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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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孫基禎 | Sohn Kee-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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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베를린 올림픽 출전 당시 모습


파일:attachment/200608070072.jpg1988 서울 올림픽 당시 모습

출생
1912년 10월 9일 (음력 8월 29일)
평안북도 신의주부 (現 평안북도 신의주시)
사망
2002년 11월 15일 (향년 90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본관
밀양 손씨[1]
학력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
보성전문학교 (상과 / 수료)
메이지대학 (법학부 / 학사)
종목
육상
주종목
마라톤
신체
170cm[2]
종교
개신교천주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1. 개요
2. 생애
2.1. 초년 시절
2.4. 지도자·체육행정가로서의 활약
2.5. 사망
3. 수상 기록
4. 대중매체에서
5. 기타



1. 개요


"식민지 청년으로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달리고 또 달리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 1988년 당시 손기정 단독 인터뷰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까지 활약했던 육상 선수이자, 한국인 운동선수 최초로 세계정상무대를 제패한 한국 체육계의 선구자다.

2. 생애



2.1. 초년 시절


평안북도 신의주시[3]출신으로, 고향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그랬듯이 매우 가난했다. 호떡을 매우 좋아했으나 당시 호떡이 꽤 비싸서(5전) 많이 사 먹을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소년 손기정은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옥수수참외 장사를 하기도 하고 우동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집과 학교가 2km 거리에 있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그 거리를 매일 달려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노는 시간에도 압록강변을 달려 다녔을 정도로 뛰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 때 막연하게 운동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손기정의 모친 김복녀 여사는 어린 아들이 운동보다는 공부로 성공하길 바랐고, 아들이 달리지 못하도록 잘 벗겨지는 여아용 고무신을 신겨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손기정은 고무신을 새끼줄로 묶어서 달렸고 새끼줄에 발목이 쓸려서 피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다녔다고 한다.

이런 손기정의 재능을 눈여겨본 담임교사 이일성 씨가 손기정에게 육상 선수를 권유했고, 약죽보통학교 5학년 때부터 육상선수로 활약했다. 고향 신의주에서 열린 육상대회 장거리 종목에서 1, 2위를 다툴 정도로 실력 있는 선수였다. 하지만 보통학교 졸업 후 생계가 막막해져서 육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1932년 이일성 선생이 그를 일본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고된 노동으로 도저히 학업을 이어갈 수가 없게 되자, 6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어느 회사의 점원으로 취직하여 학업과 육상을 병행할 수 있었는데, 그 회사의 사장은 당시 신의주시에서 동익상회를 하던 공정규로, 안과의사 겸 국어학자 공병우 선생의 부친이었다. 손기정은 이곳에서 일을 하며 쉬는 날에는 압록강변을 달리며 연습했다. 그리고 1932년 경성부에서 열린 제 2회 동아 마라톤에 출전했는데 서울의 복잡한 지리를 몰라서 삼각지 로터리에서 길을 잃었고 아쉽게 2위를 한다. 그러나 이때의 레이스로 인생이 바뀌는데 당대의 걸출한 마라토너들이 배출된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양정고등보통학교 육상부 중장거리팀은 한반도 내에서만 유명했지만, 기록만 보면 세계적 수준이었다고 한다.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자, 더욱 마라톤 훈련에 매진했고 그 결과 이듬해 제3회 동아 마라톤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35년에 도쿄 메이지 신궁대회에서 마라톤 풀코스에 처음 출전하여, 2시간 26분 42초이라는 비공인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이 기록은 비공인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마라톤 풀코스에서 최초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깬 사례이다. 공식 세계 신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는데, 당시 비서구권에서 열린 대회는 대회 운영이나 코스 길이를 신뢰할 수 없었던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 열린 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도 역시 1위를 차지하며 단번에 장거리 육상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이 당시 13개의 대회에 출전하여 10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여담으로 메이지신궁대회 마라톤 종목은 손기정을 시작으로 이후 3개 대회 연속으로 조선인들이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1935년 손기정-1937년 유장춘-1939년 오동우가 그 주인공들이다.

