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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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명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 ()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
약칭
소련 공산당 ()
КПСС ()
CPSU ()
창립자
블라디미르 레닌
표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
당가
볼셰비키 찬가 (Гимн партии большевиков)
당보
프라우다
창당
1912년 1월 1일
해산
1991년 8월 29일
당원[1]
약 1,900만 명
이념
마르크스-레닌주의 , 공산주의
스펙트럼
극좌
선행조직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승계정당
러시아 연방 공산당

1. 개요
2. 역사
2.1. 창당
2.2. 레닌에서부터 스탈린까지
2.3. 해빙기와 정체기
2.4. 페레스트로이카와 쿠데타
2.5. 해산
3. 당 조직


1. 개요[편집]


1912년 1월 1일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의 한 분파였던 볼셰비키를 계승하는 정당이며, 이 정당은 일당제 구소련의 유일정당[2]이란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1917년의 러시아 대혁명 이후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여 10월 혁명 이후에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적백내전 이후 소련의 유일한 정당이 되었다. 이후 1991년 구소련이 붕괴할때까지 구 소련의 집권당이었다.

정치 성향은 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혹은 현실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다.

당의 창설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한 이후에는 스탈린이 서기장 직책으로 당을 장악하면서, 이후 서기장이 사실상의 당수로 인식되었다. 레닌 시기에 당의 구조는 전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를 선출하고, 중앙위원회에서 정치국을 선출하며, 이 정치국원들이 당을 지도하는 구조였다. 즉 정치국이 당의 핵심적인 결정을 내리며, 서기국에서 이 정치국의 결정을 집행하는 구조로 서기장은 서기국의 대표자 정도의 위치였다. 사실 중앙위원회를 최고위원회의, 정치국을 정책위원회, 서기장을 사무총장, 서기국을 사무처로 불러도 아무런 무리가 없을 정도로 현대 대한민국의 정당과 유사한 구조였다. 레닌 생전에 스탈린은 서기장이었지만, 엄연히 정치국 보다는 하위레벨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당조직을 관리하는 서기장의 직책을 이용해서 소련공산당을 움켜쥐고, 당연하게도 일당제라 자연스럽게 소련을 통치하면서 사실상 서기장이 당수 겸 소련의 실권자로 변질되었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레닌 시기에는 공식적인 당대표는 없었고 레닌은 내각제 국가처럼 수상으로 취임해 행정부를 통해 소련을 통치했지 결코 당권으로 국권을 통제하지는 않았다. 레닌은 당내에서 중앙위원이었고정치국원이었으며 경제계획을 하는 자리에는 있었지만 절대권력을 가지진 못했고 라데크나 트로츠키등이 공개적으로 레닌을 비판하는 일도 잧았다. 현대에도 스리랑카 등지의 트로츠키주의 정당들은 이 구조를 승계해 특별한 당대표가 없고 선거를 통해 원내에 입성하면 원내대표가 명목상 당대표 역할을 한다.

역대 서기장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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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제4대
제5대
제6대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고르바초프



2. 역사[편집]



