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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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배경
2.2. 시작
2.3. 농성
2.4. 학살
2.5. 마무리
3. 사실 여부
3.1.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
3.2. 기타 증언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고난의 행군이 거의 끝나갈 무렵, 1998년 8월 황해북도 송림시(대한민국 이북5도 기준 황해도 송림시)의 현재의 황해제철소(사건 당시 송림제철소)에서 일어난 숙청 사건.

탈북민 사이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는지는 논란이 있으나, 주성하 기자 같이 여러명의 탈북자를 취재한 바로는 숙청까지만 있었다고 보고 있다. 주성하 기자의 주장도 다른 탈북자의 주장과 일치한다. 이 제철소는 북한에서 두 번째로 큰 제철소다.


2. 상세[편집]


아래는 이춘구 씨, 김화순 씨, 박승학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다. 2021년 들어 탈북민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를 중심으로 아래의 내용에 대해서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 부분은 사실여부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2.1. 배경[편집]


1994년경 김일성의 사망 이후 송림제철소의 가동률이 떨어지고, 96~97년부터는 완전히 멎어버린다. 이에 따라 제철소의 노동자들은 실업자와 같은 처지가 된다. 황해도에 위치한 철광인 은률광산(은율광산), 재령광산에서 철광석을 캐기 어렵게 되었고,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며 콕스탄(코크스탄)을 값 싼 대치물자[1]로 주지 않아 제련도 어려워졌다. 석탄 생산량 자체도 감소하여 화력발전도 어려워지고, 수력 발전도 힘들어지자 전기 공급도 어려워져 다시 제철소의 가동을 어렵게 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경제 불황이 찾아와 배급이 끊어졌다. 그나마 송림에서는 먹을거리가 남아 있어 더 많은 사람들이 송림지역에 몰려들었다. 이렇게 주민들과 노동자들이 굶주리는 모습을 보다 못한 송림제철소의 지배인, 책임비서, 후방담당[2] 부지배인, 업무담당 부지배인을 비롯한 회사 간부들 8명은 지배인과 책임비서가 주동이 되어 긴급 토의에 들어갔다.

그들은 제철소가 만든, 압연 철판으로 가공된 선철을 배에 싣고 중국 대련(다롄)으로 건너가 옥수수와 교환해 오기로 결정했다. 노동자들이 굶주리지 않아야 당의 목표를 완수할 수 있고 이들에게 먹거리를 전하는 것이 곧 당과 수령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밖에도 노동자들이 이런 자재와 기계를 중국에 옥수수나 밀가루로 바꾸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편 송림항에는 외부에서 지원한 것으로 보이는 쌀이 있었고, 이것이 쌓여있기만 한 것을 본 송림항의 노동자들이 송림제철소 노동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 노동자들이 무기고를 털 계획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2.2. 시작[편집]


제철소의 간부와 노동자들이 제철소의 자산을 팔아 식량을 구하는 행위는 국가의 재산을 팔아먹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보위사령부의 검열이 행해졌다.

제철소 후방 부지배인, 판매과장을 비롯한 간부 8명이 제철소 전용 어선으로 남포항에 나가 있는 배를 이용해서 압연 철판을 싣고 중국에 가서 옥수수로 바꾸었다. 옥수수를 싣고온 배가 남포항 부두에 정박하는 순간에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가 나타나서 배에 타고 있던 일행을 전원 체포하여 포승줄로 묶어서 어디론가 끌고 갔다.

이들은 고문을 당한 후유증 때문에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에 의해 송림시 공설운동장의 공개처형장으로 이송되었다. 명목은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위반하고 국가물자를 외국에 팔아먹는 국가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제가 먹자고 한 일도 아닌데 총살까지 시키는 건 너무합니다."라는 주민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공개처형은 진행되었다. 평양 봉화진료소에서 김일성의 담당 간호사였던 여자가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총살하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철소 간부들이 위대한 장군님께 생산을 많이 하여 기쁨을 드리자는 일념으로 강냉이[3]를 바꾸려 했는데, 방법이 틀렸으면 처벌을 주어야지 총살까지 하는 건 너무합니다. 총살당한 간부들이 노동자들을 먹여 일을 시켜보자고 했지, 제가 먹자고 한 일도 아닌데 이렇게 사형까지 하는 건 너무 무지막지 합…" 라고 말을 하자,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들은 이를 무시하고 즉시 그 여자를 처형했다.


