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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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비 왕국
Regnum Suevorum

Regnum Gallæciae
파일:Visigothic_Kingdom.png
왼쪽의 초록색 부분이 서기 500년경 수에비 왕국의 영토.
409년~585년
위치
포르투갈과 스페인 서부
수도
브라가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국왕
레칠라(438~448)
레치아르(448~456)
언어
수에비어, 라틴어
종족
수에비인, 이베리아 로마인
종교
아리우스파 기독교, 가톨릭
주요 사건
409년 갈라이키아 정복
585년 서고트 왕국에 멸망
성립 이전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고트 왕국

1. 개요
2. 역사
2.1. 건국 과정
2.2. 이베리아 반도 쟁탈전
2.3. 짧은 전성기
2.4. 서고트 왕국과의 전쟁과 쇠락
2.5. 왕위 분쟁
2.6. 기록의 암흑기와 가톨릭으로의 전환
2.7. 망국
3. 역대 국왕

언어별 명칭
라틴어
Regnum Suevorum
/ Regnum Gallæciae
갈리시아어
Reino suevo
포르투갈어
Reino Suevo
스페인어
Reino suevo
영어
Kingdom of the Suebi
[1]



1. 개요[편집]


게르만족의 일파인 수에비갈리시아(이베리아 반도 서북부)에서 건국해 411년부터 584년까지 존재했던 게르만 왕국. 당시 갈리시아를 갈라이키아(Gallæcia)라고 불렀기 때문에 갈라이키아 왕국이라고도 한다. 5세기 중반에는 반도의 서쪽 절반을 차지할 만큼 강력하였으나 결국 서고트 왕국에 정복되었다.


2. 역사[편집]



2.1. 건국 과정[편집]


수에비족은 헤르문두리족, 차티족, 케루시족,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등을 포함한 게르만 연맹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전쟁아리오비스투스의 지도하에 카이사르와 맞서 싸웠으나 보주 전투에서 패한 뒤 카이사르에게 갈리아의 패권을 넘겼다.

1세기 초반 마르코만니족의 지도자 마로보두스가 주변 부족들을 제압하거나 동맹으로 삼아 장차 왕국을 세울 계획을 세웠지만,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로마 3개 군단을 궤멸시킨 체루스키족의 지도자 아르미니우스에게 패하고 로마로 망명하면서 세력이 꺾였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가 이어진 로마와의 전쟁에서 점차 밀리고 동족들 사이에서 인망을 잃어가다가 끝내 암살당하면서 체루스키족의 위세가 꺾였고, 마르코만니족은 이 틈에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후 로마와 한편으로는 충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류하던 수에비 연맹은 2세기 중반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의 주도하에 로마 제국을 침략하여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대결했다.(마르코만니 전쟁) 3세기에는 수에비족의 일파가 알레만니라는 새로운 부족 동맹을 결성해 로마를 잇따라 침략해 막심한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약탈을 벌이다가 본토로 귀환하길 반복할 뿐, 로마로부터 영토를 빼앗아 정착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406년 12월 31일, 라인 강 동쪽 기슭에 머물던 수에비족이 반달족, 알란족과 함께 라인 강을 건너 북부 갈리아를 휩쓸었다. 이들은 아마도 훈족과 훈족에 귀순한 동고트족 등 게르만 부족들에게 밀려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 부족은 갈리아에 한동안 머물다가 409년 봄 게렌티우스 장군과 그가 옹립한 황제 히스파니아의 막시무스가 갈리아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3세에 대항하여 히스파니아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정세가 혼란스럽자, 수에비족과 반달족, 알란족은 이 때를 틈타 히스파니아로 이주하기로 했다. 그들은 그해 9월~10월경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했다.

이후 2년간의 약탈과 파괴로 풍요롭던 히스파니아가 황폐화되고 식인이 만연해지는 지경에 이르자, 세 부족은 영토를 분할하기로 했다. 411년 여전히 서로마 제국의 행정력이 미치던 카탈루냐를 제외한 이베리아는 북서쪽의 갈리시아에 자리잡은 수에비족, 북동쪽에 자리잡은 아스딩 반달족, 중앙에 자리잡은 실링기아 반달족과 알란족, 남부에 자리잡은 반달족으로 갈라졌다.

