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말리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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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대
3. 중세
4. 근대
4.1. 이탈리아령 소말리아
5. 보호령 및 신탁 통치기
6. 독립
6.1. 바레 정권
6.2. 소말리아 혁명 그리고 소말리아 내전
6.3. 오랜 내전과 재통합의 시도
6.4. 현재의 동향



1. 선사시대[편집]


소말리아 지역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했다. 기원전 9000년에 그려진 동굴 벽화가 소말리아 반도 북부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벽화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여겨지는 라스 갈의 벽화이다. 석기 시대 동안 도이아 문화와 하르게이사 문화가 이 지역에서 번창했다. 아무래도 최초의 인간이 발견된 케냐 바로 위다 보니 최초의 이주지일 가능성이 있다.


2. 고대[편집]


고대의 피라미드 구조물, 무덤, 도시 유적, 와르가데 벽 등 소말리아에 산재한 유적들이 소말리아 반도에 정교한 고대 문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에 따르면 이 문명은 아직 해독되지 않은 자체적인 문자 체계를 갖고 있었으며, 기원전 2세기경까지 고대 이집트그리스 문명과 무역을 했다. 이러한 증거들은 고대 푼트 왕국이 소말리아에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푼트인들은 향료, 흑단 등은 물론, 금, 상아, 피혁 등 인접국에서 들어온 상품들로 무역을 하였다.

고대 소말리인들은 기원전 3세기~2세기 경에 낙타를 길들였다. 고대에는 모실론, 오포네, 말라오, 문두스, 타바에 등 소말리아 지역의 도시 국가들이 페니키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고대 그리스, 파르티아 등과 활발한 교역 네트워크를 연결하였다.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서 고대 소말리인들은 '베덴'이라는 배를 사용하였다. 사실 소말리아예멘 모두 오늘날에 모두 사이 좋게 막장화 돼서 그렇지 고대에는 둘 다 중계 무역으로 매우 부유한 지역이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세계 최강대국이던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황제인 캄비세스 2세가 사절단을 보냈던 "에티오피아 장명족"[1]이 바로 이 소말리아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 의하면, 캄비세스 2세가 보낸 사절단이 에티오피아 장명족의 왕을 만난 자리에서 에티오피아 왕은 "나는 캄비세스 2세가 정의로운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나라한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은 다른 나라들을 멋대로 침략하여 정복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페르시아에 정복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아주 긴 활을 가져와 페르시아 사절단 일행들한테 당겨보게 했는데, 아무도 그 활의 시위를 당길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에티오피아 왕은 "너희 페르시아인들이 그 활을 당겨볼 수 있을 후에야 에티오피아를 정복해 보아라."고 조롱했다.[2] 사절단이 돌아가서 그 말을 전하자 분노한 캄비세스 2세는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려 페르시아군을 보냈으나, 도중에 보급이 끊겨 대부분의 병사들이 굶어죽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3. 중세[편집]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의 이슬람의 전파는 아라비아 이슬람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초기의 박해 받은 무슬림들은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악숨 왕국으로 도피하였다. 보호를 인정 받은 무슬림 중 일부는 아프리카의 뿔 지역의 몇몇 지역에서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위해 정착하였다고 알려져있다.

7세기선지자 무함마드의 무슬림들이 비무슬림 씨족이었던 쿠라이시족에 맞서 승리하였다. 소말리아의 상인들과 선원들은 교역 상대들이 전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고, 주요한 교역로인 지중해홍해가 무슬림 칼리프들의 지배를 받게 됨에 따라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교역을 매개로 삼아 이슬람은 소말리아 해안 도시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불안정한 아라비아 반도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아랍인들이 소말리아 해안 도시로 이주하여 소말리아 반도의 이슬람 확장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모가디슈동아프리카 해안의 이슬람 중심지가 되었다. 소말리아에 정착한 페르시아 상인들은 몸바사, 잔지바르와 교역하였으며, 금을 얻기 위해 모잠비크에 식민지를 세웠다. 북부 소말리아에서는 아달 술탄국이 초기 단계에 있었다.

