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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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萬榮
? ~ 697년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대조영>


1. 개요[편집]


거란가한으로 이진충의 처남이다.


2. 생애[편집]


이진충의 처남이자 손오조의 증손으로 이진충보다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귀성주자사로 있다가 696년에 조문홰가 거란 사람들을 무시했는데,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이에 손만영은 원한을 품고 5월 12일에 이진충과 함께 봉기해 영주를 함락시키고 조문홰를 죽인 뒤, 숭주에서 토격부사 허흠적을 생포했으며, 이로 인해 측천무후는 이진충[1]을 '이진멸'(李盡滅)[2]로, 손만영[3]을 '손만참'(孫萬斬)[4]이라고 불렀다. 이진충이 '무상가한'이 되자 선봉이 되어 각 지역을 공격해 가는 곳마다 함락시키면서 10일만에 군대를 수만 명이나 모아 진군했다.

손만영이 반란을 일으킬 당시 당 황실의 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당 고종 후기의 독정 이래 측천무후는 신료와 당 황실의 여러 왕을 대내적으로 숙청하고, 대외적으로는 연거푸 출정하여 주변 소수민족의 반란을 단순히 무력으로 평정하려고 했다. 이는 국정을 요동치게 하고, 불안하게 했으며, 군비를 상승시키고, 징발을 날로 증가시켰다. 또한 손만영은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인질로 있었던 이래, 당나라의 허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고 한다.

696 8월에는 서협석곡의 황장곡 대전에서 기만술로[5] 조인사[6]장현우, 마인절을 포로로 잡은 데 이어 이들로 하여금 거짓 첩문을 쓰게 하고, 장현우 등의 서명을 얻은 뒤 연비석과 종회창의 대군을 몰살시켰다.

9월에 이진충이 죽자 가한이 되었다. 그러나 이진충이 죽은 틈을 타 돌궐 제2제국의 묵철가한이 송막 부락을 공격하여 이진충과 손만영의 아내를 잡아갔다. 그러자 손만영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낙무정과 하아소를 선봉으로 삼아 10월에 기주를 빼앗고, 자사 육보적을 비롯한 수천 명을 학살한 뒤 영주를 공격해 하북을 진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당 황실인 농서 이씨를 지지하는 명분을 내세웠고 하북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 여릉왕을 폐위했는가?

이후에는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 안동도호부를 공략했으나 도호부사 배현규 및 요동주도독 고구수에 의해 저지당했다. 손만영은 전투 직전 이전에 포로로 잡은 허흠적으로 하여금 배현규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허흠적이 오히려 끝까지 싸우라고 하고, 미친 도적에게는 반드시 화가 닥칠 것이라고 하자, 분노한 손만영은 허흠적을 참살했고 안동도호부가 있는 신성을 공략했으나, 도호부사 배현규와 요동주도독 고구수에게 가로막힌다.

697년 2월에는 왕효걸, 소굉휘가 이끄는 180,000명의 대군을 격파했고[7] 동협석곡 대전 승리 이후, 유주로 지원 온 무유의의 군대까지 격퇴한 후, 신병도행군 대총관 무의종이 조주에서 거란군과 싸우지도 않고 상주로 도망치자[8], 조주에서 대학살을 벌였다.

유성의 서북쪽 400리에 있는 험한 곳에 성을 쌓으면서 을원우에게 수비를 맡기고 유주를 침략했으며, 단주를 포위했다가 6월에 해족 사람들이 배반하여 기습 공격을 받았다.

무유의의 당군과 유주에서 대치하던 와중, 당나라의 뇌물에 넘어간 돌궐 제2제국의 묵철가한의 공격을 받아 요하강 상류인 시라무렌 강 유역에 있는 본거지가 무너지면서 휘하의 거란 민중들이 동요하게 된 데 이어 신병도총관 양현기[9]가 이를 공격하여 하북 전선에 나가있던 손만영과 그 군대도 사기를 잃고 패퇴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변도부총관 장구절에게 패배하고 말았다.[10] 노수의 동쪽으로 도망갔다가 가노에게 살해당했고, 수급은 수도 낙양으로 보내졌다. 그후 손만영의 남은 무리들은 돌궐 제2제국에 투항했다.