2.2. 1936 베를린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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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 당시 독일의 기록 영상[4]
당시 일본으로 송출한 단파 라디오 방송 중계 녹음본[5]
이후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동갑내기이자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였던 남승룡과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참가하게 된다. 일본 육상계에서는 당연히 순수 일본인을 뽑고 싶어했겠지만, 실력자라는 것에 이견이 없는 손기정과 남승룡을 떨어뜨리기엔 눈치가 보여서[6] 대표팀으로 발탁한다. 헌데 일본 육상계는 4년 전 1932 LA 올림픽 당시 일본 국적으로 출전했던 조선인 선수 김은배, 권태하가 일본 선수의 페이스 메이커를 해주려던 전략을 무시하고 각각 6위, 9위에 랭크되었던 악몽이 있어서, 일본 육상팀은 이 대회에서는 반드시 일본 선수를 많이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남승룡, 2위에 손기정이 랭크되자, 일본 대표팀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둘을 탈락시키려고 한다. 현지에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쉬어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일본 육상팀의 억지로 전대미문의 2차 선발전 현지 테스트가 열렸고, 이것도 모자라 일본 측에서는 이 둘을 탈락시키기 위해 일본 선수 2명을 더 후보로 추가시켰다. 그러나 레이스 내내 일본 선수 2명이 이 둘을 따라잡지 못하자 일본 선수들은 몰래 코스를 이탈하면서 지름길로 갔고, 이를 본 손기정과 남승룡은 반드시 이기자고 다짐하면서 달렸다고 한다. 결국 2차 선발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사이좋게 1, 2위를 나눠 가졌다. 그리고 지름길을 이용해 뒤늦게 들어온 일본 선수들은 분노한 남승룡에게 따귀를 쳐맞았다고 한다. 시원시원하고 활발한 손기정에 비해 남승룡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랬을 정도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당연히 일본에선 "조선인들이 대일본 제국의 대표라는 것이 말이 되냐?"라고 반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들의 실력이 워낙 좋다보니 반발은 곧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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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출발 사진. 맨 왼쪽에서 달리는 선수가 손기정이다.
이후 올림픽 본선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로 당시 올림픽 신기록[7]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같이 출전한 남승룡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사실, 손기정의 금메달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남승룡도 막판에 스퍼트를 내면서 무려 30명을 추월하여 3위로 골인하는 대단한 모습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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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인 직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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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8]
손기정은 금메달을 받은 다음 날 아돌프 히틀러와 만났다. 그는 이 순간을 "160cm인 내 키에 비해 그의 손은 크고 억셌으며, 체구는 우람했다. 그리고 독일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답게 강인한 체취를 풍겼다."고 회고했다. 기록된 바에 따르면 현재까지 손기정은 히틀러와 공식적으로 직접 대면한 유일한 한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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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인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라 할 수 있는 올림픽 금메달을 땄지만, 그가 올림픽 경기 직후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슬프다"(당시 한글 표기로는 '슬푸다')라는 석 자가 쓰여 있어,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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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 사진을 보면 1위와 3위로 각각 단상에 올라선 손기정과 남승룡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손기정은 묘목[9]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있다. 나라 잃은 국민의 슬픔이 느껴진다. 은메달을 수상한 영국 선수[10]의 밝은 표정과 대조적이다. 동메달을 차지했던 남승룡은 훗날, "기정이가 우승해서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보다, 묘목을 받아 그것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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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실어서 동아일보가 정간당한 일장기 말소사건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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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 말소사건에 조선총독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엄중한 통제 속에 그를 귀국시켰고, 올림픽 영웅에 걸맞는 환영 인파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올림픽 금메달 - 일장기 말소사건을 통해 손기정은 일제 치하 조선의 대중들에게 큰 인기와 존경을 얻었으며, 이 당시 국내의 신문광고, 특히 의약품, 식품 광고는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담는 광고가 많았다. 특히 어린이 대상 과자 광고에는 '이 과자를 먹고 쑥쑥 커 손기정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카피라이트가 유독 많았다.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은 손기정의 우승을 기리며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는 심훈이 같은 해인 1936년 9월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병사하면서 마지막 시가 되었다. 시의 전문은 심훈 문서에 있다.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은 당시 일본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던 조선인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시골의 아낙들도 올림픽이 뭔지 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손기정은 스포츠 영웅이 되어 금의환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떳떳이 활동할 수 없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통해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 강화를 바짝 경계하던 조선총독부는 손기정에게 사복경찰을 붙여서 감시했고, 이때 손기정은 심적으로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풍문에 따르면, 의지의 승리를 찍은 영화 감독 레니 리펜슈탈심지어 아돌프 히틀러까지도 손기정에게 상당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까닭은 손기정이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박하게 굴지 않고 일견 우울한 듯 보일 정도로 과묵한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올림피아에서 손기정이 꽤 비중을 차지하는 걸 봐선, 리펜슈탈 씨가 이 동양인 선수에게서 정말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은 1956년에 다시 만나게 된다. 한편 아돌프 히틀러가 손기정을 '동맹인 일본의 국민'으로 간주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말도 있는데, 어쨌든 히틀러는 손기정이 한국계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독일 방송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Wo der Japanische Sieger Son kommen muss, der Koreanische Student, er hat die Streitmacht der Welt zertrummert, mit asiatischer Fähigkeit und Energie ist der Koreaner durch

일본의 우승자 손기정이 옵니다, 한국 대학생 손기정은 전세계의 경쟁자들을 아시아의 능력과 에너지로 눌렀습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우승 이후 일본에서 우승 소감을 녹음한 내용이 레코드로 남아 있는데, 말투에서 손기정의 고향인 신의주 억양이 배어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내용은 손기정의 자발적인 발언이 아닌 일본에 의해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것에 불과했기에, 손기정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보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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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손기정입니다. 24년 간의 숙망을 달성하려고 우리들은 중대한 책임을 지고, 8월 9일 오후 3시에 스타트에 나섰습니다.

이때 나는 신궁대회 때 스타트와 같은 가벼운 기분이었습니다. 이 정도이면 반드시 우승하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쟈바라가 먼저 뛰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 페이스대로 달렸습니다. 나는 침착한 태도로 달리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에서 달리고 있는 외국인들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영국인 하파가 곧 내 앞에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32km를 앞두고 하파와 함께 전 회의 우승자인 아루젠친[12]

