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들러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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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장편 연출 작품
,(TV영화 제외),






쉰들러 리스트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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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최우수 작품상
제65회
(1993년)


제66회
(1994년)


제67회
(1995년)

용서받지 못한 자

쉰들러 리스트

포레스트 검프


역대 골든글로브 시상식
파일:goldenglobe.png
작품상 - 드라마
제50회
(1993년)


제51회
(1994년)


제52회
(1995년)

여인의 향기

쉰들러 리스트

포레스트 검프


역대 일본 아카데미상
파일:japan-academy-prize.png
최우수 외국작품상
제17회
(1994년)


제18회
(1995년)


제19회
(1996년)

쥬라기 공원

쉰들러 리스트

쇼생크 탈출



쉰들러 리스트 (1993)
Schindler's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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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주년 재개봉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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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드라마, 전쟁
원작
토머스 케닐리 - 소설 《쉰들러의 방주》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리암 니슨
벤 킹슬리
레이프 파인스
캐롤라인 구덜
조나단 샤갈
엠베스 데이비츠
각본
스티븐 제일리언
제작
어빙 글로빈
캐슬린 케네디
브랑코 러스틱[1]
제럴드 R. 몰렌
로버트 레이몬드
류 리윈
스티븐 스필버그
촬영
야누스 카민스키
편집
마이클 칸
음악
존 윌리엄스
제공사
파일:미국 국기.svg 유니버설 픽처스
제작사
파일:미국 국기.svg 앰블린 엔터테인먼트
수입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UIP 코리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UPI 코리아[재개봉]
배급사
파일:미국 국기.svg 유니버설 픽처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UIP 코리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UPI 코리아[재개봉]
개봉일
파일:미국 국기.svg 1993년 12월 15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4년 3월 5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9년 1월 24일[재개봉]
상영 시간
194분
제작비
2,200만 달러
월드 박스오피스
$321,306,305
북미 박스오피스
$96,065,768
서울 관객수
847,259명
국내 등급
파일:영등위_15세이상_2021.svg 15세 이상 관람가
북미 등급
파일:R등급 로고.svg

1. 개요
2. 예고편
3. 제작기
3.1. 원작
3.2. 판권 구매부터 제작까지
3.3. 제작 과정
4. 등장인물
5. 평가
5.1. 유대인의 피해의식?
6. 흥행
7. 수상
8. 논란
9. 기타



1. 개요[편집]


스티븐 스필버그 연출, 리암 니슨 주연의 전쟁 드라마 영화로 1993년에 개봉했다.

제목 "쉰들러 리스트"는 주인공 쉰들러가 유대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작성했다는 명단 아홉 개에서 따왔으며, 자기 이익을 위해 유대인들을 고용한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가 1,100여 명[2]의 유대인들을 구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2. 예고편[편집]







25주년 예고편



재개봉 30초 예고편



재개봉 메인 예고편


3. 제작기[편집]



3.1. 원작[편집]


원작은 호주 작가 토머스 케닐리(Thomas Keneally)가 쉰들러의 일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 '쉰들러의 방주'(Schindler's Ark)이다.[3]

로스엔젤레스 베벌리힐스에서 가죽 제품 사업을 하던 리어폴드 페퍼버그(Leopold Pfefferberg)가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쓸 수 있도록 소재를 제공했다. 페퍼버그는 쉰들러가 구해낸 유대인들을 통칭하는 '쉰들러 유대인(Schindlerjuden)' 중 한 사람으로, 쉰들러의 이야기를 영화나 소설로 만들어 그에 대해 알리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1980년에 페퍼버그는 가게에 온 토머스 케닐리에게 쉰들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케닐리는 쉰들러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소설화 작업에 착수했다. 소설은 1982년에 출간했다.

한국에는 영화가 개봉한 1994년경에 영화 제목과 동일한 "쉰들러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해 나왔고, 현재는 모든 판본이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다.[4]


3.2. 판권 구매부터 제작까지[편집]


스티븐 스필버그는 우연히 '쉰들러의 방주'를 읽고 큰 감명을 받는다. 스필버그는 1983년에 바로 유니버설을 통해 판권을 사들여, 리어폴드 패퍼버그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당시 언제 영화를 만들 것이냐는 페퍼버그의 질문에 스필버그는 10년 후에 만들겠다고 했는데 영화는 10년 뒤인 1993년에 개봉했다.

