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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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宋影

1903년 5월 24일 ~ 1977년 1월 3일[1]

본명은 송무현(宋武鉉)이다. 한국 문학에서 일제강점기 희곡, 특히 카프의 희곡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며, 북한에서도 문학/연극계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2. 생애[편집]


1903년 서울 출생으로, 배재고보를 중퇴한 것이 알려진 최종학력이다. 배재고보 재학시절부터, 박세영, 이용곤 등과 문학활동을 벌이며, '새누리'라는 동인지를 펴내기도 했었다. 배재고보 중퇴는 3.1운동에 가담하였던 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이 시기 집안이 몰락하면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시기 다양한 노동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922년일본으로 건너가 반년 가량 노동자생활을 하였으며, 이는 이후 그의 작품 창작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후 1923년 국내 최초 '사회주의 예술단체'인 '염군사'(焰群社)를 조직한다. 송영의 회고에 따르면, 이는 1900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창간한 신문 <이스크라(и́скр|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즉, '이스크라(불꽃)의 무리'라는 뜻에서 '염군(焰群)'이라고 했다는 것. 이 시기 기관지로 <염군>이라는 잡지를 펴내고, 자신의 소설과 희곡, 동화 등을 발표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 검열로 인하여 발간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회고에서 제목 정도나 볼 수 있다.

이후 1925년 카프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염군사와 파스큘라 간의 합병을 제의하고 파스큘라의 인물들을 찾아가 직접 설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그는 <늘어가는 무리>라는 단편소설로 등단한다. 이후 <용광로>, <석공조합대표>, <정의와 칸바스> 등 소설과 희곡에 있어서 여러 가지 창작활동을 벌인다.

또한 아동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아동소설과 아동극도 창작하였다. 당시 고양군 은평면에서 '은평학원'이라는 야학을 운영하였으며, 아동문학 잡지 <별나라> 간행 및 앵봉회라는 아동극 공연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한다.

희곡 면에 있어서 그는 카프 대표 극작가라고 불릴 만큼 극작가로 유명하다.[2]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 <신임 이사장>, <호신술> 등으로 대표되는 그의 희곡은 사실상 1930년대 카프의 희곡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한다. 결정적으로 이들 작품은 카프에서 창작된 희곡 가운데 실제로 공연에 성공한 몇 안 되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이들 작품은 풍자적인 성격이 짙으며, 이 풍자 수법 덕분에 검열에 쉽게 통과될 수 있었다고 한다.

카프 해산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당시에는 카프 해산을 반대하는 비해소파의 핵심인물이었다. 하지만 카프는 해산되었고, 이후에도 그는 사회주의적인 경향이 묻어나는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또한 대중극 창작도 활발히 하여, 1937년 동양극장의 전속극작가가 된다. 이광수의 <무정>과 <유정>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리기도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친일적인 극을 창작하기도 했다. 최명하[3]의 전기를 극화한 극인 <창공>(1943)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근래 들어 발견된 당시 그의 희곡들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친일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선일체의 모순 등을 폭로하고 있다는 연구도 있다.

광복 이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담한다. 1946년 10월경 월북한다. 북한에서는 문학예술동맹 중앙상무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 상당한 요직을 지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종군작가로 활동했으며, 1953년에는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전적지 조사단'에 참가하여 이를 바탕으로 <백두산은 어데서나 보인다>를 발표한다. 이후 1958년 이 작품을 <밀림아 이야기하라>로 직접 각색하여 무대에 올렸고, 이로 인하여 1959년 문학인으로는 최초로 '인민상'을 수상한다. 이 작품은 북한 혁명가극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5대 혁명가극 중 하나로 꼽히게 된다.

1956년에는 '조선문화대표단'의 단장 자격으로 북베트남을 방문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월남일기>라는 기행문을 발표한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 것으로 시작으로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59년 8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상수여위원회 결정 제2호에 따라서 밀림아 이야기하라 창작의 공을 인정받아 인민상을 받았다. 1962년 3기 최고인민회의, 1967년,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으며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2기 최고인민회의와 3기 최고인민회의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임하면서 북한 외교 분야에도 활동했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북한에서의 공식적인 기록은 1967년 제4기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 자격으로 활동한 것까지이다. 이후의 공식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아 숙청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78년경 정신병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4]

어쨌거나 숙청된건지 병환으로 사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식 기일인 1977년에 북한은 송영의 죽음을 보도하지 않았던 것을 미루어볼때 불미스러운 상황 속에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복권이 이루어졌는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여담[편집]


  • 매우 글을 빨리 쓰는 타입이라고 한다. 지면상에 발표된 소설과 희곡을 보면, 1년에 10여편씩이나 발표하는 경우도 있으며, 등단한 이래로 거의 매년 꾸준히 소설과 희곡을 발표했다. 그에 따라 작품성 문제로 비판도 많이 받았다. 특히 「백색여왕」,「오수향」 같은 경우는 작가 스스로도 비판했었다. 이와 관련해서 소설가 이기영은 "글을 쉽게 쓰기로도 유명한 작가"라면서 이로 인하여 다작을 하지만 그만큼 실패를 많이 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임화도 "(송영 형의 작품에는) 적게 공부하시고 많이 쓰신 흔적"이 많다고 깐다.언급한다.

  • 임화와 형, 동생할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20년대 말~30년대 초 송영은 아동잡지인 『별나라』와, 아동극단체인 앵봉회을 주도하는 한 사람이었고, 여기에 임화가 참가하였었다. 하지만 1950년대 임화가 숙청된 이후에는 가차없이 임화를 비판비난했다. 임화가 숙청된 이후인 1956년에 쓴 <임화에 대한 묵은 논죄장>이라는 평론이 대표적.

[1] 이는 북한에서 언급하는 사망연월일. 하지만 정작 북한에서도 출간하는 책이나 매체에 따라서, 1979년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송영 관련 논문을 썼던 폴란드인 학자는 1978년에 사망했다고 이야기 하는데... 결국 정확한 사망연대와 연월일은 알 수 없다. [2] 이에 대해 당대의 임화는 사실상 '카프의 유일한 희곡 작가'라고 언급하였다.[3] 일본 이름은 타케야마 타케시(武山隆). 조선인 최초로 일본군 항공소위에 올라 활약하다가 수마트라 공습작전에서 부상을 입고 자살한다. 일본은 징병제 홍보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4] 이와 관련하여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교 한국어문학과의 할리나 오가레크초이(Halina Ogarek-Czoj, 1931–2004) 교수는 송영이 김일성의 가족을 다룬 작품으로 비판을 받으면서 정신질환으로 78년 숨졌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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