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군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나우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소군(나우) 문서
소군(나우)번 문단을
소군(나우)#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小君

1. 개요
2. 고려 왕조의 왕실 용어



1. 개요[편집]


역사적 용어로 소군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제후아내', 다른 하나는 '고려 시대에, 왕후 이외의 몸에서 태어나 승려가 된 왕자를 이르던 말'이다. 전자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고 후자는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니 지칭하는 대상이 완전히 다르다.

2. 고려 왕조의 왕실 용어[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소군' 설명

고려왕조에서는 왕족의 사생아를 승려로 출가(出家)시켰는데, 머무는 사찰의 이름을 따와서 '소군(小君)'으로 호칭했다. 정식 후궁이 아닌 궁녀천민 출신인 폐첩(嬖妾), 정부의 자녀를 낳으면, 조선에서는 비록 차별은 있을지언정 후궁으로 승격시켰고 그 소생 자녀들도 공식적으로 왕족의 예우를 했지만, 고려에서는 후궁으로 승격시키지 않았고 자녀들 또한 사생아로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보통 공식적으로 왕족 신분은 아니었고, 왕의 친아들이라 할지라도 다른 왕자들이 출가하면 받는 '국사(國師)', '왕사(王師)' 칭호도 주어지지 않았다.

본래 소군은 명목상으로는 왕의 서자이지만, 신분제도상으로 종모법(從母法)에 따르면 천인이었다. 따라서 출가시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삼중대사라는 승직을 수여해 천인 신분을 면하면서 승려귀족의 일원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승려가 되었어도 그들의 출생과정 자체가 세속성을 내포한 것이었고, 무신정권기에 신분제의 동요가 심했음으로, 특히 이 시기에 그들의 직·간접적인 정치활동과 비행 등 폐단은 많았다.

소군의 사례 중 유명한 인물로 신혈소군[1]이 있지만, 이 경우는 그가 안종헌정왕후 간에 근친상간간통으로 임신해 태어나 정식 혼인 관계에 따른 출생을 하지 않았기에 사생아로 취급되었을 뿐, 부모가 모두 왕족이므로 신분의 기반은 사실 매우 탄탄했고, 게다가 광종 계열의 왕가가 단절되어가는 상황까지 겹쳐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현종이 불륜으로 인한 사생아였다는 점이나, 출가해 소군이라고 불렸던 점에서 고려사에 가장 먼저 나오는 소군의 예라고 하겠다. 이때에 현종에게 붙여진 소군도 넓은 의미에서는 지금까지 설명한 소군과 통하지만 어머니가 궁인이나 폐첩이 아니라 오히려 태조의 손녀이며, 경종의 계후였던 헌정왕후였다는 점에서 다른 소군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현종의 혈통 자체에는 토를 달기 어려웠고, 이후 정치적 변동에 의해 왕위에 즉위할 수 있었다.

고려 전기에는 적실 왕자를 칭할 때 소군과 어휘상으로 대조 되는 용어로 대군을 사용했다. 모든 적실 왕자를 대군이라고 부른 것은 아니지만, 적실 왕자를 대군이라고 칭했던 것에 반해 왕서자를 소군이라고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3 23:15:33에 나무위키 소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신혈사에 있는 소군이란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