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라웨시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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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도나 열도, 섬의 일부만 점유하거나 통제하고 있는 경우
  

1: 범주 내에서 면적이 가장 큰 섬이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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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ulawesi_map.png
[1]

영어, 네덜란드어, 인도네시아어: Sulawesi

1. 개요
2. 행정 구역
3. 지리
3.1. 인구
3.2. 도시
3.3. 역내 비교
4. 역사
4.1. 전통 시대
4.1.1. 남술라웨시: 루우, 고와, 보네, 와조
4.1.1.1. 루우 왕국
4.1.1.2. 16세기: 고와의 대두
4.1.1.3. 17세기: 고와 패권과 마카사르 전쟁
4.1.1.4. 18세기: 와조의 짧은 패권
4.1.1.5. 네덜란드의 정복
4.1.2. 발라니파 왕국
4.1.3. 방가이 왕국
4.1.4. 미나하사 반도
4.2. 근현대
4.2.1. 보편투쟁헌장 반란
4.2.2. 포소 분쟁
5. 정치
6. 경제
7. 문화
7.1. 관광
7.2. 교육
7.3. 요리
8. 교통
8.1. 도로
8.2. 항공
8.3. 철도
9. 창작물 속 술라웨시
10. 기타


1. 개요[편집]


술라웨시 섬은 인도네시아이다. 옛 명칭인 셀레베스(Celebes) 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인구는 2014년 기준 18,455,058 명, 면적은 174,600 km2이다. 세계에서 11번째로 큰 섬이다.

서쪽의 마카사르 해협을 건너면 보르네오 섬, 남쪽의 플로레스 해를 지나면 소순다 열도, 동쪽의 말루쿠 해협을 지나면 말루쿠 제도부루 섬, 스람 섬, 할마헤라 섬이 있다. 북쪽의 술라웨시 해를 지나면 필리핀술루 제도, 민다나오가 나온다.

2. 행정 구역[편집]






3. 지리[편집]


술라웨시섬은 중앙의 고산 지대를 중심으로 네 개의 반도, 즉 서남부의 남부 반도(남술라웨시주), 동남부의 동남부 반도(동남술라웨시주), 동부의 동부 반도(중부술라웨시주), 북부의 미나하사 반도(고론탈로주, 북술라웨시주)가 결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섬 전체에서 대체로 열대 우림 기후가 나타나지만, 남부 반도와 동부 반도에서는 열대 몬순 기후가 나타나기도 한다. 남부 반도는 계절(건기와 우기)이 뚜렷하고 비교적 넓은 평야가 있어 섬 내에서는 어느 정도 농경에 유리한 지역이다. 중부 고산 지대에서는 꽤 넓은 지역에 걸쳐 아열대 고산 기후가 나타나며, 이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드문드문 고산 기후를 볼 수 있다. 북술라웨시의 토모혼(Tomohon)은 마나도 인근의 고원 지대에 위치한 선선한 휴양 도시로 유명하다.

술라웨시섬의 최고봉은 남술라웨시 중부의 라티모종산(Gunung Latimojong, 3,478m)인데, 중부 고산 지대가 시작되는 남쪽 부분에 위치해 있다. 북술라웨시주에는 로콘산(Gunung Lo'kon), 아우산(Gunung Awu) 등 활화산들도 있다. 미나하사 반도, 서술라웨시, 중부술라웨시는 화산 폭발과 지진 등 자연 재해의 발생 위험도가 섬에서 비교적 높고, 상대적으로 남술라웨시는 안전한 편이지만 절대적 안전 지대라고는 하기 어렵다.

3.1. 인구[편집]


인도네시아에서 자바(마두라섬 포함)를 제외하면 술라웨시는 그래도 인구 밀도가 어느 정도 높은 지역이다. 자바가 워낙 인구가 많고 집중된 곳이라 인도네시아 전체의 인구 밀도를 꽤 높이는데, 술라웨시 지역의 전체 인구 밀도는 자바를 제외하고 계산한 인도네시아 인구 밀도보다 높으며 수마트라섬의 인구 밀도와 비슷하다. 술라웨시보다 면적이 3배나 큰 인도네시아령 보르네오(칼리만탄)보다 술라웨시의 전체 인구가 많은 수준이다.

인도네시아 동부 지역은 크게 술라웨시섬, 말루쿠 제도(말루쿠주, 북말루쿠주), 소순다 열도(발리주, 서누사틍가라주, 동누사틍가라주), 서뉴기니(파푸아주, 서파푸아주)로 나뉘는데, 권역별로 비교할 때 인구 밀도는 소순다 열도가 가장 높고, 다음이 술라웨시, 말루쿠 제도, 서뉴기니 순이다. 총인구로 보면 소순다 열도는 술라웨시보다 조금 적은 수준이다. 그러나 소순다 열도는 지리적으로 파편화되어 있어 술라웨시의 마카사르와 같은 수준으로 인구가 밀집된 도시나 도시권은 발달하지 못했다.

3.2. 도시[편집]


술라웨시섬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남술라웨시의 주도 마카사르이다. 전국적으로 주요 도시로 꼽히는 곳은 마카사르 외에 북술라웨시의 주도 마나도 정도이다.

양대 도시 마카사르와 마나도 외의 주요 도시는 다음과 같다. 인구는 모두 2020년 센서스 기준이다.
  • 팔루(Palu): 중부술라웨시주의 주도. 인구 37만. 팔루강을 끼고 발달한 술라웨시의 제3도시이며, 니켈을 비롯해 아연, , , , 구리, 크롬, , 망간 등 각종 광물의 보고인 중부술라웨시의 중심지로 인구 외에 총 GRDP 기준으로도 마카사르, 마나도 다음 술라웨시에서 세 번째이다.
  • 고론탈로(Gorontalo): 고론탈로주의 주도. 인구 20만. 오늘날 경제적으로 크게 중요한 도시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마나도와 함께 술라웨시 북부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로 꼽히는 곳이다.
  • 큰다리(Kendari): 동남술라웨시주의 주도. 인구 35만. 기록된 역사에는 15세기부터 등장하지만 그 이전에도 코나웨 왕국(Kerajaan Konawe)이라는 국가가 있었던 곳으로 나름의 독특한 문화가 있다. 공업이 어느 정도 발달한 지역이다.
  • 비퉁(Bitung): 북술라웨시주 제2도시. 인구 23만. 북술라웨시의 동북쪽 끄트머리 해안 지역에 위치한 곳이며 특별 경제 지역으로 개발되고 있다.
  • 팔로포(Palopo): 남술라웨시주 제2도시. 인구 18만. 지역 중심지 마카사르와 멀리 떨어져 섬 중앙부에 가까운 곳으로 마카사르와 완전히 별개의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 전통 시대 루우 술탄국(Kesultanan Luwu)의 중심지였다.
  • 바우바우(Baubau): 동남술라웨시주 제2도시. 인구 16만. 술라웨시 본토가 아닌 부속 도서 부톤섬에 있으며, 전통 시대 부톤 술탄국의 중심지였다. 한국에서 어느 정도 유명한 찌아찌아어가 이곳을 포함한 부톤섬 남부 지역에서 쓰인다.
  • 파레파레(Parepare): 남술라웨시주 제3도시. 인구 15만. 마카사르에서 북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곳에 있는 남술라웨시의 물류 거점 중 하나이다. 마카사르 광역권 외에 가장 가까운 주요 도시다. 2022년 새로 개장할 것이 예상되는 철도 노선으로 마카사르와 연결될 예정이다. 인도네시아 제3대 대통령 하비비의 고향이다.
  • 토모혼(Tomohon): 북술라웨시주 제3도시. 인구 10만. 고원 지대에 위치한 생태 휴양 도시로 연중 평균 기온이 22도, 평균 최고 기온 26~27도 정도로 선선하다.
  • 마무주(Mamuju): 서술라웨시주의 주도. 인구 11만.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존재감이 약한 주도 중 하나이다. 서술라웨시가 술라웨시 내에서도 낙후 지역인 관계로 교육, 보건, 교통 등 인프라가 심각하게 빈약하다.

3.3. 역내 비교[편집]


섬 내에서는 남술라웨시주의 인구가 섬의 6개 주 가운데 가장 많은데, 남술라웨시주는 술라웨시 전체 면적의 약 1/4을 차지하지만 술라웨시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며, 인구 밀도도 섬의 6개 주 가운데 가장 높다. 남술라웨시의 중심 도시는 마카사르이며, 마카사르는 술라웨시 전체의 중심 도시일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동부 권역(술라웨시, 말루쿠, 소순다 열도, 서뉴기니) 전체의 중심 도시이다. 남술라웨시의 1인당 명목 GRDP는 2019년 기준 $4,033으로 당시 인도네시아 1인당 GDP $4,242와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술라웨시 전체의 1인당 GRDP $3,655보다 높았고 술라웨시의 모든 주 중 가장 높았다. 동인도네시아 지역에서는 서파푸아주($6,216), 발리주($4,119)에 이어 세 번째였다. 사실상 술라웨시의 지역 개발이 마카사르를 중심으로 하는 남술라웨시주에 집중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술라웨시 내 가장 낙후된 지역인 서술라웨시는 1인당 GRDP가 $2,375에 불과했다.

