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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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
(대월)
(야마토)

일본
일본 제국
일본국
(고려)*
(대남)
대한제국

번외
소중화 사상

* 실제 황제국이 맞는지 학계에서 논란이 있으며,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외왕내제 여부 문서에 있다.
(괄호는 외왕내제 왕조)



1. 개요
2. 바탕
3. 나라별 소중화 사상
4. 비슷한 사례
5. 로마 계승론과 비교
6. 드립으로서의 소중화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정통 한족 국가인 명나라가 망한 이후 주변국들에서 중화의 계승은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가 아니라 자신들이 그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2. 바탕[편집]


소중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중화'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현대에는 '중화사상'이 중국의 민족주의 및 패권주의와 맞물리면서 다소 폭압적인 중국제일주의 사상처럼 여겨지곤 하는데, 소중화가 언급되던 시기의 중화사상은 현대의 중화사상과는 달랐다.

이 당시의 중화사상은 말그대로 '문명권'에 속해있는지 여부를 나타내는 사상이었다. 즉, 천자 중심의 세계질서에 포함되어 있고 천자를 중심으로 세상이 굴러간다는 것을 인정하는가를 의미했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사상이 확립되고 난 이후에는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의 기틀, 다시 말해 군주가 있고 유교적 종법에 따른 계승체계를 따르고 신권과 왕권이 적절히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적절한 견제장치가 존재하는지 등도 '중화'의 조건에 포함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당시의 '중화'가 의미하는 바는 현대로 따지면 삼권분립이나 민주주의 같은 요소를 충실히 국가의 바탕으로 깔아두고 있는지 여부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북한 같이 이러한 체계가 잘 잡혀있지 않고 유명무실한 나라를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라고 까는 것처럼, 당시에는 '중화'에 편입되길 거부한 족속들을 '오랑캐'라고 부르면서 깠다.

여기서 출발한 '소중화'라는 말은 원래 중국 다음의 문명국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중화'는 중화를 가장 잘 본받는 모화국가라는 뜻으로 한족의 중화 왕조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이것이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는 '명나라가 망했으니 이제 우리가 제일의 중화국가'로 바뀌게 된다. 이런 소중화 의식은 명나라 멸망 이후 중국 주변의 조선과 일본, 베트남 등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이다. 이는 중화 문명이라는 근대 이전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핵심적이고 포괄적인 틀에 소속함을 표명함으로서 내수용 정통성과 권위 뿐만 아니라 대외관계에서도 이점을 제공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도구였다.

조선에서도 명나라가 망한 후에 '청나라는 제대로 된 정통 중화왕조가 아니니 우리가 중화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다. 명나라 이전에도 중국 대륙에는 비한족 통일 정권이 계속 들어섰었는데, 그 때는 소중화 논란이 생기지 않았다. 몽골인이 세운 원나라는 당시 국정에 깊숙히 간섭해서 소중화 사상이 싹틀 여지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명나라 멸망 이후 섬길 만한 중화국가가 소멸했기에 소중화 사상이 싹튼 것이다.

외왕내제에서 더 나가버렸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과거부터 외왕내제를 실시하고 근대 무렵에 소중화 사상을 가지고 있던 나라들은 중화 시스템 안에 들어가는 일이 있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독립국가의 지위를 유지한다. 중화문명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 있었고, 조공과 책봉은 그저 외교적 수사였다고 볼 수 있다.

'중화문명'은 송대 이후로는 중원이라는 지정학적 대상에 구속된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권 전반을 포괄하는 이데올로기적 프레임으로 진화했다. 그런 만큼 물리적 현실로서의 정치적 주권과 포괄적인 문명적 정체성으로서의 중화 사상은 근대 민족주의적 관점처럼 서로 배제하고 대비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현대에 '민주주의'의 가치를 언급한다고 해서 미국에 종속됨을 자처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 당시에도 '중화'를 표방하는 것이 한족 중화 왕조에 종속됨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미국의 민주주의가 몰락했으니 그 다음으로 민주주의를 잘 지켜온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만큼 당시 식자층과 지배층에게 있어 '중화'가 엄청난 중요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와 20세기 후반에는 민족주의 사상이 고조되면서 친중 사대주의 사상이나 개화에 반대하게 만든 사상정도로만 평가절하 되었으나 점차 조선사에 대한 지식들이 퍼지게 되고 단순히 사대나 자주, 개화와 수구 등으로 가르거나 분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경우 재평가받는 경우가 늘었다.

