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교통

덤프버전 :

분류




1. 개요
2. 자동차 보급률
3. 여담


1. 개요[편집]


소련의 교통을 다룬 문서이다.

2. 자동차 보급률[편집]


소련은 자동차 보급률이 비교적 뒤떨어졌던 편이었다. 같은 공산권인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 비해서도 자동차 보급률이 낮았다. 1985년 기준으로 인구 100명 당 5대로 가구당으로 치면 4가구당 1대에 그쳤다. 물론 당시 한국보다는 자동차 보급률이 훨씬 높았기는 했지만, 소련의 경쟁국이였던 미국이 이미 1920년대에 중산층이 자동차를 굴리던게 당연시되었고, 자동차 보급률이 높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적어도 자동차에 있어서는 서방 국가들보다 열세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처럼 자동차 보급률이 낮았던 가장 큰 이유는 소련이 서방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동차 제작 기술 수준이 낙후되었고, 민간 승용차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자동차 생산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탈린 시절까지 보통 승용차는 주로 관용차로 쓰이던 시절이었고, 일반인들이 몰 수 있는 차량은 콜호즈나 지역 사업체 소속 화물차 같은 차량이 대다수였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등 지도자들이 민간경제 개선 차원에서 개인을 대상으로 한 자동차 판매가 허가되었다. 하지만 연간 생산량이 20만대를 겨우 넘기던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소련 내 자가용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었고, 차를 구매한 사람도 몇년치 급여에 해당되는 돈을 현찰로 낸 다음에 몇년씩 기다려서 받았다. 따라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초기 때는 자동차 면허를 가진 사람도 차를 필요할때 대여해서 썼기 때문에 렌트카 시스템이 발달되었다.

이후 1970년 소련이 이탈리아 피아트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피아트 124를 기반으로 한 라다 지굴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자동차 생산량이 연간 200만대를 넘기면서 개인용 승용차의 생산량이 대폭 증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련의 자동차 수요를 다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으로 자동차를 사려면 몇년씩 대기해야되는것은 여전했다. 이렇게 자동차의 생산량을 늘렸음에도 장시간 대기문제로 불만이 커져나가면서, 페레스트로이카기인 1985년에 외제 중고차의 수입이 허가되었다. 코메콘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동독 트라반트[1]와 체코슬로바키아 스코다, 유고슬라비아 자스타바 코랄을 비롯한 동유럽산 외제 중고차들이 소련 전역에 공급되면서 자동차 보급률도 급속히 상승했지만 그럼에도 소련 붕괴 직전인 1990년에도 자동차 보급률은 인구 100명당 13대, 가구당으로 치면 2가구당 1대 수준이었다.

자동차 보급률이 높지 않았던 이유에는 도로망 부실도 적잖은 요인을 차지했다. 소련은 지리상 여건이나 기반시설 유지보수비용 등 여러가지 이유로 도로교통에 있어 자동차보다 철도교통을 선호했다. 따라서 바이칼-아무르 철도 등 철도 노선에 주기적으로 투자한 데 반하여 라스푸티차부란같은 기후 특성으로 인해 적잖은 유지보수비와 주기적인 관리가 필요한 전국적인 도로망 구축에는 비교적 소극적이었다.[2] 그래서 대도시에서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도 비포장길이 수백km씩 이어지는 풍경을 쉽게 볼수있었다. 여기에 계획경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통제를 중요시한 소련 입장에서 개인의 자가용이나 화물차가 중심이 되는 도로교통보다는 철도교통이 통제하기 용이한 이유도 있었다. 이는 소련 입장에서 당장의 경제사정을 고려하여 투자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었다 할 지라도, 장기적으로 물류유통체계를 낙후시키는 원인이 되어 결과적으로 소련 내내 이어진 만성적인 물자부족의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자동차 보급률이 떨어진 반대 급부로 철도망은 크게 발전했으며, 도시철도망은 매우 발달되었다. 특히 노면전차망은 매우 대중적인 교통수단으로 서방국가에서 노면전차를 자동차 통행에 방해된다는 잇따라 폐선하는 동안 왠만한 중소도시에서도 노면전차들이 건설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발이 되어주었다. 지하철도 활발히 건설되었으며, 지하철은 인구 100만 이상 대도시에 건설되었는데 각 공화국 수도를 중심으로 건설했다. 이 결과 발트 3국[3]과 일부 중앙아시아 지역 공화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공화국 수도에는 전철이 건설되었는데, 사실 소련의 구성 공화국은 15개였다. 그말인 즉슨 핵심도시와 공화국 수도 위주로 지어도 15개는 있어야 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핵전쟁을 고려해 지하철을 깊게 건설하는 경우가 많았던지라 건설속도는 서방국가들에 비해 빠르기는 했어도 현대의 중국지하철과 인도지하철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후순위로 밀려난 지하철망도 상당수 있었고, 소련이 붕괴된 이후로 재정난 때문에 건설이 중단되거나 뒤늦게 개통되는 경우가 많았다. 소련 시기 건축된 대표적인 지하철로는 모스크바 지하철이나 레닌그라드 지하철, 키예프 지하철, 타슈켄트 지하철, 민스크 지하철, 하르코프 지하철등이 있다. 다만 고속철도망의 발달은 느렸다. 소련에서 고속철도의 필요성을 인지해서 1984년에 ER-200라는 고속철도 자체는 개통되었기는 했으나, 기존선을 그대로 이용하는 방식이었고, 차량을 대량으로 양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련 전역의 대도시에 투입되지 못하여 모스크바-레닌그라드에서 운행하는 정도에 그쳤으며 그나마 운행편수도 1주 1왕복에 그쳤다. ER-200은 2000년대까지 운행되었지만, 2000년대에 삽산으로 교체되었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아프로시욥이라는 고속철도를 개통하게 된다. 물론 구소련 나머지 국가들의 고속철도망 개통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인 건 덤이다.


