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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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 초대 황제
태조 고황제 | 太祖 高皇帝


파일:齊高祖像.jpg

출생
427년 2월 1일
유송 남난릉 일대
(現 장쑤성 창저우시)
즉위
479년 5월 29일
유송 단양군 건강현 남교
(現 장쑤성 난징시)
사망
482년 4월 11일 (향년 55세)
남제 단양군 건강현 황궁 임광전
(現 장쑤성 난징시)
능묘
태안릉(泰安陵)
재위기간
유송의 제국공(齊國公)
479년 4월 9일 ~ 479년 5월
유송의 제왕(齊王)
479년 5월 ~ 479년 5월 29일
초대 황제
479년 5월 29일 ~ 482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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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난릉 소씨

도성(道成)
부모
부황 선황제
모후 선효황후
형제자매
3남 중 3남
배우자
고소황후
자녀
19남 3녀
신장
173cm
아명
두장(斗將)

소백(紹伯)
작호
제국공(齊國公) → 제왕(齊王)
묘호
태조(太祖)
시호
고황제(高皇帝)
연호
건원(建元, 479년 ~ 482년)



파일:external/img5.ph.126.net/1010776641385156135.jpg

'''{{{#ece5b6
역대고인상찬에 실린 초상화 }}}'''

1. 개요
2. 출신
3. 생애
3.1. 잇따른 전공
3.2. 위기를 기회로
3.3. 황제가 되다
4. 둘러보기(계보)



1. 개요[편집]


남조 남제의 초대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였다. 재위기간 동안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고제 소도성은 소승지와 진도정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으로 유송 원가 4년(427년)에 태어났다. 자는 소백(紹伯)이었으며 아명은 투장이었다.


2. 출신[편집]


회음부군(淮陰府君) 소정
자: 즉구부군(即丘府君) 소준
손: 태상부군(太常府君) 소악자
증손: 선제(宣帝) 소승지
현손: 고제(高帝) 소도성 - 남조 남제의 초대 황제




자: 제음부군(濟陰府君) 소할
손: 중종사사부군(中從事史府君) 소부자
증손: 특진부군(特進府君) 소도사
현손: 태조 문제(文帝) 소순지
내손: 무제(武帝) 소연 - 남조 소량의 초대 황제




고제 소도성의 조상은 동해 난릉현[1] 사람이었다. 서진 말기 영가의 대란 당시에 강남으로 피난한 사람들을 출신지역별로 묶어 재정착시킬 때 혼동 방지를 위해 화북의 원래 지역명 앞에 '남'(南)자를 붙였는데[2] 그의 고조부 소정도 그 피난민 중 한 명이라서 남난릉[3]에 정착했다. 전한의 명재상 소하의 24대손이라고 자칭했으나, 사실 본인이 유언을 남길 때 자기를 '포의소족', 즉 평민 출신이었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일단 《남제서》에서는 소하의 24대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적국 북위의 역사서였던 《위서》(북위서)에서는 오랑캐 도성이라고 폄하되어 있다.

유송의 건국자 유유도 섬오랑캐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원문에는 '도이'(島夷)라고 기록되어 있다. 말그대로 섬오랑캐라는 뜻이며 북위에서는 남조 황제들을 모두 섬오랑캐라고 깠다. 도이(島夷)란 당대에는 장강 및 그 이남 지역 주민을 비하하던 말로, 당•송 이후에는 동남아시아와 남양 제도의 주민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되었다. 반면 남조 사람들은 북조 사람들을 '삭로'(索虜), 또는 '삭두로'(索頭虜)라고 폄칭했는데 머리털을 끈으로 땋은 것을 가리킨 것이다.

섬오랑캐라는 건 물론 거짓이며, 정통을 북위로 본 《위서》의 저자 위수가 유유와 소도성을 까기 위해서 적은 춘추필법이다. 《위서》에서는 남제뿐만 아니라 유송의 황제를 섬오랑캐라고 까면서 함부로 기록했다. 그래서 《위서》는 더럽고 공정하지 않은 역사서라고 까인다. 남제의 역사서 《남제서》에서도 북위를 '魏虜'(위로), 즉 '북쪽(위나라) 오랑캐'라고 불렀다.

전통적으로는 북조의 역사서들이 왜곡이 많아서 욕을 많이 먹고 있어서 주로 남조측의 역사서를 신뢰하는 경향이 있기에 《북위서》에서 소도성을 욕한다고 소도성이 소하의 일족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24대손-24대조 관계면 천민 집안이 황실이 될 수도 있고, 황실이 천민 집안으로 영락하거나 아예 멸족당할 수도 있는 긴 시간대라서, 실제로 소하의 후손이 맞으면서도, 본인 당대 및 가까운 조상 대에는 그냥 평민이라는 것이 서로 양립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다만 유송의 건국자 송무제 유유가 조상인 초원왕 유교의 도읍이었던 서주 팽성에서 조상 대대로 유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다가 남쪽으로 이주한 케이스인 반면, 남제 고제 소도성의 경우 조상이라고 칭하는 소하가 이미 한나라 시기부터 자손이 거의 끊기다시피 해서 한나라에서도 간신히 소하의 후손을 찾아 후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라 '남북조 시대에 소하의 후손이 그때까지 남아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 최대 약점이다.

