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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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특징
3. 자격
4. 역사
4.2. 조선의 인식
5. 역대 쇼군
6. 오고쇼
6.1. 현대의 비유적 의미
7. 유사사례
8. 기타
9. 각종 매체에서의 쇼군
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쇼군(将軍(しょうぐん)을 '일본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우두머리'로 정의한다. #

원래 쇼군은 장군일본어 발음일 뿐이지만, 일본사에서는 명목상으로 천황 다음가는,[1] 실질적으로 최고 권력자인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한다. 서양에서도 대부분 쇼군(Shogun)으로 표기한다.[2]

정이대장군은 오랑캐를 정벌한다는 의미의 '정이(征夷(せい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동쪽의 이민족, 에미시를 토벌하는 직책이었고, 그 외의 이민족인 규슈의 구마소, 하야토 등을 대상으로는 정서(征西)대장군, 정적(征狄)대장군 등의 다른 대장군 관위가 존재했다. 에미시는 여러 이민족 중에서도 특히 강대했기에 정이대장군 외에도 따로 정동(征東)대장군을 두었는데, 이 역시 앞서 등장한 다른 대장군 직책과 동등한 위계에 해당하는 관위였다. #

이 정이대장군은 1185년부터 1867년까지 아즈치모모야마시대를 제외하면 사실상 전일본의 최고지도자였다.[3] 즉, 전근대 일본 율령제에서의 영외관/국정 최고권력자이자 무가정권의 최고통치자다.


2. 특징[편집]


원래 '일본'의 권력 구조는 고대까지는 천황이 군주로서 직접 전국을 다스리는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기본으로 했으나 헤이안 시대 중기에 접어들어 점차 천황가 또는 공가(公家(くげ)의 유력자가 집정을 하거나, 섭정(摂政(せっしょう)이나 관백(関白(かんぱく)을 독점하는 후지와라 가문에 의한 셋칸정치로 바뀌었다. 그리고 사무라이 계층[4]은 12세기까지도 문관이나 문벌 집안에 비해 한 단계 아래 취급을 받았으나, 타이라, 미나모토 씨족 등 무인들이 정치 전면에 대두하면서 교토 황궁을 두고 서로 전쟁을 벌이는 양상으로 발전했다.[5] 겐지(미나모토 가문)와 헤이케(타이라 가문)는 천황가의 분가 출신이었지만 수도 교토의 문인 계열 정통 귀족인 후지와라씨, 타치바나씨와 달리 무가 집안이었다.[6]

교토는 아무래도 수도 특성상 천황가를 비롯한 여러 정치 세력이 오랜 뿌리를 갖고 있고, 누가 정권을 잡아도 항상 정치 불안정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7] 자신의 근거지로 정치 중심을 옮겨 정권의 안정과 항구적인 집권을 노렸다. 이를 막부 개창, 혹은 막부 개막이라고 한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마쿠라 막부를 열고 자신이 쇼군에 취임하면서, 천황을 대신해 쇼군이 통치하는 시스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런 이중체제가 1192년부터 1868년까지 무려 700여년이나 계속되었다. 쇼군이 실제 통치를 하면서 정작 국가원수인 천황은 점점 권력이 떨어지다 나중엔 꼭두각시 수준으로 전락한다. 물론 천황도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한 시도를 한 적은 있었다. 1333년 일본의 제96대 천황 고다이고 덴노가 고대 일본처럼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로 되돌리기 위해 싯켄이나 막부, 관백 등을 죄다 폐지하는 겐무 신정을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해 쇼군이 다스리는 막부 체제가 이후 무로마치 막부를 거쳐, 에도 막부까지 500여년을 더 이어갔다.

고대와 중세, 근세를 통틀어 일본 정치사의 특이한 점은 누가 정권을 잡아도 천황과 공가 등 교토의 조정 자체를 건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8][9] 쇼군은 교토 조정의 천황공가 귀족(공경)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늘 긴장 관계에 있었다.

1867년 대정봉환으로 일본 역사의 마지막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메이지 덴노에게 정권을 반환하면서 무가 정치는 막을 내렸다. 여담이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황실과 사이가 원활한 편이었고, 빨리 항복한 덕분에 도쿠가와 가문은 멸문되지 않고, 화족으로 편입되고[10] 황실과 혼인을 맺는 등 대우받으며 가문을 이어갈 수 있었다.

현대 일본에서도 천황은 상징적 존재로만 군림하고, 실질적인 정치는 총리 이하 내각이 하는 입헌군주제라는 점에서 우스갯소리로 '자민 막부'(...) 같은 말이 나오기도 한다. 다만 정치적 형태가 유사하다는 것이지 지위가 실제로 연속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일본사에서는 천황의 권력을 무가정권에 위임했다가 1867년에 발령된 <왕정복고의 대호령>으로 다시 회수했고, 이때 정이대장군과 막부는 폐지되었다. 이후 한동안 태정대신, 좌•우대신, 참의와 각성(省)의 경(卿)을 두었다가, 1885년 12월에 내각총리대신과 각성(省)의 대신(大臣)을 두는 내각 제도가 시행되었다. 때문에 정이대장군의 폐지와 내각총리대신의 성립 사이에는 약 20년의 공백이 있다.


3. 자격[편집]


이 관직은 원래 일본 동북부에 거주하고 있었던 에조(아이누)를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토벌부대의 대장 자리였다. 정식 호칭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었는데, 여기서 '정이'(征夷)란 '동쪽 오랑캐를 정벌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쇼군에 임명되려면 혈통과 위상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친왕이나 후지와라씨, 유서 깊은 무가 출신의 인사들을 쇼군에 임명했다.

일반적으로는 막부의 정이대장군은 겐지(미나모토씨)의 조상을 가진 집안, 그 중에서도 세이와 겐지 중 카와치 겐지 계통이여야만 쇼군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이러한 인식이 생겨난 것은 애당초 막부 체제라는 것이 겐지 출신의 쇼군이 중앙을 통제하고 같은 세이와 겐지나 카와치 겐지 계통 방계 가문들을 각 지역의 슈고로 임명하여 국가를 통치하는 일종의 가문 연합체였기 때문이다. 쇼군 자리가 무가를 대표하는 동시에 세이와 겐지 일족을 대표하는 성격도 다소나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가마쿠라 막부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세이와 겐지(淸和 源氏)라는 진짜배기 천황가의 분가 출신이었고, 가마쿠라 막부 시절 간무 헤이시였던 호조씨싯켄(집권)만 했을 뿐 정이대장군이 되지 못한 채로 일본을 다스리다 반 호조씨 세력들에게 멸문당했고, 그중 하나였던 아시카가씨가 무로마치 막부를 건설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를 열면서 세이와 겐지의 후손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미나모토씨만이 쇼군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세간의 인식은 사실이 아니다. 일단 정이대장군이라는 직위 자체가 가마쿠라 막부 이전부터 있어왔기 때문에 겐지 출신이 아닌 쇼군들이 존재했으며 가마쿠라 막부의 제3대 쇼군이었던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암살당해서 요리토모의 직계 혈통이 끊겨 버리자, 집권 세력인 호조씨가 구조 가 등의 '셋케(섭가)'(攝家(せっけ, 섭정직을 제수받을 수 있는 가문)와 황족(친왕) 같은 비(非)겐지계 쇼군들을 옹립했기 때문에 겐지 이외의 가문에서 쇼군이 나온 예는 상당히 많다.

