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노 사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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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배경
2.3. 말년
3. 자녀



1. 개요[편집]


園祥子, 1867년 12월 23일 ~ 1947년 7월 7일 (향년 79세)

일본 메이지 덴노의 측실(후궁).


2. 생애[편집]



2.1. 배경[편집]


소노 모토사치(園基祥) 백작의 딸로, 후지와라(藤原) 북가(北家) 나카미카도류(中御門流)[1] 소노(園) 가문 출신이다. 소노 가는 전근대 공가(公家)에서 전상(殿上) 중 우림가(羽林家)에 속하는 가문으로 가업은 비파, 화도, 에도 시대 봉록은 186석, 문장은 지묘인(持明院)가와 동일하고, 구가(舊家)로 분류된다.

우림가는 섭가(摂家), 청화가(清華家), 대신가(大臣家) 다음 서열이자 명가(名家)와 동렬이고 반가(半家)보다 높은 가격(家格)이며, 에도 시대 무가관위에서 다이묘 가문에 주어지는 가격에 상당한다. 근위소장(近衛少將) 및 중장(中將)을 겸해 참의(參議)에서 중납언(中納言), 최고 대납언(大納言)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우림"이란 "날개(우)와 같이 빠르고 숲(림)과 같이 많다"는 뜻으로, 중국에서 북두성을 수호하는 별의 이름이다. 그것이 변하여 황제를 지키는 궁중 숙위장 이름이 되었는데, 일본에서는 근위부(近衛府)의 당명을 우림이라 하여 근위장을 겸하는 가문들을 "우림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림가는 유신 이후 자작~백작이 되었고 이중 소노 가문은 백작위에 봉해진다.

메이지 덴노의 자녀를 낳은 다른 후궁으로는 하무로 미츠코(葉室光子), 하시모토 나츠코(橋本夏子), 야나기하라 나루코(柳原愛子), 치구사 코코(千種任子)의 존재가 확인된다. 하시모토(橋本)[2]와 치구사(千種)[3]는 우림가였고 야나기하라(柳原)[4]와 하무로(葉室)[5]는 명가(名家)에 속하므로 소노 사치코와 비슷한 신분이다. 반면 다른 후궁들이 권전시(權典侍)였던 반면에 소노 사치코는 권장시(權掌侍)에 속했다.[6]


2.2. 메이지 덴노의 후궁[편집]


메이지 덴노의 정실인 쇼켄 황후(이치죠 하루코)는 허약하여 아이를 낳지 못했다. 대신 메이지 덴노는 많은 측실들을 거느렸고, 그녀들로부터 5남 10녀를 낳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1~2살 안팎으로 주로 뇌막염으로 일찍 죽었고,[7] 살아남은 아이들은 1남 4녀뿐으로 야나기하라 나루코(柳原愛子) 소생의 하루노미야 요시히토 친왕(후의 다이쇼 덴노)[8]과 소노 사치코 소생의 내친왕(공주)[9]들뿐이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인 요시히토 친왕이 황태자가 되었고, 훗날 덴노로 즉위했다.

사치코는 메이지 덴노의 총애를 받아 2남 6녀라는 많은 자녀를 낳았으나, 4명의 딸만이 살아남았다. 사치코의 딸들은 모두 방계 황족 가문에 시집가 황족 부인이 되었지만, 그 중에서 2명은 어머니 사치코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2명은 패전 이후 신적강하로 황족의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


2.3. 말년[편집]


1915년 데이메이 황후(사다코)가 막내 다카히토 친왕을 낳을 때 출산을 도왔다고 한다.

1947년 7월 7일, 향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메이지 덴노 치세기의 극초반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패전, 그리고 일본 제국이 일본국으로 바뀌는 것까지 목격했기 때문에 긴 세월을 살며 많은 걸 지켜본 일본 근대사의 산 증인이다.


