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덴노/다른 나라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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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북한과의 관계
2. 미국과의 관계
3. 영국과의 관계
4. 러시아와의 관계
5. 네덜란드와의 관계
6. 중화권과의 관계



1. 남북한과의 관계[편집]


남북한 막론하고 한민족 모두에겐 사실상 악연이 깊을 대로 깊은 관계로 일제강점기의 폭정과 억압통치로 상처와 비극을 그리게 하였고, 일제 말기 때 제2차 세계대전에도 개입하면서 무고한 조선 청년 및 처녀들을 학병정신대,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징집시키면서 역사적으로 이들에게 생지옥으로 인도한 악인이자 마신으로 낙인찍혀 악평을 받아왔고 민족 차원에서 비난과 비판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제도를 실시한 원흉은 당시 총독이었던 고이소 구니아키였지만, 애당초 조선총독이 내각이 아닌 천황 직속인 데다 쇼와 덴노 역시 이를 허가했으니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원망스러울 수 밖에 없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방일(訪日)하여 쇼와를 만난 적이 한 번 있었지만, 정작 쇼와는 역대 덴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을 방문한 사례나 경험이 없다. 그 이전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때도 방한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에 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1936년 한국을 방문한 적은 있으며, 아버지 다이쇼 덴노도 황태자 시기에 방한한 적은 있다. 사실 본인이 방한하고 싶어도 한국 애국단체와 순국선열단체, 그리고 민주 운동권 세력들이 강력히 반발했을 것이기 때문에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1982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파동이 터진 데다, 그 이전에도 저 멀리 떨어진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조차 격한 반발을 맞이해야 했으니 물건너 한국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한 만찬에서 쇼와는 '지난날 자신의 지배하에서 양국간 불행한 과거에 깊은 유감을 표하며, 다시는 되풀이 되어선 안 된다.'는 뻔뻔한낭독사를 읽었다. 더 나아가 “지난 6~7세기 일본의 국가 형성기에 귀국의 많은 지도를 받았다.”며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하였다.

1989년 1월 7일에 쇼와 덴노가 사망한 날, 노태우 대통령이 조전을 보내고 정부는 강영훈 국무총리를 조문사절로 보낼 것을 고려하였으나 재야 민주단체와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의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강 총리는 2월 23일에 장례식 참석을 위해 방일했다.

북한 측 여론은 당연히 비난 일변도였는데, 쇼와 덴노 사후 조선중앙통신이 쇼와를 '전범'이라고 규정함과 동시에 다케시타 총리의 담화에 대해서도 피해국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는 도전이자 모욕이라고 비난했다.


2. 미국과의 관계[편집]


미국은 한-미-일 삼각동맹에서 맏형이자 우방국 관계이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미국과 일본은 엄연히 태평양 전쟁을 하며 일본군미군 포로들을 지나치게 학대한 사실이 있어 미국의 중장년층 세대들은 반일감정이 꽤 남아있는 편이다. 일례로 자신이 미 해군 조종사였다가 치치지마 식인 사건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1]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히로히토 사망 이후에야 "이제야 겨우 일본을 용서할 마음이 들었다"[2]는 술회를 했고,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3. 영국과의 관계[편집]


쇼와 덴노의 건강 악화 소식이 일본 국외로 타진되었을 때, 영국에서는 (비록 황색 타블로이드지이기는 했지만) 더 선과 데일리스타에서 히로히토에 대해 "지옥이 저 사악한 '황제'를 기다리고 있다"(Hell's waiting for this truly evil Emperor), "저 개자식을 지옥 밑바닥에 처박아 버리자(Let the Bastard Rot in Hell)", "저 사악한 친구(히로히토) 때문에 고통을 받은 사람(일본군 전몰자)들이 그들의 무덤에서 기뻐 춤출 것"이라고, 노구에 와병중이던 히로히토를 히틀러에 빗대며[3] "히로히토 저 작자는 자기가 저지른 죄악에 비해 지나치게 오래 살았고, 그 죄악의 대가를 제대로 치르지도 않았다는 것이 저 작자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가 가장 슬퍼하는 것이다"라고 제대로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설을 싣는 바람에## 일본 정부가 존 화이트헤드 당시 주일 영국 대사를 소환하고[4] 마쓰다 요시후미 당시 일본 외무성 대변인과 시바타 가즈오 주영 일본 대사가 해당 신문사들과 영국 정부에 대해 공식 항의를 전달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

