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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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История экономики СССР

1. 개요
2. 들어가기에 앞서
3. 소련 극초기
4. 신경제정책
5. 전시공산주의적 산업화
6. 해빙기
7. 침체기
9. 종말
9.1. 경제 붕괴의 원인에 대한 쟁점
9.1.1. 자원의 저주로 인한 붕괴?
9.1.1.1. 긍정론
9.1.1.2. 부정론
10. 뒷이야기
11. 기타
12. 참고 서적


1. 개요[편집]


소련 경제는 유럽에서 연구하던 사회주의와는 다소 차이가 있으며, 칼 마르크스가 제시한 공산주의 이론을 소련 실정에 맞게 바꾸었기에(마르크스-레닌주의)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많았다.

소련 경제력의 원천으로 흔히 공업화, 산업화, 과학 기술을 말하고 실제로도 1930년대에서부터 1960년대까지는 이들 산업이 소련 경제성장에 큰 역할을 해냈지만 1970년대를 전후하여 코시긴 개혁 실패, 기존 계획경제의 한계와 낮아진 노동생산성 등으로 인해 성장률이 정체되며 기존의 중공업 위주의 경제성장 전략이 한계를 맞았다. 비슷한 시기에 석유 및 가스가격이 급등하면서 소련은 막대한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로 짭잘한 재미를 보긴 했으나 소련의 경제체제 특성상 달러가 경제개발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2. 들어가기에 앞서[편집]


소련 경제를 설명하기 앞서 사회주의가 운영되는 최소한의 원리를 간단하게나마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가 오늘날 알고있는 자본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생산수단을 소유한 소유자(자본가, 지주, 사업자)가 노동자를 고용해 생산품을 만들고, 노동에 대한 대가를 노동자들에게 지불한다.
  • 소유자는 가격을 책정해 이를 시장에 판매해서 이윤을 얻는다.
  • 소유자는 생산품을 판매해 얻은 이윤으로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거나, 질을 향상시키는 등 자기 재량으로 처분한다.
  • 이렇게 소유자가 행하는 경제활동을 통해 각자 이윤을 추구하고, 여기에 추가적으로 규칙(법이나 규제 등)이나 지원이 필요할 경우 정부가 이를 중재한다.

여기서 사회주의가 제기한 문제는 '생산자는 물건을 생산했음에도, 생산품에서 얻는 보상을 결정할 수 없다'라는 문제였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소유자가 재량으로 생산품에서 얻는 수익이 소유자의 재량대로 쓰일 뿐, 실제 물건을 생산한 생산자에게 정당하게 돌아가지 않는 착취적인 현실을 지적했다. 또한 자본가들은 판매경쟁에서 노동에 들어가는 원가를 절감시키면서 원가 경쟁력을 확보, 노동자를 더욱 착취해 결국 물건을 소비할 노동자를 줄게 만들어 자본주의 경제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마르크스가 살던 19세기 영국은 정말 비참한 노동환경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문제의 핵심이 바로 당시 유행하던 극심한 빈부양극화와 1920년대를 강타한 경제대공황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타파되어 새로 거듭날 것이며,[1] 노동을 통해 생산품을 만들어내는 생산자, 즉 노동자가 권력을 쥔 사회를 완성될 것이라고 서술했다.

여기서 사회주의의 기본 원리는 이론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논리를 핵심적으로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자본가들이나 지주, 개인사업자가 소유하고 있던 생산수단(공장, 농장 등)을 개인이 아닌 사회(개인이 속한 집단, 예를 들면 조합 또는 국가)의 소유로 한다. 이를 사회화(Socialization)라고 한다.
  • 노동자들이 노동을 통해 생산물을 만들어 내면, 해당 생산수단을 보유하고 있는 사회(또는 국가)에서 가격을 책정해 생산물을 판매한다.
  • 해당 생산물이 누군가에게 거래되어 '수익'을 거두면, 해당 생산물을 통해 얻은 '수익'을 사회(또는 국가)에서 노동자들에게 분배한다.

자본주의에서는 해당 생산수단을 보유, 생산물의 가격을 책정 및 분배하는 역할을 '자본가'에서 '사회' 또는 '국가'가 맡는 것이 사회주의 경제 원리의 핵심이였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만약 학생들이 조별과제를 통해 각자 과제에서 맡은 역할을 수행(=노동)하고, 이를 최종적으로 제작(=생산), 발표해(=판매) 점수를(=수익) 받는다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학생들은 여기서 규칙에 따라 해당 과제에 부여된 점수를 평등하게 일괄적으로 부여받거나, 개별적으로 기여도를 평가해 점수를 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 오늘날 기업 중 협동조합(Cooperative)이 이와 가장 비슷하게 운영되고 있다.

여기서 현실사회주의(Real Socialism)는 이런 생산수단의 사회화(Socialization)를 주로 '국유화(Nationalization)'를 통해 추구했고, 이렇게 국유화된 생산수단을 국가가 독점적으로 관리하면서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생산활동을 주도했다. 즉, 국가가 모든 경제활동을 결정했다. 이런 요소 때문에 현실사회주의는 국가사회주의(State Socialism)라고도 불렀다. 나치가 스스로를 부른 이름인 민족사회주의와는 엄연히 다른 말이다.

