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어 슈트라서

덤프버전 :

이미지:1024px-National_Socialist_swastika.png
나치즘

[ 펼치기 · 접기 ]
이념
파시즘 · 군국주의 · 인종주의 · 범게르만주의 · 반유대주의 · 국가주의 · 국수주의 · 전체주의 · 지도자 원리
분파
국가사회주의 · 영국 파시즘 · 슈트라서주의포스트 나치즘 · 네오 나치즘(신나치주의)
정치조직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히틀러 유겐트 · 독일 소녀 동맹 ·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 · 독일 민족민주당 · 툴레 협회 · 국가사회주의 오스트리아 노동자당 · 수데텐 독일인당 ·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 · 영국 파시스트 연합 ·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 · 화살십자당 · 스위스 국민운동 · 칠레 국가사회주의 운동 · 미국 나치당 · 황금새벽당 · 오제바브란트바흐 · 세계 민족사회주의연맹 · 국민정당 우리의 슬로바키아CHEGA! · 국가사회주의 일본 노동자당· 그리스 민족사회당
군사조직
국방군,(Wehrmacht), · 국방군최고사령부,(OKW), · 방첩국,(Abwehr), · 육군최고사령부,(OKH), · 비밀야전경찰,(GFP), · 공군최고사령부,(OKL), · 해군최고사령부,(OKM), · 돌격대,(SA), · 친위대,(SS), · 비밀국가경찰,(Gestapo), · 보안국,(SD), · 아넨에르베,(Ahnenerbe) · 무장친위대,(Waffen-SS), ·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 질서경찰,(OrPo),,, · 아조프 연대 · 바그너 그룹
인물
아돌프 히틀러(퓌러) · 마르틴 보어만 · 하인리히 힘러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헤르만 괴링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루돌프 헤스 · 그레고어 슈트라서 · 에른스트 룀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오토 슈트라서 · 아돌프 아이히만· 카를 슈미트
계획
게르마니아 · 레벤스라움 ·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 레벤스보른 · T4 작전 · 홀로코스트· 대게르만국
선전물
나의 투쟁 · 의지의 승리 · 올림피아 ·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 푈키셔 베오바흐터
국가(國家)
나치 독일 · 헝가리 국민단결정부
상징
나치식 경례 · 블루트파네 · 슈바르체존네· 하켄크로이츠
관련 틀
히틀러 틀 · 파시즘 틀 · 추축국 틀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수




