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권/남방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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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양주 방면
3. 형주 방면
4. 이주, 단주, 주애
4.1. 주민이 부족하다
4.2. 결과
4.3. 왜 실패했을까?
5. 현대 중국과 대만에서의 평가



1. 개요[편집]


손권의 오나라가 자리잡은 장강 이남 지역의 상당수는 한무제때까지도 민월, 동월, 남월이라는 독자적인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을 만큼 한족 인구가 별로 많지는 않았으며, 무릉만이나 산월 등으로 불리는 먀오족, 야오족 계통이나 대만 원주민이나 좡족, 베트남인, 태국인, 미얀마인과 가까운 계통의 남방 민족도 많이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손권의 오에 순종적이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기존에 터를 잡아 살고 있던 남방 민족들을 합쳐도 오나라의 인구는 위나라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명목상 차지하고 있는 영토의 면적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강남이 후한 말까지도 제대로 개발이 되지 않아 인구 밀도가 매우 낮았던 것이다. 이렇게 땅은 넓지만 제대로 된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고 미개척지가 많아서 인구가 부족한 강남 지역이었으며, 손권은 이 문제를 보충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호구(戶口)를 늘리려고 노력했다.

우선 오나라의 인구가 영토 크기에 비해 부족한 만큼 주변 지역이나 오나라 내부에 산적해 있던 수많은 이민족의 인구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당연히 손권 당대는 물론 오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이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 강남 지역에 한족 인구가 급격히 유입되는 것은 오호십육국시대를 맞아 북방이 이민족에게 초토화 되어 한족이 대대적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던 남북조시대에서야 가능했다.[1]


2. 양주 방면[편집]


손권 집권 초기부터 이민족인 산월 토벌 기록이 나온다. 육손, 제갈각 같은 인물들의 열전에서도 "산월을 평정하고 그들을 군사로 얻었으며 민호로 편입했다."는 문구를 자주 볼 수 있을 정도.

산월은 점점 오나라에 편입되어 거점이 남하하다 255년을 마지막으로 오나라 이후 산월이라는 명칭은 아예 사라지게 된다. 이들의 토벌 진행 과정은 산월 문서 참고.


3. 형주 방면[편집]


형주 남부 지방으로 현재의 후난성 일대와 광시 좡족 자치구 일부, 광둥성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4. 이주, 단주, 주애[편집]


그리고 손권은 이주(타이완 섬, 류큐), 단주(일본 열도), 주애(하이난 섬)까지도 확장하려 노력한다. 자세한 묘사는 해당 항목들 참고.


4.1. 주민이 부족하다[편집]


230년 봄, 손권은 서복이 이끌고 간 사람들이 수만 호가 됐다는 늙은이들의 말을 듣고 이주와 단주를 찾아서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오라는 엄청난 일과 주애(朱崖)의 정복을 시키려고 들며 신하들에게 자문을 요청하니 육손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사해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응당 백성들의 힘을 동원하여 현재의 긴급한 임무를 처리해야만 합니다. 현재 병사를 일으킨 지 수년이 지나 인원이 감소했으며, 폐하께서는 이것을 우려하고 침식을 잊으시고 장차 먼 곳으로 가서 이주를 취하여 대사를 이루려고 하십니다. 신이 거듭 생각해 보았지만, 이것은 유리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만 리를 가서 땅을 탈취하여도 풍파는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고, 백성들은 수토(水土)가 바뀌어 반드시 질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사병들을 달리게 하여 볼모지를 건너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하다가 더욱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또 주애(珠崖)는 매우 험준한 곳이며, 그곳의 백성들은 금수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을 얻는다고 해도 대사를 이룰 수 없고, 그곳의 병사가 없어도 자신의 군대가 감소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강동에 있는 병사들은 자연 대사를 도모하기에 충분한데, 단지 병력을 축적한 연후에 움직여야만 합니다. 옛날 환왕(桓王 ; 손책)이 오나라의 기업을 세웠을 때, 병사는 5백 명이 안 되었지만 대업을 열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천명을 받아 강남지역을 개척하고 평정했습니다. 신이 듣기로는 혼란한 세상을 다스리 고 반역자를 토벌할 때는 반드시 군대의 위력에 의지해야만 되는데, 농업이나 양잠에 종사하여 의복과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 백성들의 근본적인 사업이지만, 전쟁이 끊이지 않아 백성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마땅히 병사나 백성들을 양육하고 조세를 적게 거둬들여 백성들이 매우 화목해지고 도의로써 용감함을 권한다면, 황하와 위수 유역은 평정시킬 수 있고 전국은 통일될 것입니다.