1150년에서 1250년에 걸친 100년간은 소말리아 역사에서 이슬람의 역할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아랍의 지리학자·사학자였던 야쿠트 알 하마위와 이븐 사이드 알-마그리비는 소말리아가 이 시기에 융성한 무슬림 국가였다고 기록하였다. 아달 술탄국은 이 시기 구아르다푸이 곶에서 하디야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 상업 제국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아달인들은 이후 발흥한 이파트 술탄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그 영향 아래에서 번성했다.

이팟 술탄국의 수도는 오늘날의 소말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제일라였다. 이팟인들의 군대는 1270년 쇼아 왕국을 지배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때문에 무슬림인 이팟인들과 기독교도에티오피아솔로몬 왕조 사이에 지배권을 둘러싼 수 차례의 전쟁이 빚어졌다. 이 전쟁은 결국 이팟의 술탄인 사아드 앗딘 2세가 제일라에서 죽음에 따라 솔로몬 왕조의 승리로 끝났다. 사아드 앗딘 2세의 일가들은 예멘의 왕궁으로 도피하였다. 그 외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소말리아 남부에는 아주란 술탄국이 있었다.

14세기에 성립한 아주란 왕국 시대에는, 메르카, 모가디슈, 바라와, 호비오 등의 국가들과 그 국가들의 항구들이 아라비아, 인도, 베네치아, 페르시아, 이집트, 포르투갈 등에서 오는 배들로 번영하였다. 15세기 모가디슈를 통과한 바스쿠 다 가마는 모가디슈를 여러 층의 집과 큰 궁전들, 많은 모스크들이 있는 커다란 도시로 묘사하였다. 16세기, 두아르테 바르보사(Duarte Barbosa)는 오늘날의 인도인 캄바야 왕국에서 온 배들이 모가디슈에 와서 천, 향료와 금, 상아를 거래한다고 기록하였다. 바르보사는 또한 고기, 보리, 밀, 말, 과일 등이 풍부한 해안의 시장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다. 말라카 해협과의 교역 관계는 15세기에 만들어졌다.

4. 근대[편집]


근대에 접어들면서 점점 유럽인들이 해상 무역을 장악해가면서 예멘 지역과 소말리아 일대의 부와 교역 범위는 지속적으로 축소되었다. 일단 와르상갈리 술탄국, 바리, 고브룬 왕조, 호비오 술탄국 등, 아달과 아주란을 계승한 국가들이 소말리아에 성립되었다. 이들은 이전의 소말리아 지역 국가들이 수립한 전통을 이어나갔다. 고브룬 왕가의 3번째 술탄인 유수프 마하무드 이브라힘은 고브룬 왕조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의 군대는 동아프리카의 상아 무역과 지역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또한 무스카트 술탄국의 위투와 예멘 왕국의 술탄들 등 인접한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브라힘의 아들이자 그를 계승한 아흐메드 유수프는 19세기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하나였다.

동아프리카를 장악한 오만 제국이 멸망하자 소말리아는 해상 무역 수입이 크게 축소되면서 결정타를 맞는다. }1884년 열린 베를린 회담 이후 유럽의 열강들은 아프리카를 식민화하기 시작했다. 소말리아는 프랑스, 영국이탈리아에 의해 지배되게 되었다. 이에 동요한 데르비시국의 지도자였던 사이드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은 아프리카의 뿔 전역에서 지원을 받아서 식민화에 저항하는 전쟁을 시작하였다. 데르비쉬 왕국은 1920년 대영 제국의 침공에 멸망하였으며,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4.1. 이탈리아령 소말리아[편집]


전간기 파시즘의 발흥은 이탈리아 왕국의 정책 변화를 이끌었다. 동북부의 술탄국들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계획에 따라 '대소말리아'에 통합되도록 강요되었다. 소말리아는 1923년 이탈리아 왕국군이 점령하고, 이 지역은 이탈리아령 소말리아가 되었다. 파시스트 정부는 모가디슈가 위치한 베나디르 지역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통치하였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1935년, 로돌포 그라치아니를 시켜 에티오피아 제국을 침공하여 강점하였다. 국제연맹 차원에서 이 강점을 승인하지 않았으나 국제연맹 차원에서 실효성 있는 제재 조치를 취하진 못했다. 하지만 미국, 소련 등 강대국 상당수가 이탈리아 왕의 에티오피아 황제 참칭과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을 승인하지 않았다. 점령은 완전하고 안정적이지 못하여 지속적으로 저항이 발생했으며, 1941년까지도 에티오피아 일부 지역이 황제를 지지하는 저항 세력에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는 잠시 동안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점령하였으나, 결국에는 영국에 패배하고 소말리아 전역은 영국 점령하에 들어간다.