이미지:icon-roman-fasces-vector-icon-roman-fasces-170587569.png
파시즘

[ 펼치기 · 접기 ]
이념
파시즘 · 군국주의 · 국가주의 · 국수주의 · 전체주의 · 권위주의 · 대중주의 · 민족주의 · 반공주의 · 지도자 원리 · 사회진화론 · 반자유주의 · 반자본주의 · 반민주주의 · 영웅주의 · 우생학 · 협동조합주의
분파
원류 파시즘 · 이탈리아 파시즘 · 나치즘(네오 나치즘포스트 나치즘) · 국민생디칼리슴 · 팔랑헤주의(프랑코주의파일:whattheydo.png) · 영국 파시즘 · 렉시즘 · 군단주의오스트리아 파시즘 · 국민급진주의 · 교권 파시즘 · 메탁사스주의파일:whattheydo.png · 천황제 파시즘파일:whattheydo.png · 프랑스 파시즘 · 좌익 파시즘파일:whattheydo.png(슈트라서주의 · 민족 볼셰비즘) · 네오 파시즘포스트 파시즘 · 유라시아주의 · 일민주의파일:whattheydo.png · 대안 우파파일:whattheydo.png
정당/조직
국가 파시스트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팔랑헤(통합 팔랑헤파일:whattheydo.png) · 신 팔랑헤 · 우스타샤 · 전위조국당 · 화살십자당 · 영국 파시스트당 · 영국 파시스트 연합 ·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 · 렉스당 · 국가사회주의 오스트리아 노동자당 · 조국전선 · 국민연합(노르웨이) · 라푸아 운동 · 슬로바키아 인민당 ·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 · 독일 민족민주당 · 공화 파시스트당 · 민주 파시스트당 · 산마리노 파시스트당 ·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 · 국민대중행동파일:whattheydo.png · 국민조합주의자 · 국민정당 우리의 슬로바키아 · 민족 볼셰비키당 · 유고슬라비아 국민운동 · 육군전우협회 · 프랑키스트 운동 · 프랑스 인민당 · 불의 십자단파일:whattheydo.png · 황금새벽당 · 회색 늑대들 · 국민급진기지 · 캐나다 파시스트 연합 · 국민연합당(캐나다) · 아메리카 은색 군단 · 대정익찬회파일:whattheydo.png · 동방회파일:whattheydo.png · 사쿠라회파일:whattheydo.png · 페르콩쿠르스츠 · 브라질 통합주의 행동 · 칠레 국가사회주의 운동 · 오제바브란트바흐 · 러시아 파시스트당 · 소련 자유민주당파일:whattheydo.png(민족 볼셰비키당CHEGA! · 유라시아당 · 러시아 자유민주당파일:whattheydo.png) ·그리스 민족사회당
국제 조직
추축국 · 1934년 몽트뢰 파시스트 회의
군사 조직
추축군 · 슈츠슈타펠(독일) · 돌격대 · 히틀러유겐트 · 아인자츠그루펜 · 검은 셔츠단 · 슈츠슈타펠(오스트리아) · 보국단 · 대천사 미카엘 군단 · 우스타샤 민병대 · 아메리카 은색 군단 · 마카필리파일:whattheydo.png · 발리 콤페타르파일:whattheydo.png · 반볼셰비키의 프랑스 지원군단 · 강철늑대 · 황도파파일:whattheydo.png · 남의사파일:whattheydo.png · 아조프 연대파일:whattheydo.png · 바그너 그룹
인물
아돌프 히틀러 · 에리히 루덴도르프 · 베니토 무솔리니 · 프란시스코 프랑코파일:whattheydo.png · 안테 파벨리치 · 오스왈드 모슬리 ·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 아우구스티나스 볼데마라스 · 비드쿤 크비슬링 · 요제프 티소 · 살러시 페렌츠 · 엥겔베르트 돌푸스 · 쿠르트 슈슈니크 · 안톤 무세르트 · 레옹 드그렐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그레고어 슈트라서 · 오토 슈트라서 · 에른스트 룀 · 카를 슈미트 ·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 율리우스 에볼라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기타 잇키파일:whattheydo.png · 오카와 슈메이파일:whattheydo.png · 안호상파일:whattheydo.png · 이범석파일:whattheydo.png · 장제스파일:whattheydo.png · 호리아 시마 · 줄리아노 고지 · 마르셀 뷔카르 · 자크 도리오 · 프랑수아 드 라 로크파일:whattheydo.png ·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 · 플리누 사우가두 · 이오인 오더피 · 조르주 소렐파일:whattheydo.png · 조반니 젠틸레 · 알렉산드르 두긴 · 윌리엄 피어스 · 윌리엄 더들리 펠리 · 찰스 코글린
국가
나치 독일 · 파시스트 이탈리아* · 스페인국파일:whattheydo.png · 크로아티아 독립국 · 헝가리 왕국 · 루마니아 왕국 · 노르웨이 국민 정부 · 오스트리아 연방국 ·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 산마리노 공화국 · 일본 제국파일:whattheydo.png · 국민군단연합 불가리아
* 1922~1943의 이탈리아 왕국과 1943~1945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파일:whattheydo.png 파시즘 여부 논란 있음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조직국장
그레고어 슈트라서
Gregor Straßer

파일:그레고어 슈트라서.jpg
출생
1892년 5월 31일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가이젠펠트
사망
1934년 6월 30일 (42세)
독일국 베를린
정당


최종계급
독일제국군 중위 (철십자 훈장 수여)
시민권
독일인
학력
뮌헨 대학교 (약학 / 학사)
가족
부모님, 동생 오토 슈트라서
경력
독일제국군 중위
약사
돌격대 바이에른 지역 지휘관
바이마르 공화국 국회의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선전국장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조직국장
화학제약회사 이사

1. 개요
2. 생애
2.1. 숙청
3. 평가
4. 슈트라서가 정권을 잡았다면?
5. 소속 정당
6. 여담



1. 개요[편집]


독일의 약사 출신 정치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간부 직위를 수행했다. 그의 아우 오토 슈트라서 역시 간부였으며 형이 죽은 이후에 독일을 탈출하여 반() 히틀러 운동을 벌였다.


2. 생애[편집]


1892년 독일 제국바이에른 왕국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에서 시험을 치른 뒤 1910년부터 약사 견습생으로 일하였고, 뮌헨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학업을 중단하여 대전에 참전하였다. 전쟁 중 현지임관하여 중위로 복무하고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는다. 종전 후 전역해 1918년 뮌헨 대학을 졸업하며 본격적으로 약사로 일했다.

1919년부터 우익 운동을 했으며, 1920년에 돌격대에서 나치당에 입당하였다. 1921년에 히틀러와 처음 대면하게 되었고, 오버바이에른 지역 나치 돌격대 지휘관직을 지냈다. 1923년 뮌헨 폭동[1]에서 돌격대의 한 부대를 이끌고 참가하였다. 폭동 실패 후 벌어진 재판에서 1년 반의 징역형을 받았으며, 1924년 5월에 가석방 되었다. 뮌헨 폭동 이후 1924년 6월 12일 나치당 잔당 세력과 독일 민족자유당이 합류한 국가사회주의 자유 운동에 참가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25년 히틀러가 출옥하고 나치당을 재결성하기로 하자, 노동자 계층의 권익을 우선시하는 성향이라 히틀러의 명령으로 노동자 계층이 많은 북독일 지역에서 나치당을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고 북독일 지역에서 전권을 위임받는다.