스필버그를 중심으로 이 책을 영화로 만들려는 시도는 많았다. 영화 제작을 위해 여러 사람을 거쳐 시나리오를 완성했지만, 스필버그 본인은 감독직에는 아무래도 부담감을 느꼈는지 처음에는 다른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려 했다. 고심 끝에 스필버그는 마틴 스코세이지에게 연출을 맡기려 했으나, 스코세이지는 이탈리아계인 자신보다 유대계 감독이 연출해야 할 프로젝트라며 거절했다. 이 과정에서 원래 스필버그가 케이프 피어의 판권을 보유했고, 스코세이지가 쉰들러 리스트의 판권을 보유했는데 서로 바꿨다고 한다.

이후 실제 홀로코스트 피해자 유족인 로만 폴란스키에게 연출을 부탁했지만, 폴란스키는 스필버그와는 달리 본인이 직접 홀로코스트를 겪고 어머니를 잃는 일을 당한 사람이라서[5]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내게는 너무 개인적인 내용"이라며 객관적인 연출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거부했다. 그리고 폴란스키는 후에 '피아니스트'로 자기 버전의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만든다.

마지막으로 스필버그는 빌리 와일더를 찾아가고, 와일더도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쉰들러 리스트를 원했다. 빌리 와일더 역시 유대계로, 실제로 1933년까지 베를린에서 살다 나치가 집권하자 미국으로 도망쳐왔다. 하지만 와일더는 스필버그에게 직접 메가폰을 잡으라고 독려했다.

이리하여 쉰들러 리스트는 결국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했다. 무엇보다 스필버그가 직접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짓을 저지르는 네오 나치들에 대해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그걸 보고 누군가가 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여 결국 스스로 영화를 만든 것이다.


3.3. 제작 과정[편집]


감독과 배급사 양쪽에서 걱정을 굉장히 많이 했다. 일단 스필버그 본인이 촬영 기간 내내 멘탈이 남아나질 않았다. 자기 조상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6] 그전까지 문서상으로만 홀로코스트를 알던 스필버그는 촬영에 들어가고 나서 사건의 심각함을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작중에서 그려지는 온갖 충격적인 광경들을 보면 이해가 간다. 담담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그려내 오히려 충격이 더 배가 된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시달려온 유대인으로서의 위치와 정체성 문제가 겹치면서 이성을 유지한 상태로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당시에 엑스트라 중 누군가 밤 10시 30분에 칼퇴근해야겠다고 투덜거리자 뛰쳐나와 누가 그랬냐고 불같이 화를 냈을 정도로 히스테릭해지고, 절친한 로빈 윌리엄스에게 전화해서 날마다 나를 좀 즐겁게 해주게! 제발...이라는 식으로 하소연했다고 한다.

스필버그의 아내 케이트 캡쇼[7]와 아이들, 부모까지 촬영장에 함께 있었고 심지어는 랍비까지 한 명 대동했다고 한다. 이에 더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시트콤 '사인펠드' 방영분 VHS를 미국에서 폴란드로 수시로 배송했다고 한다.

진작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을 느낀 배급사 유니버설은 이 영화를 제작하는 조건으로 딱 한 가지를 내걸었다. 쉰들러 리스트 찍기 전에 쥬라기 공원부터 끝내라. 사장은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면 쥬라기 공원은 못 만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1992년 8월 쥬라기 공원의 촬영을 시작해 11월에 촬영을 끝냈고, 임시 편집본은 촬영이 끝난 지 1주 만에 나왔다. 이게 다 끝나고 나서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은 다음 해 3월에 시작되었다. 쉰들러 리스트 이후 스필버그의 영화들이 상당히 바뀐 것을 보면 선견지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배급사에 문제가 된 또 하나는 바로 흑백 촬영. 컬러 영화가 당연해진 시기에 흑백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희한한 요청이었다. 일단 흑백으로 극장 개봉까지는 받아준 것 같은데, 사장이 돈을 더 벌어볼 생각으로 '영화를 컬러로 찍어 나중에 VHS 발매할 때 컬러 버전도 내보자'는 식으로 제안했다고 한다.

