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요시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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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住吉会(주길회), すみよしかい

1. 개요
2. 역사
3. 역대 회장
4. 여담
5. 관련 사건사고



1. 개요[편집]


일본 3대 야쿠자 조직 중 하나로 2019년 기준 약 4,500여 명의 조직원 수를 거느리는 거대 조직이자, 도쿄에서도 알짜배기에 속하는 미나토구 아카사카를 거점으로 하는 조직이다. 활동거점이 일본의 수도, 그중에서도 알짜배기 땅이다 보니 수입규모에서 히로시마현과 오키나와현을 제외한 일본 전국 45개 도도부현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야마구치구미와 비교해도 동급이거나 좀 낮은 수준 일정도로 막강한 자금력을 자랑한다.[1] 이나가와카이가 가장 전통적인 야쿠자 형태라면 스미요시카이는 가장 현대적인 야쿠자 형태로 알려져 있다.

2. 역사[편집]


스미요시카이(住吉会, 주길회)는 메이지 시기 스미요시쵸의 주인이라고도 불린 이토 마츠고로가 현재 도쿄의 시바우라 일대[2]에 형성한 스미요시 일가를 전신으로 하는 조직이다. 처음엔 스미요시 일가라는 단일 조직으로 시작된 2대째인 1918년 도쿄 한복판으로 거점을 옮기고 이름을 본격적으로 스미요시카이라는 이름으로 바꾼다.

항만지역에서 유명 폭력조직들이 나타난 경우가 많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저숙련 고강도 고위험 일용직 노동자가 많이 모인 지역이 폭력 조직의 발생과 발달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고용이 안정적이고 대우가 좋은 고숙련 노동자[3]들은 굳이 폭력조직과 같은 위험한 일에 가담할 매력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전문 기술을 가진 이상 고용시장에서도 어느 정도 좋은 대우를 받기 때문에 굳이 폭력조직까지 결성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지킬 이유도 없다. 고용시장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고 싶다면 굳이 범죄에 손대는 폭력조직보다 조합을 결성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리고 저숙련 노동자 중에서도 저임금 저강도 노동자가 많은 경우 임금 수준도 낮아 폭력조직 등을 성장시킬만한 잉여 자본을 축적하기 어렵다. 이에 비해, 일이 힘들고 위험하지만 그만큼 보수도 좋은 일자리가 많은 지역에서는 높은 보수를 기대하고 찾아온 뜨내기 노동자들도 많아지고, 이에 따라 경쟁도 치열해질 뿐 아니라,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은 그만큼 거칠어지기도 쉽다. 이런 거친 사람들 틈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고용주 측은 노동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조직을 결성할 필요성이 커지는 것. 많은 폭력조직들이 이런 집단으로부터 발전해왔다. 이 점에서 항만지역의 경우, 기계화 이전까지 배에 짐을 싣고 내리는 일은 몹시 힘들고 위험하지만 숙련된 기술은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4] 이런 조직이 자연스럽게 결성될만한 상황이었던 것.

사실상 이때까지만 해도 그저 그런 지역군 소조직으로 존재했던 스미요시카이가 대규모 조직으로 발전하게 되는 기반을 닦은 건 1958년 스미요시카이의 3대 회장 아베 시게사쿠이다. 이전까지 지역 단일 조직의 오야붕에 그쳤던 아베 시게사쿠는 야마구치구미의 세력 확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야마구치 구미처럼 관동의 28개 야쿠자 조직의 연합을 시도했고 이를 미나토 카이라고 이름 짓고 그 자리에 나름 명성이 있던 헤이타로 일가의 두목인 아오타 도미타로를 형식상의 회장으로 앉혀놓는다.

