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탄 마흐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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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hmud1_in_robe_from_the_caliph.jpg
1002년에 바그다드의 칼리파가 술탄 칭호를 내리며 하사한 예복 (힐라)을 입어보는 마흐무드 (페르시아 세밀화)
یمین‌الدوله ابوالقاسم محمود بن سبکتگین [1]
출생
972년 11월 2일
출생지
호라산 중부 가즈나
즉위
998년
사망
1030년 4월 30일
사망지
수도 가즈나

1. 개요
2. 생애
2.1. 시대 배경
2.2. 호라산 전역
2.3. 즉위
2.4. 초기 원정들
2.5. 1-2차 인도 원정: 페샤와르 전투
2.6. 시스탄 정복
2.7. 3-5차 인도 원정: 물탄 정복
2.8. vs 카라한 칸국
2.9. 6차 인도 원정
2.10. vs 카라한/구르족
2.11. 7차 인도 원정: 힌두 샤히의 멸망
2.12. 카라한 내분 개입
2.13. 북부 이란 원정
2.14. 죽음
3. 평가



1. 개요[편집]


가즈니 왕조의 수도가 위치하였던 아프가니스탄의 국민 영웅 중 한 명이다. 무려 17차례나 북인도를 원정하여 후의 델리술탄왕조 등 인도의 이슬람화를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의 사학도들에게는 다른 술탄 마흐무드와 구분하기 위해 왕조 이름이자 수도의 이름을 붙인 가즈니의 마흐무드 (محمود غزنوی)를 익숙해 할 것이다.

이슬람 역사상 '술탄 마흐무드'라고 불린 군주는 이 문서가 다루는 마흐무드 외에도 여럿이다. 하지만 이슬람권에서 9세기 이후 정치적 실권이 칼리파에서 장군이나 군주 (아미르)[2]로 넘어간 것을 상징적[3]으로 보여주는 칭호인 '술탄'을 처음 받은 인물이므로 항목명이 원조 술탄 무함마드로 정해졌다.


2. 생애[편집]


마흐무드는 이슬람 력으로 361년에 해당하는 서기 971년 11월 2일에 호라산 중부에 위치한 도시 가즈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아직까지 조그만 공국에 불과하였던 가즈니 왕조의 군주 사부크티긴[4]이었고 모친은 자불리스탄의 불교도 아프간인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마흐무드는 카우사리 자한과 결혼하여 998년에 쌍둥이 아들을 얻었는데 각각 무함마드와 마수드로 이름 붙여주었고 그들은 마흐무드 사후 연이어 술탄이 된다.


2.1. 시대 배경[편집]


마흐무드의 젊은 시절부터 중앙아시아 정세는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불안정 하였지만 그래도 서아시아-중앙 아시아 전역의 패권을 쥐고 있던 이란계 제국 사만 왕조가 대규모 내전에 뒤이어 중앙 아시아의 유목 제국인 카라한 칸국의 침공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사만 왕조는 마치 쇠퇴기의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계 세력들[5]포에데라티[6]로 활용하면서 점차 게르만계 세력들에게 영역이 조금씩 잠식되었던 것처럼 튀르크계 군인들과 부족들을 산하로 복속시키고 전력으로 활용하면서 그들에게 영역이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980년대부터 사만 왕조의 지방 총독들이 중앙 정부와 반목하기 시작하였고, 와지르 (재상)가 발흐의 총독 파이크의 사주로 암살되고 수도 부하라가 990년에 파이크에게 포위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991년 말, 동쪽 페르가나타림 분지 일대에 위치하던 튀르크 국가 카라한 칸국이 지도자 부그라 칸의 지휘하에 사만 왕조의 심장인 트란스옥시아나 핵심부(키바-부하라-사마르칸트)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파죽지세로 진격하며 타슈켄트에서 사만 왕조의 아미르 누흐 2세가 보낸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누흐가 반란을 일으켰던 파이크를 사면한 후 사마르칸트로 보내 카라한 군대를 막게하였으나 파이크는 되려 카라한 군대에 투항하여 부하라로 진격, 사만 조의 수도에 무혈입성 하였다. (992년 5월) 부그라 칸은 누흐의 숙부 아브드 알 아지즈를 왕으로 옹립하고 사만 조를 카라한 칸국의 속국으로 삼았다. 한편, 누흐 2세는 남하하여 호라산 총독의 치소가 위치한 니샤푸르에 몸을 위탁하고자 하였으나 총독인 아부 알리에게 거절당하였다. 이때 누흐 2세에게 천운이 따랐으니, 바로 카라한 조의 수장 부그라 칸이 부하라에 머물던 중 병에 걸린 것이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누흐는 잔병을 이끌고 부하라를 향했고, 그 와중에 부그라 칸은 사마르칸트로 향하던 중 객사하였다.