3. 나라별 소중화 사상[편집]



3.1. 조선-대한제국[편집]


歐洲(유럽)에서 황제라고 부른 것은 羅馬(로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후 日耳曼(게르만)과 奧地利(오스트리아)는 로마의 옛 땅으로서 황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독일게르만 계통을 이어 마침내 황제로 칭호를 정하였습니다. 우리나라(조선)의 의관과 문물은 모두 명나라의 제도를 따랐으니 그 계통을 이어서 칭호를 정한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청나라와 우리나라는 다같이 동양에 있으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로마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26일 양력 4번째 기사


우리나라의 강토한나라당나라의 옛 땅에 붙어있고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은 다 송나라명나라의 옛 제도를 따르고 있으니, 그 계통을 잇고 그 칭호를 그대로 쓴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다같이 로마의 계통을 이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독립과 자주는 이미 여러 나라가 공인하였으니 당당한 존호(尊號)에 거하는 것은 응당 실행해야 할 큰 법도인데 폐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 것입니까?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29일 양력 2번째 기사

위 인용문은 구한말 당시 칭제를 주장하면서 중화와 로마를 비교한 내용이다.

후기에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가진 사상이다. 기존의 '중화'인 명나라가 멸망했으니 진정한 '중화', 즉 문명국은 조선 말고는 없다는 사상이다.[1] '조선 중화주의'라고도 표현한다.

기본적으로 중국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중에서 중국 황제의 명분을 무시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성리학만 특별히 명분을 중시하는 게 아니다. 명분이라는 말은 차라리 원칙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게 오해가 없다. 조선이 명나라를 대국으로 모신 것은 단순히 명분 타령 때문만이 아니라 현실적 국력이나 문화적 수준 때문이었다. 당시 만주족은 금나라 멸망 후 자신들의 나라를 잃고, 자신들의 나라를 멸망시킨 원나라가 쇠퇴하여 중원을 잃었음에도 자신들의 나라를 가지지 못하며 씨족사회를 이루는 수준이었기에 당연히 이들과는 교류 정도를 유지하는 교린 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모든 물산과 기술을 중화천자국이 독점하고 있고 농업사회에서 민간수요가 있는 것도 아니니 천자국 놔두고 제후국들끼리만의 교역을 할만한 건덕지도 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국력이 쇠퇴하면서 만주족(여진족)의 후금, 이후에는 청나라가 부상한 것. 새로 조선의 왕이 된 광해군은 실리외교를 통해 후금과 명, 조선의 삼각관계를 유지하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단순히 실리외교 문제가 아니었다. 광해군의 지지세력인 북인이 소수파였고 단순히 명분과 실리 문제가 아니었다. 소수파인 북인마저 명에 대한 사대를 주장했으며 실제로 중립 외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은 극소수였다. 당시까지는 인구가 1억 명이 넘는 명나라가 100만 정도되는 후금에게 멸망당할 거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과거에도 오호십육국시대가 열리기도 했고 몽골이 중국을 정복하는 일이 일어나기는 했다. 하지만 오호십육국시대 이후 무려 200년 넘게 지난 뒤에야 중국이 다시 통일되었고 몽골이 전중국을 지배할 수 있던 데에는 중국을 차지하고 있던 금나라와 남송의 불화도 원인이었다. 이러니 당대 유학자들 눈으로는 일단은 그다지 분열되어 있지 않은 명나라가 훅 하고 망한다는 것이 납득이 안 될 수밖에 없다.

명나라는 200년 가까이 암군이 이어지며 쇠퇴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족 내부의 왕조교체에서 끝나고 말지 설마 청나라에게 정복당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어찌저찌해서 북중국을 먹더라도 차마 남중국까지 그렇게 쉽게 먹을 거라곤 예상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청나라는 끝까지 자력으로 산해관을 돌파하지 못했고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한 틈에 오삼계의 전향까지 겹쳐 간신히 접수한 것이다.