2.3. 농성[편집]


첫번째 공개 총살 다음날, 송림시 제철소의 노동자들은 "더 이상 간부들을 숙청하지 말라" "우리를 먹여 살리고 제철소를 위한 간부들의 행동은 잘못이 아니다"는 구호를 외치며 공장 구내 길에서 몇 천 명이 모여 앉아 밤을 세워가면서 농성을 하였다.


2.4. 학살[편집]


군에서는 이를 탱크로 밀어 붙이자고 하여,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 국무총리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의 '2006 연차보고서'에서는 이 과정에 김정일이 연루되었다고 보고 있다.

농성 시작 다음 날 새벽 4시쯤 4군단 예하 전차연대의 열댓 대 정도 되는 탱크와 트럭에 탄 수백 명의 인민군을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해산하라는 군대의 명령에도 시위대가 앉아서 버티자, 명색이 인민들을 지키는 군대라던 인민군총을 쏘고 탱크로 깔아뭉개 전부 죽였다. 깔아 버렸다는 증언은 이춘구 씨, 국방부 안보강사로 활동했던 박승학 씨, 황해북도에서 간부였던 김화순 씨가 공통적으로 증언한다.


2.5. 마무리[편집]


새벽 5시 경 송림시는 군 부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한국 특전사와 유사한 경보여단 등이 송림 인근 황주군, 평양 강남군, 평양 오류동으로 통하는 찻길, 뱃길을 모조리 막아버렸다. 날이 새자 송림시민들은 계엄령이 내려진 것을 감지했으며[4] 심지어는 창문 밖도 보지 말라는 방송이 울려퍼졌다.

그 뒤 아침 10시가 지나자 폭동 진압군은 철산광장에 사람을 모아서는 "송림시민들은 들어라. 이제부터 제철소에서 석탄 한 배낭, 못 한 개라도 훔쳐 간 사람은 모두 자수하라. 1주일간 시간을 주겠다. 그 안에 자수하지 않으면 그 대상이 누구든 관계없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가두방송을 하였다.

새벽에 제철소에서 학살이 있은 다음날,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시위 주모자를 심판한다는 포고문이 사회안전부(현 사회안전성)[5] 명의로 나 붙었다. 이날 송림시 당 선전부장 같은 송림시의 고위 관료들이 체포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틀 후 송림시의 공설운동장에서는 폭동 주모자라고 하는 3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또 한 명의 중학교 선생과 어린 처녀를 총으로 쏴 죽여버렸다. 중학교 선생과 처녀의 죄명은 한 재일교포의 집에 들어가 녹음기를 훔쳤다는 것이다.

죄과라는 것을 읽고 총살에 처한다는 판결과 함께 두 명의 보위사령부 검열대들이 처녀에게 다가가서 턱을 주먹으로 올려 쳐 턱뼈가 빠지게 한 뒤, 손바닥 안에 쥔 자그마한 용수철을 그 처녀의 입에 넣었다. 순간 그 처녀의 입에 들어간 자그마한 동그란 용수철이 쫙 퍼지더니 그의 입이 고통스럽게 불어나 처녀는 몸부림쳤다. 이어 말뚝에 묶여서 무참하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며칠 뒤 체포 당한 송림의 고위 관료들도 총살당했다. 남조선 간첩이 끼어 들어 제철소가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설비들을 훼손시키도록 의식적으로 조장하여, 그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거기 놀아났다는 혐의가 씌워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하루 평균 5~7명이 총살당하고, 제철소의 가동 중단도 남조선의 간첩 때문이라는 주장이 송림시민 사이에 유포되었다. 고문을 당하다 죽은 사람만도 십 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심지어 어쩌다가 점 한 번 봐준 사람, 신수 한번 봐준 사람 등 관상쟁이들까지 조사대상으로 끌려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김화순 씨에 따르면, 100명 정도가 총살 당했으며, 탱크에 깔려 죽은 사람도 수십 명이라고 한다. 총살 당한 사람들은 송림 외곽의 어느 지역에 봉분이 없이 묻혔는데, 날이 밝자 봉분이 생기고 수백 개의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사건 1년이 지나도 학살이 벌어진 곳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후 북한은 아예 송림제철소라는 이름을 황해제철소로 바꿔버렸다.


