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석

덤프버전 :

송유석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6.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7.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1
1993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3번
결번

송유석
(1985~1996)


장석희
(1997~1999)
LG 트윈스 등번호 21번
강봉수
(1993~1996.5.6.)

송유석
(1997~1999)


경헌호
(2000~2012)
한화 이글스 등번호 64번
임규대
(1992~1994)

송유석
(2000)


곽주섭
(2003)
한화 이글스 등번호 29번
임창식
(1999)

송유석
(2001~2001.6.)


윈스턴
(2001.7.15.~2001)



송유석
宋裕錫 | Song Yu-Seok

출생
1966년 7월 16일 (57세)
전라남도 고흥군[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대서남국민학교[2] (졸업)
고흥대서중학교 (졸업)
광주진흥고등학교 (졸업 / 11회[3])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5년 연습생 (해태)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5~1996)
LG 트윈스 (1997~1999)
한화 이글스 (2000~2001)
해설위원
광주 CMB 야구 해설위원

1. 개요
2. 선수 경력
3. 은퇴 후
4. 여담
5. 연도별 성적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해태 타이거즈, LG 트윈스, 한화 이글스의 투수.

프로 초창기인 1985년에 고졸 연습생으로 입단하여 1990년대 타이거즈의 대표적인 전천후 중간계투 투수로 팀의 주축 불펜이자 프랜차이즈 선수로 성장한 선수로, 야구 입문 때부터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구단 시스템이 미흡했던 초창기 프로야구 시절 연습생 신분으로 야구 경기 외적으로도 구단 행사 보조, 선수단 경호, 매표소 관리, 배팅볼 투수 등 각종 구단 직원의 역할을 하였고 정식 선수가 된 이후에는 불펜 투수로서 마당쇠 역할을 하는 등 리그 역사상 가장 마당쇠란 별명에 적합한 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래는 육상 투척(투창)선수 출신으로, 고등학교에 가서야 야구에 입문한[4][5] 특이 경력자로도 유명하다.

현재는 타이거즈 선수 출신 모임의 총무를 오랜 기간 맡으며 여전한 마당쇠의 면모를 보이고 있으며 모임의 실질적인 구심점 역할을 해내고 있다.

타이거즈 관련 컨텐츠를 제공하는 광주문화방송 유튜브 채널인 전설의 타이거즈의 단골 게스트로 사실상의 반고정 멤버이자 보조 MC로 활약하고 있으며, 특유의 너스레와 통찰을 보이며 타이거즈 팬들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야구부가 없는 고흥대서중학교를 졸업했으며, 이 당시는 투창 선수였다고 한다. 전국대회 투창 금메달 수상 경력을 바탕으로 육상부가 있는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의 성적이 너무 좋아 고교 진학 후 주전으로 뛸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광주진흥고등학교로 진학했다고 한다. 진흥고 재학 당시 선배와의 불화로 고2 말부터 야구부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3학년이 되어서야 공식 경기에 처음으로 나서게 되었으며, 지역 예선에서 박준태, 김선진, 정회열이 있던 광주일고 야구부에게 승리를 거두는 등 주목을 받으면서 김선진(광주일고)과 같이 연세대학교 야구부 입학통지까지 받았다.[6][7]

그러나 해태 타이거즈에서는 연습생 입단을 제의했다. 대학 등록 마감 2일 후에야 계약서를 내밀었는데 계약금과 연봉은 첫 해에 없고 첫해의 활동 실적을 고려하여 정식 계약한다는 불공평한 내용이었다.[8] 속은 걸 알았지만 대학 진학은 이미 막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2. 해태 타이거즈[편집]




현역시절 투구폼



창던지기 선수와 비교

1985년 해태 타이거즈육성선수로 입단했다. 그러나 입단 첫해에는 말이 신고선수지 사실상 머슴이나 다름없었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1인 10역원조 십잡스을 하면서 팀의 살림살이를 도맡았고 그가 맡았던 역할을 열거해보면 아래와 같다.