스필버그는 거절하려 했는데, 현장에서 아무도 흑백 영화 촬영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고생길이 뻔한 것을 진작에 알았을 것이다. 컬러 영화를 찍던 식으로 세트를 만들면 면과 면의 명암차가 크지 않아서 화면이 뭉개진다든지 하는 문제들을 사전에 발견한 제작진은 인위적으로 페인트를 칠해 세트의 명암을 조절하는 등의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이 영화는 총 다섯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흑백이다. 영화 시작 부분에 나오는 유대교 예배, 후반에 나오는 쉰들러 묘소 참배 장면, 그리고 쉰들러가 안식일(토요일) 유대교 예배를 허용할 때 나오는 촛불, 그리고 가장 유명한 장면인 빨간 코트를 입은 여자아이(Girl in the Red Coat, 두 군데에 걸쳐서 등장). 끝내 희생되는 이 소녀는 개봉 후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8]

또한 첫 장면이 컬러로 진행되다 흑백으로 바뀌며 본 내용이 시작되고, 마지막 장면에서 시점이 현재로 바뀌며 다시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기법은 고전적인 기법으로 이미 오래전인 1939년에 오즈의 마법사가 사용한 기법을 반대로 적용한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관객에게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장치다.

이런 갖가지 고생을 하면서 희한한 흑백 영상을 함께 만들어낸 촬영감독 야누스 카민스키(Janusz Kamiński)[9]는 이후 나온 스필버그의 모든 영화의 촬영감독으로 참여했으며 지금도 일한다.

당시 뉴스위크지 보도에 따르면 촬영은 전부 폴란드에서 했다고 하는데 촬영 당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스필버그를 알아본 폴란드 노인이 촬영 현장에 다가오더니만 스필버그를 죽일 듯이 쳐다보며 마구 폭언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나는 히틀러 자식이 싫지만, 유대인은 더 싫어. 왜냐면 네놈들은 히틀러는 악마, 유대인은 불쌍한 버러지. 이 따위로 떠벌리는 영화나 찍고 자빠졌잖아? 그렇게 너희는 언제나 자기들 유대인만 가엾다고 생각한다고! 당장 나가! 구역질 나는 놈들아!"

이 말에 스필버그는 하얗게 질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주연 배우 리암 니슨이 화를 내면서 반론했지만 끝내 노인을 억지로 떼어내야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노인도 거들어 스필버그에게 목매달아 죽으라는 손짓까지 하여 스필버그는 창백해져 고민해야 했다.[10][11]


4. 등장인물[편집]


  • 오스카 쉰들러 역 - 리암 니슨 (양지운)
  • 이자크 슈테른 역 - 벤 킹슬리 (이완호)
  • 아몬 괴트 역 - 레이프 파인스 (강구한)
  • 에밀리 쉰들러 역 - 캐롤라인 구덜 (강희선)
  • 리어폴드 페퍼버그[12] 역 - 조나단 샤갈 (김수중)
  • 헬렌 히르시 역 - 엠베스 데이비츠[13] (윤소라)

  • 율리안 셰르너 역 - 안제이 서린 (장승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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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슈츠슈타펠 상급대령.jpg}}} ||
슈츠슈타펠상급대령으로, 실존 인물이다. 작중에서는 단정하고 신사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 역시 유대인은 살아있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며, 아무 의미도 없다고 유대인에 대한 혐오심을 가진 인간말종이다. 오스카 쉰들러와는 영화 초반에 레스토랑에서 만나 친분을 쌓으며, 이후에도 쉰들러가 유대인 소녀에게 키스한 죄로 감옥에 들어가자 자신의 권한으로 석방시키는 등, 뒷배를 봐준다.

  • 루트비히 한 역 - 마이클 Z. 호프만 (문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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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슈츠슈타펠 대령.jpg}}} ||
슈츠슈타펠의 대령질서경찰 대령으로 실존 인물이다. 중반에 쉰들러를 변호하는 괴트와 대화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와중에 괴트가 돈으로 자신을 꾀어내려는 낌새가 보이자, 무표정을 유지하며 "나를 매수하려는 겐가?"라며 단칼에 거부한다. 이후 율리안 셰르너가 들어오자 자리를 비켜준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요제프 1.jpg}}} ||
실존 인물로 일명 죽음의 천사(Death of Angel)라고 불린 잔혹한 인간이다. 계급은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위. 영화 속에서는 아우슈비츠로 잘못 이송된 유대인 여성들을 골라내기 위해 직접 나타난다. 참고로 배우와 실제 인물의 외모가 꽤 많이 비슷한 편이다.


5. 평가[편집]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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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Db Top 250 6위{{{-3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display:none; margin-left: 0.5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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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boxd Top 250 13위{{{-3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display:none; margin-left: 0.5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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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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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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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유대인의 피해의식?[편집]


네오나치들이 유대인의 피해의식이라는 식의 주장을 펼쳤으나 이는 논리가 없다. 홀로코스트휴머니즘, 나치의 폭력을 주제로 영화는 울림을 준다.

