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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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지환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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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K 와이번스 우승 엠블럼 V4.svg파일:SSG 랜더스 우승 엠블럼 V5.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2018
2022

LG 트윈스 등번호 3번
조현
(1995~1996)

손지환
(1997~2003)


박기남
(2004~2006)
KIA 타이거즈 등번호 33번
심제훈
(2003)

손지환
(2004~2006)


김주형
(2007~2008)
KIA 타이거즈 등번호 5번
김주형
(2004~2006)

손지환
(2007)


유용목
(2008~200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번
김종훈
(1997.6.27.~2007)

손지환
(2008)


손주인
(2009)
SK 와이번스 등번호 67번
김장준
(2001~2004)

손지환
(2009)


박진원
(2010~2012)
한화 이글스 등번호 93번
백재호
(2009)

손지환
(2010)


문동환
(2011~2012)
SK 와이번스 등번호 97번
최윤철
(2012)

손지환
(2013)


김대유
(2014)
SK 와이번스 등번호 75번
김용희
(2012~2013)

손지환
(2014~2020)


이진영
(2021~2023)
SSG 랜더스 등번호 71번
김경태
(2012~2020)

손지환
(2021~2023)


이숭용
(2024~)




손지환
孫智煥 | Son Jihwan

출생
1978년 11월 13일 (45세)
서울특별시 관악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인헌초 - 휘문중 - 휘문고
신체
180cm, 87kg
포지션
2루수, 3루수, 유격수, 좌익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7년 고졸우선지명 (LG)
소속팀
LG 트윈스 (1997~2003)
KIA 타이거즈 (2004~2007)
삼성 라이온즈 (2008)
SK 와이번스 (2009)
코리아 해치[1] (2010)
한화 이글스 (2010)
지도자
SK 와이번스 루키팀 수비코치 (2013~2016)[2]
SK 와이번스 1군 타격보조코치 (2016)[3]
SK 와이번스 루키군 야수코치 (2017)
SK 와이번스 2군 수비코치 (2018)[4]
SK 와이번스 1군 수비코치 (2018~2019)[5]
SK 와이번스 2군 수비코치 (2020)
SSG 랜더스 1군 수비코치 (2021~2023)
프런트
SK 와이번스 일반인 야구교실 코치 (2011~2012)
응원가
새우깡 CM송[6], 하하하쏭[7]
기록
무보살 삼중살 (2007.6.13)[8]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프런트 경력
3.1. SK 와이번스 프런트
4. 지도자 경력
5. 연도별 주요 성적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LG 트윈스, 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소속 내야수. SSG 랜더스의 1군 수비코치.

최익성 못지않게 여러 팀에서 뛰어 본 적이 있는 저니맨 중 한명이다.[9] 현역 시절 KBO 리그 최초이자 유일한 무보살 삼중살을 성공한 적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휘문고 3학년 때인 1996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 등 2관왕의 주역이 되며 초고교급 내야수로 큰 관심을 받았다. 특히 서울을 연고로 하던 LG 트윈스OB 베어스의 관심을 동시에 받았는데[10] LG 팬들은 '제2의 유지현'이 될 것이라 기대했고 OB 팬들은 '제2의 김민호'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휘문고 졸업을 앞두고 야구 인생이 꼬이는 일이 발생한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 초고교급 선수들에게 거의 매년 관행처럼 벌어졌던 프로-대학 간 스카우트 과열 경쟁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당시 손지환은 연세대 97학번 진학이 확정된 상태로 연세대 입학처에 가등록한 상태였으나 이와 별도로 LG 트윈스는 연고지 내 고졸 우선 지명의 3번 픽으로 손지환을 지명했고 1996년 11월 손지환이 LG와 계약금 2억8천만원, 연봉 2천만원 등 총액 3억원 조건으로 입단 계약을 체결하면서 이중으로 선수 신분을 등록하게 됐다. 여기에 손지환의 동기이자 덕수상고의 초고교급 에이스였던 김민기 역시 연세대 진학이 확정된 상황에서 LG의 고졸 우선 지명 1번 픽 지명을 받았고 손지환과 같은 조건으로 입단 계약을 맺었다.

