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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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제4대 국왕.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휘는 도(裪)[휘] , 자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 막내)이었다."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5]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 서문
2. 생애[편집]
2.1. 즉위 전[편집]
조선 건국 후 태어난 첫 임금으로,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서 5년이 지난 1397년 5월 15일(음력 4월 10일) 당시 정안군[6] 이었던 태종과 정녕옹주였던 원경왕후의 3남으로 태어났다.[7]
1408년, 12살에 충녕군에 봉해졌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후 12년 뒤인 1412년에 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어릴 적부터 이미 될성부른 떡잎을 보여 한번 잡은 책은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단군 이래 최고의 독서광으로 병이 나 앓고 있을 때도 줄창 책을 읽으려 들었으므로 건강을 해칠까 걱정된 태종이 방 안의 서책을 모조리 압수했으나 병풍 뒤에 숨겨뒀던 《구소수간(歐蘇手簡)》[8] 이라는 책 하나를 붙잡고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는 얘기는 알음알음 퍼져있는 이야기. 조선에서 왕위를 이을 세자는 왕이 되면 그만이지만 그 외의 왕자는 일개 왕실 종친일 뿐 능력을 이용한 정상적인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충녕대군의 재능이 안쓰러웠던 태종은 아들의 취미생활을 전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한다. 덕분에 학문은 물론 미술, 음악, 수석까지 다양한 부분을 섭렵했고 오히려 대군이었기 때문에 제한받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으므로 다양한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대군으로서의 유복한 생활이 다재다능한 왕으로서의 실력을 키워주는 데 복이 된 셈이다.
아버지 태종은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차지하며 왕통을 바로 세우려고 했으나 결국 자식 농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장자 계승의 원칙을 버려야 했다. 태종은 양녕대군을 계속 왕위에 올리려 했지만 양녕대군의 계속되는 망나니 짓에 포기하고 말았다는게 <조선왕조실록>에 의한 사실이다. 장자 계승의 원칙을 버린 결과 한국사 최고의 성군이 나왔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태종이 상왕으로서 왕위에서만 물러나 세종의 보호자, 후견인 역할을 해준 것도 신의 한 수였다.
보통 위인전에서는 세종대왕이 대군 시절 사심없이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해서 태종의 눈에 들어 왕이 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본인도 자신에게 대권이 올 가능성을 인지하고 야심차게 행동했다는 근거가 여럿 있다.
- 첫째로 세자(양녕대군)가 기행과 방탕함으로 입지가 약화되어 가고 있을 때에 맞추어 충녕대군이 공적인 자리에서 총명함을 드러내었다. 이 때마다 어김없이 태종이 세자와 비교함과 동시에 칭찬하고 신하들이 역시 칭찬하는 분위기로 흘렀고 이는 세자의 심기를 많이 건드렸다.
- 둘째로 세자의 망동에 대놓고 직언으로 간하기도 했다. 매형인 이백강[9] 이 거느린 기생을 세자가 데려가려 하자 한 집안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꾸짖으며 "할머니[10] 의 제삿날에 소인배들하고 어울려서 놀다니 이건 또 뭐하는 짓인가?"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출전1] 또 한번은 "나 새 옷 장만했다."라고 자랑하는 세자에게 먼저 마음을 갈고 닦으라고 충고했으며[출전2] 옆에 있는 신하들도 충녕대군의 말이 맞다며 모두 세자를 욕하는 등 세자의 속을 있는 대로 긁어댔다. 1달 뒤 열받은 세자가 태종에게 "그래봐야 말만 번지르르하지 충녕은 심약한 놈이 틀림없다"고 헐뜯자 태종이 "충녕, 그 아이가 겉으로는 유약해도 결단력에서 있어서 당할 자가 없다!"라고 오히려 두둔했다.[출전3] 대충 보면 알겠지만 누구라도 욕할 짓만 세자가 골라 했다. 이런 일은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 셋째가 아주 결정적이다. 충녕대군은 자신의 집에서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살해된 남은의 형이자 태종이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남재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 도중 남재가 갑자기 충녕대군에게 "제가 예전에 잠저 시절의 주상(태종)께 학문을 권했더니 '왕위도 못 잇는데 학문은 해서 뭐합니까?'라고 하셔서 '임금의 아들이라면 왕위에 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군께서 학문을 좋아하시니 기쁩니다"라는 말을 했다.[11] 이 때 남재와 충녕대군 두 사람만 있던 것도 아니고 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이 듣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당시의 상식으로는 꾸짖고 역모로써 고변하는 등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지만 충녕대군은 그냥 태종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끝냈고 태종은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하고 웃을 뿐이었다.[12] 만일 충녕대군이 이를 꾸짖고 부왕에게 고발했다면 남재는 의금부에 끌려가 실컷 매타작을 당하고 목이 날아가거나 유배될 정도의 매우 위험한 언행이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석이든 공석이든 말 한 마디가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것이 전근대 왕조의 정치판이다. 하물며 왕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꼬드겼으니 조금만 삐끗했어도 남재는 물론이고 충녕대군까지 싸잡아서 역모죄를 의심받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이상의 일화들을 살펴볼 때 충녕대군은 분명히 왕위에 욕심이 있었다. 원래 집안을 이어야 할 장남은 인간말종이고, 어차피 장남이 아닌 이상 차남인가, 삼남인가는 상관이 없으니 세자 자리, 멀리 봐서 왕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움직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교 사회에서 양대 계승 명분중 적장자 계승이 불가능하다면 남은건 '택현(擇賢)'인데 이건 말그대로 어질고 현명한 이를 선택한다는 뜻이라 둘째든 셋째든 상관이 없었다.[13] 여기에 더해 차남인 효령대군 역시 왕위에 대한 욕심을 내보인 정황은 없기에 절대적으로 결격사유가 있는 대군들을 제하고 보면 장유유서로 보나 택현으로 보나 삼남 밖에는 답이 없었다.
양녕의 비행이 날이 갈수록 도를 넘을 정도로 심해지자 태종과 중신들도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을 전폭 신뢰하는 모습이 기록에 나오고 있으며, 심지어 명나라 사신인 황엄조차도 '충녕대군이 부왕처럼 영명(瑩明, 총명하다는 뜻)하니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대놓고 말하고 돌아다녔고 실제로 조선에서 새로운 세자를 봉해달라는 표문을 명나라에 전하자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는 것'이라고 바로 알아맞혔다.
