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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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 식민지 초대 총리
세실 로즈
Cecil Rhodes


파일:external/www.capetowndiamondmuseum.org/Cecil_John_Rhodes1.jpg

본명
세실 존 로즈
Cecil John Rhodes
출생
1853년 7월 5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하트퍼드셔
사망
1902년 3월 26일 (향년 49세)
직업
정치인, 기업인, 자선사업가

1. 개요
2. 생애
2.1. 남아프리카 식민지의 총리가 되다
2.2. 통치
2.3. 최후
3. 로즈의 흔적들
4. 옥스퍼드 대학교
5. 기타



1. 개요[편집]


영국의 정치인, 기업인, 자선사업가. 대영제국케이프 식민지[1]의 전 총리이자 학살자다.#

로즈는 활발한 아프리카 개척 사업으로 조국인 영국에 많은 식민지와 부를 안겨다주었으며, 영국 국내에서는 애국주의의 상징이었고 동시에 유명한 자선사업가로 당대 가장 존경받는 위인 중 하나였다. 그는 우수한 학생을 발굴하고 학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로즈 재단을 설립하였고, 로즈 재단에서 옥스퍼드 대학교 학생에게 수여하는 로즈 장학금(Rhodes Scholarship)은 오늘날에도 가장 전통 있고 영예로운 장학 제도 중 하나로 꼽히며, 이를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인재가 발굴되었다.[2]

우리가 세계를 더 정복할수록 인류에게는 더욱 이득이다.

The more of the world we inhabit, the better it is for the human race.

세실 로즈, 《신념의 고백》, 1877년 6월 2일 성명


한편 다문화, 다인종, 다원주의가 발전한 현대에 들어서는 대표적인 영국인 침략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윤리적인 면이 평가되어 많은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는 백인이 우월하다는 굳은 신념에 기반한 인종주의우생학을 강하게 지지하였으며, "앵글로색슨족이야말로 가장 우수한 인종이고, 앵글로색슨에 의해 지구 전체가 지배되는 것이 인류의 행복으로 연결된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러한 신념 아래 그는 아프리카 전체를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자의 야욕을 드러냈고, 영국이 식민지를 운영하던 시기 고대 로마보다도 훨씬 구시대적이고 반인권적인 식민정책을 펼치게 됨으로써 스스로의 야만성을 드러내었다. 그의 명령 아래 자행되었던 많은 착취와 수탈, 강제노동, 고문학살의 진상과 피해 사실이 드러나면서 로즈가 지원한 사업이나 그를 묘사한 조각상과 작품들을 제거하자는 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2. 생애[편집]



2.1. 남아프리카 식민지의 총리가 되다[편집]


나는 어제 런던 이스트 엔드[3]

의 실업자 집회에 가서 '빵을 달라'는 절절한 연설만 듣고 오다가 문득 제국주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우리는 영국의 4천만 인구를 피비린내 나는 내란으로부터 지키고, 과잉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야만 한다.[4] (중략) 당신이 내란을 피하려 한다면 당신은 제국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거의 무슨 범죄를 안 당하고 싶으면 범죄자가 되라는 급 나는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인종이며 따라서 우리가 세계에 많이 거주할수록 인류에 좋다고 주장한다.

세실 로즈, 《유언집》 中


지주 출신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선천적으로 병약해 로즈가 17세가 되던 해 아버지에 의해 기후가 온화한 남아공에 보내어 요양토록 했다. 건강을 되찾은 로즈는 동생과 함께 킴벌리에서 광업에 종사했다.[5] 그러던 중 다이아몬드를 채굴하여 얻은 자금을 기반으로 다이아몬드 채굴권 투기, 채굴장용 양수 펌프 대여업을 하여 상당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리고 런던의 재벌 로스차일드의 대출도 받아 1880년 "드비어스 광산 회사"[6]를 설립하였다. 드비어스 광산 회사는 킴벌리에 위치한 대다수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독점했으며, 한 때 세계 다이아몬드 생산의 90%를 독점했었다.

로즈는 드비어스 광산 회사를 통해 트란스발 공화국의 광업에도 진출하였고, 얼마 안 가서 세계 최대의 광산 재벌이 되었다. 아울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철도·전신·신문 업계도 장악했다. 이런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한 로즈는 1880년에는 케이프 식민지 의원, 1884년 케이프 식민지의 재무장관이 되었고, 1890년에는 마침내 총리까지 올랐다. 그리고 틈틈이 무기 및 보급품 조달을 대가로 광산의 소유권을 양도 받는 등 경제 활동에도 주의를 놓치지 않았다.