이렇게 형식상의 회장 자리로 유지되던 미나토카이는 62년 스미요시카이의 4대째 두목인 세키가미 요시미츠에 의해 통째로 흡수되고 그 이름을 아예 스미요시카이로 바꾸게 된다. 이렇게 급격한 성장을 거듭한 스미요시카이는 64년에는 아예 관동권 조직들의 모임인 관동회의 이사장 자리에 세키가미 요시미츠가 취임하면서 정점을 달리게 되는데 이 시기 스미요시카이의 영향범위는 비록 야마구치구미에 비해 뒤지지만 수도를 거점으로 하는 만큼 수익규모는 더욱 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렇게 커져버린 조직은 결국 경찰의 대대적인 야쿠자 수사인 정상작전으로 인해 형식상으로 65년에 해산하고 67년에 5대째 회장인 호리 마사오가 해산한 조직을 모아 스미요시 연합을 결성함으로써 다시 시작된다. 이렇게 결성된 스미요시 연합은 상당한 폭력성을 자랑했는데 그러나 결국 이러한 폭력성으로 인해 82년 산하 조직인 이케다카이가 항쟁 도중 경찰관을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케다카이를 절연시켜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렇게 절연된 이케다카이는 규슈의 도진카이에 의탁하게 되는데[5] 도진카이는 이를 도쿄 진출의 기회 로보고 산하 조직원들을 도쿄에 대규모로 파견,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결국 이 항쟁은 도진카이와 스미요시카이가 화해를 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되나 이 과정에서 스미요시 연합은 도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잃고 관서계 조직들이 도쿄로 진출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후 스미요시 연합은 91년 다시 이름을 스미요시카이로 바꾸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1년 6대 회장 니시구치 시게오가 취임하였고 1998년에 7대 회장 후쿠다 하레아키가 취임하였다. 2014년 8대 회장 세키 이사오가 취임하였다.

스미요시카이는 일본 혼슈 내에서도 유일하게 가장 최근까지도 야마구치구미와의 연을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걸을 정도로 [6] 야마구치구미와 사이가 안 좋았다. 실제로 야마구치 구미와는 엄청난 앙숙관계이며 이나가와회와 함께 야마구치구미의 관동 진출의 가장 큰 장벽이었다.

스미요시카이의 가장 큰 특징은 야마구치구미가 느슨한 연합형태지만 한편으로는 야마구치구미의 회장이 정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인 것과 달리 회장은 명목상의 직함에 가깝고 실제 권력은 최상위 조직의 두목들이 나눠서 돌려먹는 구조라는 점에 있다. 실제로 이러한 스미요시카이의 현대적인 조직 특성은 야마구치구미에 비해 상납금의 규모가 작고 연합에 속하는 각 조직의 자치권이 상당히 폭넓게 보장되는 부분으로 이어지게 되며 한편으로는 이케다카이의 사건에서 나타난 것처럼 파문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부분이 상당히 잦은 편으로 이어지기도 하다.

2021년 4월 8대 두목 세키 이사오가 암으로 인해 신설된 대표[7] 직위로 물러나고 회장은 오가와 슈지에게 물려주었다.

2022년 5월 31일 대표 세키 이사오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3. 역대 회장[편집]


  • 초대 이토 마츠고로
  • 2대 쿠라모치 나오키치
  • 3대 아베 시게사쿠
  • 4대 세키카미 요시미츠
  • 5대 호리 마사오
  • 6대 니시구치 시게오
  • 7대 후쿠다 하레아키
  • 8대 세키 이사오
  • 9대 오가와 슈지


4. 여담[편집]


  • 1990년대 버블 붕괴 전의 초호황기의 일본 신주쿠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특히 한국인이 많았는데, 그중 한 유학생의 말을 빌리자면, ‘술집 오픈 준비할 즈음, 그러니까 한 5시쯤이면 보호비 명목으로 돈 뜯어 내려는 스미요시카이 조직원이 온다. 팔에 일수 가방을 낀 빡빡이가 계단에서 종업원한테 내려오라고 휘파람을 분다. 내려가면 웬 장미 한 송이를 준다. 아무것도 없이 돈만 받고 가기는 뭐하니까 그 장미를 돈 주고 사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점이나 식당 주인은 10,000엔 정도 내고 장미를 사야 했다고 한다.[8]


