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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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1차 위기: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1848-1852)
3.1. 발단
3.2. 대외 상황
3.3. 전개
3.4. 종결: 1852년 런던 의정서
5. 국제연맹 주민투표
6. 관련 문서


영어: Schleswig-Holstein Question
독일어: Schleswig-Holsteinische Frage
덴마크어: Spørgsmålet om Sønderjylland og Holsten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건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있는건 단 세명밖에 없다 – 이미 세상을 뜬 국서 – 이미 미쳐버린 한 독일 교수 – 그리고 이미 이 모든것을 잊어버린 나.

Only three people have ever really understood the Schleswig-Holstein business – the Prince Consort, who is dead – a German professor, who has gone mad – and I, who have forgotten all about it.

헨리 존 템플, 영국 총리



1. 개요[편집]


19세기 중반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의 귀속에 관하여 벌어진 외교적 위기. 두 차례의 전쟁이 이 문제로 인해 벌어졌으며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무력으로 최종 종결되었다.


2. 배경[편집]


슐레스비히 공국은 바이킹 시대 성립되어 계속되어온 덴마크계 국가이며 12세기 경 덴마크 국왕의 휘하에 들어온, 지속적으로 덴마크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국가이다. 홀슈타인 공국은 역사적으로 독일계 국가였으며 신성 로마 제국독일 연방의 가맹국이었으나 1460년 크리스티안 1세부터 덴마크 국왕이 공작위를 겸하던 국가였다.

따라서 이 두 국가들은 덴마크와의 동군연합 상태로 수백년간 있어왔고 입법의 시스템이 슐레스비히, 홀슈타인과 덴마크간 차이점이 있을지언정 세 국가 모두 덴마크 국왕의 전제군주제 휘하에 있었기에 문제없이 유지되었다.

민족적으로는 홀슈타인은 덴마크인 공작에 의해 통치되던 독일계 다수인 국가였고 슐레스비히는 전통적으로 덴마크계였지만 지속적으로 독일계 인구가 증가하여 19세기 초에는 남부 슐레스비히 상당수는 독일계가 다수를 점하고 있던 상태였다.

따라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상황은 기존까지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던 상황이지만 민족주의자유주의가 발흥한 19세기 무렵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3. 1차 위기: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1848-1852)[편집]



3.1. 발단[편집]


1848년, 덴마크에서는 자유주의에 입각한 헌법이 제정되었다.(1848년 혁명) 하지만 전술한듯 덴마크,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은 각기 다른 정부를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고 1848년 이후에는 덴마크의 정부는 사회-경제적, 정치적 개혁을 이루고자 하던 자유주의 인사가 등용된 반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이러한 정치개혁을 반대하는 귀족들이 힘을 쓰던 상황이었다. 이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민주적 정부기관 도입으로 약화, 권력을 잃을 것을 우려했다.

또한 덴마크에 집권한 자유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슐레스비히에서 점점 늘어나는 독일계들의 영향력과 (과거에도 독일계였고) 독일 연방의 일부인 홀슈타인 공국이 홀슈타인과 덴마크에 독일의 영향력 행사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고 이들을 점진적으로 덴마크 본토와 통일시키기를 희망했다.

유약하여 자손을 남기지 못할 것으로 여겨지던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7세[1]를 우려한 그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8세는 프레데리크 7세의 후계로 먼 친척 크리스티안 9세를 들였는데[2], 크리스티안 9세가 덴마크 왕위는 부계 후손으로서 즉위하게 되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으로는 모계 후손으로 연결되기에 살리카법에 저촉되어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따라서 덴마크와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의 분리를 막기 위해 1846년 프레데리크 7세는 불법적으로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들에 모계 혈통으로 상속을 허가하는 칙령을 내려 홀슈타인의 반발을 샀다.

이러한 우려와 반발들에 전부 건드리듯 1848년 3월 27일 프레데리크 7세는 기존 자치권을 유지는 하는 선에 슐레스비히 공국의 덴마크로의 합병을 선언,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에서의 즉각적인 반대를 일으키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거주 독일인의 봉기로 이어졌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노어(Noer) 공 프레데리크가 "라우엔부르크" 제5 소총군단과 킬 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렌츠부르크 요새를 차지하면서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발발한다.


3.2. 대외 상황[편집]


당시 덴마크 해협은 발트해의 출구로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였고 당연히 덴마크와 관련된 문제는 열강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프로이센 왕국은 덴마크에 유약한 국왕 프레데리크 7세가 갓 집권한 상황과 프랑스프랑스 2월 혁명으로 발이 묶여있는 상황을 호재로 보아 프로이센을 확장하고 프로이센의 국제적 위상을 높을 절호의 기회로 보아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에 참전했다. 또한, 당대 프로이센 정부가 독일 민족주의에 찬동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독일 통일에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독일 민족주의를 이름으로 참전, 독일계 지역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해방할 시 프로이센 대내의 독일 민족주의자들을 만족시키고 독일 다른 지역의, 프로이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여겼다.