의 쟈바라를 따라버리었습니다. 그리고 하파와 함께 나는 한동안 똑같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파를 따라버리기에는 무한히 어려웠습니다. 내 전신에 아직도 힘이 가득하였으므로 능히 우승할 자신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인제 즉 문제의 언덕에 다다르니 우리나라 일장기가 나를 응원하여 주는 것이 보이었습니다. 좌등 코취 역시 응원 중의 한 사람이 되어 큰 기를 흔들면서 '인제는 6km가 남았다' 고 큰 고함을 지르는 소리에 일층 더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2번째 언덕에 도달하였을 때도 역시 이곳에 나를 응원하여 주는 우리나라 일장기가 날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수많은 응원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제는 1km 반이 남았다'고 고함치는 소리가 내 귀를 울려주었습니다. 나는 무의식 중에서 죽을 힘을 다 하여 더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기었습니다. 기록의 시간은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신기록이었습니다. 하파가 나보다 2분 4초 지나치어 들어왔습니다. 그 뒤를 이어 남 군이 원기있게 달려들어왔습니다. 이때의 반가움은 내 입으로서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오후 6시 15분 나는 하파와 남 군과 함께 표창대에 올랐습니다. 장엄한 우리나라 국가가 엄숙하게 내 귀를 울려줄 뿐이었습니다. 이때의 기쁨은 내 일생을 통하야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이 승리는 결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전 우리 일본 국민의 승리라고 할 것..(크게. 크게 해라.)이외다.[13]

이 승리야말로 내 개인의 달린 힘보담도 우리나라 동포 여러분들의 열렬한 응원의 결정(結晶)인줄 생각하는 바입니다.

금메달 수상 소감. 이는 일본이 써준 대본에 불과했다.


아직까지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의 수상자 명패에는 '손기정' 대신 '손 키테이(SON, Kitei)' 란 일본식 표기가 남아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사건으로 1970년에 신민당 제7대 국회의원이었던 박영록이 야간에 베를린 올림픽 기념관에 불법 침입하여 기념비에 새겨져 있던 손기정의 국적을 훼손하여 불법 침입, 절도 및 공공재산파손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으나, 체포되기 전에 한국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박 의원이 무엇을 훔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독 경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JAPAN이라는 글자를..." 국적을 한국(KOREA)으로 고치기 위해 이 5개 문자를 다른 우승비에서 떼어모았으니 명백한 기물파손이며 도려낸 일본(JAPAN)의 문자는 그대로 들고 도망갔으므로 절도 혐의도 적용됐지만 시대가 시대이다보니 송환되어 벌을 받는 일은 없었다.[14]

그 당시야 일본 소속으로 뛰었더라도 광복 이후로도 일본 이름으로 남은 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선수 시절과 은퇴 후의 국적이 달라졌다고 해서 이름이나 국적을 은퇴 후 기준으로 수정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식민지 출신 선수가 종주국 대표로 나와서 메달 딴 건 손기정, 남승룡 말고도 많으며, 그들 역시 종주국 선수로 기록에 남아있다. 혹시라도 은퇴 전에 독립해서 독립국 선수로 나오는 경우도, 독립 전후의 국적을 다르게 기록할 뿐이다.[15][16] 민족, 출신지, 정체성, 올림픽 이후의 활동 다 필요 없고 오직 대회 당시 소속 하나만 보는 것이다.

이런 사례를 공식 인정할 경우 국적 변경을 요구하는 다른 사례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각국은 외국 대표 선수라도 조금이라도 자기 나라와 관련이 있는 선수는 자기 나라로 고쳐 달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럴 경우 국적 분류가 완전히 흔들리기 때문이다.[17] 이게 이해가 안 간다면, 1988 서울 올림픽 주 경기장 앞과 올림픽공원에 서있는 종목별 우승자 명단이 새겨진 명판을 확인하면 알 것이다.[18] 멀리 갈 필요 없이 러시아빅토르 안이 남은 평생을 러시아인으로 살아도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획득했던 메달이 러시아로 바뀌는 일도 없으며, 영원히 한국안현수가 획득한 메달로 기록된다. 반대로 한국 국적을 회복하더라도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획득한 메달이 한국으로 바뀌지 않는다. 더욱이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이자 현재 한국 대표팀의 지도자인 탈북자도 있는데, 그가 아무리 북이 싫어서 남으로 넘어왔다 한들, 넘어오기 전에 딴 메달이니 역시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의 메달 기록으로 역사에 남는다.[19] 마찬가지로 아시아축구연맹이 1964년 아시안컵 우승팀을 인도로 바꾼 것도 아니다. 즉 기록의 속성은 이런 것이다. 한번 기록되면 평생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남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IOC에서는 공식적으로 'Kitei Son, Japan'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신 약력에는 분명히 당시 일제치하에 있던 한국인 출신이었음이 강조되며, 후일 일어난 일장기 말소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

2.3. 1937년 ~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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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전문학교 시절
그 뒤 손기정은 1937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商科)에 입학했다. 당시 보전에는 재정학을 가르치는 홍성하(洪性夏) 교수가 체육부장을 맡고 있었다. 홍 교수는 뜨거운 민족주의자여서 학교 스포츠를 장려하여 학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자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 지론으로 인촌 김성수(金性洙) 교장을 설득, 1937년에 전조선의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우수 운동선수들 다수를 뽑아 상과에 수용하였다.[20]

손기정은 보성전문학교 육상부를 대표하여 1937년 봄에 조선학생육상연맹이 주최하는 2개 대회에 출전, 보성전문의 우승에 기여하였다. 그 대회 중 하나는 4월 25일에 거행된 조선학생 수원~경성간 역전경주대회. 당시의 학제는 3월 졸업, 4월 입학이었으니까 입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아 5명이 이어 달리는 보전팀 최종 주자로 시흥~서울운동장 간을 역주, 7개 팀 중 최선두를 달려 보전을 우승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6월 5~6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조선학생육상대회가 거행되었는데 첫날엔 1,500m, 이튿날엔 5,000m에서 우승하였다. 당시 보전엔 박찬규, 백승욱, 인강환 등 장사들이 즐비했다. 이들이 포환, 원반, 해머던지기 등에 활약한 데다 손기정의 장거리 우승을 더하여 보전은 종합우승을 달성하였다.