누흐 2세가 부하라에 도착했을 때에는 대부분의 카라한 군대가 본국으로 퇴각했을 때였고 그는 큰 저항 없이 수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잠시나마 왕위에 있던 아지즈는 애꾸가 된 후 감금되었다. (992년 여름) 카라한 군대의 회군 이후 파이크는 홀로 다시 한번 부하라를 공격했지만 실패하였고 니샤푸르로 가 호라산 총독 아부 알리와 연합하였다. 둘은 과거의 원수였으나 사만 왕조를 결단내기 위해 과거사를 잊고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그들은 현재 아프가니스탄 중서부의 구르 일대에 있던 사만 조의 속국을 점령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누흐 2세는 명목 상이나마 자신의 신하로써 그 동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가즈니 왕조의 군주 사부크티긴과 호라즘 총독을 설득하여 반란 진압군을 편성하였다.


2.2. 호라산 전역[편집]


994년, 명목상으로나마 가즈니 조의 종주국이던 사만 왕조에 내분이 발생하였고 사만 조의 군주 누흐 2세는 당대 가즈니의 아미르이자 마흐무드의 아버지인 사부크티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를 승인한 사부크티긴은 차남 마흐무드와 정예병을 이끌고 누흐 2세의 진영에 참여하였다. 994년 여름, 반란의 지도자 파이크와 아부 알리는 호라산 대부분을 장악하고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그해 8월, 누흐 2세와 연합군은 발흐와 니샤푸르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에서 반군을 대파하였고 잔당은 카스피 해 연안인 골레스탄 지방의 도시 고르간까지 도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가즈니 왕조의 군대는 대활약 하였는데, 누흐 2세는 공로를 치하하고자 사부크티긴에게 나시르 앗 딘[7] 칭호를, 마흐무드에게는 사이프 웃 다울라[8] 칭호를 하사하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호라산 총독을 맡겼다.[9]

하지만 995년, 불사신 파이크와 아부 알리는 새로운 군대와 함께 돌아왔고 마흐무드가 호라산 총독으로서 지키던 니샤푸르를 점령하였다. 쫓겨난 마흐무드는 가즈나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곧 병력을 이끌고 온 아버지 사부크티긴과 합류하였다. 가즈니 왕조의 군대는 현재 마슈하드 인근 투스에서 파이크와 아부 알리의 군세를 격파, 호라산을 되찾았다. 패배 이후 파이크는 카라한 칸국으로 망명하였고 아부 알리는 누흐 2세의 용서를 받아 남 호레즘으로 보내져 감금되었다. 하지만 곧 북 호레즘이 남을 정복하자 아부 알리는 다시 누흐에게 보내졌고 이후 가즈니로 유배되었다. 사부크티긴은 아부 알리를 처형하여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끝냈다. (996년)

한편, 파이크는 카라한 조의 신임 칸인 나스르 칸에게 재차 부하라 원정을 떠날 것을 간청하였으나 나스르는 누흐 2세와 평화 협정을 맺어버렸고 동시에 파이크를 사마르칸트 총독에게 넘겨버렸다. 대인배 누흐 2세는 그를 재차 용서하였다. 사만 왕조는 오랜만에 평화를 되찾았으나 10여년에 가까운 대규모 내전은 사만 조의 쇠퇴해 오던 국력에 결정타가 되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영토 또한 카라한 칸국에게 타슈켄트 일대, 가즈니 왕조에게 호라산을 빼앗겼으며 호라즘 샤는 사실상 독립한 후였다. 사만 조의 실질적인 영토는 부하라에서 사마르칸트에 이르는 '강 사이의 땅'에 국한되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997년에 누흐 2세는 사망하였다. 그의 장남이 만수르 2세로 즉위하였으나 요절하였고 동생인 말리크 2세 때에 사만 조는 거의 멸망의 기로에 들어섰으며 이를 확실한 기회로 여긴 카라한 칸국의 나스르 칸이 본격적으로 사만 왕조를 침공하자 이스마일 문타시르가 최후의 불꽃을 태우고 완전히 멸망하였다.


