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왕국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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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왕국
Kingdom of Scotland (영어)
Kinrick o Scotland (스코트어)
Rìoghachd na h-Alba (스코틀랜드 게일어)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파일:800px-Royal_Coat_of_Arms_of_the_Kingdom_of_Scotland.svg.png
국기[1]
국장
파일:스코틀랜드 왕국 지도.svg
843년~17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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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건국
2.2. 중세
2.3. 독립 전쟁 시기
2.4. 근세
2.6. 멸망
3. 관직

언어별 명칭
영어
Kingdom of Scotland
스코트어
Kinrick o Scotland
스코틀랜드 게일어
Rìoghachd na h-Alba
라틴어
Regnum Scotiae
/ Caledonia
프랑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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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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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프랑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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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게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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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어
Skottland
덴마크어
Skotland
아이슬란드어
Skotland





1. 개요[편집]


스코틀랜드 지역에 있었던 왕국으로 1707년에 잉글랜드 왕국과 통합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됨으로써 사라졌다.


2. 역사[편집]



2.1. 건국[편집]


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파일:Map_Gaels_Brythons_Picts.png

게일인
픽트족
브리튼인
(로만 브리튼)




칠왕국 시기에 스코틀랜드는 픽트족의 주도하에 통합되지 않은 부족 국가 중심의 여러 국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남쪽의 칠왕국들보다 국가 체계가 작았고 남쪽의 노섬브리아 왕국이 로우랜드 지역을 점령하고 픽트족 일부를 복속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상당 부분은 잉글랜드가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스코틀랜드 서부에는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게일인 이주자들의 연맹 왕국 달 리아타(Dal riata)가 존재했는데, 스코틀랜드를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왕 코이나흐 언 퍼르버서흐 막 알핀(키나드 1세)이 이곳의 왕이었다.

16세기 스코틀랜드의 학자 쇼러스 보허넌(Seoras Bochanan)의 『스코틀랜드의 역사』에 따르면 픽트인들이 키나드 1세의 아버지 알핀 2세를 죽였고 키나드는 이에 대한 복수로 픽트랜드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정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키나드가 달 리아타와 픽트랜드 두 곳의 왕위를 얻은 것은 단순히 부모에 의한 상속일 뿐이었을 거라고 여겨진다. 달 리아타는 키나드의 치세 이후로 픽트랜드에 흡수되었고, 이후의 군주들은 한동안 모두 픽트인의 왕을 칭했다.

현재는 게일인의 달 리아타와 픽트인의 픽틀랜드가 게일인 위주로 점차 통합되었다고 보며, 키나드가 달 리아타와 픽틀랜드 두 곳의 왕이 된 것이 그 시작으로 여겨진다. 이후 10세기경 카우산틴 2세 때 이르러 처음으로 '알바의 왕'을 칭하니, 이가 곧 스코틀랜드 왕국이다.

약탈할 것이 없어서 잉글랜드에 비해 침략 빈도가 적었지만 바이킹의 침공도 물리쳤다. 8세기 말 데인 인과 노르만 인의 침공 이후에는 잉글랜드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차츰 남하해 로디언, 노섬벌랜드, 컴벌랜드, 웨스트모어랜드 등 잉글랜드 북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2.2. 중세[편집]


쇼러스 보허넌과 같은 역사가들은 9세기 중반의 왕인 기리크를 대왕이라고 부르며 그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절반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는데, 신빙성은 떨어진다. 이유는 기리크에 대한 기록이 잉글랜드 쪽에는 남아있지 않으며, 그의 치세기가 동시대 잉글랜드에선 이교도 대군세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잉글랜드의 절반 이상을 정복한 것은 스코트인이 아니라 데인족 바이킹이었다.

11세기 중반 스코틀랜드는 브리튼인 왕국이었던 어스트라드클리드[2]를 합병했다.

11세기 후반에 찬탈자 막 베하드를 무찌르고 왕위에 오른 맬컴 3세는 1068년 윌리엄 1세에게 쫒겨온 참회왕 에드워드의 친척인 에드거 애설링 왕자 일가를 환대했고 그의 여동생인 마가렛과 결혼했다. 이후 맬컴은 브리튼 섬의 통일을 바라면서 군대를 보내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해 많은 포로들과 함께 귀환했다. 이 시기에 스코틀랜드의 앵글로 색슨족 거주자가 늘어 영어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노르만 인도 스코틀랜드로 이주해 군대의 주력을 맡았고 현재까지 스코틀랜드의 귀족들도 대부분 노르만 혈통을 지니게 되었다.

