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파우스티나

덤프버전 :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 펼치기 · 접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리비아 드루실라 소(小) 안토니아 리비아 오레스틸라 롤리아 파울리나 밀로니아 카이소니아 메살리나 소(小) 아그리피나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포파이아 사비나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 스타틸리아 메살리나
네 황제의 해
갈레리아 푼다나
플라비우스 왕조
소 도미틸라 도미티아 롱기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폼페이아 플로티나 울피아 마르키아나 살로니아 마티디아 비비아 사비나 대(大) 파우스티나 소(小) 파우스티나 루킬라 브루티아 크리스피나
다섯 황제의 해
플라비아 티티아나 만리아 스칸틸라 디디아 클라라
세베루스 왕조
율리아 돔나 풀비아 플라우틸라
마크리누스
노니아 켈사
세베루스 왕조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 아퀼리아 세베라 안니아 파우스티나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
군인 황제 시대
카이킬리아 파울리나 파비아 오레스틸라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트란퀼리나 마르키아 오타킬리아 세베라 헤레니아 에트루킬라 코르넬리아 수페라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 코르넬리아 갈로니아 코르넬리아 살로니나 술피키아 드리안틸라 빅토리아 제노비아 울피아 세베리나 마그니아 우르비카
사두정치
아우렐리아 프리스카 에우트로피아 갈레리아 발레리아 발레리아 막시밀리아
콘스탄티누스 왕조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 미네르비나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딸 플라비아 에우세비아 파우스티나 헬레나
요비아누스
차리토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마리나 세베라 유스티나 알비아 돔니카 플라비아 막시마 콘스탄티아 레타
테오도시우스 왕조
아일리아 플라킬리아 플라비아 갈라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마리아 테르만티아 아일리아 풀케리아 갈라 플라키디아 아일리아 에우도키아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
레오 왕조
아일리아 마르키아 에우페미아 플라키디아 율리우스 네포스의 아내 아일리아 베리나 아일리아 아리아드네 아일리아 제노니스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에우페미아 테오도라 아일리아 소피아 아일리아 아나스타시아 콘스탄티나
포카스
레온티아
이라클리오스 왕조
파비아 에우도키아 마르티나 아우구스티나 아나스타시아 그레고리아 파우스타 아나스타시아 에우도키아 하자르의 테오도라
아나스타시오스 2세
이리니
이사브리아 왕조
마리아 안나 하자르의 이리니 마리아 에우도키아 이리니 암니아의 마리아 테오도테
니키포로스 왕조
테오파노 프로코피아
레온 5세
테오도시아
아모리아 왕조
테클라 에우프로시나 테오도라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 테클라 안나 아나스타시아
마케도니아 왕조
에우도키아 잉게리나 테오파노 마르티나키아 조이 자우치나 에우도키아 베아나 조이 카르보노프시나 테오도라 엘레니 레카피니 소피아 안나 가발라 엘레니 테오파노 마마스 베르타 테오파노 테오도라 엘레니 알리피아 조이 테오도라
콤니노스 왕조
불가리아의 예카테리나
두카스 왕조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 알라니아의 마리아
콤니노스 왕조
안나 달라시니 이리니 두케나 헝가리의 이리니 키예프의 도브로데이아 줄츠바흐의 베르타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프랑스의 아녜스
앙겔로스 왕조
헝가리의 머르기트 에우프로시나 두케나 카마테리나 에우도키아 앙겔리나
라스카리스 왕조
안나 앙겔리나 아르메니아의 필리파 마리 드 쿠르트네 이리니 라스카리나 호엔슈타우펜의 안나 불가리아의 엘레나 아세니나
팔레올로고스 왕조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헝가리의 언너 몬페라토의 이리니 아르메니아의 마리아 브라운슈바이크의 이리니 사보이아의 안나 이리니 아사니나 엘레니 칸타쿠지니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불가리아의 케라차 마리아 엘레니 드라가시 이리니 가틸루시오 안나 바실리예브나 몬페라토의 소피아 트라페준타의 마리아




Faustina the Younger / Annia Galeria Faustina
소(小) 파우스티나 /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