416~418년, 서고트 왕국의 군주 왈리아콘스탄티우스 3세가 이끄는 로마군과 함께 베티카로 진군하여 실링기아 반달족을 물리친 뒤 그들의 왕 프레디발을 체포하여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압송했으며, 뒤이어 알란족을 격파하고 그들의 왕 아다크를 주살했다. 이에 실링기아 반달족과 알란족은 반달 왕국군데리크에게 귀순했고, 로마는 작전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서고트족을 아키텐에 정착시켰다. 이러한 상황에 위협을 느낀 수에비족은 419년 헤르메리크를 지도자로 세웠다. 이리하여 수에비 왕국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2.2. 이베리아 반도 쟁탈전[편집]


헤르메리크는 수에비족의 왕이 된 직후 아스딩 고트족의 도전에 직면했다. 419~420년, 아스딩 고트족이 네르바스 산에서 수에비족을 포위했다. 하지만 420년 히스파니아의 사령관 마우로켈루스가 서고트족과 연합하여 반달 왕국을 압박해오자, 군데리크 왕은 아스딩 고트족에게 포위를 풀고 자신을 돕게 했다. 이리하여 아스딩 고트족이 로마-서고트 연합군에 맞서 반달군과 연합하고자 이동한 뒤, 수에비족은 헤르메리크의 지도하에 갈리시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에 따르면, 수에비족은 갈리시아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갈리시아의 일부 지역만이 요새에 의존하여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브라카라 아우구스타(현 브라가)는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고, 수에비족은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여기에 아스토르가와 루고 역시 귀순했고, 수에비족은 브라가, 아스토르가, 루고 시와 그 주변 마을에 주로 거주했다. 학자들은 당시 수에비족의 인구가 25,000~35,000명이며 전사는 8,000~9,000명 이하였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이시도르에 따르면, 수에비족보다 몇 배 많은 현지 로마인들은 노예 취급 받으며 비참한 삶을 연명했다고 한다.

이후 갈리시아에서 잠자코 지내던 헤르메리크는 반달족이 429년에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아프리카로 이주하자 430년부터 정복 전쟁을 단행했다. 431년 아쿠아 플라비아(현재 샤베스 시)의 주교 이사키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권신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를 찾아가서 수에비족의 잔혹한 파괴와 약탈 행위를 설명하며 군대를 보내 이들을 막아달라고 간청했다. 아에티우스는 432년 켄소리우스를 수에비 왕국에 사절로 보내 더 이상의 적대행위를 벌이지 말라고 요구했고, 헤르메리크는 로마의 개입을 우려해 그 말에 따랐다.

그러나 아에티우스는 갈리아의 분쟁에 얶매여 있던 터라 이베리아 반도 로마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고, 헤르메리크는 휴전 협약을 깨고 주변 일대에 대한 습격을 이어갔다. 437년 켄소리우스가 다시 사절로 와서 수에비족으로부터 무력 행위를 그만두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사절이 돌아가자 재차 습격을 이어갔다. 그러다 438년 중병에 걸리자 아들 레칠라를 왕으로 옹립하고 퇴위했다. 이사키우스 주교는 441년경 헤르메리크를 여전히 왕이라고 불렀는데, 이로 볼 때 441년까지 살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3. 짧은 전성기[편집]



레칠라 왕의 팽창.

레칠라는 왕이 된 직후 바이티카에서 약탈 원정을 벌였고, 그해 3월 초 과달키비르 강의 지류인 싱길리온 강 인근에서 안데보트를 무찌르고 그에게서 많은 금과 은을 탈취했다. 안데보트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바이티카에 남아있던 반달족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39년, 레칠라는 루시타니아의 수도 메리다를 공략하고 그곳을 자신의 거주지로 삼았다.