맬컴 캔모어는 이전까지는 잉글랜드로 간주되던 포스 만의 안토니누스 성벽을 넘어 에든버러까지 진출했고 그곳에 성을 쌓아 이후에 스코틀랜드의 궁정으로 삼았다. 윌리엄 2세와의 전쟁에서도 스코틀랜드는 승패를 주고받으며 대등한 모습을 보였다. 로디언이 이때 강역에 포함되었고 노섬벌랜드까지 위협했다. 하지만 1093년 맬컴 3세가 대군을 이끌고 보더스 지방의 요새 앤윅을 공격했을 때 노르만 귀족 로버트 드 모브레이의 군대에 기습 공격을 받아 대패했고 본인도 장남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맬컴의 어린 아들들인 에드거, 알렉산더 1세, 데이비드 1세가 차례로 즉위했다. 데이비드 1세는 천한 출신인 사람의 호소도 경청해 주는 군주였고 억울한 사건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에 주교구들을 설립해 교회의 찬사를 받았고 재산을 기부해 홀리루드 수도원, 멜로즈 수도원, 드리버러 수도원, 뉴배틀 수도원, 캠버스케네스 수도원, 제드버러 수도원 등의 수도원들을 건립했다. 한편 그의 치세에 잉글랜드의 헨리 1세가 죽고 나서 벌어진 마틸다스티븐 간의 왕위 쟁탈전이 일어났고 데이비드 1세는 대군을 소집해 잉글랜드를 침공했으나 깃발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다만 이어진 스티븐과의 협상에서 스코틀랜드는 뉴캐슬과 뱀버러의 요새를 제외한 노섬벌랜드, 더럼 지역을 할양받아 영토를 확장했다. 데이비드 1세는 1153년에 사망했고 죽고 나서는 성 데이비드로 추존되었다. 그의 장남인 '관대한 헨리'는 1150년에 요절했고 손자인 맬컴이 즉위했다.

맬컴 4세는 기질이 온순하고 상냥하다고 해서 소녀왕이라 불렸는데 잉글랜드 왕의 가신으로서 점령지들을 통치했고 일부는 반환하기까지 했다.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 그를 따라 프랑스에서 지원군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프랑스에 있던 그에게 탄원서를 보내 잉글랜드에 의한 지배를 거부했고 맬컴 4세는 에든버러로 돌아와 귀족들과 협의해 관계를 다시 청산했다. 그는 1165년에 제드버러에서 사망했고 12월 24일에 그의 동생인 윌리엄이 즉위해 1174년에 노섬벌랜드를 침공해 다시 대립을 시작했다.


2.3. 독립 전쟁 시기[편집]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지배하고 나서 스코틀랜드도 침공을 받았다. 스코틀랜드 왕국은 웨일스 공국과 달리 완전히 정복당하지는 않았으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오히려 공세를 거듭해 13세기경에 이르면 로우랜드 지역을 모두 차지함으로써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노르만 인을 피해 도망쳐 온 색슨 족인 웨식스 왕국의 유민 집단을 받아들이면서 로우랜드가 새롭게 개발되고 문화적으로도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던켈트 왕조의 알렉산더 3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고 그의 외손녀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마저 요절하면서 왕통이 끊어져 버렸다. 스코틀랜드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일어났고 그 사이에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고 잉글랜드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이 여기에 반발했고 윌리엄 월레스(William Wallace)는 반란군을 일으켜 잉글랜드군을 몇 차례 격퇴하기도 했지만 에드워드 1세의 진압으로 결국 패배했다. 윌리엄 월레스와 그 부하들은 이후에도 지속적인 게릴라전으로 잉글랜드를 압박하는 작전을 세웠으나 결국 사로잡혀 죽었다.

스코틀랜드의 귀족 브루스 가문의 로버트 1세가 윌리엄 월레스의 뒤를 이어 독립 전쟁을 지속했다. 로버트 1세는 한때 패배해 아일랜드로 망명하기도 했으나 결국 배넉번 전투에서 에드워드 2세의 대군을 격파했고 마침내 에드워드 3세 때는 잉글랜드로부터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독립했다.