3. 소련 극초기[편집]


마르크스는 생전 공산주의 혁명이 영국과 독일같은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산업국가에서 일어날 것이라 보았지만, 정작 사회주의 국가가 가장 먼저 성립된 곳은 다름아닌 유럽에서도 가장 후진적인 정치 및 경제체제를 가졌던 러시아였다.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멘셰비키볼셰비키의 갈등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 이론에서 주장한 대로 정통적인 자본주의 과정을 완성한 뒤 사회주의를 추진하자는 온건파가 있었다. 반면 현재 러시아의 사정으로는 사회주의를 먼저 완성한 뒤 체제 내에서 자본주의 과정을 소화하면서 사회주의를 완성시키자는 혁명파는 급진적인 혁명을 추구했다. 사회민주당 온건파는 2월 혁명 이후 임시정부와 연합하면서 러시아 공화국 성립에 참여, 체제 내에서 사회주의 여론을 반향시키는 대중정당 노선으로 나갔고, 반대로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롯한 혁명파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혁명조직으로써 철저한 준비를 통해 10월 혁명과 적백 내전을 겪으면서 승리할 수 있었다.

비록 레닌은 혁명에서 승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반대파가 한 둘이 아니었다. 우선 임시정부를 뒤집으면서 왕당파, 우파 등의 세력과 척을 지게 되었고, 이후 다른 좌파정당이 주도하던 제헌의회 해산,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으로 인해 다른 좌파세력과도 대립하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신생 공산주의 정부는 내전 과정에서 농민들에게서 일방적으로 식량을 징발했고, 그 결과 농민들이 저항하면서 일어난 탐보프 반란 등은 독가스를 사용할 만큼 저항이 극심했다.


4. 신경제정책[편집]


1922년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는 러시아 내전에서 어렵게 승리했다. 하지만 적백내전 이후의 러시아는 독소전쟁 이후 소련보다도 엉망진창이었고, 소련 정부는 일단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어떻게 해서든 내전 전 수준으로 회복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소련이 채택한 방법은 바로 자본주의 도입이었다.

1921년 3월에 개최된 제10차 러시아 공산당 대회에서는 기존의 일방적인 농산물 징발을 식량세로 교체했다. 1923년에는 단일 농업세가 도입되어 다양한 현물세를 화폐로 대신하게 되었다. 농업세는 농산물 징발보다 두 배 이하로 낮았고, 특히 주로 쿨락같은 부유농민에게 부담되어 가난한 농민은 좀 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 소련 농업은 협동조합 형태로 조합화되어 처음으로 기업화되었으며, 농가에서는 개별 생산 대신 협동 생산으로 바꾸어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28년 말 약 2,800만명이 협동조합에 참여하게 되었다.

농업뿐만 아니라 공업, 상업에도 생산협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정부에서는 네프만(Нэпман)이라 불리는 사기업가들에게 중소 공업이나 상업 기관들을 임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비록 작업계획이나 구체적인 세부 사항은 정부기관들이 정했지만, 네프만들은 실제 기업에서 이루어지는 생산활동을 정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 개인에게 20명 이하의 고용을 가진 사업체 설립이 허용되었고, 그 결과 1920년대 중반에는 공업제품 20%에서 25%가 이런 사기업에 의해 생산되었다.

소련 정부는 경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외국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실감했고, 그 결과 1922년 이탈리아 라팔로에서 독일과 조약을 체결, 2천명 이상의 독일 공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초빙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비가 제한되면서 우회수단을 찾기 위해 소련 내에서 생산하는 방법을 택했기에 서로 이득인 셈. 1929년 중반 소련은 27개의 독일 회사 및 15개의 독일 회사와 협정을 체결했고, 1929년 말에는 40개 이상의 미국회사들과 협력했다. 실제로 레닌이 실시한 신경제정책은 큰 효과가 있어, 러시아 경제는 이 기간 내에 서서히 회복했고, 특히 농업부문은 1925년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비록 신경제정책은 1930년대부터 서서히 산업화 계획으로 대치되었지만, 훗날 1980년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중국의 경제 개혁, 개방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5. 전시공산주의적 산업화[편집]


1924년 레닌 사후 소련의 새로운 권력자로 집권한 스탈린은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스탈린은 당시 레닌의 유력한 후계자였던 트로츠키에 반대하는 당내 정치인들을 끌어모아 집권에 성공했지만, 언제라도 이들이 자신의 정적으로 돌아서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당시 공산당 지도부에는 10월 혁명에서 붉은 군대를 창설해 승리를 이끌어 낸 레프 트로츠키, 신경제정책에서 농업정책의 입안자였던 니콜라이 부하린과 10월 혁명 이전부터 레닌의 신임을 얻었던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등 정치, 경제적으로 쟁쟁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스탈린은 이런 정치적 공로를 세운 인물들에 비해 줄곧 당 내 실무조직에서만 일했었기에 상대적으로 정치적 입지가 부족했었다. 이는 스탈린이 정치적으로 불리한 위치를 만회하기 위해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배경이 되었다.

당시 스탈린이 추진하려던 산업화 계획의 핵심은 산업화(Industrialization,индустриализация) 및 집단화(Collectivization, солективизация)였다. 당시 소련 경제는 쿨락이나 소규모 자영농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이들 농업 경제만으로써는 자본주의 경제와 같이 발전하기 어려웠다. 스탈린이 새운 경제계획의 핵심은 집단농장을 통해 곡물을 저렴하게 공급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추어 얻은 이윤으로 다시 산업에 투자하는 식이었다. 이는 산업화를 단기간 내에 급격히 발전시킬 수 있지만, 이를 위해 곡물 가격을 일방적으로 낮추어 농민들을 희생해야 했다.

특히 쁘띠브루주아라고까지 평가되던 자영농들은 스탈린이 추진하던 산업화 계획에 적대적인 존재였다. 이 무렵 쿨락이 받은 탄압은 정말 극심해서, 본인뿐만이 아니라 가족이 쿨락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숙청 대상이 되거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당연히 자신들이 애써 가꾼 생산물을 그대로 뺏기게 생긴 농민들은 가만히 앉아서 내주지는 않았고, 자기 생산물을 불태우거나 먹어치우는 식으로 저항했다.