2.1. 창당[편집]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은 외적으로는 폴란드핀란드에서부터 캅카스, 중앙아시아, 연해주, 알래스카까지 거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제국이자 강대국이었다. 하지만 내적으로 들여다보면 러시아의 부를 독점한 소수의 귀족 계층과 절대 다수의 농민들로 이루어진 후진적인 사회였다. 서유럽이 프랑스 대혁명 이후 불어닥친 민주주의 바람과 산업혁명을 통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서 봉건제를 철폐하고 (제한적이지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반한 근대적인 시민국가로 바뀌어 가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1861년 계몽군주였던 알렉산드르 2세의 노력으로 겨우 농노제가 철폐되는 수준이었다. 당시 서유럽 국가들이 헌법에 근거해서 (불완전하나마) 선거를 하고 법치주의에 입각한 통치[3]를 할 때, 러시아 제국은 헌법조차 없었다![4] 즉 러시아는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신분제도와 봉건적 경제질서에 의해서 유지되는 전근대적인 전제군주제 국가였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러시아 제국은 근대 시민국가가 되기에는 한참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이러한 사회상에 불만을 품었고, 수 차례나 차르로 대표되는 전제군주정을 전복시키려고 시도했다. 러시아 제국은 18세기 말인 1773년 푸가쵸프의 난부터 시작해 1825년 데카브리스트 반란,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의 알렉산드르 2세 암살 등 사회적 변혁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체제전복 시도를 극복한 전제군주정은 어떠한 개혁이나 변화 없이 더욱 더 반대파들을 권위적으로 탄압했고, 이는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체제를 완전히 뒤엎는 혁명을 통해 국가를 변혁해야 한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런 가운데 19세기 서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등장하면서 마르크스엥겔스공산당 선언을 발표하고 "과학적 사회주의" 이념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자 러시아 지식인들도 사회주의를 전제군주정으로 낙후된 러시아를 변화시킬 혁명이념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지식인들도 점차 사회주의 흐름에 동참하기 시작해 1898년, 러시아 제국 민스크에서 첫 마르크스주의 정당이었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창설되었다. 당연히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던 정당을 달갑게 보지 않았던 러시아는 이들 정당의 활동을 금지시켰고, 이들은 곧 서유럽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민주노동당원들은 곧 러시아 내 사회주의 실현을 두고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민주노동당 내 율리 마르토프를 비롯한 온건파는 러시아가 아직 사회주의를 실현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며, 마르크스가 역사는 봉건제 -> 자본주의(부르조아 민주주의) -> 사회주의 순으로 발전한다고 설파한 대로 일단 봉건제적 질서에 머물러 있는 러시아에서 당면의 목표는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이며 이를 통해서 자본주의와 공업생산력을 발전시킨 뒤에 사회주의 체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회주의 혁명은 공업화가 진행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초창기 주장을 받아들이면서[5] 러시아는 아직 노동자가 얼마 안되며 사실상 봉건적 질서가 잔존하는 농촌국가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멘셰비키로 불리게 된다.[6]

반면 러시아의 낡은 사회상을 급격히 바꾸길 원했던 블라디미르 레닌은 굳이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으며 곧바로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해서 일거에 봉건제적 잔재를 쓸어내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설사 노동자의 숫자와 공업화의 정도가 영/프/독 등의 국가에 비하면 낮다고 하더라도 이미 러시아 경제의 핵심은 공업이며, 숫자가 적더라도 도시노동자을 조직해서 혁명을 일으킨다면 충분히 구 체제를 뒤흔들고 러시아를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사회주의라는 이름만 같지 내용은 전혀 다른 노선이었고, 당내에서의 격렬한 투쟁끝에 1903년 2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제갈길을 가기 시작한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라는 간판은 여전히 같이 쓰고 있었지만, 그 뒤로 이 두 분파는 사실상 다른 당으로 경쟁자의 관계가 되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러시아에 대한 인식과 목표가 달랐기에 행동방식도 전혀 달랐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차르가 군대와 봉건제적 신분질서를 가지고 폭압적으로 통치하는 전근대적인 러시아의 상황에서 헌번 제정, 선거, 의회 개설, 언론의 자유 같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적인 요구 대신 곧바로 차르체제 타도와 사회주의 혁명으로 달려가길 원했고 강철같은 규율을 가진 혁명가들로 구성된 비합법적인 전위조직이 지도하는 폭력혁명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것의 실현을 위해서 레닌은 볼셰비키를 서유럽과 같은 선거로 집권하는 대중정당이 아닌, 엄격한 규율을 바탕으로 혁명을 지도하는 조직체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현을 지향하였다.

즉 당시 러시아는 선거와 의회 그리고 언론의 자유가 없으니 인민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할 합법적인 공간이 전혀 없었다. 여기에 멘셰비키와 카데트(입헌군주제 지지자들)는 그럼 일단 합법공간을 만들자는 쪽이고, 볼셰비키와 나드로니키(사회혁명당)은 궁극적인 목표는 차르체제의 타도와 사회주의 체제의 수립이니 합법공간은 건너뛰고 바로 혁명을 외친 것이다. 다마 볼셰비키는 도시노동자들의 민중봉기로, 나드로니키는 농민과 테러전술을 채택한 것이 달랐을 뿐이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멘셰비키가 주도권을 잡고 있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과 정식으로 결별하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로 당명을 변경했다. 이후 10월 혁명이 성공한 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집권당이 되면서 1918년 당명을 전러시아공산당으로 변경했다. 당시 공산당이라는 명칭은 멘셰비키, 나드로니키, 무정부주의자 등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구별하여 러시아의 레닌 추종세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2.2. 레닌에서부터 스탈린까지[편집]