2.3. 즉위[편집]


비슷한 시기인 997년, 8월 5일, 가즈니 왕조의 실질적인 건국자인 사부크티긴이 발흐에서 가즈니로 돌아오던 중 테르메즈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임종 시에 장남이었던 마흐무드를 제치고 차남 이스마일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고 한다.[10]당시 마흐무드는 호라산의 지배자로서 니샤푸르에 있었는데, 이스마일은 그를 매우 경계하였고 즉위하자마자 숙부인 보르구즈와 자신의 친동생 누르 알 딘에게 호라산 총독 직위를 넘기라는 칙령을 니샤푸르로 보내었다. 이복동생의 즉위와 갑작스러운 해고.. 명령에 반발한 마흐무드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였다. 마흐무드의 다른 동생인 아불 무자파르가 그의 진영에 합세한 것이 호재였다.

양측의 전투는 가즈나 인근에서 벌어졌다. (998년 3월) 전투는 길고 지지부진 하게 이어져 두 군대 모두 지쳐 갔는데, 이스마일 진영은 코끼리 부대가 있었고 마흐무드 측보다 수도 더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흐무드의 군대는 실전 경험은 그 열세를 극복하고 상대 진영을 와해시켜 놓는데 성공하였다. 형세가 불리해지자 이스마일 측의 코끼리들이 전선을 이탈하여 중앙부에 틈이 생겼고, 기회를 잡은 마흐무드가 소수의 기병과 돌격하여 천막에서 지휘 중이던 이스마일을 생포하였다. 주군이 생포되자 이스마일 측의 병사들도 전의를 잃고 항복하였다. 마흐무드는 자신의 손으로 이스마일로부터 직접 왕관을 낚아채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 놓는 것으로 대관식을 대신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마흐무드는 쌍둥이 아들을 얻으며 즉위의 기쁨을 만끽하였다. 한편, 패배 이후의 이스마일은 구즈간[11]의 한 탑에 유폐되어 여생을 보냈다.


2.4. 초기 원정들[편집]


성장하는 제국을 움켜쥔 마흐무드는 주변의 여러 적들과 상대해야 했다. 서쪽의 사파르 왕조와 북쪽의 사만 왕조카라한 칸국, 그리고 남쪽의 힌두 샤시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사만 왕조의 관료 출신인 아불 하산 알리 이스파라니를 와지르 (재상)으로 선임하고 대외 원정을 위한 자금 조달을 맡겼다. 마흐무드는 숨돌릴 틈도 없이 쓰러져 가는 사만 왕조를 공격하여 발흐, 헤라트, 메르브 등을 점령하였다. 동시에 카라한 칸국이 남진하며 사만 왕조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999년)

한편, 마흐무드가 동생과의 내전 및 사만 왕조 원정으로 바쁘던 틈에 사파르 왕조의 아미르 칼라프 이븐 아흐마드가 아들 타히르를 보내어 제국의 서부[12]를 침공하였다. 그들은 비록 격퇴되긴 했으나 세북티긴의 동생이자 마흐무드의 숙부인 부그라축을 전사시켰다. 이에 마흐무드는 재빨리 복귀하여 시스탄으로 진군하였고, 그렇게 빨리 돌아올 거라 예상하지 못하고 고원의 별장에 있던 칼라프를 포위하였다. 칼라프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마흐무드의 이름을 자신의 동전과 금요예배 (쿠트바)에서 언급하는 등의 조건으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991년에 부와이 왕조는 칼리파 알 타이를 폐위시키고 그의 사촌 알 카디르를 옹립하였다. 이에 사만 왕조와 그의 봉신이었던 사부크티긴은 알 타이의 정통성을 지지하며 신임 칼리파를 인정하지 않았다.[13] 하지만 999년에 마흐무드는 태도를 바꾸어 알 카디르에게 복종을 선언하였고, 강력한 지원군을 얻은 칼리파는 그에게 술탄 칭호를 하사하였다. 이전에 아바스 조의 칼리파 알 무타미드 (재위 870 ~ 892년)가 자신의 동생이자 실권자였던 알 무와파크에게 준 것이 처음이었으나 칼리파 가문 외에선 처음이었다. 따라서 마흐무드를 '첫 번째 술탄'으로 칭하기도 한다. 서기 1000년 혹은 1002년, 바그다드로부터 '성스러운 예복'이 도착하자 마흐무드가 이를 입어보는 그림이 문서 상단에 제시되어 있다.