무엇보다도 간무 헤이시를 자칭하던[11] 오다 노부나가에게 쇼군직을 제안했던 사례가 있다. 이를 보면 미나모토씨만이 쇼군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지켜지면 좋은 관례'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오히려 겐페이 전쟁 이후 일본에는 미나모토와 타이라의 대결이 반복되며 서로 패권을 잡는다는 일본식 세계관이 있어 타이라를 자칭했던 오다에게도 쇼군직 제안이 온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혈통을 따진다는 것조차도 명목상으로 그랬고 실질적으로 그렇진 않았다. 일본은 양자 입적이 매우 흔해서 명망있는 사람의 양자로 입적하면 호적 세탁 따위 식은 죽 먹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아버지가 명문가 여자의 데릴사위로 들어간 후 본인이 외삼촌의 양자로 입적하는 것이 가장 각광받는 호적 세탁 방법 중 하나였다.

실제로 몇몇 명망가[12]슈고 다이묘[13]를 제외한 대부분의 센고쿠 다이묘는 대개 지방 호족(고쿠진)이 세력을 얻자 어디서 주워다 붙인 족보로 헤이시나 겐지를 사칭(...)하는 수준이었다.[14] 헤이시나 겐지가 아니면 뼈대있는 집안으로 대접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출신 가문인 마츠다이라는 결코 쇼군 자리를 넘볼만한 가문 배경은 아니었으나 조정에 뇌물을 바쳐 무로마치 쇼군의 계승권을 주장 가능한 위치였던 닛타 가문[15]에 입적되는 방식으로 미나모토씨를 칭했다.[16]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자신을 양자로 삼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히데요시는 우겨볼 여지조차 없는 비천한 출신이라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는 설이 있다.[출처][17] 그러나, 이건 당대에는 없던 이야기. 이 이야기가 처음 나타나는 것이 에도 시대의 막부 어용학자인 하야시 라잔의 저술에서이기 때문에 학자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비해 열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이미지를 위해 만들어낸 에피소드라고 본다.

당대 일본은 족보조작이 일상인 곳이었으며[18] 히데요시가 쇼군이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관백 직위는 미나모토 계열이 맡는다는 관념 정도만 있던 쇼군보다도 격이 높고 오르기 어려운 자리였다. 오직 후지와라의 직계 가문인 오섭가 출신만이 맡을 수 있었으며 그들은 미나모토씨보다 고귀한, 천황가 다음가는 귀족 가문이었다.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히데요시는 오섭가의 필두인 고노에 가문에 양자로 입적하고, 그것도 모자라 새로 사성받아 도요토미씨를 칭하게 되었다. 만일 히데요시가 쇼군 자리에 오를 생각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오르는 것에 큰 무리는 없다. 설령 아시카가 측에서 입적을 거부한다 해도 다른 방계 가문을 찾거나, 가마쿠라 막부에서 섭가 출신 쇼군이 나온 전례도 있으니 오섭가에 입적하면 어쨌든 쇼군에 오를 수 있었다. 따라서 히데요시가 쇼군 대신 관백 자리를 택한 것은 혈통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통치 성향 때문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이다.


4. 역사[편집]


고대에는 '이쿠사노키미'라 불렀으며, 율령제하에서 병사 1만 명에 대하여 쇼군 1인, 부쇼군 2인을 두고, 3개 군에 대쇼군(대장군) 1인을 두도록 규정했다. 실제로는 북방의 에조 원정, 남서 규슈의 하야토 정벌, 천황의 호위, 외국 사절 응대 등 네 가지 사안에 대하여 임명되는 임시직이었다. 한국사에서 고려 중기까지의 원수,[19] 그리고 조선의 도원수와 유사한 직책이었다. 각 쇼군은 서로 다른 칭호를 가졌기에 실제로 '쇼군'이라는 관명은 없었다. 유일하게 상설직이었던 쇼군은 대 에조(아이누인) 방위를 담당하는 진수부의 '진수부장군'(鎭守府將軍)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헤이안 시대에 쇼군하면 진수부장군이었다.

무가정권의 최고 통치자로서의 정이대장군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시초인데, 이 발상은 요리토모가 이전 무가정권의 양태를 분석하여 고안했다고 추정된다. 맨 처음 무가정권을 이룩한 헤이케 일족은 기존의 율령체제 내에서 관위를 높여 나갔고, 이를 제압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조정으로부터 '세이토우타이쇼군'(정동대장군)직을 임명받았다.

1189년에 권대납언(権大納言(ごんだいなごん)[20] 겸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将(うこんえのだいしょう)에 올라 공경이 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정소'(政所(まんどころ)를 개설하면서 사실상의 무가정권이 시작되었는데, 당초에는 간토(관동) 일대를 다스리는 강력한 지방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21] 또한 '우콘에노다이쇼'(우근위대장)는 수도 교토의 방위를 담당하는 관직이라서 조정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독립한 간토에서의 무사정권을 구상하고 있었던 요리토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관직이었다. 게다가 현재의 도호쿠 지방인 오슈(奥州, 오주) 일대는 히라이즈미에 근거지를 두고, 몇 대에 걸쳐 강한 세력을 구축했던 오슈 후지와라 일족이 사실상 사유하고 있었는데, 요리토모는 이를 능가하는 권한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이대장군직에 주목했다.

기존에 존재했던 무가 정권인 헤이케,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오슈 후지와라씨 지방정권 세 사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 헤이케는 교토의 전통적인 공가의 체제에 편입되어 관위를 올리며 가격(家格)을 높여 나갔다. 그러나 이는 지방의 실효통치나 무사의 대표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율령체제에 있는 중앙 관직을 귄위의 기반으로 삼는 것을 피하고 교토의 조정과는 거리를 둘 수 있는 직위를 받야하 했다.
  •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200년 전에 존재했던 정동대장군 직위를 받았다. 정동대장군은 이름 그대로 동쪽을 정벌하는 직위로, 동쪽에 있던 요리토모 세력을 제압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요시나카를 제거하고 권좌를 차지한 요리토모는 체면상 자기 또한 이와 대등한 직위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또한 자기 역시 동쪽에 있는 세력(오슈 후지와라)를 제압해야 하는 처지로서 비슷한 성격의 직위가 필요했다.
  • 도호쿠의 오슈 후지와라 지방정권은 진수부장군 직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무쓰 국, 데와 국에서의 군정이라는 형태로 지방통치권을 인정받아 100년 동안 그 땅을 지배하였다. 진수부장군은 진수부라는 변경 상비군을 운영하는 기관의 현지사령관이기에 수도에 체류할 필요가 없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은 교토의 압박을 피해 도호쿠에서 독립적으로 살 수 있었다. 때문에 간토를 차지하여 동부 기반의 독자세력을 유지하려는 요리토모 역시 이와 같은 성격의 직위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또한 상술했듯이 요리토모는 오슈 후지와라를 제압해야 했기에 진수부장군보다 격이 높은 직위가 필요했다.
따라서 요리토모는 교토 조정과 거리를 둘 수 있으며, 무사의 대표로서 기능할 수 있으며, 진수부장군보다 격이 높고 정동대장군과 대등한 직위가 필요했다.