결국 서인들은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광해군과 북인파를 축출한 후 인조를 내세워 정권을 장악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정묘호란병자호란을 당하면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버티다가 항복, 삼전도에서 숭덕제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청에게 굴복하는 치욕을 겪게 된다.

이전 상황이 어찌됐든 간에 조선 왕이 적국에게 치욕을 당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상황. 이건 성리학자의 명분론을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당시 조선 사람들은 광해군이든 화친파든 다 성리학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북벌을 외치면서 제기된 것이 소중화론이었다. 중화문명의 정통 왕조인 을 계승한 것은 오랑캐이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논리였다.

이는 송시열의 유명으로 제자들이 만동묘를 세운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만동묘는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즉, 이제 중원에서 문명 즉, 중국(중화)이 파괴되고 야만적인 오랑캐가 들어섰지만, 그들은 중화의 정통이 아니며 조선만이 유일하게 중화(문명)의 정통을 이었다는 선언이었다.

당연하지만 효종 때의 북벌론은 '중국 대륙을 정복하고 우리가 중원의 새로운 황제가 되자'가 아니라 '중원에서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의 문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자'는 것이었다. 허생전에서도 북벌이 성공했을 시의 최종 목표는 대국의 스승이지 새로운 천자국으로 등극이 아니었다.

북벌이 사그라든 이후에도 청나라를 오랑캐 취급하는 경향은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에 방문하는 사신을 명대에는 '조천(朝天)'[2]을 썼지만 청대에는 '연행(燕行)'(연경(북경)에 간다)으로 바꾼 것. 또한 공문서에서도 청나라는 피국(彼國), 즉 '저쪽 나라' 정도로 지칭되었다. 이때문에 명대에 파견한 사신을 조천사라고 부르고, 청대에 파견한 사신을 연행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홍순학이 지은 '연행가'의 그 연행이다.

그런데 이후 청나라가 훌륭한 치세를 보여주면서 소장학파에서는 북학(청을 배우자)이 나타나게 된다. 박지원도 "청나라가 들어섰다고 해서 중국 대륙이 야만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며, 중화 문명은 그대로 남아있다"고 평가했다. 즉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는 것은 오랑캐(만주족)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여서 그들의 사회와 문화 안에 남아 있는 중화 문명을 배우는 것이라고 보았다. 원래 동아시아에서 중화 문명은 특정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의 소중화사상과 사대주의가 충돌한다는 식의 논리는 말이 되지 않는다. 쉽게 말해 명을 섬기고 명의 문물이나 제도 사상 등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대주의라면 조선의 소중화 사상은 명이 멸망한 뒤에 자국이 곧 명의 후계자라고 내부적으로 주장하고, 오랑캐(청나라)에게 외형적으로는 굴종할지라도 그들을 명과 동급의 중화로 인정하지는 않겠다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3]

이러한 조선의 소중화 사상의 문제는 청나라와의 외교보다도 조선 내부의 문화 변화에 있다. 병자호란 이후 소중화주의가 퍼지면서 주자가 설정한 유교적 의례 등을 교조적으로 지키려 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호란 이후 사회 혼란을 수습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복잡하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명나라 멸망 이후 중국 문화에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어지고 조선 자체 문화에 관심이 높아졌는데,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나 국문학의 주체성이 보여진 점 등이 그러하다. 게다가 이러한 경향은 조선 후기 서민 문화 발전과 결합하여 조선의 독자 문화가 더욱 강조되는 경향이 보였다.

결국 조선시대에서 소중화는 중화=문명이라는 인식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고, 실학자들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경세를 논의했던 것이지 성리학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새로운 사상과 방법론을 논의했던 것이 아니다.

양명학을 받아들인 강화학파나 서양 학문+천주교를 받아들인 정약전 · 정약용 같은 인사들도 분명히 있기는 했지만, 다수의 실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을 공부했던 사람들이었다.

명청교체기에 임경업처럼 명나라의 복수 운운하며 정치 공작을 펼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박지원허생전 뒷부분에서 비판했다.