2.2. 통치[편집]


결국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1889년 본국의 정부까지 매수해 식민지의 치안•통치권을 가진 '대영제국 남아프리카 회사(BSAC)' 설립 허가를 받아냈다. 그리고 1894년 로즈는 BSAC을 명분으로 원정군을 아프리카 각지에 파견해 영국 본토의 4.5배에 해당하는 광대한 토지를 점령하여 BSAC의 지배하에 두었고, 그 토지를 로즈의 이름을 따서 로디지아라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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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 정책의 일환이였던 카이로에서 케이프타운을 잇는 통신망(전신선)의 완성을 알리는 만평
그렇게 남아프리카 식민지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자타칭 남아프리카의 나폴레옹이라 불리던 로즈의 최종 목표는 대영제국의 지배하에 남아프리카를 통일한 연방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런 목표 하에 로즈는 트란스발 공화국을 합병할 계획을 세웠다. 트란스발의 영국인들에게 비밀리에 무기와 탄약을 보내 반란을 선동하고, 이를 트란스발 공화국이 진압 할 때 일어날 소요를 빌미로 마타베레 랜드 총독인 제임슨이 지휘하는 BSAC군을 파견해 한방에 먹어치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고, 일단 국경을 넘어버린 제임슨 총독 지휘하의 BSAC 군은 보어인들의 맹렬한 반격에 당해 포위당하고 결국 전군이 포로로 사로잡힌다. (제임슨 사건)


2.3. 최후[편집]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로즈뿐만이 아닌 대영제국 자체가 단체로 욕을 먹는 거대한 스캔들로 비화되어 결국 로즈는 1896년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사임한다. 그러나 이런 굴욕에 대영제국 정부 및 시민들은 복수심에 불탔고, 어느정도 영국에 대한 비난이 잦아들자 제2차 보어 전쟁을 일으켰고, 로즈는 당연히 참전하나 졸전을 면치 못해 4개월간 포위되었고, 이로인해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더니 전쟁 종결 2개월 전 49세의 나이로 무이젠바구에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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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짐바브웨 마토보에 있는 산봉우리 World 's View Lookout에 안장되었으며, 근처 작은 기념관에 유품데스마스크가 보관되어 있다.

죽을 때까지도 골수 제국주의자였는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집행인들에게 전 세계에 영국 지배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비밀 단체를 만들어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영국의 지배하에 두고 남아메리카, 팔레스타인, 중국과 일본, 말레이 반도, 그외 태평양의 섬들 중 영국령이 아닌 모든 곳에 정착민들을 보내 식민화를 추진하도록 교시되었다. 거기에 미국을 다시 대영제국으로 회복시킬 것, 제국을 통합시킬 것, 그리고 전쟁을 더 이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인류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위대한 세력의 수립을 얻기 위해 식민지가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체제를 마련하라 지침을 내렸다.



3. 로즈의 흔적들[편집]



  • 6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유산 대부분을 옥스퍼드 대학교에 기증했고, 그 돈은 현재 '로즈 장학금'으로 사용되었다.

  • 2015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 대학교에는 학교의 부지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로즈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반발로 철거되었다.

  • 마찬가지로 남아공에 로즈의 이름을 딴 로즈 대학교가 있는데, 이곳의 학생들이 대학 이름을 바꾸라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

  • 로즈가 재산을 기부한 조국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도 로즈 동상 철거 운동이 불었었다. # 심지어 이중에는 로즈 장학금을 탄 학생들도 일부 있었는데, 그 중에 아프리카인 학생이 있어 '장학금 반납이나 하라'는 등의 인종차별적 비난을 들었다. 이에 대해 철거 측은 '배상금'으로 받아들였다 반론하고 있다.#, ##, ### 옥스퍼드 대학교와 보수 매체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양성'을 명분으로 철거를 거부하고 있고, 과거 졸업한 동문 상당수가 기부금을 빌미로 협박해 철거를 무산시켰다. #


4. 옥스퍼드 대학교[편집]


세실 로즈는 600만 파운드라는 막대한 기부금을 옥스퍼드 대학교에 기부하였으며, 로즈 재단로즈 장학금을 운영하고 있다. 외국인들의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 학위과정 유학을 지원하는 장학금이다.

로즈 장학금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받기 어려운 장학금이자 명망있는 장학금으로 손꼽히는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석사나 박사 과정을 하는 동안 등록금은 물론이고 기숙사비와 생활비, 심지어 여행비까지 전액 지원해준다. 미국영연방에 속해 있는 나라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뽑는데, 로즈의 뜻에 따라 높은 학문적 성과와 야망이 있고, 봉사심과 리더십을 갖췄고, 거기다가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스포츠를 오랫동안 해온, 그야말로 지덕체를 완벽하게 갖춘 학생들을 뽑는다.