또한 당시 독립적인 무가정권을 구상하고 있었던 요리토모에게 필요했던 권한은
  • 간토 내 무사의 정점에 군림하는 '동량'(棟梁)[22]으로서의 권한
  • 전국에 '슈고'(守護 ; 수호. 즉 군사, 치안을 담당하는 막부의 지방관)와 '지토'(地頭 ; 지두. 즉 토지와 백성을 관리하는 막부의 지방관)를 파견할 권한.
  • 공경의 위에 오르면서 설치한 가정기관을 공적인 정치기구에 준하는 기관으로 인정받을 것.
이상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를 만족하는 것이 정이대장군직이었다.[23]

단, 이를 뒤집는 주장도 있다. 요리토모가 필요로 했던 것은 '다이쇼군'(대장군)이라는 칭호뿐이었다는 것으로, 이는 본래 '쇼군(장군)'의 후예라 자부했던 요리토모 자신에게 위엄을 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24] 이후로도 정이대장군 이외의 쇼군이 임명된 예가 없지는 않았으나 예가 지극히 드문 관계로 단순히 '쇼군'으로 약칭되었다. 단, 윗사람의 관명을 직접 지칭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였으므로, 실제로는 오카미(お上), 쿠보(公方, 공방) 등으로 불리었다.

가마쿠라 막부간토 지방을 다스리는 지역 정권의 성격이 강했으니, 간사이(관서) 지역에서는 여전히 덴노의 조정이 통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3대째로 미나모토씨가 내분에 의해 단절되자 고토바 덴노 측은 가마쿠라 막부를 토벌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려 했는데, 오히려 가마쿠라 측의 집권 호조씨의 역습에 관광당해 교토가 함락되고 덴노가 쫓겨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조큐의 난). 이후 남북조시대까지 덴노의 정권은 실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25]

이후 전국시대에는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이 쇼군직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둘 다 쇼군이 되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쇼군, 태정대신,[26] 관백[27] 중 원하는 자리를 골라 가져가라는 일본 역사상 미증유의 파격 제안을 받고도 모든 것을 거절했다. 이것을 일본에서는 '삼관추임문제'(三官推任問題)라고 부르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이 제안을 받고 오래 지나지 않아 혼노지의 변이 터져 노부나가가 사망했기에 노부나가의 본의가 무엇이었는지 영원히 확단할 수 없게 되었고, 일본 학계에서도 이거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하지만 노부나가가 쇼군직에 관심이 있었으면 1568년에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부쇼군 직을 권했을 때 응하지 않았겠냐며, 파천황적인 이미지답게 관백, 태정대신이나 쇼군 같은 구시대의 권력 체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28] 보는 이들도 삼직 각각의 관직을 지지하는 설만큼이나 많다.

히데요시는 쇼군보다 더 혈통 따지고 오르기 힘들며 상위에 있는 관백 자리에 취임하면서 쇼군직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게 됐다. 정이대장군이 무가의 수장이라면 관백은 덴노를 대리하는 자리였고, 족보의 신빙성이 의심되는 구성원들로 버글대는 겐지 씨 중에서 배출되는 쇼군과는 달리 관백미나모토보다 격이 높은 후지와라 가문 중에서도 종가 중의 종가들인 고셋케(오섭가(五攝家(ごせっけ), 즉 고노에,[29] 구조, 니조, 이치조, 다카쓰카사) 출신들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였으므로 더욱 급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낮은 출신 신분의 문제는 고노에 사키히사의 조카로 들어가서 해결했다.

이 때문에 쇼군 및 막부 정권을 대역무도한 것으로 취급하는 존황사상을 이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히데요시가 조정과 천황을 존중했기 때문에 쇼군이 되지 않은 것이라 해석되어 덴노의 충직한 신하로써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대륙 침공의 좋은 본보기였던 것은 덤.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히데요시는 조정에 대해서 그런 식의 충성심은 전혀 없었고, 조선으로 출병하지 말라는 고요제이 덴노의 어명마저 씹고 자기 하고싶은대로 하고 살았다. 심지어는 고요제이 덴노에 두고 다이묘들에게 자신에 대해 충성을 서약하게 하면서 힘을 과시한 적도 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이마저도 히데요시가 다이묘들에게 '덴노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며 왜곡했다.

158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끝으로 쇼군직은 폐지되었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에 취임함으로서 다시 부활했다. 전국 3걸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만이 쇼군직에 흥미를 보인 이유는 새로운 성씨를 창설하고 이에야스에게도 이를 하사한(당대 이에야스의 풀네임은 '하시바 다이나곤 도요토미노 아손 이에야스'였다.) 히데요시의 그늘로부터의 단절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야스는 농민의 자식이었던 히데요시에게 굴종한 것이 여간 굴욕이 아니었던지, 히데요시 수하의 다이묘가 자신에게 복종한 후에도 집요하게 트집을 잡아 가문을 단절시키는 등 해코지를 해가면서까지 히데요시와 손을 끊은 것을 분명히 했고,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를 허무는 등 다소 치졸한 방법까지 동원해 격하했다.


4.1. 천황과의 관계[편집]


천황과 쇼군의 관계는 그 역사가 길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기술하기가 어려우나, 쇼군직의 승계는 어디까지나 천황에 의한 '선하(宣下)'였으므로, 기본적으로는 명예군주신하인 셈이었다. 본래 일본에서는 천황이 친정을 한 예가 드물기에 쇼군이 실세이고 천황은 얼굴마담이었다고 단순화하기보다는, '무사 계층에 의한 현실 정치를 쇼군이, 쇼군과 무사의 권력행사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천황 및 공가가 담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권과는 관계없지만 관직 위계상으로는 쇼군보다 위인 공가[公家] 계층도 존재했다.[30] 그런 직책을 맡은 인물들 중 쇼군 수준의 권력을 누린 인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뿐이었다.

