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앙 그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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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편집]
프랑스의 은퇴한 테니스 선수이다. 175cm의 작은 신장[1] 에도 불구하고 빠른 발로 코트 이곳 저곳을 누비며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특유의 우아한 테니스를 구사하였다.
1980~1990년대 프랑스 테니스를 이끌었던 야닉 노아, 기 포르제를 이어 2000년대 초중반 프랑스 테니스를 대표했던 선수이다.
2. 커리어[편집]
그랜드슬램 성적
- 호주 오픈 : 4강 - 2001
- 프랑스 오픈 : 4강 - 2001
- 윔블던 : 4강 - 2003, 2004
- US 오픈 : 3라운드 - 2005, 2007
세바스티앙 그로장의 연도별 메이저대회 성적표
기타 대회 성적
3. 선수 경력[편집]
어린 시절 스키와 테니스를 병행하였다. 1987년 테니스의 길을 선택한 이후 페트리스 베스트[3] 의 테니스 팀에 합류하여 주니어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1992년 프랑스 국립 스포츠 체육 연구소 INSEP에 합류하는 등 성공적인 길을 걷는듯 보였으나, 청소년기 무릎 성장 질환인 오스굿-슐라터병[4] 으로 인해 1994년 팀에서 나와 고향 마르세유로 복귀한다. 이후 자신의 코치인 베나드 프리츠[5] 와 함께 포핸드 훈련에 전념하였고 1995년 프랑스의 단복식 주니어 챔피언으로 성장한다.
주니어 시기 단식 90승 20패, 복식 58승 12패를 기록하며 단복식 모두 세계 1위에 이름을 올리는 등의 성공적인 유년기를 보낸 그로장은 1996년 프로의 문을 두드린다. 1996년 641위로 배정받은 이래 첫 성인 무대였던 알리칸테 챌린저에서 4강에 진출하며 기대를 높였고, 1997년 19살의 나이에 슬로바키아에서 개최된 ŠK 슬로반 브라티슬라바 챌린저에서 우승하며 프랑스 오픈에 자력으로 출전하였다.
1998년 카사블랑카 오픈에서 4강에 진출하며 세계 랭킹을 100위권 초반으로 올렸고 1998년 4월에는 에콰도르의 테니스 신예 니콜라스 라펜티를 꺾고 커리어 첫 마스터스 승리를 올린다. 프랑스 오픈에서는 1라운드에서 카를로스 모야를 만나는 탓에 아쉽게 1라운드 탈락했지만[6] , 이어 참가한 윔블던에서 세계 11위 펠릭스 만티야 등을 비롯한 출중한 선수들을 꺾고 4라운드에 진출하여 피트 샘프라스와 호각의 승부를 펼치며 세상에 이름을 알린다. 이후 특별한 활약은 없었지만, 꾸준한 성적을 남기며 연말 랭킹 100위 안쪽인 87위로 1998년을 마무리 한다.
1999년 셰르부르 챌린저에서 우승, 코펜하겐 오픈 4강 진출을 토대로 세계 랭킹을 74위로 갱신하였다. 이어 참가한 마이애미 마스터스에서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성과를 보여준다. 64강에서 남미 테니스 No. 1 구스타보 쿠에르텡을 16강에서 당시 세계 랭킹 1위였던 카를로스 모야를 꺾으며 마스터스 결승에 진출하였다. 결승에서는 1996년 윔블던 챔피언인 리하르트 크라이첵을 상대하였고 첫세트를 6-4로 제압하지만, 3세트를 내리 내주며 준우승으로 마무리하였다. 이후 애틀란타 오픈 준우승, 델레이 비치 오픈 4강, 프랑스오픈과 윔블던 32강 진출 등을 기록하며 연말 랭킹 27위를 기록하였고, 프랑스의 데이비스컵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는 영광을 누렸다.
