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조선)/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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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즉위 당시
2. 주요 치적
3. 철혈 통치
4. 왕족, 외척, 사림파의 등용
5. 공신 우대 정책
6. 호불(好佛) 군주
7. 한계와 비판
8. 사후 간접 디스



1. 즉위 당시[편집]


즉위했을 때 의외로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39세 때 왕으로 즉위했는데, 이는 건국을 해야 하는 사정이 있던 초대 태조 이성계(58세)와 2대 정종(42세)에 이어 역대 조선의 국왕 중에서 3번째로 고령이다. 4번째는 37세에 즉위한 형 문종(3살 터울)으로 이후 태종(34세), 광해군경종(33세)이 뒤따른다.


2. 주요 치적[편집]


조선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전 《경국대전》 편찬을 명하여 시작하였다. 경국대전은 이미 세조 치세에 호전과 형전은 이미 완성이 되었으나 그 외 법전에 대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치느라 성종 즉위 후 15년이 지나서야 최종적으로 반포될 수 있었다. 전 왕조 고려가 6전식(六典式) 법전을 완비한 바가 한번도 없음을 고려해 보면, 한반도 왕조 최초의 국가 공인 성문 법전인 경국대전 편찬은 세조 최고의 업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1] 한편으로는 태종처럼 6조 직계제를 실시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여러가지 제도를 재정비해서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 그 과정에서 시국과 정치를 토론하는 경연도 폐지하고, 집현전도 문을 닫아버리고 대신 왕의 직속 기구인 예문관을 강화시켰는데, 이는 단종 복위 운동의 후폭풍이었다. 그래서 집현전의 기능이 예조로 넘어갔다가, 다시 성종 대에 부활되는데, 이것이 바로 홍문관이다.

6조 직계제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공신들에게 엄청난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 탓에 세조 사후 이 공신들이 훈구척신이 되어 왕권을 견제하게 된다. 이것은 정조의 경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신권을 억눌러서 왕권을 강화해놨는데, 후대의 왕들이 이것을 유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안돼서 오히려 친위 세력들이 권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폭군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깊었다. 세자 신분이 아닌 상황에서 왕이 된 경우,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2] 왕이 된 후 백성들의 삶에 보다 주의를 기울인 경우가 많다. 세종대왕 때의 나름 악법인 "수령 고소 금지법"이 폐지가 된 것도 이때였다. 다만 조선 초기 수령 고소 금지법을 시행한 배경에는 지방 토호들을 견제하고 중앙 집권을 시행하려는 의도가 존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지방관들이 토호들에게 살해당한 경우도 있을 정도로 토호들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이다.[3] 그러나 이 즈음에는 호족들의 세력도 많이 약해졌기 때문에 유향소를 폐지하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등, 직접적인 방법을 쓰려한 것으로 보인다. 행차 때 마다 백성들을 직접 만나서 의견을 들은 것도 이때였다. 스스로 롤 모델로 삼은 당태종처럼.

그러나 민생은 전혀 나아질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부리는 측근 세력들인 한명회, 봉석주, 홍윤성 같은 이들의 패악질 때문이었다. 아무리 나가서 민심을 살피면 무엇하는가? 자신이 부리는 측근들의 온갖 부정 부패와 비리를 눈감아 주고 있는데, 이들은 예사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았고, 심심하면 사람을 죽이는 인간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쳐 냈어야, 이들의 수탈이 멈추고 민생이 좋아질텐데, 정작 이들의 비리를 다 눈감아 주면서 나가서 민심을 살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훈구대신들을 쳐낼 수 없었던건 세조의 정당성이 너무나 취약했기 때문이였다. 단종이 후일의 연산군급 막장이였다면 모를까 뭔가 평가를 하고 싶어도 할 건덕지가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어린 나이였던걸 뚜렷한 명분도 없이 무리해서 쳐낸것이라 세조는 정당성의 취약함에 늘상 시달려야 했으며[4]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지지해주는 훈구파만이 유일한 버팀목이라 쳐낼수가 없었던 것이다.

군사적으로도 업적을 남겨서, 문종의 5위 진법 사상을 계승하여 중앙군의 편제를 바꾸었으며 지방에 전국 55개의 진을 설치하여 진관 체제를 마련했다. 물론 이는 세종대왕 때부터 정비된 군사 제도의 결과인 면도 있다. 어쨌든 군사를 정비하여 1460년에 신숙주를 북방으로 파견하여 여진족의 본거지를 크게 들쑤시고 돌아왔고(경진북정庚辰北征)[5], 이시애의 난 직후에는 남이, 강순 등으로 하여금 세종대왕 때부터 조선 변경에서 골치를 썩인 이만주를 참살하는 개가를 올렸다.(정해서정丁亥西征) 이 과정이 골때리는데, 세조는 이만주는 지금쯤 숨었을 건데, 괜히 서둘렀다가 명나라 놈들에게 "니들이 실수해서 놓쳤으니 어쩔거임?"이라는 개소리를 들을 바에야 그냥 아예 처음부터 늦게 갈 것을 명했는데, 느릿느릿 이만주의 소굴로 들어가자, 이만주는 자기 병사들은 죄다 원정을 보내놓고 참모 이하 일족들과 '날 잡아 잡수!' 하고 있지 않은가? 이로써 조선의 군대는 태종 시절부터 조선 국경에서 분탕질을 했었던 이만주를 잡아죽이는 통쾌한 공을 매우 손쉽게 거두게 되었다.[6] 다만 많은 외부 여진들이 자진해서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할 정도로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이뤄지던 여진족 관리체계[7]가 흔들렸고, 실전을 통해 만들어진 정예 병력은 아무것도 안하고 놀리다가 사라져버려 한계가 있는 업적이다.

자신 스스로의 꿈이자 정통성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된 군주로서의 책임감과 열정이 대단히 강해서, 재위 기간 중 매우 정열적으로 일을 했으며 몸가짐을 검소히 했다. 왕이 왕궁에서 무명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다녔으니 말 다했다. 또한 그는 파티를 아주 좋아했는데, 자신은 술은 좋아하나 한 여자만, 중전 정희왕후 윤씨만 끔찍히 사랑하고 여색을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신하들이 "전하, 이제는 후궁 좀 들이시는게 어떻겠사옵니까?" 하고 청하자 "난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점잖게 거절했다. 실제로 세조의 여자는 중전 정희왕후와, 후궁으로는 반정 전에 맞이한 근빈 박씨와 소용 박씨 뿐이다. 근빈(謹嬪) 박씨는 사육신 박팽년의 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본관이 다르다고 하니 박팽년의 누이일 가능성은 없다. 후일 근빈 박씨는 오래 산 덕분에 춤에 능하다는 이유로 팔순의 나이에 연산군 앞에서 춤을 춰야만 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세조는 연산군의 증조부이니, 근빈 박씨는 증손자뻘인 연산군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춤을 췄던 것이다.

소용(昭容) 박씨는 덕중이라는 이름의 여인인데 아들도 일찍 죽었고 중전인 정희왕후만 바라보는 애처가 세조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외로워진 그녀는 세조의 조카인 구성군에게 연달아 구애하다 사단을 낸다. 임금의 후궁이 보낸 구애 편지[8]에 기겁한 구성군이 2번 다 바로 달려가서 세조한테 보고하였고, 분노한 세조에 의해 편지를 배달한 내시 둘과 소용 박씨 모두 죽임을 당한다.[9]기생관도 독특하여, 기생들을 아예 여자 취급도 하지 않았으며 기생들이 술자리에 나올 때는 아예 얼굴에 분칠을 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잠실(蠶室)이란 지명은 세조가 만들어 냈는데, 왕족에게 누에치기를 널리 하게 했다. 그때 누에를 키우는 곳이 지금의 잠실이 되었다고 한다.