전종 또한 이에 반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조의 위세로써 한다면, 어떤 곳으로 향하든지 승리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이역은 바다가 장애물이 되어 그 사이를 끊어놓고, 물과 풍토에는 독기가 있는데, 이것은 옛날부터 있어 왔던 것입니다. 병사들과 백성들이 그곳을 드나들면 반드시 질병을 낳게 되고 서로 전염시켜, 가는 자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우리가 얻는 것이 얼마나 많을 수 있겠습니까? 장강 해안가의 병사들을 손상시켜 만분의 일의 이익을 구하는 것, 이것은 어리석은 신이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손권은 그런 것쯤은 가뿐하게 무시해주고 1만 명을 제갈직하고 위온에게 주어 단주와 이주를 찾아 백성을 납치해오게 하고 한참 나중에 육개에게는 주애(朱崖)를 정복하게 한다.


4.2. 결과[편집]


그리고 1년간 쌩고생을 한 이들은 단주를 발견하는 데 실패한다.[2] 이주에서 원주민 몇 천 명을 이끌고 왔지만 데리고 간 만 명 중 8~9천 명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이 원정을 이끈 제갈직과 위온은 조서의 내용을 거스르고 공이 없었기에 하옥된 후 처형된다.

반면 주애를 공략하러 간 육개는 적을 참수하고 사로잡는 공로가 있었기에 건무 교위로 승진한다. 그 후에 설종의 상소문에도 주애군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나름 정복하는 데에는 성공한 모양이다.

하지만 제갈직과 위온이 이끌고 간 만 명 중에 80~90%가 나가떨어진 것은 크나 큰 손실. 이에 손권은 후회를 하고 훗날에 전종과 다시 한 번 이 일에 대해 말했는데 전종은 이에

그대 신하들 가운데 간언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신은 그들이 충성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손권의 해상 진출은 끝나게 된다.


4.3. 왜 실패했을까?[편집]


이것은 손권이 대군을 보낸 것이 결과적으로는 실패를 자초했을 가능성이 높다. 탐험대의 숫자가 많아지면 군사적이나 외교적으로는 위엄이 서지만, 당시의 타이완이나 하이난같이 도시도 없고 원시 부족들만 살고 있을 오지에서 위엄을 세우고 정복을 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실상 오지 탐험이나 다름 없는 임무이며, 탐험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1만 명이나 되는 병사는 숫자가 너무 많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식생이나 지리도 제대로 알 수 없을 오지에서 1만 명이나 되는 대군의 식량을 조달하고 보급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당대의 운송 기술로는 식량을 운송하는 데 한계가 있으며, 바다 건너 외딴 섬에 1만 명분의 군량을 계속 보내는 것은 상당히 곤란한 일이다. 게다가 이런 낯선 환경에서는 낚시, 채집, 사냥 같은 방법으로는 필요한 양의 식량을 구하기 어렵고, 먹을 입이 너무 많은데 자연에서 조달하는 방법을 쓰면 생태계가 금세 파괴되어서 먹을 거리가 고갈되어 버린다.[3] 원주민의 부락도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고 문명 수준이 낙후되어 있을 것인데, 약탈을 한다고 해도 충분한 식량을 조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강남만 해도 한족들은 전염병 때문에 곤란을 많이 겪었는데, 더욱 낯선 환경으로 많은 병력이 이동한다면 전염병 문제가 심각할 것은 뻔한 일이다. 결국 처음부터 대군을 보낸다는 탐험 계획부터가 오류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당장에 16세기의 코르테스나 피사로도 그 규모가 아무리 많아도 2천을 넘지 못했다.