이런 이 대장의 말을 들은 허생은 크게 노하여, "뭐야!? 명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는 놈이 할 말이 그것 뿐이냐? 상투를 트는 건 본래 오랑캐의 풍속이며 흰 옷은 상을 치를 때나 입는 옷이 아니더냐? 바야흐로 대륙을 정벌하겠다면서 그까짓 꼴같잖은 예의범절이나 따지다니, 이게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할 말이더냐! 너 같은 놈은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칼을 집어 대장의 목을 베려고 들었다.


영조 44년에 노론 대신인 김약행은 이 사상을 기반으로 영조에게 칭제하자는 상소를 올렸고 특히 한원진[4]은 아예 중국 대륙으로 진출해 정복해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1 #2 심지어 소중화가 아니라 대중화(大中華)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훗날 대한제국이 세워진 것도 소중화와 전혀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임오군란을 제압한 북양군벌위안스카이가 조선에 눌러앉는 시점에서 청나라는 이전까지의 조공 관계를 유럽식 제국주의로 바꾸어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으로 두려는 외교 정책을 취했다. 그때문에 위안스카이는 사실상 조선 총독인양 조선 정치를 농락했고 이것을 본 조선 식자층의 반청 감정이 커졌다. 그러나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조공-책봉 관계를 청산하여 중국식 황제 칭호를 한민족계 국가가 대놓고 써도 청나라가 뭐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국명에서 지명의 고유명사인 '한(韓)'이 동아시아 천자국의 전형이던 중화권 통일 왕조처럼 한 글자인것도 소중화 의식이 있음을 드러낸다. 이 시점의 소중화는 진짜로 조선을 속국으로 삼으려 했던 청나라를 향한 반발이 발현된 것이다.

베이징대 역사학 교수 왕위안저우(王元周)는 조선의 소중화 사상과 반청 감정이 현대 한국에서 반중 감정의 형태로 남아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청나라를 미개한 오랑캐라고 혐오하던 감정이 현 중국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는 의견이다. # 실제로 조선시대 때 여진족 비하어였던 되놈, 오랑캐라는 표현은 조선 멸망 이후에도 남아 있으며 6.25 전쟁[5] 당시 중공군을 격파한 전장의 호수를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그 일면이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부터 두드러진 한국의 반중 감정은 청나라 시기 문제보다는 중국 공산당의 확장주의적 행보나 신냉전 등 현대에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이 더 직접적인 원인이다.

13~17세기 '중화'와 '소중화' 그리고 '사대자소' 관념의 본질은 유교 문명(보편 문명)을 다른 주변부(야만)보다 선취하기 위한, 지구적으로 전후무후한 '형식적' 행위가 아니라, 두 국가의 관계망이다. 쌍방이 구축한 권력 관계에서 제국은 최소한의 자원을 투자하면서 지정학적 구도를 유지하며 약소국을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약소국은 제국에게 도덕적 권위를 강조하여 강대한 권력을 제약하는 보편적인 현상을 '유교'의 예교 질서를 상상하여 합리화한 것에 불과했다.#

3.2. 일본[편집]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아이누(=에미시, 에조), 하야토, 그리고 한반도의 국가를 포함하는 일본이 주장하던 종주권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것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대외적으로 최초로 언급된 경우는 5세기 경에 일본에서 중국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의 왕을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으로 자처한 것을 꼽는다.

중국은 삼한과 신라의 지배는 인정해도, 백제의 지배는 인정하지 않았다. 백제의 구이신왕이 이미 일본보다 먼저 중국으로부터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百濟諸軍事(백제제군사)鎭東大將軍(진동대장군)百濟王(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유학계에서 진무 천황이 사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태백의 후손, 혹은 형제라는 속설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고고학적인 연구결과를 보면 오나라와 월나라 멸망당시에 상당수의 유이민들이 배를 타고 한반도 중남부나 왜국으로까지 간 경우는 있었고, 이들이 야요이 시대의 주역이라는 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진무 천황이 진짜로 오나라 왕실의 후예인것은 아니다.

이후에도 일본 제국주의에 영향을 끼쳤다는 연구도 존재한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은 한때 서양인들을 오랑캐라고 비하했던 일본식 중화사상을 가졌던 세력들이었다. 이후 이들 중에서도 급진파와 온건파가 나뉘어 알력 다툼을 하는 양상이 된 것.