가축이 그레먀치 로크(Гремячий лог)에서 매일 밤 도살되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기 무섭게 약한 양의 외마디 울음소리, 돼지가 죽을 때 내는 가느다란 소리, 그리고 송아지의 음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콜호스에 참가한 농민들도, 개인농들도 모두 가축을 살해하였다. 종우[2]

는 물론이고 황소, 양, 돼지, 심지어 암소까지도 도살되었다. 그레먀치의 뿔 있는 가축은 이틀 밤 사이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개들은 내장을 끌고 마을로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땅광과 헛간은 고깃덩어리로 가득 찼다. 협동조합들은 18개월 동안이나 창고에 있던 약 200푸드[3]의 소금을 이틀만에 팔아치웠다. '죽여라, 그것은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죽여라, 그들은 어쨌든 그것을 고깃덩어리로 생각할 것이다', '죽여라, 콜호스에서 당신은 고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음험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리고 농민들은 가축들을 죽였다. 그들은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어댔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모두 배앓이를 하였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삶고 구운 고깃덩어리로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입가에 기름칠을 하고, 마치 장례식 전날 밤처럼 딸꾹질을 해댔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먹는 것에 취해버린 듯, 올빼미처럼 눈만 끔뻑거렸다.

- 미하일 숄로호프, 개척되는 처녀지 중


이렇듯 농민들의 저항이 극심했음에도, 소련 정부는 의도적으로 자영농을 박멸하기 위해 농산물 착취를 극대화했고, 그결과 홀로도모르같은 대규모 기근 사태가 벌어져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중공업 위주 산업화가 가장 큰 빛을 발휘한 때는 바로 2차대전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공업은 역사가들의 평처럼, 전선에 필요한 무기를 대량으로 공급하는데 최적화된 체제였다. 덕분에 소련군은 독일의 압도적인 기갑, 항공전력에 맞설 T-34같은 무기들을 빠르게 대량으로 투입해 독일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렇듯 스탈린이 단시기 내에 완성하려 했던 소련의 공업화는 전시체제에 최적화된 경제였다. 이는 소련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반대로 이후 소련 정치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진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중공업화가 소련의 경제력을 크게 끌어올리는데에는 효과적이었으며 적어도 여러 사회지표도 향상되었다. 이 당시에 공교육이 완전히 대중화되면서 문맹이 퇴치되고 무상의료도 실시되면서 평균수명이 크게 증가하였다. 허나 높아지는 경제력에 비해 경공업의 발달은 미진했고, 성장률에 비례해 소득수준이 급속히 늘어나지도 않았기에 소련이 세계2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와중에도 농민들은 저임금에 시달리며 곡물생산량의 증산은 미진해졌고, 도시민들도 임금수준이 썩 높지 않은데다가 대다수가 단칸방에서 온가족이 생활하였으며 소비재도 부족하고 얻을수있는 소비재도 그 수준이 높지 않은 등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그에 걸맞게 성장하지 않았다.


6. 해빙기[편집]


2차대전 이후 소련은 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사실 당장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는 일이 시급했다. 우선 독일과 5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소련 주요산업이 완전히 초토화되어버렸고, 그 결과 전후 피폐해진 산업을 복구시켜야 했다. 1947년 소련은 배급제를 마치고 다시 기존의 계획경제 체제로 돌아가려 했다.

여기에 2차대전 이후부터 자본주의 국가였던 미국과 본격적인 패권경쟁, 즉 냉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소련은 이념경쟁이나 세력경쟁에서 미국과 패권을 겨루기 위해 균등하거나 우월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당장 2차대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당장 자본주의 경제의 선두주자인 미국을 균형을 맞추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소련 지도부는 자국이 2차대전 이후 얻은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얻은 영향력을 팽창시키기 위해 미국과 경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 소련은 군사력에 집중적인 투자를 계속했다. 당연히 이러한 군사비로 낭비되는 국가 자원으로 인해 먹고, 입고, 자는 소비재 산업은 별로 나아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이 때부터 소련 경제는 조금씩 맛이 가기 시작했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제1서기로 집권한 흐루쇼프는 1956년 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스탈린을 정면으로 비난했다. 이후 스탈린 시절 투옥된 정치범들을 복권시키고 체제 비판을 제한적으로나마 허용하면서 정치적으로 보다 온건해지려고 변화를 꾀했다. 경쟁자인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우선 소비재 위주의 경공업을 중심으로 소련 경제를 복구하려 했지만, 얼마 못 가 중공업을 중시한 흐루쇼프와의 경쟁에서 밀려 실각했으나, 정작 말렌코프 실각 후 흐루쇼프도 경공업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이 당시 소련 지도부들은 누가 지도부가 되더라도 전체적인 경제력에 비해 일반인들의 소비수준이 너무 낮았던지라 누가 되었더라도 경공업에 신경썼을 것이기는 했다.

