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리 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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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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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스틸리 댄
Steely Dan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도널드 페이건, 월터 베커
입성 연도
2001년
후보자격 연도
1998년
후보선정 연도
1999년, 2000년, 2001년



















스틸리 댄
Steely Dan


[1]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결성
1971년
뉴욕 주 아난데일-온-허드슨
데뷔
1972년 11월
데뷔 앨범
Can't Buy a Thrill
활동 기간
1971년 – 1981년
1993년 – 현재
멤버
도널드 페이건 (피아노 & 리드보컬)
월터 베커 (기타 & 보조보컬)[2]
장르
재즈 록, 소프트 록, 팝 록[3]
링크
파일:Steely_Dan_1024x1024.webp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스포티파이 아이콘.svg

1. 개요
2. 역사
2.1. 결성과 데뷔
2.2. 이후 활동
2.3. 해체, 재결성
3. 음반 목록
4. 여담




1. 개요[편집]



파일:CTSD_01-C0GM6J28MEzEbfqmBj.2.zQ0aDDSFaLj.jpg


1971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미국의 록밴드.

매우 높은 완성도의 스튜디오 앨범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4] 대중 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록 밴드 중 하나이며 시카고와 더불어 재즈 록을 대표하는 밴드이다.[5] 또한 요트 록(Yacht rock)을 대표하는 밴드이기도 하다. 4,0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고 재결합 이후 첫번째 앨범인 Two Against Nature로 2000년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을 받았으며, 2001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2. 역사[편집]




스틸리 댄의 역사와 음악적 성향을 잘 정리한 영상

1970년대의 완벽한 음악계의 안티히어로들.

롤링 스톤#


미국의 록 밴드 스틸리 댄은 기본적으로 스튜디오에 기반을 둔 듀오이다. 스틸리 댄은 1970년대의 가장 지적이고 복잡한 팝 음악을 만들기 위해 미국 음악 스타일의 모든 것을 그렸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2.1. 결성과 데뷔[편집]


1965년 뉴욕의 바드 컬리지(Bard College) 동창이었던 도널드 페이건과 월터 베커가 만나면서 스틸리 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원래 월터 베커는 색소폰을 배우다 기타로 바꾸었는데, 캠퍼스 카페에서 연주하던 베커를 도널드 페이건이 눈여겨보면서 동업을 제안해 함께하게 된다. 드러머 체비 체이스를 영입한 둘은 돈 페이건 재즈 트리오(Don Fagen Jazz Trio)라는 이름으로 밴드를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까지 그런저런 로컬 밴드로 활동하던 둘은 대학교 졸업 후, 브루클린으로 이주해 저예산 영화 사운드트랙을 작곡하는 일을 하거나, 제이 앤 더 아메리칸스(Jay and the Americans)의 투어 멤버로 1년 반 동안 활동하며 전전한다. 그러던 중 밴드와 인맥이 닿아있던 ABC 레코드의 프로듀서 개리 카츠에 눈에 띄고 작곡가로 포섭된다. 그러나 이들의 작곡 스타일이 꽤나 실험적이고 난해했기 때문에 레코드사의 뮤지션들과는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개리는 "너희들의 밴드를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냐" 해서 데이비드 팔머, 제프 백스터 등의 멤버 4명을 붙여줘 스틸리 댄을 결성하고 곧 데뷔 앨범 <Can't Buy a Thrill>을 발매한다. 재즈, 보사노바, 소프트 록 등 여러 가지 장르가 섞인 독창적이고 세련된 사운드로 스틸리 댄의 첫 앨범은 큰 관심을 끌었고, 발매 이후 50만 장이 넘게 팔리며 골드 인증을 받고, 싱글 'Do It Again'이 빌보드 핫 100 6위, 'Reelin' In The Years 가 11위에 오르며 크게 성공했다.