3. 사실 여부[편집]


2021년 들어 위의 내용에 대해서 반론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탈북민 출신 주성하 기자는 처음엔 사실로 여겼으나, # 2021년 9월 자세한 취재 결과 상당한 과장이 있었다는 것으로 결론지었으며, 탈북자 사회의 과장된 거짓말이 악용된 사례임을 기사와 유튜브를 통해 밝혔다. 북한군 탱크로 노동자들을 깔아죽였다는 송림 황해제철소 노동자 시위는 애초에 없었다.

주성하가 재구성한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 1.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서 굶주린 노동자들이 공장의 철판, 기계 등을 팔아먹는 행위가 있어 사회질서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탱크와 장갑차가 동원되었다.
  • 2. 무단으로 공장자재를 내다파는데 관여한 11명의 간부가 1998년 8월 철산광장에서 처형된 것은 맞다.
  • 3. 11명의 숙청으로 송림제철소는 바로 정상화되었으며, 노동자들의 시위나 농성은 전혀 없었다. 탱크와 장갑차가 동원된 공포분위기 속에서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다.
  • 4. 김일성의 전담 간호사 출신 여성이 항의했다거나 봉분을 다시 세워서 헌화했다는 이야기는 완벽한 거짓이다. 특히 헌화는 온가족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갈 수 있기 때문에 일어날 수가 없다.

주성하의 취재결과는 국민의힘 국회의원 태영호의 주장과 부합한다. “공장 노동자들이 황해제철소 기계와 철판 바닥을 다 뜯어 가자 북한군이 총살을 예고하는 계엄령을 내렸다”고 언급하고, “당시 노동자들은 무서워서 기계를 다시 갖다 놓았는데, 지금(2017년)은 당국의 정책에 반발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언급한 적 있다. # 태영호는 계엄령만 내리고 노동자들은 무서워 기계를 갖다 놓았다고 주장하는데, 이춘구 씨가 계엄령을 내리고 노동자를 죽였다고 한 것과 다른 내용이다.


3.1.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편집]


아래 3명의 증언들은 다른 탈북자들에 의해서 대체적으로 부정되고 있다.
  • 송림제철소 학살 사건을 목격한 탈북자 이춘구 씨가 쓴 수기. 이 문서의 주된 내용이 된 가장 널리 퍼진 수기로, 노동자들의 항의를 진압하는 과정을 언급한다. 원본
- 댓글에는 직접 보았다는 사람, 소문으로는 들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주성하 기자도 처음엔 믿었을 만큼 사실에 과장이 덧붙여져 거짓임을 확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송림제철소 학살 사건의 증언(NK조선)
  • 배나TV 박승학 씨의 증언. 진압 병력의 정체에 대한 언급도 있고, 송림제철소 뿐만 아니라 송림항 노동자들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증언을 한다. # 가장 과장이 심한 주장으로 보인다.
  • 2021년에는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무역국장이었던 김화순 씨의 증언도 등장하였다. 통일신문


3.2. 기타 증언[편집]


  • 이 사건 당시 송림에 거주했다는 정철민 씨의 수기. 송림시에서, 제철소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한다. #
  • 기타 탈북자의 증언. 이 증언이 실제와 가장 일치하는 증언으로 보인다. #
  • 통일연구원의 '2006 연차보고서'에서 언급된 2명의 탈북인사 증언도 참조하였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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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금의 성격으로 주는 물자. #[2] 북한에서는 물자보급업무를 "후방사업"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북한 군인들의 피복과 식료품, 생필품 공급은 인민무력부 후방총국 관할. 기업소 후방담당 부지배인이면 소속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식량과 생필품을 책임지는 위치다.[3] 옥수수. 남한에선 영호남 지방의 방언에서 옥수수를 강냉이라고 하지만, 북에선 강냉이가 표준이다.[4] 공교롭게도 남한의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 신군부가 비슷한 방식으로 광주로 가는 모든 교통로를 틀어막아 봉쇄한 바 있다.[5] 한국의 경찰청과 유사한 기능을 갖는다고 알려진 기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