남술라웨시의 2대 주류 민족은 부기스어를 사용하는 부기스인마카사르어를 사용하는 마카사르인이며, 이 둘은 남술라웨시 인구의 약 2/3를 차지한다. 전통 시대부터 이 양대 민족이 남술라웨시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이들은 압도적인 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남술라웨시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민족은 전통적으로 산간 지방에 거주하는 토라자인(Toraja)인데, 이들은 남술라웨시 인구의 약 9%를 차지하며 서술라웨시주에서도 두 번째로(약 14%) 인구가 많은 민족이다. 토라자인은 현대에는 대체로 개신교 또는 가톨릭을 받아들였지만, 토라자인의 약 6%는 아직까지도 독특한 토라자식 힌두교(Aluk To Dolo)를 신봉하고 있다. 토라자식 힌두교 전통은 현대까지도 토라자인의 생사관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 술라웨시 북동부 미나하사 반도의 끝 부분에는 북술라웨시주가 있는데, 남부와 역사적, 문화적으로 거의 접점이 없을 정도로 판이하게 다른 곳이다. 북술라웨시 지역도 남술라웨시보다는 못하지만 인구 밀도가 6개 주 가운데 두 번째로 높으며, 중심 도시인 마나도는 술라웨시 제2의 도시이다. 마나도는 16세기부터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를 겪었고,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에는 암본과 함께 네덜란드령 동인도 동부 권역에서 기독교도 비율이 높고 상대적으로 유럽화가 많이 진행된 곳이었다. 북술라웨시의 주류 민족은 90% 이상이 기독교도인 미나하사인(Minahasa)이며, 미나하사인의 언어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하기는 하지만 다른 인도네시아 지역의 언어와는 달리 필리핀어군에 속한다.

4. 역사[편집]


파일:술라웨시_청동도끼.jpg
술라웨시 지역에서 출토된 제식용 청동 도끼.
기원전 100년~기원후 3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현재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1] 원본은 여기

술라웨시 지역에 언제 유력한 토착 정치체가 등장했는지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각 지역마다 역사 기록 이전을 다루는 구술사 채록이 있으며, 기원후 첫 번째 천년기에 창건되었다는 전승을 가진 국가들도 있다. 그러나 기원후 첫 번째 천년기에 성립한 체계를 갖춘 국가가 기원후 두 번째 천년기까지 이어졌다는 물증은 2021년 현재 아직 확실한 것이 없다.

단, 인도네시아 군도의 다른 지역들처럼 불교(및 아마도 힌두교)가 기원후 첫 번째 천년기, 그것도 상당히 이른 시기에 술라웨시로 전래되었음은 알 수 있다. 2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불상이 서술라웨시 시켄뎅(Sikendeng) 지역에서 1921년 발굴되었기 때문이다.[2] 기원후 10~11세기에 제작된 소형 청동 불상 2점도 남술라웨시 본토하루(Bontoharu) 지역에서 1974년 발굴되었다. 이 불상 2점은 보다 정교한 자바 지역의 불상을 모방하여 남술라웨시 지역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3]

두 번째 천년기 초기, 적어도 남술라웨시 지역은 군도 무역 체제에 통합되어 여러 지역 국가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술라웨시 지역에 관해 최초로 확인되는 신빙성 있는 문헌 기록은 자바에서 기록된 마자파힛 제국 시대의 역사적 서사시 《나가라크르타가마》(1365)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14세기 중반 당시 남술라웨시 지역에는 반타엥(Bantaeng)[4], 루우(Luwu), 우다(Uda, 와조 지역으로 추정) 등의 지역 국가들이 있었다. 남술라웨시 지역에서는 이후 마카사르어와 부기스어로 된 근세 연대기로도 약 14~15세기부터 각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4.1. 전통 시대[편집]


파일:Sulawesi_Topography.png
술라웨시의 지역별 고도를 묘사한 지형 지도.

중부를 중심으로 산지가 많은 술라웨시에서는 많은 전통 국가가 파편화되어 독립적으로 발달했지만, 비교적 평야가 많고 자연 환경이 안정적인 남술라웨시에서는 대규모 국가가 출현할 수 있었다. 남술라웨시에 존재한 주요 국가는 마카사르인의 고와 술탄국과 부기스인의 루우 술탄국, 보네 술탄국, 와조 왕국이 있다.

이 두 민족은 남술라웨시의 정치에서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핵심 역할을 해 왔다. 특히, 이상의 지형 지도를 보면 남술라웨시 남부 반도를 동서로 양분하는 이등변 삼각형 모양의 산지가 있는데, 이 산지 좌측은 마카사르인의 영역(고와/탈로 왕국), 우측은 부기스인의 영역(보네/와조/소펭 왕국)으로 산지가 양 민족 간의 자연 경계가 되었다. 술라웨시 최고봉 라티모종산을 중심으로 중부의 산지가 시작되는 부분부터 동북쪽으로는 다시 산지를 일부 영역으로 포괄한 루우 왕국의 영역이 펼쳐졌다. 남술라웨시의 역사는 이하에서 따로 상세히 서술한다.

서술라웨시 지역에는 만다르인(Mandar)이 16세기에 술라웨시 서부에 세운 발라니파 왕국(Kerajaan Balanipa) 등 다수의 군소 왕국이, 중부술라웨시(술라웨시 중북부) 지역에는 바나와 왕국(Kerajaan Banawa), 팔루 왕국(Kerajaan Palu) 등 다수의 군소 왕국이, 동남술라웨시 지역에는 코나웨 왕국(Kerajaan Konawe, 15세기–1916, 톨라키어 등 사용), 부톤 술탄국(Kesultanan Buton, 1332–1960, 월리오어, 찌아찌아어, 투캉브시어 등 사용) 등 다수의 군소 왕국이 있었으나 고와 술탄국의 전성기에 고와 술탄국에 이 지역들이 복속되었던 적이 있다. 그 밖에 술라웨시 남부와 서부에서 산간 지방에 거주하는 토라자인은 남술라웨시 저지대 국가들과 서술라웨시 만다르인 국가들에 영향을 받았지만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를 거쳐 지역은 모두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흡수되었다.

술라웨시섬 북동부의 미나하사 반도는 고론탈로(Gorontalo)주(주요 주민은 고론탈로인, 오늘날에는 이슬람교 우세 지역)와 북술라웨시주(주요 주민은 미나하사인, 오늘날에는 기독교 우세 지역)로 나뉘는데, 이 지역은 다른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지역과 달리 토착민이 필리핀어군에 속하는 언어들을 사용하며, 역사적으로도 타 술라웨시 지역과는 이질적인 곳이다. 이 지역에도 수많은 토착 국가들이 있었고, 16세기에는 트르나테 술탄국과 스페인 영향권에 속했다. 17세기에 네덜란드 세력이 진입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세력을 축출하였고, 이후 17세기 후반부터 동부의 미나하사 지역은 마나도를 중심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속하게 되었다. 서부의 고론탈로 지역도 19세기 전반부터 네덜란드의 보호령이 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속하게 되었다.

4.1절 및 이하 부속 절에서 기본적인 참고 문헌은 인도네시아/역사 문서와 공유한다. 특히 남술라웨시 고와-보네-와조 관계사에 대해서는 위 문서의 (Wellen 2014) 및 (Charney and Wellen 2018, "La Maddukelleng and Civil War in South Sulawesi") 등을 참고하였다.

4.1.1. 남술라웨시: 루우, 고와, 보네, 와조[편집]


남술라웨시는 우림과 산지가 펼쳐져 있는 술라웨시섬에서 비교적 계절(건기/우기)이 뚜렷하고 평야가 많으며 비교적 자연 재해로부터도 안전한 편이어서 술라웨시 기준으로는 가장 농업에 적합한 곳이다. 나아가 남술라웨시는 보르네오 동부, 소순다 열도, 자바 등지와 가까워 전통 시대에는 해상 무역에도 적합한 입지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 따라 남술라웨시에서는 전통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술라웨시에서 가장 높은 인구 밀도가 유지되었으며, 정교한 체계를 갖추고 역외로 영향력을 뻗은 국가들도 등장하였다.

남술라웨시에서는 14~17세기를 거치며 독자적인 역사 기록 전통이 정교하게 발달하기도 했다. 가령 17세기의 마카사르어 사료 《고와 연대기》(인도네시아어: Sejarah Kerajaan Gowa, 마카사르어: Lontaraʼ Pattorioloanga ri Togowaya)는 전통 사료로서 매우 가치가 높을뿐더러, 바밧 등 동시대 자바어권의 전통 연대기에 비해서 덜 설화적이며 보다 서술이 정확하고 객관적인 것으로도 유명하다.[5]

4.1.1.1. 루우 왕국[편집]

남술라웨시에서 근대에 정리된 부기스 서사시 《라 갈리고》(La Galigo) 등은 모호하게 14세기 이전의 역사를 언급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 신빙성이 많이 낮다. 14세기에 관한 토착 기록도 많은 지방에서는 15세기나 16세기만큼 신빙성이 높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남술라웨시에서 14세기부터 존재했던 것이 여러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로 확실시되는 토착 국가로는 남술라웨시 동북부 해안 지방의 루우(Luwu) 왕국, 정확히는 루우 다투국(Kedatuan Luwu)이 있다.

고고학적, 역사적 증거들로 추론한 바에 따르면, 14세기 이 지역(남술라웨시 동북부)에는 부기스인을 포함해 다양한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부기스인은 주로 해안을 따라 거주했다. 내륙의 산악 지대는 인구 밀도가 낮았고, 또 부기스인이 적고 비부기스계의 여러 종족이 있었다. 여러 종족들이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게 되자 서로 이권 다툼이 벌어졌는데, 이때 해안 지역의 부기스인들이 다양한 산악 종족들 사이를 중재하는 데 능했다. 따라서 해안과 산악 지역에는 부기스인 군장(datu) 주도로 다종족 연합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점차 국가로 발전하여 14세기 초 내지 14세기 중반에 루우 왕국이 성립하였던 것이다.