실제로 비평가에 따라서는 이 영화는 유대인보다는 나치의 폭력성에 더 중점을 두었다고도 말한다. 영화 안에서 쉰들러는 유대인들에게 사랑을 느꼈다기보다는, 나치에게 사악함을 느꼈을 뿐이라는 것.

실제로 쉰들러는 후반까지 공장의 유대인들과는 그다지 교류를 하지 않고, 나치의 고위층과 더 교류를 한다. 그리고 유대인=피해자=선하다는 식의 묘사는 딱히 없다. 영화는 그보다는 나치가 저지르는 온갖 만행들을 보여줄 뿐이다.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하는 것이다. 쉰들러는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비정하기까지 한 사업가였다. 특별히 나치를 반대하지도 않았다. 단지 "내가 아는 사람들을 죽게 둘 수 없다"는 최소한의 도덕을 지키고자 한 것. 당시 시대를 생각해보면 이것만 해도 넘치도록 대단한 것이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면서까지 1,100여 명의 사람들을 살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폴란드를 떠나기 직전에는 유대인들에게 옷과 식량을 주는 등 자기만큼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 온정을 베풀던 다른 독일인 공장주에게 '자기와 같이 공장을 모라비아로 옮겨서 유대인들을 살려내자'[14]고 설득하다 거절당하기까지 한다. 이 사람이 그나마 양심적이라 자기만 발을 빼는 데서 끝냈으니 망정이지, 쉰들러의 의도를 게슈타포에 밀고하기라도 했으면 쉰들러는 절대로 무사할 수 없었다. 아무리 유대인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알고 있었다지만, "외부인"에게 쉰들러가 본의를 드러낸 건 정말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미국 영화들이 유대인에 유리한 것도 사실이고 너무 유대인의 피해만 많이 영화로 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홀로코스트를 다뤘다고 해서 유대인의 피해의식이라는 것은 편견이다. 똑같이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다룬 작품들이라도 나치의 악행을 이 영화만큼 그대로 다룬 작품도 그리 흔하지 않다. 영화로는 피아니스트, 만화로는 정도뿐.

또한, 스필버그의 다른 영화 뮌헨을 보면 스필버그는 적어도 피해의식을 지닌 사람은 아니다.

로만 폴란스키의 명작 피아니스트와 비교하자면 쉰들러 리스트는 주인공 쉰들러의 행적을 중심에 놓고 그와 대척점에 있는 아몬 괴트를 비롯한 나치의 잔혹성에 초점을 두었다면, 피아니스트는 물론 나치의 잔혹성도 그리긴 했지만 좀 더 전쟁 속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다룬 편이다. 피아니스트에는 나치측 인물뿐 아니라 같은 유대인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유대인, 그리고 주인공의 친구인 유대인 경찰 이츠학을 비롯해 주인공을 이용해 사기 행위를 저지르는 안텍 등 정말 다양한 인간들이 나온다.

쉰들러 리스트에서도 학살 증거 인멸을 위해 유대인들을 시켜 소각장에 썩어가는 시신들을 던져 넣는 작업을 하다 반쯤 미쳐서 소리를 지르고 시체 더미에 발터 P38 권총을 난사하는 SS 하사(노르베르트 바이저[15] 분)의 모습이 나온다.(1분 30초 무렵) 이를 두고 죄책감에 미쳐버린 또 한 사람의 피해자를 표현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었으나, 해당 인물은 100% 창작으로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인 알베르트 후야르(Albert Hujar)를 바탕으로 한 인물이다. 후야르는 정신이 불안정한 사이코패스로, 학살 행위를 매우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자제심을 잃고 아무에게나 총질을 하는 광적인 행동까지 보인 바 있다. 그가 학살을 자행 및 감독한 폴란드의 한 장소는 아예 그의 이름을 따 후요바 언덕(Hujowa górka)로 명명되었다.[16] 실존 모델의 이런 행보를 생각할 때, 해당 장면이 학살 행위에 대한 죄책감에 미쳐 기행을 벌인 것을 묘사한 장면이라기 보다는 그저 학살의 흥분에 미쳐서 날뛰는 장면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휴야르는 쉰들러가 열차에 수용된 유대인들에게 소방 호스로 물을 뿌려주는 장면에서도 나오는데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다가 쉰들러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서서 먹다가 쉰들러의 제안에 괴트가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어디 불났어요?" 라는 대사를 해서 쉰들러와 괴트가 폭소를 한다.