슈트라서의 지도 하에 나치당은 북서독일 지역에서 지부수가 증가하였고 세력이 강화되었다. 북서독일은 바이에른과 달리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강세를 보이는 지역이 많아 노동자 계층의 지지가 필요했다. 원래 슈트라서 형제의 성향도 나치당 내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노선 분파 중에 사회주의 우위 노선이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서 좌파적 성향을 띄었고, 이 때문에 나치당 베를린 지역구는 반 자본주의 사상을 강화하였으며, 이 강화 노선이 민족주의를 더 중시한 헤르만 괴링빌헬름 프리크 등 우파 성향의 뮌헨의 중앙당과의 대립을 일으키기도 했다. 히틀러는 초기에는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1926년에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당내 강령이 지나치게 우편향되었다는 의견을 내고 당헌 개정을 요구했으나, 나치당 주류인 뮌헨에선 이에 극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국 당내 노선 차이는 중앙당에서 그레고어의 의견이 무시되고 히틀러가 "내가 곧 이데올로기"라는 메시아 선언을 하면서 마무리되는데, 실제론 뮌헨 중앙당의 민족주의 계열이 당내에서 세력이 컸고 같은 좌파 성향이라고 여긴 북독일 베를린 지역의 파울 요제프 괴벨스조차 지도자 원리에 승복해버렸기 때문에 슈트라서의 당내에서 입지는 점점 약해졌다.

그러나 굴복 직후에도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히틀러에게 낯간지런 찬양사를 쓸 정도로 히틀러에게 반기를 들진 않았다. 직접 당내 강령 유인물을 회수하며 갈등보단 지도자에 대한 충성으로 일을 덮어버린 것. 석달 후 슈트라서는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히틀러가 직접 문병하여 오랫동안 독대하며 깊은 대화를 나누며 갈등은 일단 봉합되었다. 반면 동생 오토 슈트라서는 이런 나치당의 반응에 반발하여 당을 탈당하고 민족볼셰비즘 쪽으로 노선을 바꾼다.

슈트라서는 1927년 나치식 경례가 퍼져나가는데도 일조했다. "하일 히틀러"는 '지도자에게 개인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충성의 맹세이며 지도자에 대한 깊은 사랑과 국가사회주의 운동에 바치는 내면적 헌신'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주군과 가신!

지도자와 동지들의 끈끈한 유대야말로 귀족적이면서도 민주적인 독일의 유서 깊은 전통인데 그것은 바로 나치당 구조의 본질이기도 하다. 벗들이여, 오른팔을 높이 들어 나와 함께 자랑스럽게 외치자!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겠다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치겠다고! "하일 히틀러!"[2]

이후 슈트라서는 나치당 선전국장을 맡으며 북독일 노동자 계층에 파고들었다. 나치당 기세는 전국적으로 정체인 가운데 1928년 벌어진 선거에서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되지만 이 해 당선된 나치당 의원수는 12명에 불과할 정도. 선거에서 나치당의 지지율은 오히려 전보다 더 떨어졌지만 골수분자들은 훨씬 늘어나 맥주집 폭동 시절에 비하면 당원 수가 두 배나 늘어난 10만명에 달했다. 이런 세력은 훗날 나치당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슈트라서는 선전국장을 사임하고[3] 당내 업무를 총괄하는 조직국장 자리로 이임했고, 1930년경부터 나치당이 경제 위기를 기회삼아 원내 제2당이 되며 정치적으로도 거물이 되었다. 가톨릭 중앙당 하인리히 브뤼닝과의 정책 연합을 시도하기도 했고, 나치당 내 거물 국회의원으로 여러 곳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브뤼닝의 가톨릭 중앙당 뿐만 아니라 온건우파 부르주아 정당들 사이에서도 신뢰할 만한 인물이란 평을 얻었다.

1932년 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총리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접촉해와서 연정을 제안하여[4] 이를 고려했는데, 이 사실을 안 히틀러의 격노를 사서 결국 당직과 국회의원직을 모두 사임하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2.1. 숙청[편집]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 내각이 성립했다. 당시 슈트라서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독일에 머물고 있었다. 당무에는 다시 복귀하지 않고 화학제약회사 이사직으로 스카웃되었다. 그는 정계 동료를 만나기를 거부했고, 동생 오토가 만든 정치단체 흑색 전선에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1934년 6월 18일 루돌프 헤스에게 편지를 보내 히틀러에게 변함없는 충성심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2주도 지나기 전인 6월 30일, 장검의 밤 사건 당시 게슈타포에 납치되었으며, 2시간 뒤 감옥에서 사살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발표되었다. 동생 오토는 국외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다.