5. 보호령 및 신탁 통치기[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은 영국령 소말릴란드와 이탈리아령 소말리아를 보호령으로 지정하였다. 1949년 11월, UN은 10년 내에 소말리아의 독립이 이루어진다는 조건 하에 이탈리아령 소말리아에 대한 이탈리아의 신탁통치를 승인하였다.[3] 이 조건은 소말리아 청년 연맹(Somali Youth League)와 다른 신생 정치 조직들이 제안하였다. 영국령 소말릴란드(오늘날의 소말릴란드 지역)은 1960년까지 영국의 보호령으로 존속했다.

이탈리아가 UN의 권한 아래에서 소말리아 지역을 통치하였기 때문에, 신탁 통치 조항은 소말리아인들에게 정치 교육과 자치 경험을 증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런 기회는 영국령 소말릴란드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두 지역 사이의 경제 격차와 정치 경험 차이는 두 지역을 통합하는 데에 심각한 걸림돌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령 소말릴란드였던 북서부의 지부티에서는 1958년 소말리아 공화국에 들어갈 것인가를 정하는 국민 투표가 진행되었다. 국민 투표 결과 프랑스와의 지속적인 협력을 선호하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국민 투표에서는 프랑스인들에 의한 부정 선거도 행해졌다. 지부티는 1977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여 핫산 굴레드 압티돈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6. 독립[편집]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1960년 6월 26일 독립하였고, 옛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도 5일 후 이를 따랐다. 1960년 7월 1일, 두 지역이 통합하여 소말리아 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초대 대통령으로 아덴 압둘라 오스만 다르가 취임한다. 1961년 국민 투표를 통해 소말리아의 새 헌법이 비준되었다. 독립 후 지부티를 비롯한 소말리인의 거주지까지 소말리아로 합병시키려 하는 대소말리아주의를 채택함에 따라 에티오피아와의 마찰을 빚었다. 1967년에는 후에 소말릴란드의 대통령이 되는 무함마드 하지 이브라힘 에갈이 총리로 취임하여 에갈 내각이 성립하였다. 이때 에티오피아 및 케냐와의 관계가 잠시 개선되었다.

1969년 10월 15일, 북부의 라스 아노드 마을을 방문한 셰르마르케가 경호원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이 치러진 1969년 10월 21일,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 쿠데타는 군장성인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가 이끌었다. 바레는 국명을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으로 고쳤다.


6.1. 바레 정권[편집]


1969년에 셰르마르케 대통령을 암살하면서 쿠데타로 집권한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 장군은 자기 부족 위주의 정책을 펼치며 22년간 장기집권하기에 이르고, 냉전 때라 미국이든 소련이든간에 독재자라도 자기 편이면 OK 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바레 장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이 쿠데타는 소말리아가 기존의 친 소련 정권에서 친미, 친중국 정권으로 바뀐 사건이었고, 친소련 사회주의 노선을 걷던 에티오피아와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었다.

바레 장군이 오랫동안 독재를 하긴 했지만, 초기 8년간 서방의 지원으로 고속도로도 놓고 발전소, 항구, 공항, 축구장, 그리고 상하수도 시설도 확충하는 등 그럭저럭 경제적으로 성장을 해나갔으며, 농축산물도 자급자족되었다. 이 시기가 현대 소말리아 역사상 가장 안정되었던 시기였다.[4]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 에티오피아가 공산화되자 바레 정권은 에티오피아 남동부 쪽에 살고 있던 소말리인들을 끌여들여 정권을 공고히 해나가려는 목적에서 대 소말리아 주의를 내세우며 에티오피아를 침공, 소말리인들이 다수였던 오가덴 지역에 대한 병합을 시도하려고 했는데, 이로 인해 벌어진 오가덴 전쟁에서 쿠바소련이 개입하면서 처절하게 깨졌다.