영국 안에서 히로히토나 일본에 대해 이렇게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 것은 비단 자극적인 가십성 기사만 좇는 황색언론만 그런 것도 아니다. 영국의 주요 우익 일간지 스펙테이터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히로히토를 접견한 것에 대해서 "여왕은 버킹엄 궁전에서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접대할 수 있겠나?"라고 수사적으로 따져 물었고, 많은 영국인들이 일왕 히로히토의 방영에 대해서 "(히로히토가) 공개적이고 과시적으로 영예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shoulud no have been “publicly and ostentatiously honored.)고 보도했다. 한 마디로 여기 히로히토 방문한 거 아무도 반기는 사람 없으니까 정 방문하려거든 환영 같은 거 기대하지 말고 딱 일정대로 쥐 죽은 듯이 있다가 알아서 꺼져라라는 뜻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남아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5] 평생 극동 전선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에 사망한 부하 장병들을 잊지 않았고, 일왕 히로히토가 사망하기 10년 전인 1979년 사망하면서도 끝내 "내 장례식에 일본인 부르지 마라"라는 뜻을 밝혀[6] 그의 장례식에는 일본측 인사가 참석하지 못했을 만큼 마운트배튼 경은 평생 일본과의 관계를 거부했다. [7] 또한 1971년 히로히토의 영국 방문 당시 영국에서는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규탄하는 전국적이고 광범위한 시위가 벌어져, 심지어 히로히토가 영국 왕립 식물원에 심은 기념식수마저 다음날 누군가에 의해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자리에는 뿌리까지 죽으라는 의미에서 제초제까지 부어졌고, "그들은 헛되이 죽지 않았다(They did not die in vain)"는 표지판이 남겨져 있었다고 한다. #

4. 러시아와의 관계[편집]


러시아와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러일전쟁을 벌여왔고 러일전쟁 과정에서 러시아령이었던 사할린 섬 남부 지역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과 싸워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빼앗아간 사할린 남부 지역을 다시 차지하고 더 나아가 쿠릴열도까지 일본으로부터 뺏어먹는 등 그렇게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대 때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과 친미국, 자본주의 진영에 속해있던 일본과도 정치적,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쿠릴 열도 분쟁으로도 갈등을 빚는 등 쇼와 시대 이전에도 양국은 상당히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쇼와 승하 당시 소련 정부는 최고회의 제1부의장 아나톨리 루키야노프(1930~2019)를 필두로 한 조문단을 보내긴 했으나, 아키히토가 새 덴노가 되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도 두 나라의 사이는 러일전쟁 등 역사적인 원한과 쿠릴열도를 둘러싼 러일간의 영토분쟁으로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다.


5. 네덜란드와의 관계[편집]


예로부터 네덜란드와 일본은 에도 시대부터 활발한 교류를 하여 양국간의 적대심은 심하지 않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했고 최근에 네덜란드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까지 밝혀지면서, 네덜란드인에게도(한국이나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71년 히로히토가 아내 나가코 황후와 함께 네덜란드를 방문하자 격렬한 항의 시위가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네덜란드 노병들과 전사자의 유족들이 "히로히토를 전범 재판에 회부해라!!", "히로히토가 죽인 내 아버지를 살려내라!!", "인간백정은 네덜란드를 떠나라!!"라고 항의한 것이다. 이들은 일장기를 소각하는 것부터 히로히토 부부에게 욕설 세례와 날달걀, 보온병, 돌팔매, 벽돌까지 투척했다. 누가 다쳐도 이상하지 않을 이 살벌한 항의 시위로 인해, 수행원들은 거의 죽어나갔고 나가코 황후도 피골이 상접해 귀국할 지경이었다.