2000년 1~3월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지난해 준우승한 마이애미 마스터스 역시 32강 탈락에 그치며 20위까지 올렸던 랭킹이 29위로 떨어진다. 4월 둘째주 참가한 카사블랑카 오픈에서 커리어 통산 3번째 준우승을 기록하였지만 지속되는 부진 속 랭킹이 35위까지 떨어진다. 클레이 투어에서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자국에서 개최되는 프랑스 오픈 32강에서도 예브게니 카펠니코프에 패하며 부진을 거듭하던 도중 윔블던 전초전인 노팅엄 오픈에서 커리어 첫번째 투어급 타이틀을 들어올렸다. 10월 말 참가한 슈투트가르트 마스터스[7] 4강 진출의 성과를 올리며 세계 랭킹을 18위까지 끌어올렸고 스톡홀름 오픈 4강을 끝으로 세계 19위에 랭크되며 2000년을 마무리 한다.
2001년 시드니 오픈에서 로저 페더러를 꺾고 4강에 진출하였고, 호주 오픈에서 토마스 요한슨[8] , 전직 세계 2위 출신의 마그누스 노르망,카를로스 모야 등을 이기고 4강에 진출한다. 4강전에서는 당시 세계 18위이자 자국 동료인 아르노 클레망과 5세트 접전을 펼쳤는데, 1세트와 2세트를 이기고도 3개 세트를 내리 지며 아쉽게 결승 진출에는 실패하였다.[9] 이어 출전한 마르세유 오픈에서 준우승, 몬테카를로 마스터스에서 4강 진출을 기록하였고, 2001년 5월에는 Top 10에 이름을 올린다. 또한 프랑스 오픈에 참가하여 8강에서 안드레 애거시를 이기는 쾌거를 이루며 4강에 진출하는 성과를 보였고, 4강에서는 클레이코트 스페셜리스트인 알렉스 코레차에 아쉽게 패하였다. 하반기에는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지만, 한 해의 마지막 마스터스이자 조국에서 열리는 파리 마스터스에서 예브게니 카펠니코프를 제압하며 우승하는 유종의 미를 거두었고, 이로 세계 랭킹이 7위로 상승하며 마스터스 컵[10] 진출 티켓을 거머쥐게 된다. 마스터스 컵에서는 라운드 로빈과 결승전 모두 휴잇에게 패하며 3승 2패의 성적으로 준우승을 기록하였고, 이어 참가한 데이비스 컵에서 활약하며 자국에 5년만의 데이비스 컵 우승을 선물한다.
2002년 호주 오픈 2라운드에서 5세트 접전 끝에 패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드 코트 시즌에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몬테카를로 마스터스 4강 진출, 프랑스 오픈 8강 진출을 이뤄내며 클레이 코트에서 제법 성공적인 커리어를 남긴다. 부상으로 인해 프랑스 오픈 이후 잔디 시즌을 건너뛴 그로장은 북미 하드 코트 시리즈에 참여하여 케나다 마스터스 8강, 인디아나폴리스 오픈 8강 등의 성과를 내며 커리어 내내 유독 약했던 US 오픈[11] 에서의 성과를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자국 동료 아르망 크레망과의 5세트 풀 접전 끝에 패하며 2라운드 탈락을 기록하게 된다. 물론 데이비스 컵 4강에서 만난 미국의 앤디 로딕과 제임스 블레이크를 모두 제압하며 클레이 코트에서의 화려함을 보였다. 이어 자국의 리옹 오픈에서 8강, 마드리드 마스터스에서 4강, 상트페테브루크 오픈 우승을 연속적으로 이뤄내며 커리어 하이 랭킹인 4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포인트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파리 마스터스 16강에서 카를로스 모야에 63 67[10] 16으로 패하였고, 마스터스 컵 준우승 포인트 역시 회수되며 순식간에 17위로 강등[12] 되어 마스터스 컵 출전 기회는 박탈되었다. 