교과서나 두산 백과, 위키 백과 등에 나오는 공식적인 주요 치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의정부의 정책 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六曹) 직계제(直啓制)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시켰다. 특히 실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던 6조의 권한이 세조 이후 크게 상승하였고, 귀신도 부릴 정도로 크게 성장했던 삼정승의 위세를 경계하여 도승지와 삼정승이 서로를 견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중국처럼 왕까지 유린할 수 있는 강력한 권신이 나타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 이시애의 난(1467년)을 계기로 유향소(留鄕所)를 폐지하고 농민들을 괴롭히는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조선의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 국방력 신장과 신무기 개발에 지속적으로 힘써 호적(戶籍), 호패제(戶牌制)를 강화하고 최초의 조직적인 지방 군사 지휘 체계인 진관 체제를 실시하여 전국을 처음으로 방위 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중앙군을 5위(五衛) 제도로 개편하였다. 군제(軍制)를 확정하고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에 거진을 설치했다.

  • 북방 개척에 힘써 1460년(세조 6년) 북정(北征)을 단행, 외교에 매우 유능한 신숙주와 특출한 군사 능력과 특유의 잔인성(?)을 가진 홍윤성으로 하여금 두만강 건너 야인을 토벌케하고, 1467년(세조 13년) 서정(西征)을 단행, 강순, 남이, 어유소 등으로 건주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하삼도(下三道)[10] 백성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썼고 각도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

  • 세조 12년 경제 정책에서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현전직 관료에게 모두 사전(私田)와 급료를 지급하는 과전제를 폐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 수입을 크게 늘렸다. 세조 이전까지는 은퇴, 퇴직한 사람과 그 유가족에게도 현직 관료와 똑같이 토지를 주었으나 이로 인해 조선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자 세조 12년부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직전제를 밀어 붙였으며, 자신이 아끼고 비호하던 공신들에게도 직전법만은 철저히 따르게 했다. 이때 전직 관료를 토지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고, 관료의 과부나 자녀 등 유가족에게 지급하던 수신전(守信田), 휼양전(恤養田) 등도 폐지하였으며 그 지급액도 과전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성종 대에 또다시 직전법의 단점을 시정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시행하였고 이 2번의 개혁 과정을 거치며 조선의 재정이 크게 안정화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조선의 재정이 불안해진 것은 세조가 자신의 쿠데타를 도운 공신들에게 공신전을 남발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공신들에게도 직전법을 따르게 했다고는 하지만, 남발한 공신전은 이후 조선이 멸망할때까지 거두어지지 않고 조선의 경제력, 잠재성을 영구적으로 깎아먹고 말았음을 감안하면 이를 치적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 궁중에 잠실(蠶室)을 두어 왕비세자빈으로 하여금 친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하는 한편, 사시찬요(四時纂要), 잠서주해(蠶書註解), 양우법초(養牛法抄) 등의 농서를 농민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훈민정음으로 번역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 즉위 전에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오위진법(五衛陣法), 의주상정(儀註詳定) 등을 편찬했으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토지 제도를 개혁했다. 1465년(세조 11년)에는 발영 ·등준시(拔英登俊試)를 시행해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고,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훈사십장(訓辭十章), 병서대지(兵書大旨) 등 왕의 친서를 저술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사서(史書)를 편찬하도록 했다. 번역 활동에도 전념하여 여러 불경과 운회(韻會)를 직접 번역했다.

  • 국초 이래의 경제육전(經濟六典), 속육전(續六典), 원육전(元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 등의 법전과 교령(敎令)·전례(典例)를 종합 재편하여 법전을 제정하고자 최항, 노사신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성종 때 완성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성문법인 경국대전은 기존 관습법을 주로 사용하던 전대와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조선이 중세 국가를 넘어 근세 국가로 평가받는 중요한 도약점이다.


  • 면리제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면리제는 한국의 땅과 마을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연구하여 만든 지방 행정 체계로, 조선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도 우리 나라의 주요 행정 구역 제도로 사용되고 있다.

  • 규형(窺衡), 인지의(印地儀)라는 토지측량기구를 직접 발명,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용이하게 하였다.

  •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빛나는 종묘제례악의 개념이 이때 바로잡히고 사실상 완성되었다. 그 외에도 세조가 직접 기보법인 오음약보(五音略譜) 등을 창안하기도 했으며 대악후보와 같은 책을 통해 세조의 높은 음악적 치적을 살펴볼 수 있다.

  • 금속활자와 활판 인쇄술이 크게 발달했다. 대군 시절 세종대왕 대에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의 제조에 참여하였고, 이후 세조 시기에 정축자(丁丑字), 을해자(乙亥字), 을유자(乙酉字)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중 갑인자와 을해자는 조선 초기, 중기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특히 을해자병용(乙亥字倂用)은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시대 활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서적의 보급이 확산되었다. 한명회권람, 신숙주가 지방의 서원들에 썩혀두던 서적들을 몰수해 성균관의 도서관을 장려했고 특히 역사 관련 서적을 편찬, 재간행, 중수하고 이를 반포하여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에게도 필독을 권고하여 고대고조선고구려의 후손이라는 국가 의식, 민족 의식을 고양시켰는데, 국조보감(國朝寶鑑)의 편수,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정비 등 일련의 편수,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밖에도 오륜록(五倫錄), 역학계몽도해(易學啓蒙圖解), 주역구결(周易口訣),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동국지도(東國地圖),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 등의 편찬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 중에서도 훈민정음으로 번역된 불경, 불서들이 대량으로 전국에 유통되었고 세조가 직접 불경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3. 철혈 통치[편집]


조선은 본래 전제군주제 국가로, 왕권이 신권보다 강한 것이지극히 정상인 시대였는데 세조 때는 그것이 최고조여서 말 안 들을 거 같으면 미리 죽여버려서 대간들도 "지당하신 분부이옵니다." 라고 말하는 시절이었다, 반대하면 사모가 벗겨져 맞아 죽는다. 앞의 불교만 해도 그렇고, 황제들만 할 수 있는 원구단을 세워 하늘에 제사 지내는 행위도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정통제 몰래하던 제사를 대놓고 했다. 도성 한복판에 큰 부지를 만들어서 원각사를 지었을 때도 신하들이 특히 대간들이 반대 의견은커녕 좋은 기운이 감돌았다는 칭찬만 나왔다. 욕하다가 걸리면 어디서 죽을 지 모른다.[11]

공신들도 예외가 없어서 대신의 수장 중 하나인 정인지도 세조에게 숱한 분노를 산 적이 있는데, 연회에서 풍수지리에 대해 논하다가 정인지가 평양개성이 어째서 한양만 못한 도읍인지를 풍수지리학적으로 설명하다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풍수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갔다간 전하께서 잘 모르시니 못 알아들으실 겁니다."라고 말했다가 "이게 원로 대신이라고 대접해 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혼내주고 싶지만 술 취해서 그런 거니 한 번 봐준다."[12]라고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다. 게다가 세조는 세종대왕, 소헌왕후, 문종, 의경세자의 장례에 깊이 관여하여 장지를 잡는데 일조하는 등 풍수지리에 매우 능통한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자존심과 권좌심이 높은 세조에게 "너 이거 모르지?" 라고 대놓고 무시했으니 취기에 눈이 돌아가 버린 것.