이렇듯 손기정이 보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골치 아프게 생각하였다. 당시 1930년대 중반에 조선인 학생이 진학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조선인이 교장인 학교는 보성전문뿐이었고, 교수들 가운데엔 창문을 닫게 하고 한국어로 강의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학교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이 재학하면서 육상대회에서 활약하자 그는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되어 보성전문학교에는 그를 중심으로 서클이 형성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손기정이 보성전문에 다니는 것을 꺼렸고, 조선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총독부의 관헌은 손기정을 주야 감시, 감독하였고, 손기정은 그 눈을 견디지 못해 1937년 2학기에 반강제로 보전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편입학하였다.

그런데 도쿄에서도 일본 관헌은 손기정이 마라톤을 달리고 육상경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막았다. 해마다 양력 정초엔 도쿄~하코네 간 대학대항역전대회가 거행되었다.[21] 손기정을 맞은 메이지대학은 그 역전에서 성적을 올리게 되었다고 좋아했으나 그는 달릴 수가 없었다. 일본 관헌이 공중 앞에서 손기정이 달리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결국 손기정은 메이지대학 법대를 졸업한 후 1944년까지 조선저축은행[22]에서 은행원으로 일해야 했다.

2.4. 지도자·체육행정가로서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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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들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손기정 선수
해방 이후 10월 조선체육회가 개최한 '자유해방 경축종합경기대회'에서 손기정은 기수를 맡게 되었다.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서 슬픈 우승을 해야했던 손기정은 개막식에서 태극기를 들고 감격에 겨워 마냥 눈물을 흘렸다.

손기정은 대한민국의 체육계에 큰 공헌을 했다.[23] 그는 각각 1947년과 1950년에 감독으로서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과 함기용을 훈련시켰다. 1948년에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1948 런던 올림픽부터 1964 도쿄 올림픽까지 마라톤 대표팀 감독으로 역임했고, KOREA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참여한 올림픽에서 개막식 기수로 당당히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였다. 이후 1963년에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66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하였다. 1971년에는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1988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역임하였다.

1983년에는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발간하고 베를린 올림픽 당시의 상황과 심정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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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 당시 성화를 들고 주경기장에 들어서는 모습
손기정 옹의 인생 후반부에서 특히 기억되어야 할 장면은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최종 봉송 주자로 뛴 것을 들수 있다. 사실 손기정은 성화 최종 점화자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극비에 붙여져야 할 최종 점화자가 너무나 쉽게 예상되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개막식 2일전 밤, 손기정은 야광봉을 들고 성화봉송 연습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신문사 기자에게 들켰다고 한다.[24] 결국, 손기정이 경기장으로 성화를 들고 들어오는 역할을 하고, 이후 임춘애가 넘겨받은 뒤, 최종적으로 3인의 일반인이 성화를 점화하였다. 손기정의 외손자인 이준승 씨의 회고에 따르면 손기정은 본인이 당연하게 최종 성화 점화자로 선택될거라 생각했는데 대회 직전에 이게 뒤집히자 의자까지 집어던지며 격노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체육계에서 손기정의 위상을 생각해 본다면 무척 자존심이 상했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대회 영상에서 실제 볼 수 있듯이 손기정 옹은 결국 자신의 역할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당시 영상을 보면 손기정은 가슴에 당당하게 태극기를 달고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성화봉송을 했다.[25]일장기 말소사건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대목이다. 나라도 없이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우울한 금메달을 받아들어야 했는데 이제 조국이 올림픽을 유치한다고 하니 그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유튜브에서 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26]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손기정 옹의 영광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는 그 순간, 손기정은 그 현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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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조의 골인 순간에 잡힌 손기정 모습.
한국 올림픽 최고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날과 손기정이 우승한 날은 8월 9일로 똑같다. '''황영조가 결승점에 골인하는 순간,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중계방송은 관중석에 있던 손기정을 '손기정'이라는 이름과 함께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라는 자막과 함께 비춰줬다. 그야말로 한국 올림픽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황영조는 손기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이 끝난 직후 경기장에서 지켜보던 손기정을 만나 격려하는 장면도 유명하다. 이때 황영조의 두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손기정의 사진은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다. 당시 은메달이 일본, 동메달이 독일 선수라 폐막식 때 태극기 양 옆으로 일장기독일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는데, 이걸 보고 손기정은 "56년 전 그날, 한국인인 내가 일본 국기를 달고 독일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 3개의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다"고 감격하기도 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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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촬영된 사진
1996년 가을 강형구(손기정기념재단 공동이사장) 화백의 작업실을 방문한 손기정이 강 화백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강 화백은 캔버스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젊은 손기정의 얼굴을 담았다.