히로히토가 1971년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히로히토를 향해 규탄 시위를 벌이며 일장기를 소각하거나, 히로히토가 탄 차에 계란보온병을 던져대는가 하면 영국과 마찬가지로 히로히토가 기념 식수한 나무 모종까지 뽑아 버렸다. 일왕 히로히토는 암스테르담에서 아르티스 동물원, 레익스 박물관 및 일본 자본이 지원된 신축 오쿠라 호텔을 둘러 보았는데, 아르티스 동물원에서는 한 청년이 히로히토가 탄 차에 달려들려다 경찰에 제지되거나, 레익스 박물관에서는 상복을 입은 여성이 "히로히토, 우리 아버지는 어디 있지(Hirohito, where is my father)?"라고 쓴 팻말을 들고 시위에 참가했으며, 오쿠라 호텔 앞에서는 일장기 소각까지 벌어졌다. 히로히토 부처가 줄리아나 여왕과 점심 식사를 했던 바른의 소에스트틱 왕궁 앞에서도 200여 명 정도의 시위자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히로히틀러는[8] 집에 가라(Hirohitler Go Home).”거나, “살인자(Murderer)”, 또는 “19,000.”[9]이라고 쓴 표지판을 들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당시 대표적인 좌파, 우파 언론지인 Het Vrije Volk와 De Telegraf는 모두 히로히토에게 '강렬한 악과 비인간적인 불행'의 상징이라고 부르며 "대규모 야만 행위에 대한 적극적인 기여 혐의를 받고 있는 한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10] 네덜란드 관리들은 쇼와 덴노가 네덜란드에 온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방문이지 국빈 자격으로 온 것은 아니며, 여왕의 중찬 초대는 통상적인 외교적 예의라고 해명해야 했다. #

1986년 베아트릭스 여왕의 일본 방문도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11] 무산됐다. 당시 쇼와 덴노가 골골거리는 와중에도 버젓이 살아 있는 상태였는데, 베아트릭스 여왕이 일본을 방문하고자 했을 때 네덜란드 여론은 과장 안 보태고 "가기만 해 봐라."였다. 결국 쇼와 덴노가 죽고[12] 아키히토가 새로운 덴노로 즉위하고 난 1991년에야 베아트릭스 여왕은 일본을 방문했는데, 이때 베아트릭스 여왕은 신임 일본 국왕으로 즉위한 아키히토가 주최한 만찬에서 "그 국치의 기억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태평양 전쟁 중 일본에 희생된 자국 군민(軍民)의 숫자까지 들어가며 "과거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고통스런 체험을 진지한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울분과 원한으로 가득한 마음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음 세대들은 그런 과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장래를 보아야 한다"고 발언해, 네덜란드가 과거 일본과의 관계에서 겪었던 전쟁 범죄의 피해를 잊어버리지 않았고[13] 자신의 방문도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천명했다. #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도 2014년 일본을 국빈 방문하여 아키히토 일왕이 주최한 만찬 자리에서 "2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 국민이나 병사가 체험한 것을 잊을 수는 없다"며 "전쟁의 상흔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희생자의 슬픔은 계속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 국왕 모자(母子)가 대를 이어가면서 일본에 대해 네덜란드가 겪은 전쟁 피해를 잊어서는 안 되고 그들도 잊지 않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6. 중화권과의 관계[편집]


중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고 청나라나 중화민국과 일본의 관계가 양호했던 면도 있었지만, 중일전쟁난징대학살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으로 인해 중국에게도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쇼와 덴노가 살아있었던 1970~80년대까지 덴노가 중국을 방문하지 못했을 정도. 결국 히로히토가 사망하고 전쟁을 반대하던 아들 아키히토 황태자가 새 덴노가 되면서, 1992년에 아키히토 덴노가 중국을 방문한다.

최근에도 히로히토를 비난하는 여론은 여전하며, 일본 덴노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음은 물론이다. 일단 아키히토 상황과 현 나루히토 덴노는 개념 행보 덕분에 딱히 비난 받지 않는 편이지만 히로히토는 중국의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알리바바 그룹 소유 사이트 등에서 여전히 비난받는 것은 물론이고, 간혹 도조 히데키를 제치고 히틀러, 무솔리니와 함께 악마로 취급받는 경우까지 있다.