정인지 외에도 병조 판서를 지낸 이계전 역시 술 자리의 피해자다. 이 사람의 조카가 사육신의 한 명인 이개. 그래서 사극 왕과 비에서 이개가 죽기 직전 절명시를 읊으면서 이계전을 쳐다보자 이계전이 시선을 피하는 장면이 나온다. 할아버지는 고려 말의 대유학자인 이색이다. 술 자리에서 이계전이 세조에게 "술이 과한 듯 하니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라"고 권하자 격분하며 병조 판서의 머리를 붙잡고 사정없이 곤장을 친 뒤, 애정을 담은 행동이였다라는 식의 과격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실록의 원 표현은 이렇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찌 나와 같겠느냐?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좌익 공신의 높은 등급에 올려 놓으려고 하는데, 너는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세조 실록> 세조 1년(1455년) 8월 16일 기사


야사에 나올 법할 스케일로 신하를 욕보인 이 이야기는 분명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철권 통치의 또 다른 희생자로는, 강맹경과 권람이 있는데 갓 영의정에 임명된 강맹경과 우의정에 임명된 권람이 잔치를 벌이는 세조에게 "술을 마시고 놀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라고 간했다가 세조가 분노하면서 "야, 우리가 술먹고 논지가 하루 이틀도 아닌데, 지금껏 내가 못마땅했다고 그런거냐?" 식으로 말했다. 경악한 두 대신은 허겁지겁 하면서 해명을 했으나, 세조는 이들을 갈아치워서 좌의정 신숙주를 영의정에 앉히고, 이인손을 우의정에 앉히니 강맹경과 권람이 정승에 임명된 지 고작 5일 만이었다. 역대 영의정 중 최단임 기록이었다.

그런데도 세조는 강맹경과 권람을 파직했음에도 녹봉만은 정승으로 일하던 때처럼 지급할 것을 명했고, 이에 강맹경과 권람이 궐밖에서 엎드려 사례했는데 이에 마음에 약해진 세조가 그들을 불러 "경들이 옳은 말을 했는데, 내가 너무 심했다."라면서 그들의 자리를 원상복구 시켜주니 영의정 신숙주는 4일 만에 좌의정으로 돌아가 신기록을 갱신하고, 이인손도 우의정 자리를 내놔야 했다.[13]

심지어, 야사 용재총화에는 예문관 문신들을 한여름에 뜰 가운데 앉혀 놓고, 하루 종일 뙤약볕을 쬐게 하며 근무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세조는 "능히 춥고 더운 것을 견뎌 본 후에야 백성들의 고충을 느끼고 큰 일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말하자면 일종의 극기훈련 같은 것을 신하들에게 시킨 셈이다. 사실 신하들만 시킨 건 아니고, 이 때 세조 자신은 창문을 닫고 솜옷을 입은 채 화로를 방 가운데 켜놓은 채로 정무를 봤다고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때는 한여름이었다.[14]

이 외에도 신하들을 장난으로나 왕권에 도전할 시 구타하거나 욕보이는 일화는 꽤 많다. 신하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사실, 어쩌면 이 사례들은 모두 신하들이 함부로 왕에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휘어잡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당시 기준으로도 저런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영의정을 포함한 삼정승은 국가의 최고위직으로 신중을 기해야하는 자리인데 그냥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덜컥 날려버리고 며칠 만에 다시 원상 복귀 시키는 등의 행위는 다시 말해서 세조가 국가 통치 체제를 스스로 무시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신하들을 막 대한다고 왕권이 강해지는게 아니다. 저 경우에는 왕권 강화가 아니라 그저 협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무제당태종을 유난히 좋아했으며, 한 고조 유방송태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15] 유방의 경우는 공신을 멋대로 토사구팽시킨 인물이라 배울 게 없는 인물이라고 깠고, 송태조 조광윤은 뭔가 우유부단하고 화끈한 맛이 떨어지는 카리스마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 그래서 조광윤이 도끼 자루로 신하의 이빨들을 털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양반 재위 기간 동안 자기가 화끈하게 결단한 것은 그게 유일하구만."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다만 한고조 유방의 경우 신하들과의 의를 저버린 행동에 대해서는 크게 비판했지만 정치적, 군사적인 능력은 꽤 칭송하였다. 1462년에 세조가 직접 저술한 병법서인 병장설 유장편 서문에서 직접 군사적인 측면에서 수양제를 비판하는 반면 한고조는 띄웠다.

군사들을 다스릴 때 일일이 귀에다 대고 명(命)할 수 없기 때문에, 형명(形名)의 분수를 받들어 나아가고 물러남과 합치고 흩어짐을 미리 정하고, 싸움에 임할 때 한 가지 형세만을 항상 고수할 수 없기 때문에 변칙을 내어 새로운 명령을 기별해 통하고, 기회를 틈타 정도를 쓰거나 기계(奇計)를 쓰는 것이다. 만약 산천이 가로막혀 있으면 꿰뚫어보기 어렵고 100리 길에 군진이 잇달으면 말을 통기하기 어려우므로, 한 부대가 적의 공격을 받을지라도 일제히 대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 때문에 병법을 아는 자는 고개를 숙이며 적합한 장수에게 군율을 맡기는데, 한나라 고조가 바로 그러한 제왕이었다. 반면에 병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군신을 믿지 못해 여러 군사들을 움켜쥐고 직접 다스리는데, 수나라 양제가 바로 그러한 제왕이었다. 병법가의 대요는 이것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마음으로 국가의 대계를 체득해서 사졸의 마음과 힘을 얻어 위기에 임해 적변을 제어하고 사방에서 승리를 얻는 방법과 같은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병법에 달려 있지 않다. 그렇기에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 유장편 희유제장 서문 중(세조)


언젠가 권람이 세조를 유방에 비유하여 칭송하는 시를 올리자 "뭐? 유방? 공신을 파리 잡듯이 죽여버린 배울 게 없는 양반을 감히 나랑 비교해? 과인은 공신들이 반역을 저지르지만 않으면 절대로 해치지 않을 것이야!"라고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 이 발언만 보더라도 그의 체제를 분석하는 능력이 세종과 문종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16] 세조는 이 말대로 토사구팽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게 결과적으로 세조 최대의 실책으로 남은 것을 잘 생각해보자.[17] 물론 그 후의 훈구파들을 알았다면 세조가 직접 훈구파들의 목을 쳤을 것이다.

아버지인 세종고려 시대의 분할적 재정 운용의 폐해를 문제시하였다. 쉽게 말해 왕실에서 쓸 돈은 왕실에서 걷고 개경부에서 필요한 돈은 개경부에서 걷는 방식. 때문에 고려 시대에는 중앙에도 세원을 파악하는 호부와 회계 출납 같은 거 해주는 삼사가 따로 있고 또 세금 걷는 건 일선에서 또 따로... 때문에 세종은 왕실 재정을 따로 안 챙기고 전부 중앙 재정으로 편입시켜서 현대와 같은 이른바 '국용전제'를 완성시켰다.