번호
역할
설명
1
배팅볼 투수
이 때 김성한에게 배팅볼을 많이 던져주었다.
2
경기장 그라운드 정비

3
기록원
기록 업무를 도우면서 선수들의 고과를 매기는 업무도 병행하였다.마이크로소프트 엑셀도 없던 시절
4
보안요원
당시 관중석과 불펜이 철망을 사이에 두고 붙어있어 관객들이 몸을 푸는 투수들에게 라면국물을 뿌리고 가면 관중석에 가서 잡아오고, 경기 끝나고 선수단에 몰려오는 팬들을 몸빵(..)으로 막는 역할을 맡았다. 인상도 험악하고 힘이 좋다보니 잘 막아냈다고..
5
불펜 포수
당시 포수가 부족해 본래 투수였음에도 선동열 그리고 고교 선배 김정수의 볼을 받았다. 받기 좋게 들어오는 선동열의 투구와는 달리 김정수는 워낙 제구력이 들쑥날쑥해서 눈 크게 뜨고 공을 받아야 했고 성격과 구위과 아주 제멋대로인 건 똑같다는 말이 백미다.
6
유명 선수들의 싸인을 모방해 사인볼을 만들기

7
사인이 없는 선수들의 사인까지 개발

8
매표소 직원
마당 쓸다가 나가서 던지고 표 받다가 나가서 던지고
9
영화 촬영보조
이장호의 외인구단 촬영 당시 마동탁의 구단 역할을 해태 타이거즈에서 맡았다.
10
뒷정리
김응용 감독이 '장성군에 선수들 내려놓고 광주 무등 야구장까지 뛰어오기'를 시전할 때 선배들이 뛰어가는 모습, 차 얻어타는 모습을 다 확인한 후 본인이 맨 마지막에 출발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등 야구장에는 제일 늦게 도착했다.

이런 잡일이 너무 힘들어서 입단 후 이듬해인 1986년,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된다는 소식을 듣고 해태에서 야반도주(...)를 해 빙그레 입단 테스트를 봤다. 합격했으나 해태에서 보내주지 않는 바람에 결국 빙그레에 입단은 못 했다.[9]

그러다가 김대현이 시즌 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투수 엔트리가 비자 송유석을 패전처리 투수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송유석이 무실점으로 막아내자 중간계투, 필승조, 마무리 투수, 땜빵 선발(오프너), 롱릴리프 등 온갖 보직을 가리지 않고 투입됐다. 정현욱에 앞선 원조 노예. 마당쇠 별명다운 활약상을 보였다.

본래 투창 선수를 하다가 야구로 전향했던 탓에 투구 폼이 특이했다. 다른 선수들이 공을 던진다는 느낌이었다면 송유석은 창을 던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공을 내리꽂는다라는 느낌으로 던졌다.[10] 게다가 앞발을 굉장히 힘차게 내딛었다. 이런 특이한 동작 때문에 타자들은 타이밍을 맞추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상기 언급한 광주일고와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투구폼때문이었다. 9이닝 내내 일고 타자들은 송유석의 특이한 투구폼만 보다가 완투패를 내줬다고... 요즘으로 치면 디셉션이 좋아 타자들이 어려워하는 유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저 투구폼이 뭣이당가-

구사가능한 변화구는 아예 없다시피 했지만 배팅볼 투수로 뛰면서 가다듬은 제구력과 묵직한 볼이 전매특허였다. 같은 팀의 고참 김성한이 타격감에 문제가 있을 땐 당시 송유석을 일찍 불러서 배팅볼을 던지게 하고 짬뽕 한 그릇을 사줬으며[11] 땀과 눈물의 짬뽕을 먹으면서 제구력을 갈고 닦아 주축 투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12] [김종건의 Let’s Go Baseball] 김성한 홈런은 짬뽕국물 덕이었네

1987년에 1군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1990년부터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 시작, 1991~1995년에 전성기를 맞아 이 시기에 5년 연속 110이닝 이상을 투구하면서 해태 투수진의 허리를 책임졌다. 1991년과 1993~1995년에는 주로 구원투수로 나오면서도 10승을 올리는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레알 원조 노예 간간이 보조 선발로 나오기도 했지만 선발 출장 횟수는 10번을 넘긴 적이 1993년을 제외하곤 없었다. 마무리를 하던 선동열에 앞서서 나왔기 때문에 현대 야구의 개념으로 따지자면 셋업맨이 되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보직이 없었으니... 차명석과 더불어 뒤늦게 생긴 홀드 제도의 빛을 못 본 케이스. 공교롭게도 KBO 최초 홀드 기록 투수도 송유석이었다.