따지고 보면 건국 초기 시절이라 아직 적장자(嫡長子)가 왕위에 오른 사례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14] 능력이 만렙이거나 야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왕위 계승자로 지목되거나 왕위에 오를 수도 있던 시대였다. 할아버지 태조가 고려 왕실의 옥새를 빼앗아 조선의 초대 국왕으로 등극한 바 있고 아버지 태종도 5번째 왕자로 왕위 계승에 불리한 위치에 있다가 왕자의 난 두 번으로 결국 국왕으로 등극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국왕에 오른 부왕 태종[15] 은 명분도 그렇거니와 자식들도 자신을 본 받아 같은 짓거리를 할까봐 두려웠는지 틈틈히 형제들 간의 우애를 당부하는 한편 왕위 적장자 승계 원칙을 누구보다 철저히 확립시켜 왕권 다툼에 대한 예방과 왕권 안정을 도모하고 싶어서[16] 세자의 계속된 비행에도 누구보다 장남이 정신차리고 제대로 왕위를 물려받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자신처럼 왕좌를 노리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유혈 투쟁을 하는 꼴은 부모 입장에서도 보기 싫었을 것이다. 원경왕후 민씨 역시 형제 간의 골육상쟁이 두려웠는지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국본으로 삼는 일에 끝까지 반대했다. 문제는 그러거나 말거나 세자는 계속 태종의 눈 밖에 어긋나는 짓을 일삼았다는 것.[17] 이런 와중에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세자의 행동을 고자질을 하는 등 세자를 압박하면서 견제하는 동시에 자신의 모범생다운 행실을 보여주면서 태종과 신하들에게 점수를 땄다. 세종의 즉위 뒤 쓰여졌다는 문제점은 있지만 후에 양녕대군으로 폐해지는 세자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낸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대로 수록되었다.[18]
능력만이 아니라 인성 면에서도 두 왕자가 대조를 이루었던 사건이 있었으니 막내 동복아우 성녕대군의 죽음이었다. 성녕대군이 큰 병에 걸려 죽게 될 때 충녕대군은 의원과 함께 어린 동생 곁을 지키면서 의서를 탐독하고 열심히 간호하여 궁궐의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던 반면에 세자는 이 때 활쏘기나 하면서 띵까띵까 놀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게 세자를 감싸던 태종마저도 이 사실을 알고는 "하는 짓이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것 같지 않다"[19] 라며 깊은 실망을 드러냈다.
사실 세자에게는 태생적인 결점이 있었다. 태종은 세자를 위해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서 평생 원경왕후의 원망을 들어가면서까지 처가인 여흥 민씨 집안을 갖은 꼬투리로 끝까지 멸문했다. 그런데 세자는 태종이 사저에 있던 시절 외가에서 자라 숙청된 외숙들[20] 과 매우 가까웠다. '혹시 그래서 폐세자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이것이 폐세자의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작 세자는 자기네 외삼촌들이 궁지에 몰리자 헌신짝마냥 외면했다. 민무휼과 민무회가 원경왕후의 병문안을 왔다가 세자에게 "우리 형들이 죄 없는데 죽었으니 우리만큼은 보전시켜 주소서."라고 했는데, 세자는 "외삼촌들은 죽어도 싸다"고 비웃었다. 민무회는 어이가 없어서 "아니 대체 마마는 어느 집안에서 자랐습니까?"라고 확 내질러 버렸다. 어린 시절 민씨 집안에서 자랐던 세자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의미로 한 말이다. 같이 있던 민무휼이 수습하기는 했지만 결국 각종 개차반짓으로 입지가 좁아진 세자는 점수를 벌어보겠다고 얼마 안 있어 그 일도 태종에 고변해서 민무휼과 민무회를 죽게 만들었다. 비록 토사구팽이 예정된 상태였지만, 세자가 자기의 마지막 뒷배가 되어줄 수 있는 민씨 숙청에 가담한 행동은 현명함이었을까 아니면 어리석음이었을까?[22]
한편 둘째인 효령대군은 평생 부처를 받드는 선비, 그러니까 속가제자가 되었다.[23] 효령대군이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에서 동생 세종에게 밀린 이유 중 하나가 술을 못 마셔서다. 태종에 따르면 "군주가 술은 너무 많이 마셔도 안 되나 의전 상 아예 못 마셔도 문제가 되는데, 전에 사신들이 왔을 때 보니까 효령대군이 술을 못먹는데 충녕대군은 마시긴 하더라"는 이유였다. 원래부터 불가에 뜻이 있었기 때문에 계승권에 관심이 없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다. 그런데 사실 세종도 술을 잘 마시는 건 아니었다. 소주를 겨우 1~2잔 마실까 말까 할 정도였다. 다만 당시의 소주는 도수 40도 이상의 원조 증류식 소주였기 때문에 술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두잔 먹는 것도 용한 것이긴 했다. 물론 정말 술 못마신다는 이유만으로 걸러진 건 아니고, 정확히는 "애가 그냥 순둥순둥하기만 해서 뭔 얘기를 해도 그냥 헤헤 웃고만 있다"는 말과 저 술 이야기가 같이 나왔다. 즉 일을 똑부러지지게 처리하지도 못하고 사신 앞에서 한 잔 받아 넘길 정도의 융통성머리도 없는 애를 어떻게 왕으로 앉히겠냐는 것.
태종 18년(1418) 6월 3일 태종은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다. 처음에는 양녕대군의 장남인 순성군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박은 등 대신들이 반발해 뜻을 거둔다. 다음으로는 점을 쳐서 세자를 정하겠다고 했으나 다시 의견을 바꾸고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한다는 이유로 충녕대군을 세자로 지명한다. 태종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명분인 유학적인 장자 계승에 따르면 순성군이 후계를 이어가는 것이 일견 옳아보이지만, 문제는 양녕대군이 사망이 아닌 생존 상태에서 폐세자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되면 원손 이개는 졸지에 아버지를 제끼고 세손이 되는 셈이므로 원손 본인부터가 입장이 난처해지는데다가 태종 사후 살아있는 양녕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지, 양녕 혹은 세손이 아버지를 폐위시킨 대신들에게 어떻게 나올지 등등 골치아픈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온 조정이 한 목소리로 반대했다.[26] 이어서 점복으로 하는 것은 과거 한성부로 돌아올 때 명분으로 활용되던 것으로 천명(天命)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27] 하지만 양녕대군을 폐세자하려는 생각을 하면서 태종이 다음 후계를 정하지 않았을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도 세자 책봉 이후 양위까지 한 것을 보면 충녕대군을 세우고자 했을 것이다.아아! 너 충녕대군 도는 관홍장중(寬弘莊重)하다.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 17일 2번째 기사. 정전에 나아가 세자와 경빈에게 책보를 내려주다.[24]
충녕대군은 셋째 왕자이기 때문에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첫째 왕자인 양녕대군이 평소의 망나니 짓 때문에 끝내 폐세자가 되고 그 전부터 영특하고 어질기로 유명했던 충녕대군이 왕통을 잇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양녕대군이 일부러 양보했다고 하나 실상은 지나친 말종 짓 때문에 끝내 태종이 그를 비호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양녕대군은 제 버릇 못 고치고 여전히 망나니 짓을 하며 세종의 속을 긁었고 긁은 정도로 끝나는게 아니라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려서 재위 기간 초기에 세종의 약점이 되기까지 했다.[28] 그러나 세종의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도리어 양녕대군의 처우도 점점 좋아졌다.