3. 생애[편집]



3.1. 잇따른 전공[편집]


소도성은 이처럼 무장 가문이었지만 13살 때 유학자 뇌차종(雷次宗) 문하에서 유학을 배워 《예기》와 《춘추좌씨전》을 익혔다. 원가 17년(440년), 송나라 사도 팽성왕 유의강이 강주자사로 강등당하여 예장을 지킬 때 부친 소승지가 군사를 이끌고 휘하에 배속되면서 공부를 그만두고 부친을 따라다녔다.

원가 23년(446년), 옹주자사 소사화 밑에서 좌군중병 참군의 일을 담당했고, 송 명제 유욱(宋明帝 劉彧)이 즉위하자 우군장군이 되었다.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칙명을 받고 하루에 적의 보루 12개를 함락시키고 ,태시 3년(467년) 8월에 남서주에 가서 정사를 처리했다. 여기서 소도성은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회음에 주둔하면서 뛰어난 인재를 양성했는데 빈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다음 해 7월에는 남연주자사가 되어 광릉을 수비했다.

소도성은 키가 7척 5촌으로 약 173cm였다. 촉나라 유비신라 실성 마립간도 7척 5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유송을 건국한 유유의 키는 7척 6촌이며 진패선은 7척 5촌이다. 유일하게 을 건국한 소연은 신장이 기록되지 않았다. 사실 7척 5촌이라는 키가 제왕의 덕을 강조하는 요소 중 하나로 쓰인 신체적 특징이다.

또한 영특하며 남다른 생김새가 민간에서는 천자로서 손색이 없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송 명제 유욱은 그를 의심하여 태시 6년(470년)에 황문시랑, 월기교위로 임명하여 조정으로 소환했는데, 그를 수도에서 감시하면서 제어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소도성은 망설이다가 관군참군 순백옥이 기병 10기를 북위의 국경으로 파견하여 긴장 국면을 조성하게 하자고 건의해서 실행했더니 과연 북위에서는 수백 명의 기병을 보내 대비했다. 소도성은 이를 보고하여 제자리를 보존했지만,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회음에서 소도성이 반란을 꾀한다는 참언을 올렸다. 이에 송 명제 유욱은 (銀)단지에 을 담아 회릉태수 오희에게 주어 내리도록 했다. 소도성은 두려워서 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희가 내막을 알려주어 그 술을 마심으로써 의심이 풀리게 되었다.

태시 7년(471년) 7월, 송 명제 유욱은 또 소도성을 조정으로 소환했는데 좌우에서는 황족들과 대신들이 살육되고 있는 점을 들어 말렸으나, 소도성은 망설이다가는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니 빨리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건강에 이르니 송 명제 유욱은 소도성을 산기상시, 좌자좌위솔에 임명했다.

태예 원년(472년) 4월, 우위장군, 위위가 되었고 상서령 원찬과 함께 기밀을 담당했다. 위위에서 시중으로 옮긴 후에는 석두수군사를 통솔했다. 후폐제 유욱(後廢帝 劉昱)이 즉위하고, 계양왕 유휴범(桂陽王 劉休範)이 심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대비를 못해 쩔쩔매던 조정 대신 용감하게 중임을 맡았다. 소도성은 둔기교위 황회와 월기교위 장경아를 시켜 거짓 투항을 시키게 하고, 내부에서도 확고한 대비를 했다. 장경아는 유휴범과 술을 마시다가 그가 술에 취해 무방비 상태가 되자 그의 칼을 꺼내 찔러 죽이고 난을 평정했다.

원휘 2년(474년) 6월에는 중령군 및 남연주자사가 되어 건강을 수비하고 원찬, 호군 저연, 복야 유병과 함께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여 사귀(四貴, 네 명의 귀인)라고 불렸다.


3.2. 위기를 기회로[편집]


원휘 4년(476년) 6월, 후폐제 유욱의 사촌 형제였던 남서주자사 건평왕 유경소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7월 초에 소도성이 난을 평정했다. 유경소의 난은 유송 충성파 모두가 참여하였다. 유욱의 폭정을 본다면 "이걸 진압하는 소도성도 미친 놈이다."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허나 후폐제의 성정을 보면 소도성 입장에서는 유경소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거나 방관을 했을 시 의심을 사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소도성이 이처럼 반란을 계속 평정하자, 더 교만해지고 방종해져서 사람을 함부로 살육하던 후폐제 유욱은 소도성의 명성을 꺼려 그를 죽일 생각을 했다. 후폐제 유욱은 나무로 소도성의 형상을 조각하게 하고 직접 활로 쏘았으며 좌우에게도 쏘게 하여 명중하는 자에게는 상을 내렸다. 이 사이에 소도성은 친위군의 실권을 손에 넣었다.