단, 에도 막부 중기 이후에는 쇼군 선하의 칙사가 에도로 내려오고, 이 때 쇼군이 상좌에, 칙사가 하좌에 앉는 형태로 정착되었으며, 쇼군의 실질적인 가격(家格)이 명실공히 일본 최고가 되면서 막부가 천황의 조정과의 외교면에서 상위에 위치하는 시기가 150년 가까이 이어졌다. 물론 이는 막부 말기 대두되는 존황사상에 의하면 대역부도한 일이었기 때문에 유교적 존왕양이 사상은 곧 막부를 쓰러뜨리자는 토막(討幕)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4.2. 조선의 인식[편집]


조선시대에도 일본에 '천황'이라는 진짜 군주가 있고 쇼군은 천황으로부터 임명된 존재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 《해동제국기》에 '천황대서'와 '국왕대서'를 두어서 덴노의 계보와 쇼군의 계보를 분리해서 나열해 놨기 때문. 다만 조선 입장에서는 워낙 이질적인 체제라 이해도가 부족했는지 《조선왕조실록》에는 무로마치 시대 쇼군과 에도 시대 쇼군을 일반적으로 '관백(간파쿠)'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대군'과 '일본 국왕'이 혼용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시대에 들어오면서 조선-에도 막부 측이 서로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맺은 협정에서는 조선 측이 막부 측을 '일본 국왕'으로 호칭하려다가 되려 일본 측에서 이 호칭을 거절한 적이 있었다. 이는 무로마치 막부중국으로부터 '일본 국왕'의 명칭을 공식 하달받았듯이, 조선은 일본의 새 지배자인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완전히 몰아냈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에도 막부 측에서는 아직 천황의 협조가 필요한 한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오사카에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한 사항이라서 이를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 대해 일본측이 쇼군을 칭하는 호칭은 일본국대군으로, 당연히 조선에서는 국왕의 적자를 가리켜 부르는 호칭인지라 종종 군주의 사신이 어떻게 대군에게 무릎 꿇을 수 있겠냐는 식으로 예전 관련으로 다툼이 일어났다. 다만 대군이라는 칭호 자체는 《주역(周易)》에서 「대군(大君)이 명(命)을 받음이여, 나라를 열고 집안을 일으키도다」(大君有命,開國承家), 「무인(武人)이 대군이 되도다」(武人爲於大君), 「지혜롭게 임함이니 대군의 마땅함이라」(知臨, 大君之宜) 등에서 따온 호칭이며, 주역의 이 문구에서 대군이란 천자(天子) 즉 황제를 가리키는 것이었기에 '일본국대군'이라는 말은 달리 보면 '일본 황제'라는 말이 되기도 하다(...). 또한 대군(大君)을 일본어로 읽으면 오오키미(おおきみ)인데, 이는 천황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효종 대까지 '대군'을 쓰다가 숙종 때 일본의 요청으로 '일본 국왕'으로 잠시 바뀐 적이 있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였다. 6대 쇼군 이에노부(家宣) 측근이었던 그는 조토쿠의 치(正徳の治)라 불리는 개혁을 주도하면서 당시 많은 경비가 들어가는 조선통신사 대접을 간소화하고자 했으며, '대군'은 조선에서는 국왕의 적자(嫡子)를 의미하는 칭호인데 그럼 우리 쇼군이 조선 국왕의 아들이 된다는 거냐며 조선 국왕과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며 '일본국대군'이 아닌 '일본국왕'으로 바꿀 것을 제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대 의견도 많았으며[31]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의 시대에 '일본국대군'으로 돌아갔다.

1763 ~ 1764년(영조 36년)에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단의 일원이었던 원중거의 《승사록》에서는 천황을 '왜황(倭皇)'으로 칭하고, 쇼군을 '관백' 혹은 '대군'으로 칭하며, 임진왜란 직전 황윤길과 김성일을 각각 정사와 부사로 한 사절단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예우 문제로 시비가 붙었던 일을 떠올리며 쇼군에 대한 예우가 딱 잘라 정하기가 힘들고 애매하다는 것[32]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에도 막부에 통신사를 파견할 당시 일본 국내 정치판이 다소 불안정해 통신사가 보고를 올린 바 있는데 이에 따르면 관백이 제위를 겸한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기도 하다.

5. 역대 쇼군[편집]










6. 오고쇼[편집]


천황에게 태상황[33]이 있었듯이,[34] 쇼군에게는 에도 시대부터 오고쇼(大御所(おおごしょ)[35]가 있었다. 원래 '오고쇼'라는 말은 에도 막부 이전까지 전면에 나서지 않으나 여전히 실권을 가진 친왕이나 그 거처를 이르렀으나 에도 막부부터 은퇴한 쇼군이나 그 거처를 의미했다.

누구나 알다시피 아예 막장 나라가 아니면, 군주로서 한 나라를 통치하는 건 동 • 서양을 통틀어, 진짜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펴는 일 외에도 할 일이 너무 많고 엄청나게 피곤했던 게 당연했던 일로써 자신이 원하는 권력 쪽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중앙집권이 약해서 정적을 견제하는 문제가 다른 중세 어떤 국가들 못지 않게 피곤했던 일본천황이 실권이 있을 때는, 천황을 그만두고 물려준 상황(上皇)이 피곤한 실무는 다음 천황에게 맡기고, 순수한 정치세력적인 실권을 쥐는 일[36](인세이)이 많았는데, 쇼군의 실권 시기 역시 마찬가지여서 쇼군을 어느 정도 하다가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본인이 오고쇼가 되어 실권을 휘두르는 일들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일본사에는 천황 vs 쇼군보다 오히려 천황 vs 상황(上皇)이나 쇼군 vs 오고쇼의 세력 충돌 문제가 실질적으로는 더 심한 경우가 많았다.

다만 보충설명을 하자면 사실 천황 vs 상황은 자주 있었지만 쇼군 vs 오고쇼인 경우는 드물었다. 인세이의 경우 상황이 천황에게 양위한 다음 실권을 휘두르다 못해 왕위계승권까지도 손을 대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37] 또 아예 상황보다 천황이 먼저 죽자 그 다음 천황대까지 전횡을 벌이는 등 인세이는 생각 이상으로 비정상적인 경우가 많았던 것에 비해 오고쇼의 경우 대부분 실권을 휘두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계승권에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으며[38] 때로는 오히려 계승권 서열을 따져서 더 견고하게 했던 적도 있었는데, 이에야스의 아들이자 쇼군 히데타다가 장남과 차남 중 후계자를 고를 때 히데타다의 처는 차남을 총애해서 차남을 후계자로 밀었지만 당시 오고쇼였던 이에야스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함으로써 후계자는 장남인 이에미츠임을 분명히 하였다.[39][40]

쇼군이나 천황 입장에서는 원칙적으로 자신이 제1권력자인 것이고 피곤한 정치 실무는 자기가 다하는데, 자기보다 편하게 쉬는 자기 아버지(오고쇼 혹은 상황)가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는 자기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 않고 아버지를 따르는 세력에 힘을 유지시키며 죄다 이래라 저래라 하며 간섭을 해댔기 때문에 불만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에도 막부의 창시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고쇼라는 명예직의 창시자인데, 이에야스가 공식으로 쇼군 자리에 있던 기간은 불과 2년밖에 안 되며, 이후 죽기 직전까지 10년이 넘도록 오고쇼 자리에 앉는다.

