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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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55호
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Sosuseowon Confucian Academy, Ye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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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 교육기관 / 서원
면적
89\,975㎡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조선 중종 37년(1543)
위치





소수서원 영상
1. 개요
2. 최초의 사액서원
3. 주요 문화재 및 건물
3.1. 국보
3.1.1. 안향 초상
3.2. 보물
3.2.1.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
3.2.2.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3.2.3. 주세붕 초상
3.2.4. 문성공묘
3.2.5. 강학당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 문서



파일:소수서원.jpg


소수서원 전경


1. 개요[편집]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서원이다.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영주를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랜드마크 중 하나다. 선비촌과 같이 있으며, 몇 년 뒤에 한국문화테마파크가 들어설 것이다. 한참 더 올라가면 영주에서 제일 큰 사찰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부석사가 나올 것이다.

1963년 사적 제55호로 지정받았으며 201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서원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최초의 사액서원[편집]


1542년,[1]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이 우리나라에 고려말의 유학자 안향의 연고지에 사묘를 세워 안향의 위패를 봉안했다. 안향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왔고 후일 조선건국의 주도계층인 신진사대부의 형성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 다음 해에는 유생들을 교육시킬 학사를 건립하여 소수서원의 전신이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창건되었다. 서원의 명칭인 백운동은 주자가 세운 여산의 백록동서원을 본따 지은것으로 알려져있다.

백운동서원은 부지는 원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찰인 숙수사(宿水寺)가 자리한 곳이었다. 숙수사의 법통이 어떻게 끊겼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안향이 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였고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향의 아들과 손자까지 이 숙수사에서 수학했다고 알려져있어 적어도 고려말까지는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원 내에는 아직도 옛 숙수사의 흔적이나 석조물이 남아있고 통일신라 양식의 청동불상 25구가 출토되기도 했다.

파일:명종어필_소수서원_현판.jpg
▲소수서원 명종 어필 현판

본래 명칭은 백운동서원이었으나 1550년[2]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 중 조정에 건의하여 명종이 친필로 사액을 내리면서 현재의 명칭이 되었다. 소수라는 명칭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3]는 뜻을 담고 있다. 사액이란 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은 편액을 하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액서원이 되면 왕의 친필 현판뿐 아니라 서원 운영에 필요한 서적, 노비, 토지는 물론이고 면세, 면역 등의 혜택이 따라와서 비사액서원과는 격을 달리했다. 때문에 소수서원 이후 세워진 전국의 서원들은 경쟁적으로 사액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뛰어난 유학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초기 서원들과 달리 나중에 생겨난 서원들은 이러한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사림파의 세력 형성, 확장의 목적이 주가 되었고 이로 인해 서원의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나중에 서원철폐론이 등장할 무렵에는 무려 1,000여 개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정치를 잘했던 숙종은 사액을 남발하면서 130개가 넘는 사액서원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서원이 난립하다 보니 조정에서는 아무나 함부로 제향하지 못하게 하였고 특히 한 사람이 여러 곳에서 제향되지 못하게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자신의 연고지에 서원을 세웠고 송시열 같은 경우에는 전국에 수십 개의 서원이 존재하기도 했다. 또한 한 서원에서 여러 사람을 제향하는 일도 부지기수였으며 본래의 대상인 학문적으로 뛰어나 존경받을 만한 유학자가 아니라도 온갖 이유를 만들어붙여 그 사람을 위한 서원을 세우기도 했다.

서원의 폐단이 지속되자 결국 1741년 영조는 1714년(숙종 40년) 이후 허가 없이 세워진 모든 서원을 철거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계속 이어져 1871년에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려지게 된다. 소수서원은 가치를 인정받은 주요 47개 서원에 포함되었고 이황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4천여 명의 유생을 배출했다.

3. 주요 문화재 및 건물[편집]


서원 내부에는 안향의 위패를 모신 문성공묘(文成公廟)가 보물 제1402호, 강학당(講學堂)이 보물 제1403호에 지정되어 있다. 서원 입구에 있는 숙수사지 당간지주도 보물 제59호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도 여타 여러 유물들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 내에는 소수박물관이 조성되어 소수서원에서 보관하던 여러 유물을 보존 및 전시하고 있다.

3.1. 국보[편집]




3.1.1. 안향 초상[편집]


파일:안향 초상.jpg
안향 초상

국보 제111호. 고려 후기 문신 회헌 안향(1243~1306)의 초상화.
안향은 고려 원종 1년(126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도첨의중찬과 문하시중을 비롯한 여러 관직을 지냈다. 원나라에도 여러 차례 다녀오며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설파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알려져있다.

3.2. 보물[편집]




3.2.1.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편집]


파일:영주_숙수사지_당간지주.jpg
보물 제59호.
통일 신라 시대의 것으로 당이라고 하는 불화를 그린 깃발을 걸던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던 석재기둥이다.

3.2.2.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편집]


보물 제 485호

제작년도는 1513년(명나라 정덕 8년)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공자 앞에 길게 늘어서 안자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공자는 다른 인물보다 크게 그려 강조되었고 제자들은 사각관모를 쓰고 손에는 홀을 들고 있다.

3.2.3. 주세붕 초상[편집]


보물 제717호.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주세붕(1495~1554)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

3.2.4. 문성공묘[편집]


파일:소수서원 문성공묘 2015년 문화재청.jpg
소수서원 문성공묘의 모습
파일:소수서원 문성공묘 위패 2015년 문화재청.jpg
소수서원 문성공묘의 위패
2004년 4월 6일 보물 제1402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알려진 회헌 안향의 위패를 모신 곳. 나중에 안보와 안축, 주세붕도 함께 모셔졌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묘당현판의 글씨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것이다.

3.2.5. 강학당 [편집]


파일:소수서원 강학당 옆모습 2015년 문화재청.jpg
소수서원 강학당의 옆모습
파일:소수서원 강학당 내부 편액들 2015년 문화재청.jpg
소수서원 강학당 내부의 편액들
파일:소수서원 강학당 내부 2015년 문화재청.jpg
소수서원 강학당 내부 모습
2004년 4월 6일 보물 제1403호로 지정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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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종 37년[2] 명종 5년[3] 旣廢之學 紹而修地(기폐지학 소이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