원희 5년(477년) 6월 한여름에 소도성이 친위군 병영에서 대낮에 웃통을 벗고 누워자고 있는데 후폐제 유욱이 들어와서 활로 그의 배를 쏘려고 했다. 소도성은 깨어나 겁을 먹고 목숨을 빌었는데 소도성의 몸이 비대하여 배가 올챙이처럼 튀어나왔으므로 과녁을 그린 다음 배꼽을 쏘려고 했다. 그러나 좌우에서 지금 쏘면 소도성이 죽어 다시 쏠 수가 없다고 말려 로 만든 화살로 대신 맞혔다.

이에 소도성은 두려움에 빠져 월기 교위 왕경칙에게 황제의 측근인 양옥부, 양만년 등 15명과 약조를 맺고, 기회를 엿보며 암살을 명했다. 때마침 적절하게 7월 7일 칠석날, 절에서 훔친 를 술과 같이 먹고, 한밤중에 궁궐로 돌아온 후폐제 유욱이 양옥부에게 네가 해가 뜰 때까지 은하수를 건너는 견우직녀를 찾으면 보고하고 못찾으면 넌 죽을 것이야라고 으름장을 놓은 후에 잠들었다. 그런데 사실 후폐제 유욱의 으름장은 양옥부 등이 배반할 것을 짐작해서 으름장을 놓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어쨌든 그가 잠들자 양옥부는 후폐제 유욱이 심혈을 다해 제작한 살인 도구를 꺼내 목을 잘라 죽인다.

후폐제 유욱은 총명해서 모자 재단하는 것을 한 번만 보면 직접 만들 수 있었고 처음 연주하는 악기도 스스로 연습하면 능히 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능력을 살인 도구 제작에 썼고 그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도구에 일일이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을 죽일 때 쓰던 도구가 자신을 죽이는 데 사용될줄은 몰랐다.

양옥부는 자른 유욱의 목을 왕경칙에게 바쳤다. 왕경칙은 후폐제 유욱의 머리를 들고 소도성의 집에 찾아가서 후폐제 유욱을 죽였다고 알렸지만 소도성은 믿지 못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왕경칙은 소도성을 설득하지 못하고, 연못에 머리를 버리고 돌아갔고, 소도성은 슬그머니 나와 연못에서 머리를 꺼내 를 물로 씻었더니 과연 후폐제 유욱의 머리였다.

소도성은 기회를 잡기 위해 즉시 친위군을 소집하여 궁궐로 들어가 점령하고 차후의 일을 의논했다. 왕경칙은 "천하는 이미 소씨의 천하다. 거역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야."라면서 으름장을 놓고는 얼른 제위에 오르라고 했다. 하지만 소도성은 뇌차종에게 유학을 배웠기에 선양의 아름다운 방식을 잘 알고 있던 소도성은 일단 후폐제 유욱의 동생 안성왕 유준을 황제에 세우니 그가 순제였다.

소도성은 사공(3공의 고위직으로 국정 중대사나 공사 등을 맡음), 녹상서사(내조의 실직으로 비서실장 급. 조조 이후 권신들은 이 직을 차지해 황제와 내부 측근의 유착을 차단한다), 표기대장군(고위 장군으로 군권 관할)이 되어 군국을 총관장하고 대권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이에 원찬과 유병은 불만을 품고 12월 말에 거사를 하기로 했지만 탐지되어 먼저 원찬과 유병을 없앴다.

소도성은 형주 자사 심유지가 난을 일으킬거라고 생각하고 미리 대비했다. 심유지는 자신의 재략이 남보다 뛰어나서 딴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미리 알고 있던 소도성은 장경아를 윈휘 3년(475년) 3월에 옹주 자사로 임명하고 심유지를 경계하게 했다. 처음에는 심유지가 경계를 했으나, 장경아의 일처리가 워낙 주도면밀해서 심유지가 성심으로 대하고 그를 믿어 주었다.