2.5. 1-2차 인도 원정: 페샤와르 전투[편집]


이후 마흐무드는 현재 아프가니스탄 서남부의 보스트 (라쉬카르가)[14]칸다하르 일대를 평정하고 전자를 군사 기지화 하였다. 칸다하르 일대는 서쪽으로는 사파르 왕조를 견제할 수 있고 남쪽으로는 인도의 펀자브 평야로 나아갈 수 있는 교통로 상에 위치한 터라 마흐무드에게 유용하였다. 한편, 부왕의 원정을 따라다니며 인도의 풍요로움에 대해 익히 들어온 마흐무드는 북인도가 완전히 자신의 영토가 되기 전까진 매년 원정할 것이라 다짐하였다. 하지만 그가 '부유한 미지의 땅'으로 향하기 위해선 당시 펀자브 대부분을 다스리던 힌두 샤히 왕조를 넘어야 했다.

가즈니 제국은 세북티긴 시절부터 힌두 샤히의 마하라자 자야팔라[15]와 종종 충돌하고 있었다. 자야팔라는 세북티긴을 견제하여 가즈나를 침공하였으나 패배하였고 배상금 지불을 대가로 강화하였다. 하지만 배상금을 지불할 생각이 없던 자야팔라는 10만 대군을 모아 재차 진군하였다. 그에 맞선 세북티긴은 겨우 수천의 기병만을 지니고 있었는데, 5백 단위로 나누어 적진의 한 부분을 지속적이고 유기적으로 공략하였다. 튀르크 기병대의 용맹이 더해져 세북티긴은 승리하였으며 힌두 샤시로부터 카불 계곡을 빼앗았다. (986년) 이러한 선례에 힘입어 마흐무드는 인도 원정을 계획했던 것이다.

마흐무드의 1차 인도 원정은 서기 1000년 초엽에 시작되었다. 우선 그는 전통적으로 페르시아 문화권과 힌두 문화권의 경계 역할을 하던 카이버 고개[16] 일대의 요새를 점령하였다. 이는 인도로의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마흐무드는 카라한 왕조를 견제하느라 호라산에 머물렀는데, 1차 원정에 자극을 받은 자야팔라가 가즈나에 대한 선제 공격을 감행하였다. (1000년 말엽) 그러자 마흐무드는 빠르게 남하하였고, 그를 두려워한 자야팔라는 철수하였다. 하지만 추격을 멈추지 않은 마흐무드는 자야팔라의 수도인 페샤와르의 외곽에서 그를 따라잡았다. (1001년 11월 27일)

1만 5천의 기병을 데려온 마흐무드에 비해 힌두 군대는 4만의 보병과 1만 2천의 기병에 더하여 300마리에 달하는 코끼리 부대까지 있었다. 하지만 자야팔라는 증원 병력을 기다리며 방심하고 있다가 노련한 마흐무드에게 기습을 당하여 대패하였다. 1만 이상의 힌두 군인들이 전사했으며 자야팔라[17] 본인과 그의 가족들까지 포로가 되어 개선식에 끌려가야 했다. 이후 25만 디나르의 배상금과 함께 풀려난 자야팔라는 제후들의 멸시를 받자 수치심을 느껴 자살하였다.[18] 이후 그의 아들인 아난다팔라가 계승하였다. 겨울 내내 펀자브 북부를 약탈한 마흐무드는 이듬해 4월 가즈나로 돌아갔다.


2.6. 시스탄 정복[편집]


파일:mahmud.sistan.png
라시드 앗 딘집사에서 발췌한 삽화

페샤와르 전투와 함께 파키스탄 서북부인 간다라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한 마흐무드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갔다. 한편 그에 반해 사파르 조의 군주 칼라프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었는데, 그의 마지막 남은 아들 타히르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투옥되어 사망하며 (1002년) 후계자마저 사라져버렸다. 군부마저 그에 등을 돌린 후 마흐무드에게 시스탄을 지배해달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에 호응한 마흐무드는 일단의 군대를 보내어 지역을 접수하게 하였고 수도인 자란즈[19]는 전투 없이 항복하였다. 하지만 칼라프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타크 요새에서 완강히 저항하였고, 이에 그해 11월경 마흐무드가 친정하였다. 12월경 인도에서 데려온 코끼리가 성문을 부수자 칼라프는 항복하였다. [20]

마흐무드는 인도 원정을 위해 막 정복된 시스탄에 기존보다 높은 세금을 부과하였는데, 몇달 후 그에 반발한 귀족들이 봉기하였다. 반란 소식에 마흐무드는 1만의 군대를 이끌고 시스탄으로 진군하였다. (1003년 9월) 이에 반군은 험준한 우크 요새에서 농성하였다. 그들은 성밖을 나서 가즈나 군대를 패배시키기도 하였으나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그대로 회군하였다. 마흐무드는 정예병을 선발하여 밤중에 성벽을 기어오르게 하였고, 혼란에 빠진 반군은 도주하였지만 대부분 사로잡혔다. 마흐무드는 수천의 반군을 처형하였고, 이로써 시스탄은 완전히 가즈니 제국에 편입되었다. (1003년 10월)


2.7. 3-5차 인도 원정: 물탄 정복[편집]


파일:펀자브 서북부.2.png
페샤와르 → 탁실라 → 베라 → 이후 젤루-체나브 강을 따라 300여 km 내려가면 물탄에 도달하게 된다.