파일:소 파우스티나.jpg[1]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왕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Domus Nerva-Antonina)
전임
대 파우스티나
후임
루킬라
신상 정보
이름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
(Annia Galeria Faustina)
출생
출생년 미상 9월 21일
로마 제국 로마
사망
175년 말 또는 176년
로마 제국 카파도키아 할랄라(향년 45세, 추정)
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
어머니
대(大)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
형제자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풀비우스 안토니누스, 마르쿠스 갈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렐리아 파딜라
남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자녀
콤모두스 외 13명

1. 개요
2. 생애
3. 뜬소문과 그 진실




1. 개요[편집]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아우구스타, 공주,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황후. 로마 아우구스타 중 아우구스타 직에 더해 '마테르 카스트로룸(병영/공동체의 어머니)' 칭호를 수여받은 첫 아우구스타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로마 시에서 부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모친 대 파우스티나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딸로 출생했다. 서기 227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미레네 제20보병대가 숭배해야 할 신들의 명단이 기록된 페리알레 두라눔(Feriale Duranum)에는 신격화된 그녀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데, 탄신일이 9월 21일로 기재되었다. 출생년은 기록이 부족해서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120년대 즈음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오빠 2명은 요절했고, 언니 아우렐리아 파딜라 역시 안토니누스가 황제에 오르는 138년 이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녀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유일한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그녀를 무척 사랑했다. 특히 아내 대 파우스티나가 황후의 자리에 오른지 2년만에 사망한 뒤에는 막내딸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할 정도로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파우스티나는 본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루키우스 베루스와 약혼했다. 하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즉위 직후 아내와 상의한 뒤 베루스와 딸의 약혼을 파기했다. 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의 누나 케이오니아 파비아의 약혼을 파기하고, 마르쿠스와 파우스티나를 결혼시켰다. 안토니누스는 차기 황제로 예정된 마르쿠스와 딸을 맺어줘서 딸의 신분을 격상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베루스와 파우스티나의 약혼은 파우스티나가 10살 가까이 더 많아서 로마 상류층 남녀의 초혼 적령기상 문제가 많았던 반면, 마르쿠스와 파우스티나는 마르쿠스가 한 살 더 많았기에 적절했다. 그 대신, 케이오니아 파비아는 명문가인 프라우티우스 가의 자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결혼시키고, 플라우티우스를 159년 집정관에 오르게 해줬다. 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그의 두 양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가 명분과 실리를 모두 획득하게 한 결정이었는데, 실제로 이런 계획 변경은 안토니누스 왕가에 우호적인 귀족 가문을 늘려주는 조치가 되었다.