이후에도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 후유증으로 소말리아는 기울어가기 시작하여 경제 상황은 나빠지기 시작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이자율까지 급상승하여 갚아야 할 외채까지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결국 소말리아는 1981년 국제통화기금(IMF)에게 손을 벌렸는데, 그 대가로 농업보조금과 축산보조금을 대대적으로 삭감하거나 없애버리고 값싼 수입 농산물이 대거 밀려들어오면서 농촌은 황폐화되었다. 유목민들 역시 가축을 기르기 위해 쓰이는 의약품을 더 이상 싼 값에 공급 받지 못하면서 엄청난 타격을 입으며, 소말리아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혼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도 바레는 자신의 부족에게만 권력을 몰아주는 정책을 펴고 다른 부족들은 철저하게 정치에서 배제시켰으며 자기 배를 채우는 데 열심이었다. 소말리아 내 타 부족들의 불만은 증폭되었고 바레는 지지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또한 슬슬 냉전도 끝나가는 상황에서 미국도 매몰차게 바레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었고, IMF와 세계은행도 소말리아가 채무를 갚을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철수하면서 바레 정권은 더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소말리아의 다른 부족들과 정치 집단들은 통일소말리아회의(United Somali Congress)를 결성하여 내전을 일으켰고 1991년 1월에 바레 정권을 전복시켰다.


6.2. 소말리아 혁명 그리고 소말리아 내전[편집]


1991년은 소말리아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해였다. 바레 대통령은 에티오피아의 지원을 받은 남부와 북부의 씨족들에 의해 축출되었다. 소말리국민운동(SNM)과 북부의 씨족 지도자들 사이의 회담 이후, 옛 영국령 소말릴란드 지역은 1991년 5월 소말릴란드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인상적인 점은 3개월 간의 회의 끝에 다수의 부족들이 자발적 무장해제를 시행하여 이후 남부가 끝없는 내전에 빠진것과 달리 어느정도 안정된 사회 구축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독립 상태이지만, 현재까지도 다른 국가로부터 승인을 받지는 못하였다.

1991년 1월, 대통령 알리 마흐디 모하메드가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통합소말리의회(United Somali Congress, USC)의 군사 지도자인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 소말리국민운동(Somali National Movement, SNM)의 지도자 압디라흐만 아흐메드 알리 투르[5], 소말리애국운동(Somali Patriotic Movement, SPM)의 지도자인 아흐메드 오마르 제스가 마흐디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소말리아의 각 부족이나 정치집단들도 바레를 몰아내겠다는 목표만 같았지, 그 외에는 완전히 따로 국밥이었던 것이었다.

이로 인해 USC, SNM, SPM과 소말리민주운동(Somali Democratic Movement, SDM), 소말리국가연맹(Somali National Alliance, SNA) 사이에 분열이 빚어졌고, USC 내부에서도 내분이 일어난다. 한편 아직 대통령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던 바레는 1992년 중반까지 소말리아 남부에 잔류하였다. USC 내부에서 빚어진 내분은 모가디슈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이들 단체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면서 그나마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소말리아의 농업과 식량 분배 체계는 완전히 붕괴하고 만다. 기근으로 인해 3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92년 평화유지 작전인 UNOSOM I(United Nations Operation in Somalia)을 시행한다. 계속되는 폭력과 내전으로부터 남부 소말리아의 안정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국제연합은 군사연합을 구성하였다. 문제는 전쟁을 막기 위해 결성된 병력이 겨우 500명뿐이었다. 1,000만이 넘게 살며 남한의 6배가 넘는 크기의 나라를 단 500명으로 사태를 중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연히 지역 군벌들은 없느니만 못한 UN군을 무시하고 계속 총질을 해댔고, 거기다가 반군 사이의 평화 중재도 말아먹는 등 여러 삽질이 겹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소말리아의 상황이 점점 막장이 되는 것을 눈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가 싶었지만, 소련이 망한 후 세계의 경찰을 자부하던 미국이 소말리아 사태 해결에 나섰다. 1992년 11월 미국은 UN에 사태 해결을 위해 다국적군 결성을 요구하고, 이에 미국이 솔선수범하여 참여하겠다는 뜻을 전했고, UN의 회원국들은 환영했다.