흐루쇼프는 전후 피폐해진 경제 향상을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이 시기 소련 전역에서는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의 아파트의 건축이 이루어졌으며,[4] 경제적으로도 경공업에 상당한 포커스가 맞추어졌다. 이는 어느정도 성과을 올려서 봉급수준이 대폭 올라갔고 주거환경도 개선되었는데 스탈린 시대에는 고도경제성장에도 농민들은 저임금에 시달려야했고, 도시민들도 임금수준이 썩 높지 않기는 매한가지인데다가 대다수가 방 하나에서 온가족이 생활했던데 반해 농민들의 소득이 대폭 올라가고 도시민들도 주거환경이 어느정도 개선되어서 대다수가 방 2~3개가 있고 개인용 화장실과 주방이 있는 아파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다만 이 아파트들이 외형적인 디자인에는 일체 신경 쓰지 않았고 집도 썩 넓지는 않았기에 혹평이 없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전에 비해서는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던것은 사실이었고, 다차도 대대적으로 보급되어 주말마다 별장에서 휴식과 여가를 즐기는 것이 소련인들의 일상이 되었고, 사회통제조치와 검열도 어느정도 해체해서 스탈린 시절에 비해서 사회분위기가 어느정도 느슨해지고 자유로워졌으며 식생활도 풍족해져서 이때부터 소련은 고기를 매일같이 먹는 나라가 되었다.

특히 흐루쇼프는 전후 피폐해진 민심을 살리기 위해 농업을 개선시키려고 애썼고, 옥수수를 심거나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를 개간하려 하는 등[5]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특히 농업을 개선하려고 했던 흐루쇼프의 노력은 트로핌 리센코라는 사이비 과학자를 만나면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이르렀고 인민들에게는 미국보다도 많은 양의 우유, 버터, 육류 등을 제공하겠다고 했던 무리한 약속도 지키지 못 해 지지도 점점 잃어 갔다. 1957년에는 15년안에 미국을 추월하겠다고 선언하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이 무렵 국제적으로는 중국과 외교적으로 틀어지거나, 베를린 장벽을 쌓거나, 쿠바 미사일 위기를 일으키는 등등 정치적으로 무모한 모습을 보인 결과 당내 보수파는 이를 구실로 1964년 흐루쇼프를 축출시키고 그 자리에 브레즈네프를 앉혔다.

7. 침체기[편집]


흐루쇼프 실각 이후 집권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전임자의 실책을 해결하기 위해 부분적인 성과급제도를 골자로 하는 경제개혁(일명 리베르만 개혁 혹은 코시긴 개혁)을 1965년 단행했지만, 근본적인 체제개혁이 없는 상태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6] 하지만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의 전철을 밟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저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려고만 했고, 결과적으로 이 무렵 소련은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이게 되었다. 당시 소련은 외적으로는 미국보다 더 많은 핵무기를 가진 거대한 강대국이었으며, 명실상부한 제2세계의 선두주자였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소련은 점점 더 무리한 경쟁으로 병들어가는 경제를 그대로 놔둔 채 단지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다. 일명 "침체의 시대(era of stagnation)", "회색의 시대" 였다. 특히 이 무렵부터 소련의 경제성장은 사실상 한계를 맞이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소련 경제 전체가 1. 중앙통제식 계획경제가 더이상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았으며, 2. 군수공업과 국방비의 비중이 지나치게 증가되었고, 3. 낮아진 노동 생산성으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효율을 심각하게 깎아먹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 가지 문제점은 결국 소련 경제를 완전히 좀먹기에 이르렀다.

소련 공업의 전반적인 생산과 유통은 비효율적인 중앙결정 의사구조 때문에 무척 경직된 상태였다. 그 때문에 늘어나는 구매력을 생산성이 따라잡지 못해서 지하경제가 활성화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인 자동차만 해도 배급을 신청하여 대기명부에 이름을 올린 후 몇 년 정도를 기다린 뒤에야 간신히 받아가는 식이었고, 그 품질도 미국, 유럽, 일본 차에 비하면 형편없었는데, 주택이나 다른 고급 상품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군비에 대한 투자는 그 열매를 맺어 소련의 핵전력은 1970년대 후반 즈음 미국을 추월했지만, 강력한 핵미사일이 정작 인민들의 복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동시대 소련 핵미사일이었던 R-36 미사일이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을 때, 정작 비누, 치약 같은 생필품이 자주 떨어져서 수시로 상점 앞에서 줄을 서는것이 일상이 되었으며,[7] 1939년에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기는 했지만 1970년대가 되어서야 텔레비전이 대중화되었을 정도였다.[8][9] 당시 소련인들의 구매력은 주택요금과 아파트 관리비, 전기요금, 가스요금, 전철비, 버스비, 항공비 등 기본 공공요금과 생필품값, 교통요금이 몹시 싼데다가 교육이나 의료는 무료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반적인 소득수준에 비하면 크게 높았기는 했지만, 정작 소비재의 수준은 그 구매력을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소련은 의외로 TV광고를 생각보다 일찍 시작한 나라로 1967년에 TV 광고를 시작했는데[10] 이러한 물품부족 현상때문에 품질이 좋은 물건은 재빨리 팔리다보니 광고란 품질이 나쁜 물건을 팔아먹기 위한 수작이라는 인식을 소비자들이 가지게 되어서 TV광고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게 되었고 덕택에 광고효과도 엄청나게 떨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인 1970년대에 두 차례의 석유파동이 벌어지면서 세계 1위의 산유국이었던 소련에 대량의 경화가 유입되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게 대부분 곡물이나 식량같은 서방제 소비재였다는 것이다.[11] 당연히 이것이 체제 개혁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진 못했으며, 정작 서방제 물품을 공급받은 인민들은 이를 환영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소련제 물품들이 얼마나 구린지 알게 되는 역효과도 있었다고.