2.2. 재위기간[편집]
태종은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지 두 달여 만인 태종 18년(1418년) 8월 10일 전격적으로 양위한다. 태종은 재위 기간 수시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선위한다는 쇼를 벌이고는 했는데[29] 신하들은 그때마다 찬 바닥에서 절을 하며 말리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신하들은 '이번에는 또 얼마나 선위 파동이 오래 갈려나?' 했는데 태종은 세자에게 임금이 즉위식 때 입는 면복을 입혀 신하들 앞에 내보냈다. 당연히 왕의 복장은 왕만 입을 수 있었다. 선위를 반대하여 뜰에 나아가 엎드리던 신하들도 면복 차림의 세자를 보고 군말없이 조복으로 갈아입고 세종의 즉위식에 참석했다. 이는 불안정한 셋째 아들의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태종 자신의 남은 여생을 쓰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세종 4년(1422) 죽을 때까지 4년간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종은 태종이 죽은 뒤에야 진정한 조선의 국왕으로 거듭났다.
태종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완전히 잡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는데 첫 작업은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그로테스크했다. 태종은 세종의 처가인 심씨마저 멸문했던 것인데 선위 직후 심온을 영의정과 세종의 즉위를 알리는 명나라 사신으로 임명하며 힘을 실어주는 척 안심시켰다가 시답잖은 사건을 끄집어냈다. 이른바 강상인 사건으로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 부분의 일을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 보고하자 그를 친히 국문해 함경도 관노로 보냈다. 태종이 이미 "왕이 30살이 될 때까지는 내가 맡겠다"고 했는데 이를 어겼다는 죄목. 그가 태종을 아주 오랫동안 모셔온 공신임을 감안하면 매우 큰 형벌이다.
한 달 뒤 심온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이에 재조사해 박습[30] , 이조판서 심정[31] , 동부총재 이관이 심온과 논의했다는 답을 얻어내 엮어냈다. 그러고는 강상인은 거열형, 이관과 심정은 참수형에 처해 죽였으며 귀국길의 심온을 붙잡아 고문했다. 이 때 심온은 하루에 곤장을 2번 맞고 압슬형을 5번이나 받고도 자복하지 않았다가 류정현이 "이보시오, 심공, 당신 지위가 뭔지 알면 이게 뭐 하는 건지 알 텐데 왜 자복 안 하시오?"라고 하자 결국 자복했다. 유정현의 말을 듣고 심온도 처음부터 태종이 꾸민 짓임을 깨달은 모양. 심온은 다음 날 바로 사약을 마셔버렸다.[32] 야사에는 "앞으로 반남 박씨와는 혼인하지 말라." 하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박은을 두고 한 말 같다. 실제로 박은도 이 일에 유정현처럼 연루되어 있어서 심온을 경계했고 세종비인 소헌왕후를 폐비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는데 소헌왕후 심씨의 어머니를 노비로 강등시켰다.
사실 이는 명나라 눈에 불경하게 보일 수 있는 짓이었다. 나라까지 직접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을 처형해버리고 그의 아내를 노비로 만들었으니 외교상 명나라에서 불편해 할 가능성[33] 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애써 몸이 안 좋아 시골로 내려갔다며 거짓말까지 하라고 지시했다.[34]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까지 고려하면 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3대가 멸족을 당한 셈이다. 세종은 태종 사후 황희 등의 주청을 받아들여 태종과 원경왕후의 유훈이라는 핑계로 장모와 처제들을 노비에서 풀어주고 직첩도 돌려주었으나 그의 장인 심온의 사면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아들 문종 대에 가서야 사면이 되었다. 이는 선왕의 결정을 바꾸는 것은 선왕의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와 선왕에게 불효가 된다는 유교 사상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효를 행하는 것 중 하나가 선친(혹은 선왕) 사후 3년간(3년상 기간)은 생전의 처분을 바꾸지 않는 것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종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효 이전에 심온 본인에 대해서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온갖 병에 시달리던 세종이 아들 문종에게 양위하려고 했을 때 장인의 사면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35]
심온 옥사 재수사는 세종이 물갈이를 하기 가장 적합한 일이었고 명분도 분명했던 정치 보복이었으나 세종은 일체의 정치 보복을 하지 않았다.[36][37] 옥사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박은은 태종이 사망하기 직전에 병사했는데 사후 관직 박탈과 같은 처벌을 전혀 받지 않았다. 심온에게 자복을 받아내고 심온 일가의 처벌뿐만 아니라 소헌왕후의 폐비까지 주장했던 유정현도 계속 좌의정으로 일하며 국가의 재정 분야의 일을 하면서 궤장까지 받는 명예를 얻었으며 72세가 되어서야 은퇴해서 곧 자연사했다. 다만 그 때문에 소헌왕후는 개인적으로 고생했을 가능성이 큰데 심지어 아버지 심온이 죽을 당시에 소헌왕후 본인은 임산부[38] 였으며 죽을 때까지 아버지가 신원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39]
이러한 일련의 과정 이후 세종이 아버지에게서 어보를 받고 즉위했다.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세종 4년(1422년)에 숨을 거두었지만, 아직 조선 조정은 온전히 세종의 것이라고 하기엔 일렀다. 태종은 죽었으나 아직 조정에는 태종 때의 사람들뿐. 세종 4년(1422) 당시 영의정 류정현[40] , 좌의정 이원[41] , 우의정 정탁[42] , 병조판서 조말생, 이조판서 허조, 호조판서 이지강 등 주변에는 태종의 사람들만 있었다. 이 신하들은 초장부터 세종을 잡으려는 의도였는지 세종의 말에 따르지를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일을 진행하려는 속내를 내비친다. 대표적인 일이 폐세자 양녕대군에 관한 일. 태종의 상을 치르기 위해 유배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양녕대군을 탈상 전부터 다시 유배지로 내보내라는 상소를 사헌부, 사간원, 육조, 의정부 등지에서 끊임없이 올려댄다. 이때 내용 중에는 "양녕대군의 거취는 신들이 태종에게 위임받은 것이니 전하도 사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 있었다. 양녕대군의 일은 자기들이 태종에게 위임받았으니 지금 왕이라도 간섭하지 말라는 소리다. 이러한 상소가 줄을 잇자 세종은 상소를 던지기도 하고 무시도 하지만 결국 신하들의 압박에 못 이겨 양녕대군을 내보내게 된다.