합리적인 방안이라면, 탐험을 목적으로 소수 정예의 탐험대를 보내서 차근차근 정보를 수집, 원주민들과 교류를 튼 다음 상업 목적의 탐험대를 보내서 무역 거점과 이주 거점을 건설하면서 차근차근 나갔다면 다소나마 성과가 있었을 것이지만 워낙 성급하게 굴어서... 구체적으로는 500명 안팎의 병력만 있으면 되는 거였다. 이런 방법은 18세기와 19세기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많이 써먹었다. 물론 시대와 기술력 차이가 상당함을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물론 이주와 단주는 아메리카 대륙 따위보다 훨씬 가깝긴 하다. 그리고 영국조차도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식민지를 건설할 때 주민들이 전부 증발하는 등 실패를 겪었었다. 프랑스 역시도 캐나다 개척 때 실패한 바 있고[4] 스페인 역시도 브라질을 제외한 남아메리카 정복에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으며 특히 잉카 제국을 정복한 것으로 유명한 피사로 역시도 두차례나 실패를 거두었으며 본인 생전에는 잉카 제국의 완전한 멸망을 보지 못했다.[5] 여기에 스페인의 초기 아메리카 식민지는 카리브해의 몇몇 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도 봐야 하고 즉 상당히 긴 시간을 두고 해야 하는데 너무 성급하게 굴어서 대실패를 거두었다는 거다,

애초에 강남지역은 명청 시기에도 한족들이 풍토병으로 고생하던 아열대 지방이다. 비교적 영양, 위생상태가 좋았던 관료들조차 강남에 부임하면 평균 수명이 확 줄어든다. 그런데 후한 삼국시대야...심지어 강남보다도 더 아래로 내려간 거다!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터무니없는 모험이라서인지 삼국지 관련 매체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체역사소설 아! 내가 마속이다에서 원정에 실패하고 죽게 된 제갈직, 위온을 살려내서 써먹는 이야기가 나오는 정도.

토탈 워: 삼국에서는 타이완, 하이난 섬이 미개발 지역으로 구현되어 있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개발할 수 있다. 여기서도 단주에 해당하는 일본은 등장하지 않는다.


5. 현대 중국과 대만에서의 평가[편집]


중국과 대만이 "이주가 대만이므로 대만은 손권 시절부터 우리 것!"이라는 논리로 중국과 대만 그리고 대만 원주민[6]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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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그래도 남북조시대가 끝나는 수나라-진나라 시기에조차 진나라는 수나라에 인구면에서 눈에 확 띌 정도로 열세였다. 물론 이는 진나라 자체가 후경의 난 등 양나라 말의 삽질로 인해 오나라보다도 지배 영역이 작았다는 점에도 기인한다.[2] 여담이지만 고작 7년 뒤인 238년에 일본에서 보낸 히미코의 사신이 위나라에 온다(...)[3] 더하여 뭐가 먹을 수 있는 건지 뭐가 먹을 수 없는 건지도 분간해야 한다. 즉 임팔 작전의 일본군의 고충과 동일한 고충이 예약되었다는 것[4] 자크 카르티에가 캐나다를 탐험할 때 프랑스인 수십명을 남겨두고 떠났는데 돌아와 보니 대부분 추위나 굶주림으로 죽었다.[5] 물론 이는 잉카 제국이 원시 부족들 따위완 격을 달리한다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한다.[6] 대만 원주민들이 대만의 영웅 정성공 동상에 불지른 사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