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와 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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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센터 공로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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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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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매리언 앤더슨, 프레드 아스테어, 조지 발란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리처드 로저스
1979년
에런 코플런드, 엘라 피츠제럴드, 헨리 폰다, 마사 그레이엄, 테네시 윌리엄스
1980년
레너드 번스타인, 제임스 캐그니, 애그니스 데밀, 린 폰탠, 리언타인 프라이스
1981년
카운트 베이시, 케리 그랜트, 제롬 로빈스, 헬렌 헤이스, 루돌프 세르킨
1982년
조지 애벗, 릴리안 기시, 베니 굿맨, 진 켈리, 유진 오르만디
1983년
캐서린 던햄, 엘리아 카잔, 프랭크 시나트라, 제임스 스튜어트, 버질 톰슨
1984년
레나 혼, 대니 케이, 잔카를로 메노티, 아서 밀러, 아이작 스턴
1985년
머스 커닝햄, 밥 호프, 아이린 던, 앨런 제이 러너, 프레더릭 로, 베벌리 실즈
1986년
루실 볼, 레이 찰스, 제시카 텐디, 험 크로닌, 예후디 메뉴힌, 앤서니 튜더
1987년
페리 코모,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베티 데이비스, 네이선 밀스타인, 알윈 니콜라이
1988년
앨빈 에일리, 조지 번즈, 마이어나 로이, 알렉산더 슈나이더, 로저 L. 스티븐스
1989년
해리 벨라폰테, 클로데트 콜베르,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메리 마틴, 윌리엄 슈만
1990년
디지 길레스피, 캐서린 헵번, 라이즈 스티븐스, 줄리 스턴, 빌리 와일더
1991년
베티 콤덴, 로이 에이커프, 아돌프 그린, 헤럴드 니콜라스, 로버트 쇼, 그레고리 펙
1992년
라이어널 햄프턴,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진저 로저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폴 타일러
1993년
자니 카슨, 아서 미첼, 게오르그 솔티, 스티븐 손드하임, 매리언 윌리엄스
1994년
커크 더글러스, 아레사 프랭클린, 모튼 굴드, 해럴드 프린스, 피트 시거
1995년
자크 당부아즈, 메릴린 혼, 비비 킹, 시드니 포이티어, 닐 사이먼
1996년
에드워드 올비, 베니 카터, 조니 캐쉬, 잭 레먼, 마리아 톨치프
1997년
로렌 바콜, 밥 딜런, 찰턴 헤스턴, 제시 노먼, 에드워드 빌렐라
1998년
빌 코스비, 프레드 엡, 존 칸더, 윌리 넬슨, 앙드레 프레빈, 셜리 템플
1999년
빅터 보르게, 숀 코너리, 주디스 재스민, 제이슨 로바즈, 스티비 원더
2000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척 베리, 플라시도 도밍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안젤라 랜스버리