마르쿠스와 파우스티나 부부는 서로를 매우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30년간 해로하면서 14명을 낳았다. 파우스티나가 첫 아이를 낳았던 147년, 원로원은 파우스티나에게 아우구스타 칭호를 선사했다. 그 후 159년 딸 파딜라가 출생한 걸 기념하는 주화에는 파우스티나를 출산의 여신인 쥬노 루치나로 묘사한 그림이 새겨졌으며, 160년경에 그녀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 위에 "Fecunditas Augustae(출산력의 아우구스타)"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로 볼 때, 당대에도 그녀가 14명이나 되는 자식을 낳은 게 이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식들은 대부분 일찍 죽었고, 딸 루킬라, 파딜라,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 코르니피키아,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 아들 콤모두스만 성인으로 성장했다. 여러 아이가 요절하는 상황이 부부에게 깊은 고통을 안겨줬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가정교사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에게 보낸 서신에는 "통치자로서 자식의 병과 죽음에 대한 슬픔을 억눌러야 합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147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프론토에게 보낸 서신에는, "파우스티나의 열병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녀는 내가 함께 있는 것에 만족한듯 보였다"라며 그녀의 순종에 찬사를 보냈다. 20~30년 후에 보내진 것으로 보이는 서신에서, 마르쿠스는 아내를 "순종적이고, 애정이 넘치며, 소박하다."라고 묘사했다. 162년 파우스티나의 고모 중 한 명이 죽었다. 이때 그녀는 합법적인 후계자인 파우스티나가 아닌 다른 이에게 많은 재산을 남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법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파우스티나가 유산을 상속받아야 하지만, 그랬다간 황실이 탐욕스럽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마르쿠스, 파우스티나 부부는 유언을 그대로 집행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마르쿠스는 프론토에게 경매에 나온 유명한 진주 목걸이를 사는 걸 거부한 아내의 검소함을 칭찬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신뢰성이 떨어지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콤모두스는 소년 시절부터 학대를 받아 폭력적인 아이가 되었다고 한다. 한 번은 목욕물이 너무 차갑자 노예를 산채로 불구덩이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콤모두스의 폭력성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인 특성이라 여겼다. 마르쿠스는 외적과 맞서 싸우느라 바빴으니, 콤모두스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이는 바로 파우스티나였다. 그런데 콤모두스가 엇나갔으니, 결국 모든 책임은 그녀에게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파우스티나를 비난했는데, 심지어 그녀가 검투사와 불륜 관계를 맺어 낳은 아이가 콤모두스라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후대에서 폭군이 된 콤모두스를 악마화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이야기일 뿐이다. 콤모두스의 시대에 원로원 의원으로 활동했던 디오 카시우스는 콤모두스가 부모 생전에 별다른 결적 사유가 없는 소년이었다고 기록했다. 콤모두스는 성격적인 결함이나 무절제한 사치, 잔인성과 폭력성, 무책임함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단지 또래들과 어울리고 운동하길 즐기는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그랬던 그가 엇나가 버린 건 즉위 2년 후 큰 누나 루킬라의 암살 음모를 겪은 후 심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우스티나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건 사실과 거리가 멀다. 더욱이 파우스티나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린 나이의 콤모두스가 덩치와 달리 천성적으로 순한 것을 염려해 남편과 함께 여러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남편 마르쿠스가 황제로서 외적의 침략에 맞서느라 외지에 장기간 떠나 있는 사이, 파우스티나는 로마에서 남편을 대신해 행정을 책임졌다. 그녀는 남편과 제국을 위해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고, 제국은 그 덕분에 황제가 장기간 부재한 상황에서도 원활히 돌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이렇듯 남편을 잘 따랐고, 남편의 의사에 대체로 순종했다. 다만 딱 한 가지 사안만은 달랐다. 공동 황제였던 루키우스 베루스가 사망한 뒤, 마르쿠스는 베루스의 황후이자 자신의 딸 루킬라를 심복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와 재혼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루킬라는 아우구스타의 신분이었던 것에 깊은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기사 계급 출신에 본인 대에야 비로소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인 자를 새 남편으로 맞이하게 되자 심히 분노했다. 게다가 이 결혼으로 아우구스타라는 신분까지 잃고 평범한 귀부인으로 전락하게 생겼으니,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후 파우스티나 역시 루킬라 편을 들어 "폼페이아누스는 우리와 격이 맞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며 남편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아내와 딸의 반대를 묵살하고, 169년 결혼을 강행했다. 루킬라는 이 일로 마음속에 깊은 한을 품었고, 이는 그녀가 콤모두스 암살 음모를 꾸미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175년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이 마르코만니 전쟁을 수행하는 시기부터 대부분의 실권은 맏딸 루킬라, 차녀 파딜라 등이 행사했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파우스티나는 남편과 자신이 사망할 경우, 콤모두스를 도울 인사를 찾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가장 먼저 지목한 인사는 맏사위 폼페이아누스였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어린 콤모두스와 루킬라의 미래를 위해 폼페이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부여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콤모두스의 미래를 보장한다고 해도, 자칫 궁중 암투로 확전될 확률이 높아 폼페이아누스 당사자의 거듭된 거부 요청으로 무산됐다. 따라서 카이사르 칭호 결정은 실제 결정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후에도 파우스티나는 남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여러 인사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나, 콤모두스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여기에는 카이사르 칭호를 거절했던 폼페이아누스 외에도 둘째 사위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2], 셋째사위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3]도 있었다. 다행히 맏사위, 둘째 사위는 콤모두스가 완전히 망가진 상황에서도 동분서주하며 최선을 다했고, 유지를 받들었다. 헌데 부부가 어떤 이들보다 기대한 셋째사위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는 휼륭한 스토아 철학자임에도 겁이 많고 이기적이며 정치쪽과는 거의 담 쌓은 인사인 척 하면서 제 잇속만 챙겼다.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소 파우스티나가 동방 행차 당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전역을 돌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고 여러 인맥을 연결해준 존재였기에 이런 행동은 훗날 조롱거리가 됐다. 더욱이 그는 콤모두스가 루킬라에게 죽을 뻔 했을 당시 제대로 뒤통수를 치고 제 일이 아닌 듯 빠져버렸다. 따라서 파우스티나는 사후 이 부분에서 남편과 함께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고 욕을 먹었다.