6. 흥행[편집]


스필버그는 이 영화가 망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대단한 호평 속에서 제작비 대비 10배 수익을 거둬들이며 스필버그에게 마침내 아카데미를 안겨준 영화가 되었다. 그전까지 스필버그를 상업 영화 만드는 감독으로 낮춰 보던 사람들도 이 영화를 시작으로 스필버그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에서는 개봉 첫날 표가 매진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한국 배급을 맡은 UIP 한국지사에 의하면 쥬라기 공원보다 이 영화가 성공한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확실치 않다. 당시 서울 관객 집계에서 쥬라기 공원은 106만명 관객이 관람했지만, 쉰들러 리스트는 847,000명으로 나온다. 전국 관객에서 앞섰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2000년 초반부터야 전국 관객 집계가 이뤄진 탓에 자세한 전국 관객 집계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시는 배급사가 멋대로 국내 관객 수를 부풀리는 것도 허다했으므로 이게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물론 두 작품 다 한국, 월드와이드 모두 크게 흥행한 작품들인 것은 맞다.

극장 개봉 당시, 영화 앞뒤의 나레이션 자막(번역 자막 말고)을 모조리 한국어로 바꿔 넣을 정도로 배급에 공을 많이 들였다. VHS 출시본까지는 이 한국어화가 살아있었지만 TV 방영 시에는 원래의 영어 자막 버전으로 나왔다.


7. 수상[편집]




8. 논란[편집]


다른 곳으로 가야 할 쉰들러의 유대인들이 행정 착오로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일 자체는 진짜로 있었고, 이들은 영화에 나온 것처럼 쉰들러가 협상을 통해 구해냈다. 단, 이들은 처음부터 노동자로 분류되어 아우슈비츠로 갔기에 가스실에 들어간 게 아니라 진짜로 소독 처리를 받고 막사에 수용됐으며, 영화에서처럼 가스실로 끌려가는 사람들과 교차하지는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영화에서는 끌려간 쉰들러의 유대인들만 구해낸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들 외에도 노동 수용소에 있던 건강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유대인 150명 정도를 노동자 파견 명목으로 더 구해냈다. 예루살렘의 쉰들러 묘비에 적힌 1,200명은 이때 추가된 유대인까지 합친 인원수다. 그러나 이렇게 추가로 구한 유대인들은 쉰들러의 유대인들보다 영양 상태가 매우 나쁜 탓에, 아우슈비츠에서 쉰들러의 공장으로 오는 동안 열차 안에서 7명이 사망했다.

이전 설명에는 수용소장 아몬 괴트의 최후가 영화에서 "Heil Hitler"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것이 허구라고 서술했으나, 실제로도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17]

그리고 유튜브에 올라온 아몬 괴트의 처형 영상으로 알려진 동영상도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 Bloody Tales(2013)에 따르면 이 영상은 루트비히 피셔(Ludwig Fischer)의 처형 영상이라고 한다. 아몬 괴트의 죽음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거의 없다고 한다.

황금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에서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해당 곡은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예루살렘을 회복한 6일 전쟁을 기념하는 의미를 갖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해당 부분을 Halikha LeKesariya로 바꿨다.


9. 기타[편집]


  • 제작자 중에 브랑코 러스틱은 실제로 홀로코스트를 겪었다. #

  • 스필버그는 이 영화로 얻은 자기 몫의 로열티 전액을 홀로코스트 역사재단 쇼아 파운데이션(Shoah Foundation)에 기부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피가 맺힌 돈'(blood money)이라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 명장면 중 하나이면서도, 개봉 당시 소수 영화 계층에서는 논란이 일은 장면이 있다. 바로 가스실 장면 때문인데 이 장면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서스펜스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기능 중 하나인 카타르시스와 이 영화와 같은 역사적인 고증으로 슬픔을 이루는 작품의 경우에 드러나야 하는 고발성이 서로 상충하여 나타난 결과로 볼 수 있다.[스포일러]

  • 영화 초반 레스토랑 씬에서 오스카 쉰들러가 SS 장교들과 한창 친목질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들 장교의 소매 부분을 잘 보면 SS 특유의 커프 타이틀 위에 "SD"라고 적힌 패치가 붙어 있는데, SD(Sicherheits dienst의 약칭, 보안부)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제국중앙보안성(RSHA) 소속이다. 자세한 것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항목 참조.
또한 초반 씬에서 쉰들러가 장교들과 '즐거운 방랑자'(Mein Vater war ein Wandersmann)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18], 이 역시 고증 오류다. 실제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만들어진 가요로, 독일 전통 민요로 종종 오인되다 보니 영화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 이 영화도 스필버그의 많은 작품들처럼 존 윌리엄스가 음악을 담당했는데, 이작 펄만이 연주한 메인 테마가 매우 유명하다. 윌리엄스도 이 음악이 마음에 들었는지 약간 손보고 중간에 나오는 다른 OST와 합쳐 바이올린 협주곡을 만들었다. 윌리엄스는 작곡 전 처음으로 영화를 보고 나서 너무나 마음에 들어 몇 분이나 밖에 서성이다 왔다고 한다. 그러고 돌아와서는 스필버그에게 "이 작품에는 더 나은 작곡가를 쓰는 게 좋겠어"라고 조언했는데, 스필버그는 "나도 알아, 근데 그런 사람들이 다 죽었어."라고 답했다고 한다.