21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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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줄리 앤드류스, 밴 클라이번, 퀸시 존스, 잭 니콜슨,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2년
제임스 얼 존스, 제임스 리바인, 치타 리베라, 폴 사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2003년
제임스 브라운, 캐럴 버넷, 마이크 니콜스, 로레타 린, 이작 펄만
2004년
워렌 비티, 오시 데이비스 & 루비 리, 엘튼 존, 조앤 서덜랜드, 존 윌리엄스
2005년
토니 베넷, 수잔 파렐, 줄리 해리스, 로버트 레드포드, 티나 터너
2006년
주빈 메타, 돌리 파튼, 스모키 로빈슨, 스티븐 스필버그, 앤드루 로이드 웨버
2007년
레온 플라이셔, 스티브 마틴, 다이애나 로스, 마틴 스코세이지, 브라이언 윌슨
2008년
모건 프리먼, 조지 존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트와일라 사프, 더 후
2009년
멜 브룩스, 데이브 브루벡, 그레이스 범브리, 로버트 드 니로, 브루스 스프링스틴
2010년
멀 해거드, 제리 허먼, 빌 존스, 폴 매카트니, 오프라 윈프리
2011년
바바라 쿡, 닐 다이아몬드, 요요마, 소니 롤린스, 메릴 스트립
2012년
버디 가이, 더스틴 호프먼, 레드 제플린, 나탈리아 마라코바
2013년
마티나 아로요, 허비 행콕, 빌리 조엘, 셜리 맥클레인, 카를로스 산타나
2014년
알 그린, 톰 행크스, 퍼트리샤 맥브라이드, 스팅, 릴리 톰린
2015년
캐롤 킹, 조지 루카스, 리타 모레노, 오자와 세이지, 시실리 타이슨
2016년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글스, 알 파치노, 마비스 스태플스, 제임스 테일러
2017년
카르멘 드 라발라데, 노만 레어, 글로리아 에스테판, LL 쿨 J, 라이오넬 리치
2018년
셰어, 필립 글래스, 레바 매킨타이어, 웨인 쇼터, 해밀턴 팀 (린 마누엘 미란다, 토마스 카일, 알렉스 라카뫄르, 앤디 블렝큰불러)
2019년
어스, 윈드 앤 파이어, 세서미 스트리트, 샐리 필드, 린다 론스태드, 마이클 틸슨 토머스
2020년
데비 엘렌, 조안 바에즈, 가스 브룩스, 미도리, 딕 반 다이크
2021년
저스티노 디아즈, 베리 골디, 론 마이클스, 베트 미들러, 조니 미첼
2022년
조지 클루니, 에이미 그랜트, 글래디스 나이트, 타니아 레온, U2 (보노, 디 에지, 애덤 클레이튼, 래리 뮬렌 주니어)
2023년
퀸 라티파, 르네 플레밍, 빌리 크리스탈, 디안 워윅, 배리 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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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지휘자
(2019)

명예 단원
(1992)

명예 단원
(2004)

명예 단원
(2014)

다니엘 바렌보임
다니엘 바렌보임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명예 단원
(2016)

명예 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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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단원
(2019)


오자와 세이지
마리스 얀손스
주빈 메타





오자와 세이지
小澤 征爾 | Ozawa Seiji

파일:오자와 프로필.jpg

출생
1935년 10월 1일 (88세)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펑톈성 펑톈[1]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직업
지휘자
가족
배우자 오자와 베라[2]
장녀 오자와 세이라[3]
장남 오자와 유키요시[4]
조카 오자와 켄지


2015년 10월 1일, 마르타 아르헤리치,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본인의 80세 생일 축하 공연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및 청소년기
2.2. 유럽 유학과 미국행(뉴욕 필 부지휘자)
2.3. 토론토 심포니 음악 감독, 빈필과 베를린필 데뷔
2.4.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음악 감독
2.5. 29년 최장기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
2.6. 동양인 최초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음악 감독
2.7. 2010년 이후
3. 평가
4. 가족


1. 개요[편집]


일본지휘자.[5]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으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 및 청소년기[편집]


1935년 만주국 펑톈성 펑톈에서 치과의사이자 만주국 협화회 장춘지부장이었던 오자와 가이사쿠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당시 가이사쿠가 친하게 지내던 만주군 참모인 이타가키 세이지로(板垣 征四郎)와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1941년 어머니, 형들과 함께 일본 도쿄로 건너왔다.

1945년 우연히 피아노를 치는 걸 보고 재능을 알아챈 아버지[6]와 큰 형은 아버지가 시계를 팔아서 산 피아노를 리어카에 싣고 집에 가지고 왔고, 이 피아노로 세이지는 열심히 연주했다고 한다.

1948년 세이죠 학원 중등부에 입학했는데, 당시 집안이 상당히 가난했기에 어머니가 부업까지 하면서 가르쳤다고 한다.

1951년 세이죠 학원 고등부에 입학하게 되자 어머니의 먼 친척이자 지휘자인 사이토 히데오가 운영하는 지휘학원에 입학했고, 사이토의 권유로 1952년 토호여학교 고등부(남녀공학)에 편입하며 1955년 토호단기대학에 입학하여 1957년 졸업하게 된다. 1958년 군마 교향악단을 지휘하거나 도쿄 필하모니 부지휘자로 활동했다.