시스탄을 평정한 마흐무드는 이듬해 발흐에 머물며 군대를 정비한 후 다시 인도 원정에 나섰다. (1004년 가을) 그의 다음 목표는 펀자브의 여러 강이 인더스로 합류하는 요충지인 물탄이었다. 당시 그곳은 965년 이래로 이스마일리 (일곱이맘파) 파티마 왕조가 파견한 다이 (선교사) 가문이 통치하고 있었다. 수니 이슬람의 수호자를 자처한 마흐무드에게 그렇게 중요한 도시가 이교도보다 못한 시아파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보다 좋은 명분도 없었다. 한편, 페샤와르 방면에서 물탄으로 가려면 펀잡의 5개 강들 중 위에서 두 번째인 젤루 강가에 위치한 베라 (바티아)를 함락해야 했다. [21]

당시 베라는 페샤와르 전투 이후 힌두 샤히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상태였는데, 펀자브 중부 지방의 패권을 쥐고 있었다. 마흐무드는 베라에 무리한 규모의 연공을 내게 하였고, 그 통치자인 바지 라이가 거절하자 공격하였다. (1004년 말) 바지 라이는 영웅적으로 저항하였으나 패배한 후 자살하였다. 가즈니 군대는 펀자브를 약탈한 후 회군하였다.

위기를 실감한 물탄의 통치자 파테흐 다우드는 힌두 샤시의 아난다팔라와 동맹하여 마흐무드에 맞섰다. 1006년 봄, 다우드의 불복종을 응징하고 물탄을 속국화 하기 위해 마흐무드는 남하하였다. 그는 힌두 샤시의 아난다팔라에게 영토 통행권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아난다팔라는 가즈니 군대의 도강을 막기 위해 페샤와르까지 나아갔으나 마흐무드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아난다팔라는 체나브 강을 따라 도주하였고 가즈니 군대는 힌두 샤히의 수도 소드라 (와지라바드)까지 점령하였다. 이후 아난다팔라가 카슈미르의 요새에 숨어버리자 마흐무드는 추격을 멈추고 물탄을 향해 진격하였다.

물탄은 7일만에 함락되었고 시내의 이스마일파는 학살당하였다. 다만 그 지도자인 다우드는 수니파로 개종하여 목숨을 부지했을 뿐만 아니라 마흐무드의 신하로서 물탄을 계속 지배할 수 있었다.

  • 5차 원정
이슬람으로 개종한 자야팔라의 손자를 물탄 총독으로 임명. 하지만 반기를 들자 진압 (1007년)

  • 6차 원정
아난다팔라는 재차 힌두 연합군을 편성하여 마흐무드에 맞섰다. 1008-9년

  • 7차
라자스탄 나가르코트 ~ 칸가라 정복 1009-10년

  • 8차
물탄 평정 1010-1011

  • 9차
타네사르 1011-1012

  • 10차
난다나크 1013-14

  • 11차
카슈미르 1015-16

  • 12차
마투라 1018

  • 13차
카나우지 1018-19

  • 14차
칼린자르 1020-21

  • 15차
라호르 1021-22

  • 16차
솜나트 1025-26


2.8. vs 카라한 칸국[편집]


1006년에 가즈니를 급습했다가 격퇴당한 카라한 칸국의 아르슬란 일릭 나스르는 마흐무드의 펀자브 원정을 틈타 호라산을 침공, 발흐와 니샤푸르를 약탈하였다. 이에 빠르게 회군한 마흐무드는 발흐 인근의 샤르히얀에서 나스르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1008년 1월 4일) 이때 마흐무드 진영은 인도 코끼리를 이용하여 카라한 기병대를 압도하였다. 한편 나스르와 경쟁 중이던 형인 대카간 아흐마드는 마흐무드의 편을 들었다. 이후 일릭 나스르는 독립을 선포하고 아흐마드 대칸과 대립하니, 카라한 칸국의 동/서 분열의 단초였다. 마흐무드는 동카라한의 아흐마드와 동맹하여 나스르의 서카라한을 견제하였다.