즉위 초의 상황은 세종이 진정한 군왕이 되기까지는 험한 길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던 중 세종에게 1가지 반전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소위 말하는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43] 이다. 고려 말 김도련이라는 사람의 아버지가 함경도에서 양인 426명을 불법적으로 노비로 만들어 자신이 관리하고, 당시의 권문세가 임견미에게 뇌물을 바쳐 이를 허용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임견미가 죽고 고려가 망하면서 노비들이 다시 양인으로 돌아왔는데, 조선조에 들어와 아들 김도련이 노비 426명과 그 자손들까지 거의 천 명을 자기 소유 노비로 되찾겠다고 한 일이다. 김도련이 당시 조선의 권력자들에게 노비로 뇌물을 주어 큰 문제가 되었다. 노비를 무려 36구나 뇌물로 받아 뇌물 스캔들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떠오른 병조판서 조말생부터 시작해서 평성부원군ㆍ우의정ㆍ좌의정ㆍ곡산부원군 등 여러 권력자들이 연루되었고 이 때 바쳐진 총 노비 수만 132구(口: 노비를 세는 단위). 가히 조선 초기 최고의 뇌물 스캔들이라 할 만했다. 당시 노비 1구당 현재 가치로 천만 원 정도[44] 였고 노비도 사람인지라 자손을 낳으면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나니 뇌물 스캔들의 사이즈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가능하다.이제부터는 양녕이 들어온 때에 이와 같은 봉장(封章)은 다 접수하지 말라. 또 이 봉장의 글은 도대체가 진부한 말뿐이다. 전일에 올린 것과 다름이 없으니, 목판에 새겨 두고 찍어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냐. 또 이 봉장은 거꾸로 접어서 봉(封)했구나.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12월 27일 병자.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재위 4년(1422)이었다. 처음에는 별로 주목받지 않았으나 4년 뒤(1426)에 사헌부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즉시 조말생은 파직되고 유배형을 받았는데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함경도에 사람을 보내 낱낱이 조사하도록 명한다. 이를 계기로 조말생의 다른 죄들이 드러났으며 이 때 조말생이 노비 36명에 장물 780관, 현재 가치로 약 14억 원 남짓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조말생은 교형을 받을 뻔했으나 유배로 그치게 된다.[45] 관리 17명이 노비 132명을 뇌물로 받았다는 사실도 드러나자 세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관련자들에게 유배 혹은 파면 등의 처벌을 내렸다. 이로 인해 태종의 구신들을 몰아내고 세종의 세력으로 조정을 채울 수 있었다. 이듬해 1427년(세종 9년) 1월 황희를 좌의정, 맹사성을 우의정으로 승진시키면서 세종은 본격적으로 성군으로서 행보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재위기간은 그야말로 업적의 향연이었다.
세종 8년(1426년) 2월 한양 대화재가 발생했다. 세종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고 훌륭하게 후속 대책을 시행하기는 했지만, 이 화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조선 500년 동안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 아닌 평시에 발생한 재난 중 한양을 가장 크게 파괴한 재난이었다. 시작은 1426년 2월 15일의 화재였다. 이날 경시서(京市署)[46] 와 북쪽의 행랑 106간, 한성부 중부(中部)의 인가 1630호, 남부의 350호, 동부의 190호가 불에 탔다. 당시 세종과 세자는 군사훈련 강무를 위해 강원도 횡성에 있었으므로 중전인 소헌왕후가 대응을 총괄했는데 금성대군[47] 을 임신한 상태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했다.[48] 다음 날인 16일에는 전옥서[49] 와 행랑 8간, 민가 200여 호가 불탔으며 보신각 종루까지 탈 뻔했으나 간신히 진압했다. 세종은 16일에 급보를 접하고 19일에 한양에 돌아와서 아내와 교대해 대응을 지휘했다. 큰 화재는 잡혔지만 소소한 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이를 틈타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는 등 재난이 끝나지 않자 세종은 계속해서 대책을 수립했다. 부상자의 치료와 이재민에 대한 식량의 배급 등 1차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한편 화재 예방을 담당하는 금화도감[50][51] 을 설치하고 가옥의 개량 및 지나치게 좁은 도로들을 정비해 큰 화재가 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붙어있는 가옥을 적당히 이격시켜 다시 짓도록 조치함과 아울러 그 사이마다 우물을 파서 화재를 빠르게 진압할 수 있도록 한양의 도시 구조를 바꿔놓았다. #
재위 9년(1427) 5월 박연이 경기도 남양에서 나는 옥으로 편경을 만들었다. 이제까지 편경은 중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다. 9월 어린 왕족들의 교육을 위하여 종학(宗學)을 세웠다. 교육 내용이나 수준은 성균관과 비슷했으리라 추측한다.
재위 11년(1429) 2월 주종소를 설치하여 편종을 법식대로 만들게 했다. 5월 정초 등이 농사직설을 편찬했다. 6월 돌을 던지는 군사인석척군을 폐지하고 단오 때 행해졌던 돌 던지는 놀이인 석척희를 금지했다. 7월 신라, 고구려, 백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재위 12년(1430) 2월 농사직설을 반포했다. 10월 공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주는 법을 제정했다. 11월 등에 매질을 가하는 편배를 금지했다.
청동 활자인 계미자가 고르지 못함을 인식하여 재위 2년(1420) 경자자, 재위 16년(1434) 갑인자, 재위 18년(1436) 병진자 등을 주조해 활판 인쇄 기술을 더욱 발전케 했다. 재위 19년(1437) 장영실, 이천 등에게 지시해 앙부일구, 자격루를 만들도록 했다.
2.3. 말년[편집]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만 전념한데다 20대 초반부터 왕위에 올라 열정적으로 국정을 돌보았고 육식을 즐겨하는데다 특별히 몸을 쓰는 강무 등을 즐겨하지 않았으므로 익히 알려진 대로 비만에 각종 성인병을 달고 살았다. 결국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고 재위 후반기들어 각종 질병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재위 24년(1442)부터 세자 향에게 국정을 대리청정케 했다. 국정에서 물러난 세종은 이 시기부터 좋은 온천에 들러 요양을 하고 유명 사찰을 찾아 먼저 떠난 자식들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일으켰는데 훈민정음 창제가 이 시기에 이뤄졌다.
재위 25년(1443)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재위 26년(1444)과 27년(1445) 5남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이 연달아 죽더니[52][53] 재위 28년(1446) 왕비 소헌왕후마저 먼저 죽고 말았다. 연이은 가족들의 죽음 이후 건강은 더욱 악화됐다.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감지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세손(단종)의 앞날을 부탁했다.
재위 32년(1450) 음력 2월 17일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향년 52세에 승하했다. 능호는 영릉이다.