2.4. 근세[편집]


인구 규모에서만 봐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비해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잉글랜드가 계속 스코틀랜드를 노렸으므로 전통적으로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 동맹을 '오래된 동맹'(Auld Alliance)이라고 한다. 하지만 동맹을 맺었다고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은 아니어서[3] 잉글랜드의 침공을 스코틀랜드는 자력으로 항상 막아내야 했다.[4] 잉글랜드가 인구는 물론이고 조직력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면서 유럽의 군사적, 정치적 발전의 영향도 더 많이 받아 앞서 있었다. 전쟁을 벌일 때는 스코틀랜드는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 험한 산악 지방이 많은 스코틀랜드 내륙으로 끌어들여 소모전을 벌이다가 지친 잉글랜드를 상대로 갑작스럽게 보병 돌격을 하는 등으로 대응했다. 이 때문에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가 남하하는 것은 저지해도 근본적으로 복속시키는 것에는 실패했다.

중세 후기부터 17세기의 동군 연합과 국가 통합까지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대한 방어에 주력했다. 동시에 왕실의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않아서 맥도널드, 더글러스, 매코넬, 캠벨, 캐머런 등 지방의 강력한 하이랜드의 클랜들이 서로 끊임없이 이권 다툼을 하면서 국가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했던 잉글랜드와의 국경 지대, 서부 해안과 섬들, 하이랜드의 복속도 추구했다. 정복왕 윌리엄 이후 런던을 기반으로 강력한 왕권과 체계적인 지방 행정을 꾸준히 정착시킨 잉글랜드에 비해 스코틀랜드는 기본적으로 켈트계 사회가 더 수평적인 측면도 있고 무엇보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성립과 독립 과정에서 하이랜드 클랜 대귀족들의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에 중앙 권력의 정착이 어려웠다. 특히 헤브리디스 제도(Outer/Inner Hebrides)를 기반으로 '섬들의 군주' (Lordship of the Isles)라는 직함을 가지고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를 갤리선으로 오가면서 아일랜드와 브리튼 섬 간의 중개 무역과 용병업에서 쏠쏠한 재미를 보았던 맥도널드 가문은 한때 스코틀랜드 왕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위세를 자랑했고, 왕실의 충신을 자처하면서 주로 국왕의 이름으로 다른 클랜을 공격해 그 땅과 전리품을 차지했던 하이랜드의 최대 클랜이자 스코틀랜드 내에서 왕실 다음으로 강력한 권력을 자랑했던 캠벨 가문 같은 거대 클랜들의 존재는 스코틀랜드 왕실의 방해가 되었다.[5]

오래된 관습과 법제화된 봉신의 권리로 인해 함부로 봉건 귀족의 자치권을 뺏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왕실은 봉건 귀족들의 최고 우두머리로서 전쟁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유지했다.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가의 군주들 또한 이 점을 파악하고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클랜들을 상대로든 잉글랜드를 상대로든 왕권을 위한 전쟁을 종종 걸고는 했다. 스코틀랜드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전부 칼과 활, 나중에는 권총 하나는 차고 다니고 글래스고-에딘버러 밸트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항시 무장한 클랜의 장정들이 서로의 양, 소, 목축지, 노예 등을 빼앗기 위해 사시사철 전쟁에 대비해 살던 사회였다. 전쟁을 통해 군왕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면 중세 기사도와 켈트 전사 집단의 성향에 따라서 최전선에 앞장서서 싸웠다. 제임스 2세는 플랑드르에서 새로 들여 온 공성포를 시험하기 위해 독립 이후에도 잉글랜드가 점령하고 있었던 록스버러 성을 탈환하려고 공성하던 중 야포 근처에 있다가 대포 폭발로 죽었다. 뒤를 이은 제임스 3세는 아들을 필두로 자신의 실정에 반발한 대귀족 연합을 상대로 1488년 스털링 근처에서 벌어진 소키번 (Sauchieburn) 전투[6]에서 죽었고 제임스 4세는 잉글랜드로 친정에 나섰으나 플로든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잉글랜드 병사들의 창에 찔려 죽고 또 그 아들인 제임스 5세는 1542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동맹을 위해 잉글랜드로 쳐들어갔으나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패배하자 열병으로 사망했다.