반면 일제강점기를 겪었지만 사정이 많이 다른 대만[14]에는 과거에 쇼와가 방문했던 적이 있으며, 타이베이 인근 신베이터우 온천에는 그가 이용했던 탕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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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군 잠수함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리고 포로가 된 동료 조종사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살해당한 후 먹혔다.[2] 달리 말하면 히로히토 생전에는 일본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는 의미다.[3] 구미권에서 "히틀러 같은 놈"이라는 말이 얼마나 모욕적이고 경멸적인 말인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 그것도 1980년대 말이면 아직 동서 막론하고 그 지옥 같은 시절을 몸소 겪은 피해 당사자들이 버젓이 살아 있었다.[4] 대사 소환은 상대국과의 관계 단절까지 고려하겠다는 의미로 쓰인다.[5] 영국령 인도의 마지막 총독인 동시에 1945년 9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대장으로 데라우치 히사이치의 대행이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항복을 직접 접수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마운트배튼 경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보낸 한국광복군의 활약에 긍정적인 인상을 받아서 직접 치하하고 인원을 증원해 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장제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후 한국광복군이 자체적으로 인원을 증원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전에 일본이 항복해버렸다.[6] 콕 집어서 마운트배튼 경이 그렇게 "일본인 부르지 마라"고 말한 것은 아니고, 마운트배튼 경 본인이 생전에 웬만하면 일본측 인사와 만나거나 하지 않고 일본과는 되도록 엮이지 않으려는 행보를 뚜렷하게 보였기에 장례식에도 그러한 마운트배튼 경의 행보를 감안하여 일본측 인사에게 장례식 참석을 권하지 않은 것에 가깝다.[7] 마운트배튼 경이 딱 한 번 자신의 의사를 굽힌 것은 사망 8년 전인 1971년 히로히토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로, 원래는 죽어도 히로히토를 만나지 않으려 했지만 당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간청에 마지못해 사석에서 접견한 것이었다.[8] 히로히토+히틀러.[9] 옛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본군 수용소에서 사망한 네덜란드인들의 숫자이다.[10] 뉴욕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는 네덜란드의 언론인으로 수마트라의 일본군 수용소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었는데, 일본 정부측이 연 기자회견에서 "그는 미안하다고 말 한 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Can't he just say that he's sorry)?"라고 쏘아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11] 일본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알겠지만 네덜란드는 쇄국 시대 일본이 유일하게 교류했던 구미 국가로 일본하고의 인연이 구미 국가 가운데 가장 길고도 깊은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가운데는 네덜란드인도 포함되어 있었다.[12] 이때 네덜란드는 일왕 히로히토의 죽음에 조문 사절조차 보내지 않았다. # 뉴질랜드호주도 마찬가지로 일왕 히로히토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을 뜻을 보였으며, 심지어 밥 티자드 당시 뉴질랜드 국방장관은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당시 일본 총리가 조의(弔意) 담화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부정하며 “전화(戰禍)에 시달리는 국민의 모습을 보다 못해 전쟁 종결의 영단을 내렸다”고 찬양한 것에 분개해 "히로히토는 종전 후에 총살이나 공개처형을 당했어야 했다!"고 다소 과격한 발언을 했을 정도. 데이빗 랑게 총리가 티자드 국방장관의 발언을 부인했지만, 일본인들이나 유족들에 대한 조의를 표하지 않았다. ## [13] 사실 네덜란드도 한국과 상황이 묘하게 닮은 게 네덜란드도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 청구권을 포기했고, 일본도 이에 따라 1천만 달러를 '위로금' 명목으로 네덜란드에 지급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전쟁 피해 당사자들은 이를 납득하지 않고, 7천 8백 명의 전쟁 피해자들이 따로 모임을 만들어, 한 사람당 2만 달러씩의 배상금을 일본에게 물리도록 유엔에 제소하는가 하면, 베아트릭스 여왕의 방일에 맞춰 해당 단체의 대표가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 [14] 자세한 것은 대만의 역사, 그리고 대만독립문제를 참고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