3. 업적[편집]
자세한 내용은 세종(조선)/업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비판과 반론[편집]
자세한 내용은 세종(조선)/비판과 반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특이한 기록들[편집]
자세한 내용은 세종(조선)/특이한 기록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가족 관계[편집]
7. 영릉[편집]
자세한 내용은 영릉(세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어진[편집]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소실된 대부분의 다른 어진과 달리 1935년에 일제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이미 그때에도 세종의 실제 어진은 없었다고 한다.# 더 과거, 가령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세종의 어진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두 전란을 겪으면서 화를 면한 어진은 이곳저곳에 있었던 태조와 반쯤 타버린 문종의 어진, 그리고 이이첨이 구해낸 세조의 어진밖에 없었다고 한다. 역사의식 함양을 위해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는 표준영정 지정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때 세종의 어진을 그리게 된 이가 바로 김기창이었다. 하지만 당시부터 어진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과 흡사하게 그렸다고 하여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만원권의 어진은 전주이씨 출신 가수 이석을 모델로 그렸다고 전해진다.
https://youtu.be/Ri8LFWJf4Dg
실제로는 더 후덕하고 수염이 그닥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고기반찬을 좋아했다는 기록이나 이방원이 상왕이 된 이후 세종이 뚱뚱하니 함께 사냥을 나가야겠다고 한 대목을 감안하면 비만 체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주변 친족들의 인물을 통해 세종의 외모를 상상해본다면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나 큰아버지 익안대군, 고모 경신공주, 형 효령대군, 차남 세조의 초상 자료가 남아 있으니 참고할 것. 특히 실록에는 양녕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 3형제의 얼굴이 무척 닮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아버지 태종은 먼저 죽은 세종의 동생 성녕대군에 대해 회상을 하며 "성녕은 내 아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다른 녀석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아마 효령대군과 가장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렇다면 수염이 적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효령대군 초상화는 생각보다 숱이 짙은 수염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태조는 수염이 성글다는 말도 있으나, 지금은 실전된 장년기의 어진 사진을 보면 역시 제법 짙은 수염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의 아들 중 세조는 수염이 매우 적지만, 반대로 문종은 수염이 풍성했다.
2014년 9월 4일, KBS 여유만만에 출연한 고종황제의 손자인 황손 이석은 광화문 동상의 경우 현재까지 남아있는 효령대군의 초상화와 자신의 얼굴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말을 했다. # 다만, 황손 이석 씨의 발언은 전반적으로 과장과 허황이 있으니 가려 살펴야 한다. 자세한 이유는 이석 문서로.
이순신 장군 동상에 비해 상당히 큰 데다가 시선이 장군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터라 묘하게 이순신 장군이 세종대왕을 호위하는 느낌이 난다. 이게 어울리는 것이, 한국에 있는 수많은 왕 중 성웅이 호위할 자격이 있는 왕이라면 세종대왕 정도니 말이다. 아울러서 한국의 문과 무를 대표하는 것이 저 두 위인들이다.
9. 창작물[편집]
자세한 내용은 세종(조선)/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직접 쓴 글과 시[편집]
1446년 음력 9월 세종이 꿈에서 지은 시이다. 그래서 아들인 문종과 세조에게 이 시는 꿈에서 지은 시라고 말해주었다.꿈속에서 지은 시
교외에 비 풍족하니 백성 마음 즐겁고
한양에 해 비추니 기쁜 기운 새롭다
많은 경사 누가 선행 쌓아서라 했던가
우리 임금 위해 일신을 삼갈 뿐이네
11. 기타[편집]
-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이지스 구축함인 KD-3 1번함은 이 왕의 이름을 따 세종대왕함으로 명명되었으며 이후 동일함급은 세종대왕급 구축함이 된다. 이지스함 1번함에 불릴 만한 인물이라면 세종 아니면 이순신뿐이지만,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이 KD-2 구축함에 명명되면서 후속함인 KD-3 1번함에 세종이 낙점된 듯하다. 두 급의 구축함 모두 한국 해군 제7기동전단의 일원으로서 활동 중이다.
- 세종특별자치시, 세종과학기지, 세종로, 세종학당, 세종대학교, 세종텔레콤 등 세종의 이름을 붙인 고유명사가 매우 많다. 이름 자체가 갖는 상징성이 엄청나기도 하고 라틴문자로 표기하기에도 적절해서 그런 듯하다. 인천국제공항도 원래 세종국제공항으로 명명하려 했으나 인천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만약 이대로 되었다면 세종공항이 왜 세종시가 아닌 인천시에 있는가로 불평하는 외국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 중국에서 의도적으로 한국 역사를 중국 소수민족 역사로 편입하기 위해 세종대왕을 중국인만을 뜻하는 조선족(朝鮮族)이라고 기재하는 경우가 있는데 애초에 나랏말이 중국과 다르다고 천명한 국왕이기도 하고 조선족이라는 단어 자체가 1949년에 생긴 신조어기 때문에 근본없는 허위 억지 주장이다. # #
- 태종이 세종에게 자신이 죽어 상을 치를 때 육식을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는 단순히 세종이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허락한 것이 아니다. 본래 유교의 장례 문화는 매우 가혹한데, 부왕이 죽어 3년상을 치르면 무명 옷을 입고, 삼시세끼 고기 없는 소식을 하는 것과 더불어 곡을 해야 하는데 이러면 당연히 몸이 축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런 장례절차를 대부분 수일 정도로 간략화시켰다. 그러나 태종은 효심이 깊은 세종은 자신의 3년상을 정석대로 치를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56] , 상중에 육식을 허락한다는 유언에 가까운 말을 남긴 건 자신의 장례보다는 건강하게 국사를 돌보는 것을 중요시하라는 뜻이었다. 세종과 똑닮은 아들인 문종이 3년상을 줄지어 치르다 요절한 것을 보면, 이는 태종의 예리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57]
- 북한에서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는 근본적으로 백성들에 대한 지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세종시대에 백성에 대한 봉건적 착취는 더 심해졌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의외로 이런 시각은 일본 혐한들이나 뉴라이트, 이영훈 등 식민지 근대화론 학자들과 유사하다. 의외라고 할 수도 있지만 뉴라이트 계열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주사파가 나온단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해석이 의외로 비슷한 것은 크게 놀랄 일만은 아니다.[58] 이에 대한 반론은 세종(조선)/비판과 반론 문서로.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아들인 문종과 함께 명나라에 묘호가 통보된 단 두 명의 임금이다. 원래 조선은 명나라, 청나라와 교류할 때는 태조니 성종이니 하는 묘호 대신 중국 왕조로부터 받은 시호로만 사용했다. 왜냐하면 묘호란 기본적으로 황제국에서만 사용하는 예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종이 죽었을 때에는 대놓고 "우리 왕 묘호 문종이라고 지었고 그 이전 선왕의 묘호는 세종이었음"이라고 명나라에 직접 알렸다. 다만 그 이후에는 단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을 보면 뭔가 외교적으로 문제시되긴 했던 모양이다.
- 세종 때 만들어진 여러 과학기기들이 2021년 6월 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79번지 피맛골 입구에서 대거 발굴되어 조선 과학사를 실증할 수 있는 주요한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낮에는 해시계, 밤에는 별시계가 되는 복합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와 물시계의 구슬 방출장치인 주전(籌箭)도 실물로 처음 발견되었는데 이로서 관련 유물들의 정확한 복원에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세종대왕이 보던 밤낮 겸용 시계… 땅속서 잠을 깨다
- 조선 왕조에서 처음으로 종신(終身)한 임금이다. 선대의 왕인 태조, 정종, 태종은 모두 종신하지 않고 생전에 퇴위했다.