약한 왕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시도한 정치적 전쟁은 오히려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안정에 타격을 주었다. 특히 후계도 똑바로 준비 안된 군주들이 연달아 전사해버려 스코틀랜드의 국내 정세는 혼란해졌다. 이 과정에서 결국 국가의 통치는 캠밸 가문을 필두로 한 연고지는 비록 하이랜드 클랜 출신이지만 로우랜드에서 교육받고 유럽식 왕실 행정에 익숙했던 대귀족들과 연계되었던 도시민과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7]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는 스코틀랜드에도 예전부터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였고 문화적으로는 유럽의 선진 문물의 창구였고 교역 파트너로서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 지방을 통해 개신교가 퍼졌다. 16세기 중후반에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는 너무 어리기도 했고 주변 세력에게 휘둘리기도 해서 왕실과 결합했던 가톨릭 교회의 세력도 약해졌다. 그 사이에 잉글랜드에서 유학하고 프랑스에서 감옥에 갇히기도 했던 존 녹스를 필두로 한 로우랜드의 개신교 도시민들과, 동맹을 했던 캠밸 가문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로 개종했던 클랜들이 힘을 합쳐 1559년 퍼스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을 파괴하는 것을 시작으로 왕실과 가톨릭 교회에게 정면으로 도전했다. 메리 스튜어트를 둘러싸고 터진 내전이었던 Marian Civil War는 짧은 전쟁 끝에 개신교 세력이 승리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왕국은 왕실과 가톨릭에 반대한 내전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로우랜드 도시들의 평신도 유지들의 모임인 장로회를 근간으로 하는 개신교 중심의 칼뱅교 국가가 되었다. 근세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의 부상은 종교적인 문제와 함께 정치적인 이유가 컸고 장로회를 구심점으로 도시민, 귀족, 목사들이 연합해 이전부터 약화되었던 왕실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달리 후대에도 종교적 국가 정체성에 더 집착했다.

별개로 스코틀랜드는 문화, 인류학적 구분으로 여전히 로우랜드와 하이랜드로 나뉘어졌다. 로우랜드는 에딘버러, 글래스고 같은 대도시를 필두로 한 도시 문화를 형성하고 늦어도 14세기부터 영어를 받아들였고 종교개혁장 칼뱅의 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이랜드는 19세기 중후반까지 게일어를 유지하고 반유목 수렵 중심의 클랜 씨족 사회가 중심이었고 아일랜드 섬과 깊은 관계를 가지면서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까지 비교적 가톨릭이나 자코바이트 중심의 성공회가 강했다. 중세 초기부터 하이랜더 클랜의 차기 지도자들은 대부분 세인트 앤드류 대학을 비롯한 로우랜드에서 교육받고 에딘버러 같은 로우랜드의 정계 사회에도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두 지방의 관계는 유기적으로 상호 교류하고 서로 섞여 현대 스코틀랜드의 민족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에딘버러, 글래스고 등의 스코틀랜드의 대도시는 게일어를 안 쓴지 적어도 700년이었고 좀 멀리 잡으면 1000년이나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켈트족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로우랜드를 필두로 한 현대 스코틀랜드인들 다수는 이렇게 켈트계 민족 국가 중 하나이긴 하지만 영어라는 언어적 동질성을 통해 잉글랜드와 함께 영국이란 국가를 형성한 민족 공동체가 되었다.


2.5. 동군연합 시기[편집]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자 스코틀랜드의 젊은 왕 제임스 6세가 후계자가 되면서 동군연합이 형성되었다. 제임스 6세의 증조할머니 마거릿 튜더가 바로 헨리 8세의 여동생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고모였다.[8]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두 왕국은 통합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직 한 국가는 아니고 별개의 두 국가가 같은 왕을 모시는 동군연합 상태였다.

잉글랜드로 내려간 제임스는 기본적으로 떠나온 고향 스코틀랜드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했으나 종교 문제에 있어서 과거 귀족들과 다시 대립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존 녹스의 직계 제자이자 당대 최고의 라틴 문필가로 철학자, 정치학자기도 했던 조지 뷰캐넌의 영향을 받아 본인도 강성 장로회파에 속했지만 크면서 왕실의 힘을 키우려 하자 장로회 귀족과 에딘버러 시의회가 권력에 제한을 두려고 했다.[9] 여기에 이제 새로운 조국이 된 잉글랜드의 성공회는 개신교임에도 가톨릭의 전례와 교계 제도 등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도 이렇게 잉글랜드와 비슷하게 왕실의 영향력이 교회에 미치는 감독제를 실시하고 주교제를 부활시키려고 하면서 왕실과 스코틀랜드 지방 권력은 서로 대립했다.

