있던 루마니아와 오스만이 개입하면서 1대 5로 몰린 불가리아가 전쟁에서 패했고 불가리아는 1차 발칸 전쟁에서 얻은 영토 중 일부를 토해내야 했다. 그리고 불가리아 자신들의 정당한 영토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여 세르비아와 그리스에 대한 여론, 특히 동포들이 살고 있던 북마케도니아 일대를 빼앗아간 세르비아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한편 세르비아는 보스니아를 오헝에게 빼앗긴 이후 꿩 대신 닭이자 아드리아해로의 진출구 겸해서 알바니아를 목표로 삼아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차지하는데 성공했는데 열강들의 개입으로 알바니아를 토해내야 했다. 손해를 보기 싫었던 세르비아는 자신들이 점령한 북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하면서 이것이 제2차 발칸 전쟁의 원인이 되었는데, 이 때 세르비아에게 알바니아를 토해내라고 주도적으로 압력을 넣은 열강이 바로 보스니아 문제를 놓고 싸우던 오헝 제국이었고 이에 자국의 확장을 2번씩이나 방해한 오헝 제국에 대한 세르비아 내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또 발칸 전쟁의 결과 발칸 반도의 소국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발칸 반도 소국들의 동맹을 주선하여 러시아의 대 오스트리아 정책은 파탄이 났고, 특히 산 스테파노 조약 이후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이어오던 불가리아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발칸 반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는 세르비아 밖에 없었다. 결국 러시아는 오헝 제국과 전쟁을 하는 일이 있어도 세르비아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총을 맞아 암살당했는데, 프린치프는 대세르비아주의자로 보스니아를 세르비아에 합병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를 발칸 반도 지배의 기회로 보고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역시 발칸 반도 진출을 노리며 슬라브 민족주의를 내세우던 러시아 제국이 총동원령을 선포하며 세르비아 편에 서서 참전하자 독일 제국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을 들어 맞섰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의 발칸 지배를 경계하던 영국과 프랑스도 참전했고,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번지고 말았다.


3. 과정[편집]



3.1. 양국의 준비[편집]


세르비아는 그 지리적 입지 때문에 발칸 반도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세르비아의 지형은 거친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2개의 유서 깊은 무역로가 지나는 곳이기도 했다. 하나는 중부 유럽과 에게 해를 이어주는 '마름모꼴 고랑'으로 알려진 모라바-마리차 통로[2]였고, 또 다른 하나는 모라바-바르다르 통로였다. 세르비아의 북쪽 국경지대는 드리나 강과 다뉴브 강이 천연의 방어선을 제공하고 있었다. 두 강 모두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깊이의 강이 아니었다. 또 1914년 당시, 세르비아에서 다뉴브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는 수도에 있는 교량이 유일했다. 세 번째 장벽은 사바 강이었다. 이 강 주변에는 거의 통과가 불가능한 습지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세르비아의 도로 교통망은 전국적으로 아주 열악했다. 여기에다 세르비아 인구의 대부분은 강인한 소작농들이었다.

전운이 짙어짐에 따라 1914년 7월 26일, 세르비아 왕국은 동원령을 하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참모총장인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전쟁을 빨리 시작하고 싶어 안달복달했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려고 하는 시점에서는 오헝제국군이 전쟁을 치를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콘라트는 러시아의 공격에 대비해 러시아 국경지대에도 8개 육군 군단을 배치해야만 했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했다. 다음 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군함들이 다뉴브 강을 타고 올라와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포격했고, 오스카 포티오레크 대장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제2, 4, 6군은 사바 강과 드리나 강을 도하할 준비를 했다. 당시 세르비아 왕국군은 45만 명의 병력과 엉성한 훈련을 받은 몬테네그로인 보조병들만을 갖추고 있었다. 세르비아 왕국군 총사령관 라도미르 푸트니크 원수는 압도적인 적을 맞아 세르비아 병사들의 목숨을 최대한 비싼 값에 팔 각오를 다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불가리아 왕국에 이르는 450마일에 달하는 국경선을 지켜야 했던 푸트니크는 휘하의 3개 군을 세르비아 중부 지역에 배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불가리아 왕국 어느 쪽이 침공해와도 대처할 수 있도록 병력을 배치했다. 푸트니크는 소수의 병력으로 주요 하천 방어선을 지키고 있다가 오헝군의 주요 도하 지점을 포착한 후 자신이 선택한 장소에 전략을 집중해 오헝군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짰다. 푸트니크가 정확하게 오헝군의 주공 방향을 예측한 덕분에 오헝제국군이 실제로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해왔을 때 세르비아군은 이를 맞아 싸울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반면, 포티오레크의 전략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었고,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그의 병사들 중 상당수는 동포 슬라브인 세르비아군과 싸울 의욕도 없었다. 당시 군기가 해이해져 있던 오헝군은 세르비아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3.2. 침공 개시와 초반[편집]