2.2. 유럽 유학과 미국행(뉴욕 필 부지휘자)[편집]


1959년 스승 사이토 히데오의 조언으로 유럽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유럽 유학 당시 오자와는 생계를 위해 유럽에 주재한 일본 기업과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모터사이클 세일즈맨 생활을 했다. 1959년 프랑스 브장송(Besançon)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1위를 하며 유럽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브장송 콩쿨의 심사위원이었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샤를 뮌슈는 그를 보스턴으로 초청했고 거기서 오자와는 샤를 민쉬와 피에르 몽퇴에게 지휘를 배우면서 탱글우드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뮌슈와 몽퇴에게의 배움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오자와가 보스턴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1960년 쿠세비츠키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밑에서 지휘를 배우게 되어 다시 서베를린으로 떠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그를 주목했고, 1961년 번스타인은 오자와를 뉴욕 필의 부지휘자(assistant conductor)로 채용했다. 뉴욕 필의 부지휘자 시절인 1962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를 지휘하며 서방에서 지휘자로 공식 데뷔했다.

1962년 여름 뉴욕 필 부지휘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최고의 명문 오케스트라인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척 권위적인 단원들과 아직 20대 후반의 새파랗게 젊은 신참 지휘자였던 오자와는 극심한 마찰을 겪게 되었다. 결국 일부 단원들이 오자와의 지휘를 거부하면서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나중에 오자와가 세계적인 거장이 된 후에도 NHK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는 복구되지 않았고, 만년에야 가까스로 화해했다. 도쿄에서의 갈등 후에 오자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1964년 번스타인은 다시 그를 부지휘자로 채용했다.


2.3. 토론토 심포니 음악 감독, 빈필과 베를린필 데뷔[편집]


이듬해인 1965년 토론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면서 뉴욕 필 부지휘자를 그만두게 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토론토 심포니에서는 1969년까지 재임했다.

1965년부터 RCA와 음반을 취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로 협주곡을 반주하는 녹음을 맡았으나 이듬해부터 RCA는 그를 명문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주선하여 차이코스프키, 베토벤, 슈베르트 교향곡 등을 취입했다.

1966년에는 스승 카라얀에 의해 세계적인 음악 축제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처음으로 지휘하며 그의 이름을 유럽에 알리게 되었다. 같은 해 하반기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도 데뷔했다.

1968년 뉴 재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고문이 되었고, 같은 해에 러시아혼혈인 이리에 미키[7]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작가 오자와 세이라, 배우 오자와 유키요시가 태어났다.

1969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 코시 판 투테를 지휘하며 오페라 지휘자로 데뷔했다.


2.4.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음악 감독[편집]


1970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여 1976년까지 재임했다. 1972년 필립스와 계약을 맺고 음반을 녹음하기 시작했고, 그와 샌 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이전까지 사실상 거의 음반 녹음이 없었기에 오자와의 음반 작업은 악단이 크게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1973년 오자와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유럽 투어를 이끄는 등 샌프란시스코 시절은 오자와 본인에게나 악단에게나 그 명성을 세계적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1973년 오자와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직을 겸임하게 된 이후 1974년 일본인 바순 단원을 채용하는 문제로 오케스트라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2.5. 29년 최장기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편집]


1973년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에 취임하여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음악 감독에 취임하게 되는 2002년까지 29년간 재임하여 악단 최장수 지휘자가 되었다. 보스턴 심포니 음악 감독에 취임하면서 세계적인 음반사인 도이치 그라모폰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초기에 그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프랑스 음악이나 러시아 음악 등을 주로 취입했으나 이는 음반사의 의도였을 뿐 오자와 자신은 카라얀에게 배운 독일적인 음색을 입히기 위해 주력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오자와는 클라우스 텐슈테트, 쿠르트 마주어 등 독일 출신 지휘자들을 보스턴 심포니에 객원 지휘자로 초청하기 위해 각별히 애를 썼다고 밝혔다. 또 오자와는 뉴욕 필 부지휘자 시절 번스타인에게 말러를 배웠고 이후 말러는 오자와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가 되었는데, 77년 보스턴 심포니와 녹음한 말러 교향곡 1번은 젊은 시절 그를 대표하는 명반으로 자리잡았으며, 한국에서도 그의 명성을 확립해준 음반이 되었다. 보스턴 심포니는 1994년 새 탱글우드 콘서트 홀을 건립하여 "세이지 오자와 홀"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주요 객원 지휘자 중 한 명이 되었다. 특히 카라얀은 본인이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말러 교향곡 연주를 오자와에게 맡겼다고 한다.