그리고 소련은 사회간접자본 구축에 있어서 라스푸티차라는 최악의 지형 조건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때문에 장거리 화물 수송은 철도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전국적인 사회간접자본 확충 자체에 관심이라도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어서 미국의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같은 대규모 고속도로 체계나 항공 물류 체계를 적극적으로 갖추는데 소극적이었다.[12] 이 시기 소련은 바이칼-아무르 철도 건설등 인프라 투자를 아예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그 속도는 지지부진하였고, 지형적인 악조건 때문에 전국적인 단위의 도로망 구축 및 관리는 상당히 부실해 철도에 의존해야 했다. 이 때문에 소련의 화물철도 수송량 자체는 당시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였지만, 간선철도에서 먼 소련 지역 내 물류 운송은 극도로 비효율적이 되었고, 이는 물자공급의 지연으로 이어져 경제사정을 악화시켰다.

또한 소련 정부는 1970년대와 80년대 당시 서방에서 훗날 컴퓨터로봇으로 이어질 자동기계와 정보산업에 투자하는 동안 산업 자동화나 정보산업같은 전자 산업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13] 그 결과 산업화 시절 지어진 인력 시스템을 그대로 활용하는 비효율이 이어져 1980년대 초에는 잉여직이 약 3,200만 명 정도 남게 되었다. 소련에서 PC컴퓨터가 처음 출시된 것은 엘렉트로니카 BK가 나온 1984년이였지만 가정용 컴퓨터가 활성화된 것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IBM, HP와 기술교류가 활발해진 1989년 이후였다. 사실 저축률이 높아서 은행에 도는 자금은 많았기 때문에 제대로 활용했다면 재빠른 인프라의 구축도 가능했지만 이렇게 구축이 늦었던데에는 관료들의 첨단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던데다가 비용문제를 제기했던 당대의 전문가들이나 산하기관들의 미적지근한 대응으로 재빨리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그 만큼 소련의 침체를 깊게 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소련의 비효율적 생산-유통구조와 맞물려 취약해진 소비재 산업이 국민들의 소비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암시장같은 지하경제, 일명 '제 2경제'가 점점 더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 예로 농업에서는 소련 전체 경작지의 3%에 불과한 개인 소유의 텃밭(별장)에서 생산해 거래되는 작물이 소련 농업 전체 생산량의 25%를 차지하였으며 육류는 40%를 차지했다. 1980년대 중반 무렵 소련 내에서 약 1,500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암시장에 참여할 정도였다. 사실상 이미 이 때부터 소련 경제는 심각한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1982년에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후에 집권한 유리 안드로포프는 이러한 소련 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했다. 안드로포프는 저조한 생산성의 향상과 빈약한 경공업을 개선하기 위한 노동규율 강화[14] 및 경제개혁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조치로 1983년에는 2%대로 정체되었던 경제성장률이 1985년 4% 가량으로 잠시동안 회복세를 보였다. 그러나 유리 안드로포프는 재임 2년만에 사망하였고 안드로포프의 후임인 체르넨코가 집권했지만 브레즈네프파였던 체르넨코도 별 다른 조치없이 1년 만에 고령으로 사망하여 추가적인 경제개혁조치가 진행되지 못하며 경제개혁은 지연되기만 하였다.


1960-70년대 소련의 생활수준을 보여주는 영상. 1970년대 말, 모스크바는 800만 명에 육박하는 인구를 자랑하는 거대한 대도시였다.


8. 페레스트로이카[편집]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맞이한 침체기를 직시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1979년부터 지속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군비에 쓰이는 예산이 크게 늘어난 상태였고 추가적인 경제개혁은 성과없이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경제개혁을 시행하려 한 순간부터 어려운 난관에 부딪쳤다. 1986년 1월 사우디 아라비아가 유가를 두고 영미권 석유업체와 치킨게임을 벌이면서 석유 가격이 급락하여 경화 획득에 차질이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1986년 체르노빌 사고가 터지면서 국가 자원의 거의 절반 이상이 해당 사고에 소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이전부터 침체되던 경제는 더욱 침체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런 상황을 개혁하기 위해 개인사업체의 설립을 허용했다. 또한 기존의 소련 무역부(Министерство торговли СССР)가 독점하던 무역을 민간에도 조금씩 허용했다. 특히 1987년 6월에는 외국 투자자들로 하여금 소련 내 산업시설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합동사업법을 통과시켰다. 처음에 소련 내에서 외국인 투자지분은 49%로 제한되었으나, 이후 경제교류가 늘어나자 규제를 철폐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소련 내 사업체를 운영하거나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진 첫번째 맥도날드 입주는 이러한 경제협력의 산물이었다. 소련 내 첫 맥도날드 지점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당시 공산당 기준으로도 젊은 신진인사에 속해 당 내 입지나 장악력이 부족한 편이었다. 이 점을 이용해 로마노프같은 보수파가 압박하자, 고르바초프는 보수파를 견제하기 위해 개혁 속도를 가속(Ускорение, 우스코레니예)시켰고 이는 체제 유지에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이 무렵 민족주의가 분출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지방정부가 연방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길 거부하거나, 중앙정부의 생산지시를 따르지 않으면서 소련 내 경제활동은 완전히 마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동유럽에서도 개혁이 시작되어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소련은 더 이상 냉전으로 대표되는 패권주의적 정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소련은 말그대로 낡은 정치, 경제 체제를 완전히 고쳐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하는 기로에 도달하게 되었다.