반면 세조는 절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조 산하에 내수사를 설치하여 다시 왕실 재정을 분리시켰다. 결국 쉽게 말해서 왕실을 위한 딴주머니를 찼다는 소리다. 아무튼 내수사는 고종 때까지 혁파됐다가 부활했다가 계속 반복되지만 중요한 것은, 세조 이후 왕실이 호조에 손 안벌리고 따로 왕실을 위해 돈을 쓰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관둔전이라는걸 설치해서 고려 시대와 똑같이 관청이 따로 자기들 경비를 세금으로 걷기 시작해서 결론적으로 아버지인 세종대왕이 그토록 개고생을 해서 고쳐놨던 조선의 재정 제도는 간단히 박살나버렸다.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러한 분할 재정의 문제는 두고두고 조선의 발목을 잡게 된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6년 독립협회 만민 공동회에도 재정 일원화는 중요하게 논의된 개혁안이었으니 뒤집어 보면 분할 재정이 조선 시대 내내 큰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내수사 자체가 세조 이전까지만 해도 있던 것으로 세종 12년인 1430년에 궁중의 특수 물품을 조달하던 내수별좌를 내수소라 명칭으로 개칭한 이후 단종 때까지 기록이 있었으며 이때 당시에 내수소에 별도의 토지와 노비가 다수 배정되었는데, 특히 함경도에는 내수소 소속의 해척(海尺 : 해변 어부)·응사(鷹師 : 매 사냥꾼) 300호가 지정되어 있어 하나의 관서라기보다는 국왕 직할의 궁방이나 다름없었다.

4. 왕족, 외척, 사림파의 등용[편집]


훈구 공신들의 권한이 비대해지고 살인이나 월권행위가 심해지자 집권 중반 이후 세조는 공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왕족과 왕실 외척, 그리고 사림파를 등용한다. 왕실 인사로는 귀성군 준, 외척으로는 남이, 사림파로는 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 그밖에 정몽주의 문하생 등을 새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권한은 세조가 죽기 전까지 성장하지 못했고, 오히려 남이나 귀성군 등은 훈구 공신들의 견제를 받아 제거된다. 그러나 사림파는 이 당시에는 훈구세력과 크게 부딛치지 않아 화를 피하였다.

김종직은 세조에게 등용되었지만 세조는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긴 것 같다. 그가 김종직을 직접 만나보고는 완고하여 쓸모 없는 선비같다는 말을 하여 김종직이 그에게 앙심을 품었다는 설이 있다. 1463년(세조 9년) 여름 김종직이 그의 친불교 정책에 반발하여 불사(佛事)를 하지 말 것을 간언하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464년(세조 10) 7월 김종직은 다시 세조에게 실무 잡학을 장려한다고 질타하여 그는 이때 크게 분노하였다. 김종직은 그에게 '사학과 시학은 본래 유자의 일입니다만 나머지는 잡학(雜學)이고 미신인데 문신에게 힘써 배워 능통하게 하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라는 취지의 상소를 올렸으나 세조는 듣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종직은 끝까지 비슷한 내용의 상소를 올려 그의 분노를 샀다.

"김종직은 내가 잡학을 장려한 까닭을 알 것인데, 참으로 경박하다"

세조는 분노했지만 김종직이 사림의 지도자였고, 지나치게 강성해진 훈구 공신들을 내심 두려워하여 김종직을 내치거나 크게 처벌하지는 않았다.


5. 공신 우대 정책[편집]


신하들을 죽이는 것만은 그만하자는 주의였는듯 하다. 계유정난 때 살생부까지 작성해서 죽여댔으니, 더 이상 죽였다간 능력있는 정치할 인재들이 없어서였던 면도 있을 것이다. 당시 급제한 김종직이 당시 실학에 포함되던 잡학을 배우라는 세조의 의견에 반발했지만 살아남았고, 한명회와 신숙주도 이시애의 난 때 목숨을 건졌다. 술에 과하게 취해서 세조 앞에서 세조를 '너'나 '상왕'으로 부르거나 신하들과 술 파티 때 그때 당시의 야자 타임 놀이(?)를 하던 중 하면 안 될 말 실수를("이렇게 노는 게 좋으면 왕 때려쳐! ㅋㅋㅋㅋ" 이런 식으로 말 했다고...) 자주 했던 정인지도 살아 남았다.

이런 모드였던데다 계유정난 때 목숨을 걸고 자신을 끝까지 따라준 킹메이커들인 한명회, 신숙주를 필두로 하는 많은 공신들에게 토지 혜택을 마구 퍼주는 바람에 예종, 성종 때 의도치 않게 신권이 더 강해지게 되는데, 이는 핵심 공신들을 몰아내고 외척 세력들과 공신 세력들의 힘을 억눌러서 토사구팽시키고 후대까지 강한 왕권을 확립한 태종과는 꽤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그 외에도 다른 공신인 권람, 구치관, 정창손, 이사철, 김질, 박원형, 박종우 등도 큰 벼슬에 제수했다. 또한 외척들도 후하게 우대해줬는데 자신의 아내인 정희왕후의 집안 형제였던 윤사분, 윤사흔 형제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고 또 한명회와도 사돈을 맺었으며 정인지와도 사돈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의 아버지인 한확에게도 큰 벼슬을 주었다. 그 뿐 아니라 어머니의 외척인 심회에게도 정승 자리를 주었을 정도다. 그리고 예종의 장인인 한백륜에게도 큰 요직을 주었고 정희왕후의 인척인 한계미, 한계희, 한계순 등과 성봉조 등에게도 큰 요직을 주었다. 그 외에도 왕실의 인척인 윤사로윤필상 등에게도 벼슬을 주었고 인수대비의 사촌오라버니인 한치형과 역시 왕실의 인척인 신승선에게도 큰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이 공신 세력들을 1차로 싹쓸이해버린 인물은 바로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었다.

유일한 예외가 양정인데, 왜 죽었는지는 문서 참조.

워낙 술을 좋아하고 공신들과의 의리를 중요시여겨 잦은 술 파티를 가졌던 터라, 아침에는 숙취 때문에 일찍 일어나기를 힘들어했다고 한다. 본래 늦어도 6시 정도에는 시작되어야 할 왕의 일과가, 세조 때에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시작했다고 한다.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직접 가담자는 죽이고 연좌제로 친족을 노비로 삼는데, 세조는 그 노비들을 공신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김 장관댁 며느리가 그렇게 예쁜데 나 주라."
"그럼 딸은 내가 가져간다?"
...이게 약탈나온 도적떼가 아니라 실록에 기록된 공신들의 대화다. 고위 관료라는 자들의 자기 정체성이 인신매매범 수준이었음이 드러나는 기록.

6. 호불(好佛) 군주[편집]


왕자 시절부터 불교를 숭상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문종 때는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이니 나는 절대로 그딴 놈 취하지 않겠다!"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 일화는 그의 호불 성향 뿐만 아니라 야심을 드러내는 일화로도 소개된다. 임금도 아닌 일개 왕족이 '취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다른 마음이 있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

사헌부에서 도첩이 없는 승려를 잡아가자 멋대로 풀어주는가 하면, "공자보다 석가모니가 훨씬 낫다"고 했으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스스로 "나는 호불(好佛)의 군주다!"라고 선언했을 정도. 원각사를 세우는 등. 불교와 관련된 업적도 여럿 존재한다. 아예 정부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대량 간행하는 관청을 만들었으며, 세조가 친필로 써서 부처에게 봉안한 문서도 존재한다. 태조 이성계와 말년의 세종 이후로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마지막 조선의 왕이다.