윈휘 5년(477년), 심유지가 난을 일으키자 장경아는 비밀리에 건강에 있던 소도성에게 보고했다. 결국 12월에 심유지가 영성을 공격했지만 소도성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승명 2년(478년) 정월에 심유지는 화용계로 달아나 역림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3.3. 황제가 되다[편집]


심유지의 난을 평정한 소도성은 반란을 꾀한 영주 자사 황회를 죽이고 명제 유욱의 총신이었던 원전부와 양운장을 외지로 보낸 다음 군국대권을 모두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승명 3년(479년) 3월에는 상국이 되어 10군을 봉지로 얻고 양공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심복 최조사가 '참서(도참)에 제나라는 금도리인으로 다른 나라를 멸했다라고 되어 있으니 공은 제나라에 책봉되는게 천명에 타당합니다'라고 해서 제공(齊公)이 되었다. 4월에는 제왕(齊王)으로 승진하여 10군을 더 봉지로 받았고, 결국 그 달에 순제 유준이 선양하여 소도성은 건강 남교에서 즉위하고 국호를 제, 수도를 건강으로 정하니, 후대 역사가들은 이 나라 이름을 남제(南齊)로 부른다. 이 때 소도성은 이미 증손자도 있었다.[4]

소도성은 초대 황제답게 도량이 넓고 생각이 깊으며 말이 적고 희로애락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또 박식하고 문장을 잘짓고 초서예서에 능하며 바둑을 좋아했다. 즉위 후에는 유학자 유환의 건의에 따라 송나라 효무제 유준 이후의 폭정을 개혁하며, 조정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해서, 관리와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했다. 5월에는 여음왕으로 강등되었던 순제 유준을 죽이고 송나라 유씨 황족을 모두 멸했으며 그 자리에 그대로 소씨 일족들을 봉했다. 이렇게 송나라 황족은 전폐제 유자업 시대에 북위로 망명한 문제 유의륭의 9남 의양왕 유창을 제외하면 모두 멸족되었다. 유창은 북위 황제의 사위가 되어 대를 이어나갔다. 자세한 것은 유자업 항목 참조.

소도성은 절약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자신도 정교하고 아름다운 귀중품을 지니지 않고 구리로 장식된 궁궐의 기물과 난간을 모두 쇠로 바꾸었다. 그리고 매번 자신에게 10년 동안만 천하를 다스리게 하면 황금을 흙과 같은 값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결국 건원 4년(482년) 3월, 재위 3년 만에 56세의 나이로 건강 임광전에서 병사하고 4월에 태안릉에 안장되었으며 장남 소색이 즉위했다. 소도성은 죽기 전에 '짐은 하관 상인이자 포의소족(미천한 신분)으로 황제에 오르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소. 이렇게 어렵게 일으킨 창업이니 그대(황족)들과 경(대신)들은 힘써 이 나라를 지켜주기 바라오. 그리고 송나라를 귀감삼아 황족들끼리 내분을 절대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오.'라며 화목하게 지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남제의 황족 다툼은 유송과 더불어 중국사 내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하드코어였다. 특히 명제 소란의 황족 대량 도살은 유송의 경우보다 더 지독한 경우에 속한다.

소도성은 폭군 유욱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유능한 송나라 황족들을 모두 죽였으며, 유욱이 자기를 죽이려 하자 그 때서야 겨우 유욱을 제거했으나,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 남은 송나라 대신들을 살육했다. 결국은 유욱의 악행의 공범인 주제에 그 칼날이 자신에게 이르게 되어서야 찬탈을 한 것이고, 게다가 그 자신은 그나마 평균은 지켰으나 그의 직계 및 방계 자손들의 행각이 유송의 막장 황제들보다 오히려 더 지나쳤기 때문에, 좋은 군주로 평가받지 못하고 인지도도 낮다.

유유는 북벌을 통해 산동반도 일대는 물론이고, 잠시나마 양경(낙양ㆍ장안)을 모두 탈환했었던 쾌거를 이루어서 사마씨 왕가를 대체할 만한 명분을 그럭저럭 인정받았으나, 소도성은 황제가 될 명분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으면서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유송을 없애고 즉위하였다. 이런 그의 행동은 당장 그의 조카 소란부터 황제가 될 명분을 주었으며 이후로도 남조가 계속 황위다툼으로 날이 새도록 만든 악영향을 낳았다.[5]

정리하면 인생의 코스가 거의 비슷하면서도[8], 유유가 좀더 상위호환인 반면, 소도성이 하위호환이다.(...) [9]

4. 둘러보기(계보)[편집]


남제서(南齊書)

[ 본기(本紀) ]