사실 이에야스가 굳이 쇼군을 2년만 하고 오고쇼라는 직책을 만들어 앉은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이에야스가 천하를 평정하고 쇼군에 즉위할 때 이미 60이 넘은 나이였고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령이었다. 물론 이에야스 본인은 이후에도 10년이나 더 살았지만 그건 역사를 아는 지금의 미래인 시점에서야 아는 부분이고, 어쨌든 쇼군에 즉위할 당시 이에야스는 당장 언제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당연히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본인이 쓰러지거나 심지어 급사하기라도 한다면 아들, 더 나아가 아예 도쿠가와 가문 자체가 쿠데타의 표적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미리 쇼군직을 주면서 본인이 죽었을 때 아들이 혹시 모를 반란으로 축출될 것을 미연에 방지해두고, 도쿠가와 가문이 쇼군 가문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다.[41][42]

역대 도쿠가와 막부 쇼군 중에서 오고쇼에 오른 인물은 1대 이에야스, 2대 히데타다, 8대 요시무네, 9대 이에시게, 11대 이에나리로 총 5명이 있다. 다섯 명 중 쇼군 퇴임 후 은거라는 목적에 가장 부합했던 오고쇼는 도쿠가와 이에시게였다. 병약했던 이에시게는 사망하기 1년 전에 아들 이에하루에게 양위한 바 있다.[43]


6.1. 현대의 비유적 의미[편집]


현대에서도 '오고쇼'라는 단어는 특정 분야에서의 실권을 행사하는 원로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연예계에서 많이 쓰인다. 단어 자체 뜻은 조우코(상황) 쪽이 더 와 닿을 수도 있어보이지만, 도쿠가와 시기에 워낙 유행한 탓인지 오고쇼라고 부른다.[44] 한국이나 중국 현대 미디어에서도 이러한 경우 상왕, 상황, 상장군 등을 쓰는데, 이걸 일본어로 번역할 때는 오고쇼라고 해야 양쪽 언어 사용자 측의 뜻이 정확히 일치한다. 이 단어가 현재도 계속 쓰이고 있는 이유는 천황이 계속 존재하지만 천황은 그저 상징일 뿐 실제 실권은 신하인 총리가 쥐고 있기 때문인데, 천황과 쇼군의 관계를 보면 어디까지나 쇼군은 명목상 천황의 신하이기 때문이다. 에도 막부의 천황과 쇼군의 관계가 현재는 천황과 총리의 관계로 바뀐 것이므로 막후상의 전임 실세는 오고쇼로 치환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무가정권의 권신을 대상으로 쓸 단어이지, 일본 역사에도 실권을 쥔 상황은 존재했기 때문에 군주를 대상으로 이 단어로 치환해 쓰는 경우는 둘을 동격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부적절한 단어가 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도 시대 시점에서 천황은 이미 실권을 잃은 명목상의 군주일 뿐이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 제국 초기에도 수많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왜 천황을 숭배해야 하는지에 대해 엄청난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 따라서 오고쇼를 상왕, 상황, 상장군과 같은 뜻의 관용어로 보는 것을 마냥 부적절하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여담이지만 만약 도요토미 정권이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까지 계속 이어져서 에도 막부가 끝내 세워지지 못했다면, 한국중국에서의 상왕, 상황, 상장군 등에 해당하는 일본 관용어는 오고쇼가 아니라 '타이코'(태합)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에서 섭정이나 관백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태합이고,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조카이자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 관백 자리를 물려주고 태합으로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막후에서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7. 유사사례[편집]


세계사에서 군주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집권하여 통치한 권신은 많았지만 그러한 권신 정권이 권신 자리에만 만족하며 일본의 쇼군처럼 세습하여 국가를 통치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왜냐면 대를 이어 국가를 통치할 정도로 권력이 있는 가문이라면 2인자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얼마안가 그냥 왕위를 찬탈하거나 선양받아 본인 가문이 직접 왕조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정도 권력이 없다면 그 권신의 정권도 1대만에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권신인 조조도 그 아들 조비 대에서 선양을 받아 직접 황제가 되었고 프랑크 왕국궁재 소 피핀메로베우스 왕조를 끝내고 본인이 왕위에 올랐다. 쇼군처럼 3대 이상 세습하며 국가를 통치하는 실권자 가문이지만 명목상의 상위 군주는 그대로 놔두고 인정해주는 이런 체제는 흔하지는 않았다.

다만 다른 나라에도 역사적으로 이런 사례가 없지는 않았는데 한국사에는 고구려 말기의 연씨 정권고려 무신정권기의 최씨 정권임씨 정권이 있었고, 네팔 왕국에는 군주인 샤 왕조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국가를 통치한 라나 가문이 있었다.[45] 또한 베트남 후 레 왕조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고 통치한 찐씨 정권아바스 왕조 칼리프를 자신들의 수도인 카이로에 데려와서 허수아비로 옹립해놓고 명목상 칼리프로부터 술탄에 임명받은 이집트맘루크 술탄이 있었다.

가장 비슷한 직위는 마라타 제국의 '페슈와'인데 마라타 제국도 명목상 수도인 사타라에 있는 황제(차트라파티)가 명목상 군주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바트 가문이 페슈와(재상)직을 독점하여 세습하고 실질적인 수도인 푸네의 재상궁에서 권신으로서, 각 지방의 봉건 제후처럼 할거하고 있었던 장군들의 가문들[46]을 통솔하며 통치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 쇼군과 페슈와 모두 말기에 가면 힘을 잃고 지방 영주 세력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는 것도 비슷하다.[47] 그외에 메로빙거 왕조 말기 프랑크 왕국에서 권신 피핀 가문이 세습했던 궁재도 봉건제+세습 권신 조합이라는 부분은 비슷하다. 다만 피핀 가문의 경우는 상술한 사례들과는 달리 궁재직에 만족하지 않고 결국에는 군주를 폐위시키며 스스로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는 것이 다르다.