174년경, 파우스티나는 마르쿠스와 동행하여 도나우 전선으로 갔다. 그런데 175년 5월경, 마르쿠스가 절대적으로 신임한 장수였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녀가 이 반란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주장은 당대부터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제기된다. 하나는 카시우스가 파우스티나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남편의 상태가 갈수록 안 좋아져서 아편에 의지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자, 일부러 남편이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놔서 차기 황제를 꿈꾸는 야심가가 섣불리 행동에 나서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두 번째 설은 파우스티나가 카시우스에게 "황제가 곧 서거할 것 같고, 콤모두스는 아직 어리니 그대가 제위를 이어달라"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이 설을 제기한 로마 역사가들은 훗날 카시우스가 죽자 자신과 마르쿠스가 주고받은 서신 발췌문을 제시하면서 혐의를 부인했다고 덧붙였다.

현대 학자들은 파우스티나가 카시우스에게 보냈다는 서신을 가짜로 간주하지만, 파우스티나와 카시우스의 반란 간의 연관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디오 카시우스는 파우스티나가 남편의 건강이 나빠지는 상황을 두려워하여 자신과 아이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피하고자 카시우스에게 의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토록 싫어하는 사위 폼페이아누스를 밀어내기 위해 카시우스를 끌여들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누명을 쓴 것일 뿐일 지도 모른다.

아무튼 카시우스의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원로원에 이 사건 보고를 하면서 상당히 관용적으로 문구를 쓰고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남은 자녀들을 용서했다. 또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사무실을 점거한,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이며 진압사령관 푸블리우스 마르티우스 베루스에게 카시우스가 주고 받은 모든 서한들을 불태울 것을 지시했다. 또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반란 당시부터 돌기 시작한 뜬소문이 퍼지지 않게 하면서, 파우스티나에게 명령을 받아 반란에 연루된 것이 아니냐는 원로원 의원들을 구제해줬다.

이 사건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건재함과, 아내의 무너진 권위를 회복하고자 동방 행차를 결정했다. 이때 그녀는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는데, 사후수습을 위해 몸소 나선 남편을 따라 아들 콤모두스, 둘째 사위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등과 함께 동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만 살았고, 여러 번의 출산과 황후로 있으면서 치룬 여러 업무 수행 등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까닭에 파우스티나의 건강이 더 악화됐다. 결국 175년 겨울 또는 176년 초 카파도키아 타우루스 산맥에 있는 할랄라 시의 주둔지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이전부터 건강이 무척 좋지 않았기에 병사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믿을 수 없는 사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역시 그녀가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순행 중 병사했다고 말한다. 자살이나 카시우스와의 불륜이 발각되어서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근거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마르쿠스는 할랄라 시를 파우스티노폴리스로 개명하였고, 그녀를 기리는 신전을 세웠으며, 소녀들을 위한 자선 단체인 푸엘레 파우스티니아나(puellae Faustinianae)를 설립했다. 원로원은 그녀의 사망 소식을 접한 즉시 신격화하였고, 그녀의 유해는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무덤에 안장되었다. 이후 남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소년 시절부터 자신과 늘 함께했던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추도사를 직접 적어 낭독했다.

남편 마르쿠스는 사별 후 재혼을 하거나 애인을 구해 동반자로 지명하지 않았고[4] 180년 3월 17일에 사망한 뒤, 그녀가 묻혀 있는 하드리아누스 영묘 내 소 파우스티나 납골당에 나란히 합장되었다.