사실 손지환과 김민기처럼 대학 진학과 프로 입단을 동시에 약속하다가 한쪽을 파토내는 사례는 1990년대까지 비일비재했다. 특히 대학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고교 졸업 후 프로행을 택한 사례가 대부분이었는데 1992년 말 원광대 93학번으로 진학을 확정한 공주고 노장진이 훈련 숙소를 뛰쳐나와 돌연 빙그레에 입단했고 1993년 말에는 연세대 94학번으로 진학이 나란히 예정됐던 신일고 김재현광주일고 이호준이 각각 LG 트윈스와 해태 타이거즈 입단으로 진로를 바꿨다. 또 1994년 말에는 한양대 95학번으로 입학할 예정이던 경북고 이승엽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으며 1995년 말에는 고려대 96학번 진학이 결정됐던 인천고 박진만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한 것이[11] 대표적 사례다.

이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대졸 선수가 다수를 이루던 당시 야구계 환경과 "명문대 졸업장은 따놔야 사회에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돌던 사회 풍조[12] 탓이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야구의 위상은 매우 높았다. 지금이야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프로로 직행하고 고교야구에서 실력이 다소 뒤처지는 선수들이 대학 진학을 택한 뒤 프로 진출을 다시 노리는 상황으로 대학야구의 위상이 많이 추락했지만 이 시절까지만 해도 학생야구의 종착역은 무조건 대학야구였다. 선수들의 프로필을 보면 대부분이 대졸이었고 고졸 선수들은 몇명 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날고 기던 선수들이 대부분 대학으로 진학해서 기량을 닦은 뒤 프로에 완성형 선수로 진출하는 것이 1990년대 후반까지 KBO 리그의 대세였다.

그래서 고교야구의 우수한 선수들을 두고 대학과 프로팀 간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했다. 예를 들어 대학 측에서 자신들이 점찍어둔 선수에게 4년간 장학금 지원 및 동기들 몇 명을 같이 데리고 입학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한 뒤 해당 고교 출신 선배들을 동원하거나 다른 학교나 프로팀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방 호텔에 감금해놓으면 이걸 또 프로 팀 스카우터가 뒤를 밟아 해당 선수를 도로 빼돌린 뒤 선수의 부모님에게 연락해 높은 액수의 계약금을 제시하는 등 온갖 웃지못할 해프닝이 많았다.

어쨌든 노장진, 김재현, 이호준, 이승엽, 박진만 등에 이어 김민기와 손지환까지 연거푸 프로팀으로 뺏길 처지가 되자 대학야구 관계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했고 급기야 '앞으로 휘문고 선수들을 절대 받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하면서 프로와 대학이 전면 대립하는 초유의 스카우트 파동으로 비화되었다. 사건이 일파만파되자 휘문고 측에서는 학교 명예를 실추시킨 책임을 물어 손지환에게 자퇴를 종용했고 이명섭 당시 휘문고 감독을 물러나게 했다.[13]

물론 이 파동은 우여곡절 끝에 진화됐다. 대학야구 측이 휘문고와의 손절을 언급했지만 따지고 보면 대학이 특정 고교 출신 선수 수급을 거부하는 행위는 제 발등에 도끼를 찍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행동이어서 휘문고 선수의 대학 진학 보이콧을 조용히 철회했다. 그리고 이 사태를 계기로 서로를 죽일듯이 위협했던 프로야구와 아마야구 간의 분쟁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손지환도 어찌저찌 휘문고 졸업장을 받고 정상적으로 LG 유니폼을 입게 됐지만 이미 안팎으로 큰 상처를 받고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손지환 스카우트 파동의 여파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쪽은 휘문고 야구부였다.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는데 휘문고 유니폼을 벗은 이명섭 전 감독이 춘천고 감독으로 가는 과정에서[14] 당시 휘문고에서 뛰던 저학년 선수들 일부가 이 전 감독을 따라 춘천고로 전학을 가는 바람에[15] 휘문의 전성기가 어이없이 종료되고 말았다. 다행히 정병희, 우규민, 지석훈 등 유망주들이 입학하면서 휘문의 암흑기는 오래 가지 않았지만 당시의 파동은 여파가 상당했다.

2.2. LG 트윈스[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620195531625G.jpg

(출처 : 포토로)

우여곡절 끝에 1997년 고졸우선지명으로 김민기, 박만채와 함께 LG에서 데뷔했다.