2.2. 이후 활동[편집]


2집 <Countdown to Ecstasy>은 더욱 강해진 재즈 색채를 보여주었지만, 상업적으로는 1집만큼 성공하진 않았다. 3집 <Pretzel Logic>은 후일 결성되는 토토의 멤버로도 유명한 제프 포카로, 데이비드 페이치 등이 참여했으며 싱글 ‘Rikki Don't Lose That Number’는 빌보드 핫 100 4위에 오르는 등 전작보다 많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스틸리 댄의 6인 체제는 잘 이어지는 듯 했지만, 곧이어 월터 베커와 도널드 페이건이 스튜디오 사운드에만 집중하면서 라이브 공연 또한 중지했다. 이러한 결정에 반대한 멤버들이 탈퇴하게 되고, 4집에 들어서 2인조 체제로 완전히 굳어지게 된다. 인원에 공백이 생긴 만큼 스틸리 댄은 세션 섭외에 공을 들였고,[6] 그렇게 만들어진 4집 <Katy Lied>는 전작에 비해 더욱 부드럽고 팝적인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후 1976년, Funk 드럼의 거장 버나드 퍼디와 함께한 5집 <The Royal Scam>을 발매한다. 1977년 발매된 <Aja>는 다시 재즈 분위기를 전면으로 드러냈으며, 밴드 최고의 음반으로 주로 평가되는 명반이다. 3년 후에 발매된 Gaucho 또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2.3. 해체, 재결성[편집]


하지만 <Gaucho>가 나온 당시 밴드는 너무 지쳐 있었다. 제프 포카로, 하이럼 불록, 래리 칼튼, 마크 노플러 등 초특급 세션들을 기용하면서까지 사운드의 ‘완벽함’에 집착하면서 작업 기간과 비용은 점차 늘어만 갔고[7], 월터 베커의 여자친구가 마약 복용으로 사망하고 베커 본인도 교통사고로 부상을 당하는 등 개인적으로도 피폐해져 갔다. 설상가상으로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이 그들의 노래를 저작권 위반으로 고소하고, 작업 도중 엔지니어 실수로 곡 하나가 날아가는 해프닝도 있었다. [8]

결국 <Gaucho>를 끝으로 1981년 스틸리 댄은 해체하고, 도널드 페이건은 솔로 활동 [9], 월터 베커는 하와이 이주로 각자의 길을 걷는다.

이후 월터 베커와 도널드 페이건이 1993년 라이브 투어를 통해 재결합하고 2000년 새 앨범 <Two Against Nature>을 발매했다.

2017년 9월 3일 월터 베커가 식도암으로 사망하였다. 현재는 도널드 페이건의 솔로 프로젝트로 투어를 돌고 있다. 다만 베커의 미망인과 소송전 도중 밝혀지길, 페이건은 원래 스틸리 댄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상업적인 이유로 남겨둔 상태라고.


3. 음반 목록[편집]


  • Can't Buy a Thrill (1972)[10]
  • Countdown to Ecstasy (1973)
  • Pretzel Logic (1974)
  • Katy Lied (1975)
  • The Royal Scam (1976)
  • Aja (1977)[11]
  • Gaucho (1980)
  • Two Against Nature (2000)
  • Everying Must Go (2003)


4. 여담[편집]


  • 특유의 완벽주의 레코딩으로 오디오필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미국 오디오필들이 음감 테스트를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아티스트 중 하나가 스틸리 댄이다. 그중에서도 이들의 최고 명반 중 하나인 'Aja'를 많이 청음한다.#



  • '스튜디오에서 실험하는 밴드’라는 이미지와 달리 대중적으로도 히트곡도 있으며, 판매량도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이들이 10년여 활동하는 동안 내놓은 7장의 앨범은 모두 골드를 기록했다.