볼셰비키가 10월 혁명으로 정권을 탈취하고 여타 세력을 소비에트에서 몰아내자[7] 적백내전이 폭발하였지만 공산당은 백군과의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내전 승리 이후 1924년 레닌이 사망할 때까지 신경제정책(NEP)을 통해서 제한된 자본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수립된 후 1925년부터 전연방공산당(Всесою́зная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으로 개칭하였다.

레닌 사후 권력투쟁 끝에 정권을 장악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1934~1938년 대숙청을 통해서 당 내부에 남아 있는 반대세력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천 명의 정적과 혐의자들이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수백만 명이 투옥되거나 강제노동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51년 소련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2.3. 해빙기와 정체기[편집]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소련의 권력자로 급부상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1954년 비밀리에 열린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는 그동안 독재자를 숭배하다시피 했던 소련에 큰 변혁을 예고하는 사건이였고, 이후 대숙청 당시 굴라그(강제수용소)에 보내진 사람을 석방시키고 반체제 인사들의 활동을 허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본격적인 해빙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농업정책이 실패하고,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에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당 내 보수파들의 불만을 샀다. 이에 당내부의 보수파와 군부는 1964년 여름 휴가기간 동안 전격적으로 당 중앙위원회 투표를 통해서 흐루쇼프를 실각시키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제1서기로 선출했다. 브레즈네프는 이후 체제를 현상유지시키는 선에서 어떠한 개혁이나 변화 없이 1982년까지 사실상 정체기라 불리는 시기를 이끌게 되었다.

1982년에는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직을 승계하였다. 하지만 안드로포프는 15개월 만에, 그 뒤를 이은 콘스탄틴 체르넨코는 13개월 만에 사망하면서 소련 공산당은 지도력의 부재를 맞게 되었다. 이에 공산당 정치국은 변화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1985년 당시 최연소 정치국원이었던 50대의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서기장에 선출하였다.


2.4. 페레스트로이카와 쿠데타[편집]


1985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취임하였다. 고르바초프는 80년대를 겪으면서 침체된 소련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사업체들이 자율적으로 지정하게 하는 한편, 그동안 금지되었던 표현, 출판의 자유를 허용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곧 지속되는 경기침체에 지쳐있던 민중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소련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개혁 조치로 인해 타격을 입은 공산당 간부들이 고르바초프에게 반발하면서 고르바초프의 지도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1989년 동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민주화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권에서 이탈하면서 동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사실상 끝났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1989년 인민대표회의 창설, 1990년 다당제 허용 등으로 소련을 민주적으로 바꾸며 서방 국가들과 비슷한 국가로 탈바꿈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고르바초프의 노력은 1991년 8월, 보수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보수파들은 옛 체제로 회귀하는 방향으로 소련을 복원시키려 했다. 하지만 TV로 쿠데타가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쿠데타군에 등을 돌렸고, 결국 쿠데타는 4일 만에 실패했다.


2.5. 해산[편집]


1991년 8월 23일 보수파들이 일으킨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소련 공산당은 사실상 사망선고를 확정받았다. 이후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소련 공산당의 활동을 완전히 금지하고 공산당이 소유한 재산을 전부 각 공화국 정부에게 환원했다. 이로써 소련 공산당은 정부와 소련 내 보안기구 및 소련군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사라졌다.

후신 정당으로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있는데 옐친 정부 중후반기때 제1야당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과시하기는 했고, 1996년 대선에서 옐친에게 석패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 옐친이 삽질을 반복한데다가 모라토리엄까지 선언하기에 이르렀기에 차기 집권정당으로 유력시되었기까지 했지만 푸틴이 총리로 등극하고 대선에서 잇따라 승리한 뒤로는 세가 약화되어 그냥 일개 야당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그치고 있다. 그래도 명색은 제1야당이기는 하다.