입단 당시까지만 해도 유지현을 이을 LG의 차세대 주전 내야수로 꼽혔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명성에 비해서는 성장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저 그런 내야 백업에 그쳤다. 그나마 LG에서 많이 나온 해가 2002년. 김성근 감독 시절 내야 백업으로 111경기를 소화하였다. 하지만 그나마 쓸만했던 수비에 비해 타격은 형편없었고, 그래도 고교 시절 보여줬던 모습이 있었기에 끊임없이 트레이드 떡밥이 돌다가[16] 결국 2003 시즌 후 진필중의 FA 보상 선수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2.3. KIA 타이거즈[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40418192634254.jpg

(출처 : 포토로)

진필중의 보상선수로 KIA로 이적한 뒤, 성장이 지지부진했던 이현곤을 밀어내고 주전 3루수 자리를 차지했고, 114경기에 나서 타율 0.271, 13홈런, 42타점을 기록하며 LG 시절과 비교하면 환골탈태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한 방 쳐줄 수 있는 타자로 거듭났다. 2005년에도 타율 0.278, 11홈런, 44타점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면서 어째 FA로 이적한 진필중보다 더 쏠쏠하게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7]. KIA 시절에는 주로 3루수나 2루수로 출장했고, 가끔 좌익수로도 출장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 공격에서는 한 방 기대해 줄 수 있음과 동시에 수비에서는 멀티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가 되었다.

거기에 2005년 5월 15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친정팀 LG와의 경기에서는 보란 듯이 홈런 2방을 포함해 혼자 7타점을 뽑아 냈는데, 이중 홈런 1개는 자신과 유니폼을 맞바꿔입은 진필중으로부터 뽑아낸 홈런이었다. 혹자는 누가 FA고 누가 보상선수냐?라고 하기도….

2006년과 2007년은 예전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2007년 6월 12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무보살 삼중살을 펼치는 메이저리그식 장면을 연출했다.[18] 더군다나 이틀 뒤인 14일 경기에서는 삼성을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5타수 4안타 6타점으로 맹활약한 바 있다. 오죽하면 삼성이 2007시즌 삼중살 때문에 낚여서 손지환을 데려가서 써먹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다.

2.4. 삼성 라이온즈[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80311172651731.jpg

(출처 : 포토로)

2008 시즌을 앞두고 유용목과 맞트레이드되어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었지만 부상에 시달리며 이후 이팀 저팀 떠돌아다니는 저니맨 신세로 몰락하고 만다.[19] 그러다가 시즌 막판 4위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한화와의 경기에서 박석민의 홈런 이후 송진우를 상대로 역전 솔로 홈런을 쳤으며 팀을 기적의 4강으로 올려야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0] 08 시즌에는 페넌트레이스 전용이며 포스트시즌 전용은 신명철에게 돌아갔다. 시즌 후 삼성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으며 1년만에 유니폼을 벗고 말았다.

2.5. SK 와이번스[편집]



파일:SK손지환.jpg


삼성에서 방출된 뒤 친정팀인 LG 트윈스로 간다는 말도 있었으나 LG 시절 함께했던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아 2009년에는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등번호는 67번으로 휘문고 재학 시절 달던 등번호를 다시 달게 되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너무 의욕적이었는지, 스프링캠프 첫 날부터 발목 골절상을 당해 귀국했고, 결국 몸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며 시작부터 꼬이게 되었다. 부상 여파인지 1군에는 6경기 출장에 그쳤고 주로 2군에 머물렀다.

2009 시즌 이후 다시 방출. 나이도 30대 초반으로 괜찮은 내야수긴 하지만 경쟁자가 최정, 정근우, 나주환, 박정권, 김연훈 등 손지환보다도 젊은 내야수들이 많아서 괜찮다는 것만 가지고 SK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울 듯 싶었고, 하필 부상까지 겹치면서 결국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2.6. 한화 이글스[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100814182801444.jpg


그 뒤 일본 독립리그 팀인 코리아 해치에서 뛰다가, 주전 3루수송광민이 시즌 중 군입대라는 초유의 해프닝으로 이탈하여 3루수가 필요해진 한화 이글스가 신고선수로 영입했다.