캄보디아의 총리인 훈 센도 38년간 장기 독재를 하다가 2023년에 자신의 장남인 훈 마넷에게 총리직을 세습했는데 천황을 바지사장으로 앉혀놓고 쇼군이 세습한 막부처럼 캄보디아도 사실상 국왕인 노로돔 시아모니를 꼭두각시로 앉혀놓고 훈센 가문이 총리직을 독점하는 세습 체제가 되었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간혹 고려무신정권을 일본의 막부 시대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정이대장군직과 유사한 것을 굳이 찾는다면 무신정권 중•후반 60여년간의 교정별감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1209년 최충헌 암살 시도 관련자를 찾아 잡아들이기 위해 만든 기관의 장이었지만 이후에도 계속 존재하면서, 최충헌부터 임유무까지 고려의 모든 정치가 교정별감이 상주하는 교정도감에서 이뤄졌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다만 한국사에서 막부와 가장 비슷한 사례를 찾는다면 고려 무신정권보단 고구려대막리지 쪽이 더 유사성이 있다.


8. 기타[편집]


  • 실질적인 국가의 최고 독재관이었으나 명목상으로는 천황의 신하였고, 이에 '최고사령관'을 뜻하는 정이대장군을 호칭으로 대신했는데 그게 오늘날의 쇼군으로 굳어졌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로마 제국황제와 비슷한 케이스다. 실제로 로마 제국 역시 황제들은 실질적인 국가의 최고 독재관이었지만 명목상으로는 원로원의 일원이었고, 이에 '최고사령관'을 뜻하는 임페라토르(Imperator)를 호칭으로 대신했는데 그게 오늘날의 엠퍼러(Emperor)로 굳어졌다.
물론 다른 점도 많은데, 로마 제국의 경우 임페라토르가 1인자였다. 또한 로마 황제는 임페라토르 칭호 외에도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제1시민'이라는 뜻의 프린켑스(Princeps)[48]도 사용했고, 아우구스투스의 아버지로서 신격화된 종신 독재관이었던 카이사르에서 따와서 그냥 스스로를 '카이사르'[49]로 칭하는 황제도 많았다.

  • 정작 일본 열도의 사실상 최고통치자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가마쿠라 막부 이후, 쇼군이 절대권력자답게 통치권을 행사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가마쿠라 막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이 초반에만 권력을 행사했고 그 이후는 호조 가문싯켄이 실세였다.[50] 무로마치 막부도 역시 초반의 몇 대에만 권력을 행사했으며 이후에는 아예 꼭두각시로 전락해 쇼군이 다이묘에게 암살당하거나 관위가 정4위, 종4위급으로 추락하는 굴욕도 겪었다. 센고쿠 시대에는 그래도 나름의 권위는 남아 존속해 왔으나 이후 오다 노부나가에게 교토에서 추방당하며 멸망한다. 그나마 에도 막부는 정이대장군의 권력이 명목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가장 강했지만, 결국 후기에 이르러선 쇼군이 아니라 그 밑의 다이로, 로쥬, 부교[51]나 후견[52]이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했고 혼란스러웠던 막말에 이르러선 조용히 세력을 키워왔던 조슈, 사쓰마, 아이즈 같은 거대 웅번들이 실세였다.

  • 천황 대신 실권을 휘두른다는 이미지와 달리 쇼군의 일정과 실무는 옆나라 조선과 청나라 군주들에 비하면 노는 수준이라고 할 정도로 정말 편했다고 한다. 세부적인 일들은 밑의 대신들이 다 했으며 제례 같은 것들도 교토의 천황과 공가 귀족들이 분담하였다. 덕분에 쇼군은 실무 확인 도장을 찍는 중요한 일정을 제외하면 무한대의 자유시간이 있었으며 이는 쇼군의 정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당장 조선의 왕과 왕비들이 정무는 물론 수많은 제례와 심지어 공부에까지 시달린 거와 엄청 대조적(...).[53]

  • 지금도 일본에서는 꼭두각시를 내세운 막후 실력자를 쇼군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벽안의 쇼군이라 불렸던 GHQ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실제로 맥아더는 일본 항복이후 쇼와 덴노가 자기 집무실에 찾아왔을때 시큰둥하게 맞으며 내리 깔보는 듯한 사진을 언론에 뿌려 내가 덴노보다 위라는 언론플레이를 했는데, 이게 쇼와 덴노의 인간선언과 맞물려 순식간에 일본인들이 그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쇼군과 덴노의 질서, 명목상 지도자와 실권을 가진 자중 누구를 따라야하는지 일본인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는 증거 중 하나다.


  • 일본에서는 장군이란 말이 군대 지휘자 전반을 가리키는 한국에서의 쓰임새와 거리가 있기에, 한국 사극을 일본에서 더빙할 때는 쇼군으로 번역하지 않고 한국어 발음을 그대로 음차하여 장군으로 말한다. 역으로 한국 사극에서 임진왜란에 파견된 일본군이 자기의 상관을 쇼군이라고 호칭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고증 실패이다. 주군을 뜻하는 '도노'라고 부르는 것이 고증상 맞다.

  • 현대 일본에서는 천황일본 황실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기 때문인지 각종 매체에서 권력자를 희화화할 때는 거의 쇼군이 등장한다. 실제 일본 역사 대부분을 보아도 쇼군이 일본 최고 권력자이기도 했고. 일본 환타 광고에서도 쇼군 선생님으로 등장했다. 후술될 서브컬처에서의 일본풍 가상 세계관의 인물들의 경우에도, 막부와 쇼군만 있고 그 뒤에 조정이나 천황은 아예 존재 자체를 묘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9. 각종 매체에서의 쇼군[편집]