8월 12일,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9일 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세르비아군은 자다르 전투에서 오헝제국군을 공격개시선으로 밀어내버리면서 퇴각하는 오헝군을 쫓아 보스니아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오헝제국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도 결의에 찬 세르비아군의 반격에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9월 7일, 포티오레크는 다시 한 번 세르비아군을 공격하여 너무 멀리 진출해 나온 세르비아군을 보스니아에서 축출하려고 했다. 세르비아군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11월 초가 되자 세르비아군은 이제 끝장이 난 것처럼 보였다. 불리한 입장에 있던 세르비아군은 11월 29일, 어쩔 수 없이 수도 베오그라드까지 내주고 퇴각을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12월 3일, 질서정연하게 남서부 방면으로의 철수작전을 끝마친 푸트니크는 콜루바라 강에서 반격에 나섰다. 이때까지도 페타르 1세는 소총과 50발의 실탄을 지니고 최전선에 머물러 있었다. 독기 어린 세르비아군의 반격에 오헝군은 다시 한 번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12월 15일 무렵, 세르비아군 정찰대가 다시 수도 베오그라드로 진입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세 번째 침공 역시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콜루바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27만 명에 달하는 피해를 입고 133문의 야포까지 잃었으며 거듭된 졸전의 책임자였던 포티오레크는 결국 오이겐 대공으로 교체되었다.


3.3. 침공 중후반[편집]


이후 오헝군이 전황이 급박해진 러시아 전선에 주의를 돌리면서 세르비아 전선은 소강상태를 맞게 되었다. 1915년 2월, 세르비아에 대한 구원 부대로서 영국 지중해 함대의 트로우브리지 제독이 4.7인치 야포와 해군 분견대를 이끌고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자존심 높은 영국 해군 장성으로는 이례적으로 트로우브리지 제독은 독일 제국의 정보망을 교란하기 위해 세르비아군 장성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한편,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세르비아군은 티푸스의 만연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다. 4월 무렵에는 4만 8,000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티푸스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1915년 여름 동안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는 국지적인 소규모 교전 이상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 동안 세르비아는 격심한 전투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겨울에 대비해 전력을 축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독일 제국은 베를린-바그다드 철도를 다시 개통하고 싶어했지만, 세르비아를 정복하기 전에는 그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세르비아와의 전투에서 발생한 엄청난 손실에 경악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단독으로 세르비아를 공격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계속 전황을 주시하고 있던 불가리아 왕국에게 참전할 것을 요청했다. 당시 불가리아는 만약 영국과 프랑스가 세르비아와 그리스령 마케도니아 지방의 광대한 영토를 제공한다면 협상국 편에 설 것을 고려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행동에 먼저 나선 것은 독일 제국이었다. 1915년 9월 6일,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 3개국 사이에 세르비아 분쇄를 목표로 한 협약이 체결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위협을 느낀 협상국은 불가리아에게 마케도니아의 일부를 제공하겠다는 최후 제안을 했다. 그 정도의 영토로는 만족하지 못한 불가리아는 협상국의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세르비아의 운명은 그렇게 끝장이 났다.