특히 삼성 라이온즈와 치른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송유석은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이날 삼성은 에이스 박충식, 해태는 문희수를 선발로 예고했는데 김응용 감독은 문희수가 불안하다고 판단해 3회 2사 1,2루에서 문희수를 강판하고 선동열을 등판시켰다. 삼성 팬들에게 눈엣가시 같았던 선동열은 기대대로 잘 던졌지만 승부는 길어졌고, 결국 연장 10회말까지 7과 3분의 1이닝을 호투하고 내려갔다. 선동열이 내려가는 순간 삼성팬들은 승리를 예감하고 환호를 질렀지만…

11회에 등판한 선수는 바로 송유석. 특이한 폼 때문에 전날 온 비로 인해 마운드에서 미끄러질 우려가 있었던 송유석은 땅이 거의 다 마른 상황에서 등판해 15회까지 무실점 투구를 보여주며 비록 팀이 승리하지는 않았어도 패배하지도 않게 호투했다. 당시 해태와 삼성은 전적이 1승 1패였고 삼성은 선발 박충식이 그 유명한 15이닝 181구 완투를 하였던 경기였다. 만약 여기서 해태가 졌다면 한국시리즈의 판세가 삼성에게 기울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송유석의 5이닝 무실점 호투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13]

선동열이 빈볼 투수의 조건을 밝힌 바 있는데, 배짱과 제구력 그리고 연기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과거에는 송유석이 그런 투수였으며, "송유석은 두둑한 배짱을 지닌 데다 뛰어난 제구력까지 갖고 있었다"고 평가한 뒤 "타자와 몸쪽 승부를 즐겼는데 가끔 몸에 맞는 공을 던지기도 했다. 그래서 고의로 몸을 맞혀도 표가 안 났다"고 말한 바 있다. 송유석도 훗날 술회하기를 프로야구 무대가 워낙 생존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본인도 살기 위해 던졌다고 한다.

그러나 송유석은 1996년 시즌을 마친 후 LG 트윈스최향남, 동봉철과 함께 최훈재, 조현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 1996년 2월 하와이 전지훈련에서 있었던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 당시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이건열과 함께 야구를 그만두겠다면서 짐을 싸는 데 동참하여 김응용 감독에게 찍힌 것이 원인이었다. 이후 김 감독은 1996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송유석을 일부러 패전처리 투수로 마운드에 올린 다음 빈볼을 지시하였는데 송유석은 하와이 항명사건의 보복임을 직감하였고 타자에게 빈볼을 던지려는 것을 깨달은 심판이 '빈볼을 던지면 정규시즌 경기 및 한국시리즈 출전 불가'를 경고했다고 한다. 송유석은 빈볼 대신 백 네트로 공을 던져 퇴장을 당하였고 시즌 후 트레이드된 것이었다.[14]

2.3. LG 트윈스~한화 이글스[편집]


파일:엘지송유석.jpg
사인을 하는 모습을 김용수가 지켜보고 있다.

LG에서도 중간계투로 그럭저럭 활약해주었다.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친정팀 해태를 상대했으나 김종국에게 홈런을 맞았다.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말 그대로 불을 지르기도 했었다.[15][16] 그 뒤 1999년에는 LG 트윈스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시즌 후 FA를 신청했지만 방어율이 4.72로 불안정해[17] 노쇠화의 기미가 보였고, 과거 혹사 덕분에 성적이 하락세를 탈 것으로 보였다.

FA신청은 LG의 권유로 했으나 정작 구단은 계약 협상은커녕 언론 플레이를 했고 그렇게 FA시장에서 FA 미아가 되어 LG와 1년, 연봉 5000만원에 울며 겨자먹기로 계약했다. 해태 시절 팀 동료인 이강철이 3년 8억이라는 FA계약으로 삼성에 이적한 것과는 대조적이다.[18] 2000년 시즌 개막 전에 최익성을 상대로 신국환과 묶어서 한화로 트레이드됐는데 FA를 신청했다는 것, 주장으로서 그리고 선수의 권익 보호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탓에 구단과 마찰이 잦았던 것[19], 그리고 다른 베테랑인 김기범과 같이 선수협에 우호적이었다는 점에서 구단에게 밉보였던 것이 크다.