즉시 다국적군이 결성(Unified Task Force, UNITAF)되고, UNOSOM I의 임무는 UNITAF로 이양된다(Operation Restore Hope). UNITAF는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려 37,000명이라는 대규모의 병력을 자랑했고, 미국은 그 중 25,000명을 파견했으며, 병력 유지에 필요한 무기, 식량 등등을 모두 미국에서 댔다.

이런 대규모의 병력을 건드렸다간 자기 부족이 그날로 초토화될 것을 깨달은 여러 부족 무장단체들은 UN군의 요구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리스토어 호프 작전은 순조로이 진행되었고, 소말리아 내 식량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 UNITAF는 긴급 사태 해결을 위한 임시 부대의 성격이 강했으며, UNOSOM II에게 임무가 다시 이양되며 UNITAF는 해체된다.

그러나 아이디드는 UN의 개입을 그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UNOSOM I 체제 때부터 아이디드는 UN의 개입을 반대했으며,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할 경우 UN에 선전포고를 하겠다 제정신이 아니다. 고 으름장을 놨으나, UNITAF 당시에는 UN의 세력이 너무 강하여 짜져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참다가는 자신의 군벌이 그냥 스스로 무너질 판이었고, 결국 아이디드는 UN에 대한 적대 행위를 선포한다.[6][7] 1993년 6월, 아이디드의 군대가 UNOSOM II에 연관된 모가디슈의 파키스탄군 기지를 공격하여 80명의 사상자를 낸다. 10월에는 블랙 호크 다운으로 유명한 모가디슈 전투에서 19명의 미군이 사망하였다.

UNISOM II 체제에서 소말리아 지방 군벌과 UN군의 충돌이 늘어나면서 UN군의 작전 횟수가 급증하였는데, 이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늘어나면서 소말리아 민중들과의 사이까지 나빠지기 시작했다. 소말리아 민중들은 UN군이 이 헬게이트 상황을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고, UN군도 그럴 목적에서 파견되었지만 UN군은 UN군에 친화적인 군벌들의 활동은 묵인하고 지원하였는데, 이 친 UN 군벌도 소말리아 민중들에게는 아이디드군과 같이 악마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결국 국제 연합군은 1995년 3월 완전히 철수하기에 이른다. 아이디드는 1996년 모가디슈에서 사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디드 사후에도 소말리아는 전국에서 여러 중, 소규모의 군벌, 부족 집단들이 충돌하는 혼란상이 이어졌다.


6.3. 오랜 내전과 재통합의 시도[편집]


그리고 2000년 과도국민정부(Transitional National Government, TNG)가 설립되고, 아브디카심 살라드 하산이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된다. 그러나 아이디드의 부대였고, 아이디드 사후에도 강력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SRRC가 TNG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내전은 지속되었고, 부패와 정치 혼란까지 겹쳐 3년 사이에 총리가 4번이나 교체되는 등 사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2004년에는 케냐 나이로비에서 과도연방정부(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 TFG)가 설립되었다. 과도연방정부는 국제 사회에서 승인을 받은 유일한 소말리아 정부였다.

그러나 내전의 혼란상을 틈타 세력을 키운 이슬람법정연합(Islamic Courts Union, ICU)이 과도연방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슬람법정연합은 당시 온건파 무슬림들의 연합으로[8] 이슬람이라는 강력한 종교적 구심점을 통해 힘을 키웠으며 수도 모가디슈를 포함한 남부 소말리아를 대부분 장악했으며, 이 지역에서는 과도연방정부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았다. 2006년 모가디슈 전투에서 이슬람법정연합이 대승을 거둠으로써 모가디슈의 지방 군벌이 거의 다 소멸되었다. 이로 인하여 모가디슈지역은 치안이 강화되어, 당시 이슬람법정연합의 지도자 샤리프 셰이크 아흐메드에 의해 국제공항을 다시 개방하고, 해적들의 근거지를 차례차례 장악하여 해적들의 난립도 방지했다.

문제는 이슬람법정연합은 미승인국, 그것도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은 과도연방정부와 대립하는 이슬람 성향 정부였다. 안 그래도 구성원의 대부분이 기독교 관련 종교를 믿는데 오가덴 전쟁 때를 기억하던 에티오피아는 대놓고 이슬람 세력이 소말리아를 통치하게 된 것에 심히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에티오피아는 해외 망명 정부인 과도연방정부의 군대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소말리아 국경에 침투한 과도연방정부 군대로 매일같이 교전이 일어나며 애써서 잡아놓은 치안이 다시 막장이 되게 생겼으니, 이슬람법정연합은 배후에 있는 에티오피아를 강력히 비난하였다.