1618년 글래스고에 있었던 장로 총회 General Assembly에서 가톨릭식의 무릎을 꿇는 성찬을 부활시키고 반발하는 장로 총회의 문을 닫아 버리고 20년간 다시 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스코틀랜드는 종교 갈등이 다시 생겨났다. 이후 내전기에 자라 하이랜드의 강력한 귀족들과 개인적 연줄이 닿았던 아버지와 달리[10] 스코틀랜드에는 제대로 와 보지도 않아서 그 사정도 잘 몰랐고 비교적 독단적이었던 찰스 1세가 왕이 되면서 정국은 더 악화된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 애향심을 가지고 멀리서도 적극적으로 다스리면서 국정을 추진하더라도 현지의 귀족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찰스는 윌리엄 로드 추기경을 필두로 한 성공회식 전례와 주교제를 스코틀랜드에 강제하려고 들면서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유력 목사들, 에딘버러와 다른 로우랜드의 시민들, 이들과 동맹이었던 개신교계 클랜들은 1638년 에딘버러의 그레이프라이어[11] 교회에 모여 국민 언약[12]이라는 종교 정치적 동맹을 선포하고 봉기를 일으켜 스코틀랜드 정부를 장악하고 찰스의 권위에 도전했다.


2.6. 멸망[편집]


당시 잉글랜드는 의회와 국왕이 대립하던 끝에 찰스가 의회를 철폐하고 혼자서 직접 국가를 다스리던 11년 폭정이라 불리던 시절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언약파 (Covenanter) 반란군은 정부를 장악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잉글랜드로 남진하면서 잉글랜드 내전의 발단이 된 주교 전쟁을 일으켰다. 언약파 반란군이 국경 지대인 뉴번에서 잉글랜드 국왕군을 물리치고 거의 저항없이 잉글랜드 북부의 관문 뉴캐슬어폰타인에 입성하자 찰스는 어쩔 수 없이 의회를 다시 열었다. 그러나 내심 스코틀랜드의 언약파가 국왕군을 박살내면서 왕실을 더 약화시킬 것을 기대했던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가 요구한 예산 조달과 군대 소집을 거부하면서 적극적으로 방해했고 찰스의 종교적, 정치적으로 충신 역할을 했던 로드 추기경과 스트래포드 공작을 기소하고 사형시켜 버렸다.

분노한 찰스는 존 핌을 비롯한 당시 잉글랜드 의회에서 왕한테 가장 심하게 반기를 든 의원 다섯 명을 체포하려고 쳐들어가나 이들은 도망치고 만다. 이 사건으로 국왕과 의회 간의 관계는 파탄났고 찰스를 더욱 못 믿게 된 잉글랜드 의회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왕의 동의 없이 민병대 소집법(The Militia Ordinance)을 통과시켜 버렸다. 찰스도 의회의 비준 없이 혼자서 군열 위임령(Commissions of Arrays)을 선포하면서 양측은 내전 상태로 들어간다. 이렇게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과격파 청교도들은 잉글랜드보다 3년이나 일찍이었던 1638년에 이미 왕권을 실질적으로 무너뜨리면서 혁명을 이루었고 스코틀랜드가 찰스 1세의 권력을 약화시켜 잉글랜드에서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신정부를 구성했던 스코틀랜드 언약파는 반란을 멈추면 장로회를 공식 국교회로 인정하고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찰스 측과 장로회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에도 장로회를 도입하겠다고까지 했던 의회 측 사이에서 고민하다 1641년 10월 반언약파 근왕파 귀족들의 반란 시도를 분쇄한 이후[13] 결국 1643년 근엄 동맹과 언약 (Solemn League and Covenant)이라는 조약을 통해 의회파와 동맹을 맺으면서 스코틀랜드를 넘어 영국 내전에 뛰어든다. 언약파는 전쟁 시기 내내 스코틀랜드의 정부 역할을 하면서 남쪽으로는 잉글랜드의 국왕군, 북쪽과 서쪽으로는 로우랜드 개신교도들의 통치와 무엇보다 캠밸 가문의 영향력의 확대를 견제했던 하이랜드와 아일랜드의 클랜들이 소집한 근왕군, 바다 건너 아일랜드얼스터에서는 가톨릭 킬케니 연맹의 반란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루면서 동시에 안쪽으로는 내분하면서도 올리버 크롬웰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독자적인 전시 정부를 꾸린다.