그래도 불펜진이 시망이던 한화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예상되었으나... 그동안의 눈부신 활약이 무색하게 혹사의 여파인지 2000시즌은 ERA가 5.34로 폭등했다. 물론 한화는 상군매직에 힘입어 중간계투요원이 답이 없었던지라 그나마 이 정도면 적당히 잘 한 편에 속한다는 점(....). 이후 2001시즌은 불과 4경기 동안 ERA 12.00으로 폭망하면서 그 해 6월에 웨이버 공시되었다. 그 뒤 소속 팀을 찾지 못했고 그대로 은퇴하게 된다. 이미 36살로 반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점 역시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데 어렵게 했다.

1997년 7월 롯데 자이언츠와의 부산 원정 경기에서 벤치 클리어링 당시 퇴장을 당했고 제재금을 부과받은 적이 있다.<프로야구> 박정태.송유석,동시 퇴장<프로야구소식>송유석.박정태에 제재금 부과 2022년 5월 19일 전설의 타이거즈 라이브에 출연하여 본인이 직접 부연 설명을 했다. LG 선수와 박정태가 2루 도루 과정에서 서로 충돌하면서 박정태가 먼저 LG 박종호에게 죽빵을 갈겼고 LG 주장이던 송유석이 그 장면을 보고 불펜에서 바로 뛰쳐나가 박정태에 죽빵을 시전했는데 하필 그게 사직구장 전광판 멀티비전에 그대로 나가고 말았으며 훗날 박정태와는 서로 잘 풀었다고 한다. LG 선수들이 묵는 원정 숙소로 롯데 팬들의 항의 및 협박 전화가 많이 왔다고 덧붙였다.


3. 은퇴 후[편집]


파일:external/image.sportsseoul.com/2016042901001456700102201.jpg
오른쪽이 바로 송유석이다. 왼쪽에 서있는 사람은 선수 시절 동료였던 박철우 두산 베어스 코치.

은퇴 이후 건설업과 숙박업에 종사하였다. 광산구 쌍암동에 사무실이 위치한 (주)루빌코리아의 사장을 맡고 있다.# 본래 회전식 건물 건축 기술을 활용하여 건설업자로 활동하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건설업은 접고 건물 임대업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20]

광주 CMB의 야구 해설가로 경력도 쌓았다. 한편 타이거즈 OB회 총무, 프로야구은퇴선수협의회 부회장도 담당하고 있다.


4. 여담[편집]


  • 동갑내기 부인 임춘회와의 사이에 1남(송원호, 1990년생), 1녀(송지나, 1987년생)를 두고 있다. 아들 송원호는 서울중대초등학교, 배명고에서 선수생활을 했으나 아쉽게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고 동국대에 진학했으나 중도에 군복무를 하면서 야구를 쉬었다. 2013년 KIA 타이거즈신고선수로 입단했다가 그 해 방출되었고 2017년에 KBO 심판이 됐다.[21] 2017년 10월에 결혼하였고 자녀를 낳아 50대 초중반이라는 이른 나이에 손주를 봤다. 송유석 부부 모두 절약 정신이 강하며 해태에서 LG로 이적하면서 가족들이 모두 서울로 이주했다.# 그래서 자녀들은 서울에서 학교를 나왔다.