연말 개최된 데이비스 컵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하여 팀 러시아를 상대하였으며 오랜 숙적이자 라이벌리인 예브게니 카펠니코프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이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2003년 전초전 없이 호주 오픈에 참여하여 엄청난 대진운 속에 무난하게 8강까지 진출한다.[13] 2월 참가한 로테르담 오픈 4강을 제외하고는 별 성적을 기록하지 못하다가 윔블던 전초전인 퀸즈 클럽 오픈에서 준우승을 기록한다. 특히 윔블던 디펜딩 챔피언이자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었던 레이튼 휴이트를 8강에서, 대영제국 테니스의 자존심이자 2번의 퀸즈클럽 결승 진출자였던 팀 헨먼을 4강에서 제압한 것이 이례적이였다. 결승에서는 앤디 로딕에 36 36으로 패한다. 퀸즈 클럽의 기세를 이어 윔블던에서도 활약하였다. 전 세계 4위 출신의 토마스 엔크비스트를 1라운드에서 제압하였으며, 16강에서는 당해 프랑스 오픈 우승자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를 제압하였고, 8강에서는 다시 한 번 팀 헨먼을 제압하며 커리어 첫 윔블던 4강에 진출한다. 4강에서는 최고의 기량을 뽐내던 마크 필리포시스
에 패하였지만, 부진하던 커리어에 변곡점이였으며 3개 표면에서 그랜드 슬램 4강 진출이라는 기록을 추가하게 된다. US 오픈에서는 약속한 듯이 부진하였지만 도쿄 오픈에서 준우승하며 포인트를 방어하였고 2년만에 연말 랭킹 TOP 10에 이름을 올리며 2003년을 마무리 한다.
2004년 호주오픈에서 올해도 운 좋은 시드를 밟으며 8강까지 무난하게 진출하였지만 다시 만난 애거시에 부상으로 기권패한다. 약 2개월간의 휴식을 마치고 인디언 웰스 마스터스에서 복귀하여 16강에 진출하며 건재하게 돌아왔음을 알렸다. 클레이 시즌에는 별 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으나 올해도 퀸클럽 오픈에서 결승에 진출하며 포인트를 방어한다.[14] 올해도 결승에서는 앤디 로딕에 패한다. 이후 참여한 윔블던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펼치며 4강까지 무실 세트로 올라왔지만, 차세대 황제 로저 페더러에 26 36 67[6]으로 한 세트도 건지지 못한체 완패당한다.[15] 8월 아테네 올림픽에 프랑스 국가대표로 참여하여 8강 진출의 성과를 이룩한다. 16강에서 펠리시아노 로페스를 제압하였지만 8강에서 페르난도 곤잘레즈에 26 62 46으로 패한다. 연달아 참가한 US 오픈 2라운드에서 토미 하스에 46 46 61 16으로 패한 것을 끝으로 2004년을 마무리 한다.
2005년 호주 오픈 전초전 도하 오픈에서 이형택을 63 60으로 압도하며 8강에 진출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2년 연속 8강에 진출했던 호주 오픈은 2라운드 탈락한다. 이 패배를 시작으로 마이애미 오픈 전까지 5연패를 당하며 부진한다. 클레이 시즌의 첫 대회인 휴스턴 오픈에서 준우승을 기록하였다. 8강에서 안드레 애거시를 제압하였지만 이번에도 로딕에 26 26으로 패하며 준우승한다. 프랑스 오픈에 참여하여 2라운드에 만난 다비드 상기네티를 상대로 베이글을 기록하기도 하는 등 활약을 펼쳤지만 16강에서 흙신으로 성장할 스페인의 신예 세계 5위 라파엘 나달에 46 63 06 36으로 패배한다. 윔블던 3라운드에서 노박 조코비치를 제압하는 등의 활약을 보이며 8강에 진출하였지만 로딕에 63 26 16 63 36으로 풀세트 패배를 당하며 랭킹이 34위까지 떨어지게 된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US 오픈에서 3라운드에 진출하며 커리어 하이를 갱신하였다. 2005년 이후 별다른 활약 없이 세계 25위로 한 해를 마무리 한다.