하지만 국제적 인증을 받은 정부와 대립하는 미승인국+이슬람이라는 굴래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고, 결국 2006년 12월 20일 에티오피아가 소말리아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결국 전쟁으로 정부가 붕괴할 위기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알 카에다를 비롯한 외국 무슬림 세력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오히려 이게 화근이 되어 2개월 뒤인 2007년 2월엔 아프리카 연합까지 가세하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국제 사회의 지원하에 에티오피아가 주축이 되어 아프리카 전체가 합심하다시피 해서 두들겨 팬 결과 결국 이슬람법정연합 정부를 붕괴하고 만다.

하지만 에티오피아군은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말소할 수 없었는데, 결국 에티오피아군이 미승인국이긴 했지만 이슬람을 중심으로 어느정도 안정화된 정부를 또 무너뜨린 꼴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대체할 에티오피아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TFG는 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되어 있어 소말리인들의 불만이 대단히 높았고, 당연히 소말리인들은 이슬람법정연합을 계속 지원하였다. [9]결국 2009년 에티오피아군이 물러가고, 이슬람법정연합은 과도연방정부와의 평화협상을 통해 내전을 종식시키려 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외국 무슬림 세력의 도움을 받을 때 같이 강경파 무슬림도 세력이 급증했고, 온건파들이 세속적인 사유로 '이도교'의 지원을 받는 TFG에 고개를 숙이는 것을 극도로 분노했다. 이런 움직임에 반발하여 뛰쳐나가 만든 그룹이 바로 알-샤바브, 히즈불 이슬람 같은 소말리아 극단주의 단체였다.

안 그래도 강력한 이슬람 근본주의 사상에 공권력이 없는 소말리아의 특성상 알-샤바브는 소말리아 남부 지역을 대부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어린 소녀에게 폭탄 조끼를 매고 자살폭탄 테러를 시키는 등 개막장 행보로 이슬람주의자들도 알-샤바브를 강력하게 비난하였고, 소말리아 민중들의 지지도 잃었다. 2011년, 동아프리카 대기근이 닥쳤는데 알-샤바브는 인도주의 구호단체들을 제국주의 십자군의 첨병으로 몰아 쫓아냈으며, 심지어 이슬람계 구호 단체들마저도 이교도와 결탁했다(...)며 쫓아냈다. 이에 소말리아 민중들은 목숨을 걸고 난민 보호소가 있는 케냐나 아프리카 연합군이 점령 중인 모가디슈 구역으로 탈출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무기를 구입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케냐에 찝적거려 관광객을 납치해가자 분노한 케냐는 2011년 10월 소말리아 정부군과 협력해 알-샤바브 소탕 작전을 실시하였다.(Operation Linda Nchi).

이 소탕 작전은 큰 성과를 거둬 모가디슈에서 알-샤바브군이 철수하고 남부 내의 본거지가 소탕되는 등 알 샤바브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반면 이슬람법정연합은 온건 이슬람정당으로 재편되어 TFG의 야당이 되며 서서히 갈등은 소강국면에 들어갔다.


6.4. 현재의 동향[편집]


다시 치안이 안정되자 2012년 8월 20일, 21년만에 드디어 임시정부 체제를 해체하고 정식정부 체제로 들어가게 되었다. 치안이 불안하고 부족들간의 갈등을 우려해 정식적인 선거 과정으로 뽑은 것이 아니라 UN이 부족당 티켓을 배분하여 지명되는 방식으로 의회를 구성하였기에 부패가 판치는 정부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나, 소말리아 민중들은 "그래도 총 안 쏘는 게 어디냐"라며 환호하는 중이다. 오랜 내전에 얼마나 지쳤으면...