440년 과디아나의 메르톨라 시를 상대로 공방전을 벌인 끝에 항복을 받아내고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부관이었던 켄소리우스를 붙잡았다. 441년 바이티카 지방의 수도 세비야를 공략한 뒤 바이티카와 카르타고헤나 일대의 여러 지역을 공략했다. 이리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남부, 서부, 중부 일대가 수에비 왕국에게 직접 지배되거나 그들의 영향권에 들어왔다. 다만 서로마 제국을 따르는 지중해 연안 지역의 도시들은 완강히 저항하여 수에비 왕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이베리아 반도 북동쪽의 히스파니아 타라코니아는 서고트 왕국과 서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446년 마기스테르 밀리툼을 맡은 비투스가 로마군을 이끌고 바이티카 지방으로 진군했다. 그는 서고트족과 연합하여 레칠라가 이끄는 수에비군과 맞붙었다. 그러나 서고트족은 전투가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장을 이탈했고, 비투스는 참패한 뒤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떠났다. 445년, 반달족이 대서양 연안으로 항해하여 갈리시아 도시들 중 하나인 투루니아를 약탈하여 상당한 노예와 전리품을 챙긴 뒤 귀환했다. 일부 학자들은 서로마 제국의 의뢰에 응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반달 왕 가이세리크가 자금과 노예 마련을 위해 독자적으로 움직였을 거라고 본다.


2.4. 서고트 왕국과의 전쟁과 쇠락[편집]


448년 레칠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레치아르는 왕이 되기 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일부 학자들은 레칠라가 교회와 좋은 관계를 행성해 현지인들이 지배에 순응하게 하기 위해 아들을 가톨릭 신자로 삼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449년 서고트 왕국의 군주 테오도리크 1세와 동맹을 맺고 테오도리크 1세의 딸[2]과 결혼했다. 이때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툴루즈로 가는 길에 서고트 분견대의 지원을 받고 사라고사 일대를 약탈하고 일레르다를 공략했다.

그는 브라카라(현재 브라가)를 수도로 삼고 브라카라와 메리다를 포함한 여러 도시에 조폐국을 설치하여 금화와 은화, 그리고 청동 동전을 주조하게 했다. 이때 생산된 동전은 서로마 제국의 동전 양식을 그대로 따랐으며, 호노리우스, 발렌티니아누스 3세 등 로마 황제들의 초상화를 그대로 담았다. 이는 동전 주조 기술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도 했고, 로마의 앞선 문화에 대한 경외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대에 주조된 동전에는 "레치아르 왕의 명령에 따라(IUSSU RICHIARI REGES)"라는 문구가 항상 실려서 그의 권위를 드러냈으며, 수도 브라카라를 의미하는 'BR'을 그 옆에 실었다.

아버지가 이베리아 남부 일대를 주로 공략했던 것과 달리, 그는 이베리아 북부와 동부로 향했다. 449년 2월, 북부에서 바스크인을 격파한 뒤 에브로 계곡으로 진군하여 히스파니아 타라코니아 일대를 공략해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하려 했다. 그의 군대는 사라고사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레리다 시를 함락해 많은 주민을 생포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과 군대의 저항이 거세지자 타로코니아 일대의 수도인 타라고나 시에 접근하지 않고 철수했다.

453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만수에타와 프론토를 수에비 왕국에 사절로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다. 그는 이에 응했고, 양자는 다음의 합의를 이뤄냈다.

1. 수에비는 카르타헤나와 타라코니아에서 빼앗은 영토 일부를 로마에게 돌려준다.

2. 로마는 갈리시아, 루시타니아, 바이티카 등 나머지 히스파니아 일대에 대한 수에비 왕의 권위를 인정한다.

3. 로마는 매년 수에비 왕국에 공물을 바쳐야 하며, 수에비 왕국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보조군을 보낸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은 타라코니아와 카르타헤나에서 세력을 회복할 기회를 얻었지만, 454~455년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발렌티니아누스 3세,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등 로마 권력자들이 잇따라 죽고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군이 로마 약탈을 자행하는 등 일련의 혼란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이 때를 틈타 타라코니아 지방에 대한 정복 전쟁을 재개했다. 막시무스 사후 새 황제가 된 아비투스는 456년 프론토를 사절로 보내 휴전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레치아르는 사절 앞에서는 이에 응하겠다고 밝혔지만 프론토가 돌아간 직후 약탈 원정을 떠나 타라코나 일대를 철저히 약탈했다.