2006년 기적같이 호주 오픈 8강에 진출한다. 마르세유 오픈에서 4강에 진출하며 팬들로 하여금 부활을 기대하게 만들었으나, 클레이 시즌 부진에 이어 근 몇년간 활약했던 잔디 코트 성적조차 부진하며 이도 저도 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한다. 이후 대회에서 메츠 오픈 4강에 진출한 것을 제외하며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페더러 나달 등의 독식 체제로 호혜를 받아 연말 랭킹은 32위로 무난한 마무리를 짓는다.
2007년 호주 오픈 3라운드에서 다비드 날반디안에 5세트 패배를 당하였다. 개인 커리어는 부진하였지만 데이비스 컵에서는 예선과 8강에서 승리를 올리며 자국의 자존심을 높이는데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진을 거듭하며 세계 랭킹이 81위까지 떨어졌지만 기적적으로 리옹 오픈에서 우승하며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 타이틀을 획득한다.[16]
2008년 호주 오픈 3라운드에 진출하는 저력을 보였지만 이 해 7승 15패로 전성기와는 거리가 멀어진 모습을 완전히 보였다.
2009년과 2010년 2년간 2승 8패의 성적만을 기록하며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한다.
4. 타 선수들과의 상대 전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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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바스티앙 그로장의 전적이 우세한 상대
- 질 시몽 : 1승 0패
- 파라돈 스리차판 : 2승 1패
- 페르난도 베르다스코 : 2승 1패
- 펠리시아노 로페즈 : 4승 0패
- 토미 하스 : 5승 4패
- 요나스 비요크만 : 4승 1패
- 토마스 요한슨 : 3승 2패
- 미하일 유즈니 : 4승 1패
- 제임스 블레이크 : 3승 1패
- 니콜라스 라펜티 : 8승 1패
- 이형택 : 2승 0패
- 세바스티앙 그로장과 전적이 동률인 상대
- 노박 조코비치 : 1승 1패
- 예브게니 카펠니코프 : 3승 3패
- 카를로스 모야 : 3승 3패
- 조 윌프리드 송가 : 1승 1패
- 세바스티앙 그로장의 전적이 불리한 상대
- 로저 페더러 : 2승 3패
- 라파엘 나달 : 0승 3패
- 피트 샘프라스 : 0승 3패
- 팀 헨먼 : 3승 4패
- 레이튼 휴이트 : 3승 6패
- 안드레 애거시 : 3승 4패
- 페르난도 곤잘레스 : 0승 2패
- 마라트 사핀 : 2승 7패
- 리샤르 가스케 : 1승 2패
- 다비드 페레르 : 1승 3패
- 토마스 엔크비스트 : 1승 4패
- 로빈 소더링 : 1승 4패
- 니콜라이 다비덴코 : 0승 2패
- 스탠 바브린카 : 0승 2패
- 앤디 로딕 : 1승 8패
- 마르코스 바그다티스 : 0승 2패
- 다비드 날반디안 : 1승 2패
- 토미 로브레도 : 2승 6패
5. 여담[편집]
- 약 15년간의 커리어 동안 헤드사의 Head Radical Tour TwinTube 630 XL 만을 사용하였다.[17]
- 2018년 야닉 노아에 이어 프랑스의 데이비스컵 주장에 임명되었다.
- 빠른 발을 보유한 선수답게 잔디 코트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보였다. 통산 잔디 코트 성적은 승률 65.3%와 타이틀 1개이다.