- 조선 왕조에서 처음으로 개국 이후 태어난 임금이다. 처음으로 개국 이후 태어난 세자는 형 양녕대군이었으나 결국 폐위되었다. 또한 별다른 관직 경력 없이 성인이 되어 세자로 책봉된 조선 최초의 사례이며 이는 이후 조선 역사를 통틀어 3명[59] 밖에 나오지 않은 케이스이다. 즉 세종의 세대는 고려왕조에서 관직을 경험한 1.5세대(정종, 태종)가 퇴진하고 본격적으로 개국 이후 세대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승계해야 하는 타이밍이었지만 양녕대군의 막장 행보가 이를 늦추었고 그 아들인 문종까지 가서야 드디어 미성년 시절 세자로 책봉되어 즉위한 국왕이 탄생했다.
- 중국의 신 남극장생대제를 존군으로 추봉하기도 했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16년(1434)과 18년(1436)에 제주도 원숭이의 기록을 근거로 꽤 근래까지 한반도에 원숭이가 자생했을 가능성도 일부 제기되고 있으나 제주도 원숭이의 경우 이전 고려시대에 제주도 원숭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에 제주도에서 원숭이가 자생하고 있던 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 예물로 받은 원숭이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 제주도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한글과 한국어를 헷갈리는 사람들 때문에 한국어와 관련된 주제로 이야기하는 상황에서 한국어를 창시한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에스페란토를 만든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마냥 인공어의 제작자로 여겨지는 것.... 물론 세종이 만든 것은 한글이지 절대 한국어가 아니다.
12. 어록[편집]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 서문
"그는 족보로 된 임금이 아니다. 전주 이씨의 임금이 아니라 하늘이 낸 임금이었다. 그가 정음을 짓고 모든 책의 언해를 만든 것은 모두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정말 민족 걱정을 한 이요, 정말 인생 걱정을 한 이다. 어쩌면 그런 어진 마음이 이 역사에도 났을까? 공자가 관중의 역사적 공로를 칭찬하여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야!" 했다지만, 오늘 우리야말로 이 사람이 아니고 그냥 짜 먹자는 그놈들만이 있었다면 정말 짐승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영민하고 총명했으며 강인하고 과감했다.
무거우며 굳세였고 점잖고 두터웠다.
크고 너그러웠으며 어질고 사랑했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다.
(英明剛果, 沈毅重厚, 寬裕仁慈, 恭儉孝友, 出於天性)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총서
"임금으로 있으면서 백성이 주리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진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 하물며 지금 묵은 곡식이 이미 다 떨어졌다고 하니,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준다 해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되거늘, 도리어 주린 백성에게 조세를 부담시켜서 되겠는가. 더욱이 감찰을 보내어 백성의 굶주리는 상황을 살펴보게 하고서 조세조차 면제를 안해 준다면, 백성을 위하여 혜택을 줄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1419) 1월 6일 신해 6번째 기사 - 강원도 원주 등지의 기민의 조세를 면제해 주니, 변계량이 이의를 제기하다
"관·민간에 폐단이 없도록 힘쓰라. 만일 공평하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법에 의하여 엄중하게 논죄하라."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1420) 8월 14일 경술 1번째 기사 - 여러 도에 손실을 조사하는 경차관을 보내다
정사를 보았다. 근신에게 이르기를,
"해를 거듭한 기근으로 백성들은 간혹 먹을 것이 떨어지는 일이 있는데도 여러 경차관(敬差官)은 대의는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직 일 처리에만 마음을 써서, 왕년에 민간에게 대여한 곡식을 징납하기에 너무 심히 하므로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니, 경차관에게 유시하여서 백성이 가난하여 갚지 못하는 자에게는 강제로 징수하지 못하게 하라. 내가 깊은 궁중에 있으므로 민간의 일을 다 알 수 없으니, 만일 이해관계가 민간에게 절실한 것이 있게 되면, 너희들이 마땅히 모두 아뢰게 하라."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1421) 1월 3일 병인 1번째 기사 - 경차관에게 명하여 가난한 백성에게서는 대여한 곡식을 징수하지 못하게 하다
정사를 보았다. 호조 판서 이지강(李之剛)이 계하기를,
"지금 밀과 보리가 익기 시작하여 백성의 식량이 대어 먹을 수 있으니 기민[飢民/饑民]
을 진제[振濟] 하는 것을 중지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밀과 보리가 익었다 할지라도 나는 굶주리는 백성이 있을까 염려되니 수령들로 하여금 직접 백성의 살림을 조사하게 하여 만일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구제하게 하라."
했다.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1421) 4월 27일 기미 1번째 기사 - 이지강이 밀·보리가 익는다며 굶주린 백성의 구제를 중지할 것을 건의하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내가 박덕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생민의 주가 되었으니, 오직 이 백성을 기르고 무수[撫綬]
하는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여, 백성에게 친근한 관원을 신중히 선택하고 출척[黜陟] 하는 법을 거듭 단속했는데도, 오히려 듣고 보는 바가 미치지 못함이 있을까 염려된다."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1423) 7월 3일 신사 3번째 기사 - 백성의 폐해를 구제하는 것 등에 관해 왕지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신(信=믿음)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세종실록 28권, 세종 7년(1425) 4월 14일 계축 1번째 기사 - 동전과 저화의 교환에 대하여 논의하다
정사를 보았다. 집의 정연(鄭淵)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제 밤에 경회루(慶會樓)에 나가서 못 가를 거닐었는데, 풍악소리와 노랫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아니했으니, 요사이 밤에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헌부에서는 어찌하여 금지하지 않느냐. 내가 깊은 궁중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이 소리를 들었는데, 그대들은 알지 못했다고 말하겠느냐. 내가 연사가 흉년이므로 자주 연회를 하지 않았으나, 근일에 효령 대군(孝寧大君)이 족친을 모아 연회를 열므로, 내가 술을 보내 주었으며, 공신(功臣)들이 이원(李原)이 사행(使行)에서 돌아온 것을 위로하므로, 내 또한 술을 보냈었다. 비록 내가 이러한 일을 하더라도, 그대들은 직책이 규찰(糾察)에 있으니 마땅히 〈나에게〉 그 까닭을 물어야 했을 것이다. 전조(前朝)의 말기(末期)에 밤에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그 폐풍이 극도에 이르 렀었다. 사헌부에서는 유의(留意)하라."
하니, 연이 대답하기를,
"평민(平民)의 집은 쉽게 수색 체포할 수 있으나, 조관(朝官)들의 집은 집안이 깊숙하고 지키는 것이 강고(强固)하여서 법을 집행하는 관리도 또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낮이면 법리(法吏)로 하여금 살피게 할 수 있으나, 밤은 순찰(巡察)하는 관리의 직책이므로 사헌부에서 감찰할 수 없습니다."
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본래부터 탁주(濁酒)를 마시는 자는 붙잡히고, 청주(淸酒)를 마시는 자는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밤에 술 마시는 폐해는 적지 않으니 사헌부에서는 유의하라."