  • 같은 학교 후배인 김진우에게 싱커를 전수해주었다고 한다. 김진우가 야구계를 떠나 방황하다가 방황을 끝내고 프로야구 복귀를 결심했을 무렵 송유석은 김진우를 크게 꾸짖고 시험해보면서 김진우의 진심을 확인했다. 조범현 감독과 이강철 투수코치에게 김진우를 추천했고 어렵게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 2021년 6월 광주MBC전설의 타이거즈에 정회열과 함께 출연하여 입담을 과시했다. 1980년대 어느날 해태가 원정경기에서 맥없이 패하자 당시 김응용 감독이 패배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했는데 광주로 돌아오던 구단 버스가 광주 교외인 장성군 쯤에 들어서자 대뜸 버스를 세우게 하고 선수들에게 내리라고 한 다음 광주 무등경기장까지 뛰어오게 하는 벌을 시켰다. 이 때 김성한이나 김종모 등 스타급 선수들은 스스로 택시를 불러서 타고 가거나 그들을 알아보던 팬들이 광주시내까지 차에 태워줬지만 본인처럼 무명에[22] 인상이 강한 선수들은 행여나 해코지당할까봐 태워주지 않았고 결국 지나가던 농민이 끌던 경운기를 타고(...) 광주에 돌아왔다고 한다. 이같은 입담이 팬들로부터 폭발적 반응을 얻었고 2021년 10월 방수원과 함께 전설의 타이거즈에 다시 출연했다. 송유석 본인도 팬들의 댓글을 보면서 아직 해태 팬이 많이 있구나를 느꼈고 옛 추억을 방송을 통해 돌이키면서 본인도 다시 젊어지는 느낌이라고 밝혔다. 2022년 6월 김정수와 함께 또 출연하였다. 최해식과 함께 총 3회 출연 타이 기록을 가지고 있다.[23] 2022년 10월 김성규와 함께 출연하면서 다시 최다 출연자가 됐고 2022년 12월 박철우와 함께 출연하면서 출연 기록을 5회로 늘렸다.

  • 송유석은 가장 보고 싶어하는 선배로 김무종을 뽑았다. 파랑새 존[24] 상금 50만원 중 20만원을 봉투에 담아 그 당시 연습생이던 송유석에게 주었으며 20만원은 송유석의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25] 김무종은 일본프로야구에서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송유석의 고생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서 챙겨준 것이고 송유석은 '훗날 내가 스타가 되면 나도 꼭 후배들을 챙겨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 현재 일본 연락처를 알지 못해 아쉽다고 말하면서 꼭 전설의 타이거즈 방송을 보면 연락해달라는 부탁의 말도 남겼다.이후 김무종이 전설의 타이거즈 유튜브에 김성한과의 전화 인터뷰로 근황을 전하기도 한 걸 보면 조만간 두 사람의 재회를 기대해도 될 듯?

  • 원조 마당쇠이자 피네스 피처였던 방수원은 배팅볼을 던지느라 고생하는 송유석을 살뜰히 챙겼고 여러가지 변화구를 전수해주었다고 밝혔다.[26] 배팅볼을 던지면서 변화구 등을 시험해봤고 해태 강타자들이 송유석의 공을 못 때리면 거기서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타구가 빗맞거나 타구가 타자 자신의 발목이나 다리를 때리면 송유석에게 성질을 냈다. 특히 배팅볼을 던지기 까다로웠던 선수로 김일권김성한을 지목했는데 그 이유는 치기 좋은 공을 안 던지면 '아야! 똑바로 안 던지냐?'라고[27] 버럭 화를 냈기 때문이다.

  • KIA 감독을 맡아달라는 댓글들을 보고 본인은 사장이나 단장은 할 수 있어도 감독이나 코치와 같은 현장 지도자는 어렵다고 밝혔다. 본인이 운동을 지도하게 되면 본인 스스로가 먼저 미쳐버려서 그 팀은 지옥훈련을 통해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만들 거라고 했다.[28] 여기에 2022년 초 야구계 선배인 허구연KBO 총재가 된 후에는 "언젠가는 KBO 총재라도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 부산 사직야구장 원정 당시 일화맥콜에 맞서 해태음료에서는 보리텐, 롯데칠성음료에서는 비비콜을 출시했다. 두 회사 모두 많은 관중들이 몰리는 야구장에서 시음회를 개최했는데 하필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나는 바람에 1만개가 넘는 캔들이 그라운드로 쏟아져 들어와 해태, 롯데 선수들 전원과 구장 관리직원들이 들어와서 치웠다고 밝혔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 자주 출연하는데, 자신의 주관을 막힘없이 논리정연하게 말하며 달변가의 면모를 과시함과 동시에 함께 나온 게스트들이 있으면 그들을 세워주는 발언을 잊지 않고 꼭 한다. 댓글에서도 입담이 굉장하다는 반응이 많이 나오며, 현역 시절 어느 보직에서든지 묵묵히 헌신하던 그 선수가 저렇게 달변가였다니 놀랍다는 반응도 꽤 있는 편이다.