  • 영화에서 밤이 되자 독일군이 유대인들이 은신한 건물에 다시 들어가 청진기로 천장 벽을 짚어보는 등 수색하여 온갖 곳에 몰래 숨어 겨우 살아남은 유대인들마저 모조리 학살해버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건물에서 한 독일군 장교가 아무 감정도 없는 듯한 표정으로 바흐의 영국 모음곡 2번 전주곡을 연주한다. 다른 군인들이 MP40을 정말 쉴 새 없이 난사해대는 통에 총소리와 피아노 연주가 함께 울려퍼지는 아이러니컬한 장면은 한때 위대한 음악가를 배출한 문명인들이 홀로코스트 같은 광기어린 짓들 역시 저질렀음을 잘 표현한다. 또 피아노 소리를 듣고 온 다른 독일군들이 나누는 대화 또한 인상적인데, 한 병사가 바흐냐고 묻자 다른 병사가 모차르트의 곡이라고 말해준다.[19] 살육의 현장에서도 마치 열심히 일하다 쉬는 것처럼 장교가 치는 곡의 작곡가가 누구냐만 신경 쓰는 피도 눈물도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 그리고 바흐의 곡이 맞음에도 모차르트라고 잘못 아는 것은, 그들이 교양 있는 체하지만 실상은 무지한 상태임을 꼬집는 장면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 신체검사가 끝난 직후 노동 가능으로 분류되어 좋아하던 유대인 여성들이 어린 자녀들이 실려가는 트럭을 보고 그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눈이 뒤집혀 일제히 달려들고[20] 경비병들이 통제에 실패하는 모습도 굉장한 명장면. 아이들은 어디 좋은 데라도 가는 줄 알고 어른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데 가슴 아픈 모습이다.[21] 서슬 퍼런 SS들도 이 상황에선 감히 군중에게 쏘지 못해 하늘을 향해서만 쏘고 단순히 시위를 말리듯 붙잡기만 한다.


  • 쉰들러가 떠난 이후, 유대인들이 공장 입구의 땅바닥에서 잠을 자는 것은 유대인들의 추모 풍습이다. 실제로 유대교 전통 장례식 때는, 유족들이 찬 마룻바닥에서 자며 고인을 추모한다. 지옥 행성의 죄수[22]에도 묘사되었다.

  • 소련군 장교가 나타나자, 유대인들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고 했을 때 그 장교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라면 동쪽으로 가진 않을 거다. 그들은 당신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전쟁이 끝난 직후까지도, 나치가 점령한 동유럽 지방에서는 유대인 차별 의식이 짙게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대사다.

  • 영화 마지막 장면에 오스카 쉰들러의 노력으로 생존한 유대인들과 그 후손, 당시 생존해 있던 에밀리 쉰들러 등이 자신들을 연기한 배우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쉰들러 묘지에 참배하는 모습이 나온다. 즉 당시 실제로 생존한 본인들이 참배하는 것을 찍은 것이다.[23] 특히 쉰들러의 묘에 장미꽃을 헌화하는 이는 바로 극중에서 쉰들러 역을 맡은 배우 리암 니슨. 카메라가 멀리서 촬영하는 시점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는 있는 수준이다.


  • 2018년 재개봉 당시 스필버그는 집단적 증오가 조직화되고 산업화되면 학살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지금이 (개봉 당시보다) 더욱 위험한 시대라는 발언을 하였다. ##[24]

  • 스필버그는 대학 영화과에 다니다 중퇴 후 34년 만에 졸업을 위해 재등록했는데 영화 제작 수업의 기말 과제로 이 영화를 제출했고 우수한 학점으로 수강을 완료하였다고 한다. #

  • 아몬 괴트의 한국 성우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직접 지명했다. 그리고 성우 강구한은 엄청난 명연기로 보답하였다. 강구한은 이 일을 자신의 최고 자랑거리 중 하나로 삼는다고 한다.