에른스트 룀과 패키지로 살해되고 좌파 성향이라 룀과 정치적 성향마저 유사했다고 곧잘 치부되지만, 룀을 비롯한 당내 과격 좌파와 슈트라서의 정치 노선은 전혀 달랐다. 룀과 돌격대는 반동 척결을 주장하며 사회혁명을 부르짖은 과격 좌파였고, 슈트라서는 반자본주의 성향은 있었으나 비교적 온건한 노동자 권익 중시 성향이었으며[5], 정치적 행보로는 우파 부르주아 정당과 연정을 주도할 정도로 유연성이 있었다. 당연히 둘은 서로 사이도 좋지 않았고, 아예 슈트라서가 룀이 동성애자인 점을 비꼬아 룀을 암퇘지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3. 평가[편집]


나치당 내부에서 좌파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것은 현재 기준의 좌우 구별 스펙트럼과 거리가 멀다. 반자본주의 성향이라 좌파로 분리되긴 하는데 나치당 내 반자본주의와 반공주의는 반유대주의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 아돌프 히틀러에게 변함없는 개인적 충성을 바쳤고 일종의 음모론인 반유대주의에도 반대하지 않았다.

결국 나치당 주류인 민족주의 세력과는 다른 점이 많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레고어 슈트라서도 나치이고, 히틀러 개인의 숭배까지는 나가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히틀러를 천재이자 지도자로 인정하며 그를 대체할 인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종합적으로 보면 여느 나치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인종주의자였으며, 히틀러에게 바치던 개인적인 충성심은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개인적인 능력으론 당내 행정에 관해서는 탁월한 업무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1920년대의 나치당 제2인자는 외부에서 보기엔 괴링이 아니라 그레고어 슈트라서로 여길 정도.

그러나 정치인의 필수 능력인 연설에선 별 재능이 없었다. 나치당의 베를린 관구 기관지인 캄프(kampf) 출판사의 여러 출판물 주필도 맡았지만 형편없이 안 팔려서 괴벨스가 이런 약점을 발견하고 자신이 따로 출판물을 만들어버릴 정도. 결국 연설 실력에서도, 글 쓰는 능력에서도 괴벨스에게 철저히 밀린 슈트라서는 선전국장 자리도 뺏겨버리고 베를린 관구도 괴벨스에게 넘어가는 등 괴벨스에게 당내 실권을 잃게 되었다.


4. 슈트라서가 정권을 잡았다면?[편집]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19 - 1920
정계 입문


1920 - 1923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23 - 1924
징역형으로 인한 탈당
가석방으로 정계 복귀

1924 - 1925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25
나치당 복당을 위한 탈당


1925 - 1934
복당
정계 은퇴
숙청


6. 여담[편집]


하인리히 힘러를 잠시 비서로 둔적이 있다. 무능해서 힘러가 짤렸다는 낭설이 있지만, 오히려 슈트라서가 나치당 선전국장이던 시절 힘러는 튀링겐과 오버바이에른 지역에서 한 지역에만 집중해서 유세하는 아이디어를 내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힘러는 윗사람들의 눈에 들어 출세하게 된다.

나치당 주요 인물 중에선 괴링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앙숙이었다. 괴벨스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비슷한 좌파성향이어서 슈트라서가 일종의 멘토 역할을 하기도 했었지만, 괴벨스가 주류와 타협하고 히틀러에게 승복하자 불편한 사이가 되었으며 이후 베를린시당을 놓고 갈등을 빚으면서 서로 라이벌이 될 정도로 사이가 악화되었다. 나치당 과격 좌파 에른스트 룀과도 성향이 맞지 않았는데, 슈트라서는 노동자 권익 중심의 현실참여형 온건 성향이기 때문. 기억해야 할 건 상술한대로 좌니 우니 하는 것은 상대적 성향일 뿐이고, 1920~30년대 독일기준이라는 사실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4 23:03:15에 나무위키 그레고어 슈트라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맥주홀 폭동이라고도 불린다.[2] ≪히틀러 Ⅰ≫ -이언 커쇼-[3] 후임은 당시 베를린 대관구장 파울 요제프 괴벨스였다.[4] 슈트라서에게 부총리와 프로이센 총독(친위 쿠데타로 인하여 중앙정부가 주정부를 직접 통치함) 노동부 장관직 등을 제안했다. 슐라이허는 이를 통해 나치당 국회의원 60명 정도가 슈트라서를 따라 이탈할 것으로 판단했다.[5] 단 국제 노동자 연대나 계급투쟁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나치당에서 이것은 조국과 민족이 없는 유대인식 사회주의으로 공산당을 비난하는 근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