  • 싹싹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한국프로야구은퇴선수협회(한은회) 부회장 직과 해태 타이거즈 OB모임 총무를 맡고 있다. 해태 출신 OB들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현역 시절에도 선수단 모임의 총무를 맡았다.평생 총무

  • 해태 버스 방화 사건 당시 피해자였다. 월급 20만원을 찾아서[29] 본인 좌석 밑에 넣어놨는데 하필 버스에 불이 나는 바람에 돈을 고스란히 날렸다. 사실 당시 삼성 구단에서 버스 수리비와 함께 소실된 선수들의 장비나 물건들도 같이 보상해 주기로 했는데, 신인이던 송유석은 그걸 말할 엄두가 안 났다고. 류중일 당시 삼성 선수와 맞대결에서 하필 급소를 직격당한 아픈 스토리도 있다.



5.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5
해태
1군 기록 없음
1986
1987
4
15⅔
0
0
0
-
-
2.87
18
2
10
4
8
5
1.72
1988
3
15⅓
1
0
0
-
1.000
3.52
16
0
6
5
6
6
1.44
1989
3
16⅔
0
0
0
-
-
5.94
23
2
3
8
11
11
1.56
1990
34
98
2
1
2
-
0.667
3.77
90
3
53
62
46
41
1.38
1991
37
(9위)
145⅔
11
4
5
(9위)
-
0.733
(3위)
2.97
126
8
70
74
55
48
1.29
1992
37
(10위)
117⅓
4
10
4
-
0.286
5.60
146
12
58
59
84
73
1.69
1993
39
(6위)
124⅓
11
6
1
-
0.647
(9위)
2.90
109
8
56
67
46
40
1.25
1994
41
(6위)
116⅓
10
8
7
(9위)
-
0.556
3.40
121
4
54
57
50
44
1.42
1995
42
(10위)
120⅔
10
3
3
-
0.769
(2위)
2.98
107
10
49
51
44
40
1.23
1996
31
71⅓
2
1
3
-
0.667
4.29
74
6
42
32
38
34
1.4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7
LG
47
78⅓
2
7
1
-
0.222
4.37
86
6
41
41
41
38
1.53
1998
55
91
3
3
3
-
0.500
2.97
92
7
30
44
32
30
1.23
1999
52
82
5
3
5
(10위)
-
0.625
4.72
87
13
33
51
49
43
1.39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한화
38
64
1
4
2
2
0.200
5.34
70
8
56
21
48
38
1.75
2001
4
3
0
0
0
0
-
12.00
4
1
4
1
5
4
2.33
KBO 통산
(15시즌)
467
1159⅔
62
50
36
2
0.554
3.84
1169
90
565
577
563
495
1.41