이에 아비투스는 서고트 왕국의 군주 테오도리크 2세에게 수에비족을 응징해달라고 요청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테오도리크 2세는 수에비 궁정에 사절을 보내 로마인들을 해치지 말아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레치아르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그대가 나를 원망하고 적대한다면, 나는 그대가 옥좌에 앉아 있는 툴루즈로 가겠다. 거기에서 할 수 있다면 저항해봐라!"


테오도리크 2세는 서고트군을 동원해 수에비족과 정면 대결을 벌이기로 했다. 456년 10월 5일, 양군은 아스토르가에서 12마일 떨어진 우르비코 강둑에 있는 캄포스 파라무스에서 맞붙었다. 당시 서고트군에는 서고트족 외에도 부르군트족, 프랑크족도 함께 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레치아르는 부상을 입고 갈리시아의 가장 외딴 곳인 오포르토 시로 가까스로 피신했다. 서고트군은 456년 10월 28일 브라가를 함락시키고 일부 수에비족을 처단했으며, 테오도리크 2세는 수에비족으로부터 히스파니아 남부 일대가 해방되었다고 선포했다. 히다티우스에 따르면, 고트인들은 브라가를 공략한 뒤 교회를 더럽히고 제단에 침입하고 수녀들을 납치했으며 사제들을 발가벗기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했다고 한다.

레치아르는 적이 접근해오자 배를 타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폭풍우에 가로막혀 그러지 못하다가 서고트족에게 체포되었고, 456년 12월에 처형되었다. 서고트군은 뒤이어 메리다를 함락시키고 457년 아스토르가와 팔렌시아를 함락하여 약탈을 자행한 뒤 아키텐으로 귀환했다. 테오도리크 2세는 이베리아 반도 서쪽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수네리크 공작과 키릴라에게 해당 지역의 방위를 일임했다. 이리하여 수에비 왕국은 지리멸렬한 상태로 전락했으며, 히다티우스는 수에비 왕국이 사실상 멸망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잔존 세력은 여전히 남아 여러 왕을 옹립했다.


2.5. 왕위 분쟁[편집]


서고트군이 철수한 뒤, 아이울프라는 이름의 고트인이 갈리시아에 남아서 수에비 왕을 자처했다. 히다티우스에 따르면, 그는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457년 6월 오포르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6세기의 동로마 제국 역사가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테오도리크 2세는 수에비 왕국을 상대로 승리한 뒤 부하 아이울프를 오포르투에 남겨두고 떠났다. 수에비족은 그에게 서고트 왕국에게서 독립하여 수에비 왕이 되어달라고 간청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소식을 나중에 전해들은 테오도리크 2세는 즉시 분견대를 보냈고, 아이울프는 전투에서 패한 뒤 체포된 후 곧 처형되었다.

한편, 일부 수에비인들은 레치아르 왕이 서고트군에게 피살된 직후 말드라스를 왕으로 세웠다. 457년, 또다른 수에비인들은 말드라스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프람타를 왕으로 내세웠다. 두 수에비 왕 사이의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말드라스는 아들과 함께 루시타니아를 침공하여 리스본에 근접했다. 이때 그들은 리스본 시민들에게 평화로운 목적으로 찾아왔다고 속여 무혈 입성한 뒤 도시를 철저히 약탈했다.

몇 달 후 프람타가 사망했지만, 두 세력은 통합되지 않았다. 말드라스의 추종자들은 루시타니아 서부 일대를 약탈했고, 프람타를 추종하던 자들은 갈리시아에서 리치문트를 따랐다. 460년 말드라스가 암살자들에게 피살된 뒤, 말드라스를 따르던 이들은 프루마르를 새 군주로 받들었다. 이후 그는 프루마르를 상대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다 464년 프루마르와거의 동시에 사망했고, 왕위는 말드라스의 아들인 레미스문트에게 넘어갔다.

6세기의 동로마 역사가 요르다네스는 수에비인들이 서고트 왕국의 군주 테오도리크 2세에게 레미스문트를 왕으로 세우는 걸 허락해달라고 요청해 허락받았다고 서술했다. 반면, 당대 역사가 히다티우스는 레치아르 왕의 죽음과 아이울프 왕의 권력 장악 시도가 실패한 후 군주제가 몇년간 존재하지 않고 군사 지휘관들이 왕을 자칭하며 서로 싸우다가 레미스문트가 수에비인들에 의해 단독 군주로 세워진 뒤에야 분쟁이 종식되었다고 기술했다. 학계에서는 당시에 프루마르 왕에 의해 생포되어 수에비족과 함께 산 적도 있던 히다티우스의 기록이 진실에 근접할 거라고 본다.