루우는 비교적 평야가 적고 산지가 많으며 큰 강이나 호수가 적고 계절도 남부에 비해 뚜렷하지 않아 대규모 농업에 적합한 지역은 아니었고, 15세기와 16세기에 명목상의 영토는 넓었던 반면 인구 밀도가 낮았다. 그러나 루우는 산악 지대와 해안 지대의 연합이었으므로, 산악 지대에서 채광한 철광석을 해안 지역으로 운반해 제련하는 체계를 갖추어 철광과 철 제련 기술에 힘입어 번성했다. 루우에서 제련된 철은 무기와 농기구 등 다양한 도구의 제작에 사용되었고, 남술라웨시 중부와 남부의 여러 저지대 지역으로 수출되어 14세기와 15세기 루우의 국부에 핵심이 되었다.

14~15세기에 루우는 남술라웨시에서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 다소 늦었던 남부 저지대 지역에 비해 정치적으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루우의 초기 왕계는 불확실한 편이며, 14세기는 신화와 구전 설화로 뒤덮여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남부 반도와 동남부 반도의 여러 국가와 전쟁을 벌이고 다양한 조약을 맺었음은 분명하다. 여러 기록으로 실존이 확실한 최초의 루우 군주는 15세기 중반의 바타라구루(Bataraguru)인데, 그는 15세기 중반 남부 보네 지역과 평화 조약을 맺었음이 알려져 있다. 치세의 다양한 측면을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최초의 루우 군주는 데와라자(Dewaraja, 재위 1495 전후~1520)이다. 데와라자는 인접한 와조(Wajo)와 시덴릉(Sidénreng)을 침공하고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16세기 중반까지 남술라웨시 중부와 남부 저지대에서 다양한 농업 국가들이 발전하여 체제를 갖추고 힘을 기르자, 농업에 불리했던 루우는 고와, 보네, 와조 등 남술라웨시의 여러 국가에 비해 열세인 상태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16세기에 활발해진 무역 등으로 루우의 주력 상품 철의 가격이 하락한 것도 루우 세력 쇠퇴의 원인 중 하나였다. 16세기 전반 루우는 와조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와조에 한동안 굴복해야 했다.

16세기에 남술라웨시 정치의 중심은 고와, 보네, 와조 등 남부 저지대로 이동했고, 이후 루우는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핵심 패권 경쟁국 중 하나가 되지는 못했다. 열국이 세력 균형을 유지한 남술라웨시에서 루우도 한동안 무의미한 세력은 아니었고, 이후의 루우는 시덴릉을 비롯한 아자타파릉 연맹이나 소펭(Soppéng) 등 소국처럼 정치적으로는 시기마다 바뀌어 간 대립 동맹의 일원으로 균형추 역할을 한 국가 중 하나로 남았다. 1605년 2월 4일 혹은 5일 루우의 군주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술탄을 칭하여 루우 술탄국이 성립하였다. 1620년 무렵, 오늘날 루우 지역의 중심지인 팔로포(Palopo)가 세워져 수도가 되었다. 이후 루우는 경제적으로 정체되었고, 19세기에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흡수될 무렵에 과거의 영광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4.1.1.2. 16세기: 고와의 대두[편집]

술라웨시 남부의 마카사르를 중심으로 거주하며 마카사르어를 사용하는 마카사르인들이 인도네시아 군도의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4세기경이다. 《나가라크르타가마》(1365)에 따르면, 마자파힛의 여러 봉신 가운데 하나로 마카사르 지역 왕국이 기록되어 있다. 마카사르의 초대 군주는 여왕 투마누룽(Tumanurung, Tomanurung)이었다고 하며, 투마누룽의 재위 시기는 1300년 전후, 또는 14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투마누룽은 마카사르인들의 많은 민속 설화에 등장하는 군주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17세기 마카사르어 연대기인 《고와 연대기》는 마카사르(또는 고와) 왕국의 성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원래 마카사르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던 지역 부족들의 연합체인 '아홉 깃발'(Bate Salapang)의 족장들이 새로운 군주(카라엥Karaeng)로 옹립하기 위해 외부에서 유력자 카라엥 바요(Karaeng Bayo, 남성)를 데려왔는데, 그 부인의 이름은 투마누룽이었다. 이때 카라엥 바요와 투마누룽에게 아홉 깃발이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 새로운 군주는 아홉 깃발이 전통적으로 누렸던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마카사르, 혹은 고와라는 정치체가 성립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계 여러 지역의 초기 역사가 그렇듯, 투마누룽이나 카라엥 바요라는 인물의 정체는 다소 불명확하다. 이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비문 등 당대 사료가 있는 것은 아니며, 오늘날에는 후대에 작성된 지역 연대기와 설화에만 의존해 이들의 행적을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고학자 프랜시스 데이비드 벌벡(Francis David Bulbeck)은 투마누룽과 카라엥 바요의 이야기는 마카사르 지역의 전통적인 귀족 여성(투마누룽의 원형)과 당대 술루해와 남술라웨시 지역 무역에서 유력했던 외부 세력(해양 민족 사마 바자우 또는 그 원형이 유력 후보)의 남성 유력자(카라엥 바요의 원형)가 결혼하여 기존 마카사르 부족들을 통합하는 지배 가문을 새로 창시한 이야기가 기록된 것이었으리라 추정한다. 연대에 관해서는, 1300년 전후 고와 지역에서 강력한 지배자가 등장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이때 지역에서 출토된 도자기가 갑자기 많아졌다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마카사르 지역의 여러 사료에 따르면 6대 군주 토나탕카 코피(Tonatangka Kopi)의 시대에 마카사르 왕국은 코피의 두 아들 바타라 고와(Batara Gowa)와 카라엥 세로(Karaeng Loe ri Sero)에 의해 둘로 쪼개져 고와 세력은 고와 왕국(Gowa), 세로 세력은 탈로 왕국(Tallo)이 되었다. 두 왕국은 긴 전쟁을 벌였는데, 종국에는 고와가 승리하고 고와 왕국의 투마파리시 칼로나(Tumaparisi Kallonna, 재위 1511–1546)[6] 시대에 고와의 왕이 탈로의 왕을 겸하게 되었다. 이 연합왕국을 고와–탈로 왕국, 또는 단순히 고와 왕국이라 부른다. 고와 왕국의 수도는 숭구미나사(Sungguminasa)였는데, 투마파리시 칼로나 시대에 해안에 위치한 현재의 마카사르(도시) 지역이 교역 거점으로 개발되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말 고와 왕국의 영향권은 트르나테 술탄국의 영역에 속하는 동부 일부 지역과 북동부 미나하사 반도, 남부의 부기스 삼각 동맹(이하 서술)을 제외한 술라웨시섬 전체에 이르렀으며, 보르네오섬 동부와 숨바와섬 동부에도 마카사르인의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남술라웨시 지역에서 이슬람의 역사는 늦어도 1320년대 사잇 자말루딘(Sayyid Jamaluddin al-Akbar al-Husaini)[7]이 도래하여 이슬람을 포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6세기가 되면 이미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슬람이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있었으며, 1605년 9월 22일 마침내 고와의 14대(투마누룽 이래; 재위 1591–1629) 왕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술탄 알라우딘(Sultan Alauddin)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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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전후 남술라웨시 세력 지도.
서부와 남부는 고와의 영역,
동부는 부기스 삼각 동맹(보네, 와조, 소펭),
북부의 루우(부기스계)는 고와의 동맹(세력권),
완충 지대 아자타파릉은 삼각 동맹의 우방.
[5] 관련하여 William Cummings, A Chain of Kings: The Makassarese Chronicles of Gowa and Talloq (the Netherlands: KITLV Press, 2007)에서는 《고와 연대기》와 《탈로 연대기》를 마카사르어 원문과 함께 영어로 번역하여 싣고(3장 및 4장), 1장과 2장에서 마카사르 연대기에 관해 개괄하였다. 특히 p. 8에서 자바의 연대기와 비교하였다.[6] 투마누룽 이래 9대, 고와 분리 이래 3대[7] 이 사람의 손자 중에 인도네시아 이슬람 성인 9인의 왈리(Wali Sanga)로 손꼽히는 이도 있다.


비록 고와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남술라웨시, 나아가 아마도 술라웨시 전체에서 가장 유력한 패권적인 해양 세력이었지만, 남술라웨시의 다른 주요 민족 부기스인의 왕국들은 독립성을 유지하고 고와의 패권에 저항했다. 이러한 부기스인 국가로 주요했던 것은 남술라웨시 동남부의 보네(Bone, Boné) 왕국(나중에 술탄위를 칭하여 보네 술탄국이 됨. 1330–1951)[8]과 와조(Wajo, Wajo', Wajoq) 왕국(Kerajaan Wajo, 15세기–1957)을 들 수 있다. 이들 부기스 국가들도 지역을 어느 정도 통합해 등장한 것으로, 예를 들면 중부 동해안의 와조 왕국은 그보다 위에 있었던 다른 부기스 국가 루우(Luwu)와 이어진 15세기부터의 주도권 경쟁에서 승리하였으며 16세기 전반에는 루우를 봉신국으로 삼기도 했다. 그 외에 남술라웨시 중부 지역에는 서술라웨시의 만다르(Mandar)인 지역 및 북부 산간 지대(토라자인들의 영역)와의 점이 지대에 소국 연맹체 아자타파릉(Ajatappareng)[9]이 있어 완충 지대를 구성하며 주변 유력 세력과 경우에 따라 연합하였다.