||<-2><tablewidth=100%><tablebgcolor=#3797e8><width=33%> 1·2권 「고제기(高帝紀)」 ||<-2><width=33%> 3권 「무제기(武帝紀)」 ||<-2><width=33%> 4권 「전폐제기(前廢帝紀)」 ||
||<-2><rowbgcolor=#fff,#191919> 소도성 ||<-2> 소색 ||<-2> 소소업 ||
||<-3> 5권 「중폐제기(中廢帝紀)」 ||<-3> 6권 명제기(明帝紀)」 ||
||<-3><rowbgcolor=#fff,#191919> 소소문 ||<-3> 소란 ||
||<-3><width=50%> 7권 「후폐제기(後廢帝紀)」 ||<-3> 8권 「화제기(和帝紀)」 ||
||<-3><rowbgcolor=#fff,#191919> 소보권 ||<-3> 소보융 ||
||<-6><width=1000> 20권 「황후기(皇后紀)」 ||
||<-6><bgcolor=#fff,#191919> 진도정 · 유지용 · 배혜소 · 왕보명 · 하정영 · 왕소명 · 유혜단 · 저영거 · 왕순화 ||
※ 9권 ~ 19권은 志에 해당. 남제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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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권 「중폐제기(中廢帝紀)」 ||<-3> 6권 명제기(明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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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width=50%> 7권 「후폐제기(後廢帝紀)」 ||<-3> 8권 「화제기(和帝紀)」 ||
||<-3><rowbgcolor=#fff,#191919> 소보권 ||<-3> 소보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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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권 ~ 19권은 志에 해당. 남제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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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염 · 우원 · 유회위 · 배소명 · 심헌 · 이규지 · 공수지
54권 「고일전(高逸傳)」
저백옥 · 명승소 · 고환 · 장영서 · 하구 · 유규 · 유역 · 종측 · 두경산 · 심유사 · 오포 · 서숙
55권 「효의전(孝義傳)」
최회진 · 공손승원 · 오흔지 · 한계백· 손담 · 화보 · 한영민 · 봉연백 · 오체지 · 왕문수 · 주겸지 · 소예명 · 악이· 강필 · 두서 · 육강
56권 「행신전(倖臣傳)」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여문도
57권 「위로전(魏虜傳)」
58권 「만・동남이전(蠻・東南夷傳)」
59권 「유목전(遊牧傳)」
위로
고려· 가라 · 왜국 · 임읍 · 부남국 · 교주
예예로 · 하남지 · 양씨저 · 탕창
60권 「자서전(自序傳)」
소자현


<bgcolor=#DC143C><height=33px>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 본기(本紀) ]
1권 「송본기상(宋本紀上)」
2권 「송본기중(宋本紀中)」
3권 「송본기하(宋本紀下)」
유유(裕) · 유의부
유의륭 · 유준(駿) · 유자업
유욱(彧) · 유욱(昱) · 유준(準)
4권 「제본기상(齊本紀上)」
5권 「제본기하(齊本紀下)」
소도성 · 소색
소소업 · 소소문 · 소란 · 소보권 · 소보융
6·7권 「양본기상·중(梁本紀上·中)」
8권 「양본기하(梁本紀下)」
소연
소강 · 소역 · 소방지
9권 「진본기상(陳本紀上)」
10권 「진본기하(陳本紀下)」
진패선 · 진천 · 진백종
진욱 · 진숙보
11·12권 「후비전(后妃傳)」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 진도정 · 유지용 · 배혜소 · 왕보명 · 하정영 · 왕소명 · 유혜단 · 저영거 · 왕순화 · 장상유 · 취휘 · 왕영빈 · 정영광 · 완영영 · 서소패 · 장요아 · 심묘용 · 왕황후 · 유경언 · 심무화 · 장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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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송본기중(宋本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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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13·14권 「송종실급제왕전(宋宗室及諸王傳)」
유도련 · 유도규 · 유의경 · 유준고 · 유의진 · 유의강 · 유의공 · 유의선 · 유의계 · 유소 · 유준(濬) · 유삭 · 유탄 · 유위 · 유창 · 유혼 · 유휴인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위 · 유창 · 유혼 · 유휴인 · 유소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 유의강
15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16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유목지 ·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왕진악 ·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 주수지 · 왕현모
17권 「유경선등전(劉敬宣等傳)」
유경선 · 유회숙 · 유수 · 손처 · 괴은 · 상정 · 유종 · 우구진 · 맹회옥 · 호번 · 유강조
18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19권 「사회등전(謝晦等傳))」
조륜지 · 소사화 · 장도
사회 · 사유 · 사방명 · 사령운
20권 「사홍미전(謝弘微傳)」
21권 「왕홍전(王弘傳)」
22권 「왕담수전(王曇首傳)」
사홍미
왕홍
왕담수 ,왕훈,
23권 「왕탄등전(王誕等傳)」
24권 「왕유지등전(王裕之等傳)」
25권 「왕의등전(王懿等傳)」
왕탄 · 왕화 · 왕혜 · 왕욱
왕유지 · 왕진지 · 왕소지 · 왕열지 · 왕준지
왕의 · 도언지 · 원호지 · 장흥세
26권 「원담전(袁湛傳)」
27권 「공정등전(孔靖等傳)」
28권 「저유지전(褚裕之傳)」
원담
공정 · 공림지 · 은경인
저유지
29권 「채곽전(蔡廓傳)」
30권 「하상지전(何尙之傳)」
31권 「장유전(張裕傳)」
채곽
하상지
장유 ,장승,
32권 「장소전(張邵傳)」
33권 「범태등전(范泰等傳)」
34권 「안연지등전(顔延之等傳)」
장소
범태 · 순백자 · 서광 ·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안연지 · 심회문 · 주랑
35권 「유담등전(劉湛等傳)」
36권 「양흔등전(羊欣等傳)」
37권 「심경지등전(沈慶之等傳)」
유담 · 유열 · 고침 · 고기지
양흔 · 양현보 · 심연지 · 강이 · 강병지
심경지 · 종각
38권 「유원경전(柳元景傳)」
39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40권 「노상등전(魯爽等傳)」
유원경
은효조 · 유면
노상 · 설안도 · 등완 · 종월 · 오희 · 황회