세르비아 북부 국경지대에서 독일 제국군까지 가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제야 협상국들은 유사시 세르비아를 돕도록 규정한 조약을 준수할 것을 그리스 왕국에게 끝까지 요구하지 않았던 것이 외교적으로 큰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9월 22일, 한 프랑스 외교관이 세르비아에 대한 지원 기지로서의 적합성을 평가하기 위해 테살로니키(살로니카)에 도착했다. 그리스의 도움을 얻기 위해 세르비아는 그리스에게 국경지대의 영토를 할양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은 마지못해 협상국이 테살로니키에 상륙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주었다. 또 그리스 총리는 불가리아에 그리스군의 동원을 중지할 테니 불가리아도 동원을 중지해달라는 마지막 요청을 해보았지만, 불가리아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어차피 그 무렵에는 만사가 소용없는 상태였다. 세르비아의 운명에 대한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던 것이었다.

당시 세르비아 북부 국경지대에 집결해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독일 제국군을 지휘한 것은 얼마 전 고를리체-타르누프 지구에서 러시아 제국군에게 파멸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던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원수였다. 세르비아군을 철저하게 쳐부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마켄젠은 새로 동원된 불가리아군을 포함한 오스트리아-헝가리&독일 연합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10월 5일, 엄청난 포병 사격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독일 연합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다음 날,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가 동맹군의 공격을 받았고, 영국 해군 포병들은 10월 9일 수도가 함락될 때까지 끝까지 싸웠다. 동맹군은 결국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세르비아군을 상대로 격렬한 시가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7,000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제 전세는 완전히 동맹군 쪽으로 기울어 11월 23일에는 세르비아군이 남쪽과 서쪽으로 철수하면서 미트로비차의 대규모 요새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점령당했다. 같은 날, 불가리아군과 폰 갈비츠 대장이 이끄는 독일군이 합류했다. 그래도 영국-프랑스 협상군은 테살로니키의 교두보로부터 푸트니크의 세르비아군을 지원할 수 있었지만, 불가리아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세르비아군은 더 이상 테살로니키의 협상군으로부터의 지원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압도적인 동맹군의 공격에 밀린 세르비아군은 퇴각을 계속했지만, 이들의 사기는 여전히 높았고 세르비아 남성들 역시 앞다투어 군에 입대했다. 또 세르비아군의 전의와 전투 능력은 여전히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했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은 강력한 동맹군의 맹렬한 공격 앞에서 한발 한발 조금씩 뒤로 밀려났고, 11월 1일에는 크라구예바츠의 대규모 무기고까지 폭파해버리고 퇴각해야만 했다. 세르비아군이 코소보 평야까지 밀려나자, 세르비아 정부는 미트로비차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 겨울이 다가오는 가운데 11월 16일 모나스티르 시가 불가리아 손에 떨어졌다. 이제 세르비아군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불가리아가 북마케도니아 일대를 점령하면서 그리스와의 마지막 연락로도 차단당한 상태에서 티푸스까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모든 병사들은 평소의 절반 분량의 급식만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야포는 겨우 200문밖에 남지 않았다.

11월 23일, 임시 수도 미트로비차와 프리슈티나가 함락되자, 세르비아군 최고사령부는 전 국토를 포기하고 알바니아를 가로질러 아드리아 해안으로 후퇴해 연합군에 합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20만 명의 세르비아군 잔존 병력은 엄동설한에 알바니아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안전한 아드리아 해안 지역으로 철수해야만 하는 악몽 같은 상황을 맞게 되었고 동료부대의 후퇴를 엄호하던 세르비아군 후위대는 동맹군에게 전멸당하고 말았다. 아드리아 해로 철수하던 도중 세르비아군은 혹한의 날씨와 굶주림, 후퇴 행렬을 추격해 온 오스트리아-헝가리 공군의 폭격, 세르비아군에게 적대적인 현지 알바니아인들의 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후퇴하는 세르비아군을 따라 같이 피난길에 오른 22만 명의 피난민 역시 피난 도중에 엄청난 고난을 겪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대후퇴(Great Retreat), 또는 알바니아 골고타(Албанска голгота)라는 이름의 비극 속에서 최종 목적지인 아드리아해 해안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한 세르비아군은 12만 명, 피난민은 6만 명이었다. 뒤늦게 영국-프랑스-이탈리아 협상군은 후퇴하는 세르비아군을 구원하기 위해 알바니아에 함대를 급파했지만 8만 명의 군인과 16만 명의 피난민들이 이미 목숨을 잃은 상황이었다.