의외로 축구계와도 접점이 있다. 1950년대에 조선방직 대구공장(대구방직)의 상무이사로 재직했었는데, 대구방직이 1951년 1952 헬싱키 올림픽 선수 선발을 겸해서 열린 전국축구선수권 대회에서 당시 한국 축구의 최강팀이었던 육군 특무대를 이기는 파란을 일으키자 김창룡 특무대장이 조선방직의 단장이 누군가 호출했더니 바로 손기정이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2.5. 사망


1997년부터 다리의 동맥경화증 때문에 잘 걷지 못하여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남북대표팀 공동입장, 2002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에 이어 2002 부산 아시안 게임까지 지켜보았지만[28]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통일은 끝내 보지 못한 채, 2002년 11월 15일에 지병이던 만성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인한 숙환으로 타계했다.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으며,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되었다. 모교인 양정중학교양정고등학교[29]의 옛 터가 있는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서울역 뒷쪽)에는 손기정 기념공원이 만들어졌다.[30] 손기정공원에는 손기정기념재단도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79년 5월 손 기정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 의사에 따라 기념품 1,500여 점을 국가에 기증했고, 육영재단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의 어린이회관에 '손기정 전시관' 을 지어 2005년도 기념품을 보관 및 전시하고 있다.

2005년 한 독일인이 손기정에게 헌정하는 앨범을 만들었다.

3.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36 베를린
마라톤

4. 대중매체에서


  • 1982년 KBS 1TV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을 소재로 하여 한국 최초의 스포츠 드라마 '맨발의 영광' 5부작을 방영했다. 극본은 박찬성, 연출은 전세권 PD가 각각 맡았으며 손기정 역은 김영철이, 남승룡 역은 강태기가 연기했고, 그 외 배역들은 장민호와 김세윤, 이치우, 백수련, 이영수, 김길호, 전원주, 김해권, 금보라, 정재순, 우제영, 김숙경, 이대로, 이정웅, 신종섭, 정운용, 김윤형, 이현두, 안광진, 송희남 등이 출연했다. 일부 에피소드 1개는 2020년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자료실에 업로드됐다.

  • 1994년 2월 13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선 배우 차기환이 연기했다.

  • 2011년작 영화 《마이웨이》 초반부에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등장한다. 인력거꾼인 주인공 김준식에게 한 신사가 시간이 급하다면서 최대한 빨리 가달라는 주문을 받고 육상 선수가 꿈으로 꾸준히 연습해 오던 김준식의 속도로 아슬아슬하게 도착하자 신사는 고마워한다. 나중에 김준식이 육상 대회 신청을 하려 하지만 일본인 위원들의 방해로 등록조차 못할 찰나 아까 그 신사가 들어오며 김준식의 참가를 강력히 요구하는데 이 신사가 바로 손기정이었다. 조선인이긴 하지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그의 발언권이 장난이 아닌지라 금방 상황이 정리되면서 김준식의 참가가 이루어졌다. 해당 인물은 배우 윤희원이 연기했다.

5. 기타


  • 가족 관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가정사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아버지 손인석 씨는 베를린 올림픽 개최 1년 전인 1935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 김복녀 씨는 1941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939년에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체육교사이자 단거리 육상 선수 출신인 약혼녀 강복신[31]과 결혼했지만 5년 뒤 부인은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둘의 사랑 이야기는 2016년 7월 10일 방송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강복신 씨 사이에서는 자녀가 2명이 있는데 딸 손문영(1940년생), 아들 손정인(1943년생)이 있다. 손정인 씨는 재일교포거류민단 요코하마지부 사무총장으로 일하였고, 2002 한일 월드컵 때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또한 외손자 이준승 씨는 現 손기정기념관의 관장이기도 하다. 사위, 즉 손문영의 남편이자 이준승의 아버지인 이창훈도 손기정이 키운 선수로, 1958 도쿄 아시안 게임 마라톤 우승자다. 장서가 나란히 마라톤 금메달을 딴 셈이다.

  • 일제강점기의 올림픽 우승자라는 사실이 부각되어 실력자임에는 이견이 없되,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는 덜 알려져 있는데, 12년 동안 세계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거물이었다.[32] 이 기록은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손기정의 제자인 서윤복이 2시간 25분 39초의 기록으로 깼다. 올림픽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였는데 당시 올림픽 마라톤에서 처음으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깼다. 훈련법도 무척이나 독해서 발에 무거운 추를 달고 달리기도 했고, 일본 대표팀이 전부 자고 있을 때 새벽에 일어나서 혼자 훈련을 강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 육상 선수로 최고의 영예를 누리긴 했지만, 본인은 "어릴 적에 스케이트를 살 돈만 있었으면 스케이트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 태극기를 24살 때 처음 보았다고 한다. 베를린 올림픽 우승 이후 일제의 감시를 받던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안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봉근이 운영하는 두부공장에서 몰래 파티를 하며 보여주었다고 한다.

  • 평안북도 신의주시 출신으로 죽을 때까지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으며, "죽기 전에 남북통일이 된다면 신의주 - 부산 간 역전경주 대회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만 했다.

  • 북한 정권에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1946년 평안북도 체육회 창립 당시 체육회 측에서 참가를 끈질기게 종용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서울로 도망친 일화는 유명하다. 이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서 통일원에 방북 신청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고립되었는데 이 때 북한군의 감시를 받아서 한국군이 서울을 탈환할 때까지 숨어지냈다. 북한에서도 자국의 체육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 동안 손기정에 대해서 거의 다루지 않았으나, 21세기가 되면서부터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뛰어서 우승하였고 당시 일장기 말소사건 등이 있었음도 언급하게 되었다. 로동신문에서 손기정의 우승을 이야기하면서 '나라를 잃은 체육인의 금메달은 그 자신에게도 민족 성원들에게도 기쁨과 자랑보다 눈물과 치욕을 더 뼈아프게 자아낸다'라고도 하였다.