41권 「제종실전(齊宗室傳)」
소도도 · 소도생 · 소요광 · 소요흔 · 소면 · 소경선 · 소적부 · · 소탄 · 소탄지
42·43권 「제고제제자전(齊高帝諸子傳)」
소억 · 소영 · 소황 · 소엽 · 소고 · 소장 · 소삭 · 소감 · 소봉 · 소예 · 소갱 · 소구 · 소현
44권 「제무제제자·제문혜제자·명제제자전(齊高帝諸子·文惠諸子·明帝諸子傳)」
소장무 · 소자량 · 소자경(卿) · 소자향 · 소자경(敬) · 소자무 · 소자륭 · 소자진 · 소자명 · 소자한 · 소자륜 · 소자정 · 소자악 · 소자문
소자준 · 소자림 · 소자건 · 소자하 · 소소수 · 소소찬 · 소보의 · 소보현 · 소보원 · 소보인 · 소보유 · 소보숭 · 소보정
45권 「왕경칙등전(王敬則等傳」
46권 「이안인등전(李安人等傳)」
왕경칙 · 진현달 · 장경아 · 최혜경
이안인 · 대승정 · 환강 · 초도 · 조무 · 여안국 · 주산도 · 주반룡 · 왕광지
47권 「순백옥등전(荀伯玉等傳)」
48권 「육징등전(陸澄等傳)」
순백옥 · 최조사 · 설연 · 우종 · 호해지 · 우완지 · 유휴 · 강석
육징 · 육혜효 · 육궐
49권 「유고지등전(庾杲之等傳)」
50권 「유환등전(劉瓛等傳)」
유고지 · 왕심 · 공규 · 유회진
유환 · 명승소 · 유이 · 유규

51·52권 「양종실전(梁宗室傳)」
소경 ,소매 소발 소앙 소욱, · 소의 · 소부 · 소창 · 소융 · 소굉 ,소정인 소정의 소정덕 소정립, 소수 · 소위 · 소회 · 소담
53권 「양무제자전(梁武帝諸子傳)」
소통 · 소종 · 소적 · 소속 · 소윤 · 소기
54권 「양간문제자·원제제자전(梁簡文帝諸子·元帝諸子傳)」
소대기 · 소대심 · 소대관 · 소대림 · 소대련 · 소대춘 · 소대성 · 소대봉 · 소대아 · 소대장 · 소대균 · 소대위 · 소대훈 · 소대구 · 소대흔 · 소대지 · 소대원 · 소방등 · 소방제 · 소방구 · 소방략
55권 「왕무등전(王茂等傳)」
왕무 · 조경종 · 조의종 · 석천문 · 하후상 · 길사첨 · 채도공 · 양공칙 · 등원기 · 장혜소 · 장징 · 풍도근 · 강순 · 창의지
56권 「장홍책등전(張弘策等傳)」
57권 「심약등전(沈約等傳)」
58권 「위예등전(韋叡等傳)」
장홍책 · 유역 · 정소숙 · 여승진 · 악애
심약 · 범운
위예 · 배수
59권 「강엄등전(江淹等傳)」
60권 「범수등전(范岫等傳)」
61권 「진백지등전(陳伯之等傳)」
강엄 · 임방 · 왕승유
범수 · 부소 · 공휴원 · 강혁 · 서면 · 허무 · 은균
진백지 · 진경지 · 난흠
62권 「하창등전(賀瑒等傳)」
63권 「왕신념등전(王神念等傳)」
64권 「강자일등전( 江子一等傳)」
하창 · 사마경 · 주이 · 고협 · 서리 · 포천
왕신념 · 양간 · 양아인
강자일 · 호승우 · 서문성 · 음자춘 · 두즉 · 왕림 · 장표