  • 2001년에 지바현 카시와시에서 스미요시계 하부조직이 한국인 유학생을 라이벌 조직원으로 착각하고 오인해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한국에도 화제가 되었으며 실행범들은 체포되어 사살범은 무기징역, 나머지 조직원들은 징역 10~20년 정도를 받았다. 이후 유족은 스미요시카이에 민사소송을 제소하여 최종적으로 합의가 되어 7천만 엔 정도를 배상받았다고 한다.기사

  • 산하 조직인 아사쿠사 다카하시구미(浅草高橋組)는 도쿄의 명물인 아사쿠사 산자마츠리에 자주 참가하여 조직원들이나 조직원들의 여성들이 전신문신을 노출하면서 가마행렬을 주도하고 있다.영상. 본래 마츠리에 전통적인 야쿠자 형태인 데키야 조직들이 끼어드는거야 오래된 전통인 면이 있어 눈감아주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런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는 축제에 다카하시구미, 쵸지야카이, 야마구치구미, 소아이카이, 나카무라구미 등등 여러 야쿠자들이 자꾸 끼어들어서 조직의 세과시를 하거나 조직 운영자금 벌이에 마츠리를 이용하거나, 다툼이 발생하는 등 폭배조례를 위반하는 모습이 종종 발생해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 한구레 조직 이었던 관동연합 OB들이 스미요시 카이에 많이 들어간것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스미요시카이는 한구레같은 폭력조직들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외주를 맡기는 야쿠자 조직으로 알려져있다. 폭대법때문에 야쿠자 조직에 직접적으로 소속되면 손해가 많기에 최근 일본의 많은 야쿠자 조직들은 범죄자들을 굳이 자신의 조직원으로 가입시키지않고, 외주형태로 폭력이 동원되는 일을 맡기는 경우가 많다.[9]


5. 관련 사건사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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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과거 스미요시카이의 보스였던 니시구치 시게오의 은닉자산+현금자산+실물자산을 총합산한 개인 자산이 10억 달러는 넘었을 거라는 예측도 있었다. 시노다 켄이치도 못 넘길 금액이다.[2] 도쿄와 요코하마 사이에 있는 항만지역이다. 일본의 3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 스미요시카이, 이나가와카이 모두 항만지역을 기점으로 발전한 조직들인데, 사실 세계적으로 봐도 대규모 유명 폭력조직들의 상당수는 무역에 의해 수많은 이권이 오가는 항만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3] 예를 들어 공장지대의 숙련공이나 기술자[4] 수십 킬로그램 이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한 사람이 겨우 걸어 다닐만한 판자 다리를 건너는 일이 대표적.[5] 도진카이는 일본 내 야쿠자 조직들 중에서도 가장 폭력적인 항쟁을 많이 일으킨 것으로 유명한 무투파 조직이다. 실제로 야마구치구미의 규슈 진입 때도 수많은 총격사건으로 많은 사상자를 만들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6] 2011년에 와서야 정식으로 관계를 재정립했다.[7] 타 조직의 소사이(총재)와 비슷한 느낌의 직위로 보인다.[8] 이러한 갈취 방식은 오늘날에 와서는 더욱 추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최근의 한 조직은 라인 스티커를 대량으로 만들어서 가게주들에게 강매하는 방식으로 했다가 걸리기도 했다.[9] 야쿠자의 고령화는 이런 현상으로인한 착시이기도하다. 젊은이들을 굳이 조직원으로 가입시키지않고, 외주형태로 돈만 주고 일을 시키는것. 그러다가 나이가 들고 어느정도 실적과 신뢰가 쌓인 이들만 정식 조직원으로 받아들여주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