  • 생전에 여기저기서 정치 입문을 많이 권유받았는데, 이를 전부 뿌리치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한국 스포츠계의 진흥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 점에서 오늘날에도 순수한 스포츠 영웅으로 칭송받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야말로 한국 근대체육사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손기정 선수가 정치에 가담하지 않았던 원인에는 여운형의 비극적 죽음도 같이 결부되어있다. 여운형은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자 조선 체육계의 대부로서 손기정과 인연이 있었는데, 손기정이 월남한 후 이 인연으로 여운형을 많이 수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여운형이 백색테러로 암살을 당하면서 손기정이 그의 관을 운구하는 비극적 순간도 함께하게 되었다. 조선중앙일보로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심훈과도 인연이 있어, 3명의 후손들이 81년 만에 만나기도 했다.

  • 성품은 시원시원하고 활달하고 농담도 곧잘 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가 손기정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고 한다. 그런데 황영조의 막장 행보에 따른 구설수를 생각하면 손기정에게 실례다.

  • 은퇴 이후에도 꾸준히 달리기를 하여 건강을 유지했기 때문에, 거의 한 세기를 살다시피 장수할 수 있었다.

  • 항상 마라톤을 하면서 얼굴이 반쪽이 된 사진만 찍혀서 그렇지 알고 보면 미남이다. 인터넷에서 중년시절 사진을 찾아보면 꽤나 잘생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젊었을 때도 꽤나 훈남이다.

  • 자서전으로는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베를린에서의 우승, 해방 전후의 사건들에 대해서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부분으로는, 이 자서전은 1983년에 출판되어서 그 이후의 일인 1988 서울 올림픽 때의 성화 봉송이나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의 이야기 등은 없다는 점이다.

  • 1956년 레니 리펜슈탈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데, 손기정은 평소 정치랑 스포츠는 별개라 생각했으며 리펜슈탈은 결백하다 생각했다. 참고로 리펜슈탈 씨가 손기정보다 10살 많은데 90세에 사망한 손기정보다 1년 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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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시절 최승희와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지금 현재 최고의 스포츠 스타와 최고의 연예인이 같이 찍은 사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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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의 성화봉송 주자로 발탁되기도 했다. 이 때 손기정으로부터 성화를 넘겨받은 인물이 바로 새미 리였다. 둘의 우정은 생각보다 오래 됐는데, 1947년에 손기정이 보스턴 마라톤에 제자들을 이끌고 참가했을 때 처음 만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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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전 발자국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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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필가로 유명한 김형석(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은 손기정 말년의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한다(《백년을 살아보니》, 42~44면. 아래 '최 세무사'에게서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손기정: 최 선생, 바쁘지 않으면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어? 내가 요사이 어디서 상을 받은 것이 있는데, 상금도 생겼다고. 그래서 공짜로 생긴 돈이니까 세금을 먼저 내고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왔는데,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어.
최 세무사: 선생님은 연세도 높고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신고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손기정: 그럴 수는 없지. 내가 지금까지 한평생 얼마나 많은 혜택을 국가로부터 받고 살았는데, 세금을 먼저 내야지. 내가 이제 나라를 위해 도움을 줄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아?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손기정: (세무사가 계산해 준 내역을 보고서) 고것밖에 안 되나? 그렇게 적은 돈이면 내나 마나지. 좀 더 많이 내는 방법으로 바꿀 수는 없나?
손기정: (세무사가 법적으로 가장 많이 낼 수 있는 방법으로 다시 계산해 주자) 됐어, 그만큼은 내야지. 그래야 마음이 편하지......



  •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의 58번째 드라마 이다텐 ~도쿄 올림픽 이야기~가 3부작 47편 정도가 제작 된다고 한다. 시대배경이 스톡홀름, 베를린, 도쿄 올림픽 중에서 2부에 해당하는 1936 베를린 올림픽이 주요 배경인데 과연 손기정 옹이 어떤 모습으로 묘사될지 궁금한 상황이다. 다름아닌 손기정 옹이 금메달 리스트이기 때문에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인물이기 때문이다.[33] 앞서 언급된 드라마 이다텐의 2019년 9월 15일 방영분에서 남승룡과 등장하였는데, 직접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에 실제로 촬영되었던 영상들을 이용하여 등장시켰다. 해당 화 내내 등장하는 일본인들은 대부분 '조선인' 손기정과 남승룡이라고 언급을 하며, 주인공 카나쿠리 시소와 같은 신발을 신고 마라톤에 출전하는 것으로 나오며, 제일 마지막에는 손기정과 남승룡이 금메달과 동메달을 땄을 당시 일본인들이 손기정의 금메달에 환호를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와 함께, 나레이션으로 손기정과 남승룡은 수상식때 국기가 올라가고 국가가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라는 이야기가 부연되며 등장인물 중 한 명이 '과연 저 사람들 심정은 어떠할까'하면서 침울해 하는 장면이 나온다.[34] 이에 대해서 카나쿠리 시조에게 신발을 만들어주는 쿠로사키 신사쿠가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미국인이든 자신이 만든 신발을 신고 뛰어서 금메달을 땄다면 그것만으로 '그냥 기쁘다'라는 대사를 한다. 다만, 작중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이 조선인임을 꽤나 강조하고 올림픽 정신과 연결하는 온정적인 형태의 저러한 표현과는 별개로 당시에 여러 일본인들이 손기정과 남승룡을 일본 대표에서 배제시키기 위하여 내내 벌였던 여러가지 치졸한 악행들은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 2019년 4월 17일에 손기정의 일생을 일본어로 기록한 평전이 일본에서 출간되었다.