9. 종말[편집]


1990년 소련 경제는 빈사 일보 직전이었다.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동유럽 국가들이 이탈하면서 사회주의 경제는 붕괴되었고, 노동자들은 점차 돈이 안 되는 직장 대신 각자 개인사업에 뛰어들어 돈을 벌기 시작했다. 또한 고르바초프의 경제개혁도 효과를 내지 못하고 국영기업들이 국영상점에다가 적게 납품하고 농민시장에다가 몇배의 가격으로 비싸게 물건을 내다파는 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면서 유통구조가 왜곡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인민들은 줄을 더 길게 서야했고, 소련 정부로써도 국가재정의 추가적인 지출을 강요하게 되었으며 물가상승을 초래하고야 만것이었다 비록 통화량이 증가하면서 전반적인 구매력이나 저축률은 크게 늘어났지만 돈은 썩어넘쳐나는데 그걸 제대로 쓰질 못해서 문제점이었던것이다. 결국 1990년 소련은 배급제를 부활시킬 정도로 심각한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고, 발트 3국을 비롯한 각 공화국에서는 독립을 선포하는 등, 전반적으로 국가적인 해체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당시 소련 총리였던 발렌틴 파블로프는 1991년도에 50루블과 100루블 지폐를 무효화하는 방식의 개혁을 시행하여 지하경제를 다시 장악하고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지만, 이미 지하경제와 유탁한 공산당 고위간부들이나 기업가들은 전부 루블을 달러로 사재기해 재산을 축적한 상태였고, 생필품난을 완화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미 소련 중기부터 성장 조짐을 보이던 지하경제는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나라를 장악했고, 국영상점에서 물건을 살려면 긴줄을 서야했고 줄을 서기가 싫으면 암시장에서 비싼돈을 주고 물건을 사야했다. 이러한 오랜 경기침체에 질린 소련인들은 중앙정부의 무능에 불만을 토로했고, 이를 이용해 공화국 정부에서 독립을 부추기면서 소련 내 독립 여론은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현실을 뒤집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보리스 옐친과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등 공화국 지도자들과 협상, 신연방조약을 통해 소련을 존속시키려 했다. 하지만 1991년 8월 19일 새벽, 고르바초프가 조약 체결을 기념하기 위해 휴가를 간 틈을 타 모스크바에서 쿠데타가 벌어지면서 이러한 개혁 노력을 완전히 무산시켰다. 그 결과 소련은 70년의 역사를 뒤로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9.1. 경제 붕괴의 원인에 대한 쟁점[편집]



9.1.1. 자원의 저주로 인한 붕괴?[편집]


일각에서는 소련의 경제가 지나치게 석유에 의존했으며, 70년대 고유가로 인해 벌어들인 외화를 자국의 군수산업과 중공업에 투자해왔다가 80년대 저유가로 한순간에 몰락했다는 학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아래는 이 쟁점에 대한 찬반론을 다루고 있다.

9.1.1.1. 긍정론[편집]

Е.ГАЙДАР: Собственно, дата краха СССР, когда история была уже сыграна, она хорошо известна. Это, конечно, никакие не Беловежские соглашения, это не августовские события, это 13 сентября 1985 г. Это день, когда министр нефти Саудовской Аравии Ямани сказал, что Саудовская Аравия прекращает политику сдерживания добычи нефти, и начинает восстанавливать свою долю на рынке нефти. После чего, на протяжении следующих 6 месяцев, добыча нефти Саудовской Аравией увеличилась в 3,5 раза. После чего цены рухнули. Ну. Там можно смотреть по месяцам — в 6,1 раза.

가이다르: 소련이 무너진 날은... 충분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날은 당연히 벨라베자 조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8월의 사태가 일어났던 날도 아니며, 그 날은 1985년 9월 13일이었습니다. 그 날은 사우디 아라비아 석유부 장관이었던 아흐메드 야마니가, 사우디 아라비아는 석유생산 억제전략을 중지하며, 석유 시장에 자국의 생산량을 늘리겠다고 선포한 날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다음 6개월 동안 사우디 아라비아의 석유 생산량은 3.5배나 증가하였습니다. 그 날 이후 (석유) 가격은 무너졌습니다. 몇 달 단위로, 6.1번이나요.

Е.АЛЬБАЦ: В 6 раз они рухнули?

알바츠[15]

: 6번이나 무너졌다고요?

В 6 раз. Если смотреть долгосрочную перспективу – в 4 раза. После чего, собственно, история СССР была полностью сыграна.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4번입니다. 그날 이후, 당연히도, 소련의 역사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예고르 가이다르, 에호 모스크바와 진행한 인터뷰, <제국의 붕괴> 중 출처


9.1.1.2. 부정론[편집]

단순히 소련이 자원에 의존하여 몰락했다는 주장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다.

1. 소련의 주요 석유수출 대상국에 대한 고려가 없다. 소련의 주요 수출품이 원유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주요 수출국은 미국과 유럽이 아니라 같은 공산권이었다는 점이다. 지금의 입장에서는 석유시장이 하나이므로 세계시장의 석유값이 동일하지만 당시에는 이원화된 시장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서방과의 무역과 달리[16] 공산권 간 무역은 경화결제 비율이 높지도 않았다.