당시 언약파 혁명 정부가 모집한 스코틀랜드 군대는 비상 소집되어 급조되었으나 인적 자원이 대부분 열정적인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한창 30년 전쟁이 벌어지던 유럽 대륙의 북방의 사자 구스타프 아돌프 휘하에서 종군한 용병들과 캠밸 가문을 필두로 했던 언약파 클랜들 휘하 사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속적으로 군사 기술이 발전하던 17세기 초중반 대륙의 선진 용병술을 몸으로 배우고 온 전직 용병들이나 일상이 전쟁이고 아직도 성인 남성 개개인에게 '전사'라 할만한 전투력을 사회적 소양으로 요구하던 하이랜더들 모두, 스페인과의 전쟁 이후 40년 가까이 대규모 분쟁에 휘말린 적 없던 잉글랜드에서 평상시 치안 유지용 민병대들을 급조한 의회파, 국왕파 양쪽 모두와 비교해도 병력의 질적으로 우월했고 이것을 기반으로 언약파 정부는 안 그래도 인구도 적으면서도 자체적으로도 내전 상태인 반쪽짜리 스코틀랜드 뿐이지만 크롬웰과 페어펙스가 아예 대륙식으로 첨단 교리와 훈련 체계까지 이식시킨 신군대 (New Model Army)를 도입할 때까지 한쪽에 가세하기만 하면 전쟁의 균형을 완전히 기울일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숙련되고 강력한 주력은 잉글랜드에서 내전을 도와주느라 비운 사이 초기 언약파 주요 지도자 중 하나였으나 다른 지도자 클랜 캠밸에 대한 원한 관계로 인해 언약파 정부를 통수치고 근왕파로 돌아선 몬트로즈 백작 제임스 그레헴이 클랜 도널과 동맹을 맺고 스코틀랜드 내부에서 일으켰던 내전으로 한때 에딘버러 본진 바로 앞까지 밀릴 만큼 수세에 몰리기도 했다. 언약파 혁명 정부의 군사적 우위도 지속되는 전쟁에서 초기에 대륙에서 군종한 숙련병들을 하나씩 잃으면서 무더져갔던 반면 잉글랜드 의회파에서 페어펙스와 크롬웰의 주도로 군제 개혁을 마쳤다. 원래 합의했던 내용인 장로교회의 잉글랜드 도입에 잉글랜드 측의 반대가 강해지면서 1643년만 하더라도 근엄 동맹을 통해 영국 전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집단으로 나섰던 스코틀랜드 언약파 정부의 입지도 불안해졌다.

언약파 정부는 올리버 크롬웰이 장악한 잉글랜드 의회파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고 결국 찰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의회를 배신하여 잉글랜드 왕당파를 지원한다. 그러나 3차 내전과 던바, 우스터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대파당하고 크롬웰에게 스코틀랜드가 정복당했다. 왕정복고 시절에 언약파가 아버지의 목이 날아간 전쟁이 일어났던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을 잊지 않았던 찰스 2세는 아가일 공작 아치볼드 캠밸, 장로 총회 집사였던 워리스톤의 아치볼드 존스턴 경을 비롯한 지도자들을 반란을 일으켰던 그레이프라이어 교회에서 처형하고 옥사시켜 분쇄했다. 크롬웰은 양국 관계에서 일반적으로 있었던 의심하는 태도로 스코틀랜드를 대했으나 일단 사상적인 면에서 기본적으로 같은 개신교 급진파고 전쟁 막판 전까지는 동맹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스코틀랜드를 정복한 이후에도 딱히 정치 보복을 가하진 않았다. 수십만 명이라는 당대에는 경이로울 만큼의 희생자가 나온 보복성 학살을 자행했던 아일랜드와 심각하게 대조적인 모습이었으며, 끝까지 크롬웰 시절의 역사적 원한을 잊지 않으면서 근본적인 종교의 차이로 인해 결국 장기적으로 반영국 민족주의가 발달해 독립 국가를 추구하게 된 아일랜드와 달리 스코틀랜드가 비교적 쉽게 연합왕국이란 체제에 자발적으로 편입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언약파가 이루어 놓은 새로운 혁명 정부의 행정적 기틀과 전시 상황에서 구축한 통제력 등은 이후 스코틀랜드 정부가 물려 받았고 장로회 급진파도 스코틀랜드 사회 지배 계급으로 떠오르면서 17세기 말에 다시 한번 왕실과 충돌했다. 명예 혁명이 일어나자 언약파를 계승한 로우랜드의 장로회 측은 새로운 왕실을 받아들이고 마찬가지로 가톨릭/성공회 주류를 계승한 하이랜드의 클랜들은 자코바이트 세력에 가담하면서 다시 한번 내전이 발생했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한편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개척이 진행되면서 스코틀랜드도 17세기 후반에 식민지를 건설할 다리엔 계획(Darién scheme)을 추진하고 있었다. 중앙아메리카 파나마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콜롬비아 사이에 있는 다리엔(Darién)이라는 지방에 스코트인들을 이주시키고 그곳에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무역 거점을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나마에 있던 스페인인의 공격을 받아 싸우다가 패하였고 전염병까지 돌아서 식민지 건설은 실패했으며 스코틀랜드의 재정상태에 큰 피해만 주었다.[14]