10.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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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을 공화제로 비유할 때, 천황을 대통령으로 보면 쇼군은 의원내각제총리라고 볼 수 있다.[2] 정이대장군을 외국어로 번역하기가 복잡한 이유도 있다. 중국의 사정(四征)장군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방식처럼 한다면 "General Who Attacks the Barbarians" 정도가 된다. 영어 위키백과Shogun 항목에서는 "정이대장군"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Commander-in-Chief of the Expeditionary Force Against the Barbarians"라고 기술했다.[3] 중국으로 비유하면 역사상 쇼군과 비슷한 성격의 직위로 초한전쟁패왕이 있지만 패왕은 항우 1대만에 끝나버렸다. 이후에는 상국이 권신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그러나 직위의 성격을 보면 상국은 정이대장군보다는 천황 조정의 관백에 더 가깝다.[4] 이들의 수장격인 미나모토씨, 타이라씨 등등은 덴노로부터 유래한 가문들이었다. 세대가 지나면서 덴노와 혈연이 멀어진 황족들이 신적강하된 것이다. 그럼에도 대대로 섭관직을 독점하고 황후를 배출했던 외척 가문인 후지와라씨의 종가인 섭관가, 그리고 분가 중에선 격이 높은 청화가보다도 낮은 계급이었다.[5] 간접적인 피해는 어느정도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죄없는 평민들까지 죽인 전쟁은 아니고 자기들끼리 무력을 이용한 정치 싸움이었다.[6] 즉 무가정치의 수장은 천황의 선하에 따라 통치하는 최고집권자였던 셈이다.[7] 역사적으로 소가씨와 모노노베씨, 백제(도래인)계와 타치바나씨, 후지와라씨의 싸움이 이어졌고, 권력을 쥔 후지와라씨와 뒤를 이은 고셋케(오섭가)는 헤이안 시대의 섭관정치가 몰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8] 역성혁명이 없었다고 해도 좋다. 단, 일본 고대사의 왕계표를 보면 200년을 살았다는 천황들도 몇 있는데, 이를 두고 혹자는 원래 일본 왕을 현 천황 가문이 엎었고, 천황의 정통성을 위해 전 왕조의 흔적을 지운 게 아니겠느냐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개혁이 있었던 7세기 이후 최소 1,400년이 지나도록 일본 천황제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나마 있었던게 일본의 남북조시대였다.[9] 물론 타이라노 마사카도처럼 아예 다 뒤엎고 자신이 천황이 되려고 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타이라도 황실의 분가라서 가문 싸움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 외에 아시카가 요시미츠오다 노부나가가 천황 자리를 노렸다는 '의혹'은 존재하지만 확실하지도 않고 결국 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다.[10] 도쿠가와 본가와 요시노부의 분가가 공작, 고산케후작(이중 미토 도쿠가와가는 대일본사 편찬의 공으로 공작으로 승작), 고산쿄는 백작 작위를 수여받는 등 도쿠가와 가문은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11] 그러나 실제로는 오와리국의 오다 가문은 타이라씨와는 관계가 없으며, 에치젠국의 신관 가문이 무사로 전직한 것이었다고 한다.[12] 세이와 겐지의 후예이자 상당히 오래된 명가인 카이 타케다 가문(아키 타케다 가문, 와카사 타케다 가문도 포함)[13] 스루가 이마가와 가문, 사츠마 시마즈 가문, 분고 오토모 가문, 스오 오우치 가문, 노토 하타케야마 가문, 셋츠 호소카와 가문 같은[14] 참고로 이러한 일본 가문들의 겐지와 헤이시 사랑(...) 때문에 조선에서는 일본 다이묘들이나 쇼군들을 지칭할 때 실제 성(묘지) 대신 그들이 자신의 본성(혼세)으로 자처한 겐지(源, 원)나 헤이시(平, 평)를 성처럼 부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평수길'(平秀吉),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행장'(平行長)으로 하는 식이었다. 세이와 겐지의 후손이라고 자칭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경우에는 '원가강'(源家康)으로 불렸다. 마치 루이 16세가 '루이 부르봉'이 아니라 '루이 카페'의 이름으로 처형당한 것처럼 말이다.[15] 무로마치 막부 초기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대립했던 닛타 요시사다의 가문인 닛타씨의 방계 세라다 가문의 후손을 자칭. 원래 닛타 가문은 혈통상으로는 아시카가 가문과 제법 가까운 축에 속하는 일족이었지만 닛타 요시사다와 다카우지의 악연 덕분에 무로마치 막부 성립 이후 완전히 찍혀버렸고, 덕분에 전국시대 당시에는 직계는 단절되고, 아와의 다이묘 사토미 가문 등 일부 방계일족만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16] 심지어 한때는 아예 후지와라씨를 자처한 적도 있었다. 에이로쿠 6년(1566년) '후지와라노 아손 이에야스'(藤原朝臣家康)라는 이름으로 종 5위하 미카와노카미를 받았었다.[출처] 『義昭興廃記』『豊臣秀吉譜』 畿内戦国軍記集 和泉選書39 1989年1月15日初版第1刷発行 青木晃、加美宏、藤川宗暢、松林靖明編 和泉書院発行。そもそもは、加賀市立図書館聖藩文庫蔵.[17] 하지만 히데요시는 나중에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오히려 품위 유지 명목으로 1만 석을 주었다. 히데요시는 주가였던 오다가에게 전관 대우를 잘 해주는 등 예우에 대해서는 후한 성향이었다.[18] 당장 이에야스도 카와치 겐지의 분파인 닛타씨의 후손임을 자칭했다.[19] 다만 외침이 잦았던 고려 후기에는 일선 지휘관들의 재량권을 보장해주기 위해 원수직이 남발되어, 기존의 최고사령관이라는 의미보다는 당나라의 절도사나 일본의 다이묘같은 상설직 지방 사령관이자 군벌을 지칭하는 의미로 변화한다.[20] 대납언은 율령제에 존재하는 고위 관직명이다. 앞의 '권'은 이미 관직을 맡은 누군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명예직으로서 같은 관직을 정원외로 수여했음을 나타낸다.[21] 처음 1189년에 가정기관이 설치된 것은 맞지만 당시에 설치된 것은 정소(政所)가 아니라 공문소(公文所)였다. 양자가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같은데 이는 일본 고대 체계에서 기원한 것으로 본래 고위 공경의 집에 국가의 이름으로 설치해주는 일종의 비서기관이었다. 이는 국가의 일을 담당하는 기관이 아니라 집안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막부의 지배는 무사의 동량(수장)과 개별 무사들 간의 개인적인 예속관계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는 기본적으로 공적이라기보다 사적인 家의 지배의 성격을 지녔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의 일을 관장하는 公文所-政所가 무가의 정치 행정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公文所와 政所는 기본적으로 성격상 차이가 없었으며 단지 이를 개설하는 공경의 관위에 따른 구분이었다. 4위까지는 公文所였고, 그 위로는 政所였는데 1189년 임명받은 관직의 관위에 맞추어 公文所를 개설했던 것이고 이것이 1192년 세이타이쇼군직을 받아 관위가 정 3위 이상으로 올라가자 자연스럽게 政所로 승격되었던 것이다.[22] 사전적으론 '대들보'라는 뜻이지만 한글의 '두령' 혹은 대통령의 '통령'과 발음이 같으며, 실제적인 의미도 같다. 즉 우두머리란 뜻이다.[23] 이는 정동대장군도 충족하지만 요시나카가 받은 직위라 자신이 쓰기에는 좋은 전례가 아니라서 피했다.