3. 여담[편집]


  • 자동차 가격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싼 경차인 자포로제츠는 일반인의 1~2년치 봉급 수준이었다. 중형차인 라다 지굴리는 3-4년치 봉급, 대형차인 가즈 볼가는 구입하려면 5~6년치 봉급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들이 평범하게 구입하기는 힘들었다.[4]

  • 사실 소련은 생활비가 낮고 평균 저축률이 높아 소비패턴만 보면 최소한 1970년대에 1가구 1대를 기록한 일본과 비슷하게 자동차가 대중화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5] 그럼에도 자동차 생산량이 수요량보다 부족하다 보니 재고가 없어 신청을 한 뒤 몇 년 정도 순번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거기에다가 수입차는 공산권이나 제3세계 국가에서 생산된 제품을 제외하면 수입이 제한되어있었고, 공산권에서 생산된 차라도 중고차는 1985년 이전까지 수입이 제한되어있었다. 이렇게 국산차로는 수요를 벌충하기에 모자랐고 수입차의 수입도 제한되어 있었으니 자가용 자동차의 보급률이 그에 비례해 떨어졌다.[6] 이러다보니 사회초년생들이 자동차를 소유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차를 소유하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잡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사회초년생들은 수령하는 데 몇 년씩 걸리는 자동차를 사는 것보다 쉽게 사서 탈 수 있는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7]따라서 차를 빨리 구하고 싶은 사람은 보통 중고차를 구입해야 했다.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중고차 매매가 엄청나게 활성화 되었다.[8]

  • 그러나 오토바이는 비교적 일찍부터 대중화되어서 서민들의 보편적인 교통수단으로 취급받았고, 노면전차지하철, 무궤도 전차같은 대중교통망이 잘 깔려있던 대도시, 중도시와 달리 대중교통망이 빈약한 지방 소도시와 농어촌 지역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또는 별장을 오갈 때나 여행을 갈 때에도 버스를 전세 내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 항공의 경우 소련 민간항공부가 아에로플로트라는 이름으로 소련 전역의 민간항공노선을 관리하여 운영했다. 당시 국토가 넓었고, 포장도로를 깔기 쉽지 않은 오지대가 많던 소련 특성 상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찍부터 항공교통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항공기 값이 너무 비싸서 지위가 있던 사람들이나 오지 거주자들이 주요도시로 드나들때 이용하던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후 항공기 표값인하 및 제트기 보급으로 1960년대부터 대중교통 수단으로 널리 애용되었다. 다만 해외로 나가는 노선은 정치적 망명 등을 고려하여 쉽게 이용하기 어려웠고, 1달에 1번꼴로 사고가 일어났을 정도로 항공사고가 심심치 않게 벌어졌기 때문에, 철도 이용률이 여전히 높았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3-11 19:09:46에 나무위키 소련/교통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트라반트는 정말 자가용이 급한 사람이 샀다. 드넓고 험한길이 많은 소련의 운전 환경에서는 트라반트가 힘을 못썼기 때문.[2] 이 당시에는 고속도로 통행요금이 완전 무료였던지라 당국 입장에서 도로 건설로 수익을 창출한다는 개념이 낯설었던 이유도 있기는 했다. [3] 당시 유일하게 인구 100만명에 육박했던,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지하철이 건설될 계획이었으나, 지반 문제와 현지인들의 반대 등으로 무산되었다.[4] 그래서 당시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은 대부분 당 간부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계층인 경우가 많았다.[5] 비슷한 사례로 한국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고급차 1대가 아파트 1채 값에 달하는 금액이었고, 서민차로 출시한 대우 티코도 첫 출시 당시인 1991년에 약 300만원~400만원대였는데 당대 저임금 노동자들의 1년 봉급보다는 조금 높은 수준이니 큰 차이가 난다고 보기는 힘들었다.[6] 자가용 1대를 구할려면 10년씩이나 걸린다는 농담도 실제 현실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7] 오토바이 가격은 1987년 기준으로 신제품은 직장인 몇달치 급여 수준이면 살수있었다.[8] 아니면 복권 경품으로도 자동차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 경우 순번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서 크게 쓸 일 없는 돈 보다는 대부분의 당첨자들은 돈보다는 자동차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