일단의 프랑스군이 뒤늦게나마 세르비아군을 돕기 위해 테살로니키에서 바르다르 계곡으로 진출했지만, 압도적인 군세의 불가리아군과 맞닥뜨리면서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괴멸의 위기에 빠진 프랑스군은 영국군 제10아일랜드사단이 측면을 원호해주는 틈을 타서 간신히 테살로니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협상군은 테살로니키로부터 내륙으로 14마일 들어간 지점에 구축된 포위된 캠프라고 불린 주둔지로 철수해서 남은 겨울을 그곳에서 보냈다.

협상군으로서는 그다지 상서로운 출발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이 무렵 협상군은 그리스 국왕에게 살아남은 세르비아군이 코르푸 섬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코르푸 섬은 이미 그리스의 허락도 받지 않고 상륙한 프랑스군 해병대가 점령한 상태였다. 1916년 1월 15일, 션진(Shëngjin)과 두러스, 블로러 세 항구에서 협상군 함대에 의한 세르비아인의 소개가 시작되었다. 2월 6일 세르비아 정부와 최고사령부가 코르푸 섬으로 이동했고 2월 말까지 14만 명이 코르푸 섬으로 이동했다. 테살로니키를 수비하고 있던 협상군은 스트루마 강의 교량을 현지 그리스군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폭파해 버렸다. 마케도니아 전역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4. 결과[편집]


세르비아 왕국은 방어에 실패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불가리아 왕국에게 분할되었다. 하지만 끈질기게 저항한 끝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혀 전쟁 초기부터 전쟁수행능력을 급감시키는 역할을 해주었고, 협상국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자 그 일원으로서 승전국이 되어 오히려 영토를 확장하고 다시 부활하게 된다.


5. 오헝제국의 졸전[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여 준 졸전의 가장 큰 이유는 비단 그들의 전력이 약체였기 때문이 아니라 작계가 꼬였기 때문이다. 전쟁 이전, 오헝 제국의 주력인 A 집단군은 R계획에 따라 가장 큰 위협인 러시아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갈리치아에 전개되어 있었다. 발칸 방면에는 고작 8개 사단으로 구성된 발칸 최소집단군이 배치되었고, 유동적인 증원예비대인 B 집단군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갈리치아 또는 발칸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이는 세르비아와 러시아에 포위된 형태였던 오스트리아의 안보적 상황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는 독일 제국의 목표와 배치되는 것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국은 서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가 달랐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에 따른 1순위 목표인 프랑스를 상대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잡아 주어야 했고, 반대로 오스트리아는 확전을 막기 위해 세르비아를 빠르게 끝장내는 동안 독일이 러시아를 견제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양 국가는 서로의 속내를 알지 못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에 자신들의 작계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오스트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국 사학자 A.J.P 테일러와 독일 연방군 군사사학자 게하르트 그로스 등 현대의 군사사학계에서는 독-오 양국 참모부의 불통을 두고 놀라울 정도라고 지적한다.

결국 전쟁이 벌어지자 독일군이 프랑스로, 오스트리아군 발칸 최소집단군과 B 집단군이 세르비아로 몰려가며 동부전선은 거의 비어버렸고, 그 사이 러시아는 동원을 거의 마무리한 채 공격을 개시했다. 이에 당황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러시아 방면으로 군대를 재배치해야 했다. 그나마 독일은 1개 군단만을 다시 동부로 보냈으나,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데다 독일의 일방적인 강압에 못 이긴 오스트리아는 발칸 전선으로 향하던 B집단군 전체를 180도 돌려 다시 갈리치아로 올려보냈다.

결국 세르비아 전선에 투입된 오스트리아군 발칸 최소집단군 8개 사단 병력은 졸지에 증원예비대가 사라진 채 유리한 방어선을 끼고 있는 세르비아군을 홀로 상대해야 했다. 당연히 그들은 세르비아에 대한 큰 전력 우위를 점하지 못했으며 이는 결국 전선의 교착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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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르비아 수도인 베오그라드에 위치한 하중도이다.[2] 이 통로는 베를린-바그다드 철도의 노선으로 선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