2. 계획경제에 대한 고려없이 시장경제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소련의 경제는 계획경제이므로 매년 GDP가 일정하게 성장했다. 만약 석유가격이 소련 재정에 영향을 미쳤다면 적어도 석유가격이 4배가 뛴 제1차 오일쇼크 때에는 최소한 상당한 흑자를 주어야 하고, 198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증산에 의한 석유가격 하락에는 그에 따른 적자가 발생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소련의 경제는 1970년이나 1980년이나 1990년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석유수출을 통해 얻은 수익을 중공업이나 군수품에 투자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자유시장경제와 WTO체제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수출을 통해서 얻어진 외화를 다른 곳에 투입하거나 외화보유고를 높여서 이를 기반으로 재정적자를 매꾸거나 등은 지금과 같은 국제무역시장에서나 먹히는 이야기이다. 소련의 입장에서 미국의 화폐를 얻어도 어차피 이 외화보유고를 쓸데가 없다. 차관을 들일 일도 없고, 국채를 발행할 일도 없다. 기껏해야 수입품에 대한 결재정도에 쓰일 뿐인데, 수입품이 주로 소비재이다보니 그렇게 많이 들이지도 않았으며, 수입도 모든 것이 국가의 주도에서 운영된다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3. 자원의 저주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소련의 규모는 단순히 자원의 저주로 설명하기에는 국가 규모가 크다. 단순히 자원만을 판매했다면 인정되나 공산권에서 최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한 나라는 동독과 소련이었다. 소비재에 대한 생산은 적었으나 군수용의 경우에는 상당히 높은 품질을 자랑했다.꼬우면 장기복무하라는 건가. 기본적으로 제조업의 규모가 있는 나라이다. 또한 소련은 자원의 저주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되는 방안을 모두 수행했다. 인적자원개발을 위한 교육투자, 신산업에 대한 국가적인 투자 등인데 소련은 이 모든 것을 다 했다. 소련은 전국민 대상 고등학교 의무교육을 1960년대에 이루어냈고[17], 고른 배분과 기술투자도 진행되고 있었다. 흔히 소련은 소비재에 대한 투자가 전혀 없었다고 인식되나, 소련도 소비재에 대한 투자도 진행하고 있었다. 자동차의 개선과 생산량 상승을 위한 다양한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18]

최근 논의되는 소련의 경제실패의 요인으로는 사고의 경직성이 제시되고 있다. 소련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제도가 상부에서 채택되면 그 제도에 대해 무결성을 강조한다. 소련체제는 완벽한 체제라는 절대적인 신념이 있었기에 발생한 문제였는데, 이로 인해서 기존에 도입된 제도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오류가 발생하면 제도의 오류를 개선하기 보다는 그 제도를 시행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향이 많았다. 그래서 과거에 이미 그 문제점이 발견되었으나 오히려 수정되지 않고 수십년을 지속하는 경우가 종종이 있었다. 절대적인 체제의 완벽성을 추구하다보니 그러한 한계가 조금씩 쌓이고 쌓여 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실패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불필요한 경제개혁이 문제라는 설도 있는데, 실제로 소련에서 경제개혁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으나 중국과는 달리 좋은 냉전기에 실시된 개혁 정책 중 좋은 결과를 낸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주장으로는 소련의 만성적 소비재 부족[19]계획경제의 한계로 평가하기도 한다. 계획경제 소련에서는 소비재를 포함해서 모든 것의 생산량을 중앙당국에서 결정했는데, 문제는 이 소비재의 양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빵과 같이 매일매일 쓰이는 소비재는 그 수량을 예측하기가 쉽지만 위에서 언급한 치약과 샴푸와 같은 소비연한이 긴 소비재는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치약의 경우 사람마다 소비연한이 다르다. 그래서 이러한 소비재가 부족한 것이 아니었는지 평가한다. 그리고 소련에서 비공식경제 특히 텃밭경제가 활성화된 이유도 이러한 계획경제에서 기인한다고 보는데, 공장과 달리 농업에도 생산량을 정해놓기 때문이다.

다른 설로는 단순히 과도한 군비경쟁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소련의 군사비 지출이 20% 에서 50%까지 집계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지간한 나라면 바로 망할 수준이다. 소련이 군사비를 과도하게 지출하게 된 이유는, 이렇게 하지 않고는 서방진영과 군사력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방비를 퍼부었기에 소련은 많은 군사분야에서 서방에 우위였으며, 해,공군력만 예외적으로 열세였다.[20]

10. 뒷이야기[편집]


오늘날 많은 러시아인과 구 소련 국가의 일부 국민들은 복지가 보장되었던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하지만 개혁되지 않은 낡고 비효율적인 경제로 그들이 경쟁하고자 했던 자본주의 열강들과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비록 소련 후반기 내내 저축률은 높았고,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에는 민간의 저축자금이 6천억 루블에 달했기 때문에 제대로 써먹는다면 소련 붕괴를 막고 소련이 붕괴될지라도 러시아 경제의 회복에 유용하게 쓸수있었겠지만 막상 그 막대한 저축자금은 제대로 활용하기도 전에 옐친의 삽질로 엄청난 인플레이션의 폭풍을 맞이하며 휴지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1990년대 러시아 경제가 막장화되는 주요 요인이 되어버렸고 이는 현재의 러시아의 저축률이 낮게 만든 요인이 되어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11. 기타[편집]




12. 참고 서적[편집]