참고로, 이 때 간행된 월인석보 같은 불경들은 언문으로 간행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조선 시대의 한글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상원사 등 세조와 관련된 설화를 가지고 있는 절들이 좀 있다. 다만, 이 모든 행동은 공식적으로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세조 개인의 행동으로 처리되었다.

이런 호불 정책을 많은 인명을 살상한 세조의 속죄 의식과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하는데, 불교에 대해서는 왕자 시절부터 호감을 나타냈었고 왕자 시절에 어머니 소헌왕후가 병상에 있을 때 궁궐에 법당을 지어 심신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외톨이 조카에겐... 그런 거 없었다. 적어도 실록 속에 나타나는 '거침없는 행동주의자이자 야심가' 유형의 인물 됨됨이를 생각하면 그가 과연 죄의식으로 고통 받았을지는 의문이다. 그냥 개인적인 취향이 불교였고 속죄 의식과 연결짓는 것은 세조를 비호하기 위한 주장일 가능성이 꽤 크다.

그의 불사에 관해 세종, 문종 때와 비교하면 매우 재밌는 차이가 있다. 세종, 문종 때는 작은 절 하나 세우는 것이나 작은 불사 하나 하는 것에도 온 조정이 거의 뒤집어 졌으나, 세조 때에는 신하들이 굽실거리면서 '이번에 새로 짓는 절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합니다!'라고 아첨을 떨었다. 다시 말하자면, 신료들의 간언에 귀를 기울였던 아버지, 형과는 달리 세조 본인은 신료들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세종이나 문종의 왕권 또한 상당히 강한 편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태도 차이는 세종, 문종이 '신하들이 간언하면 들어주는' 왕이었던 반면 세조 치세에는 왕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쉽게 주장하기가 어려운 풍토가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유교 정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간들의 힘을 바닥까지 추락시킨 왕도 세조였다. 세조 집권 이전에는 신하들이 직접 왕에게 의견을 제의하고 정사를 논하는 주장을 하는 이유와 그 근거를 왕이 함부로 묻지 않는다는 암묵의 룰이 있었을 정도였다(이는 이유도 근거도 없이 질러보는 기레기식 정치의 원동력이 된다). 또 세종이나 문종이나 훈민정음 창제와 같이 불사보다 더 큰 일을 벌일 때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신료들을 설득하면서까지 밀어붙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게다가 조선의 국가적 이념이 유교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렇게까지 막나가는 호불 정책은 국왕 스스로가 조선의 기초를 무시했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세조가 죄없는 조카를 함부로 폐위하고 그 조카에게 사약까지 내렸을 뿐더러 그 과정에서 또다른 무고한 피해자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호불 정책과 별개로 세조 본인의 인간성은 불교 이념과도 정반대였던 셈이다. 세조가 문종 치세, 수양대군 시절에 말했던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 는 아이러니하게도 세조 본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겉모습(사찰, 불상, 불교의식 등)을 좋아하면서도 정작 불교의 가르침(생명을 소중히 함)은 가볍게 여겼으니 오히려 불교의 입장에서도 욕을 먹어 마땅한 군주다.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는 극도로 집착하면서 정작 그 종교의 좋은 가르침은 자기가 하고 싶은 (극악무도한) 일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되면 가차없이 무시해버린 점에서 현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

이 때문에 현재는 세조의 호불 성향이 부정적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특히 오늘날 대한민국 불교계수경사 사건 범인 옹호, 나랏말싸미 옹호 등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면서 세조의 불교신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은 더더욱 줄어든 상태다.


7. 한계와 비판[편집]


능력 면에서는 명군이라는 탈을 쓴 채 함부로 조선의 시스템을 파괴하여 후대에까지 악영향을 남긴 암군, 윤리 면에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폭군.[18]

사실 세조의 명성이 꽤나 깎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찬탈도 찬탈이지만 장기적인 전략이나 정치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대단히 부족했던 나머지 큰 부작용이 따르는 정책들을 시행하고 그것이 민생에 직접적으로 큰 피해를 준 것에 있다.[19] 게다가 세종이 온갖 애를 써서 완성시켰던 훌륭한 정치 문화와 우수한 제도, 정책 여러가지를 일거에 날려버린 게 결코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심각한 실책들 중 하나다. 세종대왕문종은 국가 시스템을 굉장히 중요시한 임금들이었다. 집현전 등을 통한 지속적인 학자 배출과 토론을 통해서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조선 특유의 관료제를 긍정적인 쪽으로 강화시켰다. 단적으로, 세종과 문종 때에는 신하와 군주가 상하일치하여 신하들은 군주를 존경하고, 군주는 신하들을 예로 대하여 국가의 발전을 위해 서로 상생하며 나아갔다. 하지만 50년 만에, 세조는 무려 조선의 정승이자 고명대신인 김종서, 황보인 등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 목을 저잣거리에 효수했으며, 이는 실로 세종과 문종이 쌓아왔던 인의의 정치 시스템의 실질적인 붕괴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조는 독재 정치를 선호해서 이러한 시스템을 철저히 왕에게 집중된 독재자 스타일로 꾸준히 밀어붙였다. 주변 훈구 대신들의 왕당파가 있었긴 했지만, 이 훈구 대신들은 세종과 문종의 훈련을 통해 배출되는 관료가 아닌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전형적인 도구들에 지나지 않았다. 세조는 태종과는 달리 훈구 대신들을 철저히 관리 및 감독하지 않았고 권력의 맛을 보자 이들은 차츰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세조가 그 부패하는 절대 권력의 정점에 있는 폭군 유형에 속했던 만큼, 공신 우대 정책이 너무 과해서 그러한 권신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한 것이다.

세조가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철저한 반대에 져주는 아버지와 형을 신권에 의해 농락만 당하기 급급한 아버지와 형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황보인김종서가 고명 대신으로 활동하고 황표 정사를 시행할 때 수양대군의 이러한 분노이자 배신감은 꽤나 커졌을 것이다. 그들을 살해할 때 왕권을 유린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세조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세종과 문종은 신권에[20] 농락을 당하고 늘 져주는 왕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세종은 반대 의견이 있으면 경청하고, 설득하면서 끈질기게 자기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스타일의 군주였다. 게다가 세조 측이 엄청난 국정농단으로 홍보했던 황표정사도 그리 오래 시행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아직 제왕 수업을 받지 못한 단종을 합법적으로 후견인이 된 대신들이 일시적으로 보좌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정작 세조의 지나친 공신 우대 정책 때문에 이후 조선의 왕들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들을 끌어들이면서 정치 싸움의 의도치 않은 원인을 제공했다. 아버지와 형을 신권에 휘둘리는 왕으로 여긴 세조의 생각 자체가 매우 근시안적이었던 셈이다.

세종과 문종은 한 제도나 정책을 결정할 때 방법이나 과정, 미래의 파장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감수하고 희생해야 하는지까지 죄다 토론하고 연구해 나가는 유형이었다. 이러한 유형은 경우에 따라서는 우유부단하여, 신속한 판단력과 발빠른 추진력을 이끌어내는 데에 있어 치명적으로 발목을 잡는 위험도 있었고, 난세에서는 일일이 토론하고 연구할 여유 없이 시시각각 급변해가는 현실에서는 혼란만 자초할 뿐이라는 심각한 한계가 있었다지만, 세종 - 문종 연간이 과연 난세였나 생각해보면 이는 근거가 부족하다.