했다.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1425) 12월 14일 기묘 1번째 기사 - 밤 늦도록 술 마시는 폐풍을 규찰하게 하다
"그대가 유생(儒生)이니 어찌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모르리요마는, 그러나 내가 친히 가르치는 것은 그것을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수령이 힘써야 할 정사는 그 종류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백성에게 어질게 하는 것이 중하다. 이것으로써 마음을 가지면 백성을 다스리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1425) 12월 24일 기축 2번째 기사 - 군위현감 노호가 사조하니 인견하다
"마음이 바르면 사무를 처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근래에 부정한 짓을 범하는 지방관들이 간혹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일선에서 백성과 가까이할 관리를 선택하여 친히 접견하고 보내는 것이다. 요즈음 흉년으로 인하여 백성이 식량난으로 많은 곤란을 당하고 있으며, 금년은 기후가 고르지 못하여 지극히 걱정되는 바이다. 오히려 나의 정성과 공경이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할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니, 그대들은 오늘 내가 가르치는 말을 받아들여 관직에 있는 동안 부디 조심하여 긴급하지 않은 공사에의 동원은 모두 중지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전하게 하라."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1426) 1월 17일 임자 1번째 기사 -지평해군사 허항·지철산군사 민소생·교하 현감 박도 등이 배사하니 접견하다
"내가 아무리 걱정하고 노력하며 잘 다스리려고 하여도, 근래에 기후가 순조롭지 아니하여, 금년의 농사가 또한 잘 되지 못할 듯하니 더욱 걱정이 더해진다. 그대들은 앞으로 세납과 노역을 경감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편히 살면서 직업에 재미를 가지게 하라."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1426) 3월 29일 계해 1번째 기사 - 판강서현사 김인·경기좌도 첨절제사 이붕 등이 사조하니 인견하다
"한재는 예로부터 있었지만, 그러나 지난 겨울부터 금년 봄에 이르기까지는 기후가 고르지 못하고, 눈이 올 때 눈이 오지 않으며, 비가 올 때 비가 오지 않았다. 무릇 시행함에 힘써 이를 생각했지마는, 그러나 어찌 일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없겠는가. 내가 요역(徭役)을 가벼이 하고, 부세를 경감하여 백성의 생계를 넉넉하게 하고자 하니, 호조에서는 국가의 용도가 넉넉하지 못하다고 말하지 말고 공물을 견감(蠲減)시켜 마감(磨勘)하여 아뢰라."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1426) 4월 9일 임신 4번째 기사 - 한재가 극심하여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경감할 방안을 아뢰게 하다
(전략)"내가 본디 술을 즐기지 않으며, 비록 술을 금할 때가 아니더라도 한두 잔에 지나지 않았다. 또 기체(氣體)가 편안하니 비록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무슨 병이 있겠는가. 만약 약으로 먹는다면 염탕(鹽湯)이 좋을 것이다. 나는 들어 따르지 않겠노라."
했다. 이직 등이 다시 계하기를,
"전하께서 오늘 기체가 편안하시다 하여 술을 드시지 않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풍습(風濕)의 독기가 몸에 맞아서 병이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약을 복용하실 때에 술 한 두 잔 드시는 것이 무엇이 불가(不可)하겠습니까. 신 등의 청은 전하께서 술을 흠뻑 마시시고 근심과 두려움을 잊으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은 내가 연전(年前)에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얻었던 까닭으로, 이같은 말을 하는 것이나, 내가 그 때에는 선(膳)을 반이나 줄였던 까닭으로 병을 얻은 것이요, 지금은 술만 마시지 않을 뿐인데, 어찌 병이 생길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사람에게는 술마시는 것을 금하고 나만 홀로 마신다면 되겠는가."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1426) 4월 16일 기묘 1번째 기사 - 이직 등이 임금의 건강을 걱정하여 술을 금하지 말 것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다
"내가 술을 마신다면 대궐 안에서 모두 술을 쓰게 될 것이니, 어찌 조금 비가 왔다고 해서 금주(禁酒)를 늦출 수야 있겠는가."
"나는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의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이 옳겠는가."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1426) 5월 11일 갑진 2번째 기사 - 대신들이 임금의 풍기를 걱정하여 술을 드시라고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그대는 일찍이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으로 있었으니 이미 나의 뜻을 알 것이다. 내가 재위(在位)한 이래로 하늘의 견책(譴責)이 누차 있었고, 백성들이 그 업에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다스리는 방법에 다하지 못함이 있지 아니한가 생각된다. 그대는 그대 고을에 가거든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박하게 할 것이며, 환상(還上)과 진대(賑貸)에 심력을 다하도록 하라."
세종실록 33권, 세종 8년(1426) 9월 18일 무신 2번째 기사 - 지영월군사 김복항이 사조하니 인견하다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니, 만물이 그 처소를 얻지 못하여도 오히려 대단히 상심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일 경우야 어떠하겠는가.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良民)과 천인(賤人)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 녹비(祿非)가 나타나서 일의 증거가 더욱 명백한 것이 이와 같은데, 권채가 기어코 복죄(服罪)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형벌로서 신문할 것이다."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1427) 8월 29일 갑신 3번째 기사 - 권채와 그의 아내를 형벌로서 신문하도록 하다
"임금의 직책은 백성을 사랑함이 중한 것인데 내가 즉위한 지 10년이 되었으나, 하늘과 땅이 재변(災變)을 보이시니, 내가 백성을 위하여 마음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아닌가 근심스럽다. 지금 또 겨울이 따뜻하고 눈이 적으니 내년의 농사가 염려된다. 대신들이 너희들을 수령으로 삼을 만하다고 하므로 이에 보내는 것이니, 마침 진제(賑濟)할 때를 당하여 무휼(撫恤)하는 데에 마음을 쓰라." 하매, 백충이 대답하기를,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신 등이 감히 힘을 다하지 아니하오리까."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마음과 힘을 다하겠다고 말하니 내가 심히 가상하게 여긴다." 했다.
세종실록 38권, 세종 9년(1427) 12월 20일 계유 1번째 기사 - 충주 판관 이백충·금성 현령 서지경·맹산 현감 조전이 사조하다
"내가 술을 들지 않고 금한다면 옳으나, 위에서는 시행하지 않으면서 다만 밑으로 백성들만 금한다면 범하는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이며, 옥송(獄訟)이 번거로울 것이다. 더군다나 형벌을 경하게 하고 금령(禁令)을 늦추는 것도 또한 한재(旱災)를 구(救)하는 한가지의 정책(政策)이니, 이를 정하게 할 것이다."