2.9. 6차 인도 원정[편집]


마흐무드에게 연거푸 패한 후 자신의 세력만으론 한계를 느낀 아난다팔라는 주변 라자들에게 연합군 결성을 제안하였다. 대군이 모이자 아난다팔라는 자신의 아들인 브라흐마팔라를 선봉에 세워 페샤와르로 진군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마흐무드는 한겨울임에도 정예병을 소집하여 맞서기로 하였다. 1008년 12월 31일에 가즈나를 떠난 마흐무드의 군대는 이듬해 1월 인더스 강을 건너 바이한드 인근 평원에서 힌두 연합군과 조우하였다. 전투는 기존의 양상과는 달랐다. 카나우지, 델리, 괄리오르 등에서 온 병사들은 마흐무드가 처음 만나는 적들이었고 초저녁까지의 전투는 힌드 연합군의 우위로 전개되었다.

북인도 정복이 수포로 돌어가려던 찰나, 마흐무드는 자신의 친위대로 하여금 전장을 이탈하는척 하며 적군의 후방을 기습하도록 하였다. 도박은 성공하였고 애초에 결속력이 낮았던 힌두 대군은 와해되었다. 마흐무드는 30마리의 코끼리를 포함한 막대한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힌두샤히의 패잔병들은 왕국 동쪽 끝의 캉그라로 도주하였다. 펀자브와 히말라야 사이의 계곡에 위치한 그곳에는 나가르코트라는 요새가 있었는데, 내부의 사원은 마하바라타의 비마가 지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유서깊고 화려했다. 마흐무드는 나가르코트를 포위하였고, 요새는 3일간의 영웅적인 저항 후 함락되었다.

마흐무드는 나가르코트에서 힌두 샤히의 보물창고를 수중에 넣었는데, 수세기간 순례객들이 바친 보물이 축적되어 무려 7천만 디르함의 가치가 있었다고 한다. 막대한 금/은 세공품 외에도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의복들과 비마를 위한 옥좌 등을 수중에 넣은 정복자 마흐무드는 나가르코트에 주둔군을 남겨두고 가즈나로 금의환향하였다. (1009년 6월) 이제 펀자브는 가즈니 제국의 앞마당이나 다름 없었다. 마흐무드가 떠나자 카슈미르에서 내려온 아난다팔라가 난다나 요새를 근거지로 펀자브 북부 산악지대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그는 1010년에 사망하였고 아들 트릴로찬팔라가 계승하였다. 아난다팔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맞선 포루스 왕에비교되기도 한다.

마흐무드의 이름을 세계사에 각인 시킨 대사업


2.10. vs 카라한/구르족[편집]


아프가니스탄 중부 산악 지대 (구리스탄)의 서부에 위치한 불교 왕국인 구르 왕조 정복. 사부크티긴 시절 그에 복속하고 조공했던 무함마드 이븐 수리. 마흐무드가 인도 원정에 집중한 틈에 조공 안하고 그의 동맹들을 위협하였다. 가즈니 조의 총독이 원정해 오면 접근이 힘든 고산지대로 도피, 게릴리전

1011년 초, 마흐무드의 친정. 구르 군대는 선발대를 이끈 헤라트 총독 알 툰타쉬를 패배시켰으나 곧 마흐무드의 본대와 마주하자 퇴각하였다. 이후 이븐 수리가 1만의 군대와 산악 요새에 틀어박혔다. 마흐무드는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았으나 함락에 실패하자 꾀를 내어 거짓으로 후퇴하는척 하였다. 이에 이븐 수리가 추격해 왔고, 마흐무드는 평지에 다다르자 마자 말머리를 돌려 반격하였다. 구르 군대는 대패하였고 이븐 수리를 포함한 지도부가 포로로 잡혔다. 마흐무드는 이븐 수리의 아들 아부 알리를 구르 왕조의 군주로 임명한 후 회군하였는데, 도중에 이븐 수리는 반지 밑에 숨겨두었던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비슷한 시기 발루치스탄 북부 쿠스타르의 통치자가 카라한 칸국의 꾀임에 넘어가 조공을 중단하였다. 이에 1011년 12월, 마흐무드가 친정하여 쿠스다르를 포위하였다. 이에 쿠스다르의 통치자는 재차 복속을 청하였고, 마흐무드는 1500만 디르함의 배상금과 15마리의 코끼리를 받는 대가로 그를 수락하였다. 마흐무드는 막대한 재산과 함께 가즈니로 귀환하였다.