  • 존 카니 감독의 영화 <싱 스트리트>(2016)에서 이들의 이름이 거론된다. 주인공 코너를 위시한 소년들은 디페시 모드 운운하며 ‘미래파’를 지향하는 가운데 ‘싱 스트리트’라는 이름의 밴드를 결성한다. 이후 코너가 첫 번째 연습곡을 형 브랜든에게 들려주자, 형은 못마땅한 얼굴로 “섹스 피스톨즈가 어떻게 연주하는지 알아? 배워서 음악을 하는 거 같아? 너희가 추구하는 건 다 속임수야”라며 “음악은 결코 배워서 하는 게 아니야”라고 충고한다. 여기서 섹스 피스톨스에 이어 언급되는 스틸리 댄은 ‘연주 기술’의 제왕으로 묘사된다. 음악이란 게 단지 연주 기술만으로 잘할 수 있는 거라면, 스틸리 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난 다음에 떠들란 얘기다.

  • 카니예 웨스트가 본인의 노래 Champion의 스틸리 댄의 노래 Kid Charlemagne을 샘플링하기도 했다. 스틸리 댄은 본인들의 곡을 절대 샘플링 허가를 안해주는 밴드로 유명하다. 그러나 카니예가 손편지까지 보내 샘플링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고, 스틸리 댄은 "그것은 너무 좋은 편지여서 우리는 '좋아요, 어서 하세요'라고 말했고, 우리는 그와 거래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MF DOOM도 그의 노래 Gas Drawls의 스틸리 댄의 노래를 샘플링하기도 했다.

  • 심슨 가족에도 언급되거나 나온적이 있다. 시즌28 4화에 도널드 페이건이 카메오로 출연했다.##


  • 지미 페이지는 이들의 2집 'Countdown to Ecstasy'의 수록곡 'Bodhisattva'의 기타 솔로를 '가장 좋아하는 기타 솔로'라고 말한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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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왼쪽부터 도널드 페이건, 월터 베커.[2] 이들이 작곡/작사가 겸 리더로, 이들 외에도 고정 멤버와 후술할 세션멘들이 있다.[3] 그냥 재즈 퓨전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4] 스틸리 댄은 완벽주의 성향으로 유명한데, 이런 이유로 이들의 앨범은 다 준수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특히 1차 해체전까지의 앨범들은 버릴게 없을 정도로 뛰어난 퀄리티를 자랑한다.[5] 당대에는 상업적으론 시카고가 월등히 앞섰으나, 오늘날에는 스틸리 댄의 평가가 훨씬 높다. 명예의 전당도 스틸리 댄이 먼저 들어가기도 했다. 스틸리 댄은 혁신적인 사운드로 1970년대 당시보다 오늘날에 더 높은 평을 받는 밴드이기도 하다.[6] 이때 세션맨은 유명한 래리 칼튼, 마일스 데이비드와 같이 일했던 빅터 펠드맨 등이 있다.[7] 실제로 이들은 당대 최고의 세션맨들을 초빙하여 앨범 작업을 한 관계로 앨범의 완성도가 엄청 높았으며 제작비용도 그 만큼 많이 들었던 관계로, 앨범 판매가격도 당시 다른 아티스트의 앨범보다 늘 1달러 높게 책정해서 발매하였다. 그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앨범을 들어보면 알 것이다" 라고 답을 하기도 했을 정도로 퀄리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8] 이 곡은 The Second Arrangement이라는 곡으로, 나중에 부틀렉으로 공개된 "The Lost Gaucho"에서 들어볼 수 있다.#[9] 솔로 첫 앨범인 The Nightfly는 초기 디지털 레코딩 앨범으로 유명하며 상당히 호평을 들었다.[10]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 2012년판 230위, 2020년판 168위.[11] 이 앨범의 타이틀은 한국인 이름 애자에서 따왔다고 한다. 도널드 페이건의 고등학교 동창의 남동생의 아내 분 이름이 애자였던 것. 앨범이 워낙 히트를 쳐서 저 시절 태어난 여성 중에 Aja라는 이름이 좀 있다.