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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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송호곤(宋鎬坤)
자 / 호
직부(直夫) / 정산(靖山)
본관
은진 송씨
생몰
1865년 10월 9일 ~ 1929년 12월 9일
출생지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유전리
사망지
경상남도 합천군
추서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송호곤은 1865년 10월 9일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유전리에서 부친 송근용(宋根龍)과 모친 영천 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8살 때 서당 공부를 하면서 소학을 읽은 뒤 반드시 모친 앞에서 배운 것을 밝히는 등 학업에 열성을 보였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7살때 사망했고 모친은 12살 때 사망했다. 모친 사망 후, 그는 재종숙인 송근형(宋根馨)에게 의탁했다.

1884년 삼가현감으로 부임한 신두선(申斗善)이 고을의 학풍을 진작시키고자 고을의 자제들을 모아 후산(后山) 허유(許愈)와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을 초빙해 교육을 시켰다. 이때 송호곤은 여기에 참여했다. 허유는 그의 학문이 깊은 걸 보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굳게 앉아 독서를 할 사람이 지금 몇 명이나 있겠는가. 오직 직부(直夫)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격려했다. 그 후 송호곤은 허유를 자주 찾아뵈어 학문을 배웠다. 또한 성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를 만나 사단칠정, 이기론 등의 성리학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다.

1894년 봄에는 호서 지방으로 가서 송병선과 아우 송병순 등을 만나 이기(理氣)와 체용(體用)의 분변(分辨)등을 토론했다. 1895년에는 거창군에 가서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를 뵙고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집 간행을 도왔다. 1896년에는 곽종석의 문인이 되었으며, 1897년에는 안의 수승대를 방문하고 모리(某里)에 있는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유적지에 들러 병자호란 때 자결을 시도했던 충절을 기리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함안 용화산 기슭에 있는 합강정(合江亭)을 방문해 한강과 여헌의 유람을 떠올렸으며 이어 마산 등지를 유람했다. 이해 10월 서산 김흥락에게 글을 보내 ‘태극도설’에 대해 질문을 했으며, 1901년 어릴때 자신을 돌봐 주었던 재종숙 송근형이 세상을 떠나자 어버이 상을 당한 것 같이 애통하게 여겼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스승 곽종석은 서울로 상경해 조약을 폐기하고 을사오적을 참수할 것, 열국공관에 호소할 것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송호곤은 여기에 참여하려 했지만 병에 걸려 상경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고향에서 지역 선비들과 성리학에 대해 토론했고 유학자의 정신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당시 중국의 대표적 사상가인 양계초의 문집인 ‘음빙실집(飮氷室集)’을 읽고 공자의 도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점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전우의 성리설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1914년 송재락, 송호완, 유원중, 문용 등과 함께 거창 다전으로 가서 면우 선생의 명으로 강목 분류를 정하고 향음주례를 행하고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와서는 안락산방(安樂山房)에서 제자들 30여 명을 모아놓고 학문을 연마했다. 1919년 곽종석, 김창숙 등이 주도한 파리장서 서명운동에 가담해 서명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합천 형무소에 구속되었다가 7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후 곽종석이 세상을 떠나자 제자의 예로서 장례에 참여했다.

1922년 덕산 경의당(敬義堂)에서 강장(講長)으로 초빙되었지만 사양했고, 1925년 가을에는 매서 김극영, 상헌 송기용, 겸산 문용 등과 함께 한성으로 가서 면우집 간행의 일을 보고 호서지방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이후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는 1929년 12월 9일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저서로 정산집(靖山集)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송호곤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