오선진의 부상으로 2010년 7월 27일 1군에 콜업되어, 몇 경기 안되지만 제법 괜찮은 타격을 선보여주고 있다. 수비야 그다지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한화 내야가 원래 막장이니….

2010년 8월 14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장원삼으로부터 투런 홈런을 치며, 근 2년만의 홈런맛을 봤다. 2:8로 진 한화 이글스의 유일한 득점…. 당연히 빛이 바랬다. 28일에는 두산 베어스임태훈의 공에 번트를 대려다 오른손 엄지골절상으로 6주간 출전 불가. 시즌이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시즌 아웃됐다. 결국 또 부상으로 인해 꼬이는 이래저래 기구한 야구인생. 그리고 시즌 종료 후 젊은 선수들을 키운다는 명분으로 방출되며[21] 저니맨 커리어를 따라 가게 되었다.


3. 프런트 경력[편집]



3.1. SK 와이번스 프런트[편집]



파일:손지환 sk 프런트.jpg

SK 프런트 시절.
한화에서 방출된 이후에도 현역 연장을 위해 개인 훈련을 이어나갔으나 그를 원하는 팀은 없었고, 결국 2011년 1월 은퇴를 선언하면서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니폼을 벗게 되었다. 이후 한때 몸담았던 SK 와이번스프런트로 입사하였고, SK 구단에서 개최하는 사회인 및 여성 야구 교실의 코치를 맡기도 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4.1. SK 와이번스-SSG 랜더스 코치 시절[편집]



파일:external/www.sksports.net/20130110150316_1.jpg


이후 2013 시즌을 앞두고 SK 와이번스의 3군 선수단에 해당하는 루키팀 수비코치에 선임되어 정식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2016년 4월 14일 이후로 루키군 수비코치에서 1군 타격보조코치로 보직이 바뀌었다. 시즌 도중 이적생 최승준이 역대 보상선수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세웠는데 종전 기록이 바로 손지환 코치의 13개였다. 손지환 코치는 인터뷰를 통해 비시즌 동안 다른 코치님들과 함께 최승준 지도에 열을 올렸다. 타격 폼만 수정하면 분명히 큰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라면서 승준이가 시즌 초반 안 좋았을 때 과거 나쁜 폼으로 다시 돌아가 고민이 컸는데 본인이 스스로 극복해내더라. 이제는 우리 팀 대표 거포가 됐다. 너무 자랑스럽다며 최승준 칭찬에 열을 올렸다. 시즌 종료 후 2017년 루키군 야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018년부터는 2군 수비코치를 맡았으나 전반기 종료 후 평가가 좋지 않았던 박계원을 대신해 1군 수비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지난해까지 불안한 수비를 선보였던 김성현이 2019년 37경기에서 단 2실책을 기록하고 신예 안상현 역시 안정된 수비를 보여주는 데에는 손지환 코치의 공이 큰 듯.'확 달라진 SK 센터라인' 손지환 코치는 약속을 지켰다 비록 김성현의 수비는 이닝소화로 인한 체력저하 등으로 인하여 6~7월부터 퇴화되었으나 시즌을 최소 실책 2위로 마무리했다. 이후 SK 와이번스가 2018 한국시리즈에서 업셋 우승을 달성하면서 손지환 코치는 처음으로 우승 반지를 끼게 되었다. 손지환 코치의 쪽잠이 만든 '신들린 시프트'

2020년부터는 김일경 코치와 보직을 맞바꿔 2군 수비코치를 맡는다. 다만 손지환 코치가 2군에 내려가자마자 SK 와이번스는 타격/투수진 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크게 퇴화된 모습을 보여 리그 9위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거두고 말았다.


파일:손지환 SSG 코치.jpg


2021 시즌부터는 김일경 코치와 보직을 맞바꿔 1년만에 1군 수비코치를 맡게 된다. 전체적으로 선수들이 지난 시즌보다 좋은 수비력을 보여줬으며, 시즌 종료후 백재호, 최창호는 팀에서 퇴단했으나, 손지환 코치는 능력을 인정받아 유임되었다.