그래서였는지 계유정난 이전 수양대군 일파는 단종 시대를 난세로 규정했지만, 계유정난 직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평온한 시대였다고 볼 근거가 꽤 되는 편이다. 섭정인 김종서 등의 선대 왕의 충신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단종에겐 흠결 낼 수 없는 명백한 정통성이 있었으며 김종서 등이 그의 왕권을 제약한 바는 결코 없었다. 수양 측은 김종서 등이 엄청난 전횡을 저질렀다고 선전했지만, 실제 기록을 면밀히 보면 딱히 그렇게 볼만한 근거도 부실할뿐 아니라, 김종서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조건부로 부여된 권력이었다. 김종서는 외척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앙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명문 세도가의 좌장도 아니었다. 세종과 문종의 신뢰를 바탕으로 정승이 되었고, 그 정승이라는 지위로 인해 어린 국왕의 보좌 역할을 잠시 맡았을 뿐이다. 김종서를 비롯한 대신들의 권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은 단종이 성인이 되는 순간 반납되게 되어있었다. 애초에 이렇게 기반 없는 김종서에게 권력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왕>왕의 총신>세도가 공식이 성립할 만큼 왕권이 강력하는 뜻이다. 세도가>>>왕 공식이 성립하는 훗날을 생각해보면...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처럼 막가는 성향의 인간이 아니었다면 쉽사리 성공할 수가 없는, 생각보다는 성공하기 어려운 쿠데타였던 것이다. 물론 그 어려운 쿠데타를 성공시킨 원인이 수양 대군의 탁월한 순간 판단력과 결단력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향후 국정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긍정적 평가를 받긴 상당히 힘들어 보인다.

이 부분에서 태종과 세조 사이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앞서 한계점을 거론하는 단락에서 나오는 그 수많은 실정은 이 일방주의 성향에서 기인하는데, 특히 명분도 없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핑계를 붙여 친족을 죽인 것은 큰 오점이다. 집현전을 없앤 것만 봐도 더욱 잘 알 수 있다. 물론 사육신 문제도 있었겠지만, 수양 대군은 아버지의 지지부진해 보이는 장기적 정책 연구를 단순한 탁상공론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집현전을 고비용 저효율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것이 이어져 결국 피를 보고야 만 게 바로 치세 말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이다.

그렇다고 세조의 수많은 업적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지나치게 냉혹하고 권력에 과잉적으로 집착했던 성격 탓에 행한 과오들이 그 업적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꽤 심각하다. 특히나 정당성을 지금보다 몇 십 배로 따졌던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운 조선 왕조에서 그의 왕위 찬탈과 형제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살육 행위는 당시 관점으로도 공으로 덮기에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과의 정치적인 안목과 역량의 차이도 나타난다. 태종이 외척은 처남이고 사돈이고 역모를 생각했던 이유로 사형에 처하고, 공신인 이숙번을 후계자에게 방해되지 않게 귀양을 보낸 반면 세조는 자신의 최측근 공신인 한명회를 자신 인생의 참모이자 친구라며 외척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이성계가 세웠던 세자 이방석은 막내 아들인지라 쟁쟁한 형들에 비해 정통성이 매우 미약했기 때문에 태종이 방석을 죽일 때 대다수의 대신들도 이에 대해 반발할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세조는 정통성이 확고한 단종과 그 대신들을 몰아냈기에 이징옥의 난, 사육신 사건 등을 겪었으며 그 중에서도 중간파들이 일으킨 사육신 사건은 자칫 정권이 다시 전복될 수 있는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따라서 세조는 공신들을 견제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심과 의리에 기대야 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말년에 가서는 자신의 왕권이 안정되었다고 판단, 이시애의 난을 기점으로 신 공신 세력을 형성하며 구 공신들을 견제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문제는 얼마 안 가서 질병으로 졸했기에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 남이의 옥사를 기점으로 신 공신은 소멸하고 구 공신을 필두로 "훈구파"로 명명되는 기득권 세력이 형성되는 근간이 된다. 또한 지방 유학자 출신의 학자들은 자신들을 사림이라 명명하며 공신 그룹과 대립하게 되었다.[21]

게다가 세조가 실제보다 더 오래 살았다 해도 상황이 나아졌으리라 판단하기는 꽤 어렵다. 구 공신 세력을 견제 하기 위해 신 공신 세력을 육성했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실책이고, 이 실책이 그가 일찍 죽어 그나마 이 정도에서 봉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수양이 육성하던 이들의 면면을 보면, 구성군 이준, 남이, 유자광 등등인데, 남이가 구성군을 질투하여 둘 사이가 매우 나빴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유자광은 남이의 역모 사건을 고변했을 뿐 아니라 후일 연산군 대에 이르러 무오사화의 시발점이 되어 놓고는 연산군을 배신해 중종 반정에 참여하는 등 권력을 쫒아 박쥐와도 같은 행적을 보여주었다. 이 쯤 되면, 이들이 과연 제대로 구 공신 세력을 견제할 신 공신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성장했다고 해도 국정을 제대로 이끌어갔을지도 의문이다.

구 공신과 신 공신은 성격 그 자체가 매우 달랐다. 수양이 구 공신 세력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같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동지들이었고 매우 부패한, 약점이 많은 이들이었기에 수양이 그들의 약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부귀 영화를 보장하고 그 반대 급부로 자신에 대한 충성을 얻어내어 왕권을 강화하는데 썼던 것이다. 마찬가지 의도로 예종에게 자신과 같은 친위대를 붙여준다는 의미로 신 공신 그룹을 육성했으나, 일단 신 공신 세력은 예종과 어떤 정치적인 동지적 관계를 형성할만한 인물들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종은 거만한 성격의 남이를 매우 싫어하여 즉위하자마자 그를 병조 판서에서 해임하였고, 여기에 불만을 가진 남이가 역모를 꾀했다고[22] 처형당했으며, 구성군 이준의 경우 언제든지 왕권을 노릴 수 있는 종친의 위치에 있었으며, 유자광은 서자라는 위치상 당대 조선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인물이기에 예종에게 충성을 바칠 지도 의문스런 인물이었다. 즉, 수양이 구 공신을 부려 왕권을 확립한 것처럼 예종이 신 공신을 부리거나, 구 공신을 견제하게 할 수 있을만한 세력이 전혀 아닌 이들이었다. 이런 이들이 수양이 더 오래 살아 더 많은 권세를 확보했다면 과연 예종의 왕권 확립에 기여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나이가 있어 성종 대에 이르러 점차 권세를 잃어가던 구 공신에 비해, 젊은 세대이기에 권력을 확보하고 왕권에 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큰 인물들이다.

애시당초 공신들의 목줄기를 틀어쥐고 이들을 이용하여 왕권을 확립한다는 상황 자체가 쿠데타 동지 + 약점이 많은 비리 정치인들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나 가능했던 것이지, 전혀 이런 상황을 활용할 수 없는 예종이나 성종의 입장에서 신 공신을 수양처럼 부릴 수는 없는 일이고, 오히려 이들이 세력화 되었으면 더 큰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그나마 그 시점에서 수양이 죽었기에 그만큼 수습이 된 것이지, 만약 이들의 세력이 더 강화될 때까지 수양이 살아남았다면 어떤 헬게이트가 열릴 수 있었을지 걱정스런 상황이었다.

더욱이, 주목할 것은 그나마 구 공신을 견제한답시고 한 짓거리가 새로운 공신 세력을 만든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그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통성 부족을 자력으로 메울 수 없었다는(혹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후대 왕들에게까지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예종은 그래도 나름 강한 군주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 공신 세력의 주의를 불러일으켰지만 요절해 버렸고, 사실상 그의 직접적인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성종은 그야말로 시달렸다. 성종이 세조와는 정반대로 유달리 유교적 도학 정치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세조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여기에 연산군의 폭정이 성종 대 왕권 약화에 기인한다는 주장도 고려해 보자.