- 은퇴 후 리샤르 가스케, 뤼카 푸이[18] , 아르튀르 피스 등 자국 후배들을 지도하였고 이들이 모두 탑 티어 선수로 성장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 한동안 프랑스의 테니스 No.1[19] 이였던 만큼 자국에서 개최되는 대회에서 유리함을 많이 가졌다. 대표적으로 2001년 파리마스터스 챔피언쉽 포인트 상황에서 애매하게 떨어진 그로장의 볼에 아웃을 심판이 선언하자 ‘우’라고 야유가 쏟아졌다.[20]
6.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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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소년기에 무릎 성장 질환인 오스굿 슐라터 병을 앓았다.[2] ATP 투어 파이널의 전신[3] 프랑스의 테니스 선수이자 코치이다.[4] 이로 인해 그로장의 신장은 175cm밖에 자라지 못하게 된다.[5] 프랑스의 테니스 선수로 세계 91위까지 이름을 올렸었다. ATP 투어 우승 경력을 없지만 준우승 4회를 기록하였으며, 1980년대 노아, 르콩트, 포르제 등과 함께 프랑스 테니스를 이끌었다. 그로장의 유년기부터 은퇴 때까지 함께한 코치이기도 하다.[6] 모야는 이 대회에서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획득한다.[7] 2001년을 끝으로 마스터스 대회에서 배제되었다.[8] 2002년 호주오픈을 우승하였다.[9]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로장의 그랜드 슬램 경기 중 가장 결승 진출에 가까웠던 대회로 평가받는다.[10] ATP 투어 파이널의 전신[11] 작은 신장을 극복하기 위해 그로장이 선택한 플레이는 강한 포핸드 샷과 빠른 풋워크였는데, 하드 코트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표면을 지닌 US오픈 특성상 그의 플레이가 장점이 되기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요즘 시대는 몰라도 과거의 라켓은 전적으로 그로장과 같은 베이스 라이너에게 불리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베이스 라이너였던 안드레 애거시 조차도 강력한 파워를 자랑했던 서브 앤 발리를 극복하고자 반박자 빠른 리턴 전술을 채택하였다.[12] 이 정도로 다이나믹한 순위변동이 있었던 주된 이유로는 당대 포인트 제도가 현재의 기준과 다르기 때문이다. 작성일인 2024년 10월을 기준으로 세계 4위 노박 조코비치와 세계 17위 로렌조 무세티의 포인트 격차는 3785 포인트로 파이널 준우승 600-800포인트와 마스터스 우승 1000포인트를 모두 잃더라도 세계 5-6위는 유지한다. 하지만 당대 시스템의 경우에는 1위 레이튼 휴이트와 세계 20위 알렉스 코레차의 포인트 차이가 2700점밖에 안됐을 정도로 밀집된 랭킹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포인트가 큰 대회의 타이틀을 방어하지 못할 경우 랭킹 변동이 심했다. 2004-2007년 로저 페더러가 압도적인 성적일 기록하기 전까지는 1위~20위의 랭킹포인트 차이가 거의 없는 구도가 계속되었다.[13] 8강에서 안드레 애거시에 36 26 26으로 무력하게 패했는데, 애거시를 만나기 전까지 만난 4명의 선수 중 순위가 가장 높은 선수가 세계 30위의 니콜라스 라펜티였다...[14] 4강에서 이형택과 67(4) 76(3) 62의 호각을 펼쳤다.[15] 사실 2004년 윔블던에서 다음과 같은 활약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페더러를 만나기 전까지 붙은 선수들의 랭킹이 모두 낮았기 때문이다. 128강-8강까지 86-69-84-34-66위 선수와 경기를 펼쳤다. 즉, 상위시드 선수를 한 명도 만나지 않았다.[16] 여담으로 그로장은 이 대회 1라운드에서 결승까지 모두 프랑스 선수들만을 상대하였다.[17] 톱티어 선수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라켓에 페인팅만 바꿔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라파엘 나달이 대표적이다.[18] 2018년 3월 세계 10위를 기록한 배태랑 선수이다.[19] 2001~2004년[20] 당시 파리 마스터스의 경우에는 카펫 코트였기 때문에 심판의 판정이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