김원형 감독, "손지환 코치의 지도 덕분에 박성한 폭풍 성장"
적재적소 시프트에 플랜 A·B·C까지…수비박사의 ‘팔색조 전략’
'V4' 이어 'V5'에도 손지환 코치 2시간 쪽잠 있었다 "눈빛만 봐도 아는 성현이 힘 컸어."
2022 시즌 팀 내 수비력이 매우 향상되었다. 시즌 종료 시점에서 SSG 랜더스는 10개 팀 가운데 실책 7위로 리그 상위권을 차지했고, 수비율 또한 .980로 LG, kt에 이은 3위를 기록했다. 또한 한국시리즈에서도 선수들이 좋은 수비력을 토대로 우승을 차지하게 되면서, 손지환 코치 또한 2018년에 이은 두 번째 우승반지를 끼게 되었고, 손지환 코치의 평가도 크게 올라갔다.

2023 시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팀을 떠났다.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성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7
LG
23
22
.318
7
2
0
0
3
2
0
1
.409
.348
1998
48
60
.233
14
1
1
0
4
13
0
7
.283
.313
1999
20
35
.114
4
0
0
0
1
2
0
0
.114
.114
2000
54
63
.238
15
4
0
0
5
12
2
5
.302
.294
2001
96
188
.250
47
8
1
5
22
25
2
13
.383
.297
2002
111
290
.214
62
9
0
5
24
25
5
24
.297
.272
2003
61
74
.189
14
1
0
0
4
11
0
8
.203
.265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4
KIA
114
303
.271
82
15
1
13
42
40
3
18
.455
.311
2005
107
316
.278
88
13
0
11
44
37
1
33
.424
.344
2006
96
273
.264
72
12
0
4
21
24
1
16
.352
.303
2007
102
267
.217
58
9
1
6
33
26
1
27
.326
.28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8
삼성
45
78
.179
14
4
0
2
11
7
0
5
.308
.226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9
SK
6
16
.188
3
1
0
0
0
1
1
1
.250
.236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10
한화
25
59
.220
13
3
0
1
3
6
0
5
.322
.281
KBO 통산
(14시즌)
908
2044
.241
493
82
4
47
217
230
16
164
.354
.295


6. 여담[편집]


  • 친정팀인 LG 트윈스와의 경기에 강한 선수다. KIA 시절이던 2005년에도 LG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쳐낸 바 있고, 2008시즌에서는 시범경기때에 LG 투수로부터 홈런을 쳤다.

  • 최익성 못지않은 저니맨 커리어를 보냈다. 선수 커리어 14년간 입은 유니폼이 무려 5개.[22] 정식 프로 구단은 아니지만, 2010년 잠시 몸담은 일본 독립리그 팀 코리아 해치까지 포함시킨다면 6개의 유니폼을 입어본 셈.

  • 현역 시절 5개의 팀에서 몸담았던 시절 우승 반지는 껴보지 못했고, 준우승만 4회나 맛봤을 정도로 대표적인 콩라인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은퇴 후 SK 수비코치 시절인 2018년 팀이 2018년 한국시리즈에서 극적으로 우승하면서 드디어 우승반지를 처음으로 껴보게 되었다.

  • 앙헬 산체스가 SK에서 뛸 때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 2019년부터는 산체스와 커피 내기를 하는데, 내기 방식이 상당히 독특하다. 산체스가 선발 등판해서 승리투수가 되거나 야수실책 없이 경기를 마쳤을 경우 다음 날 산체스가 손지환 코치 및 팀 내야수들에게 커피를 쏘고, 반대로 산체스 등판 경기에서 실책이 나올 경우 손지환 코치가 산체스와 팀 내야수들에게 커피를 쏘는 내기라고 한다. 이외에도 산체스가 승리투수가 되면 짜장면과 군만두를 사주겠다고 약속하는 등 상당히 친한 모습을 보여준다.