3. 뜬소문과 그 진실[편집]


로마 제국의 역대 아우구스타 중 리비아 드루실라와 함께, 본인이 하지 않은 일이 살아생전과 사후 뜬소문으로 확정돼 악녀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에 대한 뜬소문은 거의 대부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 아들 콤모두스의 기행 이후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 동시대 사람으로 콤모두스 시대때 원로원 의원이 된 디오 카시우스는 콤모두스와 루킬라의 어머니인 그녀가 남편을 전복시키기 위해 지방 총독(아비디우스 카시우스)과 공모한 대가를 피하기 위해 통풍으로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거짓으로 밝혀진 지 오래돼 설득력이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물론, 대중매체에서는 각색소개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소 파우스티나 생전의 뜬소문을 넘어, 본인의 상상과 자신이 살던 콘스탄티누스 왕조 이후의 로마 제국에서 돌던 소문에 따라 그녀를 악녀의 대명사이자 음탕함의 상징 같이 묘사했다. 오늘날 파우스티나의 악행으로 잘 알려진 "소 파우스티나가 수많은 정부를 두고, 관계를 맺었다", "검투사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음탕해, 검투사와 캄파니아 해안에서 나체로 뒹굴다가 콤모두스를 낳았다", "매일 같이 남색을 탐해 원로원 의원, 장군, 무언극 배우들을 유혹했다", "시동생이자 맏사위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꼬셔 불륜을 저질렀다가, 들킬 위기에 처하자 시동생 루키우스를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소문들은 죄다 거짓으로 콤모두스가 폭군으로 단죄되고 100년이나 넘게 시간이 흐른 뒤 떠돈 것들이라고 한다.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파우스티나가 남편 마르쿠스 몰래 검투사와 통정해 콤모두스를 낳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마르쿠스 황제는 아내의 넘치는 정욕을 없애고자 점술가들과 상의 후, 아내와 동침 중인 검투사들을 모두 죽이고 파우스티나에게 그들의 피로 목욕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 아내와 식사를 한 원로원 의원들에게 고위직을 하사한 것은 마르쿠스가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언급된 이런 악의적 뜬소문들은 다행히 여러 증거로 거짓말로 취급받고 있다. 당장, 악의적 소문을 마구 적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역시 그 주장이 중구난방이라서 쉽게 검증이 될 정도다.

그렇지만 소 파우스티나는 당대부터 로마 원로원 인사 중 일부에게 미움받을 행동을 해서, 그녀를 미워하고 어떻게라도 흠잡으려고 하는 인사들이 여럿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이유 중 한 가지는 저명한 대웅변가인 대정치가 헤로데스 아티쿠스와의 갈등이다. 파우스티나와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전생부터 원수라고 믿어도 좋을 만큼 원수 관계였다. 아테네 출신의 이 그리스인 대정치가는 전형적인 소피스트로 엄청난 팬을 거느리고 있었고 에너지 넘치는 웅변솜씨로 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는데,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티쿠스는 뛰어난 웅변가이자 학자임에도 인간 말종이었다고 평가받았다. 아티쿠스는 자신의 노예, 해방노예들을 짐승처럼 취급하고 욕설을 퍼붓거나 폭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정신지체 장애를 앓고 있는 친아들이 잘못하면 혼내는 것을 넘어 잔혹하게 처벌하고, 대중들 앞에서 친아들의 장애를 조롱했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미래의 두 황제를 제외하곤 늘 혹독했고, 그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면도칼을 목에 대고 죽이겠다고 위협까지 했다. 따라서 그를 좋아하는 대중들이 많고, 그와 파벌을 이룬 그리스, 아나톨리아, 푸닉 출신의 인사들이 많음에도 이 사내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를 혐오할 만큼 미워했다. 그리고 후자를 대표하는 사람 중 한명이 바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내 소 파우스티나였다. 그녀는 10살 무렵, 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있었을 때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악행과 폭력성을 직접 목격해 충격을 받았었는데, 어느날 미래의 남편이 될 사촌오빠 마르쿠스가 큰 잘못을 하지 않음에도 엄하게 혼나고 뺨을 맞고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 아티쿠스를 증오하게 됐다고 한다.

서기 160년경, 아티쿠스가 임신 중인 아내 안니아 레길리아를 죽였다. 가정폭력으로 벌어진 일이었는데, 여러 증거가 드러나 체포 후 존속살해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임신 8개월이던 아내가 자신에게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하인에게 명을 내려 아내를 마구 패게 해 죽였는데, 이를 본 노예들이 그 사실을 폭로했다. 헌데 아티쿠스는 자신의 훌륭한 명성, 막대한 재물을 총동원하고 로마 각계에 깔린 친구들을 이용해 무죄를 주장하고, 억울하다고 호소해 본인과 명을 받은 하인 모두 교묘하게 무죄로 방면됐다. 반면 아티쿠스는 여러 친구들의 도움과 증거조작으로 풀려나고, 법정에서 사실을 증언한 노예들은 모두 추방형에 처해진다.