또한 청일전쟁으로 중국을 무력화한 후에도 계속해서 중국을 침공한 것이 주위의 다른 곳보다 털어먹기 만만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이러한 중화관이 영향을 끼쳤다는 가설도 있다. 일본군 등의 고위층에서는 여타 동아시아가 그렇듯이 한문 문학 등 고전시대 중국 문화를 교양 있는 것으로 여겼고, 이런 여러 전통적 경향에 의거한 고대 중국을 향한 동경심[6]이 중국에 대한 적극적 진출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이는 당시 나치를 비롯한 독일과 영미권 게르만 북유럽의 민족주의자, 극우파들이 고대 로마, 그리스, 이집트에게는 열광했으면서도 막상 실존하던 남유럽, 지중해 세계와 지중해권 사회들은 인종차별적으로 경멸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3.3. 베트남[편집]


베트남 역시 다른 주변국들처럼 명청 교체 이후 중화를 자신들이 계승했다고 여겼다.

중세 이후 베트남이란 국가 형성 과정은 정치적으로는 중원의 통일 제국에서 철저한 독립을 추구하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오히려 중화 문명의 내재화라고 볼 수 있다.

국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베트남은 한반도의 왕조들보다 더 철저한 중화 사상을 내세웠다. 국내용 칭호나 문서에서는 아예 대놓고 베트남 조정을 베이징을 비롯한 중원의 그것과 대비되는 남조라 칭했고, 참파크메르 같은 인근 나라들을 정벌하며 유교를 비롯한 중화 문명의 전파를 명분으로 삼았다. 과거 제도종묘사직에 지내는 제사 또한 일찍부터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자신들이 복속시킨 참파나 크메르 쪽에 대충 끼워 맞춘 중국식 작위를 내리며 외왕내제식 통치를 했다.

고려시대부터 활동 범위가 한반도로 제한되고, 조선 초기 사군 육진 개척 이후 국경이 고정되었던 한반도와 달리 이쪽은 근대까지 베트남이 다른 민족을 몰아내며 남진을 계속 했다. 그러니 이들을 흡수하고 지배할 중화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주장할 근거와 여건이 마련되었던 셈이다.[7]

베트남은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싱가포르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에 들어가는 나라로서, 일부에서는 동아시아권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베트남을 제외한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문화적으로 인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베트남과 이질감이 매우 크다. 유교적인 관료체계를 베트남이 도입한것과는 다르게 태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은 유교의 영향력이 별로 크지 않아서 차이가 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베트남은 크메르족, 참족 등 인접 동남아시아 민족들과 역사적으로 사이가 영 좋지 않았고 역으로 동아시아에 더 강한 동질감을 보인다. 현대 베트남인들 중에서는 베트남이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동아시아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8]

다만 조선에서는 베트남이 워낙 왕조가 빨리 갈려나가다 보니 '글을 안다고 하나 인의가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베트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938년이고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것이 1862년인데 그 사이의 십이 사군 시대와 남방을 통치한 쩐조, 응우옌조를 빼도 왕조가 무려 12개나 존속해있었을 정도로 왕조 교체가 잦았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래로 개성 왕씨에서 전주 이씨로 왕조가 딱 한번 교체되었던 조선 입장에서는 그럴 말이 나올법 하기는 했다. 더군다나 그냥 교체도 아니고 온갖 혼란을 동반하니 더더욱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4. 비슷한 사례[편집]



4.1. 대한민국[편집]


현대의 동아시아 / 한자문화권 국가들의 국명 중에서 유일하게 지역이나 민족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한 글자인 점[9]과 고유명사 앞에 '대(大)'자를 붙인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이 계승한 국가대한제국처럼 대한(大韓)이라는 전형적인 중화 왕조의 국호 형식[10]을 따르지만, 전근대 군주제 국가가 아닌 현대 민주공화국이므로 어디까지나 대한제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의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또 국기인 태극기에 그려진 팔괘는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 문화대혁명 이후 한국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소중화가 실현되었다. 유교 관련 서적이 중국에 없어서 한국에 남아있는 서적세계기록유산으로 올라가고 중국에서도 전통 제례의식을 배우러 한국에 온다.