여기에 1690년대 전반적으로 '불운한 칠년' (Seven ill years)이라고 불리는 엄청난 가뭄으로 고생했고 자코바이트와의 내전까지 잘 안 풀리면서 스코틀랜드의 유력 귀족 가문과 도시 자치회들은 대부분이 파산하거나 파산 직전에 몰려 경제까지 파탄났다. 결국 나라가 철저하게 파탄나 더는유지할수없는 수준까지 오자 이런 스코틀랜드를 다시 수습하는 방안으로 잉글랜드 왕국과의 법적 통합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를 노린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병합하려고 강력한 압박을 주었는데 스코틀랜드 왕국의 부채를 잉글랜드 측이 떠맡는 과정에서 1707년에 양국을 단순한 동군 연합이 아니라 법적 차원에서 한 국가로 통합하는 통합법 (Act of Union)을 스코틀랜드 정부와 의회에 압력을 넣어 통과시켰다. 물론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반대가 강했지만 이미 나라가 철저하게 파탄나 더는 버틸수없었기에 스코틀랜드 왕국은 멸망하여 독립 국가에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의 일원이 되었다.


3. 관직[편집]


스코트랜드 왕국의 관직은 바다 건너의 위치한 동맹국인 프랑스 왕국의 영향보다는 인접한 적대국인 잉글랜드 왕국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거의 웬만한 관직들의 이름과 역할을 잉글랜드 왕국과 공유하고 있었다. 이후 18세기 잉글랜드와 통합됨에 따라 상당수의 관직들이 잉글랜드의 관직들과 통폐합이 되었다.


