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에마쓰 요시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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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외교관 출신 정치인.
2. 생애[편집]
1956년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야하타니시구에서 태어났다. 이후 키타큐슈시에서 자랐으며, 후쿠오카현립 토치쿠 고등학교를 거쳐 히토쓰바시대학 상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외무공무원 상급 시험에 합격하면서, 1980년부터 일본 외무성에 입성해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배웠지만, 아라비아어를 연수받았다. 이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관련 담당과에 배속되어 근무했다. 그 뒤 시리아, 이집트에서 어학연수를 받았으며,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을 가 1986년에 중동학 석사 학위를 받는다.
그 뒤 주 이라크 일본대사관 2등 서기관로 근무했으며, 자원에너지청 석유부 계획과에 파견되기도 했다. 1990년에는 외무성 중동아프리카국 중동 제2과에서 근무했으며, 이 당시 걸프 전쟁이 발발했다.
1994년, 정치인을 지망하면서 외교관을 퇴직하고 쵸후시 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다.
낙선 후 당시 구 도쿄도 제7구 중의원 의원이던 간 나오토의 영입으로,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도쿄도 제19구에 출마해 신진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 후 제42, 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민주당 소속으로 도쿄도 제19구에서 당선되어 3선 의원이 된다.
2005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자민당 마쓰모토 요헤이 후보에게 지역구에서 패배하고 석패율 구제로 당선된다. 이후 중의원 청소년 문제에 관한 특별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지역구 도쿄도 제19구에서 자민당 마쓰모토 요헤이 후보를 큰 표차로 꺾고 당선되어 5선 의원이 되었다. 당선 후 중의원 소비자 문제에 관한 특별위원장을 맡았다.
그 뒤 간 나오토 내각에서 내각부 부대신을 역임했다. 이 당시 동일본 대지진 발생으로 설립된 동일본 대지진 부흥 대책 본부의 미야기현 현지 대책 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간 나오토가 총리직을 사임한 이후에는 노다 요시히코 내각에서 내각총리대신 보좌관(동일본 대지진 부흥 대책 담당)을 역임했다. 그 뒤 부흥청이 정부 부처로 설립되자, 내각부 부대신 겸 부흥 부대신을 역임한다. 부대신 퇴임 후에도 중의원 동일본 대지진 부흥 특별위원장을 맡는다.
그 뒤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지역구에서 자민당 마쓰모토 요헤이 후보에게 밀려, 석패율 구제도 못 받고 낙선한다.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지역구에 다시 출마하지만, 이번에도 자민당 마쓰모토 요헤이 후보에게 밀려 낙선한다.
2017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입헌민주당 소속으로 지역구 도쿄도 제19구에 다시 출마했다. 원래 희망의 당 소속으로 출마하려 했으나, 희망의 당의 외국인 참정권 도입 반대 방침에 반발해 입헌민주당에 입당했다. 선거 결과, 자민당 마쓰모토 요헤이에게 다시 패배했으나 석패율 구제로 당선되어 5년 만에 원내 복귀에 성공한다. 2018년 10월, 중의원 오키나와 및 북방영토 문제에 관한 특별위원장을 맡았다.
2021년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입헌민주당 소속으로 지역구 도쿄도 제19구에 다시 출마했으며, 이번에는 자민당 마쓰모토 요헤이 후보를 꺾고 지역구 당선에 성공한다.
3. 기타[편집]
- 한일관계를 중시하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2004년에는 일본 국회의원 자격으로 한국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를 방문해 참배한 적이 있다.#
- 외교관 시절 이란 이라크 전쟁을 겪은 경험 때문에 평화 헌법 개정에 반대한다고 한다.
4. 둘러보기[편집]
[A] 석패율 비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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