문화대혁명 당시 유교와 공자 역시 봉건 사상으로 여겨서 취푸(곡부(曲阜), 공자의 고향)의 대성전에 모셔져 있던 공자상이 도끼로 박살나고 유교 경전이 사라졌으며 무형 문화재 또한 상당수 실전되었다. 대표적으로 문묘에 제사를 올리는 것, 즉 제향(祭享)하는 법이기도 한 《제공대전(祭孔大典)》도 실전(失傳)되어, 한중수교 이후 한국석전대제를 참고해서 재현해야 했다. 1990년 석전대제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행사로 초빙 기사 2004년 취푸 공묘 석전대제 재현 기사 기사

21세기에도 중국보다 한국에 유교 관련 사료가 세세하게 많이 남아 있어서 한국의 도움 없이는 유교 연구가 어렵다고 한다. 유교 종주국인 중국보다 한국이 오히려 유교를 중국보다 잘 보전한 국가가 된 것.

4.2. 대만[편집]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치했어도 중화사상은 살아있어서 한족만주족이 이끄는 청나라와는 다르고 오히려 청나라를 한족을 탄압하는 압제자로 보았다. 실제로 태평천국 운동 때 명나라 부흥을 꿈꾸는 지하조직인 천지회(天地會)가 상하이를 점령하고 대명(大明)태평천국 이라는 정부를 세워 홍수전과 제휴하려 했지만 그에게 "명나라가 망한 지가 몇 백 년 전인데 반청은 그나마 가능해도 복명은 말이 되냐?"면서 거부당했다.

쑨원은 아예 혁명적 기치를 멸만흥한으로 정했고 청나라가 1912년에 멸망해 중화민국이 세워졌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난징에 있는 명 효릉에 참배해 한족의 국가를 회복했다고 널리 알린 것이다. 효릉은 명 태조 주원장의 능묘.

그리고 쑨원은 1925년에 북경에서 죽고 북경 교외 벽운사란 절에 안장되었지만 장제스가 북벌에 성공한 이후 수도인 난징으로 유해가 옮겨져 명 효릉 바로 옆에 안장되었다. 현재 중산릉이라 불리는 이곳은 한족이 이민족을 몰아내고 한족 국가를 세운 주원장이 묻혀있다는 점에서 효릉과 같지만 관심도와 관광객 수가 효릉보다 넘사벽 수준으로 많다고 한다. 오히려 중산릉에 방문한 김에 명 효릉도 같이 볼 정도. 참고로 릉(陵)이란 단어는 황제의 무덤에 쓰이는데 이를 보면 쑨원이 중화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이름부터 "中華"民國인데다 쑨원 사후 국민당의 권력자로 등극한 장제스는 북벌을 통해 군벌들을 정벌하거나 흡수, 멸망 전 청나라의 영토를 기반으로 중화민국을 세웠다. 하지만 장제스가 이끌던 국민정부의 통치력이 미치던 곳은 수도인 난징과 강소, 강서, 절강, 안휘 등 주변 지역 뿐이었고 나머진 흡수된 군벌들이 자체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신강은 명목상 관리만 파견했지 독립국처럼 행동했고, 티베트는 사실상 자립 상태였으며 몽골은 독립하여 공산국가를 세웠다.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중화민국은 잠시동안 진짜 중화제국을 다시 구현할 기회를 얻었지만, 스스로의 실책으로 인해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중화민국은 타이완 섬에 갇히게 된다. 그렇게 도망치는 와중에도 중화제국의 적통을 잇는다고 주장해온 중화민국은 북경과 중국대륙 곳곳에 있던 유물들을 긁어모아 수송선들에 전부 채워넣어 대만에 옮겨 국립고궁박물원에 전시했다.

공산화된 대륙에서 반달리즘이 벌어질 때 대만의 중화민국은 역으로 중화문명부흥운동을 펼쳐 자신들이 유일한 중화문명의 적통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공자의 종손인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쿵더청이 국부천대 때 국민당과 함께 대만으로 피신해서 공자에 대한 제사를 그대로 이어나갔다.