이 사건이 벌어진 뒤, 14년이 지난 174년 아티쿠스는 제국 동부에서 세 사람과 공모해 아테네에서 음모를 꾸몄다고 다시 기소된다. 이때 그는 또 다시 무죄로 풀려날 것이라면서 거만하게 행동하면서, 자신이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지도한 사람이 마르쿠스 황제라면서 아테네가 아닌 시르미움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주장하고 기어이 황제가 담당하는 재판을 받게 됐다. 하지만 이 계획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내 소 파우스티나 때문에 완전히 어그러졌다. 재판 당시 소 파우스티나 황후는 아들 콤모두스와 함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반란으로 인해 시르미움에 있었다. 그녀는 막내딸 비비아 사비나와 함께 법정에서 이 사내의 변론을 들었는데, 10살 무렵부터 아티쿠스의 난폭함과 잔혹함을 알고 있던 터라 그가 거짓말을 한다며 유죄로 엄하게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참다 못한 아티쿠스는 "이 노인은 두럽지 않다"며 화를 내면서 스스로 재판 변론을 포기하고 나가 버렸다. 이후 그는 옛 제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그 여자와 조그마한 여자아이 때문에 신세가 망쳤다"며 황제에게 배은망덕하다고 호통까지 쳤다. 그래서 당황한 황제는 이 사건으로 인해 도리어 유죄도 내리지 못하고, 아내의 뜻에 따라 옛 스승에게 1년 추방형을 내리고, 아티쿠스와 공모했다는 노예 3명은 처형했다. 그래서 화가 난 아티쿠스는 제 발로 1년 추방형을 선택해 아테네에 1년간 돌아가지 않았다. 물론, 이 사건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승을 달래기 위해 그가 스스로 택한 추방형을 높게 평가하더니 손수 편지까지 보내 잘못을 청하고 황궁으로 오면 융숭히 대접해드리겠다고 싹싹 빌었다.

이 사건 이후, 소 파우스티나는 아티쿠스 친구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고 만다. 로마 각계의 그리스어, 웅변술 교육은 아티쿠스와 그 제자들이 꽉 잡고 있었으니 그들이 마음 먹고 씹어댄 소 파우스티나의 이미지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이자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재림으로 박히게 됐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당사자가 이를 알기도 전에 할랄라에서 지병으로 죽었고, 애처가인 마르쿠스 황제 역시 그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기도 전에 게르만족들과 싸우다가 별세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상황은 소 파우스티나가 아테네로 복귀한 아티쿠스와 그를 따른 그리스, 아나톨리아, 푸닉 출신 제자들에게 기록과 소문으로 악녀의 대명사로 찍힌 시작이 됐다고 한다. 그들은 소 파우스티나에 대한 온갖 악소문을 만들어 씹어댔고, 뒤에 콤모두스가 폭군으로 확정되자 이를 2차, 3차 가공해 소 파우스티나를 부도덕하고, 음란하고, 비열한 황후로 묘사해 이를 계속 홍보했다. 다행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높게 평가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래에서는 악의적 소문이 걸릴 경우 크게 처벌받은 터라 이 소문은 음지에 잠들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디오 카시우스 등 당대 의원들은 아티쿠스와 그 제자들과 친구이거나 제자인 까닭에 소 파우스티나를 자기들끼리 씹어대고 또 씹었다.

이는 카라칼라 시대가 되면서 바뀌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카라칼라 시대가 도래하면서 소 파우스티나는 사후에 메살리나 수준의 악녀로 이미지가 더 나빠지게 된다. 카라칼라는 아티쿠스의 직계 제자의 직계 제자에게 어릴적부터 배워, 소 파우스티나를 무척 미워했다. 애초에 카라칼라라는 인물이 난폭하고 잔혹한데다 아티쿠스 이상으로 노예, 해방노예, 경비병들을 짐승 다루듯 취급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카라칼라는 소 파우스티나를 없어져야 할 존재로 여겨 계속 욕보였고, 그 행동은 로마인들의 기준으로도 지나쳤다.