  • 러시아 경제사, 타티야나 티모시나, 한길사, 2006년.
  • 소련경제사, 알렉 노브, 창작과비평사,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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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 (민주 국가의) 법치 제도에서 정한 민주선거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면 민주사회주의가 되고, 반대로 체제 자본주의 내에서 사회주의 요소를 도입하려는 사상이 사회민주주의가 된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 후자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스웨덴을 운영한 사회민주당 정권이 있다.[2] 농가에서 소를 키우기 위해 종자 소.[3]3톤![4] 소련에서 아파트 건설은 1930, 40년대부터 조금씩 있어왔지만 어디까지나 대도시 수준이었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성없는 고층의 '소련식 아파트'는 대부분 1970년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전국적으로 건설되었다. 아파트 항목 참조.[5] 이 때 사회주의 노력영웅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고려인 김병화도 이 캠페인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6] 자본주의 경쟁을 도입하여 생산 구역이나 생산자들의 단결과 자체적인 경쟁을 유도하고 초과 생산을 달성하면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소련이 의도한 것과는 반대로 단결이나 상부상조를 하지 않고 기업소들이 성과를 날조해서 인센티브를 타내는데 급급했다.[7] 참고로 이 생필품 부족 문제는 지방 소도시가 심각했다. 소련의 유통구조가 대도시로 생필품과 식료품을 우선적으로 공급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대도시 지역은 식료품이나 생필품 부족은 덜한편이었지만 지방 소도시에서는 공급에서 후순위로 밀려나있었기 때문에 생산지가 아닌 곳은 소시지나 치즈 같은 필수식품조차도 상점에서 보기 쉽지 않을때가 있었던 것. 그래서 소도시 사람들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등 대도시로 가서 부족한 생필품이나 소도시에서 맛보기 쉽지 않은 식품들을 사오고 그랬다.[8] 소련에서는 텔레비전을 중요한 대중매체로 인식한 시기도 미국보다 늦은 편이었던데다가 소련의 국토가 너무 넓고 사람이 안 사는 지역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텔레비전 송출망의 확대가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덧붙여 1960년대 이후로 텔레비전 공장이 대거 건설되면서 텔레비전이 대중화 되었기는 했다만 텔레비전의 품질은 높다고 말하기는 그랬던데다가 AS서비스같은것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의하면 1980년 무렵 모스크바의 화재 원인 중 두 번째로 높았던 것이 텔레비전 폭발이었다고. 여하튼 그렇기 때문에 소련TV가 낮시간대에 방송하지 않는 것(채널에 따라 다르지만 평일에는 12시에서 14시 내지 14시부터 16시까지가 쉬는시간이었다. 유튜브에 올려져있는 방송자료들을 볼때 라디오 방송을 수중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도 TV폭발을 막기 위한 당국의 배려라는 농담이 소련인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도 했고 TV방송이 끝나기 직전에 텔레비전을 끄시오라는 자막이 효과음과 같이 뜨기도 했다.[9]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 TV 구조를 살펴보면 이해가 가능한데 이 당시의 텔레비전은 스위치를 켠다고 바로 켜지는것이 아니라 20초~1분 정도 예열을 시킨다음에야 화면이 나오는 방식이었다.(한국도 마찬가지로 TV방송 초기부터 1970년대 중반에 이코노TV가 출시되기 이전까지 TV를 볼려면 스위치를 켠다음 예열시간을 기다려야했다.) 이런 방식의 경우에는 화재의 위험성을 무시할수가 없었기 때문에 고열에도 어느정도 버틸수있도록 설계가 되어야하지만 소련에서 제작된 텔레비전들은 이런 설계가 영 부실했던지라 산지 몇년간은 문제가 없었다한들 조금이라도 낣았다하면 TV가 펑 터지거나 불에 타기 좋았던것이었다. 그래도 이런 소식들이 많이 전해진 모양인지 중간에 TV과 과열되면 꺼서 삭히는 식으로 수십년간 잘 써먹은 가정도 많기는 하다.[10] 참고로 네덜란드의 TV광고 시작년도가 1967년 프랑스가 1968년이며, 1990년대에야 TV광고를 개시한 북유럽 왕국들보다 월등히 빨랐다.[11] 펩시가 소련에 진출한 것도 이 시기다.[12] 현대경제에서 물류는 생산, 공급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다. 경부고속도로도 아직 한국의 경제 수준이 열악했던 시기에 좀 무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물류 교통망을 원활히 해야 할 필요가 있어 건설한 것이다.[13] 사실 인터넷과 비슷한 네트워크망을 연결하려는 계획 자체는 있었다. 이른바 "오가스"로 그대로 컴퓨터 네트워크망을 통해서 소련의 중앙경제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아이디어로, 연구시설은 물론이고 각 지방의 공장, 농장들까지 컴퓨터로 연결해서 물자를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것인데, 물자가 중간에서 빼돌려져서 시장으로 가는 경우가 허다해서 정작 정가에 살수있는 제품이 부족한 소련경제의 비효율성을 생각한다면 나름대로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참고로 첫 계획은 1959년에 나왔다. 하지만 당시에는 너무도 생소한 개념이라서 뒤엎어졌고, 1970년대에 미국의 알파넷 계획이 입수되면서 오가스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지만 부처간 갈등이 빚어진데다가 경제학자들이 반대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추진동력을 잃어버렸다. 이후로 여러번 재추진이 이루어졌지만 오가스 개발자가 1982년에 사망하면서 결국 기초망 정도만 깔리는 수준에 머물렀고, 결국 소련이 멸망할 때까지도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14] 고르바초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경찰들을 시켜 무단 결근자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해 직장에 잡아넣었다고 한다. 훗날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금주 캠페인도 이 시기 노동규율 강화에 기초한다.[15] 예브게니야 알바츠(Евгения Альбац). 진행자이다.[16] 당시 소련은 소련 루블과 달러의 교환이 어려웠기 때문에 석유 대금을 주로 경화로 결제받았다.[17] 대한민국은 2021년 고등학교 의무교육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18] 게다가 소련은 공산주의 진영의 리더로서 다른 공산권 국가에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체제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공산권을 확장하는것이 목표였고, 그렇다면 자본주의 진영에서 생산되는 재화, 서비스와 경쟁해야만 했기에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투자는 사실상 필연적이었다.[19] 소비재 뿐만 아니라, 농업과 공업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농업 생산량은 그 넓은 흑해 연안 흑토 지대를 두고도 부족해 매년 미국으로부터 곡물을 수입하는 지경이었으며, 소련 말기 노동자 1인당 생산성은 미국의 60%에 불과하였다.[20] 이조차도 미 해군과 해자대를 제외한다면 유럽 전체의 해군을 총동원해도 소련 해군에 어렵다고 평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