그리고 이런 식으로 구 공신들의 입김이 강화된 결과 왕실 종친들은 법으로 벼슬길이 막혀버렸고 정치적 세력으로서 왕실 세력의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해 일각에서는 군약신강, 척신 정치와 외척 세력의 성장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23] 정작 종친들이 계유정난에 가담한 이유가 단종 즉위 후 종친 세력들이 김종서를 비롯한 원로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한다고 불만을 품었기 때문임을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자기 발등을 찍어버린 격.

게다가 세조의 왕위 찬탈은 후대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언제 왕 자리가 내부의 배신으로 찬탈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조선의 역대 국왕들이 통치보다는 자신의 왕권 강화에 주력하는 그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도 결국 통치가 필요하다는 게 함정. 정치적 경향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고 여겨진다. 정리하면 왕권 자체는 분명 강화쪽으로 방향성을 잡은 면이 있으나 왕권의 안정성에는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게 왕권의 안정성이 약해졌기 때문에 왕권의 강화가 절실히 필요했고 그게 실패한 왕들은 상당한 골치를 썩게 되었다. 게다가 훗날 조선 왕조가 위기에 처하거나 부조리로 고통받는 상황을 만든 원인들의 상당수는 멀리 가면 세조가 귀찮다고 없애버린 시스템의 부재나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고 멋대로 바꿔버린 장기적 안목이 결여된 정책 등이 원인으로 나온다. 한 마디로 조선 왕조 체제의 문제점 상당수를 본인이 만들어버린 셈.

실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조선의 법 체계였다. 이전의 법 체계에서는 법 조문이 있으면, 왜 이런 법이 만들어 졌는지,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이런 부분들이 먼저 기록되고, 이후 이에 대한 처리 등이 나열되는 방식이었는데, 수양 대군은 이런 방식이 답답하다고 여겨, 이를 싹 잘라 버리고, 어떤 형벌에 해당하는 죄는 무엇 무엇이고, 형량은 어떻다 라는 식으로 깔끔하게 보이도록 정리했다.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문제가 점점 생기게 되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이런 조항은 왜 생겼는지, 왜 이렇게 조치를 취하게 되어 있는지 이 부분을 전부다 잘라 버려 오히려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했는지를 찾는데 시간이 더 걸리고 업무 처리에 효율이 떨어지게 되는 문제를 가져왔다. 당장 자기 시대에서야 사람들이 왜 법 조문이 만들어 졌는지 당사자들이니 알고 있으나, 이후 세대를 고려한 정보들을 모두 날려버림으로써 문제를 가져온 것. 당장, 세계의 황당한 법 조문이라고 만들어진 인터넷 문서를 봐도 시대 상황이 바뀐 상황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법들이 보인다. 문제는, 이런 조문들이 왜 생겼는지 이유를 안다면, 현실에 맞게 개정하거나 삭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 쉬운데 이 부분들을 날려 버렸으니 법률 체계에 문제가 생길 수 밖에.

또한 큰 병크 중 하나로 집현전의 폐지를 들 수 있다. 물론 사육신을 위시한 자신의 반대파 대부분이 집현전 출신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본인이 이런 자문 기구의 필요성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국왕 자문 기구의 역할은 뒤에 홍문관, 규장각등이 계승하기는 하지만, 일단 한번 끊어진 맥락을 연결 시키는 것도 어렵고, 문, 무, 잡학에 관련된 모든 국가 전반의 일을 연구하고 다양한 학자들이 참여했던 집현전에 비하여, 후대 자문 기관인 홍문관은 아무래도 문에 치우친 기관이었고, 덕분에, 성종조에는 문치적으로는 큰 치적들이 있었으나, 국방력 약화, 성리학 일변도의 정치 흐름 등의 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즉, 국가 운영의 브레인 집합소였던 집현전을 폐지함으로써, 수양은 자신 이후의 국가의 성장 동력을 없애 버렸으며, 그나마 문치 부분에서는 홍문관이 이를 계승할 수 있었으나, 그 이외의 부분에서의 성장 동력은 멈취버리게 된 것이고, 이 덕분에 조선은 이후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또한, 그 자신이 왕권 강화를 위해 펼친 정책들 또한 얼마나 그가 근시안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공신 문제. 평생 그가 싫어하고 비판했던 인물들인 한고조, 송태조와의 공신 처리 문제를 보면, 그가 갖춘 정치력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가 드러난다. 공신 세력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군주의 통치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국가 운영에 큰 지분을 가진 이들은 군주에게 있어 정치적인 부담이 될 수도 있고, 힘이 되어 줄 수도 있다. 자신의 할아버지나, 한고조는 이를 숙청을 통하여 자신의 왕권을 확보하였고, 그가 유약하다고 비판한 송태조는 배주석병권을 통해 그들의 부귀는 보장하면서 정치적 권력에서는 떼어놓는 온건한 방식으로 공신들을 처리하였다. 덕분에 그들의 후대는 기존의 공신 세력에 대한 부담 없이 정치를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고조부인 문제로 좀 골치를 썩었으나. 반면, 수양은 오히려 이런 공신 집단을 키워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는데, 이들 집단이 제거되지 않아, 이후 아들, 손자 대에 왕권의 제약과 옥사가 일어난 것을 보면, 얼마나 그의 안목이 근시안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태종이 세종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며 '악업은 내가 지고 가니 주상은 성군이 되어라'는 말을 똑같이 수양에게 적용시키며, 성종조의 태평성대가 마치 수양이 악업을 지어 준 덕분인 것처럼 말하나 전혀 사실이 될 수 없다. 태종이 말한 '악업'은 이방석, 이방간 등을 제거한 1차, 2차 왕자의 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척 세력이 될 수 있는 민무구, 민무질 등의 외가 세력, 심온 등의 처가 세력 등을 제거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세종의 정치적 부담을 줄여 주려는 목적이 있었으나, 수양의 '악업'은 오로지 자신이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사육신의 옥사, 단종의 사사 등, 자신이 왕위를 찬탈하고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의 숙청이었지, 정작, 후대에 부담이 될 수 있을만한 외척과 공신 세력은 철저히 비호하고 권력을 주었다. 즉, 태종의 저 말을 가지고 수양을 변호할 수는 없고, 성종이 왕권을 확립하고 치세를 만들어 낸 대부분의 공은 바로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결코 수양의 덕이 아니다.

이 외에 군사적인 실책도 꽤나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층을 사실상 없애버린 것, 지나치게 궁시 위주로 고과를 편성해서 백병전을 취약하게 만든 것, 보법으로 정군 1명당 보인이 3명으로 편성된 것을 보인 2명으로 줄어들게 해서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게 만들고 조호[24]를 지급하는 기준을 호 기준에서 인정 기준으로 바꿔서 군인층 붕괴를 유발한 것, 총통위를 없애버린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세조의 실책은 조선군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8. 사후 간접 디스[편집]


세조의 통치 자체가 유학을 국시로하는 조선에선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방식이었고 비명에 죽은 어린 왕에 대한 동정심이 더해져 당대부터 김종직 같은 사람들이 나왔으며 중종 대 쯤되면 단종과 이른바 사육신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사림은 물론 민간에까지 확산된다.