65권 「진종실제왕전(陳宗室諸王傳)」
진의 · 진상 · 진혜기 · 진창 · 진담랑 · 진백무 · 진백산 · 진백고 · 진백공 · 진백인 · 진백의 · 진백례 · 진백지 · 진백모
진숙릉 · 진숙영 · 진숙견 · 진숙명 · 진숙경 · 진숙헌 · 진숙제 · 진숙문 · 진숙달 · 진숙탄 · 진숙표 · 진숙웅 · 진숙중 · 진숙엄 · 진숙신 · 진숙우 · 진숙평 · 진숙오 · 진숙흥 · 진숙선 · 진숙목 · 진숙검 · 진숙징 · 진숙소 · 진숙광 · 진숙순 · 진숙모 · 진숙현 · 진숙륭 · 진숙영
진심 · 진장 · 진윤 · 진억 · 진언 · 진경 · 진건 · 진념 · 진지 · 진전 · 진번
66권 「두승명등전(杜僧明等傳)」
두승명 · 주문육 · 후진 · 후안도 · 구양외 · 황법구 · 순우량 · 장소달 · 오명철
67권 「호영등전(胡穎等傳)」
호영 · 서도 · 두릉 · 주철무(1) · 정령세 · 심각 · 육자융 · 전도집 · 낙문아 · 손창 · 서세보 · 주부 · 순랑 · 노실달 · 소마가 · 임충 · 번의
68권 「조지례등전(趙知禮等傳)」
조지례 · 채경력 · 종원요 · 한자고 · 유사지 · 사기 · 모희 · 심군리 · 육산재
69권 「심형등전(沈炯等傳)」
심형 · 우려 · 부재 · 고야왕 · 요찰

70권 「순리전(循吏傳)」
길한 · 두기 · 신념 · 두혜도 · 완장지 · 견법숭 · 부염 · 우원 · 왕홍궤 · 심우 · 범술증 · 손겸 · 하원 · 곽조심
71권 「유림전(儒林傳)」
복만용 · 하동지 · 엄식지 · 사마경 · 변화 · 최령은 · 공첨 · 노광 · 심준(峻) · 공자구 · 황간 · 심수 · 척곤 · 정작 · 전완 · 장기 · 고월 · 척곤 · 왕원규
72권 「문학전(文學傳)」
구영국 · 단초 · 변빈 · 구거원 · 왕지심 · 최위조 · 조충지 · 가희경 · 원준 · 유소(昭) · 종영 · 주흥사 · 오균 · 유협 · 하사징 · 임효공 · 안협 · 기소유 · 두지위 · 안황 · 잠지경 · 하지원 · 서백양 · 장정견 · 완탁
73·74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瑜) · 가은 · 곽세통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구걸 · 사각수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인 · 손극 · 하자평 · 최회순 · 왕허지 · 오경지 · 소예명 · 소교처양 · 공손승원 · 오흔지 · 한계백 · 구관선 · 손담 · 화보 · 해숙겸 · 한영민 · 유풍 · 봉연백 · 오달지 · 왕문수 · 악이지 · 손법종 · 유도민 · 등담공 · 도계직 · 심숭소 · 순장 · 길분 · 견염 · 조발호 · 한회명 · 저수 · 장경인 · 도자장 · 성경준 · 이경서 · 사린 · 은불해 · 사마고 · 장소
75·76권 「은일전(隐逸傳)」
도잠 · 종소문 · 심도건 · 공순지 · 주속지 · 대옹 · 적법사 · 뇌차종 · 곽희림 · 유응지 · 공기 · 주백년 · 관강지 · 어부 · 저백옥 · 고환 · 두경산 · 장영서 · 오포 · 서백진 · 심인사 · 완효서 · 등욱 · 도홍경 · 제갈거 · 유혜비 · 범원엽 · 유선 · 장효수 · 유승선
77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서원 · 완전부 ·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 여법진 · 주석진 · 육험 · 사마신 · 시문경 · 심객경 · 공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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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읍 · 부남 · 중천축국 · 사자국 · 고구려 · 백제국 · 신라 · · 부상국· 하남왕국 · 탕창 등지 · 무흥국 · 형옹주·예주만 · 고창 · 쿠처 · 우전국 · 파사국 ·연연
80권 「적신전(賊臣傳)」
후경 ,왕위, · 웅담랑 · 주적 · 유이 · 진보응
(1) 본명이 주철호(周鐵虎)로 당태조로 추존된 이호(李虎)를 피휘하여 무(武)로 개칭되었다.