우크라이나에서도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집권할 수준까지는 아니지만[8] 어쨌든 당시 우크라이나 경제 정책의 실패로 인해서 소련 시절에 대한 향수가 일면서 공산당이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세력이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2004년 대선을 기점으로 해서 서부가 친서방자유주의 정당이, 동부에서는 친러 중도파 정당인 지역당이 세를 갈라먹으면서 중견정당으로 전락했고 2010년대 들어서 지역당과 연합했다가 유로마이단 이후로 공산당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당하면서 해체당하고 주요 지지지역 중 하나인 크림반도[9]가 날라가고 동부지역에 내전이 벌어지면서 상황이 더욱 암담해졌다.

3. 당 조직[편집]


소련 공산당은 혁명을 준비하던 시기 때부터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과 페레스트로이카, 소련 해체까지 굴곡진 역사를 겪어온 만큼 워낙 구조가 많이 변했다.
다음은 소련 중, 후반기에 정리된 대략적인 구조다.

소련 공산당의 모든 정책을 결정하는 회의. 1898년부터 1991년까지 총 28번 개최되었으며, 위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명실 상부한 소련 최고의 권력이었다. 스탈린 시기까지는 정치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었으나, 스탈린 사후 5년을 두고 개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당 대회에서는 전반적인 당의 운영노선과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다.

  •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Центральный Комитет КПСС)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에 선출되어, 전당대회가 없는 평상시 당의 운영을 책임졌던 기관.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뽑힌 당의 지도부... 이기는 했지만 사실 정치국에 가려 빛을 많이 못봤다. 물론 그래도 당의 실무를 담당하고 조율한다는 점에서 나름 영향력있는 기관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당이나 국가 내 중요한 직책은 전부 정치국 출신이 독점하다보니 사실상 당의 실무를 조율하는 기관에 가까웠다. 그래도 정치국이 소속된 기관이라는 점에서 나름 최고 권력이라면 권력이었다.
중앙위원회에서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드러내는 인물이 모인 부서는 정치국(Политбюро), 당의 행정이나 재정, 기타 실무 쪽을 주로 맡는 부서는 사무국(또는 서기국, Секретариат)으로 분류했다. 이 서기국의 수장이었던 서기장이 수장 격이긴 해도 UN 사무총장보다도 못한 권력으로 일반적인 사무업무만 맡다가,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도 하에 서기국의 수장이 정치국에서 점점 영향력을 높이더니 중앙위원회의 수장이 되고, 나아가 소련 공산당의 수장이 되며 권력이 급성장한 것이다.

  •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Политбюро ЦК КПСС)
말그대로 소련 권력의 핵심. 1952년부터 1966년까지는 간부회(Президиу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옛날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 누군가가 정치국원이었다는 것은 권력의 최종 핵심부에 있다는 것을 뜻했다. 소련에서 서기장을 포함해, 장관회의 주석이나 최고회의 주석, 심지어 나름 이름을 알린 정치인 중 정치국 출신이 아닌 인사는 매우 드물었다. 심지어 정치국원 후보(Кандидат члена Полибюро)까지 따로 선출해서 둘 만큼 정치국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누구보다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즉, 차기 서기장 후보이거나 서기장의 최측근들이 포진한 권력의 핵심부가 정치국이었다.

파일:Politburo_CPSU_1989.jpg
▲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들의 사진(1989년)

  • 소련 공산당 중앙감찰위원회 (Центральная контрольная комиссия КПСС)
중앙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당 대회에서 선출되어, 당 내에서 당원들의 당규 위반, 혹은 도덕적 타락, 사기, 권력 남용과 같은 범죄들을 감시하고 심판하였던 기구. 현대의 정당으로 따지면 당기위, 윤리위원회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중앙감찰위원회에 소속된 위원들은 중앙위원회 대의원이 될 수 없었고, 이러한 감찰 구조로 인해 소련의 경영체계 품질 향상을 꾀했다.