자치통감》에는 이때 손만영이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조정(무주)에 항복해도 죽고, 돌궐로 도망가도 죽을 테고, 신라로 건너가도 죽을 텐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망명지로 돌궐과 함께 신라를 언급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3.1. 드라마 <대조영>[편집]


파일:손만영.jpg
배우는 조인표.[11] 처음 나올 때는 이진충의 처남으로 나오는데, 설인귀가 내민 협조 요청, 즉 영주를 내주는 조건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자는 걸 같이 수락하는 걸로 나오며 이후 이진충과 같이 영주 보호를 위해 당나라 조정의 정책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조문홰가 거란인들에게 폭정을 하고 뒤에서 이문이 거란인들이 봉기하도록 조장해 괴롭히는데, 거란인들이 봉기하면서 이문이 거란인들을 진압하자 이진충과 함께 붙잡혀 고문당하는 고초를 겪다가 대조영, 대중상, 이진충의 손자 이검이 영주성을 해방시키자 구출된다.

당나라와 거란족의 전면전이 시작된 이후, 대조영과 이진충의 밀담을 부하를 통해 들었다. 이때 대조영을 후계로 삼는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자 자신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면서 후계를 빼앗길 수 없다고 했다. 또한 당나라가 대중상을 진국공에 봉하는 등 이간책을 사용할 때, 이진충이 대조영을 의심하게 되면서 분노에 치밀어 쓰러지자 부족회의에 따라 신흥과 같이 임시로 정사를 맡게 되었다.

대조영과 거란 간의 대립속에서 자주 이해고를 위하던 신홍의 꼬드김을 받는 모습을 보이고 이검이 대조영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은 후, 이진충을 죽이려고 시도했지만 죽이지 못했다. 하지만 손만영이 자신을 암살하려던 이유를 들은 이진충은 용서했다. 그후 이진충이 신홍에게 살해당했을 때 대조영이 이진충으로부터 미리 받은 유서를 통해 손만영을 후계자로 삼은 사실이 남겨졌기에 이에 따라 새로운 가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12]

유서에 따라 대조영과의 약속을 지켜 그와 고구려 유민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려고 했지만 신홍 및 이해고 등의 반대에 부딪혔으며[13] 설인귀가 거란을 직접 찾아와 당나라와의 수교를 맺자고 하자 거절하려고 했지만 신홍, 이해고 등이 요동의 대조영을 공격하자고 설득하자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고, 당나라의 주선으로 돌궐에서 형식적으로 신하 관계가 되겠다고 요청을 해서였는지 오만해지기 시작했다.[14][15]

그러나 이는 거란을 멸망시키기 위한 당나라의 계략이었고 이해고가 대조영이 있던 요동을 공격한 틈을 타서 영주가 돌궐의 공격을 받아 패했으며 포로로 잡히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마지막으로 초린에게 서찰을 보내 대조영이 지원군을 이끌고 오게끔 유도한 후, 요하성에 있는 거란군에게 대조영의 지원군이 오니 항복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연설하다가 묵철이 날린 도끼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허나 눈앞에서 자신들의 가한이 죽고, 지원군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된 거란군은 굶주림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돌궐과 당나라 대군의 수차례에 걸친 공격을 버텨냈다.

비록 이진충의 유지를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으나 거란국 2대 가한으로서의 역할에는 충실한 편이다. 그 예로 영주성이 함락되었을 때, 백성들을 빼돌리려한다며 대중상과 그 휘하 장수들을 모두 죽이려했지만, 이들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백성들을 모으지 못했을 것이라는 검이의 두둔으로 대중상 일행과 합류하여 같이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추격대와 조우하여 발이 묶일 상황이 되자, 이 과정에서 스스로 미끼가 되어 백성들이 탈출할 수 있게 시간을 끌어주었다. 이때 손만영의 희생이 없었으면 백성들과 대중상 일행 또한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대조영은 나라를 건국할 기반을 다지는 데 더 긴 시간이 걸렸을 지도 모른다.