1980년대 이후 카라얀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로린 마젤, 리카르도 무티, 다니엘 바렌보임, 클라우스 텐슈테트와 함께 베를린 필의 차기 상임지휘자 후보군으로 꼽혔다. 80년대 후반 카라얀을 대신해서 베를린 필의 해외순회 공연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선출되었다. 대신, 카라얀 사후 첫 베를린 필하모닉 송년 음악회는 오자와가 지휘하게 되면서 베를린 필과의 관계가 여전히 원만함을 보여주었다.[8]

1980년대 이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주요 객원 지휘자가 되었으며, 특히 1990년대 빈 필을 가장 자주 지휘하는 핵심 지휘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또한 빈 필의 해외순회 공연을 여러차례 이끌기도 했다.

1984년 10년 전에 사망한 스승 사이토 히데오를 추모하기 위해 일본 국내 및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이토 히데오의 제자들과 함께 《토호 학원 사이토 히데오 메모리얼 오케스트라》를 결성해서 사이토 히데오 메모리얼 콘서트를 도쿄와 오사카에서 개최했다. 이 오케스트라는 훗날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로 발전하게 된다.


2.6. 동양인 최초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음악 감독[편집]


2002년 1월 1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

2002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이후 최장기 음악 감독으로 재임했다. 2006년 대상포진폐렴에 걸리는 바람에 음악 감독 활동을 일시 중단했지만 회복 후 다시 음악 감독직에 복귀했고 이후에도 수년간 계속해서 활동했다.

2010년 1월 식도암 진단을 받은 후 음악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음악 감독직에서 물러난 직후인 2010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예 단원으로 추대되었다.


2.7. 2010년 이후[편집]


2010년 8월 식도암 수술 후 7개월 만에 무대에 복귀했다.# 복귀한 이후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 외에 다른 악단의 음악 감독이나 수석 지휘자직은 맡지 않고 있다. 2010년 7월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2010년 11월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명예 단원으로, 2016년 4월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명예 단원으로 추대되었다. 하버드 대학교를 포함한 5개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5년 만 80세를 맞이한 이후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면서, 하나의 공연 전체를 지휘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그래서 80세 이후의 공연들은 대부분 전반부는 악단 내 단원이 지휘를 대신하거나 단원들 간 실내악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오자와는 당일 공연의 후반부 지휘만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2020년부터는 거동 자체가 불편해지면서 휠체어 없이는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정도가 되었고, 공식적인 대외 활동량을 매우 축소한 상태이다.


3. 평가[편집]


역사상 가장 성공한 동아시아 출신 지휘계의 거장이다. 그동안 클래식 음악계에서 동양인이 좀처럼 진입하지 못해온 대표적인 영역이 지휘 분야인데, 오자와가 실력과 명성을 인정받으면서 첫 성공 사례가 된 것. 활동 초기에는 동아시아인이 서양인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그럼에도 오자와는 카라얀과 번스타인이라는 당시 가장 위대한 거장들의 지지를 꾸준히 받아 성장하였으며, 이 두 거장은 자신들이 음악 감독으로 재직하던 베를린 필하모닉과 뉴욕 필하모닉에서 오자와가 객원 지휘를 할 수 있도록 여러 차례 기회를 기회를 주었고 오자와는 전부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또한 카라얀은 오자와에게 빈 필하모닉과 빈 국립 오페라단 객원 지휘의 기회도 지속적으로 주선해 주었고, 오자와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 깐깐하다는 빈 필하모닉 단원들의 환대를 받으며 수십 년간 관계를 이어갔다.