고와가 아직 충분히 강성해지기 전인 16세기 초에는 잠시 대두한 와조 및 봉신국 루우의 연합에 맞서 고와 및 보네가 연합하였지만, 16세기 중반 와조가 고와의 영향권하로 떨어지면서 고와와 보네가 대립하게 되었다. 보네도 한때 루우를 굴복시키기는 했지만 16세기 중반 역외 서술라웨시, 중부술라웨시, 심지어 미나하사 반도 서부 등까지 진출하기 시작한 고와의 과성장은 남술라웨시 역내 세력 균형을 무너뜨릴 것처럼 보였고, 점차 강해지는 마카사르계 고와 세력에 대항하여 동남부의 부기스계 3국 보네, 와조, 소펭은 1582년 보네가 주도한 티무룽(Timurung) 협정으로 부기스 삼각 동맹(Tellumpoccoé)을 결성하고 고와에 맞섰다. 이때 동맹의 수장국은 보네였고, 제2서열이 와조, 말석이 소펭이었다. 부기스 삼각 동맹은 고와의 1582년 와조 원정 및 1585년과 1588년의 보네 원정을 공동으로 물리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4.1.1.3. 17세기: 고와 패권과 마카사르 전쟁[편집]

부기스 삼각 동맹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고와는 술라웨시의 다른 여러 지역과 소순다 열도, 동칼리만탄 등 해외에서 영향권을 확장하며 지속적으로 세를 늘려 나갔다. 17세기 초반, 1605년부터 군주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술탄국이 된 고와는 주도면밀하게 부기스 삼각 동맹 내부에 균열을 내 갔다. 동맹의 말석이자 가장 약한 고리였던 소펭의 군주가 고와의 권유로 1609년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고와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이어 1609~1610년 와조의 지도자(아룽 마토아)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고와는 이슬람을 구심점으로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도 적절히 행사하며 부기스 세력들을 포섭해 갔다. 최종적으로 삼각 동맹의 수장인 보네까지도 1611년 군주가 이슬람을 받아들였다.[10] 이후에도 삼각 동맹은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1610년대부터 고와가 삼각 동맹을 인정하고 삼각 동맹이 이슬람의 적에 대항해 고와와 함께한다는 식이 되어 고와에 대항한 부기스 국가들의 공동 전선은 무색해졌다.

점점 더 와조는 고와와 가까워져 1620년대 후반 와조의 지도자는 고와 군주가 수도를 비울 때 와조군이 고와의 수도를 지켜주겠다는 제안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반대로 부기스 삼각 동맹 내부의 결속은 1620년대와 1630년대를 거치며 삐걱거렸는데, 급기야 보네가 알력을 빚은 와조의 지방 페네키(Pénéki)를 공격하고 약탈하면서 동맹의 두 지도국인 보네와 와조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고와가 개입하여, 와조 및 소펭과 함께 보네를 공격하고 승리하여 마침내 1643년 보네를 고와의 속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이를 기점으로 17세기 중반, 고와가 삼각 동맹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남술라웨시의 패권을 획득하였다. 고와와 협력한 하위 파트너 와조도 나름대로 이득을 얻어 많은 보네인들이 와조로 끌려와 강제 노동을 하게 되었다. 이에 보네 지역은 고와와 와조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게 되었다.

1607년 이래 고와의 군주들은 출신을 막론하고 외국 상인을 환영하는 정책을 취했다. 1613년에는 영국인이 마카사르에 공장을 지었을 정도였다. 비슷한 시점에, 동인도로 진출해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세력과 경쟁하며 점차 셋 모두를 물리치고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가장 유력한 유럽 세력으로 발돋움해 나가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남술라웨시에도 도래했다. 네덜란드 세력은 처음에는 지역 국가들과 무역을 하려 했으나, 강대한 고와의 세력은 17세기 중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이익 주장을 관철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1660년대, 동인도 회사는 고와를 포함한 남술라웨시 지역 국가들을 힘으로 억눌러 영향권으로 편입하려 시도했다.

1666년에 고와의 술탄 하사누딘(Hasanuddin)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무리한 요구에 반발해 전쟁(마카사르 전쟁, 1666–1669)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동인도 회사는 특히 보네의 왕자 아룽 팔라카(Arung Palakka, 1634/1635–1696)가 이끄는 보네와 연합하였다. 지역의 유력 세력이었지만 고와의 속국으로 떨어져 칼을 갈고 있던 보네는 쓸모 있는 동인도 회사의 동맹이었고, 동인도 회사와 보네의 연합군은 1667년 마카사르를 점령하는 등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구 삼각 동맹국 중 와조는 고와의 편에 서서 보네 및 동인도 회사와 싸웠고, 소펭은 내부 사정으로 친고와파와 친보네파로 양분되었다.

전쟁 초기 국면에 1667년 11월 18일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고와와 동인도 회사 간에 체결된 붕아야 조약(Perjanjian Bungaya)은 이후 약 150년간 지속되며 네덜란드와 남술라웨시의 관계를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남술라웨시에서 무역할 수 있는 유일한 유럽 세력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였으며, 남술라웨시인은 군도 내에서 발리, 자바, 팔렘방, 바타비아, 반튼, 잠비, 조호르, 칼리만탄으로만 항해할 수 있고 마카사르에서 동인도 회사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

그러나 고와는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붕아야 조약의 불평등성은 고와 술탄 하사누딘을 분노케 했고, 이런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은 남술라웨시뿐 아니라 반자르 술탄국 등 인접 지역까지 빠르게 퍼져 동인도 회사에 대한 경각심을 키웠다. 결국 술탄 하사누딘은 전쟁을 재개해 끈질기게 저항하여 동인도 회사에 많은 피해를 입혔으나, 힘이 다해 패배하고 1670년 6월 12일 퇴위했다. 마카사르 전쟁은 동인도 회사가 동인도 지역에서 17세기에 겪은 전쟁들 중 가장 길고 격렬한 것 중 하나로 평가되었다. 승리한 아룽 팔라카는 1672년 보네의 15대 군주(재위 1672–1696)로 즉위했다. 동인도 회사령이 된 마카사르에는 로테르담 요새가 건설(1673년 착공, 1679년 완공)되었다.

마카사르 전쟁 이후에도 고와 술탄국과 보네 술탄국은 네덜란드의 영향권 아래에서 존속하였으나 완전히 복속된 것은 아니었다. 전쟁에서 패배하여 크게 약화된 고와는 더 이상 패권국이 아니었지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로서도 지역에 투입할 수 있는 자원이 제한되어 있어 지역 국가들을 보호국화할 수도 없었고, 네덜란드와 친교를 유지하는 보네와 제휴하며 지역 사정을 잘 아는 보네를 거쳐 붕아야 조약의 틀 안에서 네덜란드에 유리하게 지역 무역을 통제하는 것 이상으로 정치적 강제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전쟁이 끝난 17세기 후반, 아룽 팔라카 치하의 보네 술탄국은 남술라웨시 역내에서 네덜란드와 제휴하여 고와 다음의 새로운 패권국이 되었다. 그러나 보네의 패권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1696년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 아룽 팔라카가 사망하자, 보네는 남술라웨시 역내 각국에 대한 영향력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세기 남술라웨시에서는 다시 지역 국가들 각국이 네덜란드의 무역 통제를 벗어나거나, 네덜란드의 지역 거점을 공격하기도 했다.

4.1.1.4. 18세기: 와조의 짧은 패권[편집]

18세기 전반, 보네 북쪽의 남술라웨시 동해안을 통제하던 와조 왕국이 새로이 대두했다. 마카사르 전쟁 당시 와조는 같은 부기스계 보네가 아닌 고와를 도왔지만 패배했고, 고와가 항복한 뒤에도 1670년대까지 항쟁을 이어갔지만 결국 패배하고 네덜란드와 보네에 굴복했던 전력이 있었다.

와조는 동칼리만탄, 소순다 열도, 말라카 해협 인근 지역 등에 폭넓은 와조계 부기스 공동체 네트워크를 갖춘 해양 상업 세력이었다. 특히 아룽 팔라카 사후 보네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와조는 무역에서 폭넓은 자유를 누렸다. 와조는 무역으로 쌓은 부와 해외 네트워크를 이용해 무기를 들여오며 다시 군비를 증강하였고, 보네와 실력으로 맞설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갔다.

1730년대, 마침내 와조는 보네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고, 평화 협정이 체결된 1737년 이후 남술라웨시에서 보네의 힘을 빼앗아 일시적으로 새로운 지역 패권국이 되었다. 《수쿠나 와조》(Lontaraʼ Sukkuʼna Wajoʼ) 등 일부 부기스 사료에 따르면, 이때 와조는 16세기의 오래된 부기스 삼각 동맹의 수장으로 인정받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와조는 보네와 달리 반네덜란드 정책을 유지하였다. 와조가 강성했던 1739년, 와조의 지도자 마두클릉(La Maddukelleng)은 옛 삼각 동맹국(와조, 보네, 소펭) 및 고와까지 남술라웨시 남부 전체를 연합시켜 마카사르에서 네덜란드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원정을 벌였지만, 고와는 큰 열의가 없었고, 보네는 배신하고 네덜란드 측으로 돌아섬으로써 와조의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1741년 초, 반대로 네덜란드와 보네가 연합해 역공을 펼쳤고 와조의 수도 토소라(Tosora)를 포위했지만, 장기전이 되자 악천후가 이어졌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재정 상황도 악화되어 네덜란드군이 동년 3월 퇴각함으로써 와조가 방어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와조의 패권도 마카사르 전쟁 전까지의 고와, 17세기 후반의 보네처럼 오래 가지 못했으며, 18세기 중반 네덜란드 세력에 기댄 보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빛이 바랜다. 이에 남술라웨시는 다시 고와, 보네, 와조 등 여러 세력들이 균형을 이루는 체제로 돌아갔다. 여기에는 복잡한 국제 관계 외에도 와조 내부 정치가 불안정했던 탓도 있었다.