1015년에는 구리스탄 서부 (카와빈) 정복

1017년 거란이 대 카라한 동맹 제의

제국의 수도인 가즈니와 인접한 산악지대에 살던 아프간 족은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 1019년, 카나우지에서 회군하던 가즈니 원정군은 고갯길에서 아프간 족의 습격을 받았다. 분노한 마흐무드는 그들을 일망타진 하기로 하였다. 그해 말엽, 마흐무드는 다른 지역으로 향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 후 그들의 소굴로 들이닥쳤고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족민을 처형하였다. 피의 복수를 자행한 후에야 마흐무드는 가즈니로 돌아왔다.

1020년 헤라트 총독인 아들 마수드가 가장 험준하기로 악명 높은 구리스탄 서북부 (타브) 정복. 구리스탄 평정

현재 아프가니스탄 동부 누레스탄 지방의 사람들이 사자를 섬긴다는 소식이 귀에 들리자 마흐무드는 그곳에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1020년 5월) 그는 석공과 목공들을 소집하여 해발 6000m 가 넘는 고봉들 사이로 길을 내어 진군하였다. 그곳은 키라트, 누르 라는 두개의 계곡 지대였는데 전자의 지배자는 저항 없이 항복,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마흐무드에 복속하는 조건으로 통치를 이어나간 것에 비해 후자는 저항하였다. 마흐무드는 시종장 알리 이븐 아르슬란 알 카립을 파견하였고 그는 누르 계곡을 정복한 후 수비대를 남겨놓았다. 마흐무드는 새로 정복된 누레스탄 일대에 교사들을 파견하여 일대를 이슬람화시킨 후에야 가즈나로 돌아왔다.

한편 아흐마드와 나스르 형제 간의 동서 대립은 둘이 각각 1017년, 1013년에 사망한 후 그들의 장남인 유수프 카디르와 만수르 아르슬란이 물려받았다. 1016년 대카간임을 자처한 만수르는 동카라한을 공격하였고 그틈에 마흐무드는 화레즘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자 1020년, 만수르는 유수프 카디르와 타협하고 함께 동맹하여 호라산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마흐무드는 어렵지 않게 카라한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동서 화합은 두동강이 났다. 1021년 동카라한-셀주크 연합군이 서카라한의 부하라를 함락하며 전세가 역전되자 1025년 만수르는 대카간 주장을 철회하고 은퇴하여 수피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가즈니 제국의 북쪽 국경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2.11. 7차 인도 원정: 힌두 샤히의 멸망[편집]


1013년 11월, 마흐무드는 트릴로찬팔라가 다스리는 힌두 샤히를 멸망시키기 위해 진군하였다. 하지만 마침 폭설이 내려 원정은 연기되었고 따라서 1014년 초에 원정이 재개되었다. 그해 3월, 마흐무드는 난다나 요새로 향하였다. 이에 트릴로찬팔라는 아들 비마팔라에게 수비를 맡기고 본인은 카슈미르의 상그라마라자에게 지원병을 요청하러 떠났다. 비마팔라는 협곡에 코끼리를 앞세운 방어선을 세워 맹렬히 저항하였고 며칠 간의 공격 끝에 마흐무드는 튀르크 기병들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원으로 그를 유인하기로 하였다. 용맹했지만 경험이 부족했던 비마팔라는 그 전술에 넘어가 대패하였다.



2.12. 카라한 내분 개입[편집]


1025년 만수르가 은퇴하며 서카라한에 권력 공백기가 찾아오자 동,서 카라한은 동부의 유수프 카디르 한에 의해 통일된 듯 보였다. 하지만 이번엔 유수프의 동생들인 아흐마드와 알리 테긴이 말썽이었다. 유수프는 가즈니 조에 도움을 청하였고 마흐무드는 흔쾌히 응하였다. 가즈니 군대는 알리 테긴의 근거지인 사마르칸트와 부하라까지 점령하였고 이에 힘입어 유수프는 아흐마드와 대적하여 1026년 외즈겐트, 1027년 발라사군을 수복할 수 있었다. 이로써 가즈니 제국의 위상은 중앙아시아 전체를 호령하게 되었다.