  • 빨간 코트를 입은 여자아이를 맡은 폴란드 배우 올리비아 다브로브스카(Oliwia Dabrowska, 1989년생)는 스필버그와 18세가 되면 이 영화를 보겠다라고 약속했음에도, 11살 때 처음 영화를 봤다고 한다. 엄청 끔찍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다브로브스카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난민들을 돕는 봉사자로 근무하고 있다.


  • 북한에서도 예술 종사자들은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25] 일부 서방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허용되는데, 쉰들러 리스트도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다.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에서 안나가 북한 영화감독에게 서방 영화 중에 무엇을 봤냐고 묻자 감독이 패트리어트, 쉰들러 리스트, 그리고 대부를 봤다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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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초반 파티 장면에서 지배인으로 카메오 출연 하며, 이 사람도 홀로코스트 생존자다.[재개봉] A B C [2] 정확히 명단에는 1,098명이 기록되었고 150여 명을 더 구해 1,200여 명이 된다. 이로 인해 쉰들러의 묘비에도 1,200명이라고 적혀 있다.[3] 영화의 제목이 원작 소설과 다른 이유는 방주(Ark)에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보니 쉰들러 리스트가 종교 영화로 취급받고, 종교적으로 논란이 될 것을 우려하여 쉰들러 리스트로 제목을 정하였다고 한다.[4] 가끔씩 인터넷 중고서점에 물량이 풀리기는 한다.[5] 폴란스키는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그가 10살이 되던 해인 1943년, 본인은 유대인 집단 거주구역인 게토의 폐쇄 과정에서 간신히 게토를 빠져나가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으나, 어머니는 붙잡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 살해당했다. 그의 아버지는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을 하다 전후 살아남아 아들과 상봉했다.[6] 스필버그의 부모는 우크라이나 유대인이며 16~20명의 친척을 홀로코스트로 잃었다.[7] 인디아나 존스와 마궁의 사원의 여주인공이다. 스필버그에게는 두 번째 아내로, 영화 제작이 끝나자마자 결혼하여 현재까지 같이 살고 있다.[8] 이 소녀를 연기한 배우는 지금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구호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9] 폴란드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폴란드계 미국인.[10] 위 폴란드 노인의 반유대주의적 폭언은 저 사람이 네오 나치여서가 아니라 좀 복잡한 사연이 있다. 반유대주의는 원래 독일뿐만 아니라 폴란드나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등 동유럽에서도 팽배했는데, 그 이유는 1차 대전의 패전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린 나치 독일과는 좀 다른 이유였다. 수백년 전 동유럽을 지배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에 정권을 장악한 폴란드인 귀족들은 독일인유대인 상인들을 들여와 경제권을 넘겨주었고, 자국 농민들이 부르주아로 성장하지 못하게끔 막았다. 반면 연방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폴란드인우크라이나인 농노들은 이들 폴란드 귀족과 독일, 유대 상인들의 밑에서 오랜 기간 착취당해야 했다. 이때 들어온 유대인들은 농노제가 없어진 이후에도, 그리고 나치가 쳐들어오기 직전까지도 폴란드 사회의 상류층에 위치해 있었다. 이 때문에 폴란드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 그 중에서도 서민들은 자국을 갈라먹고 식민 지배하면서 학살을 일삼은 독일(+러시아)뿐만 아니라 연방 시절에 폴란드 귀족에 빌붙은 유대인들도 싫어한다. 거기다 나치 독일에게 유대인만 학살당한 게 아님에도 유대인 홀로코스트만 유명하니, 저 노인처럼 히틀러의 학살에서 유대인만 강조되는 것을 불쾌해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한다.[11] 물론 저 노인이 스필버그에게 품은 불만처럼 독일의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학살 또한 유대인 학살과 동등하게 재조명되는 것이 필요하다. 아직까지 서방 연합군과 소련의 공적에 가려진, 자유 폴란드군 및 기타 레지스탕스들이 바르샤바리비우 등지에서 불리한 상황에서도 끈덕지게 독일에 영웅적으로 항전한 기록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짚고 넘어갈 점은 동시에 역사적인 반유대주의 때문에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옹호하거나 적극적으로 돕는 이들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영화에서도 18분 43초~54초에 폴란드인들이 게토로 이주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흙덩이를 던지면서 폭언을 퍼붓는 장면이 묘사된다. 