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맥마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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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맥마나만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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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96 PL 도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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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g.thesun.co.uk/mcmanaman_1511867a.jpg

스티브 맥마나만[1]
Steve McManaman
출생
1972년 2월 11일 (52세)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세프턴 부틀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
신체
185.6cm / 체중 84kg
직업
축구선수 (미드필더 / 은퇴)
방송인
소속
유스
리버풀 FC (1988~1990)
프로
리버풀 FC (1990~1999)
레알 마드리드 CF (1999~2003)
맨체스터 시티 FC (2003~2005)
기타
BT 스포츠 (축구분석가)
국가대표
37경기 3골 (잉글랜드 / 1994~2001)

1. 소개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은퇴 이후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여담



1. 소개[편집]


잉글랜드 국적의 前 축구선수.


2. 클럽 경력[편집]



2.1. 리버풀 FC[편집]


파일:ad_117202257.jpg
단짝 로비 파울러와 함께.

리버풀 FC로컬 보이로 다른 많은 리버풀의 전설들처럼 어린 시절 에버튼 FC의 팬이었던 맥마나만은 에버튼으로부터 1년간의 스쿨보이 계약을 제의받았지만, 리버풀에게 스쿨보이 계약 + 2년간의 연습생 계약을 제시받은 아버지(역시 에버튼 팬)가 리버풀의 조건을 선택하면서 리버풀 유스로 입단하게 된다.

1990년도에 데뷔한 맥마나만은 1992/93 시즌부터 팀의 주전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1993/1994 시즌 그는 팀에 새로 부임한 로이 에번스의 주문 아래 윙어에서 플레이메이커로 포지션을 변경하였고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그는 1994/95 시즌 칼링컵 결승에 올라 홀로 2골을 기록하여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에도 그는 리버풀에서 맹활약을 펼쳤고, 리버풀의 새로운 축구를 선도하는 일명 '스파이스 보이즈'[2]의 리더로 간주되며 팀의 간판 스타가 된다.


그의 리버풀 시절 원더골

리버풀 시절의 스티브 맥마나만은 당시 잉글랜드의 다른 미드필더와는 달리 개인기가 뛰어난, 오히려 스페인 선수에 가까운 스타일의 축구를 구사했었다. 리버풀과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맹활약한 아담 랄라나가 처음 사우스햄튼 주장으로 활약을 펼치며 주목을 받게 되었을 때, 스티브 맥마나만의 재림이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스타일이 비슷하다. 이후 랄라나가 리버풀로 이적해 오게 되면서 더욱 신기한 인연이 되었다 (심지어 랄라나 또한 맥마나만처럼 어렸을 적 에버튼의 팬이었다는 말도 있다)


2.2. 레알 마드리드 CF[편집]


맥마나만이 리버풀과 재계약하지 않고 보스만 룰로 이적을 시도하자 전 유럽의 명문들이 그에게 달려들었고, 결국 레알 마드리드가 계약만료 6개월을 남겨둔 맥마나만과 계약 체결에 성공했다. 맥마나만이 수령하게 된 주급은 6만 파운드로 당시 세계 최고 주급 기록을 경신했다.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시점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상당히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델 보스케 감독이 부임한 뒤로 살아나는 모습을 보이면서 챔피언스리그에서 승승장구하였다. 맥마나만은 페르난도 레돈도를 보조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결승전에서 발렌시아를 상대로 멋진 발리슈팅으로 골을 기록하면서 팀의 3:0 승리를 이끌어 팀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페레즈가 회장이 되면서 루이스 피구의 영입과 함께 갈락티코스 정책이 시행되자 그는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된다. 페르난도 레돈도아넬카, 카랑뵈 등이 팀을 떠나고 구단은 그를 방출시키려 하였으나 그는 잔류를 원하며 버텼다. 이에 델 보스케 감독이 그에게 적은 기회를 부여했으며, 미들스브러와 이적이 합의되었다는 이야기와 첼시와 스왑딜이 합의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인하며 잔류해 주전경쟁을 하겠다고 버텼다. 이 상황에 팬들의 90%는 맥마나만을 지지하였으며 동료선수 미첼 살가도도 맥마나만이 배신당했다며 맥마나만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그는 팀에 잔류하여 경기에 나서기 시작하였고 팀을 위해 활약하면서 팀의 4년만에 리그 우승 탈환에 일조했다.