와조는 본질적으로 지방 영주 세력들의 연합체로, 각 영주가 이끄는 지역은 사실상 국가 내 국가였고 일정한 외교적 자율성마저 누렸다. 극단적인 경우, 영주는 국가 전체 방침에 반하는 결정을 하거나 다른 국가의 편을 들어 중앙을 공격할 수도 있었고, 아예 영지 전체가 타국으로 흡수되는 것까지도 가능했다. 와조의 최고 지도자 '아룽 마토아'(arung matoa)는 와조의 중앙 정치 기구 중 하나인 40인 귀족 평의회(Arung Patampulu)를 이루는 40명의 대귀족들 간 합의로 선출되었으며 이에 따라 와조는 선거군주정 체제였다. 이는 세습 군주를 중심으로 정치 권력이 상대적으로 중앙집권화되어 있던 마카사르인 국가 고와 술탄국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와조계 부기스 사료에서는 마카사르 지역의 굴욕적인 정치 체제에 비해 합의에 기반한 귀족들의 수평적 통치가 이루어지는 와조인들의 자유에 대한 자부심이 종종 드러난다. 실제로 아룽 마토아는 지역의 와조-부기스 관습법에 따라 정의로운 국정 운영을 해야 하는 '귀족들의 대표자', 정확히는 40인 귀족 평의회의 일원이자 그 수장에 불과했으며,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아룽 마토아는 귀족들의 합의하에 해임될 수도 있었다. 와조의 연대기에 따르면 17세기의 아룽 마토아 사말레와(La Samaléwa To Appakiung, 재임 1616~1621)는 독단적 전횡을 벌여 귀족들에 의해 해임되었다. 한편, 귀족들 간 의견이 모이지 못해 아룽 마토아 선출이 합의되지 않으면 아룽 마토아 직위는 자연스럽게 공석으로 남았다.

이런 선거군주정 체제는 그 자체로는 안정적이었지만, 18세기 중반 국내외의 급변하는 정치 상황에 대응하여 와조가 갈팡질팡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740년대 와조에서는 내부 반목으로 내전 등 정치적 위기가 생겼고, 1740년대 아룽 마토아였던 마두클릉은 와조 내부에서 발발한 이반을 가라앉히는 과정에서 독단적인 행보를 펼쳐 인기를 잃었다. 결국 마두클릉은 1754년 사임하고 말았다. 이후 와조 정치는 18세기 후반 내내 계속 불안정했고, 1770년부터 1795년 사이에는 아룽 마토아조차 공석이었다. 이렇게 내부 문제로 지리멸렬해진 와조 세력은 일사불란하게 외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할을 할 수 없었다.[11]

4.1.1.5. 네덜란드의 정복[편집]

나폴레옹 전쟁으로 네덜란드는 19세기 초 술라웨시에서 일시적으로 철수하였다. 1824년 네덜란드 정부의 판데르카펠런(G. A. Baron van der Capellen) 총독이 붕아야 조약을 갱신하려고 남술라웨시를 방문하였다. 고와 및 다른 부기스 국가들은 붕아야 조약 갱신을 받아들였으나, 네덜란드의 철수로 붕아야 조약의 효력은 이미 사라졌다고 간주하였던 보네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카펠런이 바타비아로 돌아간 후 보네의 군주 술타나 라지투딘(Sultanah Rajituddin, 재위 1823–1835)은 부기스인들을 규합하여 네덜란드 지배하에 있는 남술라웨시 지역들을 공격하여 제1차 보네 전쟁이 벌어졌다. 1825년, 이번에는 고와가 네덜란드와 연합하여 보네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네덜란드는 잠시 디파나가라 전쟁(1825–1830)으로 군대를 자바로 물렸지만, 결국 보네도 결과적으로 1838년 붕아야 조약의 갱신을 받아들여야 했다. 1859–1860년에도 보네 지역에서 반네덜란드 항쟁이 벌어졌지만(제2차 보네 전쟁) 네덜란드군은 보네를 다시 한 번 힘으로 굴복시키고, 공식적으로 보네를 네덜란드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마침내 1905년 남술라웨시를 정벌하여 고와 및 옛 부기스 삼각 동맹국(보네, 와조, 소펭) 모두를 확실하게 복속시켰다(남술라웨시 원정Zuid-Celebes Expeditie). 이때 네덜란드군과 강경하게 대립한 것은 고와와 보네 정도였고, 와조와 소펭은 상대적으로 순순히 네덜란드에 굴복했다. 이로 인해 남술라웨시의 모든 토착 국가는 공식적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네덜란드 산하로 떨어졌다.

1911년 고와 지역은 술탄에 의해 간접통치되는 지역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통합되었다. 1945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시작되면서 고와 술탄국은 해체되고 비세습 통치가 이루어지는 고와현(Kapubaten Gowa)이 설치되었다. 보네 술탄국은 이보다 약간 늦은 1951년 마지막 군주가 퇴위하고 인도네시아에 편입됨으로써 해체되고 보네현(Kabupaten Bone)이 되었다. 와조의 마지막 아룽 마토아도 1949년 사임하였지만 와조는 조금 더 자치를 유지하였다가 1957년 와조현(Kabupaten Wajo)이 되었다.

4.1.2. 발라니파 왕국[편집]


서술라웨시의 만다르인들은 남부와 서부 고산 지대에 거주하던 토라자인들과 가까운 민족이다. 이들은 서술라웨시 지역에서 16세기에 해안 7왕국 연맹(Pitu Babana Binanga)과 내륙 7왕국 연맹(Pitu Ulunna Salu)이라는 두 개의 느슨한 소왕국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해안 연맹을 대표하는 유력 국가는 발라니파(Balanipa) 왕국이었으며, 내륙 연맹을 이끄는 국가는 란테불라한(Rantebulahan) 왕국이었다. 기록이 많지 않은 지역이라 정확한 시점을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16세기에 발라니파 왕국의 제2대 왕 토메파융(Tomepayung)은 란테불라한 왕국의 론동 다하타(Londong Dahata) 왕과 루요발라니파(Luyo Balanipa)에서 만나 두 연맹을 하나로 통합하는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서술라웨시의 만다르인 지역은 느슨하게나마 발라니파 왕국(또는 만다르 왕국)으로 하나로 통일되었고(기존 연맹 내 왕국들은 체제를 대체로 그대로 유지했다), 이후 토메파융 시대에 발라니파를 구심점으로 하는 만다르인들은 중부술라웨시 지역으로 북진해 만다르인들의 영역을 넓히기도 했다.

발라니파 왕국의 4대 왕 다에타(Daetta)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6대 왕 토디보세앙(Todiboseang)은 영토를 확장하는 데 의욕을 보였는데, 인접한 남술라웨시 서북부의 부기스계 소왕국 연맹체 아자타파릉(Ajatappareng)과 전쟁을 벌여 아자타파릉 연맹에 속한 사위토(Sawitto) 왕국 등의 영토를 빼앗았다. 그러나 발라니파가 아자타파릉 전체를 굴복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토디보세앙은 협정을 맺어 전쟁을 끝내고 아자타파릉과의 경계를 획정했다.

발라니파 왕국은 1660년대 후반에 남술라웨시에서 고와-와조 연합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보네 연합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마카사르 전쟁에 고와의 편을 들어 참전했지만, 고와와 함께 패전해 동인도 회사의 영향력을 일정 부분 받아들이며 약화되었다.

그래도 남술라웨시 지역의 여러 국가들처럼 네덜란드가 발라니파를 직접 통제하기는 불가능했다. 발라니파는 남술라웨시 저지대 국가들에 비해 세력이 약소해 이후 네덜란드 세력을 유의미하게 위협하지는 못했지만, 발라니파를 비롯한 서술라웨시 지역이 완전히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 체제에 통합된 것은 1905년에 이르러서였다.

4.1.3. 방가이 왕국[편집]


중부술라웨시 지역 가운데 방가이 제도(행정 구역상 방가이제도현Kabupaten Banggai Kepulauan 및 방가이라웃현Kabupaten Banggai Laut)와 인근의 동부로 돌출한 반도(술라웨시 동부 반도)에 속하는 지역인 방가이현(Kabupaten Banggai)은 일찍이 14세기 초부터 《나가라크르타가마》 등 자바 문헌에 븡가위(Benggawi)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일부 중국 문헌에 모호하게나마 등장하는 곳이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 지역에는 여러 군소 왕국이 있었는데, 16세기에 트르나테 술탄국의 술탄 바불라(Sultan Babullah, 재위 1570–1583)가 팽창 정책을 펼쳐 이 지역의 네 왕국을 공격해 병합하고 트르나테의 영토로 만들었다. 트르나테 술탄은 자바인 장군 아디 초크로(Adi Cokro)를 보내 방가이 지역의 통치를 맡겼으며, 아디 초크로는 점령 지역에서 출발하여 술라웨시 동부 반도 전체로 트르나테의 세력을 확장하였다. 아디 초크로를 이어 방가이 지역(술라웨시 동부 반도와 방가이 제도)을 통치하게 된 아디 초크로의 아들 아부 카심(Abu Kasim, 방가이 국왕 재위 1600–1625, '만다파르'Mandapar라고도 불림)은 방가이 지역에 방가이 왕국(Kerajaan Banggai)을 세웠다. 17세기 후반에 방가이 왕국은 지역의 유력한 트르나테 술탄국과 고와 술탄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다가, 고와 술탄국이 네덜란드와의 전쟁으로 약화되자 트르나테의 종주권을 인정하여 트르나테에 공물을 바치고 트르나테가 방가이 국왕을 임명하는 반독립적 종속 상태가 되었다.