  • 소련 공산당 중앙감사위원회 (Центральная ревизионная комиссия КПСС)
소련 공산당 내부의 감사를 위한 기구. 중앙감찰위원회와는 다르게 중앙감사위는 예산과 같은 당 내 재정 문제에 목적을 맞췄고, 당 대회에서 재무보고를 담당하였다. 제 3대 중앙감사위원장 미하일 블라디미르스키는 중앙감사위의 목적을 '중앙위원회 사무국의 재무 관리를 확인, 사건의 적시성이나 정확성을 기준으로 하여 중앙위원회 사무국의 업무를 감사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총 37명의 위원이 당 중앙위원회에서 선출되었다.

  • 당내 교육기관
이렇게 소련 공산당은 소련 내에서도 워낙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보니, 독자적인 학교와 연구소를 소유할 만큼 세가 강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Институт Марксизма-Ленинизма)라던지 당상급학교(Высшая партийная школа)를 운영하면서 공산주의 이념을 다듬고 차기 당을 이끌어갈 엘리트를 체계적으로 교육시켰다.

  • 당 상급학교(Высшая партийная школа)
당 상급학교는 당 운영을 위한 인물 양성을 위해 설립된 기관으로, 입당한 지 3년이 넘은 당원이 지역위원회의 허가를 받아 입학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에 위치한 중앙위원회 산하 당 상급학교를 비롯, 15개 국가 내의 당 중앙위원회가 직속으로 설립한 당 상급학교, 그리고 각 지역당마다 설립한 당 상급학교가 존재하였다. 커리큘럼은 2년제와 4년제로 분류되었고, 경제나 역사 위주의 커리큘럼이었으나, 이외에도 마르크스 철학이나 조직사업, 외국어 등을 공부하였다.

  • 아동 및 청년기관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소련 역시 유아, 청소년들의 이념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고, 그 결과물이 바로 옥타브랴타, 피오네르, 콤소몰로 이어지는 공산당 내 청년기관이었다. 보통 공산당에 가입한 소련인은 7세부터 9세까지는 옥탸브랴타, 9세부터 14세까지는 피오네르, 14부터 28세까지는 콤소몰, 그 이후부터는 정규 당조직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 지부
러시아를 제외한 소련의 14개 공화국들은 소련공산당 지부를 두고 있었으며, 공화국 국명+공산당 명칭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소련공산당 우크라이나 지부우크라이나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각 공화국 공산당들은 소련공산당과는 별도의 전당대회를 개최했다. 러시아를 제외한 14개 공화국 출신의 소련 정치인들은 우선 공화국 공산당에 입당한 뒤, 능력을 인정받아 소련공산당으로 진출하는 방식의 테크트리를 탔다. 소련의 대부분을 차지해 사실상 소련과 같은 취급을 받았던 러시아는 소련공산당의 직할통치를 받다가 1990년에 러시아SFSR 공산당 창당이 허용되었으나 1년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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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6년 기준[2] 동유럽 위성국가였던 동독이나 중국, 북한이 구색정당을 만들어서 명목상 다당제를 하는데 비해서 소련은 그딴거 없이 깔쌈하게 진짜 일당제였다. 그러나 말기에는 고르바초프에 의해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를 시행하면서 다당제가 승인되었다.[3] 물론 그 수혜 대상은 철저히 부르조아 계급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노동자들은 선거권은커녕 노동삼권조차 금지된 상태였다가 러다이트 운동, 차티스트 운동 등으로 스스로 권리를 쟁취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조치들조차 의회에서 통과시킨 법률에 입각해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러시아는 의회가 없었다.[4] 제정 러시아의 헌법 제정과 의회 설립은 1906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진다. 일본 제국보다도 늦은 셈(...).[5] 그러나 마르크스는 말년에는 공업화가 진전되지 않은 러시아와 중국같은 후진국에서도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입장을 바꾸었다.[6] 이들 멘셰비키가 1917년 2월 혁명 뒤에 부르조아 민주주의 성격의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협력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7] 전 러시아 소비에트 선거에서 볼셰비키가 제2당이 되자, 빡친 레닌은 군대를 동원해서 소비에트를 강제로 해산해버렸다.[8] 90년대에도 서부지역은 반공산당 성향이 강했다. 1999년 대선에서 IMF 외환위기가 닥쳤을때임에도 쿠츠마가 서부의 지지를 얻어서 압승할 정도.[9] 다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공산당의 지지세가 강했다는 것이지,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지역당을 지지하는 성향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