3. 자녀[편집]


  • 1녀[10] : 히사노미야 시즈코(久宮 靜子) 내친왕(1886년 2월 10일~1887년 4월 4일) - 뇌막염으로 요절.
  • 1남[11] : 아키노미야 미치히토(昭宮 猷仁) 친왕(1887년 8월 22일~1888년 11월 12일) - 뇌막염으로 요절.
  • 2녀[12] : 츠네노미야 마사코(常宮 昌子) 내친왕(1888년 9월 30일~1940년 3월 8일) - 다케다노미야 츠네히사(竹田宮 恒久)[13] 왕에게 시집가 1남[14] 1녀를 낳았다.
  • 3녀[15] :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 房子) 내친왕(1890년 1월 28일~1974년 8월 11일) -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北白川宮 成久) 왕에게 시집가 1남 3녀를 낳았다. 1947년의 신적강하 때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으로 전락했다. 후사코의 차녀인 사와코(佐和子) 여왕은 이우 왕자의 신붓감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에 밀려 탈락했고, 후사코의 손녀인 기타시라카와 하츠코는 태어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 후보로 물망에 올랐으나, 평민 출신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탈락[16]한 후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 4녀[17] : 후미노미야 노부코(富美宮 允子) 내친왕(1891년 8월 7일~1933년 11월 3일) -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왕에게 시집가 2남 2녀를 낳았다.
  • 2남[18] : 미츠노미야 테루히토(滿宮 輝仁) 친왕(1893년 11월 30일~1894년 8월 17일) - 뇌막염으로 요절.
  • 5녀[19] :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 聰子) 내친왕(1896년 5월 11일~1978년 3월 5일) -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에게 시집가 4남을 낳았다. 장남인 모리히로(盛厚) 왕은 쇼와 덴노장녀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과 결혼했다. 1947년 신적강하 때 평민으로 전락.
  • 6녀[20] : 사다노미야 타키코(貞宮 多喜子) 내친왕(1897년 9월 24일~1899년 1월 11일) - 뇌막염으로 요절.
[1]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차남 후지와라노 요리무네(藤原頼宗)를 시조로 한다. 어머니는 제2부인 미나모토노 메이시(源明子)다.[2] 후지와라(藤原) 북가(北家) 칸인류(閑院流).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숙부인 후지와라노 킨스에(藤原公季)를 시조로 한다.[3]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구가(久我)의 분가[4] 후지와라(藤原) 북가(北家) 히노류(日野流)[5] 후지와라(藤原) 북가(北家) 카쥬지류(勧修寺流)[6] 장시는 전시보다 격이 낮았다.[7] 그중 장남과 장녀는 사산되었고 이들을 낳은 후궁들도 산후병으로 곧 사망한다.[8] 다이쇼 덴노는 꽤 오랫동안 쇼켄 황후를 자신의 친어머니로 알고 있었고, 나중에야 자신의 생모가 따로 있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9] 일본 황실에서 덴노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한다. 다만 1947년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4대손까지를 내친왕, 5대손부터를 여왕이라 했다. 남자의 경우 친왕/왕.[10] 메이지 덴노에게는 5녀[11] 메이지 덴노에게는 4남[12] 메이지 덴노에게는 6녀[13] 츠네히사 왕의 여동생 호시나 다케코(保科 武子)는 기타시라카와 하츠코의 고모할머니이며, 쇼다 미치코가 하츠코를 제치고 황태자비가 된 후로는 나가코 황후시녀장(侍女長)을 지내며 미치코 황태자비 시집살이 시키기에 한 몫을 했다.[14] 아들인 다케다 츠네요시는 731 부대에서 생체 실험을 했던 전범이다. 그리고 츠네요시의 손자는 극우, 혐한 논객으로 유명한 다케다 츠네야스이다.[15] 메이지 덴노에게는 7녀[16] 이 무렵 후사코는 이세 신궁신관이었다.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가 결혼식을 올리기 전 이세 신궁에 참배하러 왔을 때, 후사코는 미치코를 홀대했다고 한다. 자신의 손녀를 제치고 황태자비로 정해진 미치코가 미웠던 것이다.[17] 메이지 덴노에게는 8녀[18] 메이지 덴노에게는 5남[19] 메이지 덴노에게는 9녀[20] 메이지 덴노에게는 10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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