방가이 왕국은 술라웨시 동부와 동남부의 인접 세력, 특히 동남부 부톤섬의 부톤 술탄국 등과 종종 작은 전쟁을 벌였다. 워낙 인구가 적고 경제적으로도 중요도가 낮은 지역이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이 지역에 18세기까지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말에 트르나테 술탄국이 네덜란드의 종주권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므로 원칙적으로 방가이 왕국도 네덜란드 영향권 하에 있었으며, 1907년 트르나테 술탄국이 공식적으로 네덜란드에 방가이 지역을 할양하여 방가이 왕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관할이 되었다. 20세기 전반에도 방가이 왕가는 유지되었고 어느 정도 권리를 가졌으나,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수립된 뒤 1950년대에 방가이 왕국의 군주는 방가이 지역의 통치에 관한 모든 법적 권리를 잃어버렸고 이후에는 명목상의 방가이 왕가만이 존속하게 되었다.

4.1.4. 미나하사 반도[편집]


미나하사 반도 서부 고론탈로 지역의 전승에 따르면 고론탈로 지역에 수와와 왕국(Kerajaan Suwawa)이 8세기부터 있었다고도 하지만 자바, 수마트라, 보르네오 지역의 비문처럼 확실한 증거가 없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고론탈로 지역에는 유럽인 도래 전후에 적어도 이슬람 세력 고론탈로 술탄국(14세기 말?–1878)을 비롯하여 림보토(Limboto), 수와와, 아팅골라(Atinggola), 볼랑오(Bolango), 보알레모(Boalemo)라는 6개 왕국이 있었지만, 17세기 이전 문헌이 거의 없어 이들의 초기 역사는 구술사에 의존해야 하는 형편이다.[12]

미나하사 반도의 역사는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초에 포르투갈스페인 세력이 진입을 시도할 때에야 비로소, 미나하사 반도 동부 미나하사 지역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기 시작하게 된다. 16세기 중반과 후반 시점에 이 지역은 트르나테 술탄국의 영향권에 있었으나, 포르투갈과 스페인 세력이 이 지역에 개입하고 세력을 확장하며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면서 미나하사인(미나하사 반도 동부)의 반발을 억누르려고 시도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스페인 세력이 우세하였다.

오늘날 미나하사 반도의 중심 도시인 동부의 마나도(Manado)와 인근 지역에는 인도네시아 군도 전체에서도 매우 이른 16세기부터 유럽계 혼혈(주로 스페인계 메스티소) 공동체가 존재하였는데, 1630년 스페인에 의해 마나도의 왕으로 임명된 문투운투(Muntu-Untu, 아명 마이날로 사라니Mainalo Sarani) 또한 혈통의 1/4이 스페인계인 혼혈로, 세례를 받은 가톨릭교도였다. 마나도 지역에는 16세기부터 도시 또는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오늘날과 같은 '마나도'라는 이름은 공식적으로 1623년 7월 14일부터 스페인인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마나도는 17세기에 스페인 치하에서 미나하사 지역(미나하사 반도 동부)에서 재배된 커피를 수출하는 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다. 스페인 세력은 17세기 중반 포르투갈에 35만 두카트에 미나하사 지역에 대한 권리를 매각했다.

문투운투 외에도 스페인 혹은 포르투갈 세력의 영향권하에서 보호받은 미나하사 및 인접 지역 지도자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이베리아식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지역의 마나도 왕국(Kerajaan Manado)이나 시아우 왕국(Kerajaan Siau)[13]은 인도네시아 지역 전통 왕국 가운데 보기 드문 기독교 왕국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선교를 중시하지 않고 토착민과의 협상에 보다 능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세력이 포르투갈과 스페인 세력을 지역에서 밀어내었다. 미나하사 반도 지역에서는 1677년까지 포르투갈과 스페인 세력이 축출되었고, 167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말루쿠 총독 로베르튀스 팟브뤼허(Robertus Padtbrugge)가 마나도를 방문하여 지역의 미나하사인 지도자들과 우호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미나하사 지역 사회의 존재와 미나하사인의 권리를 인정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미나하사 연맹체 일파를 지원하여 이들이 17세기부터 타 부족을 물리치고 지역을 통합하는 데 도움을 주고, 그 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간접 통치를 수행했다. 18세기에도 이러한 사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네덜란드의 직접 통치는 마나도 및 인근 지역에 국한되었다. 미나하사인과 네덜란드 세력의 관계가 항상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며, 네덜란드 세력은 1807년과 1809년 톤다노(Tondano) 지역에서 미나하사인들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마나도는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잠시 영국 세력에 1810년부터 몇 년간 점령당했다가 네덜란드 치하로 되돌아왔다. 점차 네덜란드의 통제는 강해져 1870년대부터는 미나하사 지역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통합되었다.

미나하사 반도 서부의 고론탈로 지역도 19세기 이래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흡수되었는데, 고론탈로 지역에 존재하던 5개 왕국은 1824년부터 네덜란드 통감이 주재하는 네덜란드의 보호국이 되었고 19세기 말부터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행정 체계에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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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근현대[편집]


남술라웨시 원정(1905)으로 1905년까지 술라웨시 주요 지역 전체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완전히 통합되어 식민 지배 체제가 사실상 완성되었다. 식민 치하에서는 마카사르마나도를 중심으로 근대적 제도와 도로, 병원, 학교 등 근대적 기반 시설이 도입되었다. 마나도는 기독교도 인구가 많고 유럽화된 곳으로 식민 정부는 마나도를 암본과 함께 토착민의 동화가 특히 잘 이루어진 곳으로 평가했다. 마카사르는 동인도 동부(술라웨시, 소순다 열도, 말루쿠 제도, 서뉴기니) 최대의 도시이자, 자바나 수마트라의 대도시에 견줄 만한 동부 유일의 대도시로 마나도와 함께 근대 술라웨시를 대표했다. 이 시기 마카사르에서 네덜란드식 교육을 받고 사범학교를 졸업한 토착민 작곡가 와게 루돌프 수프라트만(Wage Rudolf Supratman)은 1920년 마카사르에서 동인도 최초의 재즈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고, 1924년 인도네시아 국가 위대한 인도네시아를 작곡 및 작사했다.

태평양 전쟁에서는 일본 제국이 마나도 전투(1942년 1월 11~12일), 큰다리 전투(1942년 1월 24일), 자바 해전 등에서 승리하고 술라웨시 전역을 점령했다. 이 가운데 마나도 전투는 일본 낙하산 부대가 처음 실전 투입된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이 패전하고 직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때 남술라웨시에서는 1945~1946년 독립파와 네덜란드군 간 전투가 벌어졌다. 열세였던 독립군은 초기 국면 이후로는 게릴라전에 의존했고, 여기에 골머리를 앓던 네덜란드군은 이를 소탕하기 위해 라이몬트 베스테를링(Raymond Westerling)이 이끄는 특공대를 투입해 게릴라로 지목한 자를 잔혹하게 즉결 처형하면서 1,500명 이상의 인도네시아인을 사살하며 독립군을 진압했다.

식민 정부는 독립군을 진압하면서 동시에 원활한 통제를 위해 술라웨시를 포함하는 동인도 동부 지역(서뉴기니 제외)을 1946년 12월 마카사르를 수도로 하는 동인도네시아 자치국으로 독립시켰다. 동인도네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독립전쟁이 끝나고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이 수립되자 합중공화국의 구성국으로 가입해 실질적으로 독립했다. 합중공화국 체제의 동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의 통합을 지지하는 통합파와 연방 체제 유지를 희망하는 자치파가 의견 대립을 보였다. 1950년 2월 동인도네시아 총선에서 통합파가 승리했고, 자치파는 반발하며 동인도네시아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술라웨시에서는 특히 1950년 4월 자치파의 마카사르 반란이 일어났지만 오래 못 가 군사적으로 진압되었다. 이후 1950년 8월 17일 동인도네시아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 통합되어 술라웨시는 단일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각 주로 나뉘어 오늘날에 이른다.


4.2.1. 보편투쟁헌장 반란[편집]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술라웨시와 말루쿠에서는 알렉스 카윌라랑(Alex Kawilarang) 대령(앞서 공화국 편에서 마카사르 반란을 진압한 인물) 등을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치의 자바 중심주의에 반발하는 지역주의적 보편투쟁헌장(Permesta, 프르메스타, 뻐르메스타) 운동이 벌어졌다. 이 운동의 참가자들은 자바의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정치권이 지역의 개발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술라웨시 등 동부 지역을 자원 공급처 정도로만 취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들은 지방 자치의 확대와 중앙 예산을 보다 많이 지역 개발에 투입할 것을 요구했다. 1957년 3월 운동이 시작될 때 중심지는 남술라웨시 마카사르였지만, 1957년 6월 남술라웨시인들과 북술라웨시인들 사이 내부 대립이 벌어져 운동의 중심지는 북술라웨시 마나도로 옮겨 갔다.