세비야의 이시도르에 따르면, 그는 테오도리크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동맹을 청하자, 테오도리크 2세는 고트족 귀족의 여인을 보내 아내로 삼게 하고 우수한 품질의 무기를 보내줬다고 한다. 466년 테오도리크 2세를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에우리크가 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하자 즉시 받아들였다. 468년 루시타니아를 침공하여 코임브라를 점령하고 철저하게 약탈했으며, 일부 집과 성벽 일부를 파괴했다. 마을 주민들은 모조리 포로로 잡히거나 도망쳤고, 도시는 버려졌다.

469년, 레미스문트는 히스파니아-로마인 루시디우스의 배신 덕분에 리스본 시를 점령했다. 이후 에우리크가 수에비 왕국으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하자, 루시디우스를 안테미우스 황제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469년 이후 히다티우스의 연대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기에, 레미스문트의 이후 통치가 어땠으며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2.6. 기록의 암흑기와 가톨릭으로의 전환[편집]


레미스문트 이후, 수에비 왕국은 90여 년간 왕들의 행적과 주요 사건에 대한 기록이 일체 전해지지 않는 '기록의 암흑기' 시대에 접어들었다. 수에비 측은 자국의 역사에 관한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고, 5~8세기의 이베리아 반도 역사를 저술한 이베리아-로마 역사가들은 반도 북서쪽 구석에 자리잡고 가톨릭이 아닌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며, 로마인들을 박대하는 그들을 야만인으로 여겨 상종하려 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큰 사건을 저지르거나 연루되지 않는 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고고학 연구와 희소한 문헌 자료에서 몇몇 왕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들이 어떤 통치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다가 6세기 중반에 수에비 왕국이 가톨릭국교로 정하면서, 당대 역사가들은 비로소 이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저서 <성 마르틴의 기적>에서 차라리크 왕의 일화를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차라리크가 군림하던 시기 수에비 왕국의 백성들은 나병으로 크게 고통받았다. 급기야 차라리크의 아들마저 나병으로 고통받자, 왕은 아들을 구학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이때 투르의 주교 마르틴이 치유의 기적을 행한다는 이야기를 접한 그는 마르틴에게 사절을 보내 아들을 고쳐준다면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마르틴이 성인의 유물을 보냈고, 유물이 수에비 왕국에 도착하자 왕자가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 이에 왕과 궁정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마르틴은 수에비 왕국의 영역인 갈리시아로 가서 30년간 포교 활동을 전개하다가 580년경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계는 그레고리우스의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세비야의 이시도르, 비클라로의 요한 등 5~8세기 이베리아 반도 역사의 주요 저자들은 이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고, 수에비 왕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가톨릭 공의회인 제1차 브라가 공의회 문서에도 이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수의 학자들은 수에비 왕국이 가톨릭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는 558년 5월이나 559년 4월 사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되는 아리아미르 왕의 치세부터였을 거라 추정한다. 그는 561년 5월 제1차 브라가 공의회를 개최해 가톨릭을 왕국 각지에 전파하는 방한을 논의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아리아미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테오데미르 왕 아래에서 수에비족이 가톨릭을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그의 치세에 갈리시아의 대주교가 된 마르틴은 두미오 수도원을 세웠고, 561년에서 572년 사이에 브라가의 대주교를 맡았다. 동시대인들은 마르틴을 "갈리시아의 사도"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저서 <평민의 교정에 관하여(De correctione rusticorum)>에서 평민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이교도 관습을 근절하는 임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태오데미르는 569년에 개최된 제1차 루고 공의회에서 왕국 내 교구 수를 늘리는 등 가톨릭 진흥 정책을 추구했다.