당초 로즈 장학금은 백인 남자만 뽑는 것이 원칙이었고, 1970년까지 흑인 학생을, 1977년까지 여학생을 뽑지 않았다. 현재는 국적과 성별 구분 없이 전세계의 우수한 인재들을 가리지 않고 뽑는다. 한 짐바브웨 출신 흑인 장학생은 "로즈가 나를 포함해 수많은 유색인종이 로즈 장학생으로 뽑힌 것을 알게 된다면 지금 관 안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을 것 아닌가. 내가 옥스퍼드에서 배운 학문을 조국에서 짐바브웨인들을 위해 이용한다면 그것으로 복수는 충분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017년부터 제국주의적 악습을 타파한다는 뜻으로 장학생 선발지를 영연방 국가들만이 아닌 전세계 모든 국가들로 확대했다. 2019년에는 한국인도 합격한 바 있다. #

South Parks Road에 있는 Rhodes House도 옥스퍼드 대학교가 세실 로즈를 기념하여 건립한 건물이다.

2016년, 남아프리카공화국 국적의 로즈 장학금 장학생[7]이 High Street 옆의 Oriel College(오리엘 컬리지) 건물에 있는 세실 로즈 동상 철거를 요구했다가, 옥스퍼드 대학교 동문들의 반발로 동상 철거가 무산되었다고 보도되었다. # 2020년, 미국에서 촉발된 흑인 관련 인종차별 논란이 전 세계로 퍼지면서 옥스퍼드에서도 다시 세실 로즈 동상 철거 요구가 불거졌다. #

또한 같은 시기인 2020년 6월 14일, 로즈 재단(Rhodes Trust) 측에서는 당시 미국에서 촉발되어 세계적으로 번진 인종차별 논란(Black Lives Matter)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임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


시위자들이 옥스퍼드 대학교의 세실 로즈 동상 철거를 요구하다


5. 기타[편집]



  • 로즈와 같은 시대에 살던 마크 트웨인은 제국주의에 반대해서 반어법으로 로즈를 찬양하면서 비꼬았다.


  • 폴란드 입헌왕국의 공작부인이자, 시온 의정서의 허구성에 대해 중요한 증언을 한 카타르지나 라지뷔우(Katarzyna Radziwiłłowa, 1858~1941)가 로즈를 스토킹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로즈에게 청혼했으나, 거부 당하자 복수 차원으로 약속 어음을 위조하여 로즈에게 빚을 떠넘기려고 했다가 남아공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장수하기는 했지만, 폴란드 입헌왕국이 러시아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고 2차대전 중 폴란드가 나치 침략을 받던 차에 사망하는 등... 말년이 좋지 못하였다.

  • 2015년 짐바브웨에서 세실 로즈의 이름을 붙인 사자 세실이 사살되었는데[8] 공원의 마스코트라며 홍보해 세계적으로 어그로를 팍팍 끌어댔다. 그런데 세실을 사살한 사람은 현지인이나 흑인, 기타 제국주의의 피해자도 아닌 백인미국인치과의사였다.

  • 한국에서도 로즈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는데, 1990년대까지 한국에는 상당수의 문물이 미•일을 통해 들어왔던 탓에 식민 지배에 관해 부정적 인식이 약한 두 국가에서 세실 로즈에 대해 옹호하는 시각으로 쓰여진 책들이 한국에 들어왔던 바가 크다. 2013년에도 로즈를 옹호하는 서적들이 번역되어 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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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2] 과거에는 인종 및 국적 제한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폐지되었으며, 한국인 장학생도 선발된 바 있다.[3] 런던 동쪽에 위치했던 지역. 당시 런던의 대표적인 빈민가였다. 잭 더 리퍼의 살인사건이 벌어진 화이트채플도 이스트 엔드에 있었다.[4] 내전을 벌이고 싶지 않다면 외부를 착취해서 자원을 수급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제국주의를 '백인의 짐' 같은 위선적인 표어를 내걸기보다 현실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훗날 나치가 레벤스라움을 내세워 2차대전을 일으킨 것과 비슷한 논리다.[5] 당시 남아공은 광업이 흥했었다.[6] 오늘날 유명한 다이아몬드 취급 회사 드비어스의 전신.[7] 옥스퍼드 대학교 재학생[8] 당연히 현지 흑인이 아닌 백인 관리사가 붙여준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