숀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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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그린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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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93

보유 기록
단일 경기 최다 루타
19루타
연타석 홈런
4타석 연속[1]
단일 경기 최다 홈런
4홈런[2]




파일:external/www.thinkbluela.com/Green-4-HR-Game-Tannen-Maury.jpg

숀 데이비드 그린
Shawn David Green

출생
1972년 11월 10일 (51세)
일리노이 주 데스 플레인스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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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93cm, 86kg
포지션
외야수, 1루수[1]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1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6번 (TOR)
선수 경력
토론토 블루제이스(1993~1999)
로스앤젤레스 다저스(2000~2004)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2005~2006)
뉴욕 메츠(2006~2007)
종교
유대교


1. 개요
2. 커리어
3. 여담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한 전직 야구 선수. 커리어 통산 세 차례의 40홈런과 네 차례의 100타점이라는 기록이 보여주듯이 비록 HOF 급은 아니더라도 한 시대를 풍미한 슬러거였다. 통산 커리어는 타율 0.282, 328홈런, 1071타점. 박찬호와 2년동안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한솥밥을 먹었기 때문에 한국팬들에게도 꽤나 친숙한 선수이다.


2. 커리어[편집]


베이스볼 아메리카 유망주 순위 6위였다. 비슷한 수준의 (역대) 톱급 유망주들의 성적은 메이저 리그 유망주 순위를 참조.

고등학교 시절부터 전미에 명성이 자자한 초특급 유망주였다. 원래는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야구 장학생으로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1991년 MLB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이 유망주를 냉큼 픽해버렸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밀당을 진행한 끝에 그린은 72만 5천불의 사이닝 보너스 + 오프시즌 동안에 스탠포드에서 학업을 진행할 것을 방해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블루제이스에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2년 본격적으로 시작한 마이너리거 생활에서 그린은 단숨에 올스타에 뽑히며 마이너리그를 평정해버린다. 다음해인 1993년 9월 로스터가 25인에서 40인으로 확장됨에 따라 토론토는 이 어린 유망주를 메이저리그로 콜업했고, 9월 28일에 그린은 자신의 데뷔경기를 치른다. 여기에 1993년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는 덤.[2]

하지만 이 시기 메이저리그 최강의 팀이었던 토론토에서 아직 숀 그린의 자리는 없었고 1993 시즌과 1994 시즌 도합 17차례의 메이저리그 출장에서 그친다. 그렇지만 토론토 유망주 전체 1위로 거론될 만큼 잠재력이 만땅이었던만큼, 그리 오랜 시간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첫 풀타임 커리어였던 1995 시즌에 숀 그린은 타율 0.288, 15홈런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특히나 장타율이 5할에 육박했다는 점이 팬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다만 유일한 문제점이었다면 바로 좌상바였다는 점. 이로 인하여 그린은 한동안 플래툰으로 기용되었다.

좌상바의 면모를 극복하는데 성공한 1998 시즌 숀 그린은 타율 0.278, 35홈런, 35도루 100타점을 기록하면서 대폭발을 일으킨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해에는 타율 0.309, 42홈런, 134타점을 기록하면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올스타골드 글러브 수상자로 꼽히는 영예도 누리게 된다. 이 시기 카를로스 델가도와 그린이 주축이 된 토론토의 타선은 말 그대로 살인타선. 하지만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던 토론토 입장에서 FA가 다가오는 초특급 거포 둘을 함께 보유하는 것은 무리수인 상황이었고 결국 그린은 2000 시즌을 앞두고 고향팀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트레이드된다. 당시 트레이드 상대는 라울 몬데시.[3][4] 그리고 다저스에 트레이드됨과 동시에 그린은 6년간 8400만 달러라는 당시로는 초초대형 계약에 서명한다.

이적 첫해였던 2000년 시즌에는 천문학적인 연봉에 대한 부담 탓인지 기대보다는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면서 먹튀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장타 뻥뻥 터지는 스카이돔에서 홈런이 더럽게 안 나오는 다저 스타디움으로 옮겼으니 홈런 수야 어느 정도 줄어들 것이라 예상했지만, 비율스탯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시즌이었던 2001 시즌 타율 0.297, 49홈런, 125타점을 기록하면서 기대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도 그린이 이 시즌에 세운 시즌 49홈런은 다저스 구단 단일시즌 최다 홈런이기도 하다. 특히 다저스에서 30홈런을 쳤다면 타구단에서 40개 홈런을 친 것으로 볼 정도였고, 시즌 40홈런은 난공불락의 선이라고 봤을 때 그린의 49홈런은 대단한 성적이었다. 하지만 옆 동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배리 본즈가 약을 빨고 신으로 각성해 73홈런을 친 시즌이라 전국적인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2002 시즌에도 성적은 여전히 훌륭해서 타율 0.285, 42홈런 114타점을 기록하면서 맹활약했으나, 약빤 본즈 때문에 역시 MVP 따위와는 인연이 없었다. 다만 이 해 5월 23일에는 6타수 6안타, 4홈런, 메이저리그 단일 경기 최다 루타 기록인 19루타[5] 경기를 치르는 맹활약을 보이며 메이저리그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2003 시즌에는 어깨 부상으로 인하여 19홈런에 그쳤지만 시즌 종료 후 수술을 받은 뒤 재기에 성공하여 2004년 28홈런에 86타점을 기록하면서 다저스가 9년 만에 내셔널리그 서부지구를 제패하는데 1등 공신이 된다.[6]