하지만 현재 폴란드 정부는 과도한 민족주의와 '독일에 저항한 폴란드' 담론 활성화에 치우쳐 자신들의 유대인 학살을 망각하며, 심지어 일부는 전술한 적대감 때문에 폴란드인 학살을 띄우면서 유대인 학살을 폄훼하기도 한다. 폴란드인 학살, 우크라이나인 학살, 유대인 학살 모두 각각 동등하게 발굴되고 알려져야 하지만, 수백 년간 수많은 민족들이 흩어져 살면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집어지고, 중층되고, 얽히고 설킨 동유럽의 상황은 이를 힘들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치에게 억압받던 폴란드-우크라이나-유대 세 민족은 서로를 돕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지워지지 않은 역사적인 적대감과 결합한 생존 본능,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독일 때문에 서로에게, 특히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몹쓸 짓도 많이 했다. 나치 독일이라면 학을 떼는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들이 가진 이런 복잡한 반유대주의 정서는 매우 유명하고, 현재까지 전쟁을 포함해 국제적으로 많은 논란이 되는 사안이다.[12] 상술했듯이 본 영화의 원작 소설을 저술할 때 작가에게 증언을 해준 사람이다. 영화에서는 폴덱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게토 초창기에는 암시장에서 쉰들러가 주문한 물건들을 암시장을 통해 구해주는 역할을 했으며, 크라코프 수용소에서는 아몬 괴트의 운전기사이자 정비사로 일했다.[13] 마틸다에 허니 선생으로 나온 배우다.[14] 쉰들러의 대사에 따르면 둘이 힘을 합치면 4천 명을 구해낼 수 있었다. 만약 그 사람이 쉰들러의 설득에 응해 둘 다 성공했다면, 쉰들러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했다고 해서 역사에 더 위대한 사람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쉰들러가 1100명을 구했으니, 3천 명 가까이 구한 그 공장주가 더 주목을 받게 되는 건 당연하다.[15] 독일 배우로, 24년 뒤 나치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설정의 대체역사물 게임 울펜슈타인 2: 더 뉴 콜로서스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연기한다. 또한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에 마드리갈이라는 기업의 수장으로, 마약 사업에 뒷돈을 댄 사실이 밝혀지자 화장실에서 자살하는 역으로도 출연했다.[16] 후요바(hujowa)는 폴란드어로 남성의 성기를 비하하는 욕설로, 후야르라는 성씨와 비슷하게 들린 점에서 착안해 붙은 이름이다.[17] 출처: Teege, Jennifer; Sellmair, Nikola (2013). Amon: Mein Großvater hätte mich erschossen. Reinbek bei Hamburg: Rowohlt.[스포일러] 다만 이것을 제작할 당시에도 의식했는지, 쉰들러의 유대인들이 다시 열차에 탑승하는 장면과 함께 지하 가스실로 걸어내려가는 듯한 앳되어 보이는 여성과 노인들의 모습을 비춰준다. 이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안도하다가 순간 바늘로 찌르는 듯한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는 평이 많다. 왜냐하면 노동력이 없다고 판단된 아이와 여성, 노인들은 아우슈비츠 도착 즉시 가스실행이라서다. [18] "팔데리, 팔데라(Valderi, valdera)"라는 후렴구로 유명하다.[19] 의미심장하게도 이 부분은 영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나온다.("Was ist das? Ist bach?" "Nein, Mozart")[20] 노동 불가능으로 분류되는 어린아이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하는 즉시 가스실로 보내져 학살된다. 따로 차출되면(=노동 불가능) 어떤 운명이 기다려지는지는 유대인들도 소문으로나마 알았다고 대화를 통해 묘사된다. 대부분 헛소문이라고 치부했으나 이것이 진짜로 눈 앞에서 최악의 형태로 실현된 것.[21] 해맑은 아이들의 모습과 경악하며 달려오는 엄마들의 모습의 대비 때문에 어린 자녀와 시청하는 부모들은 이 장면을 설명하는데 큰 곤란을 느낀다고 한다. 애초에 이 영화는 15세 이상 관람가다.[22] 의 작가 아트 슈피겔만의 단편 만화로, 정신이 불안정한 어머니의 죽음과 그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을 다룬다. 쥐 단행본에도 전체 내용이 삽입되었다.[23] 쉰들러의 공장의 회계를 담당한 이자크 슈테른은 1969년에 이미 사망해 당시 생존해 있던 이자크 슈테른의 아내 소피아 베켄로트와 극중 이자크 슈테른 역할을 맡은 벤 킹슬리가 참배 장면에 대신 등장한다.[24] 그 해에 피츠버그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하여 해당 발언을 하였다.[25] 김길선 기자는 국방과학원 근무 시절에 이러한 시야 넓히기의 일환으로 007 시리즈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