2.7. 망국[편집]


570년 테오데미르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미로는 572년 칸타브리아에 거주하는 바스크 부족인 루스콘 족과 전쟁을 벌였다. 이는 왕국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행보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서고트 왕국을 자극했다.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서고트 왕국의 영역으로 삼겠다는 야망에 불탔던 리우비길드는 서고트 왕국에게 매년 공물을 바쳤던 루스콘 족을 공격한 점을 빌미삼아 수에비 왕국을 공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바클라의 요한에 따르면, 리우비길드는 573년 사바리아에 진군하여 사프 부족의 영역을 황폐화시켰다고 한다. 사바리아는 자모라와 살라망카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곳을 점령한 의도는 수에비 왕국을 공략할 전초기지 마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리우비길드는 아들 헤르메네길드레카레드 1세에게 점령지를 임의로 다스리게 했다. 574년, 리우비길드는 칸타브리아로 진군하여 저항하는 이들을 모조리 분쇄하고 수에비 왕국을 더욱 압박했다. 576년, 리우비길드는 수에비 왕국의 본토인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미로 왕이 사절을 보내 서고트 왕국을 주군으로 섬기며 매년 공물을 바칠 테니 평화 협약을 맺자고 청하자, 리우비길드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철수했다.

이렇듯 서고트 왕국의 공세가 갈수록 강성해지자, 미로는 이에 대응하고자 내부 단결을 꾀했다. 572년 제2차 브라가 공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조직 체계를 재정비했으며, 브라가 대주교이자 갈리시아의 대주교인 두미오의 마르틴과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마르틴은 미로의 조언자들에게 왕에게 더욱 훌륭한 조언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저서를 읽어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580년 부르군트의 왕 군트람에게 사절을 보내 서고트 왕국을 견제해달라고 요청하려 했으나, 도중에 리우비길드의 동맹인 프랑크-네우스트리아의 왕 힐데베르트 2세의 군대에 사로잡혀 파리에 억류되었다가 1년 후에야 풀려났다. 한편 리우비길드는 579년경 아들 헤르메네길드와 프랑크-아우스트라시아의 왕 시게베르 1세의 딸 인군타의 결혼을 주선해, 프랑크 왕국과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하고자 했다.

580년, 헤르메네길드가 아내 인군타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단인 아리우스파로부터 가톨릭을 수호하겠다"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미로는 583년 헤르메네길드의 반란을 지원하고자 세비야로 진군했다. 그러나 도중에 리우비길드의 군대에 포위되었고, 자신의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서고트 왕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했고, 조국으로 귀환했다가 며칠 만에 세비야 인근의 나쁜 물과 건강에 해로운 기후의 여파로 심각한 질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세비야의 이시도르와 비클라의 요한에 따르면, 미로가 리우비길드 왕과 손을 잡고 헤르메네길드를 공격했다가 세비야 인근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수에비 왕국이 가톨릭을 따른 점, 자신들을 침략한 고트족에 반감이 강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을 근거로 그레고리우스의 기록이 사실에 근접할 거라고 본다.

미로 왕이 사망한 후, 아들 에보리크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리우비길드 왕이 이끄는 서고트 왕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권위에 기대는 것에 반감을 품은 반 고트 세력이 안데카의 지도하에 정변을 일으켜 에보리크를 몰아냈다. 안데카는 에보리크의 어머니 시세군티아와 결혼한 뒤 왕위에 올랐다. 이 소식을 접한 서고트 왕 리우비길드는 충실한 가신을 해친 반역자를 무찌르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수에비 왕국을 공격했다.

비클라의 요한에 따르면, 리우비길드는 갈리시아를 황폐화시키고 안데카의 통치하에 있던 국고와 땅을 확보하고 고트족의 영역으로 삼았다고 한다. 안데카는 585년 체포된 뒤 머리를 깎고 수도복으로 갈아입힌 후 바다호스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수도자로 살았다. 수에비 잔존 세력은 말라리크를 왕으로 내세워 저항을 이어갔지만, 그 역시 리우비길드의 부관에게 패배하여 체포된 뒤 리우비길드에게 끌려갔다. 결국 수에비족은 저항을 중단하고 서고트 왕국에 항복했고, 서고트 왕국은 그들을 평정하면서 동로마 제국령인 이베리아 남부 해안지대와 바스크 산간지대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했다.


3. 역대 국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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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uebi / Suavi 등으로도 표기[2]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