2.13. 북부 이란 원정[편집]


라이, 하마단 점령


2.14. 죽음[편집]


마흐무드는 오우즈, 셀주크 등 신흥 튀르크 인들을 경계하여 여러번 그들을 패배시켰다. 하지만 1028 ~ 1029년에 걸쳐 셀주크 왕조는 호라산의 핵심 도시인 메르브와 니샤푸르를 함락하였다. 따라서 가즈니 제국의 쇠퇴는 마흐무드의 치세 말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원정에서 얻은 말라리아로 와병 중이던 마흐무드는 1030년 4월 30일, 수도 가즈니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58세였다. 가즈니 조는 이후로도 한세기 반동안 지속되었지만 1040년, 그의 후계자인 마수드 1세가 단다나칸 전투에서 셀주크 측에 대패하며 급격히 쇠퇴하였다. 1050년에는 수도 가즈니를 구르 제국에게 넘겨준 '가즈니' 조는 라호르에서 연명하다가 결국 멸망하였다.


3. 평가[편집]


마흐무드는 세계의 사자, 당대의 절대자였다.

마흐무드는 여러 나라의 번영을 철저히 파괴했고 인도에서도 어마어마한 위엄을 성취하여 힌두교도들이 먼지 티끌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당연히 흩어진 이들은 무슬림을 향해 뿌리 깊은 증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알 비루니, 11세기 구르간지와 가즈나의 학자[22]


마흐무드 이전 파티마 왕조 (마그레브 ~ 시리아)와 부와이흐 왕조 (이라크 & 이란 서부)가 전체 이슬람 세계 영토의 2/3을 차지한 서기 1000년경은 가히 시아파 전성 시대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란의 부와이흐 왕조를 약화시키고 난공불락으로 악명높았던 아프가니스탄 중부 지역을 이슬람화한 마흐무드의 가즈니 제국은 수니파 세력 중에 독보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로부터 '술탄' 칭호를 받았던 것이다. 마흐무드는 동로마의 바실리오스 2세와 함께 1020년경 최강의 군주였다.

[1] Yamīn-ud-Dawla Abul-Qāṣim Maḥmūd ibn Sebüktegīn[2] 이후 영어의 admiral 의 어원이 되었다.[3] 물론 9세기 중반부터 튀르크 용병들이 득세하기도 했고 이집트의 툴룬 왕조나 이란의 사파르 왕조가 중앙 정부에 저항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10세기에 두 칼리파 국가 (파티마 조 & 후우마이야 조)의 성립과 부와이흐 왕조의 바그다드 입성으로 바그다드 칼리파의 정치적 실권은 이미 10세기를 거치며 중국 주나라 말기의 천자처럼 떨어져 있긴 했다.[4] 노예 출신으로,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가즈니 왕조를 세운 왕이다.(재위: 977년 ~ 997년)[5] 프랑크, 서고트, 동고트 등등[6] 전속 용병[7] Nāsir ud-Dīn (신앙의 구원자)[8] Saif ud-Dawlah (국가의 검)[9] 당시 마흐무드는 25세에 불과하였다! 아마도 누흐 2세는 노련무쌍한 사부크티긴에게 그 자리를 맡기면 가즈니 왕조가 호라산을 완전히 집어삼킬까 두려웠던 것 같다. 뭐 곧 그렇게 되긴 하지만..[10] 둘은 이복 형제였는데, 이스마일의 모친이 더 높은 계급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11]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12] 현재의 이란 동부 ~ 아프가니스탄 서부[13] 그에 반해 사파르 왕조의 칼라프는 알 카디르를 인정하여 그로부터 '왈리 알 다울라' 칭호를 하사받았다[14] 페르시아어로 병영 이란 뜻이다[15] 재위 964 ~1001년[16] 현재도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을 이루는 고갯길. 잘랄라바드와 페샤와르 사이에 위치한다.[17] 매우 화려한 목걸이를 메고 있었다고 한다[18] 스스로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형식으로 장작을 쌓고 불을 붙인 후 산채로 타죽었다고 한다 반지의 제왕[19] 현재 아프가니스탄 서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다[20] 이후 칼라프는 이스마일이 갇혀 있는 구즈간으로 보내졌는데, 그가 카라한 칸국과 내통한다는 소문이 돌자 가즈니 남쪽의 가르데즈로 옮겨져 1009년에 사망하였다.[21] 그곳은 산맥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되는 곳으로서 삼국지의 진창이나 이릉과 같은 거점이었다.[22] 알 비루니는 원래 자신을 비롯한 다른 학자들을 후원하던 호라즘의 샤 아부 압바스 마문을 도와서 술탄 마흐무드를 견제하던 사람이었으나 후일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술탄 마흐무드에게 항복하고 충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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