숙종 집권기 때 묘호가 없던 정종에게 묘호를 추존함과 더불어 단종까지 복위시키면서 간접적으로 디스당했다. 이 때까지 단종은 "노산군"이라 불렸는데 숙종이 "노산 대군"으로 승격하였다가 이후 다시 단종으로 복위시켰다. 이후 덤으로 세조가 처벌하였던 혜빈 양씨와 사육신도 모두 복권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숙종 혼자의 뜻이 아니었으며 조선 팔도 전국의 여론을 수렴하고 논쟁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더 의의가 큰 것.

단종, 사육신, 혜빈 양씨 관련 처벌은 세조가 직접 행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복권, 복위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세조가 잘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단종이 정식으로 복위되어 버리면 세조는... 조선시대는 상복을 몇 년 입는가에 대해 예송논쟁이란 아주 긴 논쟁을 벌일 정도로 예법과 정통성에 대해선 굉장히 민감했었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숙종 또한 정통성의 화신이기에 대대로 이어지는 왕실의 정통성을 일부 부정할 수 있음에도 이를 거리낌없이 행한 것이기도 하였다. 사실 자신과 같은 정통성의 화신인 단종의 몰락을 '구국의 결단' 이라는 미명으로 정당화하는 것 자체가 숙종 본인의 정통성을 다른 의미에서 부정하는 꼴이라고 볼 수 있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통성이 강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게 구국의 결단이면, 왕위에 오르고 싶어하는 어느 방계 왕족이 쿠데타를 일으켜 단종처럼 정통성이 강한 숙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그 왕족이 구국의 결단이라며 정당화할 여지가 있는데, 이는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는 숙종 본인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끔찍한 상황이 될 테니 말이다. 세조 : 네 이놈! 자신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할 셈이냐? 숙종 : 조상님의 만행이 잘한 일이면 누군가가 저를 왕위에서 쫓아내는 것도 잘한 일이 되겠네요? 조상님이야말로 제 정통성 좀 부정하지 마세요! 세조 사후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조선 시대에 세조가 찬탈자이며 단종이 억울하게 왕위를 뺏긴 것이었다는 여론이 다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를 기리기 위해 과거 시험이 치러지기도 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갖가지 이유로 과거가 자주 치러지게 되므로 특기할 사항은 아니다.
[1] 성문법 편찬은 왕권을 제약할 수도 있다. 실제로 후대의 왕들은 종종 신하들한테 "대전에 나와 있으니 명을 거두어주소서"라는 태클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가 성문법 편찬을 주도했다는 것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세조 역시 유교에 기반한 시스템 구축이 국가에 꼭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2] 왕족은 세자를 제외하고는 혼인 후 궁 밖에서 살아야 했다. 평생을 궁 안에서만 사는 세자 - 왕과는 달리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셈.[3] 처녀 귀신이 자신의 한을 풀어달라고 "으흑흑..." 하고 울자 새로 부임한 사또가 으악하고 죽었다는 아랑전설, 장화홍련 등의 신원 설화는 이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4] 실제로 선조인 이성계가 고려왕을 내치고 자신이 즉위하면서 내건 명분은 폐가입진, 즉 진짜 왕씨 왕족은 공민왕을 마지막으로 절멸했고 이후의 왕인 우왕, 창왕 등은 신돈의 아들이니 가짜 왕씨 왕족이므로 쳐내야 한다고 주장해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 때는 사림들이 반발해서 낙향은 했을 지언정 이성계를 도로 끌어내고 왕씨를 다시 왕위로 옹립하려 하지는 않았다. 명분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고려 왕조가 언제 한 번은 칼을 대지 않으면 안 될만큼 심각했긴 했기 때문. 그리고 이방원 또한 이성계가 막내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들자 장남 계승의 원칙을 명분 삼아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즉위했고 이번엔 이방원을 끌어내리려고 조사의의 난이 일어나긴 했지만 사실 그 난은 이성계가 조사의를 간판으로 내세운 것에 불과해서(혹은 이방원이 차마 아버지가 반란군 수장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개중 넘버 2였던 조사의를 희생양으로 내세워서) 사실상 집안 싸움이었다. 심지어 후대의 반란인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 등도 전대왕이 문제가 없는데 왜 반란을 일으켰냐며 복위 운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즉위하자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사육신 사건이 터졌는데, 같은 왕족도 아닌 제 3자인 신하들이 반란을 꾀했다는 점에서 세조가 얼마나 정당성이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5] 이 과정에서 명나라의 화해 주선도 거의 묵살하다시피하는 패기를 보였다. 앞뒤 안따지는 세조의 강한 성격, 자주성, 권력욕이 조선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드문 예시.[6] 웃긴건 강순이 그 이후 장계를 보냈는데 "이만주 이하 2백명을 죽이고 명나라를 기다렸는데 안 와서 철군할게요." 였다.[7] 그 전 100년간 조선이 관리하던 여진족의 조사는 매우 상세했고 100년에 걸쳐 800호에서 8523호로 10배 이상 증가했는데 대가족이었던 여진의 특성상 조선에 소속된 여진인은 최소 5만에서 10만에 달했다.[8] 그것도 2번이나 보냈다![9]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내시만 죽이고 끝났다고 나와있는데, 세조 실록에 보면 "덕중(德中)을 내치어 밖에서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최호와 김중호(편지를 배달한 환관들)를 때려죽이고 나인(소용 박씨)도 또한 율(律)로 처단하였다."라고 분명히 나온다.(세조 37권, 11년(1465년 을유 / 명나라 성화(成化) 1년) 9월 5일(기유) 2번째 기사)[10]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11] 세조의 측근인 훈구파 세력은 왕당파 성향인 세력이였다. 대간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ㅠㅠ[12] 같은 정난공신이었던 양정의 경우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지하게 세조의 왕권에 도전하는 말을 했기 때문에 참수형에 처해진 것이다.[13] 참고로 이 이인손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에 한 명이 이극돈.[14] 왕자 시절에는 겨울에 짧은 팔 옷을 입고 지냈다고 하니...[15] 반면 세종대왕한무제를 좋게 보지 않았다.[16] 게다가 세조가 좋아했던 한무제도 화풀이로 이릉을 팽하고 의심으로 자식까지 해치는 등 토사구팽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역알못?[17] 물론 세조 정권에도 인재도 많았다. 신숙주, 한명회, 권람, 정인지, 남이 등등 같은 유능한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문물 등을 크게 발전시켰지만 유럽 제후들 식으로 너무 키워준 것.[18] 업적을 꽤 많이 남긴 것을 보면 나름대로 괜찮은 임금으로 보일 법도 하지만, 그렇게 평가받기 어렵게 하는 결정적인 과오들이 있다.[19] 아이러니한 사실은 세조 역시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민생 문제와 해결에 꽤 관심이 깊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공신들의 힘을 너무 키워주면 공신들이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지만 말이다.[20] 일단 왕권vs신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다분히 도식적인 이분법이다.[21] 다만 이른바 4대 "사화"가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쟁 때문에 생겨났다는 인식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22] 현재로서는 실제로 남이가 역모를 꾀했는지, 누명을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정황으로 봤을 때, 충분히 남이가 군사를 일으킬만한 상황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23] 그러나 계유정난의 예처럼 권력을 가진 종친에게 찬탈당할 위험도 있는 양날의 검인 점은 감안해야 한다.[24] 봉족호. 경제적으로 군인을 지원하는 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