  • 현재 IOC 홈페이지에서의 소개문과 약력에는 당시 세운 기록과 함께 일본의 강요로 일본식 이름 표기를 사용한 것, 일장기 말소 사건, 독립 이후 공식 대회에 기수(1948년)와 성화봉송자(1988년)로 참여한 기록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 2020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올림픽 박물관에서 손기정을 자국의 금메달리스트로 전시했는데 손기정 재단과는 사전에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 당시에는 국적이 일본이었으며, 엄연히 일본의 메달이니 한국 측에서 이걸 제지할 명분은 없긴 하지만, 금메달을 따고도 융숭한 대접은커녕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핍박을 가했으며 (외손자 말마따나) 손기정 선수가 별세했을 때도 조문조차 오지 않았으면서 이럴 때만 자국의 역사적인 인물이었다고 슬쩍 끼워넣으니 이중적으로 보일 여지가 다분하다.

5.1.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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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이 기증한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1936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우승의 부상으로 그리스의 한 신문사가 손기정에게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를 주려 했으나 당시 IOC 규정이 메달 이외의 부상을 수여할 수 없는 걸로 바뀌는 바람에 받지 못했다. 게다가 일본조차 식민지 청년이 더 유명해지는걸 원하지 않아서 거절했다. 그래서 독일 박물관에 보관하다가 그리스 언론사의 주선을 받아 반환시도한지 10년이 지난 1986년 베를린 올림픽 50주년을 기념해서 손기정 선수 본인에게 반환되었다. 이후 집에서 보관하다가 손기정이 1994년 대한민국에 기증하였다. 이 투구는 현재 대한민국 보물 904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자세한 것은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문서 참고.
[1] 진주사공파 46세손으로 손원일의 7촌 조카다.[2] 아돌프 히틀러와 만난 소감을 말할 때는 본인의 키를 160cm라고 언급했다. 아마도 당시 서양 사람들과의 체격차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줄여 말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80대 고령의 나이에도 170cm의 황영조와 대등했기에 전성기의 키는 그보다 컸을 가능성도 있다.[3] 19대조 승지 손후(垕)가 사화에 연루되어 철산으로 귀양을 간 뒤 정착했다.[4] 5분 53초경부터 손기정이 경기장에 1등으로 진입하고, 관중들이 환호하는 모습이 나온다. 6분 53초 경에 남승룡이 입장하는 모습도 보인다. 한편 씁쓸하게도, 해설위원은 '일본의 키테이 손', 그리고 '또 다른 일본인 선수, 남'이라고 외친다.[5] 위 독일 방송의 영상에 소리를 덧씌웠다.(한국어 자막 있음)[6] 왜냐하면 당시 일제는 곧 벌어지는 중국과의 전쟁에서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한반도도 일본이고 거기 사는 사람들도 모두 일본인이다라는 사상인데 그 사상대로면 애초에 '순수 일본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상의 모순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7] 세계 기록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올림픽 기록이 맞다. 사실 손기정은 당시 세계 기록도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마라톤은 신기록 개념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고 최고기록으로 표기한다. 마라톤은 기온과 습도, 바람 등의 여건이 대회마다 다르고, 급경사코스와 직선코스가 다르며, 거리에서도 오차가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다른 육상 종목 기록이 갖고 있는 엄밀성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라톤에서는 ‘신기록’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최고 기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코스 거리, 출발지와 결승점 간 표고차, 출발지와 결승점 간 직선거리 등을 규정함으로써 나름대로 기록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8] 현재와 같이 메달에 목걸이를 달아서 목에 걸 수 있게 만든 것은 1960 로마 올림픽 때 시작되었고, 당시에는 큼직한 동전 형태로 상자에 넣어 주었다. 아래 시상식 사진에서 선수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메달상자이다.[9] 1982년 서울시기념물로 지정될 때 밝혀지길 이 묘목은 월계수가 아니고 대왕참나무이다. 모교인 양정중학교 & 양정고등학교의 교정에 심어졌으며, 양정중고가 목동으로 이전한 후 만들어진 손기정 공원에 남아있다. 현재는 거목으로 자랐고, 서울시기념물 5호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로 보호받고 있다.[10] 이름은 어니스트 하퍼이며, 이 사람도 꽤나 대인스러운 일화가 있었다. 이 대회 마라톤 경기의 우승 후보는 이전 대회 마라톤 우승자였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스 자발라였는데, 마라톤 경기 도중 선두를 달리고 있는 자발라를 제치려고 손기정이 무리하게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같이 달리던 하퍼가 손기정에게 "그는 어차피 금방 지칠거니깐 무리하지 말라."며 조언을 해줬다. 이 조언을 받아들인 손기정은 1위, 하퍼는 2위를 차지했고, 자발라는 이내 기권했다. 하퍼의 충고가 없었다면 아마도 손기정도 무리해서 자발라를 추월하다가 뒤쳐졌을 수도 있으니, 손기정에게도 나름대로 은인인 셈이다.[11] 사진을 자세히 보면, 남승룡이 바지를 최대한 위로 올려서 입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남승룡 본인도 일장기를 가리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이다.