4. 스코틀랜드 국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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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의 깃발은 13세기에 쓰였다.[2] Ystrad Clud. 로마가 멸망하고 형성되기 시작한 브리튼족의 왕국으로, 현재 컴브리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3] 무엇보다 프랑스는 잉글랜드 외에도 다른 유럽 국가들과 전쟁을 한터라 스코틀랜드를 적극적으로 도와줄수 있는 형편이 안되었다.[4] 특히 현대에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국경을 형성하는 베릭-어폰-트위드는 당시 한자동맹의 주요 교역 도시(kontor)기도 했고 천혜의 자연 요새기도 해서 양쪽에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중세 내내 주인이 양쪽 사이에서 수도 없이 바뀌었던 베릭은 결국 1482년 리처드 3세가 된 글로스터 공작이 공성 끝에 차지해 현대까지 잉글랜드 땅으로 남았다.[5] 제임스 4세도 스코틀랜드 전역에 행정 장관들을 보내는 정책을 시행하다가 지방의 클랜들이 반발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5년이나 걸렸을 정도였다.[6] 스코틀랜드 지명은 주로 Glaschu(글래스고), Dùn Èideann(에딘버러), Inbhir Nis(인버네스) 같이 게일어에서 기원한 것이 영어로 음차된 경우가 많아 현대 영어의 관점에서도 특이한 발음이 많다. 에딘버러 시내의 큰 도로 중 하나인 Cockburn Street만 해도 철자만 보면 특이한 이름이지만 발음은 코번 도로로 읽히고 고명한 귀족의 거대한 궁전으로 유명한 서부의 Culzean이란 마을은 쿨레인이라고 발음된다.[7] 스코틀랜드에서 하이랜드 클랜과 로우랜드 정부의 관계는 이렇게 상호 대립적인 관계기만 하지는 않았다. 나중에는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에든버러에서는 다른 국가의 정치인들처럼 활동하면서도 본거지인 고향의 하이랜드에서는 여전히 반수렵 목축 공동체인 클랜의 사회로 돌아가는 데 상당히 익숙해진 모습을 보인다.[8] 아이러니하게도 엘리자베스 1세는 제임스의 어머니인 메리 스튜어트 여왕을 자신에 대한 반란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참수시켰다. 당시 제임스 6세는 일단 대사를 통해 어머니의 구명을 청했으나 태어나서 어머니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데다가, 그녀가 죽으면 자신이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가 되기에 처형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다.[9] 1596년에는 왕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기도 했던 측근 하이랜드 귀족 자문단을 당장 처형하라고 에딘버러 성 바로 앞에서 시위를 하던 장로회 목사 몇 명이 군중들을 선동해 폭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 왕은 에딘버러 궁전에서 대로로 쭉 내려가면 있는 당시에는 새로 지었던 홀리루드 궁전의 사냥터로 도망쳤고, 군중들이 왕을 찾으라고 외치면서 횃불을 들고 궁전 터에서 왕을 잡으려고 밤새도록 뒤지고 다니기도 했다. 그만큼 스코틀랜드에서 왕실의 힘이 약했던 상황이었다.[10] 1596년 에딘버러 폭동만 하더라도 수도에서 도망쳤던 왕이 어릴 때부터 친구이자 측근으로 지냈던 유력 클랜 대귀족들을 부르면서 진압되었다. 반면 이후 언약파 혁명 때도 이들의 쿠데타에 가까운 집권 방식과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캠밸 가문의 독주에 반발한 하이랜드 클랜들이 상당한 규모의 근왕군을 일으켜 에딘버러 바로 앞까지 올 정도였으나 이들을 통제하지 못해 제대로 된 구심점을 잡지 못하고 잉글랜드 의회파-스코틀랜드 언약파 동맹에 하나씩 패배했다.[11] Greyfriars, 회색 수도자란 뜻으로 종교개혁 이전에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 있던 자리에 지어진 교회라 붙여진 이름이다.[12] National Covenant. 원래 구약 성서의 유대 민족과 야훼 사이의 계약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로 종교 개혁 이후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칼뱅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은 이렇게 자기 국가를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자칭하면서 구약적 민족주의와 가톨릭 보편주의를 반대하는 성향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13] 찰스는 본인과 전혀 무관한 시키지도 않은 짓을 근왕파 귀족들이 저질렀던 것이라 주장했는데, 몬트로즈 공작을 비롯해 반란을 시도했던 귀족들은 잉글랜드의 정국과 왕에 대한 입장과는 별개로 하이랜드 클랜 이권 분쟁을 통해 언약파 정부의 요직을 주로 차지한 캠밸 가 계열의 귀족들과 뿌리 깊은 원한 관계였기 때문에 전혀 설득력 없는 변명은 아니다. 이후에도 적어도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에서 벌어진 영국 내전은 근왕과 의회, 급진 칼뱅파와 성공회식 교구파 같은 이념적 지향점과는 별로 상관 없이 주로 친 캠밸 가문이냐 반 캠밸 가문이냐라는 지극히 지역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14] 다리엔 지역은 현대까지도 극한의 오지 중 하나로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잇는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가 끊어진 유일한 구간이다. 게다가 이곳을 탐험할 때는 여행자 보험도 적용되지 않기도 한다. 당대의 지정학적인 관점에서도 스코틀랜드인들이 어느정도 주거하던 북아메리카가 아닌 적대적인 가톨릭 세력의 수장인 스페인의 신대륙 식민지 본토에 가까운 중앙아메리카 한복판에서 상대적으로 변방에 위치해있고 인구도 적어 국력이 약한 스코틀랜드가 식민지를 개척한다는 것은 엄청난 실책이었다. 아무리 스페인이 이 당시 많이 쇠퇴하여 국력이 예전같지는 않아졌다고 하나 당시 카를로스 2세의 재위 시절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이전이었기에 아직은 스페인이 그럭저럭 강한 나라였다. 즉 스코틀랜드 정도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