[24] 《산괴기》(山槐記)에 따르면 요리토모가 바란 것은 대장군이나 그에 준하는 칭호로, 이에 조정에서는 총관, 정동대장군, 정이대장군, 상장군 네 가지를 후보를 제안했다. 그러나 총관과 정동대장군은 패배자인 타이라노 무네모리, 요시나카가 받은 직위라서, 상장군은 일본에는 선례가 없던 직위라 거부하며 자연스럽게 정이대장군을 선택했다. 즉 이에 따르면 요리토모는 정이대장군 자체의 가치에 집중했다기보단 본인의 격을 높일 여러 직위 중에서 모양새가 좋은 것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25] 단, 그 이전에도 덴노가 폐위되어 쫓겨나거나 살해당한 예는 적지 않았다.[26] 율령체제하에서 최고위로 조정의 필두[27] 덴노를 대리하는 자리. 영외관이었기 때문에 일정한 품계가 없었다. 시대에 따라 관백이 우위에 있기도 했고, 태정대신이 우위에 있기도 했지만 어쨌건 '덴노의 대리자' 자리인 만큼 정이대장군보다는 기본적으로 격이 높은 자리였다.[28] 노부나가 본인이 이미 앞서 우대신 겸 우근위대장직을 사임하면서 「실로 만국이 안녕하고 사해가 평균하게 된 때에 거듭 등용의 칙명에 응하여...」(まさに万国安寧四海平均の時、重ねて登用の勅命に応じ)라고 발언했는데, 여기서 '만국이 안녕하고 사해가 평균하게'(万国安寧四海平均) 된 때 즉 일본을 통일하기 전에는 관직을 받을 이유가 없다(=일본 통일 전에는 조정의 관직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비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29] 일본 제국의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의 가문이 맞다.[公家] 일본에만 있는 독특한 귀족 계층으로, '공경'으로도 불린다.[30] 예컨대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 요리토모의 관직인 대납언 위로 내대신, 좌•우대신, 태정대신, 관백 등과 같은 상위 관위들이 쭉 있었다. 또한 신적강하한 미나모토씨와 그 후손인 후대 쇼군 가문들은 명목상으로는 오섭가, 청화가보다 격이 낮았다. 물론 실질적인 힘을 가진 실세를 푸대접할 수는 없으니 쇼군의 권위가 강할 때는 내대신, 좌•우대신은 물론이고 간혹 태정대신직을 제수받기도 했으며, 의전상으로도 청화가와 동급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31] 아라이 하쿠세키의 '쇼군=일본국왕' 주장에 반대한 인물 가운데 쓰시마 후추 번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도 있었다.[32] 일본의 천황과 정이대장군이 이원화된 막부 체제 자체가 동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에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체제였기 때문에 조선 입장에서는 정이대장군에 대한 예우를 정하기가 애매하다고 한 것이다.[33] 혹은 상황, 법황. 일본어 발음으로는 각각 조우코, 호오.[34] 이렇게 상황이 되었지만 실권을 놓지 않고 천황을 뒤에서 조종하는 정치를 인세이라고 한다.[35] 오고쇼들이 태정대신을 많이 겸했으므로, 태정대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36] 원래 '조우코'나 '오고쇼'(혹은 태정대신)나 명예직인데, 실질적으로 실권을 이양하는 쪽으로 변질되었다.[37] 상황이 자기 아들이 꼴보기 싫어서 손자에게 양위하도록 압박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38] 보통 오고쇼는 후계자인 쇼군을 자신이 직접 골랐지만 상황은 거의 관백 등 실세 귀족의 눈치를 보면서 정했다.[39] 기본적으로 장남이 물려받는 편이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때는 이미 강항 등에 의해 일본에도 이황의 성리학이 들어온 상황이었다.[40] 이 부분은 히데타다도 적어도 이에야스의 의견에 반대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야스 사후에도 장남 이에미츠를 후계구도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본인의 후계자로 삼았기 때문.[41] 그리고 사실 이것은 인세이의 원래 목적과도 동일했다. 다만 인세이는 변질되는 바람에 엉망이 된 것이지만. 애시당초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책임은 떠넘긴다는 것도 다 인세이와 관련되어 있지 오고쇼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편이다. 즉 오고쇼는 인세이의 원래 목적을 비교적 큰 변질 없이 수행한 편이다.[42] 오히려 쇼군 입장에서는 어차피 오고쇼의 권위를 넘는 것 자체가 어려웠고, 또한 오고쇼 역시 자신의 권위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이미 즉위시킨 쇼군을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는 없었기에 적절한 균형이 갖춰졌다. 즉 쇼군 자리에 올랐다는건 이미 그 시점에서 본인이 후계자임은 완벽하게 공언된 것이고 이는 본인이 죽지 않는 이상 절대 바뀌지 않는 위치였다.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쇼군에 앉히고 본인은 오고쇼에 앉아 권위를 휘두른다 해서 쇼군인 아들의 불만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43] 이 다섯 명의 오고쇼 중 상술되었다시피 1대 이에야스와 2대 히데타다는 오고쇼가 되어야 할 만한 당위성이 있었고 이는 8대 요시무네도 마찬가지였다. 요시무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증손자이기는 했지만 도쿠가와 본가가 아니라 분가에서 최초로 쇼군이 된 케이스였기 때문에 자기 직계의 정통성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반면 이에나리는 무려 50년동안이나 쇼군 자리에 앉아 있다가 지겨워서 오고쇼가 된 케이스이다.[44] 사실 일본인들은 자기네 황실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피하는 편이다.[45] 라나 가문은 트리부반 군주가 왕정복고를 단행하여 왕권을 되찾아온 1950년까지 이런 식으로 통치했다. 일본 막부보다 거진 100년은 더 갔다(...)[46] 괄리오르의 신데 가문 세력, 구자라트의 바로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에크와드(가이크와드, 가이콰드) 가문의 세력, 인도르의 홀카르 가문 세력, 나그푸르의 본슬레 가문 세력 등등[47] 정이대장군이 통치한 일본과 페슈와가 통치한 마라타 제국 둘 다 종교적으로 다신교(힌두교, 신토) 체제였다는 것까지 비슷하다.[48] 이것이 오늘날의 프린스가 된다.[49] 이게 나중에 황제국을 자칭한 독일에서 카이저가 되고 러시아에서 차르가 된다.[50] 호조씨는 간무 헤이시를 본성으로 하는 외척 가문 출신이기에 쇼군직 자체를 찬탈하진 못하고 싯켄으로 실권만 장악한 것이었다.[51] 당장 18~19세기의 개혁을 보면 연호나 그 개혁을 주도한 해당 관리의 이름이 붙는 경우가 많다.[52] 대표적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53] 물론 좋기만 한 것은 없다고 실무를 떠넘긴 만큼 쇼군의 실권은 이웃 국가의 군주들에 비해선 약했다. 게다가 왕비는 물론 후궁들도 왕실 내부의 일을 담당했던 조선의 내명부와 달리 쇼군의 오오쿠는 거의 하는 일이 없다보니 돈 먹는 하마 수준으로 전락해 이런저런 비판을 받았다.[54] 능력치가 심히 압권이다. 3턴간 50% 확률로 300%의 데미지를 주는데, 대부분 끔살 확정이다.[55] 사실 그는 그냥 지 멋대로 쇼군이라고 자칭하고 있으며, 실상은 심각한 와패니즈와 시대착오적 사고를 지닌 미국인이다. 그래서 28화(일판 기준)에서 보면 자칭 쇼군으로는 성이 안 찼는지 각 국가정상들을 납치하여 강제로 자신을 쇼군으로 인정해달라고 협박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