그리고 2017년 치러진 소말리아 대선에서 모하메드 압둘라히 파르마조 전 총리가 하산 셰이크 모하무드 현 대통령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지난 25년 동안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던 소말리아가 비로소 완전한 형태의 중앙 정부의 모양을 갖추게 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2017년 10월 수도 모가디슈에서 최악의 폭탄 테러가 일어나 최소 230여 명이 사망했다. # 이번 테러 공격의 배후를 자처하는 세력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소말리아의 이슬람 급진 무장단체 알 샤바브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실제로 알 샤바브는 모가디슈 등 소말리아 남부에서 거점지들을 잃은 이후 폭탄 테러 공격 등 비정규전 방식으로 공격 전술을 바꾸어 모가디슈에서 여러 번 테러를 벌인 바가 있었다.

2021년 7월 30일 남부 주바랜드주(州)에서 10명의 축구선수를 태운 버스가 폭발해 4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선수들을 실은 버스 안에 폭탄이 장착됐던 것으로 보고 조사가 진행 중이다. #

2021년 10월에 실시되는 소말리아 대통령 선거에#소말리아의 첫 여성 대통령 선거 후보가 출마를 선언하였다.

2022년 2월 19일에 소말리아 동부의 도시 벨레드웨인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해 최소 15명이 사망했다.#

3월 23일에 소말리아 중부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 30명 이상이 사망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소말리아에서의 새 아프리카연합 평화유지군(ATMIS)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고 AP·AFP 등이 보도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여파가 소말리아에 영향을 끼치며 150만명의 소말리아 어린이들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 10월 29일에는 차량 폭발 테러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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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들이 아주 긴 활을 무기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에티오피아 장궁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지금의 에티오피아는 특정 국가가 독점하는 국호지만, 본래 에티오피아는 '흑인의 땅', 즉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통칭하던 표현이라서, 고대 기록에 등장하는 에티오피아가 어디를 가리키는지 파악하려면 문자 그대로 오늘날의 에티오피아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게 아니라 문맥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2] 페르시아 사절단은 이 활을 가지고 페르시아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아무도 이 활을 당겨볼 수 없었지만 캄비세스 2세의 동생만이 혼자서 이 활의 시위를 어느 정도 당겨보았다고 한다.[3]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추축국이 모든 식민지를 상실한 이래 추축국에 가담한 국가가 옛 식민지를 유지한 유일한 사례였다.[4] 물론 가장 안정되었던 시기라고는 하지만 한 가지 알아둘 게 있는데, 어디까지나 지금에 비하면 나은 처지였다는 것이지, 소말리아는 가장 잘 나가던 해이자 오가덴 전쟁 발발 1년 전이던 1976년에도 1인당 GDP가 186.3달러(2023년 환율로는 약 985달러)에 불과한, 당대 기준으로도 최빈국이던 나라였다. 오죽하면 내전이 일어나기 이전인 1970, 80년대까지도 소말리아인들이 사우디아라비아알제리, 이라크, 요르단, 튀니지 같은 아랍 국가들에 외노자로 일하러 갈 정도였다.[5] 위에서 언급했듯 이 단체는 소말릴란드의 모태가 되며, 지도자인 투르 역시 소말릴란드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6] 이 시기 아이디드는 소말리아 군벌 중에서는 최대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1. 내전을 그대로 가져가면 결국은 자기가 이길 가능성이 높았다. 2. 외부에서 개입할 경우는 대부분 최대 실력자보다는 2인자, 혹은 3인자를 지원해서 의존도를 높히는 사례가 많았는 것에 주목했다. 3. 마지막으로 미국의 하우는 아이디드를 국제재판에 올려서 내전을 끝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7] 결과론이지만, 차라리 아이디드를 지원해서 내전을 단기간에 끝내버리는 것이 소말리아의 현재를 고려하면 훨씬 나았을 수도 있다. 개인적 역량이나 세력은 아이디드가 그나마 나았고, 도덕성은 어차피 전부 막장이었으니까.[8] 이 당시 이슬람법정연합은 비록 이슬람 샤리아를 채택한 강력한 이슬람주의 정부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당시 테러와의 전쟁에 눈이 시뻘개진 미국의 주장과는 달리 알 카에다와의 연계를 가지는 등의 초특급 근본주의 파벌까지는 아니었다.[9] 단적인 예로 위에 언급된 샤리프 셰이크 아흐메드에 의해 2009년 소말리아 연립정부 구성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