1957년 내내 Permesta 운동과 자카르타 정부 사이에 꾸준한 협상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Permesta 운동은 1958년 2월부터 같은 시기에 지역주의적, 반 자바 중심주의적 반란을 일으킨 수마트라의 인도네시아 공화국 혁명정부(PRRI)와 연대했다. 이렇게 되자 중앙정부는 Permesta에 평화적으로 대응하기를 포기하고, 군사를 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저항은 거셌지만 동원 규모의 차이는 절대적이었고, 1958년 6월 말에 마나도가 정부군에 떨어졌다. 이어 7월에 북술라웨시 제2의 도시 톤다노가, 8월에는 토모혼이 함락되었다. 반정부 게릴라전이 그 뒤에도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결국 1961년까지 잔존 반군 세력이 협상을 거쳐 정부군에 모두 항복해 반란은 진압되었다.

Permesta 반란 가담자에 대한 대통령 수카르노의 처리는 매우 유화적이어서, 1961년 반군 항복 후 알렉스 카윌라랑 등 많은 Permesta 반군은 그대로 1961년 6월 22일 대통령령으로 처벌 없이 사면되어 민간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반란 전 특수부대(Kopassus)를 창설하는 등 인도네시아군에 혁혁한 공헌을 했던 알렉스 카윌라랑은 비록 정규군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재향군인회에서 잘 대접받으며 자카르타 경마 사업에 참여하는 등으로 여생을 보내다 1999년(사망 1년 전) 특수부대의 명예 장교로 복권되었다.


4.2.2. 포소 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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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4세기에 등장하였으나 본격적으로 강성해지고 술탄위를 칭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이다. 아체 술탄국처럼 종종 여성 군주가 등장하였는데, 역사에 기록된 군주 총 32명 중 6명이 여성이었다. 공식적으로 '술타나'라고 칭한 것은 그 가운데 세 명이다.[9] 적어도 일부는 부기스계인 5개 소왕국들(시덴릉Sidénreng, 수파Suppa, 라팡Rappang, 사위토Sawitto, 알리타Alitta)의 느슨한 연합체였다.[10] 10대 군주인 텐리투푸(We Tenrituppu, 재위 1602~1611)가 개인적으로는 1611년에 보네 군주 중 최초로 이슬람으로 개종했지만, 군주가 열의를 가지고 정식으로, 또 국가적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12대 텐리팔레(La Tenripale, 재위 1611~1631)였다. 보네에서 '술탄' 혹은 '술타나' 칭호를 처음 쓴 것도 술탄 압둘라(Sultan Abdullah)를 칭한 텐리팔레로, 이 때문에 텐리투푸(여성)는 무슬림 군주이기는 했지만 '술타나' 칭호는 없다.[11] 유럽으로 눈을 돌리면, 이는 남술라웨시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네덜란드 공화국이 18세기 전반에 제2차 무총독 시대(1702~1747)를 겪으며 국제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많이 상실했던 것과도 비교할 수 있다.[12] (Kompas, acc. Dec 14, 2021)[13] 미나하사 반도 동북쪽의 상이흐(Sangihe) 제도에 거주한 상이르인(Orang Sangir) 왕국. 상이르인들은 미나하사인들과 다른 민족 정체성이 있다.


중부술라웨시 포소(Kabupaten Poso) 지역(위 지도 붉은색 영역)에서 1998년 12월부터 2001년 12월까지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 유혈 분쟁이 발생해 1천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만 명의 지역 내 난민이 발생했다.

분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은 1998년 말 무슬림 소녀가 기독교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었다. 이후 격분한 일부 무슬림들이 기독교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기독교도들도 이에 반격하면서 사태는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러나 분쟁의 근본적 원인은 보다 복잡하다. 원래 이 지역은 고지대에 거주하는 기독교도 토착민들이 인구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지역 토착 무슬림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다수는 아니었다),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에서 낮은 지역으로 이주하기를 장려하는 정부 정책이 펼쳐지며 저지대 마을과 해안 지역에 꾸준히 타지에서 온 무슬림 이주민이 유입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남술라웨시 지역에서 무슬림 부기스인 등이 술라웨시 내 각지로 이주하는 흐름이 있어 왔다. 이로 인해 1990년대에는 인구 구성이 역전되어 지역에서 무슬림이 기독교도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그런데 1998년 당시 인도네시아 사회는 수하르토 퇴진 전후 정치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로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어 주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특히 포소 지역에서는 경제적, 정치적 이권이 점점 무슬림 이주민에게 넘어가고 있어 지역의 토착 기독교도가 반발하고 있던 차였다.

초기 분쟁은 무슬림 부기스인들과 개신교도 파모나(Pamona)인들 사이에 벌어졌지만, 분쟁이 확대되며 종교를 경계로 지역의 다양한 무슬림, 기독교도 종족 집단이 서로를 공격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천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며 3년간 이어진 분쟁은 정치인 유숩 칼라(Jusuf Kalla)의 중재로 2001년 말 두 종교 집단 사이에 남술라웨시 말리노(Malino)에서 평화 합의가 이루어지고 이어 평화를 위한 '말리노 선언'이 채택되어 종결 수순을 밟았다.

그러나 2001년 말 이후에도 2000년대 포소 지역에서는 이따금 소규모 종교 분쟁이 벌어졌다. 2010년대에는 ISIL과 연계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중부술라웨시에서 일으킨 소요에 포소 지역이 휘말리기도 했다. ISIL에 충성을 맹세한 소규모 극단주의 단체 동인도네시아 무자히딘(Mujahidin Indonesia Timur)이 종교 간 갈등이 첨예한 포소 지역을 본거지로 삼아 활동했던 것이다. 이 테러 단체는 2016년부터 개시된 인도네시아군의 강력한 진압 작전인 마다고 라야(Madago Raya) 작전으로 2022년 9월까지 51명이 사살되고 19명이 항복하거나 체포되어 완전히 소멸했다.

5. 정치[편집]


남부와 북부의 정치색이 확연히 갈린다. 대체로 남술라웨시는 상대적으로 보수적, 북술라웨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다. 동남술라웨시는 남술라웨시와 비슷하며 서술라웨시와 중부술라웨시는 북술라웨시와 비슷하다. 고론탈로는 부동층이 많다. 단 절대적인 것은 아니어서, 2019년 인도네시아 대선 결과를 보면 마카사르 등 남술라웨시 지역은 대체로 프라보워 수비안토를, 마나도 등 북술라웨시 지역은 대체로 조코 위도도를 지지했지만, 남술라웨시 동부 지역은 조코위가 우세했고 북술라웨시 남부 지역은 프라보워가 우세했다.

북술라웨시주는 기독교인이 68%로 많아 분리독립을 주장하기도 한다. 분리 독립 국가 명칭은 Minahasa.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가 힘으로 분리독립 움직임을 누르고 있고 북술라웨시 내부에서도 국명 생소한 신생 국가로 독립해서 살 바엔 차라리 인도네시아 국민으로 사는 게 더 낫다며 인도네시아의 통치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아 인도네시아 정부군과 전쟁 상태까지 간 수마트라 북부 아체서파푸아에 비해 내부 사정은 평화로운 편이다.

역대 대선 결과는 다음과 같다.
  • 2004년 대선
    •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민주당) 우세: 남술라웨시(64%), 중부술라웨시(44%), 동남술라웨시(42%)
    • 위란토(골카르) 우세: 북술라웨시(36%), 고론탈로(77%)
  • 2009년 대선
    •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민주당) 우세: 북술라웨시(55%), 중부술라웨시(51%), 서술라웨시(51%)
    • 유숩 칼라(골카르) 우세: 남술라웨시(64%), 고론탈로(49%), 동남술라웨시(46%)
  • 2014년 대선
  • 2019년 대선
    • 조코 위도도(민주항쟁당) 우세: 북술라웨시(77%), 서술라웨시(64%), 중부술라웨시(56%), 고론탈로(52%)
    • 프라보워 수비안토(위대한 인도네시아 운동당) 우세: 남술라웨시(57%), 동남술라웨시(60%)

6. 경제[편집]


남술라웨시의 마카사르는 술라웨시 경제의 명실상부한 중심 도시로, 선박들이 활발히 왕래하는 인도네시아의 물류 중심 중 하나다. 마카사르는 어느 정도 국내에서 경쟁력 있는 제조업 기반을 갖춘 술라웨시 유일의 도시이기도 하다. 마카사르의 제조업 업종은 식품, 의류, 목재 가공업, 제지업, 화공업, 금속 가공업 등이 있다. 섬 내 다른 도시인 마나도나 고론탈로 등지에도 약간의 공장이 있지만 마카사르 수준으로 제조업이 발달해 있지는 않다.

남술라웨시는 자연 환경 덕에 술라웨시에서 가장 탄탄한 농업 기반을 갖춘 곳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은 마카사르 등을 거쳐 인도네시아 각지와 필리핀, 파푸아뉴기니, 말레이시아 등 국외로 수출되고 있다. 쌀 외에도 남술라웨시에서는 카사바, 고구마 등 식용 작물과 커피, 후추, 바닐라, 카카오, 코코넛 등 다양한 특용 작물을 생산한다.

북술라웨시는 17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부터 시작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커피 산지였다. 오늘날에는 어업, 농업, 식품 산업, 관광업 등을 중심으로 개발되고 있다. 고론탈로에서는 코코넛, , 카사바, 옥수수 등이 재배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필리핀과 함께 세계 최대의 니켈 생산국이며, 2018년부터는 시설을 대폭 확충해 생산량 세계 1위가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니켈 최다 생산지는 술라웨시와 말루쿠 제도(특히 할마헤라섬)이며, 술라웨시의 중부술라웨시, 남술라웨시, 동남술라웨시 3개 주에 많은 니켈 광산이 있다. 술라웨시에서 석유는 거의 나지 않지만, 니켈 외에도 , 마그네슘 등 다양한 자원이 채굴되고 있다. 북술라웨시에서는 천연가스가 약간 채굴되기도 한다.