6.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4 08:09:37에 나무위키 송유석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대서면 상남리·화산리 일대에 여산 송씨 집성촌이 있다.[2]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 안남리에 있었다. 1968년 9월 9일 개교해 2001년 9월 1일 대서초등학교 관할로 편입되어 대서초등학교 안남분교장으로 개편되었다가, 2008년 3월 1일 폐교되어 대서초등학교에 통폐합되었다.[3] 김인호 현 진흥고 감독, 나광남 심판, 이한열 열사가 동기동창이다.[4] 보통 프로야구 선수로 성장하는 선수들의 야구 입문 시점은 대부분 초등학생 시절이며, 아무리 늦어도 중학생 초기 때다. 고교 입학 후 야구에 입문해서 성공한 케이스는 정삼흠과 송유석 정도뿐이다.[5] 야구인은 아니지만, 야구계와 괸련된 인물 중에서는 야구선수 문동주의 아버지인 문준흠투척(해머)선수였다.[6] 즉, 고등학교 진학 후 정식으로 야구를 시작했고 졸업반인 고3때 처음으로 실전에 나서 연세대까지 합격했다는 것이다. 굉장히 늦은 나이에 야구선수 생활을 시작했음에도 강팀이자 명문대인 연세대에 체육특기자로 합격했을 정도면 그냥 재능이 미친 거라고 보면 된다.[7] 고등학교 동기인 나광남김인호는 각각 단국대와 성균관대에 진학했고 1989년 신인드래프트에서 각각 삼성과 롯데의 지명을 받고 입단한다.[8] 해태 측에서 내세운 이유는 1년 선배인 문희수가 광주일고 3관왕을 이끈 에이스였음에도 불구하고 데뷔 첫 해 1승도 거두지 못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9] 그리고 먼 훗날인 2000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한다.[10]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인 팀 린스컴의 투구동작 역시 투창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실제로 비슷한 편.[11] 김성한은 송유석마저 부를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고교-대학 직속 후배였던 이건열을 불러다가 배팅볼을 던지게끔 한 적도 있다. 역시나 배팅볼 피칭의 대가는 짬뽕 한 그릇.[12] 배팅볼 투수로 뛰다가 자신만의 폼을 다듬은 뒤 기량이 만개한 것은 한용덕도 같은 사례다.[13] 다음날의 4차전에서 삼성이 승리했던 것을 생각할 때, 이 3차전에서 해태가 졌다면, 연속우승 신화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었다. 1승 1무 2패와 1승 3패는 확실히 의미가 다르다.[14] 스포츠조선, 1996년 10월 31일, [송유석] 뜨거운 감자[15] 다만 천보성 감독이 한국시리즈 매 경기마다 송유석을 등판시켰고, 정규시즌에서만 100이닝 가까이 소화한 30대 초반의 불펜투수가 가을야구에서도 혹사당한 걸 생각해보면, 한국시리즈까지 잘 하기는 쉽지는 않다.[16] 그래도 5차전에서 무실점 세이브를 챙겼다.[17] 다만 1999년에 LG 투수진이 박살 난 걸 생각해보면 차라리 재계약을 하는 게 나을 지도 몰랐다.[18] 정작 이강철은 삼성에서 7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선발, 불펜 어디에도 쓸모없는 선수였다. 결국 2001 시즌 중반에 다시 기아 타이거즈로 이적했으며 2002~2004시즌은 핵심 불펜으로 뛰면서 통산 150승을 달성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19] LG와 한화에서 모두 선수들의 투표로 주장에 임명됐다. 한화에서는 그러나 새로 부임한 이광환 감독이 투수가 아닌 야수가 주장을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비쳐서 장종훈으로 주장이 변경됐다.[20] 그래도 제법 큰 상가 건물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21] 송원호의 선수로서의 장래가 어둡다고 판단한 송유석이 아들에게 심판의 길을 권했다고 한다. 해태 팀 선배인 차영화 코치의 아들 차정구(광주일고-동강대)도 잠깐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다가 KBO 1군 심판으로 활동중이다.[22] 장진범, 송일섭은 결국 뛰어서 광주까지 왔다. 장진범이 늘 항상 최상위권으로 도착해서 최윤범 당시 매니저가 '장진범이는 야구를 할게 아니라 마라톤을 했어야 했어'라고 할 정도로 잘 뛰었다.[23] 최해식은 김정수, 김성한, 양준혁과 함께 각각 출연했다.[24] 무등야구장 외야펜스의 일부분으로 홈런 타구가 이 쪽 펜스를 넘기면 특별 상금을 주었다.[25] 당시 직장인의 월급이 2~30만원 정도였는데 이 상금은 몇몇 타자들의 쏠쏠한 수입원이었다고 한다.[26] 생존 경쟁이 치열한 프로야구계에서는 같은 팀 투수에게도 투수의 주무기 구종 그립을 선뜻 알려주지 않는 분위기가 있으나 간혹 타 팀 투수에게도 친절하게 알려주는 투수들도 있다. 물론 그립을 안다고 바로 그 구종을 써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만...[27] 김일권과 김성한은 연습에 대한 애착이 강했기에 허투루 연습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28] 본인의 선수 경력을 생각하면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으로, 연습생에서 정식 선수로, 그리고 최강 팀의 핵심 투수로 인정받기까지 당연히 뼈를 깎는 노력이 따라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유석 본인도 후배들이 그렇게 하길 원하는 마음이 클 것이고 지도자가 되면 그런 지옥훈련으로 후배들을 지도하게 될 것 같다며 미리 선을 그은 것.[29] 2021년 기준이면 약 200만원에 해당하는 액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