영국의 경우 당대 최강의 해군 열강이었던 만큼 덴마크 해협에 영향이 갈 해당 전쟁에 관심을 보였는데, 영국의 입장에서 약소국인 덴마크가 덴마크 해협을 쥐고 있는 편이 유리했기에 프로이센과 같은 다른 열강이 해협을 손에 넣는 것을 반대, 추후 프로이센의 개입에 반대했다.

러시아 제국 또한 덴마크 해협에 프로이센의 영향력이 가해질 것을 우려, 덴마크를 지지했다. 거기에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설령 덴마크의 영토가 프로이센으로 합병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덴마크를 스칸디나비아 통합 움직임에[3] 가담하게 만들어 발트해에서 러시아 제국 해군의 입지를 위협할 강대국의 등장을 우려했다.


3.3. 전개[편집]


1848년 4월 12일, 독일 연방 의회는 슐레스비히 임시정부를 인정, 프로이센의 개입을 지지하였다. 따라서 프로이센군이 덴마크에 진입, 초반에 여럿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열강의 개입 없이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프로이센의 예상은 빗나가고 스웨덴은 덴마크에 자원병을 파견, 영국과 러시아는 프로이센에 현상유지를 준수하란 경고를 가했고 같은 독일계 국가였던 오스트리아 제국 마저 프로이센 지지를 거부했다.

일련의 승리와 열강들의 경고 후 프로이센은 프로이센군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으로부터 철군을 조건으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을 제안하나 거절당한다. 이렇게 프로이센은 한쪽에서는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더 강력한 행동을 요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열강들이 위협하는 상황에 결국 협상에 임한다.

휴전이 맺어지고 프로이센과 덴마크 양측은 런던에서 영국의 중재 하에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이 덴마크와의 동군연합과 독자적 정부 모두 유지되는, 현상유지안이 제안되고 이는 영국과 러시아의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덴마크는 여전히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에 합병하고자 하였고 결국 협상이 실패, 전쟁이 계속된다.

1849년 2월, 협상 종결 이후 프로이센군은 덴마크 본토까지 진격하였고 7월에 다시 휴전이 맺어져 협상이 재개된다.

덴마크는 슐레스비히 합병에 대해서는 뜻을 굽혔으나 여전히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들의 모계 혈통 상속에 대해서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이에 대한 협상은 1852년 런던 의정서 조인까지 이어진다. 다만 프로이센의 전쟁으로부터 철수는 합의되어 말뫼 조약으로 프로이센과 덴마크간 평화는 맺어지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홀로 남겨지고 1852년 덴마크에 진압당했다.


3.4. 종결: 1852년 런던 의정서[편집]


당대 열강들인 오스트리아 제국, 프랑스,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영국과 발트해 국가들 덴마크스웨덴이 조인한 1852년 런던 의정서는 덴마크의 슐레스비히, 홀슈타인(과 라우엔부르크)간 동군연합을 유럽 평화 유지에 필요한 것으로 하여 덴마크의 동군연합은 유지되었다. 따라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독립을 요구한 프로이센과 슐레스비히의 합병을 원했던 덴마크 모두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덴마크가 제정하였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의 상속법 개정은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프레데리크 7세의 사후 덴마크의 분열에 대한 위협은 여전히 유지되었고 이는 결국 이후 아래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4. 2차 위기: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국제연맹 주민투표[편집]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의 패전 이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 그 중 슐레스비히 지역은 국경조정에 들어갔다. 본래 슐레스비히는 독일인 인구와 덴마크인 인구 모두가 거주하던지라 주민투표로 슐레스비히를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슐레스비히는 북부, 중부, 남부 세 지역으로 나뉘었고, 이중 북부와 중부가 주민투표를 시행했다. 결과는 북부는 덴마크 합병, 중부는 독일 잔류로 결정되었고, 중부는 남부에 합병되어 지금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이른다.

참고로 이 투표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10세에 의해 '부활절 위기'라는 덴마크의 정치 위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크리스티안은 강성 민족주의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총리 칼 테오도르 잘레에게 중부를 강제 합병하라고 명령했는데, 잘레는 왕명에 불복하고 북부만 합병한 채 사임했다. 이에 왕이 진노하여 내각을 해산하고 보수파 내각을 새로 결성했는데, 부활절 기간에 일어난 이 사건이 바로 부활절 위기다.

그러나 시민들은 왕의 독선에 크게 반발했고, 그는 결국 내각을 다시 해산한 뒤 총선을 치러야 했다. 이후 덴마크 왕의 권력이 크게 실추되었고, 마침내 입헌군주제가 정착하기에 이른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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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자손 없이 사망했다.[2] 현 덴마크 왕가인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시조.[3] 19세기 중반은 스칸디나비아 통일 운동도 활발하던 시기였다. 여담으로, 동화책 작가로 잘 알려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또한 스칸디나비아 통합 지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