그래서 후일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제 손으로 죽이고 단독황제가 되자, 진실을 확인하지 않고 소 파우스티나가 불쌍한 아티쿠스를 탄압했다고 욕하고 그녀를 기린 카파도키아 신전을 더럽히고 조롱했다. 당연한 말인데, 소 파우스티나는 살아생전 소년, 소녀들을 위해 많이 노력해, 이를 보고 환호한 사람은 적었고 많은 이들은 카라칼라의 무식함과 잔혹함에 경악했다. 더욱이 그가 소 파우스티나의 혈육 중 살아있던 코르니키피아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로마에 머물고 있던 파우스티나의 외손자 중 한명인 루키우스 폼페이아누스까지 게타 지지자이자 부도덕한 파우스티나의 혈육이라며 죽여 그 머리를 효수한 일은 카라칼라가 살아생전부터 폭군 중 폭군으로 공인된 이유가 됐다. 이중 카라칼라가 코르니키피아를 죽인 이유는 게타가 죽은 것을 보고 슬퍼했다는 이유 외에도 아티쿠스에게 고통을 준 딸아이가 그녀일 수 있다는 죄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카라칼라가 폭군으로 불리다가 암살됐고, 그 바람에도 소 파우스티나에 대한 로마인들의 생각은 크게 나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소 파우스티나는 더 심한 굴욕은 피할 수 있었는데, 이후에도 율리아 마마이아 같은 시리아 여제들이 여러 이유로 그녀를 걸고 넘어져 이미지는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물론, 아티쿠스와 그 제자들이 만들어낸 거짓 소문들은 사실로 알려져 20세기 중반까지도 그녀는 계속 욕먹고, 이 뜬소문을 주제로 하는 영화, 사극까지 나와 이미지는 아직도 좋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직도 대중적 이미지가 나쁜 것은 1세기의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렇지만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지고 난 이후, 그리스와 푸닉 출신들의 득세가 예전만 못해진 이래 서서히 그 소문 역시 확대 재생산되지는 않았다.[5] 그래서 후대 로마 황제 중 일부는 그녀를 메살리나,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마마이아 수준의 황후 내지 리빌라 같은 악랄한 공주 수준이라고 폄하하지 않았다. 그녀가 죽고 100년이 넘게 흐르고, 그녀의 가문인 안토니누스 가문이 완전히 끝난 뒤인 서기 4세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덕후로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황제 율리아누스는 그나마 그녀를 안 좋게 평가하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어떻게 보면, 로마 제국 역사에서 첫 재평가였다. 이때 율리아누스는 , 이런 사정의 원인을 제공한 파우스티나를 "고결하지만 마냥 모범적이지는 않았다"고 평가하면서, 그녀를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간접적으로나마 아우구스투스의 황후인 리비아 드루실라 같은 이미지라고 평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3 19:34:54에 나무위키 소 파우스티나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결혼했던 15세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흉상이다.[2] 아내 파딜라와 마찬가지로 성격이 올곧고 절제력, 책임감이 대단했다. 케이오니아 파비아가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여러 자녀 중 맏이로 부모 모두 이탈리아 귀족인 세습 원로원 의원이다. 어머니가 케이오니아 파비아인 까닭에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가 되며, 법률상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외증손자가 된다.[3] 그리스 아카이아 지방의 그리스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조부때부터 스토아 철학가로 유명했던, 그리스 혈통의 로마 귀족 가문 자제다. 성씨에서 드러나듯 클라우디우스 가문에게서 성씨를 하사받은 그리스 유력가의 후손이다.[4] 크리스 스카레와 같은 학자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첩실을 들였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정황상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별 후 여자애인이나 첩실도 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다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후반인 175년 이후부터 로마 황실과 내정의 실권은 장녀 루킬라가 쥐게 됐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며, 아내가 아낀 침실시종의 딸을 사실상 정부로 삼아 죽은 아내를 기리게 했다고 한다.[5] 물론,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같은 이들은 여전히 소 파우스티나를 부도덕하고 음란한 황후로 묘사하면서 이를 대차게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