세종실록 39권, 세종 10년(1428) 3월 24일 병오 2번째 기사 - 황보인이 술을 금하기를 청하나 윤허하지 않다
"사람 중에는 본래부터 술을 먹지 않는 자도 있는데, 내가 비록 술을 먹지 않아도 기운이 스스로 평안하다. 어찌 꼭 마실 필요가 있겠는가."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1428) 윤4월 11일 임진 7번째 기사 - 가뭄 걱정으로 술을 들지 않자 신하들이 술 드시기를 청했으나 완곡히 거절하다
"이제 들으니, 명(明)나라에서 요구하는 매와 검은 여우 등의 물건은, 모두가 환자(宦者) 윤봉(尹鳳)의 소위(所爲)라고 우리 나라에서 뒷공론하는 자들이 간혹 말한다 하는데, 나는 이 말이 혹시나 명나라에 알려질까 두렵다. 또 들으니, 내가 사대(事大)의 예를 지나치게 한다고 말한다는데, 지금 명나라가 사신을 보내오고 상(賞)을 주고 하는 일이 해가 없을 정도로 예우(禮遇)가 융숭함이 일찍이 없었다. 다만 우리 나라는 본래 예의(禮義)의 나라로서 해마다 직공(職貢)의 예를 닦아, 때에 따라 조빙(朝聘)하면 명나라가 이를 대우하는 것이 매우 후했다. 그런데 정성을 다하여 섬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크게 불경하는 일이고, 특히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그럴 수가 있겠느냐."
"몰래 논의하는 자들은 사물의 전체를 살필 줄 모르고, 석등잔(石燈盞)이나 매를 진헌하는 것과 윤봉과 더불어 왕래하는 따위의 일만을 가지고 매양 경솔하게 논의하고 있으니, 나는 이를 매우 그르게 여긴다. 그러나 강제로 금지할 수도 없으니 적어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어와서 나에게 말하고 몰래 논의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경들은 그리 알라."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1428) 윤4월 18일 기해 6번째 기사 - 사대의 예에 대해 의견이 있을 시는 몰래 논의하지 말고 직접 와서 하기를 당부하다
"내가 들으니 금년의 농사는 조금 잘 되었다 하나, 지난해의 가뭄 때문에 실농(失農)한 백성들은 모두 먹고 살기가 어려울 것이니, 그대들은 금년에 조금 풍년들었다 하여 진휼하는 데 게으르지 말고, 유이(流移)하는 백성들을 더욱 무휼(撫恤)하라. 수령(守令)의 직임이 비록 많으나, 요지는 구휼하는 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각기 삼가서 행하라." 했다.
세종실록 41권, 세종 10년(1428) 7월 15일 을축 2번째 기사 - 안음 현감 군자용·여산 현감 박질·임실 현감 이존충 등이 사조하다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1430) 3월 5일 을사 4번째 기사 - 호조에서 공법에 의거하여 전답 1결마다 조 10두를 거둘 것을 건의하니 모든 이에게 그 가부(옳고 그름)를 물어 아뢰게 하다
"역대에 술로써 나라를 망친 일이 많았다. 나라만 그러할 뿐 아니라 사람 한 몸에도 그러하다. 내가 주계(酒戒)를 지어서 대소 신료(大小臣僚)를 경계하고자 하니, 집현전으로 하여금 역대의 사적(事跡)을 뽑아 적어서 아뢰라."
세종실록 48권, 세종 12년(1430) 5월 28일 정묘 6번째 기사 - 김종서에게 주계를 짓고자 한다고 이르다
"인군의 직책은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 백성의 굶주려 죽는 것이 이와 같은데, 차마 여러 도에서 바치는 반찬[膳]을 받을 수 있는가. 전에 흉년으로 인하여 이미 하삼도에서 바치는 반찬을 없애고, 오직 경기·강원 두 도만 없애지 않았었는데, 지금 듣자니 경기에도 굶주려 죽는 자가 또한 많다니, 내가 몹시 부끄럽다. 두 도에서 바치는 반찬도 아울러 없애는 것이 어떠한가."
세종실록 76권, 세종 19년(1437) 1월 22일 임자 3번째 기사 - 경기의 각관·전에서 올리는 반찬을 정지시키다
통신사(通信使)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고득종(高得宗)이 하직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일본 국왕(日本國王)에게 글을 보내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가 귀국과 이웃하여 대대로 구호(舊好)를 두터이 했으나, 다만 바다가 멀리 막히어 오래 교빙(交聘)을 궐(闕)했다. 이제 신하 첨지중추원사 고득종(高得宗) 등을 보내어 애오라지 먼 정[遐悰]을 표한다. 변변치 못한 토산물을 별폭(別幅)과 같이 갖추었으니, 받아 두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직 때를 좇아 자중(自重)하기 바란다."
했다.
세종실록 86권, 세종 21년(1439) 7월 11일 정사 2번째 기사 - 통신사 고득종을 불러 보고 일본왕에게 글을 전하다
"너의 자질이 아름다움을 아노니 하지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마음과 힘을 다한다면 무슨 일인들 능히 하지 못하리오."
세종실록 90권, 세종 22년(1440) 7월 21일 신유 2번째 기사 - 함길도 경력 이사철이 하직하다
(전략)"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마음을 다하지 아니할 수 없다.[60]
너는 가서 힘쓰라."
세종실록 94권, 세종 23년(1441) 12월 17일 기유 2번째 기사 - 임지로 떠나는 경상도 도사 권기를 인견하다
"우리 나라의 노비의 법은 상하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강상[綱常]
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의지할 바를 더하는 까닭에, 노비가 죄가 있어서 그 주인이 그를 죽인 경우에 논의하는 사람들은 상례[上例] 처럼 다 그 주인을 치켜올리고 그 노비를 억누르면서, 이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고 아름다운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주고 벌주는 것은 임금 된 자의 대권[大權] 이건만, 임금 된 자라도 한 사람의 죄 없는 자를 죽여서, 선한 것을 복 주고 지나친 것을 화 주는 하늘의 법칙을 오히려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 아님이 없으니,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것인데, 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임금된 자의 덕은 살리기를 좋아해야 할 뿐인데, 무고한 백성이 많이 죽는 것을 보고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금하지도 않고 그 주인을 치켜올리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후략)
세종실록 105권, 세종 26년(1444) 윤7월 24일 신축 3번째 기사 - 노비를 함부로 구타하거나 죽이지 말 것을 형조에 전지하다
"왜인·야인을 접대하는 것은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않은데, 평안한 것이 몸에 배어 해가 오래고 날이 깊어 모든 일에 게으르고 늦어질까 두려우니, 마땅히 삼가 조심하기를 항상 하루같이 하여 혹시라도 조금도 허술함이 없도록 하라."[61]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1450) 2월 14일 기축 3번째 기사
정창손: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62]
세종: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63]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후략)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64] ·효자·열녀[65] 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66]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 2월 20일
"역대 군주들 가운데 불교를 숭배해서 오래 다스린 분도 있었고, 불교를 배척해서 짧게 다스린 분도 있었다. 신진 사류가 어찌 화복과 존망의 이치를 안다고 그러느냐."
세종대왕이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면서 했던 발언으로 알려져있다. 실제로, 조선 왕조는 고려 왕조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불교 세력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대했지만 백성들 개개인의 일상생활에 녹아있던 불교 의례와 풍습 자체를 탄압하고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수양대군과 같이 불교와 관련된 서적으로 유명한 석보상절을 집필하기도 했다.[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