2004 시즌 종료 후 숀 그린은 삼각 트레이드를 통하여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로 트레이드됐고, 트레이드 직후 3년간 총액 3200만 달러의 계약에 서명하면서 다시 한 번 잭팟을 터뜨린다. 그렇지만 40홈런을 우습게 치던 전성기에 비교하면 타격 능력은 확연히 저하됐고, 2005 시즌 22홈런 87타점에 그치면서 부진했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다소 아쉬운 성적을 기록한다. 특히나 리그 최상급까지는 아니더라도 A급 언저리는 됐던 선구안이 완전히 개발살나버려서 애리조나 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든다. 2006 시즌에도 노쇠화는 여전했고, 시즌 중반 그린이 0.425라는 커리어 로우의 장타율을 기록하자 다이아몬드백스는 미련없이 그린을 트레이드 시장에 매물로 내놓는다. 그리고 코너 외야수[7]를 급구하고 있던 뉴욕 메츠가 650만 달러를 지불하는 현금 트레이드를 통하여 그린을 데려간다.

뉴욕 메츠로 이적하여 그냥저냥 평범한 성적은 찍었지만 연봉이 1,000만 달러가 넘는 그린이었던 만큼 평범한 성적은 구단 프런트들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모든 타격 지표가 그린이 노쇠화를 겪고 있다는 징조를 보였기 때문에 메츠 구단측은 1년 연장 옵션을 실행하는 것[8]을 거부한다. 그렇게 시작한 2007 시즌 그린은 5월 말까지 타율 0.314, 5홈런 22타점을 기록하면서 회춘하는 모습을 보이나 했는데, 5월 25일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서 자기가 친 파울타구에 엄지 발가락이 골절되면서 부상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한 달도 안되어 복귀는 했지만 완전히 회복한 것이 아니었고 회복도 더뎌 그냥저냥 평범한 성적을 기록하다가 결국 2007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3. 여담[편집]


  • 타격은 매서웠지만 수비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1999년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긴 했지만 그 시즌은 몬스터 시즌이라는 후광효과(...)가 있어서 그랬을 뿐, 특히나 어깨가 소녀 어깨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어서 팬들의 한숨을 자아내는 송구실력을 보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9]
  • 9.11 테러 당시 생존자들에게 자신의 하루 치 봉급[10]을 기부해서 팬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받기도 했다.
  • 유대인이다. 단순히 혈통적으로 유대인일 뿐 아니라 열렬한 유대교 신자여서 욤 키푸르 당일에는 늘 경기에 결장했다. 또다른 유대인 출신 다저스 레전드인 샌디 코팩스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 심지어 2007 시즌 뉴욕 메츠가 그 역사적인 DTD를 시전중인 상황[11]에서도 꿋꿋이 욤 키푸르 당일에 경기에 결장해버리면서 극성맞기로 소문난 뉴욕 언론들에게 대차게 까였다.
  •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도 이스라엘 대표로 출전했지만 결과는 당연히 광탈.
  • 톰 글래빈, 앤디 페티트과 함께 잘 웃지 않기로 유명했던 선수다. 이른바 메이저리그 3대 포커페이스.
  • 홈 경기에서 홈런을 쳤을 때 꼬마팬에게 자신의 배팅장갑을 주는 버릇이 있었다.
  • 고향 LA의 명문팀 다저스에서 선수생활을 했지만, 정작 자신이 어렸을 때는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를 응원했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게 1986년 ALCS였다고 할 정도.
  • 꽤 잘생긴 외모 덕분에 몇몇 영화에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다.
  • 원래 가족의 성씨는 그린버그(Greenberg)였으나 '사업적인 이유'로 그린(Green)으로 줄여서 변경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일부 팬들은 숀 그린이 행크 그린버그의 후손이 아니냐고 말하지만 그들이 혈연관계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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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야수로서는 주로 우익수를 맡았다. 선수 말년에는 1루수로도 종종 나왔다.[2] 출전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기여도(?)를 인정받아서 우승반지를 수여받았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 때의 우승은 숀 그린의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 경력.[3] 여담이지만 그린 본인은 다저스의 지역 라이벌 애너하임 에인절스로 트레이드 되기를 내심 바랐다고 한다. 본인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경기가 1986 ALCS라고 할 정도이니.[4] 그래도 돌고 도는게 인연인지라 나중에 델가도와는 뉴욕 메츠에서 재회하게 된다.[5] 홈런(4루타)x4, 2루타x1, 1루타x1.[6] 다만 다저스는 NLDS에서 카디널스에게 1승 3패로 광탈했다. 그나마 그린은 디비전 시리즈 내내 혼자서 3홈런을 몰아치면서 맹활약했지만 나머지 선수들이 한결같이 삽을 펐다.[7] 엔디 차베스의 경우 수비나 주루는 탑급이었지만 타격이 영 아니올씨다였고, 플로이드는 부상으로 활약이 꾸준하지 않았다.[8] 애리조나로 이적하면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간 3200만 달러의 금액이 보장된 상황이었고, 여기에 구단측이 동의할 경우 1000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계약을 1년 더(즉 2008년까지) 연장할 수 있었다.[9] 선수 생활 말년에는 그래서 드문드문 1루수로 출전하기도 했다.[10] 하루 치 봉급이라고 표현하면 소액같아 보이지만 워낙 연봉 액수가 크고 아름답다 보니 8만 달러에 달했다.[11] 8월말까지 지구 2위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14게임의 승차가 났는데 이걸 뒤집혀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