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루이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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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스페인군
3.2. 영국-인디언 연합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80년 5월 26일 스페인 루이지애나(오늘날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스페인군과 영국-인디언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스페인군이 승리했다.

2. 배경[편집]


1779년 스페인이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전쟁에 뛰어든 이래, 영국 정부는 스페인령 루이지애나에 주둔한 스페인군이 북미 독립 세력과 합세하여 미시시피 강을 장악한 후 동진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미시시피 상류에 위치한 세인트루이스 마을을 장악해 적이 미시시피 강을 확보하는 걸 저지하기로 했다. 세인트루이스 마을은 미시시피 강과 미주리 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18마일 떨어진 곳에 설치된 곳으로, 1764년 프랑스 상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7년 전쟁 시기 프랑스는 스페인이 자국과 연합하여 영국에 대항하는 대가로 세인트루이스 마을을 스페인에게 넘겨줬다. 하지만 스페인은 이곳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 세인트루이스를 지키기 위한 병력, 보급품, 자금 등을 거의 보내지 않았다.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세인트루이스엔 약 900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프랑스인들이었고 스페인군은 소규모로 존재했다. 주민들은 주변의 인디언들에게서 모피를 구입하고 그 대가로 총기를 지급했고, 인디언들은 총기를 구매한 후 다른 부족들과의 전쟁에 써먹었다. 이때문에 미네소타, 아이오와, 위스콘신 일대에 거주하던 수 족과 위네바고 족은 자신들의 라이벌 부족에게 총기를 공급하는 세인트루이스 주민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이 두 부족은 미시시피 강 건너 동쪽 둑에 있는 영국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국 편을 들었다.

1778년 스페인령 루이지애나 총독 페르난도 데 레이바는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한 뒤 조지 로저스 클라크가 이끄는 독립 지지파 민병대에게 물자와 자금을 공급해줬다. 클라크는 스페인의 지원을 바탕으로 애팔래치아 서부 일대의 영역을 확대했다. 하지만 1779년 스페인이 전쟁에 뛰어들었을 때 세인트루이스는 군사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군인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거주민은 프랑스인이었으며, 주변에는 그들에게 반감을 품은 인디언들이 많았다. 레이바는 일단 200명 이상의 민병대를 조직했지만, 그들은 군사 경험이 거의 없었고 대다수는 뱃사공, 농부, 사냥꾼, 상인으로 일했다. 따라서 영국 정부는 자신들에게 협조하는 인디언들과 연합해 공세를 개시한다면 세인트루이스를 쉽게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1780년 초, 미칠리마키나크 요새의 사령관 페트릭 싱클레어는 영국 정부로부터 세인트루이스 마을을 접수하라는 명령을 전달받고 즉시 에마누엘 해세 대위가 지휘하는 원정군을 조직했다. 얼마 후 레이바는 영국군과 인디언 군대가 연합하여 세인트루이스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마을 앞에 1마일 이상의 참호를 파고 돌탑을 건설하게 했으며, 가능한 모든 사람들을 모아 병력을 증강시켰다. 그후 그는 대포를 탑에 배치하고 보병들을 참호 안에 배치해 영국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이윽고 5월 25일 영국-인디언 연합군이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하면서 전투가 발발했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스페인군[편집]


  • 지휘관: 페르난도 데 레이바
  • 병력: 정규병 29명, 민병대 291명

3.2. 영국-인디언 연합군[편집]


  • 지휘관: 에마누엘 헤세 대위, 수 족장 와파샤, 치파와 족장 마체케위스 등
  • 병력: 영국 모피 상인 및 민병대 수십명, 인디언(수 족, 치파와 족, 위네바고 족, 폭스 족, 와파샤 족 등) 750 ~ 1,000명

4. 전투 경과[편집]


5월 25일, 에마누엘 헤세 대위가 이끄는 영국-인디언 연합군이 세인트루이스 인근에 도착했다. 헤세는 척후병들을 파견해 세인트루이스의 방비 상태를 확인하게 했다. 그러나 척후병들은 마을 밖 들판에 어린이와 여자를 포함한 노동자들이 모여 있어서 적의 방비가 어느 정도인지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다음날 헤세가 이끄는 군대가 세인트루이스 마을에 접근하자, 수비대는 첫번째 경고 사격을 발사해 주민들이 마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인디언들에게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후 수백 명의 수 족과 위네바고 족 인디언들이 머스켓 총을 쏘고 울부짖으며 마을을 향해 돌진하자, 수비대는 재빨리 대포로 그들을 향해 쐈다. 인디언들은 수비대가 대포를 가지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동요했고, 참호에 배치된 수비대의 일제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자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후방에 있던 소크 족과 폭스 족 인디언들은 이번 공격에서 얻을 게 별로 없고 수족과 위네바고 족에게만 이로울 것이라 여겨 전투에 소극적으로 임했다. 그러다가 수 족과 위네바고 족 인디언들이 흩어지자, 그들은 마을에 돌격하라는 헤세 대위의 지시를 거부했다. 결국 헤세는 5시간만에 전투를 중단하고 철수했다. 한편 미시시피 강 건너편에서는 영국 원정군 분견대가 세인트루이스 인근의 커호키아를 공격했지만, 조지 로저스 클라크가 이끄는 민병대에 의해 쉽게 격퇴되었다. 이로서 세인트루이스 전투는 스페인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편집]


세인트루이스 전투에서 양측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스페인 측의 주장에 따르면, 전투에 동원된 민병대 중 14명의 주민과 7명의 흑인 노예가 전사하고 7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반면 영국 측은 적군 68명이 전사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민 25명이 포로로 잡혔다. 영국-인디언 원정군의 피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십 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스페인군은 반격에 착수해 1781년 1월 7일 모빌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미시건 주에 위치한 세인트 조세프 요새를 공략한 뒤 3월부터 영국령 식민지인 웨스트 플로리다 주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펜서콜라 공방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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