섬 주민들의 생업으로 농업과 광업 외에 수산업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남술라웨시 지역에는 전통 시대부터 임업이 발달하였는데, 마카사르 흑단의 명성은 식민지 시대부터 유럽에도 널리 알려졌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남술라웨시는 식민지 시대 이전 16~17세기에 조선업이 특히 발달한 곳이었으며, 뛰어난 조선 기술을 보유한 이곳으로 자바와 보르네오의 전통 국가들이 군선과 상선을 발주하기도 했다.

7. 문화[편집]



7.1. 관광[편집]


자연 관광 자원이 풍부하지만 술라웨시의 관광업이 아직 크게 발달하지는 않았다. 술라웨시의 관광지로는 남술라웨시와 북술라웨시의 도시(마카사르, 마나도) 및 인근의 자연 휴양지, 동남술라웨시의 와카토비(Wakatobi) 국립공원, 고론탈로시 인근 보가니 나니 와르타보네(Bogani Nani Wartabone) 국립공원, 북술라웨시의 탕코코(Tangkoko) 국립공원, 부나켄(Bunaken)섬, 톤다노(Tondano) 호수, 그리고 남술라웨시와 서술라웨시의 토라자인이 거주하는 고산 지대 등이 있다.
현재 한국에서 가는 직항은 없으며 가려면 국제선편으로는 싱가포르나 쿠알라룸푸르에서 마카사르나 마나도로 가거나 아니면 자카르타 혹은 발리에서 국내선편으로 환승해서 술라웨시의 다른 도시들로 갈 수 있다.

7.2. 교육[편집]


중심 도시 마카사르는 동인도네시아 지역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 인프라를 갖춘 지역으로, 동인도네시아 각지에서 학생들이 유학을 오는 곳이다. 마카사르 소재 하사누딘 대학교는 나름대로 전국적 명문으로 평가받는 드문 자바 외 지역의 대학이며, 사범대 위주의 마카사르 국립대학교(UNM)나 이슬람 중심의 종합대학 알라우딘 국립이슬람대학교(UIN Makassar) 등도 마카사르에 소재한 지역 명문 국립대다. 중등교육 수준에서도 마카사르를 포함한 남술라웨시 지역은 주별 통계를 내면 각종 전국 시험에서 술라웨시에서는 가장 준수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으나, 대체로 전국 평균에는 근소하게 미달한다.

마카사르 외에는 북술라웨시주의 중심 도시 마나도와 고론탈로주의 중심 도시 고론탈로에 나름대로 중등교육, 고등교육 인프라가 있다. 그러나 마카사르 도시권, 마나도, 고론탈로를 제외하면, 술라웨시의 초등교육 및 중등교육 인프라는 전반적으로 심각하게 낙후되어 있다. 특히 서술라웨시는 소순다 열도의 서누사틍가라, 말루쿠 제도의 말루쿠주 등과 함께 경제, 교육 등 종합적 인프라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꼽힌다.

7.3. 요리[편집]


술라웨시섬의 양대 중심지인 마카사르와 마나도는 각자 특색 있는 요리 문화를 발달시켜 왔다. 전국적으로는 마카사르 요리보다 마나도 요리가 좀 더 유명하다.

마나도 요리(보다 넓게는 미나하사 요리)에서는 일찍부터 지역이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유럽 요리의 요소가 토착 전통에 흡수되었다. 매운 맛과 과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향신료, 다채로운 해산물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미나하사 지역에 기독교도가 많은 관계로 인도네시아 요리에서 드문 돼지고기 요리도 있다.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대중화된 파당 요리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마니아층이 있어 마나도 요리를 취급하는 전문 식당은 인도네시아 각지에서 성업 중이다.

대표적인 마나도 요리로는 티누투안(Tinutuan, 쌀, 호박, 고구마와 야채를 넣고 다양한 토핑을 올린 죽), 브레네본(Brenebon, 강낭콩과 향신료, 그리고 돼지나 소의 발이나 아랫다리 즉 족발을 넣은 국), 차칼랑 푸푸(Cakalang fufu, 훈제 가다랑어 절임), 티노랑삭(Tinorangsak, 돼지고기나 다른 고기를 저며서 향신료와 함께 대나무 대롱에 넣고 불에 구운 것), 마나도식 바나나 튀김(피상 고렝), 판다(Panda, 가다랑어와 향신료를 넣은 일종의 만두), 클라페르타르트(Klappertaart, 코코넛 케이크) 등이 있다.

마카사르 요리로는 초토 마카사르(Coto Makassar, 마카사르식 소고기 스튜), 솝 사우다라(Sop saudara, 마카사르식 소고기/물소고기 수프), 마카사르식 아얌 고렝(닭튀김) 등이 유명하다.

8. 교통[편집]



8.1. 도로[편집]


기본적으로 술라웨시의 주요 도시는 모두 자동차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를 이용하면 서남쪽 마카사르에서 동북쪽 마나도까지 자동차로 이동 가능하지만, 물류 목적이 아니라 여행 목적으로는 특별히 로드 트립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이동하는 것이 그다지 권장되지 않는다. 술라웨시 자체가 한반도에 비견할 정도로 큰 섬이라 마카사르에서 마나도까지 예상 소요 시간을 계산해 보면 자동차로 40시간 정도(1,700~1,800km)가 걸린다.

술라웨시 중앙 고산 지대는 개발이 힘든 관계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이를 피해 주로 해안을 따라 주요 도로가 부설되어 있다. 점점 그 외 많은 지역에도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가 생겨나고 있으며, 최근에 부설된 도로들은 상태가 좋은 편이다.

8.2. 항공[편집]


도시 내, 주 내 이동이 아닌 주 단위를 넘는 이동은 주로 전통 시대에는 해운이 담당했고, 오늘날에는 항공이 담당한다. 마카사르에서 마나도까지 페리를 타고 이동하면 약 3일, 비행기로는 약 2시간이 걸리는데, 비행기 티켓 값은 80만~120만 루피아(7만~10만 원) 정도라 뱃삯과 별로 차이 안 나는 수준으로 저렴하다. 같은 경로를 자동차로 이동한다면 기름값만 비행기 티켓 값 수준으로 들어갈 수 있고, 덤으로 도중에 수리 등을 하기 어려운 구간이 나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술라웨시 내에는 각 주의 주도 등 주요 도시는 물론 그 외 여러 지역에도 각지에 공항이 있어 비행기 이동이 용이한 편이다.

8.3. 철도[편집]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철도 인프라는 항공, 도로 인프라에 비하면 상당히 부실한 편으로, 자바를 제외하면 잘 개발되어 있지 않다. 수마트라만 해도 개발되지 않은 구간이 많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술라웨시, 칼리만탄, 발리 등지에 철도를 도입하는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 1923년부터 1930년까지 남술라웨시 마카사르의 파사르부퉁(Pasarbutung) 역에서 출발해 남쪽에 있는 타칼라르(Takalar)까지 운행하는 47km, 20개 역 규모의 철도 노선이 운영된 적이 있다. 술라웨시 최초이자 유일의 철도였던 이 노선은 1930년 세계 대공황으로 운행을 중단하였다.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 20세기 말까지 술라웨시에는 철도가 부설되지 않았고, 1920년대에 운영되었던 폐선된 기차역이 가끔 관광객을 맞을 뿐이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인도네시아 정부는 철도 인프라 확충 계획의 일환으로 술라웨시에서도 철도 운영을 재개할 계획을 입안했다. "마카사르에서 마나도까지" 2,000km 길이의 철도로 연결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세부 계획을 세운 대규모의 '트란스술라웨시 철도'(Jalur kereta api Trans-Sulawesi)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것이다.

트란스술라웨시 철도 프로젝트에서 우선적으로 부설될 노선은 다음과 같다.
  • 마카사르~파레파레(Parepare): 145km, 23개 역. 2015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공사가 조금 연기되었으나 2021년 개장 검토, 일부 구간 시험 운행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2022년 10월 29일부터 절반 정도인 66km, 7개 역 구간이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저속 시범 운행을 시작했다. 지역 정부 등은 철도 신규 개장으로 지역의 관광업이 활성화될 것을 기대하며 환영하고 있다.[14]
  • 마나도~비퉁: 48km 길이로 계획. 2021년 현재 공사 연기 중.
  • 비퉁~고론탈로: 340km 길이로 계획. 2021년 현재 공사 연기 중.

9. 창작물 속 술라웨시[편집]


중국 소설 및 영화 '유랑지구'에서 주요지역으로 등장한다.

10. 기타[편집]


바비루사, 아노아, 검은짧은꼬리원숭이, 토기안원숭이, 핵원숭이, 요다안경원숭이, 오어네이트롤리킷 앵무새, 말레오, 술라웨시숲거북, 쿠스쿠스[15] 같은 이 섬에서만 서식하는 희귀한 동물들이 많아서 해외의 동물학자들이 이 섬에 가서 생태학 연구,조사를 하러 온다고 한다. [* 이 섬에서 활짝 웃고 있는 원숭이 짤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2018년 9월 28일 발생한 규모 7.5의 지진과 이에 따른 지진해일로 인해 수백명 이상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2021년 1월 15일 오전 3시 28분 술라웨시섬 마무주 남쪽 36km 지역에 규모 6.2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최소 67명이 사망했으며 6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항목 참조.

2022년 2월 8일 술라웨시 섬의 팔루강에서 6년간 타이어가 목에 끼인채로 있던 악어가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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