  • 두산 베어스 투수 유희관이 대학생 시절 야구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했는데 손지환 코치가 유희관에게 여러 음식을 사주고 많은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

7. 관련 문서[편집]



[1] 일본 독립리그 구단. 2011년말 해체.[2] ~4월 13일[3] 4월 14일~[4] ~7월 13일[5] 7월 14일~[6] 날려버려 손지환! 날려버려 손지환! 1루타 2루타 3루타 홈-런! 날려버려! 손지환! 날려버려 손지환! 날려버려 손지환 안타손지환![7] (빰빰빰빰 빠밤빰) 안~타! 손!지!환! ×4[8] 현재까지 KBO 리그 유일의 무보살 삼중살 기록 보유자.[9] 사실 손지환은 최익성보다 사정이 조금 나은 게 적어도 KIA 시절까지 10년은 큰 문제 없이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삼성 이적 이후부터 일이 꼬이면서 저니맨이 되어버린 것.[10] 이 시기 LG와 OB가 동시에 눈독을 들이던 선수가 한 명 더 있었는데 훗날 LG의 레전드가 되는 이병규다.[11] 다만 수능 세대였던 이승엽과 박진만은 체육특기생 입학을 위한 수능 최저점 미만으로 점수를 받는 바람에 대학 진학이 무효로 결정됐다. 물론 실제로는 둘 다 대학에 갈 뜻이 없었기 때문에 고의로 수능을 망쳤다.[12] 프로행을 택한 선수들의 이야기에는 "부모님은 대학에 진학하길 원했다"는 말이 십중팔구 들어갔다. 당시 부모 세대는 대부분 베이비붐 세대였거나 7080세대인데 이 세대는 자녀들의 대학 진학 성과가 부모 인생의 성공 여부로 직결될 정도로 자녀의 대학 진학에 모든 것을 쏟아붓던 시기였다. 성공한 프로야구 선수도 좋지만 대학 졸업장을 딴 뒤에 프로야구에 입문해서 성공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당시 부모들의 인식인 셈이다.[13] 휘문고와 비슷한 상태에 있던 김민기의 덕수상고도 상황이 비슷했다. 당시 덕수상고가 김민기에게 자퇴서 제출을 종용하지는 않았으나 이쪽은 스카우트 파동의 책임을 물어 아예 감독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후임 감독 선임 과정에서 선수단 학부모들과 덕수상고 총동문회가 대립하기도 했다. 참고로 덕수고 야구부는 과거나 지금이나 동문회의 입김이 매우 강력한 편이다. 동문 중에 금융권 고위 임원이 워낙 많아서 야구부에 몰아주는 자금 지원 규모가 전국 톱클래스 수준으로 빵빵하기 때문이다. 다만 반대급부로 동문들의 요구사항이 매우 많다고 한다.[14] 이명섭 전 감독은 춘천고를 1999년 청룡기 준우승으로 이끌었으나 2000년 초 아마야구 지도자들의 비리 문제에 연루되어 이미지에 흠집을 남겼고 이후 오랜 기간 야인으로 있다가 2011년 휘문고 감독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 비리 문제가 발생해 2015년을 끝으로 물러났다.[15] 이 당시 휘문고에서 춘천고로 전학을 갔던 대표적 선수가 김동건이다.[16] 2002년 시즌 중 롯데 자이언츠와 트레이드 성사 직전까지 갔다가 막판에 파토났고, 2003년에도 한화에서 트레이드 매물로 나온 송지만을 LG가 영입하기 위해 한화에 제시한 카드가 손지환과 투수 1명(대체로 장문석이라고 알려져 있다)이었다고 한다.[17] 물론 이건 진필중이 두산 시절에 지나치게 혹사를 당했기 때문에 하락세가 뚜렷히 보였음에도 LG가 FA로 영입했다가 제대로 쓰지도 못 하고 방출한 케이스에 가깝다.[18] KBO 역사상 유일하게 무보살 삼중살을 성공시킨 사례. 그 덕분에 올스타전에 뽑힌 적도 있다.[19] 이 트레이드는 루즈 - 루즈 트레이드로 남았다. 유용목은 1군에서 13경기 나오고 그대로 은퇴했고, 손지환은 그나마 유용목보단 나았지만 여러 팀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20] 무엇보다 이상목의 100승과 박한이의 분전, 양준혁전병호의 부활과 타선의 세대교체가 결정적이긴 했다.[21] 이대수정원석이 안정적으로 센터라인을 지키고 있었던 데다가 한상훈이 공익근무를 끝내고 복귀하면서 손지환은 자리가 없었다. 게다가 오선진, 김회성, 전현태 같이 손지환보다 젊은 유망주들이 있기도 했고.[22] 최익성은 삼성-한화-LG-해태/KIA-현대-삼성-SK 순으로 무려 6팀에서 커리어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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