[12] アルゼンチン{亞爾然丁} ; 아르헨티나.[13] 이 부분에서 소리가 작아진다.[14] 가이드가 붙는 베를린 올림피아 슈타디온 투어를 하면 박 의원이 너무 정교하게 바꾼 나머지 한참 나중에서야 일본사람이 지적해서 알아냈다는 얘기까지도 들을 수 있다. 가이드가 혹 감정이 상할까 봐 일본사람 한국사람 없는지 확인까지 하고서 해준다.[15]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소련에 있던 15개 국가나,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있던 7개 국가와 구 동독 국적의 선수였던 통일 독일이 이런 경우이며 1948년 이전에 중화민국 국적으로 뛴 선수들이 1952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소속이 바뀐 경우도 이와 같다.(중화인민공화국의 첫 출전은 1980년 동계라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소속을 바꾸어 참가한 선수는 없다. 다만 대륙 출신으로 대만으로 넘어가 지내다가 대륙으로 돌아감으로써, 양쪽 대표를 다 해보고 메달도 양쪽 대표로 다 따본 선수는 있긴 하다.)[16] 외국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기록에서 손기정의 국적을 한국으로 나타낸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기록 작성/편집자의 자의적인 생각이 강하며,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공식 인정한 것은 아니다.[17] 1936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이후 1948 런던 올림픽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선수도 몇 있다. 이들 모두 두 번 다 메달을 따지 못해서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다.[18] 이 명판은 잠실야구장잠실실내체육관을 잇는 길 중간에 있다. 올림픽공원의 경우 국기광장에서 호수쪽으로 내려오면 반원형으로 명패가 쭉 있다.[19] 이 문제는 앞으로도 탈북자가 더 많아지면 상당히 골치아픈 일이 될 수 있다. 이 선수의 경우야 국제대회 입상 실적이 연금을 받을 정도까지는 되지 않으므로 문제가 안 되지만, 넘어오기 전에 올림픽 메달을 딴 후 남으로 넘어왔을 때(또는 남쪽이 북쪽을 흡수하는 통일을 했을 때) 이 선수의 예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연금 등에서 대한민국 대표선수로 메달 딴 것과 동등한 대우를 하여야 하는가도 형평성 논란이 될 수 있다. 동등한 대우를 하든, 하지 않든 논란이 된다. 대한민국 대표로 딴 것이 아니니 똑같은 대우를 할 수 없다면 일본 대표로 메달 딴 선수(손기정과 남승룡은 살아 있었을 때 대한민국 대표로 메달 딴 선수들과 똑같이 연금을 받았다.)와의 형평성 문제가 생기며('대한민국 사람이지만 나라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일장기를 달았다.'와 '대한민국 사람이지만 반국가단체에 억류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인공기를 달았다.'는 서로 같은 논리가 될 수도 있다.), 똑같은 대우를 한다면 한국으로 귀화한 외국인 메달리스트에 대해서도 형평성 문제가 된다. 또한 남북 단일팀으로 메달을 딴 남측 선수(대한민국 대표로 메달을 딴 선수와 동등하게 대우하고 있다.)와의 형평성 문제도 생긴다.[20] 3년제 보성전문학교 상과의 한 학년 정원은 100명 가량이었는데, 농구, 럭비, 육상, 축구 등 종목에서 선수를 뽑았더니, 과장된 표현을 섞어 전후 좌우로 한 학생 건너 운동 선수가 배치되었다고 한다. 남자프로농구 삼성 조승연(趙勝延) 단장의 부친 조득준(趙得俊)은 손기정과 함께 그 해에 상과에 입학했는데, 1938년부터 1940년까지 3대회 연속 전일본종합농구선수권대회를 평정하는 보전 농구부의 주력센터였다.[21] 하코네도쿄에서 서쪽으로 200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명승지인데 그 사이를 각 대학팀이 왕복하며 겨루는 역전경주는 일본의 한해를 여는 풍물시(風物詩)였다.[22]SC제일은행의 전신이다.[23] 사실 선수로서의 손기정은 냉정하게 말하면 일본만 좋은 일을 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우승이 조선인 민족 정신 고취라는 뜻하지 않은 효과를 거두었고, 일본은 그에게 마땅한 대우는 커녕 핍박을 일삼았다. 이제 지도자가 되면서 진정으로 '한국'을 위해 일을 한 것이다.[24] 손자의 증언에 따르면 성화봉송 때 자신이 있었고 멋있게 달리기 위해 1년이나 훈련했다고 한다. 사실 그정도였으니 그때까지 들키지 않은게 이상하다.[25] 아들의 말에 따르면 1년 전부터 달리기 위해 건강관리를 했다고한다[26] 성화가 꺼질 기세로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2시간 5분 47초까지 해당된다.[27] 사실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가 남승룡이다.일본 꼽사리 꼈다[28]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성화봉송 주자로 손기정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이미 2002년 시점에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29] 1918년부터 1988년까지 만리동에 있었다. 1988년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하였다.[30] 베를린 올림픽 때 받은 금메달과 상장은 육영재단이 가지고 있었는데, 유족들이 장례식 때 잠시 빌려 달라고 했지만 육영재단이 거부했다.[31] 1938년에 신문에서 이 둘의 로맨스가 보도되기도 했다.[32] 공식 세계신기록은 1936년 2시간 26분 42초, 비공식 세계신기록은 1935년 2시간 25분 14초이다.[33] 다만 걱정되는 것이 다른 배역들은 이미 다 정해진 상황이나 손기정 남승룡 선생님은 누가 맡는지 알려지지 않았고 그러면서 드라마의 공식 사이트도 일본내에서만 볼 수 있게 막아놓은 상황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름만 거론되거나 등장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34] 전반적인 뉘앙스상 조선인임에도 일본국적으로 출전하여서 일본 국가를 수상대에서 들어야하는 저 선수들의 심정이 과연 어떠할까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