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조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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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조귀.jpg

蕭朝貴
병음: Xiao Chaogui, 샤오차오구이
(1820년 경~1852.9)

1. 개요
2. 태평천국 가입 전
3. 태평천국 전간기
4. 배상제회
5. 태평천국 운동에서의 역할
6. 죽음
7. 평가


1. 개요[편집]


태평천국의 인물이다. 정식 칭호는 우필우정군사서왕(右弼又正軍師西王). 서왕(西王)으로 알려져 있다.


2. 태평천국 가입 전[편집]


광서성 라이빈(来宾)시 무선현(武宣县) 하마향(河馬郷) 출신. 객가 출신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묘족이라는 설도 있다.
집이 가난하여 농부와 숯구이를 업으로 삼아서 살았는데 양수청처럼 숯구이들 중에서는 세력을 갖춰서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고 한다.


3. 태평천국 전간기[편집]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풍운산이 계평(桂平) 자형산(紫荊山) 일대의 금전촌(金田村)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전도활동을 시작했을 때 가입한 것으로 추측 되는데 대략 1848년 초에 가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배상제회(拜上帝會)라고 불리는 무리에 가입한 소조귀는 자신의 입지를 크게 향상시키게 되는데 첫번째는 풍운산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배상제회가 몸집을 키우는 동안 주변의 향촌 및 지방정부와의 갈등이 잦았는데 결국 풍운산이 계평의 관아에 체포됐다. 홍수전이 이 일을 탄원하고자 양광총독을 만나러 간 사이 조직은 1인자와 2인자를 잃어서 흔들리고 있었는데 1848년 3월 3일 양수청이 갑자기 쓰러졌고 뒤이어 성령에 빙의되어 상제가 자신을 통해 말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천부하범(天父下凡)이라고 부른다.

이에 뒤질세라 소조귀 역시 비슷하게 천형하범(天兄下凡)을 주장했다. 이것은 양수청의 천부하범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신내림이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소조귀는 이 행동을 1시간 가량이나 하며 계시를 내리는 등 상당한 재주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광서성은 수많은 민간 신앙이 발달해 있었고 특히 계평은 어린아이의 몸에 신이 빙의 한다는 믿음이 통용되는 곳이었다. 또한 태평천국에는 객가인이 많았는데 객가인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광동성의 매주(梅州)[1]에서도 비슷한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경제적으로 발달하거나 미신이 많이 타파된 지방에서는 씨알도 안먹힐 이야기였고 특히 황하 북쪽에서는 먹히지 않았지만 장강 이남의 강남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전통적 가치가 통했다. 특히 낙후된 광서에서는 통하는 이야기였고 이를 통하여 흔들리는 조직을 다잡을 수 있었다. 또한 이런 의식을 본 토착 사람들은 태평천국의 교리를 생소한 기독교가 아니라 그들이 흔하게 보는 다신교적인 성격으로 받아들여 포교 역시 용이했다.


4. 배상제회[편집]


1848년 가을, 풍운산과 홍수전이 이웃 고을에 있을 때, 소조귀는 배상제회에서 지도자를 맡는다. 이 시점에서, 소조귀는 예수가 지상에 상륙했고 그를 통해 말한다고 주장했다.(천형하범) 이 주장은 이듬해 여름 홍수전과 풍운산이 지징산으로 돌아올 때 그들에게 인정받았다.[2]

예수가 빙의된 소조귀는 배상제회에 규범과 조언과 지도력을 주었다. 양수청이 그랬듯이 소조귀가 예수에 빙의되었을 때는 홍수전의 권력도 뛰어넘을 수 있었다.[3] 1848년 여름, 소조귀는 홍수전, 풍운산, 양수청, 위창휘, 석달개, 그리고 예수와 의형제가 되었다.


5. 태평천국 운동에서의 역할[편집]


소조귀는 태평천국 초기의 최고 군사 지휘관 중 하나였고 1851년 1월 11일에 태평군 전방부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태평천국이 융안(영안)을 점령한 직후에 홍수전은 소조귀를 우필우정군사에 임명했다. 12월 4일 홍수전은 소조귀의 공을 치하하며 그를 서왕(西王)으로 임명하고 팔천세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6일 후, 청의 융안을 향한 반격 중 소조귀는 부상을 입었다. 그 후로 갑자기 천형하범은 멈추어 버렸다[4]

태평군이 다오저우에 진을 치고 있던 1852년 여름 소조귀와 양수청이 지역민들의 동정을 얻어 새로 증원을 시행하자는 청원을 올렸다.[5] 이 청원은 태평천국의 종교적-민족적-정치적 삼위일체 환경을 민중의 기독교화, 소수민족인 만주족에 의한 지배체제의 청산, 태평천국의 관점에서 부패한 정부의 파괴의 요구를 통해 제공했다. 청원은 지방 신사와 세력가들의 반발을 고착화했지만 20,000명의 지역민들을 증원하는 것을 도왔다.


6. 죽음[편집]


1852년 8월 말, 소조귀는 태평천국의 기지인 천저우에서 소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창사를 점령하려 했다. 그들은 9월에 창사에 도착했고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포위가 약간 진행되는 상황에서 소조귀는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전방에 나서서 자신의 머리 위로 거대한 깃발을 게양했다. 이건 지휘관의 위치를 알려준 셈이나 다름없었고, 창사의 성벽에서 발사된 대포알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 소조귀는 부상으로 인해 9월 말 사망하고, 창사 공략은 11월에 완전히 좌절되었다. 소조귀의 죽음을 불러온 행동은 중국의 역사가들에게 "영웅주의도 아닌 '멍청한 충성심과 용기'의 또다른 예시"라며 까이게 된다.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홍수전은 그의 명성을 높이기를 계속했다. 홍수전은 또한 그에게 "우대사(雨大師)"를 추서했다. 그의 두 아들 중 하나가 이 작위를 이어받고 난징 함락 후 죽기까지 예서왕(裔西王)으로 칭해졌다. 두 아들 모두 예수의 조카이자 하느님의 손자로 취급되었다.


7. 평가[편집]


창사 전투에서 죽지 않았다면 양수청을 견제할 유일한 왕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천형하범도 멈춰 버린데다가 소조귀가 자신의 멍청한 행동으로 인해 최후를 맞았음을 생각하면 오히려 양수청에게 농락당했을 확률이 높다. 단 군대는 어느 정도 움직일 줄 아는 수준이었는지 자잘한 군사적 공적은 어느 정도 있다. 명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범장(凡將, 평범한 장수) 정도는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남왕 풍운산처럼 크게 능력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죽어서 평가하기는 어려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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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의 메이저우[2] 이때가 배상제회의 최대 위기상황인 것을 고려해야한다. 풍운산은 군중선동 혐의로 광서에 구금된 처지였고, 홍수전은 그를 석방시키고자 양광총독에게 탄원하러 가서 주 근거지인 광동을 떠난 처지였다. 즉 잘못하면 와해될 수 있는 집단을 퍼포먼스로 극복한 것이다.[3] 단 홍수전도 바보는 아니였기에 스스로를 예수의 형제라고 선언했다. 즉 홍수전은 예수의 형제이기에 하느님과 예수의 대변인(...)인 양수청소조귀 보다 높다고 위치를 다질 수 있는 것.[4]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가 빙의된 몸이 다쳤다고 예수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 다만 양수청의 압박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다.[5] 융안에서 탈출하며 태평천국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