사실 <대조영> 역사왜곡 피해자로 이진충보다 더 큰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수차례 무주의 대군을 격파한 전적이 있는 실제 역사상 대조영의 숙적이었다.

대조영은 손만영이 죽은 뒤에야 고구려 유민들을 데리고 나왔으며, 이진충의 뒤를 이어 가한이 된 이후에도 무주의 18만 대군을 격파하는 군재를 선보인 거물 중 한 명이었다.

[1] 충성을 다하다.[2] 완전히 죽여버리다.[3] 만세토록 영화롭다.[4] 10,000번이고 참수하겠다.[5] 무주군의 포로들을 석방해 무주군의 방심을 유도했고, 선봉 조인사와 장현우, 마인절이 기병만을 이끌고 서협석곡의 황장곡에 도착하자마자 늙은이들을 내보내 고의적으로 방심을 유도했다.[6]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패배했다는 기록만이 있으나, 《자치통감》에는 조인사도 사로잡혔다고 나와 있다.[7] 전투 과정은 이렇다. 왕효걸이 이끄는 소규모의 부대가 손만영의 군대와 맞서 싸웠는데, 손만영은 이 부대를 동협석곡으로 유인했다. 그러나 소굉휘의 부대가 지원을 오지 않아 왕효걸의 부대는 어이없이 무너지고, 왕효걸은 자결했다. 나중에 장열이 이 과정을 무측천에게 자세히 보고했다.[8]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기록이 없지만 《자치통감》과 《전당문》의 <위하내왕무의종거란적등노포>에는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9] 신병도행군 대총관 무의종 휘하였다. 돌궐 제2제국의 초대 가한인 힐질리시가한의 공격을 막아낸 사람이었다.[10] 이 과정에서 하아소, 마행위, 양봉절, 이해고, 낙무정이 생포되었다. 이해고와 낙무정은 이후 무주에 중용되어 이진충의 잔당을 소탕했으나, 하아소와 마행위, 양봉절은 처형되었다. 이해고와 낙무정의 경우, 다른 신하들이 처형을 주장했으나, 재주를 아까워한 적인걸에 의해 구면된 것이었다.[11] <태조 왕건>에서 김언, <광개토태왕>에서 모용희 역을 맡았다.[12] 이진충은 초린을 추천하여 이해고가 자연스럽게 거란 가한국을 통치할 수 있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외손자가 고구려 핏줄이라는것을 알게 되면서 어쩔수 없이 손만영에게 가한위를 물려주고 대조영에게는 훗날 자신이 없더라도 거란국을 잘 챙겨달라고 부탁을 하게 된다.[13] 이진충의 유지에 따라서 가한이 된 이후부터는 기존과 달리 어느 정도 완강해지긴 했지만 경륜과 생각 등 모든 것에서 앞서서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이진충에 비하면 손만영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어떻게든 신홍을 저지했지만 처음 이후부터는 신홍도 모자라서 이해고까지 개입하다보니 손만영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둘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14] 돌궐 사신들과의 술자리에서 사신들에게 막말을 하는 것은 물론 술까지 끼얹었다. 중간에 설인귀가 말리는기는 했으나 설인귀 역시 뒤에서 손만영이 오만방자해졌다고 쓴소리를 한 것은 덤.[15] 이는 과거 손만영이 반란을 일으키기 이전 이진충에게 들었던 말이 사실로 체크되었다. 이진충은 손만영에게 "자네는 왕을 보좌할 사람이지 왕이 될 사람이 아니네."라는 충고를 했다. 하지만 당시 권좌에 눈이 멀었던 손만영에게는 그저 쓴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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