[1] 산둥성 린이시의 일부. 당시에는 서주 소속이었다.[2] 이를 역사 용어로 교치(僑置)라고 한다. '교'(僑)자는 교민, 화교 할 때의 그 '교'자인데, 화교 집단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부류가 명나라때 이주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화교인 것을 고려할 때, 그 이전의 고대~중세 중국사의 범위에서 이 '교'(僑)자가 쓰이는 맥락의 대다수는 영가의 난으로 인한 강남 피난으로 보면 된다. 또한 여기에 숨어있는 함의는, 마치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해서 원래 지명은 무시하고, '뉴잉글랜드', '뉴암스테르담' 등의 철저히 자신들 본위의 지명을 붙였던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강남 지역에도 원래 지명이 분명히 있었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서는 화북의 원래 지명을 베이스로 하여 원래 지명을 대체한 경우가 있다는 데 있다. 남난릉 말고도 '남서주', '남예주', '남연주' 등 예시는 여럿 더 있다. 따지고보면 아메리카보다도 심한 것이,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당시 아메리카는 너무나 멀어서 교류도 당연히 없었던(근세의 소위 아메리카 '발견' 이전에도 아메리카에 바이킹의 흔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곳이라지만, 4세기의 중원(화북)인들에게 있어서 강남은 전혀 그런 곳이 아니었다. 푸젠-광둥-광시 등의 남중국해 연안 지역처럼 화북과의 거리가 무시무시하게 멀면 또 모를까... 그런데도 비슷하게 흘러갔다는 것은, 강남 지역이 여전히 중화세계의 소위 '내부 식민지'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방증이 된다.[3] 현 장쑤성 창저우시: 건강(난징)에서 그리 멀지 않다.[4] 거기다 이 시절 52세의 나이는, 지금으로 치면 70~80대 정도 되는 고령의 나이였다. [5] 물론 소도성은 개인적으론 황제가 될만한 명분이 있었다. 하필 이 사람이 명성을 얻을때가 그 미친 후폐제 시기였고 후폐제에게 지속적으로 살인협박을 받고 있었다. 보통의 군주라면 '아, 내가 나대지 말라고 하는구나 내가 엎드려 있으면 봐주시겠지?' 라고 생각하는게 가능하겠지만 이 후폐제는 살인에 단단히 맛들린 미친놈이라는게 문제다. 거기다가 개념은 개념대로 없어서 후폐제의 아버지인 명제 유욱은 고자라서 부인을 심복인 이도아에게 내린 뒤 부인이 임신하자 다시 돌려받았는데 이 때 태어난 아이가 후폐제라서 후폐제가 유욱의 친자가 아니라 이도아의 친자라는 말이 돌았는데 이 때 후폐제가 짐은 이장군의 아들이다. 라는, 미친 소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즉 살인마와 무개념이라는 두 가지 이유로 후폐제의 말은 단순 협박이 아니라 진짜로 죽여버릴 수 있었고 또 그러려고도 했다. 문제는 후폐제가 아무리 그래도 황제는 황제인지라 황제를 죽였으니 시해범이다. 까딱하면 권신이 아니라 역적이 될 수도 있으니 역적행을 피하기 위해선 찬탈을 할 수 밖에 없긴 하다. 정말로 그 길밖에 없을지는 당사자와 당시 시대사람만 알겠지만.[6] 난릉이 오늘날 기준으로 따지면 서주의 후신 격인 장쑤성이 아닌 청주의 후신 격인 산둥성(린이시)에 속해있지만, 산둥-장쑤 간 경계에 딱 붙어있다. 게다가 애초에 그 주변 일대는(낭야·동해군) 산동반도 쪽의 광역행정구역에 속하는지 혹은 서주 쪽의 광역행정구역에 속하는지가 왕조마다 자주 바뀌었다.[7] 즉 양쪽 다 대대로 소위 완전 쌩 평민은 아님: 출세하고 나서 조상세탁을 했다고 보기에는, 문벌귀족(중국) 문서의 동진~남북조시대 쯤 대목을 보면 나오듯이, 귀족 내부에서도 혈통과 족보를 정말 세밀하게 따져서 세부적으로 급간을 구분하던 게 당시 귀족사회라서, 조상 세탁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이민족 출신 귀족들은 북위의 한화정책 이후 조상세탁을 하는 경우도 많았고, 동시대 한족 귀족들도 그걸 알면서도 칼을 가지고 있는 게 다름아닌 그 이민족 귀족들이니 적극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었고(...) 대신 이들이 씨족지를 편찬할 때 황족을 최고 가문으로 넣지 않는 식으로 소심하게(...) 대응했지만, 유유·소도성 등은 한족이라 소위 짤 없었다.[8] 양쪽 다 일가의 본적은 원래 구 서주, 그 중에서도 북부 지역 출신인데 교치로 인해 남하[6], 더 거슬러올라가면 그 뿌리는 한나라, 하지만 수백년이 지나며 가계가 역사의 주무대에서 밀리다가 급기야 귀족 대열에서 탈락해서 일반인이 됨[7], 난세에 군부에 투신하여 비교적 단시간 내에 재기(?) 성공 등[9] 군공 및 그로 인한 역성의 명분 차이, 구 한나라 황족 출신 vs 구 한나라 일반 귀족(非황족) 출신. 물론 엄격하게 따지면 유유의 일가는 한고조의 동생의 후손이라, 부계 조상에는 유태공 같은 추존 황제 말고 실제 황제는 하나도 없었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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