다음 시즌 그는 지네딘 지단이 레알로 입단하면서 입지가 더욱 줄었으나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 라이벌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교체로 투입되어 쐐기골을 넣으며 2:0 승리를 이끌고 팀의 결승 진출에 공헌하며 팀이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후 호나우도가 영입되며 더욱 입지가 줄어들었고 데이비드 베컴이 레알에 입단하자 끝내 팀을 떠나게 되었다.


2.3. 맨체스터 시티 FC[편집]


레알을 떠난 뒤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 그는 2시즌간 활약한 뒤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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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맥마나만

그는 잉글랜드 대표로 유로 19961998 프랑스 월드컵, 유로 2000 대회에 출전하여 활약하였다.

소속팀에서는 최고의 대체불가의 핵심멤버였으나, 국가대표에서는 당대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폴 개스코인데이비드 베컴에게 밀려 많은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물론 맥마나만 선수가 국가대표에 자주 소집되지 못하자[3]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글렌 호들과의 불화설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설에 불과했고, 유로 2000에서 선발로 나오면서 꽤나 준수한 활약을 했다. 첫 경기 포르투갈전부터 데이비드 베컴의 택배 크로스를 받아 발리 슛으로 추가 골을 넣었으며, 이는 국가대표 맥마나만도 충분히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잉글랜드 팀은 총체적인 뒷심 부족을 보이며 포르투갈에게 2대 3 역전패를 당했으며, 루마니아에게도 같은 스코어로 역전패당하면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굴욕을 당했다.


4. 은퇴 이후[편집]


현재는 세탄타 스포츠, ESPN을 거쳐 BT 스포츠의 정규적인 전문가(pundit)으로 나온다. 그러나 지나치게 친 리버풀 FC적인 성향으로 인해 축구팬들의 평가는 좋지 못하다. 특히 프라임 비디오 패널 선정 프리미어리그 2020년 올해의 팀에서 패널들 중 유일하게 브루노 페르난데스를 제외시켰고, 그 이유를 “페르난데스는 그저 페널티킥을 잘 차는 선수일 뿐”이라고 평하며 축구팬들로 하여금 황당함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6. 여담[편집]



  • 리버풀 소속이던 1993년 9월 에버튼 FC와의 더비 매치에서 동료 레전드 골키퍼인 브루스 그로벨라와 경기 도중 서로의 얼굴을 밀치는 등 크게 다툰 적이 있다. 둘의 나이 차는 무려 15살이였다.

  • 같은 성씨를 쓰는 멜버른 빅토리의 축구선수 칼럼 맥마나만과는 실제로 먼 친척 사이라고 한다.

  • 리버풀이 큰 기대를 갖고 키우는 유망주인 리안 브루스터가 첼시에서 이적 이후 구단이 직접 특별 훈련 프로그램을 짜줬는데, 이 훈련 코스 중 하나가 맥마나만에게 1대1 교습을 받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특별 훈련 프로그램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브루스터는 이적하자마자 리버풀 유스 팀의 득점을 책임지는 주포로 거듭났다.

[1] 영국 중계가들은 맥매너맨으로 발음하기도 한다.[2] 당시 영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국민 걸그룹이던 스파이스 걸스(데이비드 베컴의 아내 빅토리아 베컴이 소속되어 있었다)에서 따온 이름으로, 그 정도로 인기가 많았었다[3] 98년 월드컵에는 폴 스콜스의 교체로 1경기 출전에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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