정치적으로 친중 행보를 보였던 중국 국민당 소속 마잉주 전 총통도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지만 하나의 중국은 오로지 중화민국이라고 못박아뒀고 대만의 보수주의자들 중 과격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국은 중화민국이고 바다 건너 대륙 정부는 공산당 비적 떼라고 칭한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만의 도덕교과서에선 학생들에게 자신들은 중국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다만 이것이 "소"중화인지는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는데, 중화민국 정통론자인 대만인들이 생각하기에 자기 나라는 소중화 같은 게 아니라 "중화" 그 자체이기 때문.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대만 독립운동이 본격화되고 민주진보당 등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대만의 중화 민족주의는 흐려지고 있다.


5. 로마 계승론과 비교[편집]


우리야말로 가장 선진적인 문명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유럽에서 제3의 로마로 대표되는 로마 계승의식을 내세우던 것과 비슷하다. 구한말 유럽 역사를 공부한 조선의 지식인들도 유럽의 로마 계승 문제와 소중화 의식의 유사성을 직접 거론했다.

하지만 소중화는 중화 문명 계승 여부 하나만이 기준인데다가 철저히 국내 정치를 위해 내세운 사상이었기에 누가 진정한 중화의 계승자인지 국가끼리 논쟁이 벌어진 적은 없다. 누가 로마의 계승자인지 여러 조건을 따지며 논쟁을 벌였던 제3의 로마와는 다른 점.[11]

또한 소중화 사상은 중화 문명의 종주국이라 자처할 수 있는 광대한 영토를 보유한 중국이 건재하기도 하고, 유교에 근거하다 보니 유교의 영향력이 약해진 현대에는 잘 거론되지 않지만, 로마는 그 국력의 명성을 잇기 위함이 목적이기 때문에 현대에도 로마를 잇는다고 자처하는 나라도 있다.


6. 드립으로서의 소중화[편집]


커뮤니티와 유튜브 댓글에서 한국의 부정적인 모습이 나올 때 한국을 소중국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워낙 혐중 여론이 심해지자, 한국의 부정적인 모습이 뉴스 등에 뜨면 한국도 똑같다는걸 비꼬기 위해 사용하는 것.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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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봉-조공 체제를 받아들인 조선의 관념상, 베트남은 책봉-조공 체제 내에 있긴 하나 조선보다 끗발이 달린다고 보았고, 일본은 체제 바깥의 나라로서 논할 바가 못 되었다.[2] 천조#天朝에 조회하러 간다는 뜻.[3] 다만 반드시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게 일단 소중화 사상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문화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 유학도 기존의 중국 유학에서 한국의 이황, 이이의 유학이 더 중요시되고 진경산수화같은 조선식 화법이 나타나고 실학이 연구되는 등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이 늘어났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4] 호락논쟁에서 인물성이론(오랑캐≠사람)을 주장하여 이간의 인물성동론(이후 북학파로 계승)과 대립했다.[5] 중공군 중에는 만주족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6] 근세 이후부터 중화민국 시대의 중국은 일본이 보기에 아편 환자 오랑캐들의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7] 물론 이렇게 중화 문명의 일부를 자처한다는 것과 정치적으로 중원의 통일 제국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8] 실질적으로 보면 동남아시아보다 동북아시아가 더 국력도 크고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니 베트남 입장에서는 동남아시아보다는 동북아시아에 끼는게 이득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9] 한국: 대한민국/大韓民國 (한/韓)
북한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조선/朝鮮)
중국: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 (중화/中华)
대만: 중화민국/中華民國 (중화/中華)
일본: 일본국/日本国 (일본/日本)
몽골: 몽골국/ᠮᠤᠩᠭᠤᠯ ᠤᠯᠤᠰ, 蒙古国 (몽골/ᠮᠣᠩᠭᠣᠯᠴᠤᠳ,蒙古)
베트남: 공화사회주의월남/Cộng hòa Xã hội chủ nghĩa Việt Nam, 共和社會主義越南 (월남/Việt Nam,越南)
[10] 대수(大隋), 대당(大唐), 대송(大宋), 대원(大元), 대명(大明), 대청(大淸) 등.[11] 이렇다 보니 제3의 로마 논쟁은 별별 다양한 국가들이 거론된다. 심지어 어쨌든 로마가 패권국이었던 만큼 미국을 로마에 빗대는 것도 진지하게 논의하는 학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