오자와가 악단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단순히 지휘봉을 휘두르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도 음악에 심취한 듯 흥에 겨워 들썩거리는 퍼포먼스가 특징이며, 독일의 일부 언론에서는 '지휘하는 파가니니'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동양인으로서 인도 출신인 주빈 메타가 오자와보다 조금 먼저 성공했지만, 인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인도아리아인인도유럽어족으로서 기본적으로 유럽인과 동일한 인종으로 간주되는데다가, 주빈 메타는 인도에서도 이란계인 소수 민족 파르시 출신이기 때문에 인종적으로 서양인과 동일하다. 때문에 오자와의 성공은 메타의 성공과 차별화된다.[9]


4. 가족[편집]


오자와 세이지의 아들인 오자와 유키요시는 배우이다.[10] 그의 둘째 형인 오자와 토시오(小澤俊夫)는 일본의 유명한 독문학자이며[11], 토시오의 아들이자 세이지의 조카인 오자와 켄지는 일본 시부야계를 대표했던 가수이자 사회 운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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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중국 랴오닝성 선양시[2] 러시아 혼혈의 모델, 여배우. 결혼 전에는 이리에 미키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3] 에세이스트.[4] 배우, 타키가와 크리스텔의 전 연인. 현 부인인 아나운서 쿠와코 마호와는 2021년에 결혼했다.[5] 2002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당시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다양한 국적의 연주자들이 자신들의 모국어로 새해 인사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오자와 세이지의 바로 앞 차례에서 서양인 연주자가 일본어로 인사를 했다. 관중들이 폭소하는 와중에 오자와는 중국어로 새해 인사를 했다.[6] 오자와 가이사쿠는 가족들이 도쿄로 가고 나서 베이징에서 여러가지로 활동했고, 전쟁 말엽에는 중일전쟁에 대한 일본군의 태도를 강하게 비난했는데 당시 그의 뒷배였던 이타가키나 이시와라는 관동군에 없었지만 그들과의 친분 덕택에 결국 일본군에 의하여 일본으로 강제 추방 처리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일본이 패전하게 되었는데 이때 중국측은 그를 현상수배했다고 한다.[7] 이리에의 조부는 러시아 백군으로 활동하다 내전 패전 후 만주로 건너갔다. 이후 도쿄로 유학을 간 이리에의 부친은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한동안 도쿄에서 살다가, 만주에 볼 일이 있어서 간 직후 행방불명되었는데 2019년 NHK 패밀리 히스토리 방송을 통해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패전 직전 만주로 간 직후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하는 바람에 도망치지 못한 채 그대로 포로로 잡혀, 스파이죄 등으로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아 카자흐스탄 강제수용소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수감 9년째에 사망했다.[8] 1989년 12월 31일 송년 음악회 당시 베를린 필하모니 대공연장에서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지휘하였다. 이 날 공연 호응이 매우 좋았으며, DVD로도 발매되었다.[9] 물론, 주빈 메타의 성공도 극적이긴 했다. 아무리 인도아리아인유럽인과 같은 코카소이드라고 해도, 인종차별은 보통 피부색을 가지고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서, 영국에서는 상대적으로 피부가 다소 검은 편인 남아시아계 사람들을 두고 파키스탄인이라는 뜻의 멸칭인 파키(Paki)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상 동아시아인 못지않은 차별에 시달렸으니, 백인들과 얼마나 가까운 인종 출신이냐가 그 사람의 성공담을 까내릴 근거는 되지 못한다.[10] 유키요시는 아나운서 타키가와 크리스텔과 교제하였고 결혼 발표까지 했지만, 크리스텔의 섹스 비디오 스캔들이 터진 이후 결별했다. 이후 크리스텔은 2019년 정치인 고이즈미 신지로와 결혼했다.[11] 중일전쟁 시기 일본 제국의 병폐를 직접 본 사람이다 보니, 그는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참고로 오자와 토시오는 어렸을 때 얼굴 쪽에 심한 화상을 입었고 그로 인한 안면장애 때문에 학창 시절 집단괴롭힘을 당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